주일오후설교

신명기56강-거역하는 속성 (신9;22-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9. 07:25

2015-11-08 15:02:29 조회 : 32         
   거역하는 속성 151108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거역하는 속성(신명기 9:22-24)

음성   동영상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iDvVm3yd67A, Hit:1

 이근호 15-11-08 15:58 
거역하는 속성

2015년 11월 8일                         본문 말씀: 신명기 9:22-24

(9:22) 너희가 다베라와 맛사와 기브롯 핫다아와에서도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느니라

(9:23)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얻으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나니

(9:24)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

성경에서 지명이 나오는 것이 단순히 우리가 사는 땅에 인간들끼리 생존하기 위한 땅으로 서는 이해해서는 본 뜻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 뜻은 ‘거역’이라는 속성을 의도적으로 들추어내는 작업이 작용합니다.거역을 유도하는 것은 ②저주를 발생시켜서 그 속에서 ③진정한 축복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입니다.

말씀이 현실적으로 장착하는 것은 인간이 법을 준수해서가 아닙니다. 인간들은 자기에게 생긴 결과가 자신의 애씀과 희생과 수고의 열매에 의해서 성사되기를 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함을 통한 것으로서 자기 영광화에 매진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남이 한 것에 대해서는 라이벌 의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법을 주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 영광을 획득할 기회로 여깁니다. 그렇게 해서 법에 입각해서 생겨난 축복된 결과를 자기 솜씨로 현실화 만들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다고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이런 심보를 가지고 평소에 살아가기에 자기 기대에 실망이 되는 사태가 벌어지면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있지 않다고 단정합니다.

출애굽기 17:6-7에 보면,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자기 백성과 다툽니다. 그것은 이미 이스라엘 내부에 여전히 애굽적인 속성이 작용하기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본인들이 그 사실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 지키기만 신경씁니다. 법의 준수를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 것으로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즉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자신의 신앙의 대단함을 확인해주는 축복된 일이라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발생시키는 일은 인간들의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는 사태를 의도적으로 유발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인간 스스로 자신의 본성이 근원적으로 나빠서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원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없는’ 지경으로 하나님께서 몰아넣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말씀의 현실화는 인간이 개재해서 법의 완수 차원에서 성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자기를 배제하면서 생긴 결과가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자기에 대한 모독으로 여깁니다.

바로 이러한 모독감을 사이에 두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찾아가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 진정한 출애굽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은 ‘인간의 법 준수’라는 협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축복과 저주의 일방적으로 적용으로 이루어집니다.

축복과 저주는 인간의 행함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방적 의지로 성사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저주는 인류의 역사가 다 끝난 다음 최종 확정지어지는 천국과 지옥의 상태가 그러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최종 종합은 실은 인류의 역사에 미리 잠겨져 있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분출’입니다. 즉 진정 출애굽 사건의 현재성이 적용되려면 외형적으로 애굽나라와의 결별로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본격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출애굽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내부 마음씨 자체가 외부화되어 실제적 현실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뿜어내는 애굽성을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조치가 불만스러워야 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애굽에서의 생활보다 재미없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생존이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백성들의 심보다 유감없이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됩니다. 민수기 11:4-6에 보면,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가치성 때문에 대게 자존심 상해하면서 크게 울게 됩니다. 이 울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진노로 대처하십니다. 모세도 또한 얼마나 심사가 틀렸는지 하나님에게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하나님께서 부탁합니다. 이스라엘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미리 알고 계십니다.

민수기 11:10에 보면,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함이라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하나님 결과의 종합이 인간들이 행동에 나서기 전부터 알고 계십니다. 

이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필히 저주받을 수 있게 되는 상황으로 이끄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는 일체 인간의 긍정적인 요소가 담겨서는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원대한 하나님의 뜻은 인간들이 자기 인생이 다 가도록 변치 않습니다. 그 뜻은 이사야 46:3-4에 잘 나와 있습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은 ‘율법 외의 한 의’를 성립시키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 현실화로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결국 성도는 자신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게 애굽적인 속성입니다’ 쉴새없이 뿜어내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공로만을 드러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당연히 저주받아 마땅함을 늘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1-08 19:58 
56강-신 9장 22-24절(거역하는 속성)15110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9장 22-24절입니다. 구약성경 277페이지입니다.

“너희가 다베라와 맛사와 기브롯 핫다아와 에서도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얻으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 하였나니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옴으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 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거역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한 번 하나님 앞에 거역하고 그 다음부터는 개과천선해서 인간이 바르게 되어 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거역이 없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공간이라 하는 것은 한 번 거역은 시작에 불과하고 계속해서 반복해서 거역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오늘 지명이 다베라, 맛사, 기브롯 핫다아, 가데스 바네아, 네 개의 지명이 나오는데, 성경 보다가 지명이 나오면 딱 읽기가 싫어요. 여긴 우리 동네가 아니거든요. 진주, 창원, 또는 서산, 강원도, 속초, 이래 나오면 이해가 되는데, 서울, 어디 부산 찍고 이런 게 아니고 이상한 용어들이 나오니까 ‘에이, 그냥 넘어가자.’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근데 원래 지명에는 어떤 지명이라고 보시면 정확해요. 지명 자체가 없고 거기에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볼펜 가지고 점을 콕콕 찍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콕 집어버리면, 그 무수한 점들이 모여 버리면 하나님의 예언하신대로 거역의 땅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성립이 돼요.

내가 지나온 인생을 점으로 찍는다면, “맞습니다. 내 인생 전체가 주 앞에 거역하는 죄인 된, 죄악 된 인생이었습니다.”가 이게 성사가 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지도를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굉장히 좋아하시거든요. 어떤 분들은 궁금해 해요. 뭐가 궁금하냐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신 것이 어떻게 현실에 그대로 반영이 되는 겁니까? 그게 신기합니다. 신기하죠. 우리는 말한다고 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근데 주께서는 말씀하신 것이 현실이 된다면 말씀과 현실 사이에 어떠한 메카니즘, 과정과 절차가 동원되었기에, 말씀하시는 족족이 현실이 족족 되는지, 그걸 단출하게 정리하기를 원하는데, 제가 정리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화 되는 그 과정에 딱 두 가지가 들어갑니다. 복과 저주가 들어갑니다. 복과 저주라 하는 것은 뭐가 아니냐 하면 명령이 아니에요. “나는 명령한다. 너는 순종하라.” 그럼 순종 안 하면 명령이 실시 못되거든요. 그럼 현실화가 안 되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해도 NO하고 우리 쪽에서 거부해버리면 이게 현실이 안 돼요. 근데 명령이 없이 다른 계통이 와요. 율법 외에 다른 길이 있다 이 말이죠. 율법 외에 한 의처럼. 법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밀어붙이는 것이 뭐냐 하면 복과 저주가 되는 겁니다.

복은 반드시 싫든 좋든 상관없이 복에서 복을 외쳐버리면 거기 있는 모든 것들이 복이 되고, 저주를 외쳐버리면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리 훌륭해도 저주물이 되어 버려요. 저주의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종합’이라고 해요. 참 멋있는 표현이에요. 종합한 것. 그리고 그 보다 더 멋있는 것은 종합은 미리 있었다는 겁니다. 이게 더 멋있는 거예요. ‘종합은 미리 있었다.’를 다른 말로 하면 ‘이미 전제로 깔려 있다.’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마지막 천국과 지옥은 요한계시록 저 뒤에, 저쪽에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처음부터 종합은 이 안에 잠재되어 있었던 겁니다. 근데 인간들은 자기 태어나면서 자기 역사, 자기 생각, 자기스토리를 꾸려나가기 때문에 항상 희망을 품게 되어 있어요. “앞으로는 잘 할 게요.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잘못은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두고 보세요. 제가 얼마나 개과천선해서 인간 되는지를. 조금만 지켜보시면 다음에는 공부 잘 할게요.” 이런 것처럼. “앞으로는 잘 할게요. 잘 할게요.” 계속해서 우리는 자기한테 희망을 거는데, 우리는 미리 왔던 종합을 몰라서 그래요.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가 있는 곳에는 축복과 저주로 이미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구분 짓게 되어 있습니다. 구분 짓는데, 이제부터 어려운 것이 뭐냐, “그러면 축복 할래요?” 하는데, 이 땅이 축복을 선택하거나 저주를 선택할 입장에 있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축복과 저주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먼저 있고 “축복할래? 저주할래?” 라고 묻는 것이 아니에요. 물으면 명령이 되거든요. 그러면 “축복되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하면 이거는 축복도 저주도 아니고 법에 관계돼요.

그런데 율법 외에 한 의를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했기 때문에, 축복과 저주의 그냥 일방적인 통보와 말씀에 의해서 결국 이루어지게 된 겁니다. “그러면 축복과 저주가 어디에 있습니까?” 할 때는, 또 이게 어려워요. 뭐냐 하면 축복과 저주가 올 때에는 반드시 법이 먼저 주어져요. 법이 먼저 주어져서 “내 말과 내 명령을 지키면 복 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 라고 법을 먼저 줘버립니다. 법을 먼저 줘버리면 우리는 저주를 받는 것에 기겁을 해가지고 무조건 축복 받는 쪽으로 나가려고 애를 쓰고 “명령대로 순종하겠나이다. 쉐마, 쉐마, 들으라 할 때에 참으로 듣겠나이다.” 이렇게 하는데, 귀가 문제여서 그런지 고장 났고 가짜인데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법을 먼저 줘서 그 다음에 아! 법을 받으니까 내가 축복과 저주를 골라잡을 그런 입장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항상 우리가 시작하는 것은, 주님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우리는 기분 나빠요. 내가 내 수고한 결과물을 내가 회수할 때 우리는 어떤 자기 영광을 얻을 수 있거든요. 전에도 어디에서 그런 강의 했습니다만, 사람들이 기분 나쁜 것 중에서 공짜로 준다는 것이 굉장히 기분 나빠요. 구원을 공짜로 준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기분 좋을 것 같지만 사실은 이게 인격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내가 어디가 못나서 공짜로 받아야 되는가?’ 얼마나 못났으면 공짜로 줘요? 나 그렇게 염치없는 인간 아니거든요. 나는 좋은 집안 자제입니다. 나는 그렇게 그런 식으로 공짜로 얻는 교육 안 받았습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수고하고 얻은 보람으로 얻고 싶습니다.” 라고 나서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그런데 주님께서는 값없는 생명수를 값없이 준다고 했거든요. 그 값없이 주려면 우리를 수갑을 채우든지 해서 꽁꽁 묶여 이제 할 말이 없어야 돼요. 할 말이 없을 때, 두 손 두 발 꽁꽁 묶여 가지고 뒤로 젖혀 있을 때 앞에 개밥그릇 나오면서 “핥아 먹으라!” 하고 하면 “감사합니다.” 하고 핥아 먹어요. 이게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의 고백입니다. “개라도 좋으니 주님 주시는 것 먹으면 황공무지로소이다.” 그게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이거든요. 자기가 개라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보면서 “저게 바로 계시다. 말씀 그대로이다. 저게 바로 법이 아니다.” 는 거예요. 그 여자가 자기 운명을 사납게 보든지 힘들게 보든지 어떻게 보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은 그걸 통째로 예수님을 증거 하는 멋진 계시로서 주님께서는 그걸 교육 자재로 활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지명이 나올 때에, 주께서는 다 의도해서 그 지명을 볼펜이나 바늘로 콕콕 집어서 지명을 새롭게 만든 겁니다. 그 지평 자체가, 그 평지 자체가 그렇게 되면 촘촘히 그 점들이 모여 약속이 되고, 그 약속은 법보다 그 전에 있었던 약속으로 드러납니다. 사람 팔자라고 하는 것은 주님한테 달려있지 인간 자기한테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인’ 또는 ‘주’ 라고 합니다. “내가 행하기 전부터 내 팔자는 예수님한테 달려있는 거 맞지요?” 이걸 쉬운 말로 “예수 믿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증거 하는 용도로 써주신다면 세상에! 이런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걸 다른 말로 “예수 믿는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그들을 어떤 용도로 썼는가, 거기에 지명들이 나오는데, 이 지명들의 특징이 뭐냐, 하나님 앞에 대들고 반항하고 거역하고 패역한 지명들입니다. 다베라, 맛사, 기브롯 핫다아, 가데스 바네아가 나오는데, 이 다베라 라고 하는 것은 민수기 11장 1절에 보면 볼펜심으로 콕 찍어놨어요. 민수기 11장에 보면 그들이 어떤 짓을 했어요. 근데 설교 다시 이야기한다면 이렇습니다. 한 번 거역했다고 정신 차릴 수 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정신 차리는 게 아니에요. 거역한 인간이 계속해서 거역을 하게 돼요.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라 하는 것은 잘못된 거죠.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은 횡재나 행운이 찾아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내 본색이 들추어지도록, 내가 있는 자리를, 주님께서는 법적으로 우리를 지적하시는 그 현상이 일어날 때 그게 기적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제야 내가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게 기적이에요. 이게 진정한 기적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한 평생은 왜 너는 구원될 수 없었던 사람이었나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이렇게 보여주었던 그 패역과 거역은, 이거는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서로 친하게 인사하세요. 옆 사람하고 인사하지 말고 민수기에 나오는 사람들과 인사하세요. “아이고. 아저씨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다베라에서 일어났던 거역의 일을 보게 되면, 11장 끝까지 계속 나오는데요. 기브롯 핫다와까지 계속 나오는데, 전체 내용을 쭉 읽어보게 되면 평소에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그 심정들이 여과없이 그대로 나옵니다. 얼마나 편하지.

여기에 모세도 합세해요. 민수기 11장 5절부터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는 값없이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걸 모아 놓은 것을 가락시장이죠. 도매상 가락시장 농산물. 6절, “이제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여기 정력 나오니까 종편 케이블 방송 생각나죠. 틀었다 하면 나오는 게 정력이야기, 건강이야기, 해독주스이야기 나오잖아요. “만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도다 하니” 이래 되어 있어요. 이게 뭐라는 겁니까? 애굽에 있을 때는 이런 처참한 삶은 아니었다는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떻게 좋아하는 것들을 다 주께서 거부하는 겁니까? 김치 안 먹는 애, 마늘 파 안 먹는 애 생일 잔치에 엄마가 김치하고 마늘하고 파만 잔뜩 해놓고 생일축하 한다고 노래 부르고 있어요. 보니까 못 먹는 것만 있어요. 저한테는 곱창, 개고기 이런 것은 놓지 마세요. 저는 못 먹거든요. 순대 못 먹습니다.

근데 여기 본문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여, 거역할만해서 거역했습니다.” 이겁니다. “하나님이여, 거역할만해서 거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는 말이 “그러니까 니가 애굽 사람인 게 들통 났잖아.”이래 된 거예요. “그러니까 니가 출애굽의 의미를 모르잖아.” 이런 거예요.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분명히 애굽에서 기적적으로 구원받았습니다.”주님께서 “그거는 외형적 기적이지 내면적 기적이 아니잖아.” 내면적 기적. 율법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할례 받을 때 외면적 할례는 출애굽 할 때 했어요.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하면 마음의 할례를 못 행해요. 행하도록 기적을 베풀어줍니다. 어떻게? 거역하게 만들어가지고. 거역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내 속에서 어떤 것들이 잘라져나가야 하는가를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걸 솟구쳐 오르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저는 안 가봤습니다만 미국에 옐로스톤이라는 곳이 있나 봅니다. 거기서 뜨거운 유황물이 막 나온다는 겁니다. 비디오 같은 거 보게 되면 분출하는 거예요. 늘 나오는 줄 알았더니만 그것도 때가 있다는 거예요. 안 나올 때 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유황냄새가 분출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기적이 분출한다는 것이, 우리 속에서 기적이 분출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내가 떠나야 할 애굽적인 사고방식이었습니다가 옐로스톤의 유황물처럼 이게 뜨겁게 나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 성도가 아닌 사람들이 분출한다는 것은 지 자랑만 냅다 분출하죠. “애가 성적이 또 올랐어요. 어떡하면 좋아요?” “우리애가 네 살인데 천재에요. 5개 국어를 합니다. 내가 어떻게 교육시킬지 골치 아파요.” 이게 자랑인지 고민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지 자랑거리만 분출하는 겁니다. 둘 다 애굽적인데 하나는 출애굽이라는 것을 그걸 전제로 하고, 전제라는 것을 또 잊어버렸죠. 미리 준 통합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준 통합이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어서 그 애굽적인 것과 천국적인 것을 같이 분출하는 요소로써 성도에게는 작용하고, 성도 아닌 사람은 그걸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복 받은 자랑질 한다고 세상 것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성주에 참외 농사하는 사람이 “요번에 참외 장사가 참 잘 되었어요.” “수박 잘 되었어요.” 파, 마늘, 부추, 생선, 그런 것들. 우리가 낯익은 것들. 이런 것들로 인하여 만들어진 우리의 몸. 그래서 그 몸은 어떤 친화성이 있는가, 바로 부추나 수박, 이런 것들이 땡기게 되어 있죠. 왜 친화적이니까. 그런데 우리 몸이 그런 데에 친해서 이만큼 유지했는데, 전혀 우리 몸과 관계없는 만나가 주어진다면, 이 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주의 출애굽에 방해하는 요소가 되는 겁니다. 그걸 껄끄럽다고 하는 거죠. 주님께서 질질 끌고 가는데 우리는 샌드페이퍼(사포)처럼 뭔가 찍찍 소리가 나요. 만약에 차가 터널 속에 받친다면 끽끽 소리 나듯이. 부딪혀서 소리 나듯이.

우리는 뭔가 이렇게 자연스럽지 못하고 끽끽 억지로 해가지고, 온 몸에 상처투성이 다 돼가지고, 그러면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철사 줄로 꽁꽁 묶인 채로 맨날 애굽 쪽으로 뒤돌아보면서 끽끽거리며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세상 애굽 친화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서 광야에 보냈습니다. 만나라 하는 것은 일체 우리가 아는 먹을거리를 선택하는 일이 아예 없는 거예요. 아예 어디에도 없게 만들어요. 내가 내 살아가는 식으로는 모든 것을 아예 없게 해서.

그래서 그렇게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10절에 보면 백성들이 울어요. 얼마나 심정이 애탔으면 웁니까? 남자들은 여자가 울면 그렇게 약해져요. 근데 주님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아요. 오히려 우는 것을 보고 진노가 심히 컸다고 했습니다. “울기는 어디서 찔찔 짜고 있어?” 하면서 쥐어 패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모세까지 가담을 해요. 모세까지 삐져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민수기 11장 15절에 보면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자기를 죽여 달라는 거예요. 도대체 이런 백성을, 끽끽거리는 백성을 데리고 천국까지 못 가겠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니가 하나? 니가 하는 거야?” 아니죠. 왜 백성 책임을 니가 지느냐 이 말이죠.

이 말은 우리 인생의 책임을 내가 지게 되면 이건 아직 애굽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백성들이 할 때에 18절에 보면, 하여튼 이 이야기 보게 되면 어쩌면 우리가 기대하는 기적하고 똑같은지,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 말이 참 재미있어요. 애굽에 있을 때 재미있었다 이 말이죠. 우리교회 재미있습니까? 여러분 교회는 재미로 다니는 거죠? 사람 사는 것이 재미잖아요. 재미있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애굽에 있을 때는 고기가 있어서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고기가 없어서 재미없다는 이야기거든요.

결국은 끽끽거리면서 자기의 본색을 유감없이 냅니다. 하나님께 재미 없이는 못살겠다는 겁니다. 재미 없이는 못살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재미를 주면 될 텐데, 우리가 원하는 기적이기 때문에 주지를 않아요. 그럼 뭘 하느냐 19절에 보면 주님의 심술이 나옵니다.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 일만 먹을 뿐 아니라” 20절,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개월간을 먹게 하시리니” 아나 먹어라! 하고 계속 줘요. 남편들이 아내들이 하는 식단 중에 제일 싫어하는 것이 같은 미역국을 한 달 동안 계속 주는 것. 그걸 세자로 물린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점잖다, 훌륭하다, 마음이 넓다, 부처같이 마음이 고상하다,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와 반응을 같이 하면서 우리를 심술 나게 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아나 쳐 먹어라! 이렇게 계속 주는 거예요. 요새 말이 거칠어져서 죄송합니다만, 할 수 없어요.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착함을 포기합니다. 착하지도 않지만. 계속 먹으라는 겁니다. 1개월 동안 계속 먹으라는 겁니다. 정말 짜증날 정도에요. 그래서 하는 말이 20절에,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고” 글쎄, 이 소리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하시는 겁니다. 이 소리가 나올 때 본심 나온 겁니다. ‘괜히 나왔어. 괜히.’ 괜히 나온 거예요.

자,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해답을 찾아봐야 하죠. 이사야 46장 3절부터 4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3절,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4절,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내가 미리 종합적으로 너에게 찾아가지 않는 자는 내 사람이 아니다는 겁니다. 내 사람이 아니다. 왜 우리가 이런 말씀에서 현실감이 떨어지는가,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는 것은 저주를 전제로 할 때만 축복이 주어지는데, 우리는 자신이 중립에 있다고 생각하고 저주는 멀리하고 복만 덜렁 욕심을 내기 때문에 기적 주옵소서! 기적 주옵소서! 내게 복이 되는 기적을 달라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복은, 진짜 복은 저주가 주어지고, 저주 안에서 비로소 피어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예수님도 똑같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었던 거예요. 우리가 안 죽고 생명 얻으려고 합니다. 그래놓고 우리는 마귀한테 속아 넘어간 것을 축복인줄 알았어요. 주님의 축복은 뭐냐, 저주를 경유해서, 저주가 결코 나를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 그 순간, 소급적으로 이미 모든 것이 축복의 계시었구나! 그러니까 저주스러워 보이는 그것이 전부다 축복의 양상이었고, 축복의 모양새이었습니다.

왜 그래야 됩니까? 우리가 외부에서 걸치는 것이 복이 아니고, 우리 내부가 바꾸어지는 것, 완전히 우리 내부가 정반대의 심정으로 바꾸어질 때, 그 기적이야말로 진정한 출애굽, 내부적인 출애굽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고기 달라고 해서 고기를 줬거든요. 민수기 11장 3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34절, “그곳 이름을 기르롯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탐욕의 무덤, 처음부터 그들은 탐욕의 무덤이었습니다.

탐욕의 무덤인 애굽 사람들은 그 자리에 있어서 저주받지만, 탐욕의 무덤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끄집어내어서, 니가 탐욕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이것이 바로 축복이 되는 겁니다. “니가 탐욕쟁이다. 니가 탐욕덩어리다.”는 것을 알려줄 때, 우리에게 그것이 축복이 되는 거예요. 그 탐욕과 어린양의 십자가의 피와 매치할 때, 비로소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서 주께서 특별히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시간 관계상 그 뒤에 맛사 라는 것은 짧게 하겠습니다. 맛사 이야기는 출애굽기 17장에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명한 것, 반석에서 물 내는 거거든요. 그때 이름을 맛사 라고 했는데, 맛사 라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것이고 므리바 라고 하는 것은 다투었다는 뜻이거든요. 근데 거기서 그 이름도 중요하지만 그들일 여호와를 시험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다.” 라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고생이 왔다고 하는 거예요.

마귀를 메시아로 보고 메시아를 마귀의 종으로, 귀신들렸다고 한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이 우리하고 그렇게 멀리 있는 게 아니에요. 거꾸로 생각해야 해요. 반대로 생각해야 해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일어난 거예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한 말씀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명령이 아니에요. 이제는 명령은 끝났어요. 이제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자체가 명령이 아니고 그게 복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은 명령이 아니에요. 싫다고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복은 반드시 복이 우리 속에 있게 되어 있어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그러면 저는 어떻게 됩니까? 그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분출해야 될 것,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갖다 버려야 될 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요소들이 외부로, 마치 물차가 물 뿌리는 것처럼 애굽적인 사고방식이 계속해서 바깥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때 수박, 부추, 외가 있을 때 참 좋았는데...애굽에 있었을 때 참 재미있었는데..’ 그럼 애굽에서 살지 왜 끄집어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복 준 자에게는 처음부터 안아서 자기 사람 만들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잘못 생각한 하나님을, 진짜 십자가 지신 하나님으로 바꾸기 위해서 한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인간과 하나님이 반대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반대가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반대는 예수님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이 반대였습니다. 근데 예수님한테 가게 되면 진짜 아버지가 거기 계세요. 이제 제자들이 세상을 초월한 이유를 알겠죠.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재물이라는 말이 아니고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주님 들어내심에 하자가 없는 그런 인생을 주께서 이끌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게 바로 축복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복 받은 것 맞습니까? 그렇다면 애굽적인 요소가 어떤 것인가를 날마다 끄집어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