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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57강-진리 없음(신9'25-29) 1511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17. 07:25

2015-11-15 14:52:45 조회 : 50         
   진리 없음 151115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진리 없음(신명기 9:25-29)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JHAaoDMv4HM, Hit:2

 이근호 15-11-15 15:40 
                 진리 없음

2015년 11월 15일                     본문 말씀: 신명기 9:25-29

(9:25)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9:26) 여호와께 간구하여 가로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9:27)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9:28)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9:29)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었노라

바쁜 현대인들은 바쁜 만큼 자립에 대한 집념으로 강력하게 다져져 있습니다. 즉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잘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자기 결정 외에는 별반 믿거나 의지하지 않고 싶어합니다. 아쉽고 절망적인 상황이 아닌 이상, 구태여 하나님에게 의지해서 신을 귀찮게 할  필요없어야 신사다운 처신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자세에서 특히 위험한 현상은, 이런 마음으로 ‘믿음’이라는 것을 끄집어내고 있다는 겁니다. 없는 믿음을 인위적으로 조작해내는 겁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그들의 마음 내부로부터 이루어진 작업입니다. 이들이 조작해내는 믿음은 인간과 인간들 끼리 동조가 되고 설득이 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생하는 것을 부자연스럽게 보시고 평온한 가운데 행복을 보장하시는 것이 진심이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방침도 준비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뵈올 때는 성심성의와 정성은 기본이요, 앞으로 착하게 살겠다는 다짐도 첨부되어야 합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래서 망한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되고 싶은 자아’와 ‘하나님께서 만들고자 하는 자아’와의 차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억지를 부렸지만 그들의 요구사항들은 실은 애굽에 있을 때 생활습관이 축적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무리와는 달리 다룰 인물을 따로 뽑아서 시내산 위에 호출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남을 그대로 산 밑의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보기에, 하나님의 지시는 그들을 구원코자함이 아니라 그들을 멸하고자하는 조치였습니다. 즉 인간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충족시킬 수 없는 자였던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멸하고자 하는 조치를 막을 수 있는 핑계를 모세는 인간 입장에서 끄집어낼 수는 없었습니다.

모세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인간 의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되지 않는 한 그들이 멸망당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태도와 생각은 그들의 내면에서 나옵니다.

이 내면은 각자 개성있는 내면이 아니라 공통성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그 공통성이란 바로, 그들의 눈에 보고 살아있던 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세상이 자기 목적입니다. 세상은 세상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곧 인간은 눈으로 보기에 세상은 자기충족적입니다. 그저 자기 것으로 스스로 즐겁고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 세상의 구성원이 곧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여서 판단내리고 진리라고 규정하는 것은 모두 세상에서 온 기준에 의해서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편에서 그들과 다른 것을 끄집어내어 놓고 기도합니다. 기도해야 될 본내용은 오직 ‘언약의 구체성’ 뿐이었던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요 앞으로의 계획이라는 점을 잘 압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그 상황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이 전부 하나 낭비없이 다 언약을 삽입시키는 현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즉 그들의 내면을 언약지도를 다시 작성시키는 작업으로 이해합니다. 이 작업을 위해 모세는 40일 밤낮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모세 홀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시대의 중보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중보자 역할은 일단 세상의 유혹에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즉 세상에서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진리없음’을 도저히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정보를 외부에서 모집해서 그것으로 최종 진리를 끄집어내는 작업은 본인의 이성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따라서 편집하고 수정하고 첨가해서 자기 마음에 쏙 드는 내용이 될 때,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자아성을 수립했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모세의 40일 기도는 그들에게 영문도 모를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나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이 소리를 듣는 사람의 품격을 극단적으로 모독하는 발언일 뿐입니다.

즉 얼마나 못났으면 스스로의 회개가 반성으로도 사람 취급 못받을까 라는 논리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실상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은 모세의 40일 기도 앞에서 그 가치성을 잃습니다. 오늘 본문에 25절을 보게 되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은 이미 멸망의 대상체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유지하기 위해 동원된 가치 체계가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들먹이는 것은 다른 가치 체계를 삽입시키기 위함입니다. 시골 장터 난전에서 펼쳐지는 야바위 노름에서, 노름꾼은 있지 않는 구슬이 마치 컵 속에 들어있는 양 분위를 뛰웁니다.

세 개의 컵을 테이블 위해 놓고, 그 컵 중에 어느 한 컵에 구슬이 있음을 청중들에게 확인시키고서는 황급히 바쁘게 컵을 돌립니다, 그 와중에 구슬은 야바우꾼의 손길에 의해서 그 컵이 노는 테이블 선상에서는 없고 바닥 안으로 떨어뜨려집니다. 그러나 청중들은 저 세 개의 컵 중 어느 하나는 필히 구슬이 있다고 장담합니다. 이게 바로 사기꾼에 걸려된 시발적 생각입니다.

즉 인간들은 이 인간 세계 어디에는 진리는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모세의 기도에 의하면 모두 ‘멸망 당해야 될’ 대상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모세 본인이 하나님을 통해서만  새로운 주입됩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세상은 중보자에게 항상 부정적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기도를 하시게 됩니다.

그 때, 숨겨서 살아온 이 세상이 주인이 예수님에게 등장하면서 평소에 인간들이 어떤 기준에 의해서 세상을 판단해 왔느냐를 나타냅니다. 세상은 돈없이 못살고, 돈 있더라도 인기없이는 못살고, 그것으로 모든 삶의 목적은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부귀영화를 몽땅 다 차지할 때까지 인간의 최종 기준은 멈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진리는 야바우꾼의 테이블과 컵으로 구성되는 테이블의 상황같이 이 세상에 애초부터 없습니다. 문제는 마치 인간들이 교회에 진리가 있다고 믿기에 이미 악마의 유혹에 걸려든 겁니다. 악마는 교회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있는 그 모임이라도 인간들은 악마에 의해 제시된 기준을 진리기준으로 확정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안에 그려진 언약은 바로 이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 분의 삶의 기준입니다. 그 기준에 등떠밀리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어진 십자가 언약 앞에서 본인이 가짜임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1-16 07:27 
57강-신 9장 25-29절(진리 없음)1511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9장 25-29절입니다. 구약성경 277페이지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여호와께 간구하여 가로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었노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 대신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 산 밑에 사는 우리들 입장에서 꼭 이런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옵니다. “니가 뭔데 중간에 나서냐?” 그런 뜻이죠. “우리 구원은 우리가 할 건데, 모세 니가 뭔데 중간에 나서서 그들은 잘못했으니까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대신 하느냐?” 이 말이죠. 누가 내 대신 내가 해야 할 반성과 회개를 대신 해버리면 굉장히 기분 나빠요. “나도 할 수 있거든” 이래 되거든요. “나도 할 수 있는데 결국 니가 한다는 말은 니는 백날 회개하고 반성하고 믿고 해도 안 돼.” 라는 것을 단적으로 나한테 통보하는 그것이 인간적으로, 인격적으로 굉장히 모독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반성하고 내가 착한 일해서 이제는 하나님 말씀 잘 듣겠다고 하면 중보자가 나서서 나에게 하는 말이 “니는 하나님을 몰라” 라는 뜻이거든요. “니는 하나님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니 내부에서 일방적으로 가상적으로 끄집어낸 하나님을 상대로 너의 잘남, 반성하고 회개하는 그 잘남을 자랑질 하지 마라. 니는 사태 돌아가는 것을 도통 몰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듣는 사람들은 “그래 니나 알아라. 나는 그럼 몰라도 된다니까 나는 알고 싶지도 않아. 나는 알아서 해.” 하고 우리는 이 성경책을 덮어버리죠.

우리가 성경책을 덮고 안 보는 이유가 혼자서도 잘하는데 왜 이 두꺼운 책을 왜 펼쳐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펼치면 하나님의 중보자, 종과 대화 나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는 있어요. 알고는 있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이렇습니다. 그 하나님과 종 사이에 하는 이야기가 이게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에게 대적한 이스라엘을 위해서 대신 기도하는데 한 번 따져보세요. 그렇게 나서서 저들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전지전능하시다면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사전에 방비하는 것이 그야말로 하나님답지 않습니까?

교회를 한 삼십년 이십년 다니면서 우리의 툭툭 불거져서 나오는 생각이 하나님께서 “니 죄를 알렷다!” 하는데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해주시려고 하는 그 취지는 아는데요, 그것도 한두 번 들으면 기분 나쁘다니까요. 죄 짓는 환경을 아예 안 주시면 되잖아요. 안 주시면. 뭘 해도 만사형통하고, 여유자금이 넘치고, 아쉬운 것이 없이 살면 뭐 때문에 죄를 짓겠습니까? 베풀라 하지 말고 베풀 돈을 먼저 주고, 한 이백억 주고 삼억 베풀라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베풀라고 하니까. 상황을 이렇게 죄 짓게 되는 상황으로 몰아세워놓고 뒤늦게 니 죄졌다고 하면 사실은 건성으로 회개할 수는 있지만 속에서 기분 나쁜 것은 어떻게 처리가 안 돼요.

회초리로 때리는 선생님 앞에서 맞는 것이 싫어서 잘못했다고 하지만 진심은 아닙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진심도 아닌 회개를 우리 인간에게 그토록 원한단 말입니까? 이런 투정이 나올 수밖에 없죠. 그러면 그 결과는 뭐냐, 또다시 성경을 덮어버립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핑계대고 성경을 안 보고 저 핑계대고 성경을 안 보는 거예요. 근데 성경을 봐야 할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만드는 나와 내가 만드는 내가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딴 게 아니에요. 잘하면 되지요? 그건 니가 만든 너의 미래상이에요. 그럼 우리가 만든 미래는 왜 안 받아주는가? 그거는 우리의 내면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면에 뭐가 문제가 있는가,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내가 신이 되어 있어요. 내 나름대로의 신이에요.

근데 그걸 하나님께서 뭘로 바꾸느냐, 우리의 내면을 언약적 구조로 새롭게 개편해버려요.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에게 집어넣는 겁니다. 우리는 그딴 것 필요 없습니다. 나는 납니다. 끝나는 거예요.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는 나로서 족합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상은 세상의 자기만족’이라는 말이 있어요. 세상에 있어서의 세상은 그 자체가 자기충족이고 만족입니다. 세상 밖에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있는 것들을 달라는 거죠. 그럼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만드시는 내가 따로 있기 때문에 내가 만든 나를 어떻게든 이것을 치워버려야 되고 없애버려야 돼요.

그 없애는 방식과 방향까지, 그 뭐 어떤 전기공사 할 때에 그냥 빈손으로 오지 않지 않습니까? 드라이버나 펜치 들고 오죠. 주께서 우리를 작업하기 위해서 들고 오는 펜치가 뭐냐, 여기 27절에 나옵니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그러니까 지금의 그들의 내면을 아브라함으로 교체하고 이삭으로 교체하고 야곱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해주시옵소서.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 자기충족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의 목적이거든요. 목적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목적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에임aim과 골goal이 있어요. goal은 목표라고 합니다. 그리고 aim은 무한한 목표,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목적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두 가지가 인간에게 다 있는데, 왜 그 목적을 둘로 만들었느냐, 왜 둘로 이렇게 강조를 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의 목표는 임시적이고 인간의 속에서 터져 나오는 무한한 목적은 본인이 말릴 수가 없어요.
주여, 어디까지, 도대체 어디까지 해야 목표가 다냐 이 말이죠. 나 저 여자하고만 결혼하면 행복하겠습니다. 결혼하게 되면 행복이 끝이에요? 이제는 이루어진 결혼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둘 다 애를 씁니까? 정말 애를 써요. 마치 오리나 백조가 물에 뜨기 위해서 발길질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남자는 남자대로. 양보했는데, 양보했는데, 만날 아내를 만나면 그 생각에 나름대로 양보했는데, 좋게 했는데, 함부로 한다고 이야기하고 니는 니밖에 모른다 하고. 이상하다? 좋게 했는데, 물 밑에서 열심히 헤엄치고 있는데도 니는 니 일방적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몸이 바사지도록, 몸이 진짜 다 부수어지도록 일을 했는데, 그건 여자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이라고 이렇게 툭 튕기듯이 이야기해버리면 도대체 이 몸을 가지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렇게 애써도. 밥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여자는 밥하는 것이 전공이니까 그거라도 해야지 하면서 퉁명스럽게 한마디 해버리면, 시장가서 반찬 따져서 사는데도. 이렇게 둘 다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에임입니다. 나는 반찬 잘한다. 나는 돈 벌어 온다. 그걸로 끝났습니까? 돈 잘 벌어오는 남편에게 아내가 요구하는 것은 “니가 이제는 남편다워야지.” “돈 벌어 줬잖아?” “아니야 남편다워야 해!” “남편다운 것이 뭔데?” “그거는 니가 알아서 해!” 이거는 끝도 없어요. 도대체 어디까지.....,

에임aim이 밀어붙이는 골은 어디서 멈추는지, 멈출 수가 없어요. 인간의 내면, 그거는 바로 인간의 목적이 세상에서 와서 자기 충족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25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성경을 조금이라도 본 사람은 이 사십 주야가 바로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감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감 잡지만 이것까지 감을 잡아야 해요. 뭐냐 하면 너희를 멸하겠다는 것을 덮고, 그러니까 이 세상은 멸망의 대상, 지옥입니다.

그걸, 세상을 염두에 두고 주께서 사십일 금식기도를 하게 되면 예수님 앞에서 그동안 세상을 쥐고 있는 악마가 시험하러 나옵니다. 테스트하러 나오죠.

제가 오전에 그런 이야기했죠. 왜 교회가 교회다우냐, 시간밖에 있는 힘이 시간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게 이 세상에서 소동이 일어난 거예요. 왜 우리가 구원받아야 됩니까? 그것은 내 뜻이 아니고 세상밖에 있는 분의 소원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아야 돼요. 내가 예수를 왜 믿어야 합니까? 그거는 예수님의 소원이 그렇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거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내가 나중에 죽어서 천국가려고 예수 믿지 마세요. 그거는 나중에 한 십년 다니면 힘 빠져서 지가 자포자기하고 나가떨어집니다. ‘더는 못한다! 더는 못한다!’ 나가떨어집니다.

그러면 주님이 어떻게 합니까? 붙드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나가떨어질 거면 애초부터 신자아니었다. 나가주세요. 잘됐다. 내보내버려요. 예수님께서 사십일 동안 기도한 거나 모세가 기도한 거나 같은 맥락인데 하나를 빠트리면 안 돼요. 이 세상은 멸망하기로 작정된 거예요. 이 예수님한테는 구체적으로 거기에 대한 원인이 바로 마귀라는 것이 등장했다는 게 원인이 돼요. 그러면 여기서 좀 더 여러분들이 머리를 한 번 써보세요. 이 세상은 이 땅에서 멸망당하기로 작정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인간들이 평소에 살아갈 때 나는 잘살았다, 못살았다, 내 미래는 이렇게 개척된다, 이렇게 미래가 열릴 수 있다고 측정했던 그 기준, 그 기준들은 진리일까요? 아닐까요? 진리가 아닙니다. 이게 문제에요. 진리가 아예 없는데, 없는 진리를 감추기 위해서 대타 진리를, 유사진리를 꾸역꾸역 만들어내는 그 세력이 악마에요. 그 악마가 예수님이 광야에 있을 때 만나러 나온 겁니다. 시험하러 나왔는데, 그 꾸역꾸역 만들어낸 마귀의 진리가 인간들에게 보편적 동의가 설득이 되는 진리에요.

그게 뭐냐, 사람들은 돈 없으면 못산다. 두 번째는 사람들은 돈이 없더라도 인기 있으면 사는 재미가 있다. 그렇더라도 그 에임aim, 골goal, 목표가 끝나지 않는다. 뭐냐, 세상 모든 것을 얻을 때까지 인간은 멈추지 않는다. 폭주하는 기관차 같아요. 멈추지 않습니다. 누가 공직에 장관 됐다, 누가 경찰청장 되었다 하면 저거 또 언제 국회의원 나오노? 멈추지 않잖아요. 경찰청장 한 사람이 내년 대선 나온다고, 사대부고 나왔어요. 벌써 설치고 있어요. 도대체 멈추지를 못해요. 자칫 멈췄다간 관악산에 가서 목매 자살합니다. 결국 경찰청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자살하고 말아요. 브레이크가 없어요.

왜냐하면 에임aim, 목적 없이는 인간이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너무 설교가 난해하다 싶어서 이거는 하나의 여담이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나 안 살아봤습니다만 옛날 한국 역사를 보게 되면 명퇴(명예퇴직)하고서 살 거를 걱정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평소에 살 때부터 자연스럽게 살았어요. 근데 현재 한국 사람들은 젊을 때부터 빨리빨리를 많이 했기 때문에 명퇴하고 난 뒤에 뭘 해야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것도 빨리빨리. 몸에 이게 습관화되어 있거든요. 명퇴하고 난 뒤에 놀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리고 평소에 노는 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사회로부터 사육을 그렇게 당했어요. 빨리! 빨리!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은퇴하고 난 뒤에 등산하고 싶어서 한 달 째 등산해서 몸 다 망가졌답니다. 등산도 빨리빨리. 온 한국의 명산을 다 돌아다니고 있어요. 빨리빨리. 몸 망가졌습니다. 망가져서 치킨 집 2억 융자내서 하다 망했답니다. 한 달 다니고 더 재미없어서 안하고. 그것이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독촉을 바라는 겁니다. 자꾸자꾸 촉구를 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모세 입장에서 사십일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이래 되어 있거든요.

그럼 이 말은, 쉽게 가겠습니다. 이 땅에는 결국 뭐가 없다는 말입니까, 진리가 없어요. 진리가 없으면 나의 행동에서 내가 측정하지 마세요. 그거 마귀 시험든 겁니다. ‘아, 이번 일은 잘했어. 아, 이번 일은 못했어.’ ‘사업하다 망했으니까 이거는 잘못한 거야. 성공했으니까 참 잘했다.’ 이렇게 측정하지 마세요. 측정할 기준은 애초부터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내 행동을 측정하지 마세요. 그럼 측정 안 하고 어떻게 사느냐, 능히 뒤에서 누가 밉니다. 누가 밀어줘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서 밀어줘요. 그게 언약이에요. 매일같이 니 속에 내면의 언약적 지도를 새로 작성하라고 밀어주는 겁니다. 

어떤 젊은 분이 할머니들 상대로 아주 장난질을 치는데, 옛날 야바구(야바위)라고, 컵 세 개를 이리저리 바꾸다가 구슬이 들어있는 컵에 돈을 다는 것인데, 열어보면 분명히 거기에 구슬이 들어 있었는데 없어요. 처음부터 거기에는 구슬이 없어요. 막 하다가 구슬은 빼돌렸어요. 야바구를 할 때 구슬이 어느 쪽에 있는가를 묻지만 사실은 어느 쪽에 없느냐를 묻는 거거든요. 야바구를 하는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어느 한 쪽에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 걸려든 거예요.

제가 오전 설교에서 기독교 사기, 거기에 걸려들지 말라고 했죠.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속에는 없습니다. 기도해도 안 되고, 금식해도 안 되고, 예수 십자가 믿어도 안 되고, 아무리 해도 안 돼요. 왜? 원래 우리 내면은 그 목적이 내가 절대적으로 신이 되는 쪽이 절대적 기준이기 때문에,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 것이 절대적 기준이기 때문에, 어떤 예수를 믿든지 어떤 십자가를 믿어도 그거는 니 생각이고, 나에게서 일방적으로 나온 일방적인 이미지에 불과한 거예요. ‘교회 자체가 사기집단’이에요. 이 말하려고 목회 몇 십 년 한지 모르겠지만.

교회가 야바구(야바위)하는 거예요. 구슬은 없어요. 구슬은 없는 거예요. 없으니까 같은 인간들이 모여서 장로 만들고 집사 만들고 목사 세워서 진리 있는 척, 또 외부인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아무것도 없는데, 구원은 또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중보자 있잖아요. 이스라엘이 자기들은 사기꾼이 아니라고 여겼어요. 그러나 구약 전체가, 이스라엘 자체가 사기꾼이었습니다. 그 사기꾼을 대신하사, 그 사기꾼한테 당하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하시기 전에 먼저 마귀를 만난 겁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 사두개인, 인간 배후를 조종하는 마귀를 먼저 만났어요. 그러니까 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은 사기꾼한테 농락당했습니다. 사기에 또 사기를 당하고 지가 또 사기를 치고 하는 겁니다.

사람 하나 전도하기 위해서 세상 끝까지 가서 얻으면 배나 더 지옥 백성 만든다고 성경에 돼있죠. 본인도 천국 문을 가로막고, 본인도 못가고 가고자 하는 자들도 가로막는, 아주 과격한 발언을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원래 진리가 없어요. 진리가 없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그게 성경에 나온 것이 열 두 해 혈유병에 걸린 여자는 “제가 마땅한 개입니다.” 하고 또는 소경된 자는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그저 “나는 이렇게 당해도 쌉니다.” 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측정할 것은 내가 따로 내 속에서, 그걸 메꿀 수 있는, 내가 원하는 인생이 실패로 끝났을 때, 내 쪽에서 만든 것으로 그걸 보상하려고 하는 의도는 저에게는 없습니다. 저는 손들었습니다. 저는 저의 인생을 보존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나서서 수리하지 않겠습니다.

저, 개요. 세리요. 강도요. 창녀요. 그리고 문둥병자라도 마땅하고. 소경돼도 마땅하고. 절름발이 되어도 마땅하고. 심지어 죽어도 마땅합니다. 그런 자들이 군데군데 나오죠.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뽑아 세운 이유가, “제자들아 쟤들 좀 봐라. 니들 자랑질 하지 말고 바로 너희들이 다니면서 내가 일방적으로 고쳐준, 자비를 베풀어준 그들 좀 봐라. 언제 니들이 저들을 본 받을꼬. 마지막 때 성령이 오게 되면 너희가 저런 사람들처럼 내가 되게 할 것이다. 내가 되게 한다.”

그게 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아무것도 없는데 우리 내면이 진리 판이 되도록, 반도체 심어놓으면 반도체 판이 되잖아요. 전자기계 안에 뜯어보면 나오죠. 그처럼 전자회로 판처럼 언약의 회로판 되도록 주께서 우리를 집어넣습니다. 그걸 집어넣으면서 내가 생각한 내 인생을 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는 조치를 해주시는 그 작업이, 지금 새로운 판 들어가고 옛날 판 끄집어내는 판 교체 작업을 하실 때 그 공구가 언약입니다.

설교 마치겠습니다. 성경을 볼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을 볼 필요도 없고,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잘 하는데 왜 봅니까? 그러나 이렇게 펼쳐서 보게 한 것까지 이미 주께서 다루신 드라이버가 망치고 펜치가 작용한 거예요. 성경 본다는 자체가. ‘아, 문제 있네. 문제 있어l. 세상 모든 것을 얻지 못해서 환장한 내가 문제가 있네. 이런 식으로는 천국에 합세 못하네. 천국 못가는 것 맞네.’ ‘못가는 것 맞네!’ 라고 하시면서 알려주신다는 그것이 이미 우리 속에 언약이라는 새로운 기준과 진리가 우리 속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은 할 수 없으되 주님은 하신다고 주님 말씀하실 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인간 되게 무시한 것 같고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일방적으로 다한 것 같은데, 이것마저 주님의 과제고 주님의 결실인 것을, 열매인 것을, 뒤늦게 알고 고맙게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