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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58강-언약상자(신10;1-5) 15112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25. 07:23

2015-11-22 15:17:09 조회 : 72         
   언약 상자 151122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언약상자(신명기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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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11-22 15:36 
언약 상자

2015년 11월 22일                      본문 말씀: 신명기 10:1-5

(10: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10:2)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10:3) 내가 싯딤나무로 궤를 만들고 처음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10:4)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10: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모세는 지금 도로 산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있어 참으로 산 위, 곧 하나님 계신 곳이 원래 자기 자리인지 아니면, 패역한 백성들이 있는 산 밑이 원래 자기 자리인지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물론 모세는 지상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만 그의 사명을 받는 경우를 중심시점에서 볼 때, 그는 지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한 자입니다.

즉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모세의 이런 존재성 변화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본질을 미리 보여주는 게 됩니다. 장차 하늘에 속한 자가 이 지상에 내려오셔서 구원을 이루신다는 내용을 모세가 그 당시 사람들을 상대로 알려주게 됩니다. 그런데 모세가 도로 산 위로 올라가는 것은, 그 전에 산 위에서 내려와는 과정이 담긴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취지가 들어있습니다.

뭔가 일을 잘 성사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도중에 구원 일이 파토 났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깨어짐’입니다. 언약이 깨어지면 구원이 성사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여망을 애써 물리쳐야 하는 점에서 모세의 입장에서 예수님 입장에서나 오늘날 성도의 입장에서 힘겹습니다.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라고 반복적으로 외쳐야 될 이유가 생겨버린 것입니다. 즉 “구원을 받고자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야!”라는 점을 분명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구원이란 구원을 원하는 자에 의해서 진행되거나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주고자 하는 쪽에서 성사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사됨에 인간쪽에서 관여하는 대목은 바로 ‘엉터리 구원방식’입니다. 즉 ‘나는 구원받을 자격있다’가 엉터리 구원방식을 낳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런 엉터리 구원방식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꼭 필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이 기이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도로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설명하면서, 전의 돌판이 깨어졌음을 상기시킵니다. 돌판이 깨어진 이유를 모세는 백성들의 구원 집념에서 묻고 있습니다.

언약에서 복과 저주가 나온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곧 백성들의 축복 염념이 언약을 훼손시킨다고 보면 됩니다. 일을 인간들에 의해서 망쳤지만 그것을 똑바로 가동케 하시는 몫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깨어졌다는 사실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백성들이 깨뜨림’을 영원한 언약의 요소로 집어넣습니다.

돌판이 깨어졌으면 우리 인간 같으면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성사시킬텐데 그렇게 하시지 않고, 그 언약 깨뜨림을 언약의 완성요인으로 삽입시키십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온전함 앞에 그 어떤 인간도 감히 입을 열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시편 118:22-23에 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패를 하나님이 주워서 하나님의 언약을 신축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이 언약 완성에 있어 인간의 역할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미워하는 일입니다.

이러면 이럴수록 인간쪽에서 구원을 요구할 이유는 점점 없어집니다. 동시에 왜 인간들이 수상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의 구원과 천국행을 원하고 있는지 그 내막이 열리게 됩니다. 요한복음 8:44-45에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보면, 악마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라는 겁니다. 문제는 인간들은 바로 악마가 내뱉는 거짓말에 묻혀서 물과 정신이 갖추어져 왔다는 점입니다. 즉 인간들은 거짓말 외에는 다른 말은 듣고 싶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담겨 빠져 있기에 거짓말이 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은 늘 하나님이 제시한 것을 ‘버려야 될 패’로 여긴다는 겁니다. 즉 언약의 파괴하는 힘이 이미 인간 안에서 작동하면서 인간은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사실이 빠져 있으면 마땅히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어떤 아주머니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슈퍼마케트에서 일합니다.

가족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합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예레미야 10:25에 보면,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나이다”라고 되어 있고, 예레미야 11:3에서는 “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히브리서 9:27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고 되어 있습니다. 즉 언약을 모르면서 생업에 몰두하는 이 아주머니는 슈퍼마케트 일하면서 서서히 저주가 기다리는 지옥으로 미끌어져 내려가고 있는 겁니다. 이 아주머니의 생각은 아주 단순합니다. “나는 살아남아야겠다.” 이게 전부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 곧 언약의 안목 앞에서 거짓된 악마의 생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판의 글을 산 위에서 친히 쓰십니다. 이는 깨진 돌판을 대신하는 겁니다. 이점은 돌판을 안치하게 되는 언약상자와 합치될 때 드러납니다. 즉 돌판에 직접 제물의 피가 묻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 상자에 제물의 피가 묻히면서 언약이 완성됩니다. 하나님께서 돌판에다 언약상자를 결합시켜서 성사하시려는 취지는 바로, ‘나와 만나는 장소’를 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출애굽기 30:6에 보면,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속죄소’에서 만나시겠답니다. 속죄소란 죄가 최종적으로 확정되는 장소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돌판을 깨트리게 했던 요인이 됨을 결코 묵과하지 않고 언약구성의 요소로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즉 인간을 영원한 죄인으로 다루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래의 언약을 완성하시겠다는 겁니다.

성도의 삶은 매일같이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주님, 이것까지 욕심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언약과 상관없이 잘되기 위해 설치는 현장에 여김없이 예수님이 피해자의 입장에서 나타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1-22 20:27 
58강-신 10장 1-5절(언약 상자)1511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10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277페이지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내가 싯딤나무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모세가 십계명을 가지고 온 것은 산 위에서 아래쪽으로, 방향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방향이었습니다. 처음에 돌판을 만들었을 때는.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거는 위에서 아래가 아니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거기에 있는 돌판을 만들었어요. 위에서 내려오던 그 모세가 다시 산 밑에서 올라간다는 것은 그 오르는 과정 속에서 이 돌판은 애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진 돌판 이라는 겁니다. 내가 만들어서 너희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에게 만들은 돌판에 새겨진 이 말씀이 지금 너희 눈앞에 나타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예요.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너희들은 구원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 확인되었다는 겁니다. 구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이 파기될 수밖에 없는 대상,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아닌데, 너희들은 그냥 가만히 있고 너희들 가운데 있는 모세가 아래에서, 너희들 속에서 다시 위로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그 올라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너희들을 구원할 수 있는 근거가 새롭게 마련되는 겁니다.

그럼 조건이 있어요. 구원될 수 없었는데, 우리들 가운데 있는 어떤 분이 옛날 하나님이 내려오는 그 방법대로 했더니만 다시 구원이 연결되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만약에 진짜 구원받은 사람 같으면 처음에 그 돌판을 품에 가지면 안 돼요. 나로 인하여 깨진 돌판을 품에 안아야죠. 나로 인하여 깨진 돌판. 그러면 그 십자가는 나로 인하여 죽어야 될 어떤 분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 대신 돌아가신 분의 효과 때문에, 그 분 덕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이 말은 구원받을 수 없음을 항상 전제로 깔아야 된다는 이 말입니다. 구원파 욕 할 것 없어요. 한국 교회 전체가, 이천년 기독교 역사가 전부 다 구원파가 되고 말았습니다. 출발이 뭐냐 하면 “당신은 구원받고 싶나?” “내가 구원시켜 줄게.” 이것부터 하잖아요.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기대하는 구원은 더 이상 나한테 필요 없다. 이렇게 나와야죠. 다시 말해서 “나는 구원 안 받을래.” 이렇게 나오는 것이 정답입니다. “십 원도 싫어. 나는 구원 안 받을래.” 이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나 같은 것은 구원받을 필요 없어. 왜? 주님의 뜻이 나 같은 인간의 구원은 필요 없어요. 다만 모세와 연관되어 있느냐, 이 시대로 말하면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느냐, 그것이 더 중요하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들락날락하시는 그 안에는 구원될 수 없는 우리가 구원되게 하시는 요소가 그 안에 담겨있는 겁니다. 따라서 아까 했지만,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뭐 난로 온도가 32도까지 올라가니까 여기서 자고 저기서 주무시고 해서 제가 오후에도 또 해야 하는가 하는데, 낮에 했던 중요한 포인트를 다시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성만찬, 뭐 새 언약 이야기할 때 가장 기본이 뭐냐 하면,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인간일 수가 없어.’ ‘나는 괴물이야.’ 그리고 또 하나는 ‘따라서 나는 더 이상 살 필요도 없어.’ ‘주께서 죽이시는데 죽어야지. 왜 내가 살아야 돼?’ 이걸 기본으로 해야 언약이 이해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주께서 먼저 떡을 가지시고 자기 떡을 나눠주는 것이죠. 그럼 우리는 지점이 되고 예수님이 본점이 되시는 것이죠.

근데 우리는 내가 본점이 되어 가지고 “나를 구원해봐라! 예수!” 이렇게 되면 이거는 주님한테 떡밥 던지는 것밖에 안 된다 했죠. 주님한테 나를 꼬시라고 하는 이런 식밖에 안 된다 이 말이죠. 주께서 주실 때 우리를 건지시는 겁니다. 문제는 그 주시는데, 주실 때 어떤 형식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고 시간의 개입으로, 시간을 장악해서 주시는 겁니다. 이거는 몇 시간 해야 될 설명인데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언약은 시간을 묶어버려요. CF에 보면 이런 것이 있죠. “잇몸을 꽉 잡아주는 느낌!”(인사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이가 튼튼”(이가탄) 잇몸을 꽉 잡아주는 느낌이에요. 언약은 우리가 아무리 살아도 시간을 이미 시간이 발목 잡혀 꽉 잡아주는 느낌 같은 겁니다. 그러한 예가 어떤 예가 있는가 하면 어떤 유적지 지도를 펴놓고, 유적지를 보면 제일 먼저 사당이나 본부가 있잖아요. 해인사 대웅전 같은 것.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그림을 그리면 주변에 있는 건물들은 거기에 가을이 되어 낙엽이 지고 겨울이 되어 눈이 오더라도 그것들은 하나의 시간이 고정된, 묶여진 거예요.

눈이 와도 맨 그것은 부속건물이고, 아지랑이 피고 꽃이 피는 봄이 돼도 부속건물이에요.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과 관계없이 부속건물이에요. 이게 시간은 흘러도 시간은 묶여져있는 거예요. 언약 안에서. ‘내가 커서 무엇이 되리라.’ 뭐 돼봐야 처음부터 묶여져 있어요. 얼마 전에 우리 집 이층에 사는 슈퍼하시는 아줌마가 계셨는데 아침 일곱 시에 출근하고 그랬는데, 슈퍼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불로동 시장 안에 있어요. 슈퍼 이름은 모르겠습니다만, 기억이 안 납니다. 하여튼 불로시장에서 지금도 슈퍼하고 계신데, 집은 여기 지묘동이고. 일곱 시면 나가고 저녁 열한시가 되어서 저벅저벅 계단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요.

슈퍼 하는 그 분이 홀로 아들하고 같이 사는데, 그러면 슈퍼 하는 그 분이 뭐가 그렇게 잘못되었습니까? 인생 살아가는 게...새벽에 나가서 물건해오고 밤늦게 퇴근해서 자고 아침에 또 차타고 나가서 불로동 시장에서 장사하고..도대체 그 아즈매(아지매, 아줌마의 경상도 사투리)가 지은 죄가 뭐죠? 너무나 평범하잖아요. 성경을 안 보고 언약을 모르면 그 아즈매 죄가 안 나타나요. 근데 그 아주머니 죄를 제가 꼭 밝히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 보니까 그게 나와요. 성경 본 제가 나빠요.

성경 보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에게 분노를 퍼 부으소서” 라고 되어 있고. 예레미야 11장 3절에 보면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되어 있어요. 슈퍼 하는 아줌마가 언약을 몰라요. 왜? 새벽에 나가서 밤 열한 시에 퇴근한다고. 물론 그 아줌마는 나중에 몇 십 년 지나면 죽을 거예요. 김 영삼이 처럼 죽을 거예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이 말씀을 들어본 적도 없을 거예요. 그 아주머니의 잘못은 뭐냐면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이거는 뭐 생각이 아니라 본능 그 자체에요. ‘나는 살아야 되겠다. 그리고 나는 무조건 살아야 돼!’ 끝이에요. 언약을 모르는 그 아즈매가 무조건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그거나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예배드리면서, 진짜 본심은 나는 무조건 살아야 되겠다는 그거나 둘 다 언약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을 모른다는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왔다 갔다 하시는 그것을 모른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땅에 왔다 갔다는 것도 모르고, 무슨 일을 하신 것도 모르고, 그 일을 무사히 마감하시고 위로, 하늘로 올라가신 그것도 모르고, 그냥 아침 일곱 시에 출근해서 밤 열한 시에 퇴근하는 겁니다.

성경을 보니까 그게 보이는 거예요. 성경을 모르면 “참 아즈매 훌륭하다. 자식 키우느라 애쓴다.” 이래 되는 겁니다. 요걸 약간 응용해봅시다. 자식들 새벽에 나가 밤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하면 얼마나 훌륭합니까? 참 훌륭하죠. “너 열심히 살고 하니 나중에 큰 인물 되겠다. 그래, 누구는 열여덟 살에 박사학위 받는다는데, 니도 열여덟까지는 안 되더라도 스물여덟에는 박사학위 받아라.” 뭐 이런 식으로 희망을 거는데. 만약에 우연히 예레미야를 봤다고 치면 “언약을 모르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지금 공부하는 것이 저주받을 짓하고 똑같은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펼쳐놨으니까, 지금 언약 대목이 나왔으니까, “그럼 목사님 언약이 뭡니까?”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죠. 언약이 뭐냐 하면 인간이 버린 패를 하나님이 줍는 것이 언약입니다. 인간이 버린 패. 저는 화투를 잘 못 쳐서 모르지만은 들은풍월에 의하면 화투치다가 쓸데없는 패는 버린다는 겁니다. 뭐 12월 비싸리 버리고 한다는 거예요. 참 옛날 생각나네. 화투칠 때 버린 패. 이건 아무 쓸데없다고 버린 패. 그게 시편 118편 22절에 나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게 언약입니다.

아침에 제가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유대인들이 물질을 정신화시키는 방법이 뭐냐, 어린양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효력을 유지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디서 터지는가, 바로 그들 유대인들의 유월절과 예수님 자신의 유월절 양됨이 충돌이 일어나서 십자가 사건이 터진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 십자가 사건을 반복한다는 말은 그때 그 충돌을 우리 마음속에다가 반복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니는 니 모든 일을 모아서 니 스스로 너를 구원시키려고 하는 시도가 있다 이 말이죠.

그 시도와 그 시도에 의해서 결국은 예수님의 공로를 버린 패가 되는 거예요. 내가 구사하는, 내가 구원하는, 그 모든 방식에 예수님은 지금 쓸데없이 잔소리하는 것이 되는 거예요. 간단히 이야기해서 “십자가가 뭡니까?” 제가 물으면 “유대인의 구원방식과 충돌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구원방식이 뭡니까?” 물으면 “인간의 행함으로써 자기를 구원하고자 하는 모든 종교적 시도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반복하는 거예요.

그럼 오늘날 교회가 하는 짓이 뭡니까? 유대인, 바리새인의 반복입니다. 그럼 십자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어요. 버린 패에요. 인간들이 버려버려요. 이런 것은 교회 부흥에 전혀 보탬이 안 된다고 버린 패가 복음입니다. 지금도 교회 건축하는데 가면 복음이 바깥에 툭툭 튀어나와요. 전부 다 갖다 버려서. 십자가 이야기했다가 나중에는 행함으로 끝나버려요. 전부 다 갖다 버려요.

그러면 유대인들이 무엇이 그리 나쁩니까? 유대인들의 마음씨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보다 착하면 착했지. 더욱더 아주 세밀하게 착함을 분석하는 사람이고 그걸 행함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모든 착함과 행함을 철저하게 실천에 옮기고자 했던 사람이 유대인입니다. 근데 그 유대인에 대해서 요한복음 8장 44절에 이래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러니까 이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악마는 거짓말쟁이라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거짓말만 듣고 싶은데 어떡합니까? 그래서 이미 우리는 악마의 숙주에요. 그것도 고상한 숙주. 숙모 말고 숙주(기생 생물이 기생의 대상으로 삼는 동물이나 식물). 주인은 따로 있고 나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숙주라고 합니다. 전염병을 옮길 때  하나의 숙주로 옮긴다 이 말이죠. 콜레라, 페스트, 쥐 속에 있는 이가 숙주가 되어가지고 온 천지마다 다 옮기죠. 1457년에 유럽의 ⅓이 페스트로 다 죽었어요. 동양에 있던 이가 이태리 유럽 무역선을 통해서 들어와서 온 유럽을 완전히 헤집고 다녔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사람이 치료법을 개발했는데 뭐냐, 쥐를 잡고 죽이고 포도주, 알코올 성분으로 깨끗이 닦으면 치료가 돼요.

근데 그 페스트, 정신적인 페스트가 지금도 이 사회에 퍼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둘로 나누어보면 전기 자본주의를 생산적 자본주의라고 해서 계속 생존하기 위해서 계속 생산하고, 생산하고 또 생산하는 것이 생산적 자본주의라면, 후기 자본주의는 소비에 탐욕 하는 자본주의. 안 사면 사게 만들기 위해서 CF를 강렬하게 쏘아가지고 안 사면 못 견디게 만드는 겁니다. 유행 지났어도 반드시 사게 만들어요. 소비에 탐욕해서 계속해서 물건 구입하고, 구입하고. TV채널에 보면 홈쇼핑 채널이 더 많아요. 화면발이 더 좋아요. 거기 나와서 말하는 사람 보면 안 사고는 못 견디게 되어 있어요. 아예 전화기 붙들고 준비하고 있어요. “자 5분 내에 완판 됩니다. 5분 내에 하지 않으면 선물 없습니다. 빨리 080-0000-0000으로 주문전화 하라고. 소비 안 하면 미치게 만드는 것. 소비 안 하면 안 되게 만드는 것.

이 후기 자본주의에서는 욕망이 욕망을 낳고, 욕망이 돈이 되고, 욕망 없는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욕망 있는 사람은 많이 부자가 되는 시대에요. 계속 사람들을 꼬셔야 돼요. 그걸 한마디로 ‘거짓말쟁이들의 세계’ 악마는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그럼 거짓말 하면 기분 나쁘잖아요. 그럼 거짓이 아닌 게 뭐냐, 거짓이 아닌 게 바로 인간이 버린 패를 하나님이 주웠다는 이것만이 거짓말이 아니에요. 바른 소리 한다고 해서 거짓말이 아닌 것이 아니고, 악마가 거짓말이다 하는 차원은 같은 인간끼리 서로 거짓말한다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같은 패끼리 서로 거짓말해봐야 그거 소용없고요. 정치판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셔서 이야기를 해야 해요. 왜냐, 모든 인간은 산 밑에 있고 주님만 들락날락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주님께서 모세에게 돌판을 쓰라고 했는데 글씨는 누가 쓰느냐, 글씨는 모세가 쓰는 게 아닙니다. 모세가 궁서체로 쓰는 게 아니에요. 이거는 하나님이 직접 돌판에다 쓰십니다. 쓰시고 그 다음에 어디에 보관하느냐 하면 언약궤라는 싯딤나무로 만든 상자에다가 그걸 보관하는 겁니다.

자, 여기서 한번 생각해봐야 돼요. 분명히 인간은 물질을 정신화시킨다고 했습니다. 강아지한테 옷 입히는 것 그런 것도 말해요. 강아지한테 옷을 왜 입힙니까? 그것도 이쁜 옷을 입히거든요. 자기 속에 있는 기대하는 정신을 강아지가 대변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남편이 죽었다 하면 사람이 굉장히 힘들어요. 그 미망인이 굉장히 견디기 힘들지만 그래도 옆에 강아지가 있으면 견딥니다. 근데 그 강아지가 트럭에 치어 죽었다면 그 미망인의 정신은 와해되어 버려요. 남편 죽어도 끄떡없더니만 강아지 죽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완전히 정신 나간 인간.

그게 뭐냐 하면 남편은 자기가 안 만들지만 강아지는 자기의 정신을 거기다 입혀놨거든요. 내가 가꾼 하우스, 전원주택, 이런 것들이 불나면 미쳐버립니다. 내 정신을 몽땅 투자했던 그것이 바로 바벨탑이거든요. 그게 뭐냐 물질의 중심화에요. 왜 인간은 그렇게 물질을 중심화하느냐, 그것이 거짓인지 모르고. 마귀가 시키는 것을 왜 하느냐, 거기서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나, 이렇게 진선미 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진선미를 흉내 내서 만듭니다. 진리와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향하여 인간은 물질을 가지고 정신화시키는데, 하나님은 그딴 것 필요 없다는 거예요. 어디서 만나느냐 하면 출애굽기 30장 6절에 보면, “내가 너를 만날 곳이며” 라고 따로 지정을 해줘버려요. 그 지정된 장소가 뭐냐, 언약궤, 언약의 상자가 있는 곳입니다. 돌판이 아닙니다. 돌판을 담았던 상자에서 하나님이 만납니다. 하나님이 어디서 만난다고요? ‘딩동♬’이라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점심시간에 만나는 것이고. 이 밑에 커피숍에서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만나는 장소는 어떤 지정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만납니다. 언약궤.

언약궤인데, 싯딤나무가 물질, 나무잖아요. 그럼 우리가 싯딤나무를 만들면 만나느냐, 계속해서 싯딤나무에서 양 투입하면 만나느냐, 그것은 물질의 정신화입니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아니죠. 그럼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언약궤에다가 어린양의 피를 뿌리게 해요. 일 년에, 7월 10일 날. 피를 뿌려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오해한 거예요. “아, 피를 뿌리면 되겠구나!” 한 거예요. 이게 오해입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고요. 피를 뿌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죽음을 뿌려야 만난다는 겁니다.

니 죽음 말고 하나님의 죽음 안에서 비로소 너와 나는 생명의 만남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야곱의 얍복강 이야기도 되고요. 날이 새고 밤이 끝나는 시점에서 야곱은 알았어요. ‘내가 무서운 밤을 지냈구나.’ 이 밤 지나고 나서 야곱은 새사람 됩니다.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죠. 주님의 개입으로 새사람 되는 겁니다. 주님의 개입이라니까, 개입할 때 그럼 주님 만나면 되겠네? 그냥 만나지 않고 상처받은 모습으로, 인간들이 버린 패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자태로 오는 거죠.

그러면 그런 자태로 오는 것은 뭐냐, 우리의 욕심이 있는 곳에 와요. 그래서 오늘 설교의 결론은 이상하게 끝나버려요. 욕심을 가지세요. 이게 이래되어 버려요. 결국은. 논리가 이상한 논리가 돼요. 욕심을 감추지 마세요. 욕심을 감추지 마시고 경건하게 사세요. 욕심을 부리세요. 나의 욕심 때문에, 다시 나는 인간이며, 나는 더 살아야 되는 욕심의 현장에서, 바로 그것을 통째로 주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로써 하나님의 언약으로 묶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가짐이 거짓된 마음가짐, 솔직한데 거짓이에요. 마귀 안에서는 솔직한 것이 거짓이에요. 이 거짓된 마음, 주님 앞에서는 거짓된 마음이죠.

거짓된 마음을 거짓된 마음으로 노출시키는 그 능력이 우리를 지금 구원해내는 능력의 반복적인 현상입니다. “주님 이것마저 욕심이군요.”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는 어디냐, 우리 마음입니다. 어떤 마음? 욕심은 욕심대로 들추어내고, 그게 죄라고 규정해주는 십자가 피로 씻어주는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뭐 욕심 낸 적도 없고 평소에 말씀대로 삽니다.” 하는데, 꿈을 한 번 분석해보세요. 꿈을 분석해보면 반드시 거기에는 언약도, 주님도 없는, 혼자서 세상을 버티고 살아야 될 그 긴박함이 꿈의 내용으로 편집되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저도 한 꿈, 꿈을 꾸는 사람이니까. 어제 밤에 꿈꿨습니다. 군대 꿈꿨습니다. 통신부대에 가서 살아남으려고 상관하고 다투던 그 꿈을 꿨거든요. 꾸고 보니까 주께서 그런 꿈도 허락하셨다는 그런 생각 안 들고. 그때는 교회 안 다녔으니까. 그때는 이런 신앙이 없었을 때니까. 그저 군대생활 빨리 끝내고 집에 가야지 하는 그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고게 꿈에 나타났다 이 말이죠. 과거 이야기 아니잖아요. 그냥 무심코 살아가게 되면 어쨌든 살아야지 하는 그것이 남잖아요.

어쨌든 살아남아야지 하는 그것이 진리입니까? 거짓이 아닌 거예요? 살다보니까 우리는 내 삶을 방해하는 주님도 그걸 버린 패로 던져버리는데요. 우리의 욕심 때문에, 이러한 살고자 하는 욕심이 없는 곳이 없어요. 우리는 눈만 뜨면 욕심밖에 없어요. 그 욕심 속에 우리로 인하여 희생당하신, 나 때문에 희생당하신,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들어오신 주님의 그 십자가의 피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체가 언약궤로 외부에 사용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러한 조치를 우리에게 취하신 것입니다.

내 인생 아닙니다. 주님께서 모세처럼 사용하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욕심과 그리고 그것마저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피, 그 어린양의 피를 묶어서 우리를 언약의 장소,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써 우리를 활용해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좋은 세상, 출세하고 싶은 세상, 기대와 희망이 넘치는 세상, 남한테 박수 받고 싶은 그런 삶을 누리고 싶은 세상, 그런데 그것이 다 언약이 빠져있는 저주스런 거짓의 세상인 것을 알았사오니, 우리가 그 세상에서 탈피하지 않는 이유가 예수님 복음 증거 하라는 이유인 줄 알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