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29강-죽음에서 출발 1112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24. 18:04

2011-12-16 01:20:03 조회 : 1666         
죽음에서 출발 111215 이름 : 이근호 (IP:117.55.1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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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111215-요한계시록17장(죽음에서 출발)29강a-이 근호 목사
제 29강a

요한계시록 17장 1절에 보면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오고 그 다음에 음녀가 받을 심판이 나오죠. 음녀, 음탕한 여인, 음녀는 심판과 관련돼 있다 이 말이죠. 음행으로 포도주에 취했다. 음녀에서 나오거든요. 이런 용어들을 우리 인간들이 요한계시록 17장을 펴놓고 ‘이게 뭔 뜻입니까?’라고 물을 경우에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왜냐 하면 음녀라든지, 심판, 또는 그 유명한 짐승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 몸에 달라붙을 때 나오는 표현이 그리스도의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몸이 여기 있다고 합시다. 있을 때 우리 인간이 보통 그리스도를 보면 그리스도는 보통 사람이죠. 나사렛 예수고.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을 처음부터 메시야로 알은 게 아니고 그냥 어떻게 잘난 체 하다가 까불다가 죽었던 사형 당했던 그냥 보통 사람 이예요. ‘그런 인간이 메시야라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라고 아주 정색을 했던 사람입니다.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을 볼 때는 그냥 평범하고 또라이죠.  미친 자기 광신도인데 그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아무것도 아니다.’ 해서 이 사람들을 조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하는 말이 ‘나사렛 예수’라고 구체적인 나는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죠. 나사렛 동네, 나사렛 예수니까 나사렛 예수 이거만 해도 나사렛 청년이 한 둘이 아니잖아요. 그 청년들 중에 하나라고 하는 그 예수가 지금 사실은 ‘하나님이고 너를 창조했고 너의 구원자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이걸 알았을 때에 ‘아! 내가 몰랐던 걸 하나 알았구나.’ 이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죠? 뭐냐 하면 그러면 내가 그동안 확신 가지고 했던 확신의 장바닥, 바닥 자체가 완전히 뜯어내야 될 문제예요. 철거해야 될 문제라 말이죠. ‘야, 내가 처음부터 하나님 잘 믿고 죽으면 부활되고 천국 간다.’라고 생각했던 그 자체가 막상 예수님을 접하고 난 뒤부터는 이 자체가 문제가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러면 두꺼운 성경책에 있는 모든 예언서, 모든 말, 단어 이거는 우리한테 쪽 몰려올 문제가 아니고 이 성경들 단어가 어디로 몰려가야 됩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몸에게 달라붙을 때 비로소 숨어있는 본래의 비밀적인 의미가 드러나는 겁니다. 예수의 몸! 우리한테 먼저 오면 안 되고.

그래서 우리는 이 비밀을 알려면 우리가 예수님 앞에 가서 예수님과 연결돼 있는 예수님 주변에 배치돼 있는 성경 말씀의 용어를 알고 난 뒤에 다시 우리에게 가져와야 우리가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관건은 뭐냐 하면, 우리의 몸이 어떻게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느냐 이 문제가 있잖아요. 이 문제는 우리가 갈 수 없고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성령께서 와서 예수님의 자기 세계에 여기에 합류시켜 주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시내 산꼭대기가 그냥 높은 산이 아니고 그곳이 딴 세계라는 게 드러나죠. 어떤 딴 세계냐 하면 40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그러면 부처처럼 부처가 도 닦으면 해골만 남아 있잖아요. 그렇게 돼야 되는데 삐쩍 말라야 되는데 이거는 뭐 그게 아니고 얼굴에 광채가 났잖아요.

그러면 저쪽 위 동네에서 산다는 의미와 아래 쪽 인간들끼리 사는 의미가 이거는 근본적으로 출발점 자체가 이렇게 엮일 수 없는 거예요. 엮일 수 없다는 말은 지상의 사고방식 가지고는 그걸 아무리 숭고하고 성스럽고 빡세게 기도하고 빡세게 헌금하고 봉사해봐야 전부 다 헛짓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는 거예요. 아, 이걸 생각하면 참, 한국교회 안타까워요. 절 지어놓고 예수한테 부처한테 빈다고 천당 가는 게 아니거든요. 예수 믿는다 해서 어떤 예수냐 하면 이상한 예수 막 나온다 말이죠. 사도바울이 봤던 그 예수가 아니고요.

그래서 성령을 받게 되면 그 뒤에 모세가 수건 덮고 왔다. 할 때 그 수건은 모세에게 나온 수건이잖아요. 지상에서 만들은 수건이 아니고 하늘나라 광채가 입혀진 수건을 덮었을 때 그 수건이 무슨 역할을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나라와 육적인 나라 사이에 우리를 용납하는 성령의 그리스도의 영의 역할을 한다 말이죠.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는 뭐가 있느냐, 자유 함이 있느니라. 그 자유가 뭐냐 하면 죽어도 좋다는 거예요. 죽음의 세계.

그래서 여기서 오늘도 공식 하나 적겠습니다. 이게 우리들의 아름다운 약속 이예요.ㅎ 어떤 공식이냐 하면 이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하고 예수님도 하늘나라에 있을 거라고 하는데 이 공식은 성립 안 됩니다. 이 공식은 실패고 착각이죠. 진짜 공식은 뭐냐 하면 이미 죽었을 때, 죽음= 안식,(편안), 굉장히 편함, 최고의 행복이죠.

그게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보면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쉰다 이 말이죠. 평안하게 쉬는 거예요. 평안하게 쉬는 것이 이 세상에 있다? 없다? 이 세상은 없고 주로 예수님과 함께 죽게 되고 죽은 나라에서 안식을 얻는다고 요한계시록에 돼 있거든요.

그럼 이쪽 시점이 최고의 행복, 최고의 축복이 되는 겁니다. 이미 축복을 본 입장에서 다시 세상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축복과 행복을 주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끌고 다니셨구나.’ 그러면 이미 이 목표에 도달된 거죠. 도달하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우리 인생을 다시 보게 하는 방법이 주님께서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이미 성령 안에서 ‘너는 이제 쉬어도 돼, 너는 합격이야.’라고 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어떤 행복과 돈이 있더라도 죽어서 주 안에 편안한 행복보다 더 나은 행복은 없어. 이 세상에서는 꿈도 못 꾸는 너무 좋은 그런 행복의 영원함이 바로 주와 함께 편안하게 안식을 누리는 시점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시점에 이미 성령 안에서 도달한 사람은 그 다음부터는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도대체 나 같은 인간이 어떠한 작업이 다가와서 나로 하여금 요 길로 조 길로 샛길로 다 빠져서 어떻게 여기 이미 안식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는가.’하는 그 과정을 소급해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되는 겁니다. 소급해서 보게 되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우리 잘난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이미 기록됨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죠. 기록됨 때문에!!

어제 제가 수면 내시경을 했거든요. 수면 내시경을 하고 나서 옆으로 누워서 마취가 돼서 잠에 푹 빠졌는데 나중에 간호사가 깨워서 일어났어요. 깨어나면서 제가 느낀 것은 세상에 이렇게 죽는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줄 상상도 못한 거예요. 세상에 이렇게 좋은 건데, 왜 그동안 안 죽으려고 그런 쓸데없는 짓을 다 했느냐 말이죠. 그런데 그냥 자살하면 안 되는 이유는 자살하게 되면 주께서 선한 손길로 인도하는 주님과 함께 하는 죽음이 아니고 이거는 마귀가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고통스럽고 죽고 난 뒤에는 더 고통스럽죠. 부자 보세요. 부자가 지옥에 가서 물 한 방울 없어서 애쓰잖아요.

그러니까 그럴 때는 하나님께서 죽이기는 죽이시는데 그냥 죽으면 안 되고 뭔가 하나님 쪽에서 조치가 있는 그런 죽음이 돼야 되는데 그런 조치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작업을 통해서 우리를 요리 조리 축구 선수가 공 몰듯이 ‘그리 가면 안 돼, 요리 가야 돼,’ 계속 몰고 다니신 거예요. 그 몰고 다닐 때 인간이 자기가 관리 못합니다. 인간이 자기가 관리 못하고 이 목표점을 아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주님의 영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공을 요리조리 몰듯이 몰아세우는 겁니다. 그 몰아세울 때 그때 중요한 것은 뭐냐, 그러면 나처럼 생명책에 기록되어서 천국 가기로 몰아세우는데 그럼 나 같지 않은 사람은 누가 모느냐 하는 겁니다. 그때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짐승, 사단이 등장하는 거예요.

짐승, 사단이 대체적으로 내세우는 게 뭐냐 하면 바로 교회 충성 이예요. 왜냐 하면 교회는 살려고 오는 사람 이예요. 현재 내가 살아있는 나를 천국 가서 더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누가 누구에게 작용하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행함을 집어넣고 행위를 집어넣고 온갖 좋은 것은 다 끌어 모아서 집어넣어야 되는 거예요. 십자가 집어넣고 언약도 집어넣고 복음도 집어넣고 십자가 마을도 한번 들어가 봤다가 온갖 것 다 집어넣어도 지옥 갑니다.

이쪽에 주님께서 성령이 직접 와 버리면 구태여 내가 신앙적으로 종교적으로 어떤 행위를 나한테 가미하고 관리해서 구원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어서 모세가 산 위에서 밥 먹을 때 ‘하나님, 밥 먹어도 될까요? 안 될까요?’ 이 문제를 물을 이유가 없죠. 이미 그 산 위가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물도 마시고 이런 필요가 없잖아요. 거기에서 옛날 산 밑에서 하던 행세, 자기 행세 있잖아요. ‘자, 시간됐다. 이제 약 먹어야지, 시간됐다, 밥 먹어야지.’ 그런 행세를 산 위에서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안 하죠.

그런 자기의 모든 행위와 모든 행동과 그동안 자기를 살리던 작업 같은 것은 그게 아무 쓸데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모세가 산 밑에 다시 내려와서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 몸에서 나는 광채 자체도 다를뿐더러 생활 습관도 어떻게 됩니까? 다르죠. 거기다가 모세는 ‘그저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왜,  본 게 있기 때문에. ‘그저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이 은혜로 살려준다. 자비와 긍휼, 하나님은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주실 자에게 긍휼을 주시는데 그 혜택을 너희에게 주었다.’ 만날 하나님 이야기하는데 땅 밑에 애굽에서 올라온 백성들은 뭡니까? 때 되면 먹어야 되고, 뭔가 심어야 되고 뭔가 거둬야 되는데 당신 같이 하나님 믿는다고 그럼 우리가 애굽에서 먹던 맛있는 수박, 부추 이런 것들은 어디서 먹는데? ‘그런 것 필요 없어. 하늘나라 가면 먹는 것 필요 없다니까.’

그 원망과 다툼, 물이 없다고 원망했을 때 모세는 ‘물 없어도 괜찮아‘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말씀이 요리조리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에 현재 불 기둥과 구름 기둥 자체를 말씀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백성들은 ’물 달라. 고기 달라.‘ 하니까 모세는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면 물주시고 고기 주시고 만나 주시는 그것도 그것이 만나가 아니고 양식이 아니라 말씀의 일종이라는 거예요.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가는 말씀의 일종, 말씀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지, 이게 만나는 많이 먹으라고 준 게 아니에요. 그래서 만나는 안식일만 되면 만나는 끊어져 버려요.

안식이 무슨 날입니까? 안식일은 안식일 아닙니까? 안식을 위해서 중간 매개체로 임시로 주는 것이 만나고, 메추라기고 물이다 이 말이죠. 이 말을 신약 성경대로 하면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계속 영원히 살 수 있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알았나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우리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리라.‘ 이 말은 내가 나의 행동을 믿는다? 안 믿는다? 절대로 내 행동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설교 끝에 행함이 튀어나오느냐 말이죠.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바로 비로소 짐승, 악마란 의미가 여기서 튀어나오는 겁니다. 제 논리가 무리가 아닌 이유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17장 3절에 나옵니다마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할 때 제일 먼저 성령께서 데리고 어디로 데려갑니까? 광야로 가죠. 3절에 보면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이것은 사도요한이 지금 예수님의 종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짐승이라든지, 음녀라든지, 심판이라는 그런 용어가 이것이 우리가 성경 책 펴놓고 한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돼 있는 이러한 심판,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의미를 구축하고 의미를 파악하라고 주님께서 성령께서 다뤘던 방식대로 지금 사도요한을 다루고 있고 또 우리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니가 사는 곳이 어디지?’ ‘서울’ ‘아니야 광야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요?’ ‘예수님도 광야에 살았기 때문에.’ ‘에이, 예수님 나사렛 동네, 갈릴리 동네 살았잖아요.’ ‘아니야, 그곳이 광야야.’ 그게 광야라는 거예요. ‘아유, 집이 왜 광야입니까? 풀도 나는데.’ 광야 때 사단을 만나잖아요. 처음에 성령에 의해서 광야에서 마귀를 만나면 그때부터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귀신이 있다는 말은 그 장소가 뭐다? 광야라는 의미입니다. 귀신이 있는 곳이 광야라는 의미가 돼 줘야 예수님의 공생애에 편입된 그러한 새로운 지평, 그러한 삶의 바탕을 같이 공유하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말은 어렵지만 이해되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니까 우루루 성경에 있던 용어들이 뒤따라서 오는 거예요. 예수님 가까이에서 비로소 모든 개념들은 의미가 되살아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광야에 보냈더니만 거기 누가 나타났다? 마귀가 나타났죠. 그렇다면 어떤 세트냐 하면 예수님, 광야, 마귀, 거기에다 성도가 들어가 버리면 거꾸로 이제는 성도가 사는 곳이 광야가 되고 광야에 짐승 있고, 이렇게 성도로 하여금 광야에 짐승 만나게 하는 조치는 누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성경 안속으로 이미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전에는 성경 바깥에서 ‘여기는 서울인데 서울서 성경공부 어떻게?’ 이랬는데 광야에 들어가서 성경을 보는, 그래서 그렇게 되면 뭐가 눈에 띄느냐 하면 마귀의 정체가 드러나죠. 그렇게 해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항상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일곱 교회에. 전부 다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이야기하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나’라는 인간은 뭐하고 접근이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과 접근되지 못하고 성령이 안 오면 항상 내 몸 중심으로 예수도 성경도 전부 다 내 몸 중심으로 풀어헤치려고 그렇게 애를 쓴다 이 말이죠.

그럼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만 천국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고 바깥에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오셔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데 우리 몸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를 들어가게 하시면서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성령께서 오셔서 겪었던 모든 예수님의 일대기를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는 여기다가 다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이렇게 그려보겠습니다. 여기 탱크가 있고 그 다음에 여기도 탱크가 있는데 밑에는 연결돼 있어요. 이거는 육이고 이거는 예수님의 세계, 영이라 합시다. 처음에 육적인 것이 이만큼 채워져 있습니다. 이걸 (A)상태이다가 물이 점점 빠져서 옆 탱크로 들어가게 되죠. 그럼 (B) 상태 같으면 빠져나간 것이 중간이니까 육은 반은 빠지고 영은 반 채워졌고 (C)상태에서는 육은 완전히 빠져버리고 영의 세계가 다 채워져 있다 이 말이죠. 요 빠져나가는 파이프, 빠져나갈 때 그냥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죽음’을 통해서 이렇게 빠져 나온다 이 말이죠.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바로 육으로 오셔서 주가 되실 때 그냥 하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주가 됩니까? 아니죠. 이 땅의 죄 있는 사람의 몸이 돼서,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이 되셔서 성령이 오셔서 육신의 몸에서 영광의 몸으로 갈라지는 요 예수님의 일대기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켜 버리면 예수님께서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들어갈 때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죽었잖아요. 이게 십자가의 의미인 거예요. 죽었다는 말은 아무도 자력으로 올 수 있다? 없다? 갈 수 없는 세계에 주님께서 최초로 부활의 첫 열매로서 간 거예요. 그러니까 부활의 세계 있고, 예수님께서 그쪽으로 빠져 간 게 아니고 부활의 세계는 예수님이 빠져나오면서 새롭게 발생된 세계가 부활의 세계입니다. 이런 게 참 어려워요.

우리는 공간적으로 하늘나라 있고 여기서 그냥 예수님도 하늘나라 있고 물탱크 이쪽, 저쪽 다 있는지 알지만 이 탱크는 주님께서 만들어야 만들어지는 거예요. 만들어야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부활되기 이전에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에녹 같은 경우는 아예 죽음을 보지 않고 갔죠. 엘리야 같은 사람도 시체 없죠. 불수레 타고 올라갔죠. 그리고 엘리사가 어떤 과부의 아들도 죽었는데 살려냈잖아요. 그리고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도 살려냈고 베드로의 장모도 죽은데서 살아났고, 그것 말고도 성경에 보면 죽은 자가 살아난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그럼 시기적으로 예수님보다 그 사람들이 먼저 부활 된 겁니까? 아니죠.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부활의 첫 열매가 누구예요? 에녹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부활의 세계라 하는 것은 현재 있는 세계가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 죽어서 만들어진 완벽한 세계입니다. 최초의 세계입니다.

왜냐 하면 부활의 세계는 그냥 죽은 사람 모이는 곳이 아니고 모든 언약과 모든 말씀이 완성 상태에 놓여 있어야 그게 부활의 세계입니다. 모든 말씀을 지키면 뭘 받게 돼 있습니까? 복을 받게 돼 있어요.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받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든 모세든 그 사람들은 죽어서 부활되기 위해서 간 게 아니고 음부에 갔죠.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할 때 그들은 비로소 부활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가 오기를 기다린 것은 그 이유예요. 죽은 자로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고 ‘다 이루었다’ 할 때 그 사람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의 세계에 참여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같이 했다고 해서 아브라함도 부활이 첫 열매가 아니고 예수님만 부활의 첫 열매고 그 다음에 예수님 때 믿었던 그 사람들이 그 다음 단계 그 사람들이 그 다음 열매고 그 다음에는 아직 죽지 않은 우리가 부활되면 우리는 그 다음이고, 순서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먼저 죽었던 사람이 먼저 일어나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지만 천국은 지옥의 파편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천국이라 하는 것은 하늘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부터가 인간들이 큰 오해를 하고 있어요. 여기서 어려우니까 설명을 좀 하겠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몸에서 어떻게 해서 이런 개념이 달라붙느냐 하는 이야기를 제가 대충은 했는데 예수님의 몸에 붙어있던 짐승이라는 의미, 음녀라는 의미는 조금 있다가 하겠지만 그 의미를 알기 이전에 우리 인간의 몸부터 생각해 봅시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의 몸은 왜 생각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부활의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경로와 과정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성령께서 육신의 몸인 예수님께서 영광의 주가 되셔서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셨다 하는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우리는 육신의 몸이라는 그것은 가위로 잘라버리고 결과만 움퍽 소지해서 나도 거기에 같이 걸쳐보려고 그렇게 하는 버릇들이 있어요.

주님께서는 과정이 중요한데 우리는 결과물만 얻으려한다 말이죠. 회사 처음에 취직한 신입사원들 보면 버릇이 뭐냐 하면 선배들이 팀 이뤄서 프로젝트하면 지는 아무것도 안하는 게 선배들 덕분에 됐거든요. ‘아유, 이러면 사장님이 우리 팀 다 잘했다’고 보너스 주니까 보너스 받았는데 만약에 선배가 결근했다든지 다른 직장 가버리면 ‘어, 먼저 프로젝트 니가 해봐라.’ 하면 ‘못해요.’ 못하죠. 결과는 얻었는데 막상 과정은 뭔지 몰라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누구십니까?’하면 그건 모르는데 ‘구원 받았습니까?’ ‘예,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받았어요?’ 하면 ‘몰라요.’ 이거와 똑같은 거예요. 어디 가도 자꾸 한 수 배우려 하는 겁니다. 그 버릇은 뭐냐 하면 교회 오는 것은 점쟁이한테 하듯 하는 거예요. 점쟁이한테 가서 ‘요번에 결혼식 어느 날짜에 하면 되고 이렇게 하면 된다.’ 하면 ‘예, 이번 2월 29일 날 결혼식하면 됩니다. 그러면 잘 삽니다.’ 그러면 2월 29일 날 결혼식 하려고 하죠. 그런데 진짜 알아야 될 것은 점쟁이가 어떻게 점을 쳤기에 점괘가 2월 29일 날 나왔느냐, 그 과정을 알아야 된다니까요.ㅎ우리는 딱 열매만 따먹으려 하지 말고 그 절차가 같이 전체가 주어질 때 우리는 ‘아! 이래서 내가 죄인인데 예수님 피 때문에 구원받았구나.’라는 걸 아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십자가마을에서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내가 죄인인데 주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이렇게 하니까 뭐만 달랑 가져가느냐 하면 ’나는 죄인인데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 그것만 가져가는 거예요. 그러면 묻죠. ’당신은 어떻게 해서 죄인이냐?‘ ’모르죠.‘ 그냥 결과만 외워가지고 있는 거예요. ’어째서 죄인이냐‘ 하면 ’내가 왜 죄인이지, 그냥 죄인이라 하니까 죄인이겠죠. 그냥 나는 말 안 되면 믿습니다.‘ 하고 끝나버려요.

혹독하게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몸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성령께서 주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마귀를 시시하게 봅니다. 마귀는 우리도 이기는 존재로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은 마귀들이 벌떼 같이 달려들어서 쏘아대던 죄 있는 몸에다가 달려들던 악마의 온갖 수모와 핍박과 모독과 멸시, 그런 것이 벌 쏘이면 어떻게 됩니까? 벌 쏘이면 온 몸에 볼록, 볼록 온 몸이 다 찢겨져서 주께서는 가는 거예요. 이게 성령 있어도 동일하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왜 성도로 하여금 마귀란 벌에게 쏘게 합니까? 그래야 안식이라는 것은 우리의 관리, 내 관리가 아니고 하나님, 예수님의 피의 능력이 내가 나한테 손질하는 것보다 더 월등한 위대한 힘으로 나로 하여금 공짜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벌 쏘는 가운데서 벌 쏘는 것도 하나의 공을 모는 하나의 작업입니다. 우리 육이라 하는 것은 항상 뭘 하나 해놓고 다시 나라는 대접 하나 만들어서 뭐 하나 해놓고 그걸 나라는 대접, mp3에 저장하듯이 담아놔야 안심을 하거든요.

주께서 그냥 은혜 줘도 은혜 받은 것을 모아 놓는 저금통을 또 지가 만들어요. 만들어서 ‘내가 은혜 받은 것’ 하고 이렇게 붙여서 거기다가 저금하듯이 모아놔요. 그런 것을 주께서 발로 뻥 차면, 그 깡통 그걸 두 자로 ‘역사’라 합니다. 나의 역사, 그걸 발로 차면 그때는 와락 성질내죠. 내가 얼마나 충성 봉사 했는데 이걸 왜 발길로 차느냐고, 그 깡통이 바로, 우리는 깡통이라고 하지만 그 깡통이 주님이 이미 당했던 악마의 술책이었던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애지중지하고 아까워서 우리는 발길로 못 차는데 고마우신 우리 성령께서 오셔서 발길로 냅다 차면서 ‘어디서 마귀 같은 짓을 또 하고 있어?’ 하고 발로 차버리면 ‘오~ 내 깡통, 내 깡통.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데.’ 다 날아가죠.

스데반 집사 보세요. 스데반 집사는 벌떼가 얼마나 쏘았는지 얼굴이 다 멍들었어요. 얼마나 맞았는지 죽었어요. 벌떼에 의해서 돌에 의해서.

편히 쉰다는 것은 이미 구원을 이미 쉬기 때문에 소급해서 이 남아있는 껍데기 같은 육신이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하는 과정을 통해서 ‘아! 이 세상은 마귀가 있구나. 귀신이 지배하고 있구나. 짐승이 지배하는 것 맞구나.’ 하는 것을 확인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그 과정에서 구원받고 나머지는 그 짐승한테 다 굴복 당하게 돼 있다고 여기 8절에 보면 나옵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이렇게 돼 있어요.

 그렇죠? 생명책을 뭐와 비교합니까? 생명책이 투입되면서 그 다음에 등장한 게 뭐죠? 짐승이죠. 짐승 등장하면 생명책 등장하고 생명책 등장하면 짐승 등장하죠. 그러니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 말하면서 세상을 누가 지배한다? 짐승이 지배한다는 것을 파악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요즘 교회 귀신, 악마 하면 거기 이상한 소리 하지마라 하죠. 인간이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 거지, 언제 귀신, 악마가 왜 개입하느냐 말이죠.

70이레 논문 쓸 때 짐승이 어떻고 이렇게 쓰니까 앉아있던 그들이 얼마나 비아냥거립니까? 목사님 보셨죠? 어디 신화적 개념을 집어넣느냐고, 얼마나 ‘웃긴다.’ 하는 식으로. 왜냐 하면 짐승과 악마, 사단 이런 것은 논리에서 학문에서 이게 나올 수 없어요. 신화적 개념이기 때문에. 신화적 개념은 하늘에서 뚝 떨어져야, 계룡산에서 받아야 되지, 신화적 개념은 어느 신학 책에도 안 나와 있다 이 말이죠.

세상에 인간은 어떻게 하고 인간은 어떻게 하는 것이 인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데, 짐승이 어떻게 하고 짐승이 어떻게 하고 하는 것은 짐승을 봐야 귀신을 봐야 악마를 봐야 어떻게 하는 것이 나오는데 악마가 어떻게 학문의 대상이 되고 분석의 대상이 됩니까? 말도 안 되죠.

만약에 미스코리아 돼서 미스코리아 고별행진 끝나고 난 뒤에 미스코리아 막대하나 쥐고 머리에 왕관 쓰고 ‘아이고, 이 기쁨을 누구한테?’ ‘이 기쁨을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날 예쁘게 낳아주신 아버지, 어머니에게 감사하고 송진 미용실 원장님한테 감사한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ㅎ

그럴 때 문제는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 법 좋아하는 사람은 뭐라 합니까? 그 미용실 원장 한테 감사하는 건 좋아, 미용실 있으니까, 낳아준 엄마한테 감사하는 건 좋아, 그것도 엄마가 있으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걸 증명해 보라 이 말이죠. ‘괜히 니 기분이지? 니 기분이지?’ 뭐든지 법대로 하자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로 됐다는 걸 니가 그 논리를 증명해 보란 말이죠. 매일같이 교회 나오는 쟤는 떨어지고 니는 됐는지를 하나님의 법대로 해 보란 말이죠.

두 나라 기독교 나라가 축구합니다. 둘 다 빡세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한쪽은 2대0으로 이겼어요. 그러면 왜 한 나라는 하나님이 있는데 지고 한 나라는 이기게 되는 이유를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보란 말이죠. 하나님 찾아보고 따져보고 해야 될 게 아닙니까? 그게 어떻게 법적으로 됩니까? 그러니 사람들이 ‘하나님’ 하는 것은 그냥 구색에 맞추기 위해서 그냥 갖다 붙이는 용어에 지나지 않게 돼 버렸어요. 그냥 ‘하나님’ 안 했다가 미스 유니버스에 나가서 떨어질까 겁나서 하나님한테 아부한다고 하나님 은혜라고, 이 말은 ‘다음에 세게 당겨 주세요.’ 이런 노림수 때문에 그렇다 말이죠. 입 싹 닦기는 뭐하고.ㅎ

그래서 이 모든 생각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할 때 이 말이 왜 안 맞느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좋은 것을 욕망하는 게 아니고 지가 욕망하기 때문에 좋은 거예요. 항상 자기와 결부돼 있어요. 자기가 뭐냐,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뭐냐, 모든 것이 어떻게 감사하다할 때 누구와 관련돼 있습니까? 그리스도 몸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누구와 관련돼 있어요? 내 육신, 내 몸이 원하는 바를 내가 소지하고 있는 이런 조건하에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한계다 이 말입니다. 그게 마귀와 짐승이 그 짓하고 있다는 것을, 마귀와 짐승을 모르면 알 수가 없죠. 하나님이 도와주는데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왜 그걸 해석을 삐딱하게 해서 마귀가 도와줬다고 왜 억지를 부리느냐고 나한테 달려들 수도 있는 문제가 있다 말이죠.

그러니 짐승, 악마, 사단 이것은 좋은 것을 하나님께 돌릴 줄 안다면 짐승, 마귀와 사단을 어떤 개념입니까? 지한테 불리할 때 지한테 손해가 될 때, 스피노자 철학자는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사람이 선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존재의 힘이 증대될 때가 선이예요. 스피노자 하면 유명한 격언 있죠?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한 사람 아닙니까? 스피노자가 하는 말이 선이라 하는 것은 내 존재의 힘이 증대될 때이고 악이라 하는 것은 내 존재의 힘이 감소될 때, 이걸 악으로 본다 이 말입니다. 스피노자가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스피노자가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말이죠.

그럼 성도 악은 누가 정해요? 결국 내 몸이 정하잖아요. 내 몸이 정하는데 내 몸이 마귀에 속했는지 안 속했는지 내 몸 가지고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증명이 안 되죠. 왜 증명이 안 되는가, 나한테 무조건 유리하면 성부 성자 성령께서 도와준 게 되는데 이게 어떻게 증명이 됩니까? 안 되죠.

지난 수요일 날 예레미야 설교할 때 했잖아요. 그 아줌마들이 뭐라 합니까? 옛날처럼 아스다롯, 바알을 섬기고 우상을 섬길 때는 뭐든지 만사형통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선지자 말 듣고 그런 걸 폐지하고 난 뒤에는 이것은 뭐든지 기갈이고 전쟁이고 폭삭 망했다는 겁니다. 회사에서 성경공부하면 회사가 팍팍 커졌으면,,,ㅎ 그런데 성경공부 한 다음에 불나버렸다 하면, 이건 도움도 안 되고 불났다 하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말이죠. 성경공부를 하란 말이냐, 하지 말란 말이냐, 분간이 안 되잖아요. 그 이야기를 그 아줌마들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설교할 때 그랬잖아요. 그 아줌마들이 고맙다고. 얼마나 고마워요. 남자들은 체면 차린다고 믿음 있는 체 하지만 아줌마들은 그런 것도 없어요. 딱 깨놓고 이야기해요.

예수 믿고 나서의 형편이 전보다 못하다고. 이런 기분으로 무슨 재미로 하나님, 여호와 믿겠느냐, 옛날처럼 ‘나 둬. 내버려둬. 옛날처럼 섬기게.’라고 하는 대목이 예레미야 44장 15~19절 보면 적나라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 글대로 오늘날 교회 교인들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교회 왜 나왔는지’

정동진에 해 뜰 때 뭐라고 기도합니까? MBC나 KBS 인터뷰할 때 나오죠. ‘뭘 빌었습니까?’ 하면 ‘그저 우리 남편 사업 잘 되고 가정의 건강을 위해서 빌었습니다.’ㅎ 해가 미쳤나. 그런 거 들어주게. 해가 미쳤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달을 피 빛으로 변합니다. 믿을 걸 믿어야지. 왜 그러느냐 하면 해와 달과 인간의 몸이 함께 지금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미 주님의 십자가로 이미 작업 끝내버렸어요. 이제는 철거반으로 완장 끼고 서울에 봉천동에 지금 포크레인 열 댓 명으로 동원하고 있는데 아직도 어린애들이 이사 안 가고 줄 그어놓고 ‘요거는 내 땅’ 하고 소꿉놀이 하고 있다니까. ‘얘야, 빨리 비켜줘.’ ‘싫어, 내가 살던 내 고향이야.’ 고향이고 뭐고 어디 있어.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리는데.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인지 모르겠어.

지금 주님께서는 십자가 죽고 이 땅을 떠나버렸다 말이죠. 다시 오실 거예요. 떠나버린 상태에서 지금 재개발 지역에 왜 나와 있어요? 이사도 안 가고. 그게 정들었던 것이 평소의 습관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그걸 목표로 삼아왔던 거기에 걸맞게 그렇게 교육받아왔던 우리의 몸이 ‘니가 잘하나, 내가 잘하나.’ 되도 않는 키 재기 하는 식으로 살았던 그 버릇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철거하려니까 너무 허망하게 보이고 다 놓으려하니까 그동안 투자한 것이 아쉬운 것도 많고 그런 거죠.

더 깊이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우리 몸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 몸에 유리한 것은 하나님 뜻이고 불리한 것은 사단의 짓이다.‘라고 생각한 것 때문에 그들은 누굴 죽이고 말았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육신의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도가 아니고 인간의 육신에 속해있는 이 죄의 세력은 인간을 통해서 분출되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적대적인 모습으로 분출되면서 그 인간을 통해서 결국 그 인간을 조정하고 있는 악마는 예수님만 노리고 저격했다 이 말이죠. 그냥 악하다가 아니라 악해도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죽이고 싶은 살해의지로서 무장된 그 악마의 조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인간, 그 인간은 악의 화신이고 악의 농축액이죠. 부산 강의에서 했죠. 악의 농축액! 악의 엑기스! 이런 모습을 성령이 오게 되면 그리스도 중심으로 다시 우리로 하여금 파노라마처럼 우리의 육신의 밟아온 길과 앞으로 갈 길을 다!~ 비춰주죠. 왜, 이미 그리스도 안에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아요. 아! 이거 또 오해된다.ㅎㅎ

죽은 사람은 무슨 짓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걸 통해서 자기가 죽어야 마땅한 이유가 바로 나오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이 막 안 살려하고 조심스러워하는 이유는 뭡니까? 아직까지 덜 죽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성령이 안 왔기 때문에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조심스럽게 살면 살수록 누가 싫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갈수록 미워지는 겁니다. 왜,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서 구원받으려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날 안 도와주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내 구원이 목적인데 주님께서 내 구원을 안 도와줄 때 그때부터 주님은 나의 적이 되는 거죠. ‘그래, 니 잘났다. 그래.’ 이렇게 되죠.

왜 주님께서 안도와 줍니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안 도와줍니다. 그러면 여기서 마귀는 더욱 더 기세가 등등하죠.

마귀 : 왜, 누구는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해 주고 왜 누구는 빼주느냐.

예수님 : 그건 내 맘이다.

마귀 : 그러니까 그 따위 신앙하면 죽여야 된다.

예수님 : 그러니까 죽었잖아. 그래서 너희들은 짐승이잖아.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은 다 짐승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죠. 비로소 짐승이 보인 거예요. 짐승이 보이고 우리는 짐승과 단짝이 돼 있으면서 본인이 짐승인줄 몰랐던 거예요. 항상 짐승 편에 서서 짐승의 앞잡이로서 예수님을 공격하는 그러한 자세로서 평소에 그렇게 임했는데 우리는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다만 내 소박한 꿈과 포부와 약간의 그냥 밥 먹고 사는 정도의 그런 일자리, 고 정도 해서 바쁘다고 복음 못 듣게 했는데 세상에 그것마저 허용 안하죠. 나올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니들이나 예수 믿어라. 난 예수보다 더 귀한 게 있어. 돈이고 내 자존심이고 내가 살고자 하는 나의 의지만큼은 예수도 날 못 말린다.’

 예수님이 그 의지를 못 말리는 게 아니고 안 말리죠. ‘그래, 그래, 아이고, 잘했어요. 잘했어요. 니 맘대로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니가 성질나는 대로 사세요.’ 음녀라는 말은 음탕한 여인 아닙니까? 음탕한 여인이란 말은 반드시 이 여자는 결혼 관계 속에 있어야 돼요. 음탕한 여인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호세아에도 나오고 아모스에도 나오는 누굴 이야기합니까? 이스라엘을 두고 하는 이야기예요. 왜 이스라엘이 신약에 오면 확대되는 이유가 원래 그때 여호와 하나님과 가장 밀접하게 언약 적 관계를 가진 나라가 어느 나라입니까? 이스라엘 이예요. 이스라엘은 다른 이방 민족은 쓰레기라 필요 없고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을 대변해 주는 겁니다. 왜, 가장 가까이 근접하게 최측근이니까.

그것을 통해서 왜 이스라엘은 망해야 되는가, 그럼 이스라엘 망하면 다른 나라는 안 망해도 되는가, 아니에요. 이스라엘 망했다 하면 다 망했다는 말 이예요. 원래 망하는 민족이고. 이스라엘 자체가 이걸 음녀로 보는 거예요. 음녀로 봤는데 음녀란 말은 자리 본래의 남편을 버렸다는 거예요. 버리고 남편 아닌 자를 사랑했을 때 그걸 간음했다, 간통했다, 음녀라고 보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거든요.

그러면 음녀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옛날 남편이 있을 때는 이 여자에게 뭐만 가득했겠어요? 남편의 요소만 가득 차 있었겠죠. 정상적인 여자 같으면. 그런데 이 여자가 음녀가 됐다는 말은 여기 여자에게 있던 남편의 요소는 다 빠져버리고 빠진 빈자리에 뭐가 있습니까? 남편을 욕되게 하고 남편을 공격하고 남편을 미워하는 짐승, 하나님의 원수된 것이 여자의 마음에 찾아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음녀의 특징은 뭐냐, 지난 광주 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는데 여자라 하는 것은 남자와 달라서 빈자리를 만든다 하죠. 빈자리가 있다는 말은 ‘다오’ 다오‘ 계속해서 나한테 채우고 채우는 거예요. 쇼핑 중독증 여자들처럼, 계속해서 채워야 돼요. 채운다는 말은 뭔가 누군가 계셨는데 완전히 거덜 내고 빠져나가버렸어요. 자기가 사랑할만한 자가 빠져나가버렸어요. 이제는 자기 사랑의 대상은 옛날 떠난 그 남편 대체할 다른 것들로 채우고 채워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메시야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를 사랑해야 될 임무가 있는 이스라엘이 결국 메시야를 죽이죠. 죽인다는 말은 죽임으로써 다른 것들 메시야 말고 다른 것들로 그 안을 채우고 채웠다는 그 내용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음녀의 특징은 뭐냐 하면 주님 하나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세상에 다니면서 예수님의 기쁨을 대체할만한 것을 찾고 찾아다니는 그러한 모습, 그럴 때 찾아오는 모습을 가지고 ‘짐승’이라고 비로소 짐승의 정체가 음녀일 경우에만 파악이 되죠. 물론 다른 사람, 성도도 물론 알지만 저 사람이 음녀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말고 다른 걸로 채우려고 분투  노력하는 그 양상과 모양새를 보면서 뭐로 규정할 수 있느냐 하면 ‘너는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음녀’라. 그 채워서 뭐할 겁니까? 그 채워서 누구한테 보란 듯이 욕하죠. ‘예수 없어도 좋아. 예수 없어도 나는 행복해. 나는 십자가 복음 없고 예수 없어도 이렇게 행복하단 말이야.’라고 큰 소리 치면서 같이 들어온 것들과 합세해서 더러운 이름으로 하죠.

17장 4절 봅시다.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것도 바람피우는 여자를 말하는 게 아니고 항상 그리스도 몸을 가지고 볼 때 음녀라 하는 것은 예수님 빠지고 빈자리에 예수 없는 다른 걸로 채우려고 하는 그 양상, 특히 음녀라 하는 것은 광주 강의 때 했지만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이게 갈급해서 채우고, 채우고 계속 채우는 거예요.

5절에 보면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큰 바벨론이 무슨 비밀입니까? 하지만 비밀로 돼 있죠. 그 비밀은 어디 가야 알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몸만 같이 있어야 아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죠. 어떤 진주 장사가 다른 사람은 파악하지 못하는데 장사를 많이 해본 사람은 알 수 있는 귀한 걸 발견하고 난 뒤에는 기뻐했다 하죠. 그런 상태를 뭐라 합니까? 하늘나라라 하죠.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말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어디 가야 돼요? 육신의 몸으로 다니신 예수 그리스도와 합류된 경우에만 ‘아!’ 이게 보통 사람 모르고 예수 성령 받은 사람만 귀한 걸 아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에이, 이게 무슨 보석이야?’ 하고 갖다 버리죠.

그러니까 진짜 귀한 것은 갖다 버리고 전혀 귀하지 않은 그런 것들만 잔뜩 끌어 모으는데 그 끌어 모은 전체가 뭐냐, 예수님을 배반케 하고 공격하게 만든 힘, 바벨론의 힘이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어느 나라에 잡혀 갑니까? 바벨론에 잡혀감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의 의미가 이스라엘과 관계되는 새로운 국가로서 여기 등장해서 쓰여지게 되는 겁니다.

바벨론 할 때는 앞에 뭐가 있다? 수모 당했던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한때 품었던 바벨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두 나라밖에 없죠. 바벨론이냐, 아니면 이스라엘이냐, 이스라엘이냐, 아니면 바벨론이냐,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모든 성경은 우리 몸 가지고 풀어내가지고 내 지식으로 소유할 문제가 아니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야 돼요.

모든 성경 자체가 바벨론이냐, 아니면 이스라엘이냐,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만 파악된 그 의미에 마치 우체국에 가면 우편물류센터 있죠. 거기에서 각처에서 오는 걸 분류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 분류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뭐냐, 지가 알아서 자기 속에 좋은 것 담아서 그것 가지고 천국 가보겠다 시도하는 거예요. 뭐는 빼고? 진짜 예수님은 빠져 버리고. 왜? 성령이 오지 않았으니까, 진짜 예수님이 왔으면 오히려 반대로 어떻게 됩니까? 세상 것보다도 뭐가 더 중요해요?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거예요.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됐으니까, 무슨 생명책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됐기 때문에 어린양과 공유됩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이 지상에서 살았던 그 자체가 생명이 되고 그 일대기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 그것이 우리 속에서 생명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의 일대기 속에서 이렇게 헤매면서 우리는 뭘 아느냐, ‘아! 이게 바벨론이고 전에 내가 좋아하는 것 주께서 강제적으로 갖다 버렸구나. 아이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구나.’ 이걸 아는 성도로서 매진한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성경으로만 풀어야 된다면 간단히 되죠. 모든 세상은 바벨론이고 짐승한테 굴복돼 있다. 그러나 창세전부터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짐승에게 굴복되지 않는다. 이런 단어로 짧게 정리돼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40.73) 11-12-30 21:15 
가락교회111215-요한계시록17장(죽음에서 출발)29강b-이 근호 목사
제 29강b

여자가 음녀고 바벨론인데 이 바벨론의 과거가 나옵니다. 이 과거가 산 넘고 물 건너서 일곱 개 산을 넘고 여덟 번째 산이 또 등장하고, 그런데 이 세상에서 아무리 파도처럼 산이 있고 골이 등장해도 이 모든 것은 항상 여자라고 일괄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9절에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이것이 아무리 이렇게 변화하더라도 음녀임이 달라진다? 안 달라진다? 절대로 달라지지 않고 바벨론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바벨론 안에서 굴곡이고 습곡이고 굴곡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은 거기에 따라서 울고불고, 울고불고 하는 거예요. 이 전체 세계를 음녀가 당하기 전에 이미 생명책에 기록한 주님께서 일부러 이 파동을 일으키십니다.

옛날에 여자 둘이 빨래를 양쪽에서 잡아당겨서 주름진 광목을 오므렸다 폈다 해서 주름을 없애는 것처럼 그것은 광목 자체는 못하고 잡아당기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처럼 주님께서 바벨론 화되기 위해서 음녀 화되기 위해서 사람들이 어느 때 웃고 어느 때 울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이렇게 굴곡을 흔들어 대는 겁니다. 이 흔들어 대는 굴곡의 실체는 뭐냐 바로 짐승이라는 겁니다. 여러 가지 짐승의 활동을 통괄해서 보면 이것이 하나의 여자, 여자가 다스리고, 여자라 할 수 있는. 이 모든 이야기는 무엇을 대비하는 겁니까? 이미 여기서 사시다가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하신 바로 생명책을 만드신 예수님의 나라와 대비해 볼 때 이 전체는 전부 다 바벨론이 되고 음녀가 되고 하나의 정체적인 변화, 안철수가 어떻고 노 철수가 어떠니 하다가 어떤 사람은 이걸 못 이겨서 부엉이 바위에서 자살하고, 노숙자 들었으면 화낼 거예요. 지는 밥이나 먹고 살지만 밥도 못 먹고 사는 데도 안 죽는데 지는 밥 먹고 사는데 왜 죽느냐, 그렇잖아요.

사람이 굶어보면 세상에 임금님 되는 것보다도 한 끼 밥 주는 것도 그렇게 감사하고 고맙게 되는 거예요.+그런데 배부르니까 딴 것도 찾는 거예요. 배부르니까 자존심 찾고 뭐 어떤 것도 찾고 하는 거예요. 그저 하얀 이밥에 소고기 국 먹고 싶다는 것이 북한 우리 동포들의 소망인데 그런 것은 생각 안 하고 뭐가 배불러서 뭐가 삐지고, 이 모든 매일같이 울고불고 하는 것이 자존심의 문제인데 여기서 사람들은 뭡니까? 개별성을 가지고 하는데 이걸 고유성이라 합니다. 이 고유성의 특징이 뭐냐, ‘나는 짐승에게 속했습니다.’라는 뜻 이예요. 나는 짐승의 일부다. 다른 말로 하면 개성 이예요. 지 자존심을 챙기려 하는 사람은 ‘나는 짐승의 일부입니다‘라는 뜻과 똑같은 거예요.

주님 안에서는 물론 어떤 사람은 눈이고 발이고 다 다르겠지만 자기 개성에 대해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라고 주님으로 인하여 지금 이 자리가 주어졌음을 주님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 점이 다르죠. 그게 세상 사람과 다른 거예요.

무슨 책이라 했어요? 생명책! 생명책을 다시 설명하면, 생명책을 만드신 분의 책에 기록됐기 때문에 거기 등록돼 있는 사람의 운명은 생명책을 이 땅에서 만드신 분의 운명과 같이 가게 돼 있습니다. 주님의 일대기 속에 이미 흡수돼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등장하는가, 짐승이 광목을 흔들어 줘야 튀어나와요. ‘여기 바벨론에 우리는 해당 안 돼.’ 하고 팅 하고 튕겨나가면 그게 바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 이예요. 어떻게 튕겨나갈까요? 딴 사람이 울 때 ‘그거 울 일인가?’ 딴 사람 웃을 때 ‘ 그게 웃을 일이야?’ 하는 사람이죠.ㅎ

어제 수요일 설교 때 했잖아요. 동화 이야기에 보니까 동물의 나라에서 전부 다 선생님 말씀을 다 듣고 있는데 한 동물은 다들 앉아있는데 하나는 나무에 올라가서 앉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동화책에 보면 어제는 제가 잘못 기억해서 그랬는데 담이 아니고 나무에 올라간 거예요. ‘기린아, 너 나무에 올라가면 안 돼.’ 했다고요. 기린이 ‘나, 나무에 올라가지 않았는데?’ 그랬다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기린은 키가 커서 서 있어도 마치 다 보이잖아요. 이런 사람이 이 세상에 튕겨 나와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 이예요.

이 전체 모든 파동이 백날 흔들어 봐야 전부 다 일괄적으로 음녀의 내부에서 나오는 변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밖에 없다 이 말이죠. 죽은 사람이 지가 살았던 시절을 다시 가서 유령처럼 가서 다시 한 번 지가 죽은 살아왔던 인생을 이미 살아난 관점에서 다시 이렇게 구경해 보는 겁니다. ‘아! 이랬였었지, 그래, 이거였었어. 아! 이 때문에 울 뻔했지, 아! 이거 때문에 웃을 뻔했지, 그런데 성령께서 인도하사 이건 울 일도 웃을 일도 아니다.’라고 이렇게 보는 거죠.

예를 들면 ‘내가 강도짓해서 사형 당했을 때 나는 그걸로 인생 끝나는 줄 알았는데 세상에, 이렇게 주님께서 같이 십자가 달릴 줄이야 내가 꿈에도 생각 못했네.’ 또 어떤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 ‘나는 키가 작아서 예수님 못 볼까봐 나무에 올라가니까 ’오늘 니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해서 나 그날 횡재 받았어. 그래서 주님 오셔서 나 돈 내놨어. 다른 사람에게 4배나 갚아주고, 뭐가 들어왔기 때문에 다 튀어나가는 거예요. 이제부터 나는 돈으로 사는 게 아니고 주님 때문에 살아,’ 이게 삭개오의 고백이죠.

그처럼 이미 현재는 없고 과거 미래를 한꺼번에 쥐고 있는 분이 지금 우리의 현재에 들어와 버리면 내 인생이 아니고 주께서 살아갔던 일대기가 같이 주님과 더불어 사는 그것이 약속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채워집니다. 그 약속의 집대성은 뭐냐 하면 ‘너 이름은 이미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느니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걸 약간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창세전에 기록된 사람을 위하여 주님께서 대롱으로 훅 불어서 이 세상에 몽글몽글하게 맺히는 유리에 녹은 뜨거운 물처럼 훅 불어대면 우리는 그 분 그 분량만큼 우리의 인생을 살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딱 떼서 ’너 불어라.‘ 하지 말고 우리의 등 뒤를 따라가야 돼요. 따라가 보면 창세전에 이름이 기록된 운명이 우리 등에 박혀 있어서 그 운명이 조성한 대로 우리는 조성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우리의 몸은 그래서 사도바울은 ’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유리조각이 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불어주는 유리조각으로 만들어진 것이 이 껍데기 같은 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사도들은 만물의 찌끼(쓰레기)처럼 살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어도 죽어가는 너희들은 우리들을 통해서 살게 하려 함이라. 이게 고린도전서에 나오죠.  고린도후서에 보면 우리가 날마다 죽는 것은 우리의 죽음으로 우리 안에 생명으로 인하여 죽을 너희들이 살게 하려함이라. 이런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두 자로 뭐가 되겠어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고 인생 자체가 선물입니다. ‘은혜이다‘와 ’은혜가 아니다‘ 할 때 은혜가 아닌 것은 나의 행함으로 돌아오지만 은혜인 것은 모든 것이 주님의 행위로서 오기 때문에 주님의 행위로 하는 이 절차에 나의 행위를 집어넣을 수 있습니까? 못 파고 들어가요. 나의 행위 ’예수 믿고 바르게 살고’ 하는 이러한 행위는 파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은혜로 시작했다가 어떻게 너희가 행함으로 끝나느냐, 사도바울이 탄식을 해요. 탄식을! 어떻게 복음으로 시작해서 행함으로 끝나느냐, 갈라디아서 4장에 절기 지킬 때 그 이야기 나오거든요. 요새는 그 이야기해야 복음 아는 사람으로 잘못 아니, 주객이 전도돼 버렸어요. 기가 찰 노릇 이예요. 그걸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분간도 못하고 그쪽이 복음이라고 가버린다니까요. 그래서 자기고 구원 못 받고 전도 한 사람해서 지옥 보내고 자기도 구원 못 받고 지옥 가고.

자, 그 다음에 14절에 봅시다.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이 이김에 대해서 돌아서면 잊어버리니까 다시 한 번 또 반복합니다. 여기서 “이기시리라, 이기신다.” 이것이 미래적인 용어로 돼 있죠? 하지만 이 미래는 ‘나’라는 현재에서 나온 미래가 아니고 누구의 현재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현재기 때문에 그건 누구 현재예요? 예수님의 현재가 되겠죠. 약속이 되겠죠. 이기신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반드시 이기게 돼 있다.’ 이 말입니다. 누굴 통해서? 연약한 우리를 통해서. 반드시 짐승을 이기게 돼 있다 이 말 이예요. 이건 변개될 수 없는 변할 수 없는 확정 사실 이예요.

이걸 만약에 나의 현재로 고수하게 되면 내 몸으로 고수하게 되면 ‘아! 주님, 내가 안 보이게 되면 지옥 갑니까?’ 또 다시 자기의 현재를 고수하기 때문에 자기 현재에서 불확실한 뭐가 보입니까? 자기 현재에서는 미래가 불확실해요. 그렇잖아요. 이런 식으로 하니까 요한계시록 보면서 자꾸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죽도록 충성하라’ 하니까 충성하려 하는 거예요. 죽도록 충성해봐야 그건 주님 현재가 아니고 자기 현재죠. 왜, 자기 행함이 나오니까. ‘죽도록 충성하라’ 하면 ‘아! 지금 피자 뜯고 있는 이것도 죽도록 충성하는 게 되는 겁니다. 왜, 죽도록 충성하는 게 현재라면 우리는 주와 함께 있으면 내 약속이 주님의 약속으로 인하여 지금 피자를 한판 시켜서 맛있게 먹고 있는 그 모습이 천사가 보기에는 뭐냐, 죽도록 충성하는 게 돼요. 지는 죽도록 피자 뜯고 있지만.ㅎ

전도라는 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전도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져 있어요. 성도가. 그래서 성도가 오줌 누는 것도 전도고 다 전도라니까요. 전도를 자기가 하려면 내 현재 전도하려면 우리는 뭘 구분합니까? 전도 하는 것과 전도 안 하는 것을 누가 구분해요? 자기가 결정해야 돼요.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우리 있는 자체가 전도로 쓰여 지는 건데.

앉은뱅이가 나았다. 전도예요? 전도 아니에요? 전도죠. 그런데 다른 사람은 ‘앉은뱅이 나은 후에 몇 명 꼬였어?’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건 전도가 아니죠. 앉은뱅이 되게 하신 것은 전도하기 위함이고 낫게 하신 것도 전도하기 위함인데 우리는 전도의 과정 속에 이미 푸욱~ 잠겨있는 건데, 그걸 나라는 놈을 따로 뽑아내서 이제 전도 시키고 이런 건 없다 이 말이죠. 그 전체가 주님의 현재기 때문에 주님의 현재에서 뽑혀 나온 게 주님의 헌금이고 주님의 기도고 주님의 전도고 주님의 봉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니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주의 말씀대로 하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봉사를 하더라도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해라, 이 말입니다. 그걸 제가 스위스 빵에다 치즈 발라 먹는 것, 치즈 퐁듀, 퐁듀라 해서 빵에다 액체 치즈 발라먹죠. 우리 자체가 퐁듀에 빠진 빵의 신세라니까요. 이미 치즈가 흠뻑 젖어있어요. 주의 말씀, 주의 약속으로 흠뻑 젖었어요. 이미 생명책에 흠뻑 젖은 거예요. 사마리아 여자 가운데서 물 뜨러 온 아줌마가 한두 명입니까? 어떤 여자는 남자 열 명 사귄 여자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 많은 여자 가운데 누구만? 남자 여섯 명 사귀고 있는 어떤 여자에게만 찾아가서 구원하잖아요. 이건 주님 맘 대로입니다. 완전히 푹 젖었어요. 완전히 치즈 퐁듀에 푹 젖어버렸어요. 그러니까 물 뜨러 와서 물동이 버리고 갔어요. 이게 말이 돼요? 물 뜨러 왔으면 물동이 갖고 가야지, 물 뜨러 와서 물동이 버리고 가서 ‘나는 신 봤다. 나는 예수님 만났다.’ 하잖아요.

그게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미 우리를 죽여주시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물탱크 다시 그릴게요. 여기 육적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주님의 죽으심이 개입해서 솔솔 빼내서 완전히 영적 사람으로 만들어 내요. 영적 사람이 돼서 육적 사람을 바라보면 맘껏 육적인 것을 언급할 수 있죠. 여자가 남자 여섯 명 사귄 것도 따지고 보면 ‘주의 약속이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냥 남자 여섯 명 사귄 것은 죄고, 용서 받은 것은 의고, 이게 아니고 남자 여섯 명 사귄 것도 영적인 것에 포함이 돼 버리면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가 되는 겁니다. 강도 짓 한 것도 은혜가 되죠. 오늘도 위험하다. 위험하다.ㅎ 지금 위험하다. 간음한 것도 은혜가 돼 버리죠. 그러면 여기서 간음했다, 안 했다 하는 것이 결국은 내가 행동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겁니다.

 이걸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12세기에 윌리엄 오컴이라는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윌리엄 오컴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주님께서 시키는 간통은 반드시 해야 된다.’라고.ㅎ 왜, 안 하면 그것이 간통이 되기 때문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ㅎ 그런데 주님이 시키신 간통을 기다린다면 그건 뭐가 됩니까? 그건 간통이 되죠.

항상 소급해서 보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에 속한 게 육이라면 영은 원인과 결과를 뒤바꿔서 원인과 결과 이 노선에 이 과정에 주께서는 그걸 인정 안 해요. 결과에 의해서 낳게 된 원인들이 있기 때문에 그 원인도 결과의 입장이 되죠. 결과밖에 없어요. 우리는 주님의 생산물 이예요.

아까 처음에 이야기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의 결과물로 인간이 나왔어요. 그래서 이것이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데 어떤 피조물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위하여 다 만들어진 거예요. 심지어 뭐까지? 악마까지. 그런데 악마는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했기 때문에 그 악마의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하는 걸 악마의 고유성이라 합니다. ‘예수는 예수고 나는 나다.’ 이 말이죠. ‘내가 믿어지면 예수 믿어주고 내가 안 믿어지고 싫어지면 그만이다.’ 이 고유성, 이 고유성을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서 악마의 고유성에 인간들이 합세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그때부터 인간들은 고유성을 갖췄습니다. 부끄럽다. 수치스럽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이 왜 부끄럽습니까? 이게 고유성 때문에 너와 나와 구별되기 때문에 부끄럼이 나온 거예요. 그 차이점! 처음에 주께서 만들 때는 부끄럽게 만든 것이 아닌 이유가 너의 고유성을 ‘부끄럽다’는 판단과 판정을 내릴 자격이 우리에겐 없어요. 내가 ‘나쁘다. 좋다.’ 내릴 자격이 없는데 이런 고유성을 갖고 있던 이 악마가 찜을 해서 ‘에라, 니도 고유성 가져라.’ 해서 줘버리니까 ‘니도 독립해라. 독자적으로 독립해라. 언제까지 하나님, 하나님 하느냐, 하나님한테서 벗어나라. 니가 하나님하면 될 거 아냐, 왜 하나님을 자꾸 섬기느냐, 미쳤느냐, 섬기게, 니는 배알도 없느냐,’ 이렇게 되니까 그때부터 자기가 자기 챙기려니까 자기 관리한다고 치마 만들어서 입고 그랬다 말이죠. 옷 입은 것도 죄라. 옷 입은 것도 정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잖아요. 그리스도 옷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옷을 입는다는 말은 옷 자체가 신분을 의미합니다. 옷을 입었던 제사장이 죽을 때 어떻게 합니까? 옷을 벗어서 주죠. 제사장 아버지가 죽고 나면 아들이 지 옷을 새로 해 입는 것이 아니고 죽은 아버지 옷을 벗겨서 아들이 입음으로써 아버지가 앉았던 그 자리에 자기가 합류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무슨 옷을 입는다? 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옷을 입죠.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그걸 예수와 더불어 세례 받는다 하는데, 옷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제사장이었던 예수님이 입었던 그 옷이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흙에 속한 형상이 뭐로 바뀝니까? 예수님이 부활한 것처럼 영광스럽고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안식을 누리죠. 주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됐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기실터이요’ 할 때는 이거는 우리를 갖고 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프로젝트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우리보고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드시 내가 함께 있는 너는 이기게 돼 있다 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

부르심을 입을 때는 탱크 다시 그릴게요. 여기서 인간이 육으로 있는 인간이 영의 인간이 될 때 반드시 부르심을 입는데 부르심을 입을 때는 기존의 이름이 없어져야 됩니다. 천주교도 영세 받을 때 뭐로 바뀝니까? 이름이 바뀌죠. 야곱이 뭐로 바뀌죠? 이스라엘로 바뀌잖아요. 왜 이름이 삭제되느냐 하면 불러 줄 때 내 이름으로 불러주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러줘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러줍니다. 그때부터 이름이 그리스도의 것이 된다는 이름으로 불러줍니다. 그리스도의 것!

그러면 이 이름은 주님이 그리스도이름을 우리에게 줘 버리면 우리 안의 이름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그리스도 이름이 돼 버려요. 그리스도 이름이 돼 버리면, 여러분, 야곱은 무슨 자라 했습니까? 빼앗는 자, 속이는 자가 되죠. 이 이름대로 되잖아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이기는 자죠. 이름대로 되잖아요. 그리스도가 와 버리면 우리 운명은 그리스도 일대기처럼 그렇게 승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이름이 우리 존재보다 더 우선이 되는 거예요. 왜,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우리에게 하나의 창조가 되기 때문에.

그 증거가 창세기 25장에 보면 나와요.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여기에 아들 이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름 없죠. 없는데 그 뒤에 나오죠. 그때 비로소 뭐가 생깁니까? 이름이 생기죠.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두 서로 같을 수 없는 두 부류를 잘라놓고 하나는 무슨 이름? 본인들이 정하고 부모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애들의 잉태할 때부터 해서 출생의 모든 과정은 부르시고 이름 붙여주는 그 분의 운명대로만 되게 돼 있어요.

창세기 25장에 나오는 이 말씀은 신약에는 그리스도로 불러주면 그리스도의 운명대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그림자로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고 구원받는 것도 누구 이름으로 기도한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은 내가 내 이름 부르는 거예요. 새로운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주의이름을 부름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은 ‘제 이름이 주님이름이고 주님이름이 제 이름입니다.‘라고 불러주는 거예요. ’제 이름 없습니다.‘라는 뜻 이예요. 다른 말로 하면 ’주여, 저는 주님 것이잖아요.‘ 이런 뜻이다 말이죠. 그걸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의이름을 부를 때 가장 관계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 이예요. 하나님 이름은 소용없어요. 하나님의 이름은 이미 한물 가버렸어요. 누가 와서? 신약에 접어들면서 하나님의 이름은 더 이상 소용없는 이름이 되었어요. 여호와, 야훼, 아무 소용없어요. 그건 이미 한물 간 거예요. 지나간 거라니까요.

옛날에 검사나 판사보고 사람들이 뭐라 했습니까? ‘영감님, 영감님’ 이렇게 불렀다고요. 일제시대 때 잔재가 남아 있어서. 요새 서른 살 먹은 여자 판사보고 뭐라 합니까? ‘영감님’하면 뭐라 할 거예요. 이미 ‘영감님’하는 그 판 자체가 질서 자체가 없어져 버렸어요. 하나님 이름을 부르느냐, 여호와가 중요하느냐, 야훼 중요하느냐, 그 의미 자체가 없다니까. 지금 구원은 주의 이름으로 통일돼 버렸어요. 주의 이름으로!!

그리고 주의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자기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주의이름이 된 사람이 주의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어요. 주님께서 만드신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만드신 이름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피조물은 만들어진 이름대로 그것이 곧 자기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제가 주의 것입니다.’라는 마음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그 덕분에 제가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런 내 안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그 능력만 성령의 능력만 제 안에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신 것이 주의이름이죠.

여기 14절 봅시다.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뭐 생각납니까?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을 뭐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군대라 하죠. 군대는 있는데 대장이 없다. 대장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군대는 조직됐는데 그 다음에 뭡니까? 군대 이름이 뭐로 돼 있다? 이스라엘은 있는데 이스라엘은 승리한 뜻인데 그럼 승리하려면 군대 만들고 이스라엘 지었을 때 그때 이렇게 한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있을 게 아닙니까? 이것을 출애굽기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라고 간단하게 돼 있거든요.

아브라함과 야곱의 언약, 이런 영적인 이런 하나님이 육적인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과 만날 때 무슨 흔적을 남기고 만나느냐 말이죠. 뭐였던가요? 바로 어린양이죠. 그래서 이 어린양을 그대로 사용하는 거예요. 십자가 외에는 육과 영이 통하는 장소가 이 세상에 없어요. 교회가 아니고 십자가라니까요.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항상 십자가 사건이 터지게 되면 이미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걸 깨닫는 그런 순간, 순간이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다 말이죠.

이스라엘 옛날 이름이 야곱이죠? 야곱이 언제 축복 받았어요? 밤이죠. 그래서 출애굽이 밤에 이루어집니다. 밤에 이루어지면서 아침이 밝으면서 그들은 새날이 되거든요. 이럴 때 밤을 강조하는 이유가 밤에 다른 사람들은 벌벌 떨고 있었는데 이들을 살게 한 것은 밤에 등장한 누구입니까? 어린양의 조치죠. 그러면 죽음의 사자들도 누굴 겨냥해서? 어린양과 더불어서 짝이 되어서 다른 것을 전부 다 죽음의 상태로 만들어 버린 거예요. 단, 뭘 부각시키기 위해서? 보석처럼 어린양의 피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 준비된 환경들이고 배경들이예요. 영화 주인공 돋보이기 위해서 보조와 배경과 사극 하려면 전부 다 옷 입고 설쳐 되잖아요. 전봇대 골라서 촬영하고 전봇대 나오면 안 되잖아요. 조선시대 때. 그런 배경들을 그렇게 짜는 것은 주인공 하나 돋보이기 위해서 세종대왕 돋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짜는 것처럼.

어린양이 뭐냐 말이죠.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세상은 밤이고 세상은 캄캄하고 세상은 죽음의 세계다.‘라는 것을 같이 동반시켜서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어린양 믿고 난 뒤에는 세상은 뭘 해도 어린양에 비하면 모두 밥이야, 이건 깜깜한 거야. 죽음의 세계야. 그걸 분명히 해나가라 이 말이죠. 그리고 우리도 진작 거기서 이미 죽은 자고, 어린양과 더불어 우리는 산자고 그래서 나온 사람을 그들을 죽음에서 이겼다 해서 이스라엘이라 하는 거죠.

그러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세상이라 하는 것이 밤이 되고 낮이 됐죠. 낮이 되었지만 어린양이 떠오른 이상은 백날 햇빛 찬란하듯이 2시 45분 그렇게 대낮 같이 밝아도 그건 뭐가 돼요? 밤 이예요. 십자가 생각하면 모든 게 깜깜한 밤이라니까요. 토요일만 밤이 좋은 게 아니에요. 예수님 살아계시면 전 세상이 어둠이고 미국 이민가도 어디 가도 그건 전부 다 밤이고 어둠이라는 거예요. 그 가운데 어린양 믿고 십자가 믿는 사람 있으면 그건 빛의 자녀죠. 에베소서 5장에 ‘빛의 자녀여 죽은 데서 일어나라‘ 하잖아요. 그걸 문법적으로 아무리 해석해 보세요. 그 해석이 나오는가. 죽은 자한테 일어나라 소리를 못해요. 뫠, 죽은 사람은 이미 청각 기능이 뇌사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여기(귀) 음파가 와도 뇌에서 해석이 안 된다니까요.

‘죽은 자여 일어나라’ 이게 왜 안 일어나지? 죽었으니까 안 일어나죠. 그런데 성경에 뭐라 합니까? ‘죽은 자여, 죽었나? 살았나?’ ‘죽었습니다.’ ‘일어나라’ ‘예’ 그러면 결국 죽음과 삶이라는 것은 우리로서는 이해 안 되고 어디 안에서만 이해돼요? 말씀 안에서만 죽음과 삶이 새롭게 정립되는 사람, 그 사람이 성령 받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말씀 안에서 세상을 재편성해서 다시 보는 것, 누구 중심으로? 어린양 중심으로. 중심으로 본다는 말은, 어린양을 주로 높이기 위해서 설치돼 있는 하나의 세트장, 이 세상 전체가 세트장, 청와대부터 북한도 세트장인데 세상을 세트장으로 본다는 말은 확실한 주인공은 따로 있다. 누구라? 어린양이다. 그러면 어린양 있다는 말은 어린양의 피만 있으면 누구든지 그 피만 앞장세우면 그 사람은 저주, 지옥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그 원칙은 지금도 그대로 세상 끝날까지 변함이 없어요. 그대로 이어가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라,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했잖아요. 이걸 또 육적인 사람은 ‘보는 데 몇 번 봅니까?’ 개기일식 봅니까? ‘몇 시간 봐야 돼요? 하루 몇 번 봐야 됩니까?’ 이렇게 나온다는 말은 또 말씀 밖에서 말씀을 시찰하려 하니까 세세한 율법이 또 동원되는 거예요. 말씀 안에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여 보게 하십니다. 주여 말씀대로 보게 하십니다.’ 이래 되는 겁니다. 말씀 안에 들어가면 내가 하는 게 없어요. 내가 뭘 해도 ‘주여 이것도 말씀대로 된 겁니다.’ 이렇게 됩니다.

어린양을 보라 한다고 안 보다가 돌아서 본다고 그게 믿어집니까? 산을 봐도 어린양 보는 것이고 들을 봐도 어린양 보는 것이고. 그 다음에 봅시다. 부르심을 입었다 하는 것은 이미 창세전에 준비돼 있는 것을 호명해 줄 때 뭘 버리라 하십니까? 지금 불러 줄 때 내가 갖고 있는 내 이름을 버리는 거예요. 내 이름을 버린다는 말은 세상에서 만들어진 존재는 아니고 비로소 내 본래의 모습을 발견한 거예요. 창세전에 만들어진 내 모습이고 새롭게 이름이 바뀌게 되죠. 그래서 그 이름이 있는 이상은 내가 이름을 관장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 이름대로 이기고 또 이기고 또 이기고 또 이기게 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이기는지 이기는 방법에 대해서 봅시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아멘, 얼마나 자신만만했으면, 죽어도 괜찮아.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 같아요. 어떻게 자신만만합니까? 이렇게 내가 죽고 싶어 죽는 게 아니고 내가 믿음이 좋아서 죽는 것이 아니고 죽게 하시는 그것이 이김의 하나의 증거로서 사용되어진다는 겁니다.

내가 평소에 밥 먹는 것도 이기는 것의 일종이었고 밥 먹는 것이나 만두 하나 먹는 것이나 내일 죽는 것이나 다 같은 일이 되는 거예요. 만두 하나 잡쉈잖아요. 그 일이나 만두 먹는 것은 더러운 일이고 죽는 것은 고상한 일이고, 이게 아니고 만두 먹는 일이 죽도록 충성하는 일이고 죽는 것도 만두 먹는 일과 똑같은 일이예요. 모든 것이 말씀 안에서는 어린양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성령께서 주의 증인되게 하기 위해서 활용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이것이 사도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뭐냐,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과거가 만들어진 현재는 이걸 치워버리라 말이죠. 과거가 만들어진 현재는 없고 현재에 뭐가 들어갑니까? 주님이 현재만 들어왔기 때문에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이 과거는 주님 안에서는 필요했던 과거였고 필요했던 과거이상으로 미래는 주님의 준비된 약속된 모든 축복은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지게 돼 있어요.

거지 나사로가 천당에서 한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서 뭐했습니까? 거지가 돼서 앞에서 ‘아브라함 최고!’ 아부 성 발언을 했어요? ‘아브라함, 아브라함.’ 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반겨줬습니까? 그냥 아파서 긁었고 근지러워서 긁었고 없어서 얻어먹었고, 개 쫓아낼 힘이 없어서 개한테 몸을 맡겼을 뿐이지, 뭐 ‘아브라함, 아브라함, 아브라함, 사나 죽으나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최고야.’ 이러지는 않았다니까요. 그래도 죽어서 어디 품에 안겼습니까? 아브라함 품에 안겼죠. 그게 아브라함 언약이 일부였다 말이죠. 사는 것이.

부자는 지 물은 지가  챙기던 버릇이 그 버릇이 지옥 가서도 그런 거예요. 지옥 가니까 물이 없어요. ‘물 좀 갖다 줘.’ 나사로가 다방 레지입니까?ㅎ 왜 지한테 물을 갖다 줘야 되는데? 그럼 왜 나는 물이 없는가, 모든 것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는 그런 사람들만 모이다 보니까 자기 본색을,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들을 다 모아놓은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도움 받지 못한 자들을 다 모아놓은 거예요. 심심하지는 않을 거예요. 똑똑한 인간들 모여서 전부 다 행함 자랑을 지옥 가서 이야기하라 그래요. 나는 기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지옥 가서 실컷 하라 그래요. 나는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그래 지옥 가서 많이 하세요. 지옥 가서 지 자랑하면서 영원토록 실컷 이야기해봐야 목말라서 물 한모금도 없는데....

그 사람들이 왜 지옥 가느냐. 나빠서가 아니라 성질 더러워서가 아니라 단 한 가지 주님의 생명책에 명단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소리하면 엎친데 겹친 격으로 그 사람들이 도끼 들고 덤빕니다. ‘니는 뭔데 생명책에 기록됐는가,’ 이건 나한테 달려들 문제가 아니죠.

15절 봅시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천사가 하는 일이 뭡니까? 천사들은 누굴 섬기죠? 주님을 섬기잖아요. 주님을 섬기는데 왜 이런 것을 보여주고 왜 이런 이야기를 사도요한에게 합니까? 천사가 ‘니나 내나 다 같이 주님 섬기고 있잖아.‘ 해서 이 말씀을 준 거예요. ’천사가 보는 안목을 이제 너도 볼 줄 알 자격이 있어.‘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가 이 성경에서 보는 안목은 성령 받은 성도가 어떻게 됩니까?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주께서는 이러한 늬앙스를 가지고 세상을 보게 만들어 내고야 말죠. 반드시. 천사가 보는 안목, 사도요한이 보는 안목이 더 이상 그들의 안목이 아니고 우리들의 안목으로 성령께서 보게 하시며 말씀을 그렇게 보도록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은 바벨론이고 모든 것은 음녀다.

음녀의 약속은 배제돼 있죠. 16절 봅시다.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이 짐승과 그리고 음녀의 이러한 다툼은 일종의 파동의 연속으로 보는 겁니다. 양쪽 다 누가 조정합니까? 주님이 조정하는데 이 음녀는 이스라엘 역할이고 짐승은 누구 역할을 하느냐 하면, 바벨론 역할을 하죠. 이것은 옛날에 유다 나라 망할 때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하죠. 그런데 이스라엘을 예레미야, 이사야 보면 누가 바벨론을 통해서 망하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둘이 빠방 망하게 하죠. 그 이유가 이렇게 음녀를 망하게 하고 그러면서 짐승도 망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원리 원칙에 주님께서 개입을 하게 되면 그들의 원함, 그들이 소망 같은 것은 절대로 주님 앞에서 성취될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천사가 이야기하죠. 너희들이 이 세상에 원하는 것이 있더라도 다 주님의 허락돼야 되는데 너희들이 언제까지 너희들이 소원을 위해 헤헤 거릴 수 있는 입장은 절대로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 양쪽 다 망하게 하는 겁니다.

17절에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또 네가 본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이래 돼 있죠. 한번 정리해 봅시다.

지금 요한계시록의 스토리가 어떻게 됐느냐 하면, 땅의 세계가 있죠. 잘 들어 보세요. 총 정리하니까, 땅의 세계란 누구만 삽니까? 인간들만 살죠. 그러면 여기에 짐승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용이 있습니까? 용 없습니다. 뱀 있습니까? 뱀 없습니다. 아무것도 신화적인 것은 없습니다. 뭐가 있어요? 인간들만 있다고 여기죠. 여기에 누가 등장합니까? 예수님이 오시죠.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에 몰아놓고 누굴 만나게 하죠? 악마, 사단을 만나게 하죠. 사단을 만나게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오는 여기에 갑자기 예수님이 있는 영적 활동 내에 영적 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들만 살고 있고 교회도 인간들이 만들고 인간들만의 세계라 하는 곳이 갑자기 예수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기이한 영적 활동, 그러니까 짐승과 악마와 마귀 같은 것들이 귀신이 나오고 하는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인간들만 있는 땅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런 활동을 보여도 그것조차 무슨 활동이다? 그냥 사람의 활동이라 보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지만 다시 집에 돌아가고 보통 회사에 가서 만나면 누구 만남 이예요? 마귀 만남입니까? 사람 만남이잖아요. 그런데 거기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이거는 그 사람이 예상 밖의 발작 증세를 보입니다. 발작 증세. ‘엄마, 엄마도 이제 복음 들어.’ ‘싫다. 평생 동안 교회도 안 가고 절에도 안 갔는데 이제 다 늙어서 무슨 교회를 가.’ 하고 그렇게 어질고 착한 엄마도 과다한 발작 증세를 드러내죠. 저것은 어떻게 인간으로는 해석이 안 되는 다른 걸 가지고 해석을 해야 될 그런 판국이라 말이죠.

그럴 때 여기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에게 성령이 온다 했죠? 오게 되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에게도 예수님이 일대기처럼 남들이 발작 증세를 일으킬만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짐승이 어떠니, 이런다 말이죠.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에 의하면 원래 이 땅의 세계는 인간밖에 없었는데 여기 바다에 뭐가 살고 있느냐 하면 짐승이 살고 있다는 거예요. 짐승이 바다에 살고 있는데 짐승이 인간세계에 건너왔는데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짐승인 줄 모르고 그냥 세상 사람은 원래 이렇게 산다고 생각하고 이것들과 합체가 돼서 하나의 거대한 바벨론, 음녀가 된 거죠. 그런데 짐승이 들어와서 한참 되다가 음녀가 짐승을 타고 까불다가 도리어 짐승이 나중에 음녀와 서로 싸우고 치고 박고해서 이제는 짐승의 나라로 지배하고 통치하는 그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과정은 앞으로 그렇게 된다는 게 아니고 이미 예수님 일대기 속에 이 일이 벌써 하나로 농축돼 있어요. 지금 예수님이 일대기를 팍 터뜨리면 성경 전체에 다 퍼지거든요. 예수님이 처음 왔을 때 병을 고쳐주는 좋은 분이라고 하다가 사람들이 그분을 환영하다가 거기에 짐승 같은 놈들이 바리새인이 등장하니까 대중들은 누굴 좋아합니까? 바나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잡아가라 했잖아요. 이미 단짝이 되었어요. 됐는데 거기에 로마 나라가 와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렇게 여호와 잘 섬기고 바리새인들이 바르게 사는 그 나라를 참혹한 방법으로 로마가 완전히 작살냈잖아요. 유다 나라 작살냈죠.

그럴 때 유다 입장에서는 누가 짐승입니까? 바로 로마가 짐승인데 따지고 보면 로마만 짐승이 아니고 로마 나라도 누가 다스려서? 짐승이 그렇게 했고 그렇게 억울하게 당하고 몽땅 당하는 예수님 죽인 유다 나라도 누가 다스리고? 결국은 짐승이 다스리는 나라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누구만 알아요? 성령 받은 성도만 알게 돼 있다 이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비밀로서 그냥 쭉 가는 거예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로마(요한계시록에서 현대판 바벨론)조차도 결국은 하나의 음녀로서 이스라엘 같은 음녀로서 그렇게 판정이 나버린 겁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왜 이렇게 스토리를 전개하는가, 그것은 전부 다 결국은 사람에 대한 공격이 아니고 어디에 대한 공격입니까? 바다에서 올라온 옛 뱀, 짐승에 대한 마지막 공격이 남아 있어서 이전에 모든 나라를 무슨 나라로 만듭니까? 짐승의 나라, 짐승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성도들을 이 땅에서 죽은 성도를 다시 소급해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살게 해서 성도를 괴롭히고 성도에게 힘들게 하고 그에 대한 복수를 마지막 때 퍼붓기 위해서 성도로 하여금 짐승과 한 통속에서 살도록 그렇게 조치를 해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속에서 ‘아! 모든 것이 말씀대로, 17절에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모든 것이 주의 말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복음을 전할 때 나오는 반응을 한번 보세요. 복음을 전할 때 반응이 ’저런 소리 할 사람이 아닌데 그동안 정을 봐서라도 저렇게 발작을 하는 게 아닌데, 저거는 인간의 힘이 아니다.‘ 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느낍니다. 마치 우리가 ’제가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이 제일 좋아요.‘라는 말이 나의 힘이 아니듯이 저쪽도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이쪽도 우리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저쪽은 악령의 힘으로 살아가고 우리는 주의 힘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사울이 다윗을 만날 때 악신 들릴 때는 자기도 자기 맘대로 못했어요. 그래서 해놓고 뭐라 그러느냐 하면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안 그럴게.’ 하고는 또 창 들고 악신이 심하게 부려버리면 창 들고 다윗을 죽이려 한 것은 사울이 아니고 사울 속에 메시야를 죽이려는 메시야에 대해 악이 받쳐서 메시야는 무조건 죽여야 돼.‘라는 그 힘에서 인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가 사울이기 때문에 다윗을 향하여 못을 박으려고 했고, 다윗이 피할 수 있는 것도 ’니는 지금 죽으면 안 돼,‘라는 성령의 힘에 의해서 다윗이 피한 거예요. 결국은 인간은 영적 싸움에 말려든 꼭두각시 같은, 꼭두각시 알죠? ’사운드 오브 뮤직‘에 영화에 보면 나오는 줄리  앤드류스 선생하고 애들이 인형놀이 하는 것처럼, 결국 영적 세계에 있는 꼭두각시처럼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가 아닌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는 그런 세상이 십자가를 통해서 파악될 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마땅히 죽어야 될 이유를 이제 알았습니다. 그리고 죽고 난 뒤에 심판이 있다는 그 이유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주의 사람 되었사오니 내 사람으로 전환되지 않도록 날마다 성령으로 계속 책망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