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11215-요한계시록17장(죽음에서 출발)29강a-이 근호 목사 제 29강a
요한계시록 17장 1절에 보면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오고 그 다음에 음녀가 받을 심판이 나오죠. 음녀, 음탕한 여인, 음녀는 심판과 관련돼 있다 이 말이죠. 음행으로 포도주에 취했다. 음녀에서 나오거든요. 이런 용어들을 우리 인간들이 요한계시록 17장을 펴놓고 ‘이게 뭔 뜻입니까?’라고 물을 경우에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왜냐 하면 음녀라든지, 심판, 또는 그 유명한 짐승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 몸에 달라붙을 때 나오는 표현이 그리스도의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몸이 여기 있다고 합시다. 있을 때 우리 인간이 보통 그리스도를 보면 그리스도는 보통 사람이죠. 나사렛 예수고.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을 처음부터 메시야로 알은 게 아니고 그냥 어떻게 잘난 체 하다가 까불다가 죽었던 사형 당했던 그냥 보통 사람 이예요. ‘그런 인간이 메시야라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라고 아주 정색을 했던 사람입니다.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을 볼 때는 그냥 평범하고 또라이죠. 미친 자기 광신도인데 그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아무것도 아니다.’ 해서 이 사람들을 조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하는 말이 ‘나사렛 예수’라고 구체적인 나는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죠. 나사렛 동네, 나사렛 예수니까 나사렛 예수 이거만 해도 나사렛 청년이 한 둘이 아니잖아요. 그 청년들 중에 하나라고 하는 그 예수가 지금 사실은 ‘하나님이고 너를 창조했고 너의 구원자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이걸 알았을 때에 ‘아! 내가 몰랐던 걸 하나 알았구나.’ 이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죠? 뭐냐 하면 그러면 내가 그동안 확신 가지고 했던 확신의 장바닥, 바닥 자체가 완전히 뜯어내야 될 문제예요. 철거해야 될 문제라 말이죠. ‘야, 내가 처음부터 하나님 잘 믿고 죽으면 부활되고 천국 간다.’라고 생각했던 그 자체가 막상 예수님을 접하고 난 뒤부터는 이 자체가 문제가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러면 두꺼운 성경책에 있는 모든 예언서, 모든 말, 단어 이거는 우리한테 쪽 몰려올 문제가 아니고 이 성경들 단어가 어디로 몰려가야 됩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몸에게 달라붙을 때 비로소 숨어있는 본래의 비밀적인 의미가 드러나는 겁니다. 예수의 몸! 우리한테 먼저 오면 안 되고.
그래서 우리는 이 비밀을 알려면 우리가 예수님 앞에 가서 예수님과 연결돼 있는 예수님 주변에 배치돼 있는 성경 말씀의 용어를 알고 난 뒤에 다시 우리에게 가져와야 우리가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관건은 뭐냐 하면, 우리의 몸이 어떻게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느냐 이 문제가 있잖아요. 이 문제는 우리가 갈 수 없고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성령께서 와서 예수님의 자기 세계에 여기에 합류시켜 주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시내 산꼭대기가 그냥 높은 산이 아니고 그곳이 딴 세계라는 게 드러나죠. 어떤 딴 세계냐 하면 40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그러면 부처처럼 부처가 도 닦으면 해골만 남아 있잖아요. 그렇게 돼야 되는데 삐쩍 말라야 되는데 이거는 뭐 그게 아니고 얼굴에 광채가 났잖아요.
그러면 저쪽 위 동네에서 산다는 의미와 아래 쪽 인간들끼리 사는 의미가 이거는 근본적으로 출발점 자체가 이렇게 엮일 수 없는 거예요. 엮일 수 없다는 말은 지상의 사고방식 가지고는 그걸 아무리 숭고하고 성스럽고 빡세게 기도하고 빡세게 헌금하고 봉사해봐야 전부 다 헛짓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는 거예요. 아, 이걸 생각하면 참, 한국교회 안타까워요. 절 지어놓고 예수한테 부처한테 빈다고 천당 가는 게 아니거든요. 예수 믿는다 해서 어떤 예수냐 하면 이상한 예수 막 나온다 말이죠. 사도바울이 봤던 그 예수가 아니고요.
그래서 성령을 받게 되면 그 뒤에 모세가 수건 덮고 왔다. 할 때 그 수건은 모세에게 나온 수건이잖아요. 지상에서 만들은 수건이 아니고 하늘나라 광채가 입혀진 수건을 덮었을 때 그 수건이 무슨 역할을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나라와 육적인 나라 사이에 우리를 용납하는 성령의 그리스도의 영의 역할을 한다 말이죠.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는 뭐가 있느냐, 자유 함이 있느니라. 그 자유가 뭐냐 하면 죽어도 좋다는 거예요. 죽음의 세계.
그래서 여기서 오늘도 공식 하나 적겠습니다. 이게 우리들의 아름다운 약속 이예요.ㅎ 어떤 공식이냐 하면 이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하고 예수님도 하늘나라에 있을 거라고 하는데 이 공식은 성립 안 됩니다. 이 공식은 실패고 착각이죠. 진짜 공식은 뭐냐 하면 이미 죽었을 때, 죽음= 안식,(편안), 굉장히 편함, 최고의 행복이죠.
그게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보면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쉰다 이 말이죠. 평안하게 쉬는 거예요. 평안하게 쉬는 것이 이 세상에 있다? 없다? 이 세상은 없고 주로 예수님과 함께 죽게 되고 죽은 나라에서 안식을 얻는다고 요한계시록에 돼 있거든요.
그럼 이쪽 시점이 최고의 행복, 최고의 축복이 되는 겁니다. 이미 축복을 본 입장에서 다시 세상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축복과 행복을 주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끌고 다니셨구나.’ 그러면 이미 이 목표에 도달된 거죠. 도달하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우리 인생을 다시 보게 하는 방법이 주님께서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이미 성령 안에서 ‘너는 이제 쉬어도 돼, 너는 합격이야.’라고 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어떤 행복과 돈이 있더라도 죽어서 주 안에 편안한 행복보다 더 나은 행복은 없어. 이 세상에서는 꿈도 못 꾸는 너무 좋은 그런 행복의 영원함이 바로 주와 함께 편안하게 안식을 누리는 시점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시점에 이미 성령 안에서 도달한 사람은 그 다음부터는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도대체 나 같은 인간이 어떠한 작업이 다가와서 나로 하여금 요 길로 조 길로 샛길로 다 빠져서 어떻게 여기 이미 안식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는가.’하는 그 과정을 소급해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되는 겁니다. 소급해서 보게 되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우리 잘난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이미 기록됨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죠. 기록됨 때문에!!
어제 제가 수면 내시경을 했거든요. 수면 내시경을 하고 나서 옆으로 누워서 마취가 돼서 잠에 푹 빠졌는데 나중에 간호사가 깨워서 일어났어요. 깨어나면서 제가 느낀 것은 세상에 이렇게 죽는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줄 상상도 못한 거예요. 세상에 이렇게 좋은 건데, 왜 그동안 안 죽으려고 그런 쓸데없는 짓을 다 했느냐 말이죠. 그런데 그냥 자살하면 안 되는 이유는 자살하게 되면 주께서 선한 손길로 인도하는 주님과 함께 하는 죽음이 아니고 이거는 마귀가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고통스럽고 죽고 난 뒤에는 더 고통스럽죠. 부자 보세요. 부자가 지옥에 가서 물 한 방울 없어서 애쓰잖아요.
그러니까 그럴 때는 하나님께서 죽이기는 죽이시는데 그냥 죽으면 안 되고 뭔가 하나님 쪽에서 조치가 있는 그런 죽음이 돼야 되는데 그런 조치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작업을 통해서 우리를 요리 조리 축구 선수가 공 몰듯이 ‘그리 가면 안 돼, 요리 가야 돼,’ 계속 몰고 다니신 거예요. 그 몰고 다닐 때 인간이 자기가 관리 못합니다. 인간이 자기가 관리 못하고 이 목표점을 아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주님의 영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공을 요리조리 몰듯이 몰아세우는 겁니다. 그 몰아세울 때 그때 중요한 것은 뭐냐, 그러면 나처럼 생명책에 기록되어서 천국 가기로 몰아세우는데 그럼 나 같지 않은 사람은 누가 모느냐 하는 겁니다. 그때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짐승, 사단이 등장하는 거예요.
짐승, 사단이 대체적으로 내세우는 게 뭐냐 하면 바로 교회 충성 이예요. 왜냐 하면 교회는 살려고 오는 사람 이예요. 현재 내가 살아있는 나를 천국 가서 더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누가 누구에게 작용하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행함을 집어넣고 행위를 집어넣고 온갖 좋은 것은 다 끌어 모아서 집어넣어야 되는 거예요. 십자가 집어넣고 언약도 집어넣고 복음도 집어넣고 십자가 마을도 한번 들어가 봤다가 온갖 것 다 집어넣어도 지옥 갑니다.
이쪽에 주님께서 성령이 직접 와 버리면 구태여 내가 신앙적으로 종교적으로 어떤 행위를 나한테 가미하고 관리해서 구원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어서 모세가 산 위에서 밥 먹을 때 ‘하나님, 밥 먹어도 될까요? 안 될까요?’ 이 문제를 물을 이유가 없죠. 이미 그 산 위가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물도 마시고 이런 필요가 없잖아요. 거기에서 옛날 산 밑에서 하던 행세, 자기 행세 있잖아요. ‘자, 시간됐다. 이제 약 먹어야지, 시간됐다, 밥 먹어야지.’ 그런 행세를 산 위에서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안 하죠.
그런 자기의 모든 행위와 모든 행동과 그동안 자기를 살리던 작업 같은 것은 그게 아무 쓸데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모세가 산 밑에 다시 내려와서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 몸에서 나는 광채 자체도 다를뿐더러 생활 습관도 어떻게 됩니까? 다르죠. 거기다가 모세는 ‘그저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왜, 본 게 있기 때문에. ‘그저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이 은혜로 살려준다. 자비와 긍휼, 하나님은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주실 자에게 긍휼을 주시는데 그 혜택을 너희에게 주었다.’ 만날 하나님 이야기하는데 땅 밑에 애굽에서 올라온 백성들은 뭡니까? 때 되면 먹어야 되고, 뭔가 심어야 되고 뭔가 거둬야 되는데 당신 같이 하나님 믿는다고 그럼 우리가 애굽에서 먹던 맛있는 수박, 부추 이런 것들은 어디서 먹는데? ‘그런 것 필요 없어. 하늘나라 가면 먹는 것 필요 없다니까.’
그 원망과 다툼, 물이 없다고 원망했을 때 모세는 ‘물 없어도 괜찮아‘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말씀이 요리조리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에 현재 불 기둥과 구름 기둥 자체를 말씀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백성들은 ’물 달라. 고기 달라.‘ 하니까 모세는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면 물주시고 고기 주시고 만나 주시는 그것도 그것이 만나가 아니고 양식이 아니라 말씀의 일종이라는 거예요.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가는 말씀의 일종, 말씀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지, 이게 만나는 많이 먹으라고 준 게 아니에요. 그래서 만나는 안식일만 되면 만나는 끊어져 버려요.
안식이 무슨 날입니까? 안식일은 안식일 아닙니까? 안식을 위해서 중간 매개체로 임시로 주는 것이 만나고, 메추라기고 물이다 이 말이죠. 이 말을 신약 성경대로 하면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계속 영원히 살 수 있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알았나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우리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리라.‘ 이 말은 내가 나의 행동을 믿는다? 안 믿는다? 절대로 내 행동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설교 끝에 행함이 튀어나오느냐 말이죠.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바로 비로소 짐승, 악마란 의미가 여기서 튀어나오는 겁니다. 제 논리가 무리가 아닌 이유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17장 3절에 나옵니다마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할 때 제일 먼저 성령께서 데리고 어디로 데려갑니까? 광야로 가죠. 3절에 보면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이것은 사도요한이 지금 예수님의 종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짐승이라든지, 음녀라든지, 심판이라는 그런 용어가 이것이 우리가 성경 책 펴놓고 한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돼 있는 이러한 심판,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의미를 구축하고 의미를 파악하라고 주님께서 성령께서 다뤘던 방식대로 지금 사도요한을 다루고 있고 또 우리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니가 사는 곳이 어디지?’ ‘서울’ ‘아니야 광야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요?’ ‘예수님도 광야에 살았기 때문에.’ ‘에이, 예수님 나사렛 동네, 갈릴리 동네 살았잖아요.’ ‘아니야, 그곳이 광야야.’ 그게 광야라는 거예요. ‘아유, 집이 왜 광야입니까? 풀도 나는데.’ 광야 때 사단을 만나잖아요. 처음에 성령에 의해서 광야에서 마귀를 만나면 그때부터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귀신이 있다는 말은 그 장소가 뭐다? 광야라는 의미입니다. 귀신이 있는 곳이 광야라는 의미가 돼 줘야 예수님의 공생애에 편입된 그러한 새로운 지평, 그러한 삶의 바탕을 같이 공유하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말은 어렵지만 이해되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니까 우루루 성경에 있던 용어들이 뒤따라서 오는 거예요. 예수님 가까이에서 비로소 모든 개념들은 의미가 되살아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광야에 보냈더니만 거기 누가 나타났다? 마귀가 나타났죠. 그렇다면 어떤 세트냐 하면 예수님, 광야, 마귀, 거기에다 성도가 들어가 버리면 거꾸로 이제는 성도가 사는 곳이 광야가 되고 광야에 짐승 있고, 이렇게 성도로 하여금 광야에 짐승 만나게 하는 조치는 누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성경 안속으로 이미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전에는 성경 바깥에서 ‘여기는 서울인데 서울서 성경공부 어떻게?’ 이랬는데 광야에 들어가서 성경을 보는, 그래서 그렇게 되면 뭐가 눈에 띄느냐 하면 마귀의 정체가 드러나죠. 그렇게 해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항상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일곱 교회에. 전부 다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이야기하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나’라는 인간은 뭐하고 접근이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과 접근되지 못하고 성령이 안 오면 항상 내 몸 중심으로 예수도 성경도 전부 다 내 몸 중심으로 풀어헤치려고 그렇게 애를 쓴다 이 말이죠.
그럼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만 천국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고 바깥에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오셔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데 우리 몸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를 들어가게 하시면서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성령께서 오셔서 겪었던 모든 예수님의 일대기를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는 여기다가 다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이렇게 그려보겠습니다. 여기 탱크가 있고 그 다음에 여기도 탱크가 있는데 밑에는 연결돼 있어요. 이거는 육이고 이거는 예수님의 세계, 영이라 합시다. 처음에 육적인 것이 이만큼 채워져 있습니다. 이걸 (A)상태이다가 물이 점점 빠져서 옆 탱크로 들어가게 되죠. 그럼 (B) 상태 같으면 빠져나간 것이 중간이니까 육은 반은 빠지고 영은 반 채워졌고 (C)상태에서는 육은 완전히 빠져버리고 영의 세계가 다 채워져 있다 이 말이죠. 요 빠져나가는 파이프, 빠져나갈 때 그냥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죽음’을 통해서 이렇게 빠져 나온다 이 말이죠.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바로 육으로 오셔서 주가 되실 때 그냥 하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주가 됩니까? 아니죠. 이 땅의 죄 있는 사람의 몸이 돼서,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이 되셔서 성령이 오셔서 육신의 몸에서 영광의 몸으로 갈라지는 요 예수님의 일대기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켜 버리면 예수님께서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들어갈 때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죽었잖아요. 이게 십자가의 의미인 거예요. 죽었다는 말은 아무도 자력으로 올 수 있다? 없다? 갈 수 없는 세계에 주님께서 최초로 부활의 첫 열매로서 간 거예요. 그러니까 부활의 세계 있고, 예수님께서 그쪽으로 빠져 간 게 아니고 부활의 세계는 예수님이 빠져나오면서 새롭게 발생된 세계가 부활의 세계입니다. 이런 게 참 어려워요.
우리는 공간적으로 하늘나라 있고 여기서 그냥 예수님도 하늘나라 있고 물탱크 이쪽, 저쪽 다 있는지 알지만 이 탱크는 주님께서 만들어야 만들어지는 거예요. 만들어야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부활되기 이전에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에녹 같은 경우는 아예 죽음을 보지 않고 갔죠. 엘리야 같은 사람도 시체 없죠. 불수레 타고 올라갔죠. 그리고 엘리사가 어떤 과부의 아들도 죽었는데 살려냈잖아요. 그리고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도 살려냈고 베드로의 장모도 죽은데서 살아났고, 그것 말고도 성경에 보면 죽은 자가 살아난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그럼 시기적으로 예수님보다 그 사람들이 먼저 부활 된 겁니까? 아니죠.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부활의 첫 열매가 누구예요? 에녹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부활의 세계라 하는 것은 현재 있는 세계가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 죽어서 만들어진 완벽한 세계입니다. 최초의 세계입니다.
왜냐 하면 부활의 세계는 그냥 죽은 사람 모이는 곳이 아니고 모든 언약과 모든 말씀이 완성 상태에 놓여 있어야 그게 부활의 세계입니다. 모든 말씀을 지키면 뭘 받게 돼 있습니까? 복을 받게 돼 있어요.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받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든 모세든 그 사람들은 죽어서 부활되기 위해서 간 게 아니고 음부에 갔죠.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할 때 그들은 비로소 부활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가 오기를 기다린 것은 그 이유예요. 죽은 자로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고 ‘다 이루었다’ 할 때 그 사람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의 세계에 참여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같이 했다고 해서 아브라함도 부활이 첫 열매가 아니고 예수님만 부활의 첫 열매고 그 다음에 예수님 때 믿었던 그 사람들이 그 다음 단계 그 사람들이 그 다음 열매고 그 다음에는 아직 죽지 않은 우리가 부활되면 우리는 그 다음이고, 순서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먼저 죽었던 사람이 먼저 일어나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지만 천국은 지옥의 파편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천국이라 하는 것은 하늘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부터가 인간들이 큰 오해를 하고 있어요. 여기서 어려우니까 설명을 좀 하겠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몸에서 어떻게 해서 이런 개념이 달라붙느냐 하는 이야기를 제가 대충은 했는데 예수님의 몸에 붙어있던 짐승이라는 의미, 음녀라는 의미는 조금 있다가 하겠지만 그 의미를 알기 이전에 우리 인간의 몸부터 생각해 봅시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의 몸은 왜 생각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부활의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경로와 과정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성령께서 육신의 몸인 예수님께서 영광의 주가 되셔서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셨다 하는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우리는 육신의 몸이라는 그것은 가위로 잘라버리고 결과만 움퍽 소지해서 나도 거기에 같이 걸쳐보려고 그렇게 하는 버릇들이 있어요.
주님께서는 과정이 중요한데 우리는 결과물만 얻으려한다 말이죠. 회사 처음에 취직한 신입사원들 보면 버릇이 뭐냐 하면 선배들이 팀 이뤄서 프로젝트하면 지는 아무것도 안하는 게 선배들 덕분에 됐거든요. ‘아유, 이러면 사장님이 우리 팀 다 잘했다’고 보너스 주니까 보너스 받았는데 만약에 선배가 결근했다든지 다른 직장 가버리면 ‘어, 먼저 프로젝트 니가 해봐라.’ 하면 ‘못해요.’ 못하죠. 결과는 얻었는데 막상 과정은 뭔지 몰라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누구십니까?’하면 그건 모르는데 ‘구원 받았습니까?’ ‘예,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받았어요?’ 하면 ‘몰라요.’ 이거와 똑같은 거예요. 어디 가도 자꾸 한 수 배우려 하는 겁니다. 그 버릇은 뭐냐 하면 교회 오는 것은 점쟁이한테 하듯 하는 거예요. 점쟁이한테 가서 ‘요번에 결혼식 어느 날짜에 하면 되고 이렇게 하면 된다.’ 하면 ‘예, 이번 2월 29일 날 결혼식하면 됩니다. 그러면 잘 삽니다.’ 그러면 2월 29일 날 결혼식 하려고 하죠. 그런데 진짜 알아야 될 것은 점쟁이가 어떻게 점을 쳤기에 점괘가 2월 29일 날 나왔느냐, 그 과정을 알아야 된다니까요.ㅎ우리는 딱 열매만 따먹으려 하지 말고 그 절차가 같이 전체가 주어질 때 우리는 ‘아! 이래서 내가 죄인인데 예수님 피 때문에 구원받았구나.’라는 걸 아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십자가마을에서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내가 죄인인데 주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이렇게 하니까 뭐만 달랑 가져가느냐 하면 ’나는 죄인인데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 그것만 가져가는 거예요. 그러면 묻죠. ’당신은 어떻게 해서 죄인이냐?‘ ’모르죠.‘ 그냥 결과만 외워가지고 있는 거예요. ’어째서 죄인이냐‘ 하면 ’내가 왜 죄인이지, 그냥 죄인이라 하니까 죄인이겠죠. 그냥 나는 말 안 되면 믿습니다.‘ 하고 끝나버려요.
혹독하게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몸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성령께서 주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마귀를 시시하게 봅니다. 마귀는 우리도 이기는 존재로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은 마귀들이 벌떼 같이 달려들어서 쏘아대던 죄 있는 몸에다가 달려들던 악마의 온갖 수모와 핍박과 모독과 멸시, 그런 것이 벌 쏘이면 어떻게 됩니까? 벌 쏘이면 온 몸에 볼록, 볼록 온 몸이 다 찢겨져서 주께서는 가는 거예요. 이게 성령 있어도 동일하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왜 성도로 하여금 마귀란 벌에게 쏘게 합니까? 그래야 안식이라는 것은 우리의 관리, 내 관리가 아니고 하나님, 예수님의 피의 능력이 내가 나한테 손질하는 것보다 더 월등한 위대한 힘으로 나로 하여금 공짜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벌 쏘는 가운데서 벌 쏘는 것도 하나의 공을 모는 하나의 작업입니다. 우리 육이라 하는 것은 항상 뭘 하나 해놓고 다시 나라는 대접 하나 만들어서 뭐 하나 해놓고 그걸 나라는 대접, mp3에 저장하듯이 담아놔야 안심을 하거든요.
주께서 그냥 은혜 줘도 은혜 받은 것을 모아 놓는 저금통을 또 지가 만들어요. 만들어서 ‘내가 은혜 받은 것’ 하고 이렇게 붙여서 거기다가 저금하듯이 모아놔요. 그런 것을 주께서 발로 뻥 차면, 그 깡통 그걸 두 자로 ‘역사’라 합니다. 나의 역사, 그걸 발로 차면 그때는 와락 성질내죠. 내가 얼마나 충성 봉사 했는데 이걸 왜 발길로 차느냐고, 그 깡통이 바로, 우리는 깡통이라고 하지만 그 깡통이 주님이 이미 당했던 악마의 술책이었던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애지중지하고 아까워서 우리는 발길로 못 차는데 고마우신 우리 성령께서 오셔서 발길로 냅다 차면서 ‘어디서 마귀 같은 짓을 또 하고 있어?’ 하고 발로 차버리면 ‘오~ 내 깡통, 내 깡통.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데.’ 다 날아가죠.
스데반 집사 보세요. 스데반 집사는 벌떼가 얼마나 쏘았는지 얼굴이 다 멍들었어요. 얼마나 맞았는지 죽었어요. 벌떼에 의해서 돌에 의해서.
편히 쉰다는 것은 이미 구원을 이미 쉬기 때문에 소급해서 이 남아있는 껍데기 같은 육신이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하는 과정을 통해서 ‘아! 이 세상은 마귀가 있구나. 귀신이 지배하고 있구나. 짐승이 지배하는 것 맞구나.’ 하는 것을 확인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그 과정에서 구원받고 나머지는 그 짐승한테 다 굴복 당하게 돼 있다고 여기 8절에 보면 나옵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이렇게 돼 있어요.
그렇죠? 생명책을 뭐와 비교합니까? 생명책이 투입되면서 그 다음에 등장한 게 뭐죠? 짐승이죠. 짐승 등장하면 생명책 등장하고 생명책 등장하면 짐승 등장하죠. 그러니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 말하면서 세상을 누가 지배한다? 짐승이 지배한다는 것을 파악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요즘 교회 귀신, 악마 하면 거기 이상한 소리 하지마라 하죠. 인간이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 거지, 언제 귀신, 악마가 왜 개입하느냐 말이죠.
70이레 논문 쓸 때 짐승이 어떻고 이렇게 쓰니까 앉아있던 그들이 얼마나 비아냥거립니까? 목사님 보셨죠? 어디 신화적 개념을 집어넣느냐고, 얼마나 ‘웃긴다.’ 하는 식으로. 왜냐 하면 짐승과 악마, 사단 이런 것은 논리에서 학문에서 이게 나올 수 없어요. 신화적 개념이기 때문에. 신화적 개념은 하늘에서 뚝 떨어져야, 계룡산에서 받아야 되지, 신화적 개념은 어느 신학 책에도 안 나와 있다 이 말이죠.
세상에 인간은 어떻게 하고 인간은 어떻게 하는 것이 인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데, 짐승이 어떻게 하고 짐승이 어떻게 하고 하는 것은 짐승을 봐야 귀신을 봐야 악마를 봐야 어떻게 하는 것이 나오는데 악마가 어떻게 학문의 대상이 되고 분석의 대상이 됩니까? 말도 안 되죠.
만약에 미스코리아 돼서 미스코리아 고별행진 끝나고 난 뒤에 미스코리아 막대하나 쥐고 머리에 왕관 쓰고 ‘아이고, 이 기쁨을 누구한테?’ ‘이 기쁨을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날 예쁘게 낳아주신 아버지, 어머니에게 감사하고 송진 미용실 원장님한테 감사한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ㅎ
그럴 때 문제는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 법 좋아하는 사람은 뭐라 합니까? 그 미용실 원장 한테 감사하는 건 좋아, 미용실 있으니까, 낳아준 엄마한테 감사하는 건 좋아, 그것도 엄마가 있으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걸 증명해 보라 이 말이죠. ‘괜히 니 기분이지? 니 기분이지?’ 뭐든지 법대로 하자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로 됐다는 걸 니가 그 논리를 증명해 보란 말이죠. 매일같이 교회 나오는 쟤는 떨어지고 니는 됐는지를 하나님의 법대로 해 보란 말이죠.
두 나라 기독교 나라가 축구합니다. 둘 다 빡세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한쪽은 2대0으로 이겼어요. 그러면 왜 한 나라는 하나님이 있는데 지고 한 나라는 이기게 되는 이유를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보란 말이죠. 하나님 찾아보고 따져보고 해야 될 게 아닙니까? 그게 어떻게 법적으로 됩니까? 그러니 사람들이 ‘하나님’ 하는 것은 그냥 구색에 맞추기 위해서 그냥 갖다 붙이는 용어에 지나지 않게 돼 버렸어요. 그냥 ‘하나님’ 안 했다가 미스 유니버스에 나가서 떨어질까 겁나서 하나님한테 아부한다고 하나님 은혜라고, 이 말은 ‘다음에 세게 당겨 주세요.’ 이런 노림수 때문에 그렇다 말이죠. 입 싹 닦기는 뭐하고.ㅎ
그래서 이 모든 생각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할 때 이 말이 왜 안 맞느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좋은 것을 욕망하는 게 아니고 지가 욕망하기 때문에 좋은 거예요. 항상 자기와 결부돼 있어요. 자기가 뭐냐,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뭐냐, 모든 것이 어떻게 감사하다할 때 누구와 관련돼 있습니까? 그리스도 몸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누구와 관련돼 있어요? 내 육신, 내 몸이 원하는 바를 내가 소지하고 있는 이런 조건하에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한계다 이 말입니다. 그게 마귀와 짐승이 그 짓하고 있다는 것을, 마귀와 짐승을 모르면 알 수가 없죠. 하나님이 도와주는데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왜 그걸 해석을 삐딱하게 해서 마귀가 도와줬다고 왜 억지를 부리느냐고 나한테 달려들 수도 있는 문제가 있다 말이죠.
그러니 짐승, 악마, 사단 이것은 좋은 것을 하나님께 돌릴 줄 안다면 짐승, 마귀와 사단을 어떤 개념입니까? 지한테 불리할 때 지한테 손해가 될 때, 스피노자 철학자는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사람이 선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존재의 힘이 증대될 때가 선이예요. 스피노자 하면 유명한 격언 있죠?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한 사람 아닙니까? 스피노자가 하는 말이 선이라 하는 것은 내 존재의 힘이 증대될 때이고 악이라 하는 것은 내 존재의 힘이 감소될 때, 이걸 악으로 본다 이 말입니다. 스피노자가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스피노자가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말이죠.
그럼 성도 악은 누가 정해요? 결국 내 몸이 정하잖아요. 내 몸이 정하는데 내 몸이 마귀에 속했는지 안 속했는지 내 몸 가지고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증명이 안 되죠. 왜 증명이 안 되는가, 나한테 무조건 유리하면 성부 성자 성령께서 도와준 게 되는데 이게 어떻게 증명이 됩니까? 안 되죠.
지난 수요일 날 예레미야 설교할 때 했잖아요. 그 아줌마들이 뭐라 합니까? 옛날처럼 아스다롯, 바알을 섬기고 우상을 섬길 때는 뭐든지 만사형통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선지자 말 듣고 그런 걸 폐지하고 난 뒤에는 이것은 뭐든지 기갈이고 전쟁이고 폭삭 망했다는 겁니다. 회사에서 성경공부하면 회사가 팍팍 커졌으면,,,ㅎ 그런데 성경공부 한 다음에 불나버렸다 하면, 이건 도움도 안 되고 불났다 하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말이죠. 성경공부를 하란 말이냐, 하지 말란 말이냐, 분간이 안 되잖아요. 그 이야기를 그 아줌마들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설교할 때 그랬잖아요. 그 아줌마들이 고맙다고. 얼마나 고마워요. 남자들은 체면 차린다고 믿음 있는 체 하지만 아줌마들은 그런 것도 없어요. 딱 깨놓고 이야기해요.
예수 믿고 나서의 형편이 전보다 못하다고. 이런 기분으로 무슨 재미로 하나님, 여호와 믿겠느냐, 옛날처럼 ‘나 둬. 내버려둬. 옛날처럼 섬기게.’라고 하는 대목이 예레미야 44장 15~19절 보면 적나라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 글대로 오늘날 교회 교인들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교회 왜 나왔는지’
정동진에 해 뜰 때 뭐라고 기도합니까? MBC나 KBS 인터뷰할 때 나오죠. ‘뭘 빌었습니까?’ 하면 ‘그저 우리 남편 사업 잘 되고 가정의 건강을 위해서 빌었습니다.’ㅎ 해가 미쳤나. 그런 거 들어주게. 해가 미쳤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달을 피 빛으로 변합니다. 믿을 걸 믿어야지. 왜 그러느냐 하면 해와 달과 인간의 몸이 함께 지금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미 주님의 십자가로 이미 작업 끝내버렸어요. 이제는 철거반으로 완장 끼고 서울에 봉천동에 지금 포크레인 열 댓 명으로 동원하고 있는데 아직도 어린애들이 이사 안 가고 줄 그어놓고 ‘요거는 내 땅’ 하고 소꿉놀이 하고 있다니까. ‘얘야, 빨리 비켜줘.’ ‘싫어, 내가 살던 내 고향이야.’ 고향이고 뭐고 어디 있어.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리는데.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인지 모르겠어.
지금 주님께서는 십자가 죽고 이 땅을 떠나버렸다 말이죠. 다시 오실 거예요. 떠나버린 상태에서 지금 재개발 지역에 왜 나와 있어요? 이사도 안 가고. 그게 정들었던 것이 평소의 습관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그걸 목표로 삼아왔던 거기에 걸맞게 그렇게 교육받아왔던 우리의 몸이 ‘니가 잘하나, 내가 잘하나.’ 되도 않는 키 재기 하는 식으로 살았던 그 버릇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철거하려니까 너무 허망하게 보이고 다 놓으려하니까 그동안 투자한 것이 아쉬운 것도 많고 그런 거죠.
더 깊이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우리 몸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 몸에 유리한 것은 하나님 뜻이고 불리한 것은 사단의 짓이다.‘라고 생각한 것 때문에 그들은 누굴 죽이고 말았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육신의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도가 아니고 인간의 육신에 속해있는 이 죄의 세력은 인간을 통해서 분출되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적대적인 모습으로 분출되면서 그 인간을 통해서 결국 그 인간을 조정하고 있는 악마는 예수님만 노리고 저격했다 이 말이죠. 그냥 악하다가 아니라 악해도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죽이고 싶은 살해의지로서 무장된 그 악마의 조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인간, 그 인간은 악의 화신이고 악의 농축액이죠. 부산 강의에서 했죠. 악의 농축액! 악의 엑기스! 이런 모습을 성령이 오게 되면 그리스도 중심으로 다시 우리로 하여금 파노라마처럼 우리의 육신의 밟아온 길과 앞으로 갈 길을 다!~ 비춰주죠. 왜, 이미 그리스도 안에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아요. 아! 이거 또 오해된다.ㅎㅎ
죽은 사람은 무슨 짓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걸 통해서 자기가 죽어야 마땅한 이유가 바로 나오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이 막 안 살려하고 조심스러워하는 이유는 뭡니까? 아직까지 덜 죽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성령이 안 왔기 때문에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조심스럽게 살면 살수록 누가 싫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갈수록 미워지는 겁니다. 왜,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서 구원받으려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날 안 도와주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내 구원이 목적인데 주님께서 내 구원을 안 도와줄 때 그때부터 주님은 나의 적이 되는 거죠. ‘그래, 니 잘났다. 그래.’ 이렇게 되죠.
왜 주님께서 안도와 줍니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안 도와줍니다. 그러면 여기서 마귀는 더욱 더 기세가 등등하죠.
마귀 : 왜, 누구는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해 주고 왜 누구는 빼주느냐.
예수님 : 그건 내 맘이다.
마귀 : 그러니까 그 따위 신앙하면 죽여야 된다.
예수님 : 그러니까 죽었잖아. 그래서 너희들은 짐승이잖아.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은 다 짐승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죠. 비로소 짐승이 보인 거예요. 짐승이 보이고 우리는 짐승과 단짝이 돼 있으면서 본인이 짐승인줄 몰랐던 거예요. 항상 짐승 편에 서서 짐승의 앞잡이로서 예수님을 공격하는 그러한 자세로서 평소에 그렇게 임했는데 우리는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다만 내 소박한 꿈과 포부와 약간의 그냥 밥 먹고 사는 정도의 그런 일자리, 고 정도 해서 바쁘다고 복음 못 듣게 했는데 세상에 그것마저 허용 안하죠. 나올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니들이나 예수 믿어라. 난 예수보다 더 귀한 게 있어. 돈이고 내 자존심이고 내가 살고자 하는 나의 의지만큼은 예수도 날 못 말린다.’
예수님이 그 의지를 못 말리는 게 아니고 안 말리죠. ‘그래, 그래, 아이고, 잘했어요. 잘했어요. 니 맘대로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니가 성질나는 대로 사세요.’ 음녀라는 말은 음탕한 여인 아닙니까? 음탕한 여인이란 말은 반드시 이 여자는 결혼 관계 속에 있어야 돼요. 음탕한 여인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호세아에도 나오고 아모스에도 나오는 누굴 이야기합니까? 이스라엘을 두고 하는 이야기예요. 왜 이스라엘이 신약에 오면 확대되는 이유가 원래 그때 여호와 하나님과 가장 밀접하게 언약 적 관계를 가진 나라가 어느 나라입니까? 이스라엘 이예요. 이스라엘은 다른 이방 민족은 쓰레기라 필요 없고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을 대변해 주는 겁니다. 왜, 가장 가까이 근접하게 최측근이니까.
그것을 통해서 왜 이스라엘은 망해야 되는가, 그럼 이스라엘 망하면 다른 나라는 안 망해도 되는가, 아니에요. 이스라엘 망했다 하면 다 망했다는 말 이예요. 원래 망하는 민족이고. 이스라엘 자체가 이걸 음녀로 보는 거예요. 음녀로 봤는데 음녀란 말은 자리 본래의 남편을 버렸다는 거예요. 버리고 남편 아닌 자를 사랑했을 때 그걸 간음했다, 간통했다, 음녀라고 보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거든요.
그러면 음녀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옛날 남편이 있을 때는 이 여자에게 뭐만 가득했겠어요? 남편의 요소만 가득 차 있었겠죠. 정상적인 여자 같으면. 그런데 이 여자가 음녀가 됐다는 말은 여기 여자에게 있던 남편의 요소는 다 빠져버리고 빠진 빈자리에 뭐가 있습니까? 남편을 욕되게 하고 남편을 공격하고 남편을 미워하는 짐승, 하나님의 원수된 것이 여자의 마음에 찾아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음녀의 특징은 뭐냐, 지난 광주 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는데 여자라 하는 것은 남자와 달라서 빈자리를 만든다 하죠. 빈자리가 있다는 말은 ‘다오’ 다오‘ 계속해서 나한테 채우고 채우는 거예요. 쇼핑 중독증 여자들처럼, 계속해서 채워야 돼요. 채운다는 말은 뭔가 누군가 계셨는데 완전히 거덜 내고 빠져나가버렸어요. 자기가 사랑할만한 자가 빠져나가버렸어요. 이제는 자기 사랑의 대상은 옛날 떠난 그 남편 대체할 다른 것들로 채우고 채워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메시야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를 사랑해야 될 임무가 있는 이스라엘이 결국 메시야를 죽이죠. 죽인다는 말은 죽임으로써 다른 것들 메시야 말고 다른 것들로 그 안을 채우고 채웠다는 그 내용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음녀의 특징은 뭐냐 하면 주님 하나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세상에 다니면서 예수님의 기쁨을 대체할만한 것을 찾고 찾아다니는 그러한 모습, 그럴 때 찾아오는 모습을 가지고 ‘짐승’이라고 비로소 짐승의 정체가 음녀일 경우에만 파악이 되죠. 물론 다른 사람, 성도도 물론 알지만 저 사람이 음녀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말고 다른 걸로 채우려고 분투 노력하는 그 양상과 모양새를 보면서 뭐로 규정할 수 있느냐 하면 ‘너는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음녀’라. 그 채워서 뭐할 겁니까? 그 채워서 누구한테 보란 듯이 욕하죠. ‘예수 없어도 좋아. 예수 없어도 나는 행복해. 나는 십자가 복음 없고 예수 없어도 이렇게 행복하단 말이야.’라고 큰 소리 치면서 같이 들어온 것들과 합세해서 더러운 이름으로 하죠.
17장 4절 봅시다.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것도 바람피우는 여자를 말하는 게 아니고 항상 그리스도 몸을 가지고 볼 때 음녀라 하는 것은 예수님 빠지고 빈자리에 예수 없는 다른 걸로 채우려고 하는 그 양상, 특히 음녀라 하는 것은 광주 강의 때 했지만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이게 갈급해서 채우고, 채우고 계속 채우는 거예요.
5절에 보면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큰 바벨론이 무슨 비밀입니까? 하지만 비밀로 돼 있죠. 그 비밀은 어디 가야 알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몸만 같이 있어야 아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죠. 어떤 진주 장사가 다른 사람은 파악하지 못하는데 장사를 많이 해본 사람은 알 수 있는 귀한 걸 발견하고 난 뒤에는 기뻐했다 하죠. 그런 상태를 뭐라 합니까? 하늘나라라 하죠.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말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어디 가야 돼요? 육신의 몸으로 다니신 예수 그리스도와 합류된 경우에만 ‘아!’ 이게 보통 사람 모르고 예수 성령 받은 사람만 귀한 걸 아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에이, 이게 무슨 보석이야?’ 하고 갖다 버리죠.
그러니까 진짜 귀한 것은 갖다 버리고 전혀 귀하지 않은 그런 것들만 잔뜩 끌어 모으는데 그 끌어 모은 전체가 뭐냐, 예수님을 배반케 하고 공격하게 만든 힘, 바벨론의 힘이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어느 나라에 잡혀 갑니까? 바벨론에 잡혀감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의 의미가 이스라엘과 관계되는 새로운 국가로서 여기 등장해서 쓰여지게 되는 겁니다.
바벨론 할 때는 앞에 뭐가 있다? 수모 당했던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한때 품었던 바벨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두 나라밖에 없죠. 바벨론이냐, 아니면 이스라엘이냐, 이스라엘이냐, 아니면 바벨론이냐,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모든 성경은 우리 몸 가지고 풀어내가지고 내 지식으로 소유할 문제가 아니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야 돼요.
모든 성경 자체가 바벨론이냐, 아니면 이스라엘이냐,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만 파악된 그 의미에 마치 우체국에 가면 우편물류센터 있죠. 거기에서 각처에서 오는 걸 분류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 분류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뭐냐, 지가 알아서 자기 속에 좋은 것 담아서 그것 가지고 천국 가보겠다 시도하는 거예요. 뭐는 빼고? 진짜 예수님은 빠져 버리고. 왜? 성령이 오지 않았으니까, 진짜 예수님이 왔으면 오히려 반대로 어떻게 됩니까? 세상 것보다도 뭐가 더 중요해요?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거예요.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됐으니까, 무슨 생명책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됐기 때문에 어린양과 공유됩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이 지상에서 살았던 그 자체가 생명이 되고 그 일대기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 그것이 우리 속에서 생명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의 일대기 속에서 이렇게 헤매면서 우리는 뭘 아느냐, ‘아! 이게 바벨론이고 전에 내가 좋아하는 것 주께서 강제적으로 갖다 버렸구나. 아이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구나.’ 이걸 아는 성도로서 매진한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성경으로만 풀어야 된다면 간단히 되죠. 모든 세상은 바벨론이고 짐승한테 굴복돼 있다. 그러나 창세전부터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짐승에게 굴복되지 않는다. 이런 단어로 짧게 정리돼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