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강-신 9장 18-21절(진노 앞에서의 기도)1511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9장 18-21절입니다. 구약성경 277페이지입니다.
“그리고 내가 전과 같이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케 하여 크게 죄를 얻었음이라 여호와께서 심히 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두려워하였었노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때에도 내 말을 들으셨고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그 때에도 아론을 위하여 기도하고 너희의 죄 곧 너희의 만든 송아지를 취하여 불살라 찧고 티끌같이 가늘게 갈아 그 가루를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에 뿌렸었느니라”
사십일 동안 모세가 기도하는데, 기도 제목은 내 것 아닌 것에 대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를 할 때에 내 것 잘되라고 보통 기도하잖아요. 그런데 여기 모세가 기도하는 것은 내 것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그대로 하자 없이 진척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있기에 모세는 자기가 살아있는 것을 주님 살아계심 앞에서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라고 생각조차도 안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거대함에 자기는 없어져도 괜찮죠.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냐면,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 하는 겁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작아져도 괜찮아요. 그리고 작아지게 되면 내 것이 날아가는데, 날아가도 괜찮아요. 오히려 내 것이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주님의 것이 크게 부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행동은 모세가 속한 영역과 그리고 산 밑에 있는 백성들의 영역이 너무나 대비돼서 그런 겁니다. 그 대비에 대해서 오늘 신명기는 그 양쪽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제가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모세 쪽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볼 때에 진노하고 있다. 분노하고 있다. 화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밑에 사람들이 눈치를 채야하는데, 밑에 사람들은 원래부터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해서 감각이 없어요. 그냥 경상도 말로 “와카노?” 표준말로 “왜 그러지?” “와카노?” “왜 그러지?” 사실은 이게 우리가 이 점을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대할 때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대하기 때문에 진노하심이 그대로 살아있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모든 것을 불로 싸질러 버립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의할 게 있어요. 우리는 성경 말씀을 참조로 해서 나름대로의 영적세계를 구상을 해요. 그게 저는 그걸 육의 고상함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그런데 영은 굉장히 투박하거든요. 고상한 것이 아니고 투박해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돌판이 깨어지는 것. 우리 같으면 돌판이 주어졌으면 그걸 참조로 해서 얼마나 교회를 부흥시키고 바르게 할 수 있는데, 그걸 왜 깨냐 이 말이죠.
전에도 그런 예를 들었는데, 제가 아는 친구가 있는데 친구 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바둑만 두는 거예요. 그래서 그 동생들의 형이 되는 친구가 화가 나서 바둑판을 깨부쉈었어요. 그러니까 동생들이 “와카노? 형! 미쳤나? 와카노?” 이런 거예요. 나중에 여기에 반전이 있어요. 나중에 이만한 나무로 만든 바둑판을 도끼로 반쪽을 내던 형이 바둑 두고 싶으니까 지가 바둑판을 붙여가지고 동생 불러서 한판 두자고. 동생은 바둑이 5단이에요. 지는 한 4급 되고. 지가 했던 행동 반성하면서. 괜히 바둑판 깼다고. 저는 그걸 고상한 육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편에 선 것처럼 마음껏 분노를 드러냈지만 성질 드러낸 거예요. 지 성질 드러내놓고 마치 하나님 편에 선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근데 막상 상대방에서 거기에 대해서 좀 먹혀 들어가면, “아, 진짜 목사님이다. 진짜 갈라디아서 1장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그리스도만 기쁘게 한다고 이럴 줄 알았지?”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그렇게 나오니까 괜히 설교 시간에 성질낸 지만 생계가 위태롭거든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좋게 나오자 하는 이걸 고상한 육이라고 봅니다. 온갖 복음, 십자가, 신앙이야기를 다 했는데, 그렇게 멘트를 날린 이유가 사실은 자기가 밥벌이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그 짓하고 있다는 것을. 그걸 교인들은 잘 모르죠.
한국교회는 썩었다. 한국교회는 개혁해야 돼! 라는 그 멘트들이 모아져서 자기의 밥벌이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도대체 그 목사가 어디에 쳐 박혀야 돼야 깨닫게 될까요? 어제가 무슨 날이냐 하면 어제가 종교개혁 날이라는 거예요. 종교개혁의 날도 되지만 이용의 잊혀진 계절도 돼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그 날도 되고 종교개혁 날도 되거든요. 종교개혁을 백날 해봐도, 한국에 기독교 들어온 지가 백년이 넘었는데, 말나올 때마다 종교개혁 했어요. 개혁해봐야 뭐합니까? 개혁되어야 할 대상이 개혁을 부르짖고 있으니까 이게 말이 되겠어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기도의 내용이 오늘 본문에서 사십일 동안 기도했지만 이게 신약에 오면 간단하게 예수님의 주기도문으로 되어 있어요. 그 주기도문의 내용에 보면 특징이 뭐냐 주기도문의 내용을 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하나도 안 나옵니다. 그냥 주기도문의 내용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여 죄 지었으니까 용서해 주세요.” 핵심은 그거밖에 없어요. 죄 지었으니까 죄 용서해주세요가 이게 영광이 돼요.
그 말은 뭘 이렇게 살까요? 이렇게 살까요? 안 되는 이유가 진노 안에 있을 때, 쉽게 말해서 지옥 안에 있다고 쳤을 때, 지옥이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인식하고 있는 위치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HELP ME!” “살려주세요!”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외에는 없어요. 뭐 직업이 백부장이냐, 뭐 중대장이냐 하는 것은, 지금 주님의 심판 앞에 백부장이냐, 중대장이냐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구원할 분은 주님밖에 없나이다.” 그뿐이에요. 삭개오가 그렇게 부자라도 오직 외칠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투박한 진노를 모르고 뭘로 다 전환시키느냐 하면 고상한 육으로 다 바꿨어요. 모든 교회 행사나 예배가 육인데 굉장히 고상하게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요. 경건해보이고 거기에 회개도 있죠. 반성도 있죠. 뭐 빠진 거 없이 구색은 다 갖췄어요. 선교 있지, 헌금 있지, 예배 있지, 봉사 있지, 꽃꽂이 있지, 모든 것을 갖췄는데, 모든 것을 갖췄는데 전부다 흥미위주고 작업위주에요. 그 투박함이, 깨진 돌판처럼 그 투박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그 당시에 어떤 일을 했는가, 모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성경에 나오니까 한 번 봅시다. 모세가 기도했죠. 아론에게 진노하니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아론은 몰라요. 아론은 지금 모세가 어떤 심정인지를 모르고, 아론은 산 밑에 있으니까 모릅니다. 물론 모세도 산 밑에 있지만 주님 마음을 알죠. 그래서 “아론을 위해서 기도했고 너희의 죄 곧 너희의 만든 송아지를 취하여 불살라 찧고 티끌같이 가늘게 갈아 그 가루를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에 뿌렸었느니라”
이 읽었던 것을 한 마디로 말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만든 고상한 것 다 가져와. 고상한 것, 너희들이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경건하게 보였던 것 다 가져와. 내가 아예 빠숴 줄 테니까. 너희들이 한 십일조. 너희들이 한 모든 것.” 오늘 아침에 그런 이야기했죠. 우리 아버지는 교회 안 가면서 십일조 한다는 거예요. 이거 반전이에요. 모태신앙이라서 십일조는 하는데 교회는 안 간답니다. 천국도 돈으로 따내려고 하는가. “하여튼 인간이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여기는 것 다 가져와. 내가 완전히 빠숴 줄 테니까. 박살내버릴 테니까.” 얼마나 산 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모세의 행동이 부정적입니까? 굉장히 부정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요. 철두철미하게 부정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해서 우리의 대처방법은, 우리의 대책은 무엇이냐. 이게 좀 어려워요.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우리는 대처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산 위에 있는 입장에서 모세가 금송아지를 부수어 가루로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그걸 보고 있는 아론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 저게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를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뜻인데,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저런 행동을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부터는 우상을 만들지 말고 혹시 만들었어도 부숴버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있는 것을 안다는 게 된다.’ 이렇게 정리해버립니다. 이거 고상한 육이 요.
왜 그러냐 하면 이게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인간의 주체문제와 관련해서 풀어나가는데, 인간은 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생물적으로 기본적인 것, 배고플 때 배고프다, 아플 때 아프다, 뭐 이렇게 머리 아프고 열나면 눕고 싶다, 이게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인간이 육체니까. 잠 잘 때는 자고 싶고 먹고 싶을 때는 먹고 싶고 하는 이게 욕구라고 해요. 생물학적인 욕구니까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짐승도 있고 심지어 식물도 있어요. 욕구가 있으니까 인간은 그걸 요구를 하게 돼요.
어린애가 배고플 때 말을 못하니까, 젖 달라고 할 때는 울지요. 그러면 몸은 욕구를 나타내고 그것을 엄마한테 나타내면서 애기는 자기 주체가 생성됩니다. 욕구라는 말을 방금 했구요. 애기가 요구를 하게 됩니다. 욕구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걸 달라고 요구를 했는데, 정작 자기가 말한 것, 또는 울었던 것, 자기가 말한 것, 또는 표현한 것과 말하려고 한 것과 이게 격차가 생기게 되어 있어요. 그걸 가지고 뭐냐, 욕망이라고 하는 겁니다.
욕구가 있고, 요구를 했는데, 해놓고는 사실은 이게 아닌데. 뭔가 미진해요. 굉장히 미진해요. 남자가 여자보고 “나 당신 좋아해.” 여자가 “좋아하면 그런 행동하느냐?” 남자가 “에이, 좋아한다는 그게 그 뜻이 아닌데.. 사실은 아닌데..” 말하려고 한 것과 말 한 것과의 차이가 나는 거예요. “그러면 제대로 말하지.” 아무리 제대로 말해도 항상 미진한 부분은 항상 맴돌게 되어 있고 삐져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걸 가지고 욕망이라고 하는 겁니다. 욕구 이야기했죠, 요구 이야기했죠, 욕망 이야기했습니다. 욕구 빼기 요구가 욕망이에요. 공식: 욕구-요구=욕망
하나님 찬양해놓고, ‘하나님 기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주만 찬양합니다.’ 해놓고 ‘아니야.. 아니야.. 이게 다가 아닌데..아, 무슨 말로 표현을 못하겠네.’ 남자한테 참 좋은 건데 이게 어떻게 말로 표현이 안 돼요. 어떻게 자기 속에 있는 것을 표현을 못해요. 그러니까 모세가 와서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하고 가루로 만드니까 ‘아! 저걸 그대로 모방해서 따라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지.’ 하나님은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니야! 그게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야!” “그러면 우상을 더 가루로 빻아서 아예 죽으로 만들까요?” “그것도 아니라니까.” “그럼 뭐요?” “이야기해줘야 너는 몰라.”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삼고 그들이 나가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낫게 했습니다.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주님과 정상적인 관계다’ 라고 오해를 했죠. 주님은 “아니야. 그게 아니야.”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면 뭐합니까? 예수님 세 번 부인했는데. 본인이 본인을 몰라요. 오병이어에서 떡과 고기를 얻어먹었거든요. 고기 먹고 떡을 먹으니까 감사하면서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주님을 임금 삼았습니다. 주님은 말합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고마워서..” “아니야. 너희들이 나를 따라 온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 때문에 따라온 거야. 그게 아니야.”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뭡니까?” “글쎄 말해줘도 모른다니까.” “말해주세요.” “내 살과 내 피를 먹어라.” 다 가버렸어요.
다 가버렸습니다. 그 많던 오천여명 중에서 하나도 남지 않고 다 가버렸습니다. 열 두 제자도 갈까 말까 하다가 걸려들어서 붙어있는 것이지. 예수님 곁에서 다 떠났어요. 처음부터 다 갔어야 될 사람들이었어요. 열 두 제자들부터 해서 몽땅 다 갈 사람들이었어요. 왜? 그게 아니거든요. 사실은 그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가 무슨 수로 파악해서 거기에 대처를 세웁니까? 옛날 고대 신화에 보면 시지프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어떤 벌을 받았느냐 하면 무거운 돌을 밀어 산 위에까지 올라가야 하는 벌을 받았어요. 그래서 무거운 돌을 밀어 산 위에까지 올라갔습니다. 올라가자마자 산이 뾰족하니까 다시 바위가 내려왔죠. 그러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들고 또 올라와요. 이걸 영원한 절반이라고 했어요. ‘영원한 절반’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 진노, 십자가를 믿는다고 아무리 해도 영원한 절반에 머물고 맙니다. 베드로가 자기는 주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 어프로치(approach, 접근)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장담을 했건만, 주님께서는 니가 닭 울기 전에 니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닭 울기 전에. 인간으로서 넘어설 수 없는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왜 인간들은 모릅니까? 그러면 베드로는 지옥 갔네요? 아니죠. 그 앞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너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왜? 마귀가 너로 하여금 니 착각에 빠지게, 니가 고상한 육이면서도, 마치 고상한 육이 아닌 양 그것을 평생토록 할 건데, 마귀가 너를 그렇게 만들 건데, 거기에 겹쳐서 예수 그리스도 기도, 오늘 본문에 모세 기도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여기에 삽입이 되어버리면, 누구하고 싸움이냐 하면 베드로하고 싸움이 아니고 예수님이 직접 마귀에게 “나가! 나가! 베드로한테서 손 떼!” 하고 추방하니까 베드로는 아무 한 것도 없이 그냥 덜렁 공짜로 영생을 얻게 된 거예요. 그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지난 아가서 할 때 사랑 이야기했죠. 사랑은 강렬하기를 어느 정도로 강렬 하느냐, 우리가 죽음을 못 이기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팔을 치고 도망칠 수가 없어요. 죽음같이 강렬하니까. 뭐 죽음만 무서운 줄 알아요. 사랑은 더 무서워요. 이거는 스토커도 그런 스토커가 없어요. 주님은.
솔로몬 여자가 들어오지 말라고 문을 닫았거든요. 문을 닫았는데 그 문 틈 사이로 재빨리 손을 집어넣어가지고, 문에 손이 끼여서 손이 찧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끝까지 솔로몬은 귀한 몰약을 주어서 “이거 먹고 가을철에 감기에서 나아라.” 하고 감기약을 거기에다 넣어주잖아요. 손이 끼인 채로. 이거는 그냥 미친 거예요. 사랑에 미친 거예요. 사랑 미쳐야 성도입니다. 사랑에 미쳐야 성도에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런 노래 있잖아요. 아무것도 필요없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백날 해봐야 고상한 육이고, 백날 해봐야 영원한 절반이에요. 영원한 절반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을 우리한테 맡겨 놓으면 우리는 고생이 덜한 장소에 피신해서 구원받으려고 합니다. 저 기도원에 간다든지, 남한테 상처 안 입고 홀로 깔끔 떨면서, 도 닦으면서 구원받고자 하는데, 주님의 방법은 진창에서 구원받게 해요. “돌아가! 도로 내려가! 진창으로. 골치 아픈 데로 니가 가! 가서 니가 내놓을 수 있는 니 나름의 구원의 방식을 내놓아봐라.” 내 나름의 구원의 방식, 그게 마귀가 우리한테 심어준 거거든요. “니가 요렇게 반성하고 회개하고 이렇게 믿고 하게 되면 우리는 구원받는다.” 라고 내놓는 것이 있어요.
어떤 목사가 뭐 복음이 어떻고, 믿음이 어떻고, 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정답은 뭐냐 하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감사함이에요. 여러분 인생을 감사함 없이 살았거든 인생 헛산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괜히 나서가지고 스스로 자기 손가락가지고 자기 눈 찌르면서 인생 살잖아요. 하지 말라고 했는데 지가 답답해서 지가 설치다가 지가 미끄러져가지고 온 몸에 멍 다 들고 파스 붙이고. 가만있어도 된다는데 본인이 가만히 못 있어. 본인이 용서가 안 돼. 뭐 금송아지나 섬겨야 돼. 주께서는 그걸 가져오라고 해서 가루로 빠숴버립니다. 그러니까 그걸 알고 그 다음부터는 지가 빠순다고, 지가 또 회개한다고, 니 회개도 하지마! 그 자체가 어설퍼요.
회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함이 없으면, 통합적으로 감사함이 없으면 인생 뭔가 길이 잘못되었어. 엉뚱한 길로 가고 있어요. 마치 이런 식입니다. 제가 옛날에 싸리비를 산 적이 있는데 잘못 샀어요. 하여튼 내가 하는 일은 엉망진창이에요. 싸리비를 사서 방을 쓰는데, 쓸어보니까 싸리비에서 빠진 것이 더 많이 나와요. 방 청소가 안 돼요. 요새 아가씨들 방에 보면 아가씨들 외출할 때는 말끔하게 향수 뿌리고 귀족 집 딸처럼 보이지만, 자기 집구석 방에 들어가 보면 완전히 쓰레기장이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방을 어떻게 치워야 돼요? 방을 치우지 말고 지만 그 방에서 빠져나오면 깨끗해져요. 나 때문에 더러워졌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안 깨끗해지면 돼요. 그러면 방이 저절로 깨끗해져요. 요거 인생의 Tip입니다.
뭔가 정리정돈 하지 마시고, 그냥 되는대로 사시되, 감사함으로 사세요. 더욱더 어지럽힐 것들을 많이 내놓으세요. 그만큼 여러분들은 겸손하다는 뜻이고 낮아졌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이렇게 화를 내게 하느냐, 여기 마지막으로 진짜 어려운 건데, 뭐 알아듣는 사람은 알아들으세요. 양자물리학에서 힉스 장(場)이라는 것이 있는데, 모든 중력과 물질은 물질이 아니고 힉스 장, 영역에서, 필드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그 힉스 장이 왜 그렇게 물리학에서 주목을 받느냐 하면 이게 무無보다 더 낮은 단계라서 그래요. 보통 성경에서는 기껏 없는데서 있다고 하잖아요. 물리학은 더 나가요. 없는데서 있는 것이 아니고 없음보다 더 낮은 장소가 따로 있다는 거예요.
낮은 장소에서 올라와야 없음이 되고, 없음에서 나오는데 이 없음에서 나오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고 이게 신의 심판이라는 겁니다. 이게 뭔가 일이 잘못되어서 어떤 존재가 등장한다는 거예요. 이게 힉스 장이라는 거예요. 근데 양자물리학에서 모든 것이 균형 맞춰서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을 때 이 세상이 평화로운데 뭔가 등장했다는 말은 말썽꾸러기 하나 생겼다는 이런 뜻으로 생각을 하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내가 있는 평형 상태에서 진노를 생각합니다. ‘아하 죄 지었구나. 죄 지었기 때문에 진노하시고 말씀을 위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화내시는구나.’ 하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진노는 그게 아니에요. 니가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있어요. 그럼 누구하고 해결하는가, 우리하고 해결 안 되요. 그거는 우리보다 먼저 계신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해결할 문제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은 자만이 다시 되찾음이 돼요.
예수 안에 있을 때, 예수님과 함께 버림받고, 함께 버림받은 자만이 함께 영생을 얻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인생 살아가는 이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아니고, 주님의 버림받음에 합류하라고 주께서 허락하신 주님의 바구니, 예수 안이라는 바구니라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으면서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인생은 짧습니다. 아까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정말 그러다 갑자기 15년 후, 25년 후, 막 이런 게 나타나면 좋겠어요. 8년 후처럼. 저는 지난날 보다 60년 후 지금 여기 있잖아요. 사실은 나이 더 되지만. 60년 후. 앞으로 80되면 팔십년 후. 죽을 때 돼가지고 인생 다 산 후. 후에 나는 천국에, 영생의 나라에 있을 것이다.
이게 처음부터 마이너스에서 창조했다는 사실. 우리가 몰랐던, 우리가 아예 아는 있음, 없음이 아니고, 우리가 없다는 것보다 더 이전의 상태. 그거는 주님만 아는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아는 축복을 준 겁니다. 나의 복을 아는 축복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를 알기에, 오히려 모든 것에 감사가 되는 것은 성도만 받을 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차피 진노 받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짓는 저희들. 그때마다 해결은 이미 주님께서 치렀다는 사실. 늘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