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강-고전 11장 2-6절(남자와 여자)15110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1장 2-6절입니다. 신약성경 276페이지입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찌니라.”
우리가 만나고 있는 남자 여자란, 그냥 편하게 지내고, 사랑이나 하고, 결혼해서 가정 이루면 그것으로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다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이가 좀 든 사람을 만나게 되면 “너 결혼했어, 안했어?”라는 이야기들을 하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너는 너의 머리를 가졌어, 안 가졌어?” 이렇게 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이렇게 인사하고 묻지를 않지요. 결혼이라는 것, 남자와 여자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예언과 완전히 끊어져서 사회적관행이 되고 관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을 놓치는가? 나는 왜 여자인가, 혹은 왜 남자이어야 하는가? 도대체 남자가 무엇이며 여자가 무엇이냐는 그것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평생을 사는 게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하나의 완전체로 태어나지를 않았는가? 만약에 내가 남자라면 여자를 놓친 것이 되고 여자라면 남자를 놓친 것이 돼요. 그러면 나는 완전체가 아닙니다. 완전체가 아닌 남자라면 여자가 갖고 있는 것을 내가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이고, 그 말은 타인에 대해서 의존적이 되지요. 내게 없는 미진한 부분을 저쪽이 가지고 있다는 말은 나 스스로 자존할 수 있는 근거는 없는 게 됩니다. 빠진 게 돼요.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나라는 말이지요.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그 말은 내가 그만큼 미흡하다는 것이고 나는 모르는 것을 저쪽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마저 보태야 된다면 그것은 남자로서, 또는 여자로서 각자의 한계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계를 갖고 있다는 말은 진리에 대해서 전체를 모른다는 뜻이고 진리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은 내가 누군지를 완전히 모른다는 뜻이고, 왜 죽는지도 모르고, 왜 사는지도 모르고, 왜 인간으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게 돼버려요.
그래서 이것을 한 마디로 우리는 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완전체로 태어나지 않았느냐는 그 이야기를 끄집어낸 겁니다. 왜 나 단독적으로, 내 몸 하나로 “나는 완전해.”라는 말을 못하는가 하는 거예요. 남자 아니면 여자든지 여자가 아니면 남자에 속해서 남자가 되었다면 여자부분은 없게 되고, 여자면 남자부분은 없게 되니까 그 자체가 미흡한 거잖아요. 모자라잖아요. 모자란다면 내가 누군지는 영원히 미궁에 빠지는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 진리가 무엇인지는 영원히 미궁에 빠져요. 살면서도 해답도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 여자로 태어나면 결혼하기 위한 용도로써, 자식 낳기 위한 용도로써 남자든 여자든 되었다고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어요. 결혼하기 위해서만, 자식 낳기 위해서만, 가문을 지탱하기 위해서만. 그러면 그 다음 질문에는 해답이 없어요. 결혼해서 자식 낳고 가문을 이루었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 그게 뭔데? 그 다음 그 뒤는 뭔데? 그 뒤는 몰라요. 애나 낳는 기계입니까? 애 키우는 기계로 살다가 인생 끝나는 겁니까?
정녕 신이 있고 하나님이 있다면 왜 구태여 사람을 남자 아니면 여자, 여자 아니면 남자, 남자와 여자 둘 중의 하나로, 셋이나 넷이 아니라 꼭 두 가지 성(性) 중에서 반드시 어느 한쪽이 되어야 하는 식으로 태어나게 했는가? 여기에 대한 어떤 해답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중간체로 태어나면 그게 어때서? 그래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만한 능력이 있잖아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한 몸에 남녀 양성을 갖고 있는 식으로 만들어도 되는데 왜 남자는 끝까지 남자고 여자는 왜 끝까지 여자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이상한 것이고. 왜 여자면 여자, 남자면 남자, 그걸로 단정 짓느냐는 말입니다. 여기에 무슨 비밀이 있을 거란 말이지요.
그 비밀을 오늘 본문에서 머리라고 한 거예요. 머리란 통솔의 자리, 통솔의 위치를 머리라고 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고 결혼하기 위해서 남자가 된 것이 아니고, 여자도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여자가 된 것이 아니고, 남자가 남자로서 여자가 여자로서 된 것은 둘이 합해서 머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머리를 내세우기 위해서, 머리라는 통솔의 위치를 지시하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로 성을 구분지어서 이 땅에 사람을 만드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왜 남자나 여자 두 종류밖에 안 만들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서 손 놓고 계시는 분이 아니고,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그냥 하늘 구름 위에서 잔소리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는 그 작업, 그 모든 손길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활동하시는 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남자로서 살게 하고 여자로서 살게 한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구름위에서 가져오지 말고 자기 몸을 만지면 지금 주의 하시는 일을 만지는 게 돼요. 내 손가락을 만지면 주의 일하시는 손가락을 만지는 게 된다고요. ‘아하, 나를 남자로 만들었구나. 이것은 주님의 뜻이다.’ 또는 ‘여자로 만들었구나. 주의 뜻이다.’ 주의 뜻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주의 뜻이 이 지상에 낮아져서 우리 인간들의 모든 활동 속에서 주관하고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낙엽처럼 온 천지에 떨어져 있는데 우리는 왜 하나님의 하는 일을 놓치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문제가 돼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에 여자와 남자 이 둘로 가르는 것은 결혼해서 자식 낳고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함이 아닙니다. 가정행복 하라고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서로 다른 성을 두시고 합치라고 한 것이 아니에요. 둘이 만나서 싸우는 것보다도 아무 성도 없이, 남성도 여성도 아닌 완전체로 태어났으면 오히려 싸울 일도 없이 얼마든지 행복할 수가 있잖아요. 남자와 여자로 갈라놓고 둘이 만나서 된통 싸우게 만들어놓고 둘이 행복하라고 하면 행복이 됩니까? 서로 성이 다른데 행복이 돼요? 이렇게 다른 이유가 있고 목적이 주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목적, 서로 다른 그 차이 속에 이미 주께서 깊숙이 개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사실도 모르고 우리는 지금 평생을 살아오고 있는 거예요.
결혼을 하든 안하든 이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늙어죽을 때 까지 같이 살아도 기껏 요단강 건너간다고 하는데 요단강 건너서 뭐할 건데? 요단강 건너가면 무슨 대안이 있습니까? 왜 남자인지 왜 여자인지 이유도 모르면서 요단강만 건너가면 된다고 하는데 요단강 건너지도 못하고 빠져죽어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두는 이유는 머리, 통솔부분을 나타내고 구현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인데 이 성경적의미를 보기 전에 먼저 이 세상에 남자 여자를 어떻게 보느냐를 생각해 봐야 돼요. 이게 엉터리거든요. 인간들이 뭘 알겠어요? 고린도전서 11장의 이 대목을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고, 교회 가봐야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는 판국에 인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알게 된 남자와 여자 됨의 이유는 가정의 행복,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서 신이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의 행복은 그 사회의 권력체제의 지배와 압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해서 사랑하면서 살고자 해도 국가에서 징병을 한다든지 전쟁이 나게 되면 신혼의 단꿈이 깨져버립니다. 옛날에 최민수가 나왔던 유명한 드라마에 보면 여자가 정신대에 끌려가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와요. 그 드라마의 이름이……, 크게 이야기해 주세요. 맞아요, <여명의 눈동자> 그걸 보게 되면 둘이는 서로 사랑해서 그 사랑을 지키고자 그렇게 애를 써도 외부상황이 가만두지를 않는다니까요, 외부상황이. 개인적인 사랑이나 행복도 국가가, 그리고 사회가, 직장이 가만두지를 않는 거예요. 밤샘 근무하다가 과로로 순직하는 남편도 있잖아요. 그렇게 사회가 가장 소박한 우리 둘만의 사랑조차 용납하지 않고 훼방을 놓는다는 말이지요. “제발 좀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런 대사도 있잖아요. “제발 좀 우리 둘이 사랑하게 내버려두세요.” 누구한테 그걸 호소하는 거예요?
옛날 추장은 여자가 많았어요. 여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이 세다는 것을 티를 내고 권력이 센 쪽이 약한 쪽을 지배해야 사회질서가 견고하게 유지가 되는 겁니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은 아내도 빼앗기는 거고요. 가난한 집의 아내가 예쁘면 소위 그 지역 유지나 양반집이나 고을 사또에게 빼앗겨버리지요. 흔히들 그런 일이 많았지요. 가난하니까 아내나 자식을 팔아먹어요. 돈 받고 노예로 팔아버려요. 이게 뭐냐? 개인적인 가정의 행복이라는 것은 근래에 19세기 넘어 20세기에 들어와서야 하는 것이지 우리나라도 19세기만 해도 양반 상놈이라는 신분 때문에 개인적인 행복, 사랑도 나라의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돈이 최고지 사랑 같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도 말라는 이야기도 하잖아요. 둘이 사랑해서 애까지 낳아서 결혼하려고 하는데 신랑엄마가 반대해서 다방에 앉아서 “얼마면 돼?” 하면서 돈 봉투 내밀면서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한다고요. 개인의 사랑이나 가정의 행복에는 이런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이 무엇이냐 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결혼에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아셔야 돼요. 성경에서의 남자와 여자는 개인적인, 사적인 행복을 위해서, 가정의 좋은 어머니가 되고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결혼을 추구하는 그것 가지고는 접근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남자면서도 진짜 남자를 알지 못하고 여자면서도 진짜 여자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냥 이 세상은 경쟁만 하는 세상이 되어서 남자로 태어난 이유, 여자로 태어난 이유에 대해서 본인 스스로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남녀가 서로 싸우다가 여자가 삐져서 휙 돌아서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남자가 성질나서 말해놓고 가만 생각해 보니 심하게 말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벌써 여자는 저 앞서가 가고 있어요. 이 기회에 저 여자를 돌이키지 않으면 갈라서게 된다는 것을 직감하고 막 달려가는데 여자도 남자가 혹시 뒤따라 올까봐 겁이 나서 본능적으로 막 뛰어가요. 하지만 남자가 더 빠르니까 달려가서 그 여자를 따라 붙였습니다.
자, 달리기에서 누가 이겼을까요? 남자가 여자를 이겼습니다. 달리기에서 이기면 그 남자의 마음이 여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경쟁입니다. 경쟁사회에요. 돈 벌기 경쟁, 공부경쟁, 순위, 서열, 석차, 모든 것이 순서를 매기고 계급을 매기는 사회, 부자와 가난한 자의 서열을 매기는 사회지만 주의 마음에 들어오고 안 들어오고는 그 경쟁사회에서 이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남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남자를 아는 것이 아니고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여자를 아는 게 아닙니다.
지금 고린도전서 11장 이 대목을 펴놓았는데, 여기에 보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하는데 이 내용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계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남자와 여자를 만든 이유는 이것이라고 분명히 성경책 고린도전서 11장을 제시했지만 문제는 여기에 들어갈 방법이 없다면 우리는 겉돌게 되는 겁니다.
이 본문 속에 어떻게 들어갈까요? 한글로 되어 있으니 읽기야 다 읽었습니다만 어떻게 이 세계 속에 들어갈까요? 어떻게 그 남자는 삐진 여자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남녀의 비밀은 그 가운데 죽음이 개입해야 밝혀집니다.
남자는 남자로서 죽으라고 남자가 되었고 여자는 여자로서 죽어야 여자가 될 수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해요. 자신의 성, 남자는 남자를 알고 여자는 여자를 안다고 우기지 마시고 일단 죽음에 양도하세요.
그런데 그 죽음은 자기의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양도가 되어야 돼요. 남자와 여자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땅에 남자는 남자로 태어나야 되고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안 받아들이는 이유는 남자가 남자로서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여자는 ‘여자로 태어났으니 어쩔 수가 없지. 여자의 일생’이라고 하면서 여자로 살려고 하니 평생 살아도 하나님의 비밀에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즉 남자의 통솔자는 그리스도요, 라고 되어있거든요. 그리스도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도바울에게 그리스도라는 것은 이 땅에 오셔서 죽음으로서 모든 비밀을 다 완성시킨 분이 그리스도에요. 하나님하고 그리스도의 차이점은 하나님은 안 죽지만 그리스도는 이 땅에 와서 죽으신 분이에요. 아버지 하나님, 성부하나님은 안 죽지만 성자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필히 죽으셔야 돼요.
죽어야 그게 지혜요, 죽어야 그게 길이 되고, 죽어야 생명 되고, 죽어야 진리 되는 겁니다. 하나의 아들, 남자지요, 남자로서 죽은 그 죽음이 이 세상에서 모르는, 이때까지 인간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몰랐던 생명의 진리를 비로소 이 땅에 성취시킨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심판받고 저주받는 흔적이 예수님, 그리스도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말은 뭐냐? 예수님께 남자로서의 모든 것을 양도하고 여자로서의 모든 것을 양도한다는 말은 양도하고 난 뒤에 뭘 부여받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을 부여받으면서 그 안에서 남자로 태어난 이유, 여자로 태어난 이유를 알아가는 거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이 심판의 죽음이고 저주의 죽음이라면 이것은 곧 남자든 여자든 모든 인간은 현재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느냐 하면, 지연된 자살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오늘도 열심히 살려고 애를 쓰는데 살려고 하는 그 짓이 그냥 자살하는 하나의 몸부림이에요. 매일같이 자살합니다. 죽을 때까지 매일같이 자살하는 거예요. “신이시여, 이렇게 힘들게 살려고 하지만 그래도 죽는 것은 할 수 없지요.” 하면서 열심히 자살하는 가운데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자살로 위장된 처벌이라고 이렇게 저는 표현하고 싶습니다. 자살로 위장된 처벌을 스스로 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처벌로 위장된 자살로 봅니다. 네가 이 땅에서 고생하면서 죽는다고 해서 그 값을 다 치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인간은 그냥 자살하는 행동을 되풀이하면서도 아무런 해답을 건지지도 못하면서 매일같이 자살하면서 오늘도 하루씩 더 자살로 가까이 이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그 한마디에 인간이 어떤 형편에 있다는 것이 완전히 통째로 다 드러나고 말았어요. 남자가 되어도 자살할 수밖에 없는 처벌을 받고 여자가 되었어도 자살할 수밖에 없는 처벌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남자도 죽고 여자도 죽는다면 남자로서의 또 여자로서의 의의가 없는 것 아닌가,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부여받게 되면 남자 여자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규정이 되는 겁니다. 그건 뭐냐? 창세기 3장에서 첫 번째 아담이 범죄한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잊지 않고 끌어당기는 거예요. 요즘 충남이 가물어서 다른 지역에서 물을 끌어와야 된답니다. 그 동네 저수지는 물이 다 말랐으니까. 그러면 충남사람들 먹는 물은 자기 동네물이 아니고 어디서 당겨온 거예요.
지금 남자와 여자가 된 이유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범죄하게 된 사건의 그 저수지 물을 우리한테 계속해서 뿌리고 있고 적용시키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창세기 3장이라는 하나의 계시가 되고 말씀이 되는 거예요. 사적으로 “결혼해서 우리 행복하게 살자.” 계시와 단절된 그런 발언하면 안 됩니다. 그런 발언하면서 자기는 지금 자살하고 있는 중이에요. 이유도 모르는 채로. 이유도 모르는데 그냥 죽어요.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집어넣는 이유는 “너희들의 사적인 행복, 가정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분의 의의, 다른 분이 하신 일을 증명해 주기위해서 “그리스도만 통솔자다. 우리 운명의 주관자다. 우리 운명은 그분에게 달렸다.”는 증명을 위함입니다. 그걸 머리라고 해요. 그 머리 부분을 이 세상에 구체화,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남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가 짝을 이루어서 있는 겁니다. 그렇게 짝을 이루어서 예수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십자가로서 새로운 세계가 형성됨을 남자와 여자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남자가 아니면 여자, 여자 아니면 남자, 두 가지 성중에 하나의 성을 부여받은 겁니다. 개인적인 행복이라는 것은 없어요.
그러면 남자의 역할은 뭐냐? 남자의 역할은 남자는 죽어서 흙이 됩니다. 그러면 여자의 역할은 뭐냐? 여자는 죽으면 생명이 돼요. 여자의 이름이 하와로,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주께서 붙여줬거든요.
하나님께서 남자라는 색종이와 여자라는 색종이를 가지고 생명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따로 구분하는 것은 둘 사이의 만남을 통해서 어떤 서열을 짓기 위함입니다. 그 서열은 뭐냐? 약속의 능력,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이 너를 통솔하고 있는 거예요. 약속의 능력이 왔을 때 우리는 그냥 사람이 아닙니다. 남자로서의 사람으로서 다루어지고 여자로서의 사람으로 다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남자역할 따로 있고 여자역할 따로 있는데 그 역할은 남자역할 했다고 남자 되는 것이 아니고 여자역할 했다고 해서 여자 되는 것이 아니에요. 남자역할 여자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 그 사람에게 덮쳐졌기에 남자는 남자로서 하나님께서 빼먹을 것을 다 빼먹고 여자는 여자로서 빼먹을 것을 다 빼먹고, 나중에 죽으면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천사와 같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 땅에서 남자와 여자는 쓸데 다 쓴 거예요.
상당히 냉혹한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다르다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다른가? 그 역할이 다른 것은 선악과중심입니다. 선악과를 누가 먼저 따먹었는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었다는 그 내용을 남자와 여자에게 그대로 새겨버린 거예요.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선악과가 중요해요. 선악과가 갖고 있던 그 취지, 선악과의 그 본질이 사람 개개인보다 더 중요해요. 사람을 가지고 무슨 본질을 보여주는가? 선악과본질을 보여주는데 필요하기에 사람을 만들되 그냥 만들지 않고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서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의 할 일은 뭐냐? 여자의 할 일은 아기를 낳아야 되겠지요. 해산의 고통.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소리인지 여러분이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 이런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만 남자고 나머지는 다 여자로 만든다는 그 말입니다. 이 이야기가 더 어려운 이야기 같은데 남자는 예수님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여자들이에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겁니다. 여자 만들기 하는 거예요. 진짜입니까? 천국 가보세요. 진짜지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거든요. 나는 왜 그걸 몰랐을까? 자살한다고 그걸 몰랐지요. 돈 벌고 밥 먹고 살면서 자살한다고 그걸 몰랐지요. 그게 처벌인데.
창세기에 선악과 따먹은 순서를 하나님이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누가 따먹었느냐? 여자가 먼저 따먹었습니다. 그러면 남자는? 나중에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거든요. 진짜 어려운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에 사전에 주의조치로서 준 게 아니에요. 너희들이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아시고 말씀을 줘버립니다. 이게 성경해석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에요. “따먹지 말라. 주의해라.” 그렇게 해놓고 ①“아이고, 따먹었어? 내가 따먹지 말라고 했지? 벌 받아라.” 그런 식이 아닙니다. 그런 식 같으면 “앞으로 선악과 못 따먹도록 단단히 만들어놓을 테니까 앞으로는 주의해.” ②그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따먹도록 유도하시는 거예요. 따먹도록 유도해서 말씀으로 죄를 지적할 때 비로소 숨겨진 하나님의 자기비밀이 그렇게 위반하는 가운데서 밝혀지게 하는 거예요.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뭐냐? 자기가 죽어 마땅할 때 가장 가치 있어요. 내가 살고자하면 그게 재벌이 되었든 동사무소 서기가 되었든, 안 그러면 농사를 짓든 간에 그 인간은 천국에 아무 쓸모 짝이 없는 인간입니다. 천국에서 쓸모 있는 인간은 하나밖에 없어요. “주여,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남들은 95세까지 살았는데 우리 아버지는 80세 조금 넘어 돌아가셨다. 참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고요. ‘그동안 80까지 살게 하신 그것도 감사합니다. 진즉에 죽어야 마땅했는데 80년이 넘도록 살았으니까.’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된다니까요, 이런 마음을. ‘주여, 주께서 처벌로 이렇게 죽이신다니 이것은 저에게 당연한 조치입니다. 오래 산만큼 죄도 당연히 많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이런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질 때 그 마음이 선악과 따먹으면 죽어야 된다는 그 말씀과 합당하게 일치된 마음이거든요. ‘나는 살아야 돼’ 그게 아니고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말씀이 내가 사는 그것보다 더 소중합니다. 주님이여!”라는 마음을 가졌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이 시시해 보이는 성경말씀이 내가 밥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그 말입니다.
목회자가 말씀만 전해야 된다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지난번에 누구를 만나서 한 이야기입니다만, 목회자는 교회에서부터 출애굽 되어야 돼요. 교회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목사는 구원이라는 것이 없어요. 회사원은 회사원으로부터 출애굽 되어야 되고 장사하는 사람은 자기가게로부터 출애굽 되어야 되고 농사짓는 사람은 자기농사로부터 출애굽 되어야 돼요. 교사는 교사로부터 출애굽 되어야 돼요. 그게 날 살리는 것이 아니거든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빨리 달린다고 남자의 마음이 여자의 마음속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요.
제논이라는 고대철학자는 거북이와 아킬레스라는 마라톤선수의 달리기경주를 가지고 희한하게 이야기를 했어요. 아무리 마라톤선수가 빨리 달려도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을 거예요. ‘휙 달려가면 앞서지 뭘 못 앞서?’ 제논이 한 말은 “아무리 가 봐야 우리가 갖고 있는 시공간, 마라톤 선수가 갖고 있는 시공간과 거북이가 갖고 있는 시공간은 따로 놀기 때문에 내 시공간으로 앞섰다고 착각하지 말라. 거북이의 시공간 속에 못 들어가면 앞서봐야 그것은 전혀 거북이를 앞선 것이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땅에서 애를 써도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 안에 못 들어가면 그것은 목회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도 아니에요.
성도는요, 성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성도투쟁이어야 돼요. 성도투쟁, 남자는 남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자투쟁, 여자는 여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여자투쟁이에요. 그 남자투쟁과 여자투쟁이 합쳐져서 뭐냐? “우리는 이 땅에서 죽어 마땅합니다. 내가 따먹었던 우리 조상이 따먹었든 우리는 죽어 마땅합니다. 죽는 것이 우리에게 맞습니다.”라고 할 때 그것이 진짜 여자는 여자답고 남자는 남자다운 거예요. 애 낳을 때 해산의 고통이 있다고 “신이시여! 남은 쑥쑥 잘도 낳는데 왜 나는 애 낳는 것이 이렇게 힘듭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시고 “애 낳다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저에게 마땅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애를 낳을 때 창세기 3장 16절에 나오는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라는 이 말씀이 해산하는 나를 통해서 구현되는구나. 주께서 나를 버리지 않고 말씀만 검출되도록, 말씀을 뽑아내기 위해서 나를 사용하시는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성경 앞에서는 사적인 존엄성이나 행복을 찾지 마세요. 우리 가정의 행복 찾지 마세요. 남자 여자는 그것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누가 따먹었느냐? 따먹지 말라는 것을 왜 먹었느냐?” 할 때에 “아담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자를 보고는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할 때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마라톤선수에 비한다면 하나의 거북이의 세계에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말씀은 거북이 안에 있는 그 숨겨진 비밀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선악과에 담긴 내용인데 선악과에 담긴 내용의 진실은 마지막에 십자가에서만 비로소 공개가 돼요.
남자에게 묻고 그 다음에 여자에게 묻고 그 다음에 뱀한테 물었어요. 순서가 그렇게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순서를 통해서 뱀한테 먼저 저주를 하고 그 다음에 여자한테 심판하게 그 다음에 남자한테 심판했습니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인간의 눈에는 보여요. 그런데 마귀는 보입니까? 안보이지요.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진실이 있었던 겁니다. 인간에게도 그런 요소가 있어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눈을 감아도 당신이 보여요.” 얼마나 그리워하고 사랑했으면 이럴까요? “눈을 감아도 당신이 보여요.” 눈을 떠서 볼 때는 사랑이 안 느껴져요. 사랑하는 사람을 커피숍에서 막상 만나면 ‘돈을 누가 내나?’ 이런 생각이 드는데 집에 와서 눈을 감게 되면 ‘당신이 보여요.’ 눈 뜨고 사진 보면 안보여요. 그러나 눈을 감을 때 비로소 보이는 그것, 플러스알파, 그 미지의 사랑의 모습이 보이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위해서 스스로 장님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서편제에요. 판소리하는데 판소리가 안 되거든요. “이년아! 네가 한이 맺혀야 소리가 나온다.” 해서 딸을 장님 만들어 놓으니까 그 때서야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독한 아버지가. 그처럼 장님이 될 때 비로소 보여요.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라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장님 불러다가 실로암 못가의 진흙 발라서 눈 뜨게 해놓고 “영적세계는 눈 떴다는 이유 때문에 영적세계가 가려진다.” 하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아는 영적세계, 눈에 보이는 대로 “나는 남자고 당신은 여자다.” 이것 가지고 기껏 우리가 뭐했습니까? “우리 둘이 사랑해서 행복한 가정 이루자.” 기껏 한 것이 행복한 가정이에요. 자식 낳고 행복한 가정 이루자는 그것뿐이지요. 그 자식이 하나님이 원하는 자식입니까? 아닙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이 원하는 자식은 오직 여자의 후손에서 태어난 자식밖에 없어요. 여자의 후손에서 아들이 나올 텐데 그 아들이 남자, 여자의 성별을 회수해나가면 그 그리스도에게 회수당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머리에요. 통솔자입니다. 숨겨진 영적 진짜 현실, 가짜 현실 말고 진짜 현실을 통솔하는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를 남자로 만들고 왜 우리를 여자로 만들었습니까? 창세기 3장의 그것을 되풀이하라고,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고 있다는 것을 우리보고 알라고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민자가 불렀던 “여자의 일생” 가사를 들어보면 구구절절 눈물이 나요. “고생고생 하는 이것이 여자의 길이라면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하는 그런 내용이잖아요. 여자의 일생, 말만 들어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여자는 이 땅에서 버림받는 것, 비난 받는 것, 약한 자, 남자한테 구박받는 대상, 처음엔 사랑한다고 해놓고 나중에 버림받는 대상. 그래도 여자라고 자기새끼 끝까지 홀로 키우는 그 사연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과 전쟁 Ⅱ>에 죽 나오잖아요. 얼마나 서글퍼요.
사실은 정상적인 경우 같으면 여자는 남자 앞에서 그저 생글생글 웃기만 하면 돼요. 여자보고 돈을 벌어오라고 하기를 하나 농사를 지으라고 하기를 하나, 그저 옆에서 웃기만 해도 남자로서는 그것이 기뻐요. 그런데 생글생글 웃으려면 그냥 웃어집니까? 돈 벌어다 줘야지, 가을되면 새 옷도 사줘야지, 웃음이 나오도록 해줘야 되지요. 그런데 생글생글 여자를 웃게 해야 될 남자가 여자를 고문을 하는 거예요. 결혼한 순간부터 여자를 고문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못살게 굴어요.
그렇게 여자들은 예배당 난로도 채 안 피워놓았는데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주여, 주여! 아버지!” 하면서 “남들처럼 우리 가정은 행복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남편의 마음을 돌이켜 주시고…….” 새벽기도회나 금요철야기도회 때 보면 주로여자들이에요. 남자들은 별로 없어요. 한이 맺혔어요, 한이. 거기에 대해서 목사들은 아주 퉁명스럽습니다. “그것은 여자들이 먼저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렇지 뭐.”
창세기 3장 16절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사모한다는 말은 여자는 머리가 아니라는 거지요. 여자의 머리는 따로 있어요. 따라서 여자가 여자로 태어난 이유는 머리가 네 쪽에 없고 남자 쪽에 머리가 있다는 겁니다. 고생가운데서도 여자가 자식을 낳으면서……, 제가 이 대목에서 새롭게 안 것이 이거예요. 여자가 자식을 낳는다는 그것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자가 애 낳으면 안 됩니까?
여자가 애 낳는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남자가 애 낳는 것이 아닌 이유가 여자가 먼저 선악과가 갖고 있던 그 위상과 본질을 알려주기 위해서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애 낳는 고통은 여자담당으로 넘어온 거예요. 키우는 것까지 포함해서 담당하게 해 놓고 그 다음에 남편을 사모하게 만들어요. 그렇게 30년 동안 고생을 다 해놓고 남편이 그렇게 못된 짓을 했지만 남편의 마지막 교도소 가는 그 길에서 “여보, 내가 기다릴게.” 웃으시는 분들은 드라마 마지막 회를 본 분들이에요. “내가 기다릴게.” 그러거든요.
그래놓고 “8년 후” 이렇게 자막이 뜹니다. 제가 드라마 거의 안보고 어쩌다 보면서도 부러운 것이 뭐냐 하면, “8년 후” 이런 대목이 제일 좋아요. 8년 동안 조용하게 지나갔다는 말 아닙니까? 왜 우리 인생은 그런 것이 없습니까? “15년 후” 왜 우리에게는 그것이 없습니까? 조용하게 지나갔다는 거예요. “8년 후” 또는 “10년 후” 이런 것처럼. 성경에서는 먼먼 미래에 그 여자의 자손이 나옵니다. 이것은 고난 받는 쪽이 메시아의 아픔을 기억한다는 겁니다. 남자에게 치이고 고문당하듯이 살고 평생을 그런 식으로 짓눌려 살고 약하다고 무시당하고 못 배웠다고 생각이 좁다고 얕잡아 보이고 상처받는 그런 ‘을’같은 생활을 했지만 남자는 어떻게 됩니까? 아담은 흙이 됩니다. 아담은 그냥 흙이 돼요.
결국 아담에 준 벌이 뭐냐? 네가 죽어야 된다, 흙이 되어야 된다. 하지만 아내 이름은 생명이라, 부활을 의미합니다. 부활이란 인간의 무능성을 의미합니다. 어느 누구도 부활한 적이 없잖아요. 주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무능하다는 겁니다. “너희는 모두 자살하고 있는 중이다. 맨날 죽어봐야 맨 그 죽음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너희들은 남자는 남자역할 해야 되고 여자는 여자역할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머리,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됨이 등장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여자뿐이고 이 땅에서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 사는 이유를 이제 아셨지요? 인생을 빨리 감아버리면 소멸되어버려요. 인생이란 소멸과정입니다. 빨리 돌려버리면, 천 배속, 만 배속으로 빨리 돌리면 “태어났다, 슝, 죽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천천히 돌리는 이유는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그 약속,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친다는 그 약속을 빼먹기 위해서 우리의 인생을 천천히 돌리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관자입니다. 내 인생 내가 관리하고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주관자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성도는 압니다. 하루하루 내가 달라지는데 그 달라지는 모습이 내가 원치 않는, 나에게조차 낯선 어떤 인간으로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 아니고 다른 모습으로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은 주께서 그 때마다 하나님의 복음과 언약과 약속의 능력을 우리에게서 뽑아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아닌, 주께서 원하는 사람으로 달라지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남들 뒤 따라가다가 그것이 사는 것인 양 착각했습니다. 그래봤자 빨리 돌리면 다 죽어 나중에 누가 살았는지 기억조차 없는 인간존재인데, 주께서 이 땅에 살아 있을 동안에 내가 살지 말고 주님의 약속 안에서 주님의 약속의 관장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