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당
2015년 11월 15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1:17-21
(11: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1:18)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11:19)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11: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11: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실망합니다. 교회답지 않았다는 겁니다. 편당이 발생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추궁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그 와중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이는 특정 파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모든 파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게 아님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뭔가 를 새삼 물어야 합니다. 즉 교회가 뭐기에 파당이 유발되어야 하는가 라는 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파당이란 결국 인간들의 행함이 외부에 튀어나와 뭉쳐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겉으로 보기에 한 교회 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그들이 같은 개념들, 같은 단어들을 주고 받고 있다는 겁니다.
즉 단어는 같고 개념은 갖고, 담긴 의미가 같다고 우기지만 막상 나온 행위들을 보니 서로 다른 개념과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십자가, 교회, 천국, 영생, 성도 기타 여러 가지 용어들을 가지고 교류하지만 서로 딴 뜻들을 그런 용어들에 담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할까요? 하나로 합칠까요?
이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치적 기술에 해당됩니다. 그래가지고 진리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각자 진리를 주장들을 하면서 패가 갈려야 진리가 그 중에서 나온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달리 말씀드려서 진리가 스스로 튀어나오는 방식이 바로 인간들의 행함의 뭉치들로 야기된 분열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각기 다양한 행함의 뿌리를 조사하는 그 지점에서 나옵니다. 평소에 사람들은 자신의 행함의 뿌리를 조사하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관행이고 관습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단독적 입장에서 자기 행함을 분석할 수도 있지만 그 뿌리는 순전히 자기만을 위한 욕망이 행함의 뿌리인 것입니다.
관행과 관습이란,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해서 나온 행함만을 인정합니다. 즉 자신의 뿌리는 모르는 채 남들이 요구하는 대로 맞추는 식으로 살아가는 습관이 곧 관습입니다. 이렇듯 특정 가문이나 가족이나 공동체나 교회 내에서 통용되는 진리는 어디까지 자기충족적이며 자기만족적입니다.
“우리끼리 맞으면 됐다”는 겁니다. 이것은 남들도 다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파당이 발생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런 것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간 밖의 능력이 시간 안에 들어와서 생겨난 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셔서 밝혀진 상황은,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 법이 합당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해서 인간들은 도무지 '누구를 위한 행위며, 무엇을 위한 행위’인지를 궁극적으로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늘 자기의 발목을 잡고 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흘러들어온 선지자들의 글들마저 자신의 미래의 꿈 달성용도로 사용합니다. 자기가 알고자 하는 그 시도 안에 이미 자기를 위한 행위가 발동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무엇을 안다고 할지라도 ‘나를 위한 정보수집’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는 곧 자기만을 위한 비디오 게임을 벌리면서 평생을 보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기존 세계에서 고생스러운 생활을 보상한 신세계에서 주어진 생명을 원합니다. 마치 비디오 게임에서 게임에 중도에 목숨을 잃더라도 여유분의 생명을 두 개나 세 개 더 주듯이 말입니다.
즉 인간들은 죽음의 두 영역이 있음을 모릅니다. 하나는 물리적 목숨을 잃는 영역과 또 다른 하나는 인간들이 아무리 애써도 들어갈 수 없는 영역으로서의 죽음 세계입니다. 이러한 오류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납니다. 이사야 26:19에 보면, “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신나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이 말씀이 좋아보인다는데 있습니다. 마치 자신들의 미래인양 현재의 본인들이 성급하게 결론 내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만이 이 세상에서 특별히 택함받은 백성이기에 이 말씀으로 자신의 미래를 좋게 확정난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점의 자신의 뿌리를 제대로 모른 착오입니다. 이게 바로 비디오 게임놀이에서 중도에 일찍 실패할 것을 염두해서 시작하는 생명 몇 개를 더 얻게 되는 여유감과 같은 겁니다. 비록 이 땅에 실패한 생명이라도 천국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자없는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만듭니다.
물론 하나님의 약속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어떤 성경 말씀이라도일단 인간의 마음을 거치게 되면 왜곡된 해석과 왜곡된 행위를 유발시키게 됩니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의 뿌리는 문제있다는 말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에 해당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옛과 새것은 인간에게는 둘 다 옛 것이 됩니다.
천국에 대한 희망마저 옛 것입니다. 구원마저 옛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옛것은 어디있고 어떤 방식으로 도출될까요? 그것은 기존의 모든 것(심지어 천국의 새 것까지)을 옛 것으로 만드는 효과를 동반하면서 새 것이 나옵니다. 새 것은 인간이 건드릴 수 없는 곳에 따로 있다가 튀어납니다.
그곳이 바로 예수님 안입니다. 새 것은 예수님만이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생명을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생명입니다. 생명 안에 있는 자만이 생명의 효과를 누리게 되고 그것이 밖으로 표현될 때는, ‘자기 실패’로 나타납니다. 즉 ‘내가 하는 것들은 뭐가 되었든지 모두 죄다.’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 가서야 진짜 가짜가 들통납니다. 마태복음 13:47-52에 보면,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은 ‘마지막 때’를 위한 증빙자료를 끄집어내는 장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진정한 구원은,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성도의 실패담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행함은 그가 예속된 분을 소개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진정 우리가 주님의 성도라면 실패케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에 고마움으로 표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5강-고전 11장 17-21절(편당)15111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1장 17-21절입니다. 신약성경 276페이지입니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이는 시장하고 어떤이는 취함이라.”
사도바울이 교회에 대해서 실망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뭔데요? 교회가 뭐기에 실망이라는 말, 칭찬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느냐는 말입니다. 교회가 뭔가를 너희가 놓쳐버리고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압니다.”라고 이야기들 하거든요. 그런데 그 아는 것 속에는 반드시 행함이 들어 있게 되어 있어요. 내가 뭔가를 안다는 것, 너도 알고 나도 안다, 그러면 같이 아는 입장에서 행동을 보게 되면 안다는 것의 실체가 드러나요. 같이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행동은 서로 엉뚱하게 나타나버리면 다시 그 원래의 안다는 것을 마주쳐 보자는 말이지요.
같은 용어를 쓰고 같은 개념을 써도 모르는 것이 돼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희들이 교회의 성도라고 주장하고, 성도라는 것, 그리고 교회가 뭔지를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행동은 왜 다른가, 행동은 왜 틀리게 나오느냐는 그 말입니다. 같은 게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면 같은 게 아니면 합칠까요?” 합치지 말라는 겁니다. 이게 묘미에요. 이게 복음의 묘미인데 보통 어떤 단체가 문제가 있다 하면 화합하려고 애를 쓰잖아요. 여기에 동원되는 상투적이 찬송가가 있어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옆 사람과 어깨동무하고 찬송 부르면 화합이 된 겁니까?
그냥 네 주장대로, 네가 알고 있는 대로 그냥 밀고 나가라는 겁니다. 그게 진리가 나오는 방식이에요. 합하는 게 아닙니다. 단합대회 하는 것이 아니에요. 고집이 고집대로, 개성이 개성대로 그대로 발산될 때 그게 교회다운 거예요. 식구 많으면 바람 잘 날 없다는데 부모 입장에서는 온 형제가 하나 되기를 원하지요. 하나 되기를 원하지만 식구들 마다 개성이 다 다르지요. “무슨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저건 다리 밑에서 주워왔나?” 할 정도로 튀는 형제도 있고요. 다른 형제는 다 예쁜데 뭘 해도 혼자 못난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부모도 알지만 형제간에도 너무너무 잘 알거든요. 옛날 같이 형제간 많을 때는 형제간 끼리 비교에 들어갑니다. ‘나는 형보다 공부 못한다.’ 하면 이것이 평생 트라우마로 작용해요. ‘나는 언니보다 예뻐.’ 하면 평생 자만심으로 다가오겠지요. ‘못난 언니하고 예쁜 나하고 누가 시집 잘 가나 보자.’ 이렇게 시집가는 것으로 결판을 내고. ‘우리는 형제’니 ‘우리는 한 지붕 한 가족’이라고 해도 그 사람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본질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이야기는 뭐냐? 교회가 무엇인가, 한다고 우기지 말고 교회의 뿌리를 캐라는 겁니다.
왜 교회의 뿌리를 캐야 되는가? 인간의 몸은 법과 관습에 쉽게 물들게 되어 있어요. 관행에 물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던 행세대로 해 놓고 그걸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우기게 되어 있어요. 겉치레, 관행, 관습, 집안의 가풍, 이런 것들이 뿌리를 방해합니다. 뿌리를 방해한다는 것은 내 행동의 뿌리, 자기의 본질에 대해서는 모르게 되어 있지요. 교회, 하니까 굉장히 거룩하고 고상해 보이지요. 그 고상한 것, 거룩한 것, 뿌리를 한 번 캐보라는 말이지요. 어떻게 캡니까?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 그것은 인간이 안다는 그 밑바닥에 내려진 각각의 행동의 뿌리를 캐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네 행위가 나오게 된 그 뿌리가 뭐냐를 묻는 겁니다.
인간은 행위유발자에 예속되게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행위 같으면 하나님께 예속된 사람이고, 교회에 예속된 사람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행동하는 사람은 그 누구한테도 예속된 적이 없고 자기 뿌리는 자신의 욕망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자기 뿌리를 보는 거예요. 그런데 뿌리를 안 캐려고 해요. 겨울이 되어서 좀 낫습니다만 여름이 되면 설교자들이 애먹습니다. 다들 주무시기 때문에. 뿌리 캐라고 왔는데 다들 자고 있어요. 뿌리를 캐면 자기 욕망밖에 나오지 않으니까. 자기 욕심밖에 안 나오거든요.
뿌리를 캐면 자기 욕심밖에 안 나오는데 그래가지고 어떻게 진리를 아는가? 그 때는 각자 개성이 다른 사람들, 편당이 유발되는 모임, 교회에 가서 내가 아는 십자가, 네가 아는 십자가, 내가 아는 예수님, 네가 아는 예수님이 어떻게 차이 나는가를 경험해 보라는 겁니다. 경험해 보면 자신의 뿌리가 서서히 밝혀지지요. 어느 나이 많은 할머니 둘이 논쟁을 합니다. 후포에 사는 할머니는 후포미역이 맛있다는 거예요. 마라도 사는 할머니는 마라도미역이 맛있다는 겁니다. 객관적인 증빙자료를 들이대야 하는데 후포의 할머니, 그 사위가 남 서방 인데, 그 후포의 할머니가 계속 우기는 것이 뭐냐? 후포의 미역을 안 먹어봐서 그렇다는 거예요.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안 먹어봐서 그렇다는 거예요. “후포 미역 먹어보면 맛있는 것 다 안다.” 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자신의 뿌리는 결국 자기밖에 없지요. 자기밖에 없다는 것은 모든 행동이 나는 나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이 모여서 교회가 이루어졌으니 교회란 것은 외부인이 보기에 “결국 자기주먹 흔들면서 자기 잘났다는 것밖에 안 된다.” 그렇게 보지요. 오늘 본문 내용을 다시 말씀드리면 “참 교회가 실망스럽다. 왜? 교회에 파당이 생겼다.” 그렇게 해 놓았으면 계속 실망으로 나가야 할 텐데 19절에 보면,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분명히 교회가 실망스럽고 칭찬할 것이 없다고 해놓고, 그렇게 나무라기는 나무라면서 그렇다고 진리가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주님의 계시를 받아서 이런 말씀을 하는 거예요. 꾸중을 들으면서도 진리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너희들이 나한테 꾸중 듣는 것은 당연하지만 너희들 자신을 진리라고 생각하지는 말아라. 너희들 못난 것들끼리 모인 현장에서 뭐가 나오는가? 진리가 나타나고 발생하게 되어 있다.” 하는 겁니다.
미국의 정당은 양당제도입니다.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제고 현재 우리나라의 정당 숫자가 16개입니다. 전부 자기가 잘난 거지요. 녹색당이 있으면 빨강당, 파란당도 나오겠지요. 우리나라 대한예수교장로교 교단만 250개정도 돼요. 작년에 우리나라에게 개척교회 제일 많이 한 교파가 장로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교단이 250개인데 신학교 하나씩만 세워도 거기서 나오는 졸업생들이 나가서 교회 하나씩 세우면 제일 많지요. 각자 전부 다 예수 이야기합니다. 진리이야기하고, 영생이야기하고, 천국 이야기도 다 합니다. 그런데 그 개념이 같은가 하는 것은 그 개념에서 어떤 행위가 나오는가, 그 행위를 봐야 돼요. 그 안다는 그것이 행위의 뿌리와 연관되어서 붙어 있기에 그 행동을 보고 알 수가 있습니다.
제 취지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커피숍에 앉아서 커피 마시면서 진리가 무엇이며, 신앙이 무엇인지 토론을 약 두 시간 반 동안 실컷 했습니다. 어느 정도 진리를 정리했다고, 이제 신앙이 뭐다, 알았다고 여겼지만 나오면서 커피 값은 누가 내는가, 그것이 진리에요.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이 내게 되어 있어요. 은혜 많이 받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번 논쟁에서 내 뿌리가 거짓이라는 것을 발각당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에요. 진리 앞에서 내가 가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진리를 품고 사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보통 세상에서의 파당이나 편당은 자기가 옳다는 거예요. 자기마을 미역이 더 맛있다는 거예요. 너희들은 안 먹어봐서 모른다는 거예요. 마라도 할머니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지요. 제가 그 대목을 안 봤고 그냥 들었습니다만. 여기서 우리의 관점은 뭐로 바뀌는가? 그러면 서로 자기가 옳다고 하고 자기 잘난 체를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어떻게 진리가 나오느냐 하는 그 문제가 남아 있는 겁니다. 그게 궁금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나무라면서도 진리는 계속 나온다고 하니까 도대체 무슨 근거에 의해서, 어떻게 그것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행함이 있는데 인간들의 행함의 틈바구니에서 주님의 행함이 나오는 거지요. 이 세상의 어떤 일치되지 못한 의견들이 충돌되는 이유는 시간 밖에 있는 요소가 시간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창세기 11장에 근거한 겁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그 때에 사람들의 마음이 일치가 되었어요. 바벨탑을 쌓은 겁니다. 하나같이 동일했어요. “지상에서 하늘까지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가 아는 것을 모아보면 하늘도 뚫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진리를 다 끄집어내자. 그러면 그 진리가 정답이 되어서 하나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늘나라에 입성시켜 줄 것이다.” 이것이 인간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이런 공통된 의견자체가 전부 다 가짜라는 생각이 거기서 발생되지가 않아요. 왜? 의견이 하나같기 때문에. 그래서 의견은 달라야 돼요. 하나가 되면 전제주의가 되고 독재가 돼요. 하나같으면 안돼요. 달라야 돼요. 역사교과서가 국정 화되면 안 된다는 논리가 바로 그 이론입니다. 서로 다른 내용의 취지의 역사가 있어야 취향대로 골라잡을 것이 아닌가, 하는 거예요. 반면에 국정교과서를 찬성하는 쪽은 “역사가 취미삼아 하는 놀이 같은 것인가? 미래가 달린 문제다.” 이렇게 반대하는 겁니다.
어떻게 진리를 뽑아내는가? 이것이 핵심인데 이렇게 뽑아냅니다. 어릴 때 비디오게임이 처음 나왔을 때 신기해서 해 본 것이 있어요. 약 30년 전인데 ‘울프3’라는 것이 있었어요. 생명을 세 개 줘요. 하나 실패하면 하나 더 주고, 또 실패하면 하나 더 주고, 그것마저 실패하면 “게임 끝, 돈 넣으세요.”라는 문구가 뜨지요. 그것 말고 또 다른 것은 외계비행체와 싸우는 것이 있어요. 요즘은 그런 게임 하라고 하면 시시해서 하지도 않을 겁니다. 비행기 부서지면 몇 대 더 줘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죽음의 영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내 목숨이 죽으면 또 한 개가 있고, 그 목숨이 죽으면 또 한 개가 있고, 그것마저 죽으면 돈 넣으면 목숨 하나 또 주는 그 영역이 있어요. 다른 하나는 아예 게임 자체가 날라 가버리는 영역이 있어요. 여기서 사람들이, 기독교나 모든 교회에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목숨이 죽으면 또 하나 더 주겠지. 세상 목숨, 이 물리적인 목숨이 죽으면 천국 가는 목숨 줄 거야. 그게 예수님의 생명일거야.’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거 지금 놀이, 게임하고 있어요.
두 가지 죽음의 영역, 하나는 뭐냐 하면, ‘현재 내 목숨 죽으면 하나님이 준비한 목숨을 준비해 주시겠지.’라고 기대하고 교회 꾸준히 다니는 그런 영역, 그게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의 영역인 반면에 성경에서 소개하는 영역은 아예 판 자체가 깨져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죽어서 천국가야지.’라는 판 자체가 없는 판이에요. 있지도 않은 판인데 마귀가 우리를 꾀어서 선악과 따먹어서 환상적으로 만든 게임이 바로 기독교라는 게임, 교회라는 게임이에요. 성경 해석을 그렇게 해요. 모든 종교적인 꿈과 이상이 그거잖아요. ‘이 땅에서는 고생했지만 죽어서는 영광 누리자.’ 그 욕망이거든요.
그 욕망이 우리의 뿌리가 되었고 그 뿌리에서 나오는 행함이, 그 사람이 절에 가든 교회 가든 똑같아요. “나 잘났다.” 그러니 교회에서 파당이 생길 수밖에 없고 편당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만큼 교단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따져봐야 돼요. 여러분의 행동이 누구를 위한 행동입니까? 경북 후포리의 남 서방 장모가 “우리 미역이 최고다. 우리 미역 먹어봤나?”라고 하는 그 말, 그 행위를 할 때 그 행위는 누구를 변호하고 누구를 사수하기 위한 변명이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자기, 자기영역이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비디오게임이라니까요. 자기는 비디오 게임 속에 지금 포함되어 있어요. 그 판 자체가 날라 갔다는 것을 본인들이 생각을 해줘야지요.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는 그것이 마귀가 만든 게임 판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언제 자각하고 언제 깨닫게 될까요? 평소에 교회 놀러 다니잖아요. 보험 들어놓은 것처럼.
무엇을 위한 행위입니까? 누구를 위한 행동입니까? 커피 점에 앉아서 두 시간 반 동안 진리토론, 신앙토론 했는데 누구를 위한 변명이었고 누구를 위한 토론이었습니까? 결국 커피 값을 내는 사람은 자기 부인을 한 사람이에요. 아, 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전부다 헛된 겁니다. 헛되지 않기 위해서 그냥 친목놀이하고 취미생활 하는 겁니다. 내가 교회 간다고 결심해서 갔다. 앞자리에 앉는 것도 결심해서 했다. 생중계 듣는 것도 내가 선택해서 결정한 문제다. 그 모든 뿌리가 나의 욕망에서,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한 욕망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저에게 묻지요. “그것이 욕망에 불과하고 다 마귀의 탐욕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요? 기껏 나올 수 있는 것이 그것이 전부인데 그럼 나는 어떻게 해요?”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것으로 믿음이냐 아니냐를 결정해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해요?”라는 말이 안 나와요. 내가 잘못될 때 주 앞에 박수치는 것이 믿음이에요. 왜냐하면 누가 이미 나에게 결정했기 때문에 나는 이제부터 성공하면 안돼요. 실패해야 돼요. 매일 같이 실패해야 돼요. 생명 열 개주면 다 외계비행체에게 격추당해야 돼요. 백 개 주면 백 개 다 격추당해야 돼요. 15년 연장해 주시면? 히스기야 생명 15년 연장 해줘봤자 실패한 것밖에 없습니다. 링커 꽂고 코에 산소마스크 씌우고 그렇게 해서 더 살아봐야 낭패다. 킬러에게 쫓기지 마시고 킬러에게 목숨을 맡기세요.
지금 우리의 뿌리가 교체되어야 됩니다. 대타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대신 죽으심이에요. 왜 대신 죽음을 그렇게 무시합니까? 그래놓고 무슨 중보자를 믿는다고 하는 거예요? 주께서 대신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혼자 놓아두면 “나 실패하면 어떡해요?”라고 하면서 교회 와서 사기당하고 있는 거예요. 목사들에게, 기독교교리에게 사기당하는 겁니다. 옛것이 죽고 새것이 된다고요? 새것이 죽어야 옛것이 나와요. 이미 새것이기 때문에 마음껏 옛것을 끄집어내는 것이 숨어있는 새것의 위력이고 능력입니다. “네가 이런 인간이잖아.”라고 옛것을 끄집어낼 때 그 사람은 새것,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그런 안목으로 성경을 볼 줄 알아야 돼요. 그동안 전부 다 거꾸로, 반대로 살았어요.
제가 20년 전 어느 교회에서 설교할 때 이런 해석을 하니까 장로들이 깜짝 놀랐어요. 좋아서 놀랐는지 거부감 때문에 놀랐는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라는 내용이 나오거든요. 그 사람들은 그동안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 하나님께서 밟아도 되는데 끝까지 밟지 않고 결국 우리를 구원해준다는 쪽으로 해석해 온 거예요. 그런데 제가 그 해석이 틀렸다고 했어요. “그 해석은 틀렸습니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이유는 끝까지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이 얼마나 화를 내고 있고 하나님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서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북한의 김정은 같은 거, IS같은 테러집단, 그렇게 기도하면서 죽으라고 해도 안 죽고 활개 치잖아요. 그게 주님의 심판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테러집단이나 김정은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수님한테 관심 없습니다. 말씀에도 관심 없어요. 그저 내 욕심, 나는 잘났다는 그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안 죽고 살아 있잖아요. 주님의 심판과 분노와 화냄을 증거하고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지렁이가 밟아도 꿈틀하는 이유는 제대로 안 밟아서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에요.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너희에게 파당이 있구나. 실망스럽다. 하지만 진리는 그렇게 편당이 있는 그 와중에 비로소 나타나고 솟아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진리 제 편이지요? 제 편 맞지요?” 이렇게 하지 마세요.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미 사도바울이 거부를 했어요.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하여튼 좋은 것은 알아가지고 다 갖다 붙여요. 이런 현상이 오늘날도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나는 건강식품 뭐 먹는다.” 이런 식으로 서로 건강하다고 자랑 질을 하는데 여기에 좋은 것은 다 갖다 붙이는 거예요.
여기 보면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어떤 사람이 “나는 사도바울 편이에요.”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이게 어디서 앙탈을 부려? 당신이 내 편이라고 하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아?” 어떤 사람은 또 겁나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 이것은 “네가 그러면 내가 신자라고 쳐줄 줄 알아?” 그런 뜻이에요. 인간은 모조리 가짜입니다. 가짜인데 그냥 가짜가 아니라 가짜 티가 나야 돼요. 숨겨진 진리 앞에서는 반드시 가짜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래서 교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가 있는 교회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너희가 어떻게 가짜라는 것이 들통 나겠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지요. 실제로 있었어요. 가나안 땅에 실제로 정착한 어떤 특정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천상회의에 참석한 많은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때 그들은 크게 오해했습니다. ‘우리들만이 특별히 선택된 민족이라서 우리들만을 구원하기 위해서 선지자 보냈구나.’라고 오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한 백성이라서 선지자를 보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고 맞는 말이에요. 그게 맞는 말인데 그들이 말하는 순간 그게 자아를 경유하기 때문에 같은 말인데 틀린 말이 되고 말아요.
제 말이 어렵지요?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 그게 맞는 말인데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를 경유하기 때문에 그것이 틀린 말로 상대방에게 전달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진리는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가지지 않습니다. 성도는 생명을 가지지 않아요. 그러나 성도는 생명이 있어요. 그러나 가지지는 않아요. 생명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곧 생명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생명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믿는 자가 생명을 가진 자라는 말이지요.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은 재벌 집 애가 이런 말을 했어요. “야! 너 재벌이지?” 그 애가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가 재벌이지 나는 재벌 아니야.” 그러면 그 애는 가난한 겁니까? 부자 아닙니까? 부자 맞아요. 재벌 집 애 맞지요? 하지만 그걸 나한테 귀속시키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나를 증거 하는 것이 돼요.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어 있지 나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은 십자가마을에 이렇게 글을 올려놓았어요. “죄를 알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법을 순종해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죄 알아서 뭐하는데요? 죄 알아서 뭐할 건데? 네가 왜 죄를 알아야 돼? 말씀을 어겨야 죄가 됩니까? 그냥 막살면 죄 안 됩니까? 막 살아도 죄가 된다는 것이 나중에 성경 보게 되면 다 나오거든요. 성경 말씀 지키면서 ‘안 되는구나. 죄다.’ 이런 것은 내가 나를 구원하고자 하는 마귀적인, 그 뿌리에서 나온 행위가 돼요. 그 발상자체가. 내가 죄 알고 죄를 아는 상태에서 예수 믿으면, 그래서 예수님과 결합이 되면 구원된다는 그 말이지요. 결국 노림수가 뭐냐? 다 자기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가 스스로 새사람 되기 위한 시도라는 말이지요.
그걸 아예 콱 밟아버리면 어떻게 되지요? “뭘 압시다. 지킵시다.” 할 것도 없지요. 그게 밟힌 상태가 사는 상태에요. 주님에 의해서 막 사는 상태. 내가 뭘 할까, 그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저는 말합니다. 실 끊어진 연이 되세요. 실 끊어진 연이 되는 자신감이 있어야 됩니다. 바람 불면 부는 대로. ‘그러면 안 될 텐데?’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왔어요.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붙잡고 있는데 제발 자기를 좀 놓아주세요. 자기를 붙잡고 잘된 자기를 관리하지 마세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이유가 뭐냐? 자기가 이스라엘이라고,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이니까 그걸 붙잡고 잘해보자고 한 거예요. 선지자 말씀대로 순종해서 잘해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에게 주께서 놀리듯이 계속 선지자를 통해서 계시를 주는데 그 계시 중에 하나가 이사야 26장 19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볼 테니 여러분이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여기고 이 말씀에 대한 기분을 스스로 파악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1번, 기분 좋다. 2번, 기분 더럽다. 몇 번입니까? 이것은 누가 봐도 기분 좋은 거예요. 왜? 비디오게임에서 생명하나 더 얻은 것이 되니까. ‘내가 놀던 게임 판을 주께서도 같이 인정해주시는구나.’하는 그런 기쁨이에요. “내가 지금 하는 짓이 잘하는 짓이라고 주께서 동의해주는 조로 아름다운 희망적 미래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주니 이 큰 선물이 참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하잖아요. 이러한 고마운 기분이 오늘날 교회들을 만들어낸 거예요. 그래서 교회들이 가짜가 되는 겁니다.
이 구약 말씀이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납니다. 십자가 사건을 누락하고 그걸 비켜가고 돌아서가버리면 오늘날 죽어서 부활된다는 것을 믿는 일반적 교회나 멸망당할 이스라엘이나 똑같이 되고 마는 겁니다. ‘역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는 하는 모양이다. 이 땅에서 고생만 하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이것은 평소에 내가 더 살고 싶어 하는 자신의 뿌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동의해주는 조로 간 거예요. 자신의 뿌리가 자신의 욕망이고 욕심이라는 그것에 막혀버린 거예요. 그것이 끝이에요. “나는 살고 싶다. 끝!”
주님의 십자가는 “그런 인간, 너는 죽어 마땅해.”라고 하는데 이게 없어요. 죽어 마땅하다는 뿌리가 없고 “나는 무조건 살고 싶어. 끝”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살고 싶은 사람에게 주님께서 “너는 죽어 마땅해.”라고 한다면, “그러면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고백하면 살려줍니까?” 이렇게 끝까지 자기의 살고 싶은 것을 포기를 못하잖아요. “내가 죽어 마땅합니다, 이걸 몇 번 언급하면 생명 하나 더 줍니까?” 이런 식으로 또 흥정에 나서게 되겠지요. 되지도 않는 꼼수를 쓰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십자가사건을 실제로 경유하지 않아서 그래요.
제가 건방지게 진리를 말씀드릴게요. 죽을 사람은 죽어야 돼요. 딴 생각 하지 마세요. 죽을 사람 죽어야 돼요. 그게 끝이에요. 주께서 죽이면 그냥 죽으세요. 그리고 본인이 주께서 죽이기에 죽는다는 것을 매일 같이 늙어가면서 체험하시거든 산 사람입니다. 그게 산 사람이에요. 무지하게 간단한 이야기거든요. 왜 그런가? 십자가 사건, 구약은 십자가사건 안에 다 소집됩니다. 십자가 안에 다 모이게 되면 거기서 이사야 26장 19절대로 살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인간도 아니에요. 오직 예수님만 살아야 돼요. 어딜 건방지게, 주제넘게 예수도 아닌 게 예수 흉내를 냅니까? 예수님만 살아야 돼요. 아무도 살 사람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 죽어야 될 사람입니다.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을 구분하지 마세요. 똑같습니다. 교회 와서 일상생활 하시고 일상생활 하면서 일상생활 하세요. 그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분들을 실패자로 규정해서 죽여주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호빵 같은 사랑의 손길이 여러분들의 모든 기대가 무너지고 실패로 끝나는 복된 조치를 취해주실 겁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고 늘 사랑해주시는 것을 감사하고 늘 춤추는 고백, 그 고백이 있어야 돼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떻게 살까요?” 고백하면 돼요. 그냥 고백하면 돼요. 별짓 하지 마시고 고백하세요. 모든 일상에서 ‘아, 정말 또 실패하게 하시는군요.’
그래서 실패와 성공은 어떤 실적가지고 따지면 안 됩니다. 자기 계획이 잘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성공 아니에요. 그것은 실패의 또 다른 면이라고 보면 돼요. 퇴직해서 치킨 집 차렸는데 잘된다. ‘오늘도 실패다.’ 하고 매일 손님 받으면 돼요. 점포 세 개 네 개 차려도 그게 실패에요. 왜냐하면 어차피 그 가게 연 것이 자기 일이 아니잖아요. 자기 일이 아니기에 내 일이 아님을 인간 같지도 않은 나를 통해서 실습시키는 겁니다. 집 밥 백 날 지어봐야 실패에요. 설탕이나 때려 붓고 백날 그래 봐야 실패에요.
늘 실패하는 그 재미, 실패하면서 ‘아, 밥은 역시 아내가 해야 되는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새로이 은혜가 더욱더 부각되는 겁니다. 딸이 “내가 할게요.” 남편이 “내가 할게요.” 편당이나 파당은 그 안에서 발생되는 거예요. “우리 다 가짜다. 전부 다 가짜다. 밥은 역시 아내(엄마)가 해야 돼.” 이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걸 함축해서 말씀하는 것이 요한복음 14장에 나옵니다. 아까 우리가 교독문에서 읽었는데요. 46번 마지막 대목에 보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미 아버지를 다 알고 있는 판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렇게 예수님을 집어넣은 거예요. 집어넣은 순간 그들은 예수님이 미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욕망이 나오는 그 뿌리가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아무리 교회 다니고 복음 알아도 또 자꾸 새로운 일을 시도하고 싶고 예수는 별로에요. 예수 믿기 싫어요. 하나님은 좋아하지도 않고, 말씀은 근처에 가기도 싫고, 예수 믿기도 싫고, 그냥 혼자서 꾸역꾸역 뭔가 해요. 이거 해보다 안 되면 저거 해보다, 그렇게 뭔가 하고 싶어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게 하시는가? 너의 실패를 실패로 드러나게 하는 그것이 나의 구원의 성공작이라는 사실을 네가 믿느냐를 묻는 거예요. 맨 날 주님 찬양한다고 기뻐하고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눈물 흘리고,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끔 미쳤을 때나 나오는 짓이고 정상적인 짓은 뭐냐? ‘여전히 나는 혼자 있고 싶어요.’ 이거거든요. 그냥 혼자 있고 싶어요. 내가 하는 그 아기자기한 그것, 소박한 그것, 혼자 호호 웃으면서 자기가 자기 행위를 보고 만족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남에게 자랑 질 하는 그것이 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 실패의 여정이 주님의 구원의 작업이라는 말이지요. 왜? 역시 나는 나로 말미암아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계속 들춰내거든요. 죽을 때까지 계속 들춰내요. 죽을 때까지 십자가 안 붙들어요. 죽을 때까지 자기 붙들고 있어요. 계속 그걸 들춰내고 있어요.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이게 진리에요. 길게 이야기했습니다만 짧게 다시 이야기하면, 진리가 무엇인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 내게 없는데 외부에서 나에게 덮치는 산사태 같은 것,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나 중심의 비디오게임인데 그 비디오게임 판 자체가 게임 오버, 끝나버리는 것.
마태복음 13장 49절에 방금 제가 언급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세상 끝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몇 시간을 해야 되지만 그것은 대전에서 열리는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요한계시록 강의할 때 하기로 하고 참겠습니다. 미리 잠간 당겨보면 이렇습니다. 시간의 끝이 세상 끝이 아니고 이 세상 공간을 시간의 끝으로 보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안목입니다. 우리는 공간이라고 보잖아요. 주님께서는 이걸 종말로 보는 거예요. 시간 끝에 가면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세상을 통해서 종말을 퍼내는 겁니다. 종말 덩어리, 다이아몬드 덩어리, 이 금덩어리, 하는 식으로 종말 덩어리를 캐내서 하늘로 바치는 그것이 일곱 나팔, 일곱인, 일곱 대접이에요.
우리는 지금 종말의 지옥에 살고 있는 겁니다. 시간 끝에 가면 알 수 있겠지? 아니에요. 지금 살고 있는 바닥, 이 공간이 세상 끝이에요. 보통 세상 끝이라고 하면 시간적 개념인데 이걸 공간적 개념으로 바꾸는 겁니다. 그 세상 끝에는 어떻게 되는가?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보세요, 인간은 빠지잖아요. 인간들이 있어도 소용없어요.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기에 대해서 “악인도 있지만 의인도 있잖아요.” 할 때, 성경에서 의인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 없’다고 할 때의, 그 아버지께로 갈 자 없는 그 자는 악인이에요. 아버지께로 갈 자만 의인되는데 아버지께로 갈 자는 예수님 혼자밖에 없다니까요.
오늘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혼자만 가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뿌리가 된 사람은 내가 하는 평소의 모든 행동은 실패라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뿌리로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뒤돌아보세요. 실패 아닌 것이 어디 있어요? 모든 게 실패에요. 실패할 것이 또 남아 있어요. 52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새것과 옛것이라는 것은 옛날 구약사람들이 착각을 해서 ‘야, 이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다. 그래, 죽은 자가 부활된대.’ 그들이 기다렸던 그 부활은 엉터리부활이거든요. 그 부활, 새것, 옛것, 십자가 앞에서 다 날라 가버립니다. “네가 생각한 새것은 네 욕망에 의한, 욕망의 연결성에서 나온 새것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 너로부터 출발한 것은 마귀로부터 출발한 것이거든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한 새것의 이 땅의 모습, “실패자입니다.” 라는 이것이 새것이에요. 누가 감히 인위적이지 않은 이런 낮춤이 나오겠어요? 누가 감히 인위적이지 않은, ‘내가 이것 고백해서 천당 가야지.’라는 노림수가 전혀 없는, 주께서 그렇게 하셨기에 입에서 나오는 희한한 고백.
자식이 사법고시에 합격하니까 “축하합니다.” “축하는 무슨 축하요? 계속 일이 남았습니다.” 서울 의존교회 갔더니 새신랑이 왔어요. 일단 축하한다고 했어요. 그러고는 “부인이 한의사라니까 남들 보기에는 장가 잘 갔다고 했겠지만 결혼 해보니 날마다 새로운 과제가 주어지지요?” 이런 조로 이야기했어요. 새로운 과제가 또 오는 거예요. 또 ‘어찌할꼬? 내가 여기서 실패하면 어떡하지?’ 다음 날 되면 ‘여기서 내가 실패하면 어떡하지?’ 실패 안 해도 주께서 실패하게 해주니까 실패하거나 안할 걱정은 네가 할 필요가 없어요. 있는 것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실패자인데 여기서 뭘 더 실패해요? 살아 있는 이상은 자기 살겠다고 욕심을 챙기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데 더 이상 얼마나 더 실패하려고? 그냥 사시면 그게 실패입니다. 그냥 사세요. 약간 속도를 가미한다면, 막 사세요.
옛것과 새것은 우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관리해서 십자가로 내 놓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너로 말미암아서는 천국 갈 수 없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 너는 생명을 갖지 말고 생명의 증인 되어라.” 생명은 내가 아니고 따로 계십니다.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진리를 소유하지 말고 진리에 붙잡혀서 “나는 뭘 해도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