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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62강-모든 것의 취지(고전10;23-29) 1510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0. 12. 07:33

2015-10-11 12:36:25 조회 : 60         
   모든 것의 취지 151011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모든 것의 취지(고린도전서 10: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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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10-11 13:16 
모든 일의 취지

2015년 10월 11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0:23-29

(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10: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10: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10: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10: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10: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우리의 양심이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인간의 양심이란 시간적으로 중첩된 기억덩어리입니다. 외부의 잔소리와 교훈과 양육될 내용들이 학습에 의해서 쌓인 것이고 내부적으로 조정된 것이 양심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태어나면서 이미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공동체는 바로 가정이요 학교요 교회에 직장이요 군대에 동창모임에서 친목단체입니다. 사람들은 그 공동체에서 추방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무서워합니다. 어릴 때는 생존이 무서워서 공동체를 못벗어나지만 커서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고 관심가져주고 무조건적으로 편들어줄 힘을 상실하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즉 ‘외로워질까봐’ 무서운 겁니다. 이러니 인간의 양심이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습득된 것입니다. 외부 질서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마다 양심의 내용이 다 다릅니다. 살아온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최종적 결정은 양심 자리에 내려지는데 그 내리는 방식이 로마서 2:14-15에 나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즉 인간들은 늘 고소와 변명을 반복합니다. “이래서는 아니되잖아?” “남들 다 그런데. 나만 안하면 내가 손해보고 바보되잖아. 생존을 위하여 어쩔 수 없는거야. 그러니 이해하고 용서해줘”라는 식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내부적으로 스스로 정리하는 변명은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되시는 분 아래서 ‘다스림을 받는 상대자’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숨어계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시어 하신 모든 일은 십자가 사건으로 그 확정됩니다. 십자가 사건이 보여주는 공간 배치는, 중앙에 예수님께서 피 흘리고 계시고, 양쪽에 두 강도가 있습니다.

강도란 곧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의인의 자격으로 예수님으로부터 거느리심을 받는 처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관계구조를 예수님께서 확장시켜 ‘세상’이라고 규정하시는 겁니다. 교회란 특정 교회가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 안에 충만한’ 양상으로 존재합니다.

에베소서 1:23에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세상은 교회의 충만을 증거하는 껍질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교회의 충만이 곧 세상이 충만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구성하는 구조, 즉 예수님은 다스리고 모든 인류는 축복 아니면 저주의 대상의 진용을 갖춘 그 형태가 세상의 구성요소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의 ‘나의 교회’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인들의 교회는 세상에 충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의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들의 교회를 중심적이지 않고, 더나아가서 본인의 존재 자체가 본인에게 중심이지 않기를 원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중심은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혹시 계십니까? 라는 식으로 사도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타고난 생활 환경에서 형성된 양심의 준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곧 ‘자기 중심적’이다는 말입니다. 그 양심 안에서 늘 고소하고 스스로 변명하는 식으로 세상을 줄곧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의 말을 듣고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잘되는 방향, 곧 자기 가정이나 자기 교회가 잘되는 식으로 듣고자 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도님 뭘 우리에게 시키려고 하십니까? 시키는 대로 잘 실천에 옮겨서 하늘나라의 행운이 내쪽으로 오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심보를 발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의 취지는 그런게 아닙니다. 시장에 나온 그 어떤 음식이라도 양심에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을 실천할 명령으로 들으면 아니됩니다. 사도 말씀의 취지는, “이미 너에게 준 나의 자유가 있는데 그 자유 잘 있지. 그지?”라고 확인하는 겁니다. 그 자유란 바로 성도는 남들의 양심이나 의지에 휘돌려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타인의 욕망에 놀아나지 말라는 겁니다. 달리 이야기해서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 사람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겁니다. 상대방이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것은 상대방의 힘이 탐내서 비겁하게 굴복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타인의 양심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게 되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이 옳은 존재인줄 착각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아무 음식이라도 먹되 상대방이 “이것은 당신이 인정하지 않는 다른 신에게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라고 할 때는 그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야 그 사람의 양심의 한계를 지적하는 복음 전파의 행위가 된다는 겁니다. 인간 내부에는 타인이 만든 나 자신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내 안에 들어있는 자아는 한결같이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신경씁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심정으로 조마조마하며 살아갑니다. 성도의 양심도 마찬가지로 똑같습니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런 죄악된 양심에 십자가 사건이 반복적으로 작동하여 그 자아가 늘 폭파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중심이 되고 양쪽에 죄인으로 배치된 질서 아래서 우리가 뭘 해서 구원되는게 아님을 여전히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참 특이한 존재입니다. 마지막 때나 나타날 종말의 영으로 인하여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만 소중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이런 성도의 존재는 본인이 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께서 미리 성령님을 보내셔서 질질 끌고가시는 식으로 인도하십니다. 남은 세월이 갈수록 가벼워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중앙되심을 한시로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0-12 06:40 

60강-고전 10장 23-29(모든 것의 취지)15101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0장 23-29절입니다. 신약성경 275페이지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한 번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사도바울의 말이 우리가 원하고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않기에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세계에 속해 있고 사도바울은 사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우리한테 우리 식으로 표현해서 말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도의 말을 들으면 각설하고, 다 생략하고 ‘뭘 어떻게 행하라는 말인가?’ 그것만 뽑아내려고 해요. 지시만 하면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실천에 옮길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객소리 말고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뭘 행하면 된다고 하는 말인가?’라는 식으로 우리는 성경을 보게 되지요.

그걸 행하게 돼요. 행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그것을 했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얻고자 하는 복을 따내고 싶어 하겠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뭘 행하라는 말이 아니고 네 마음가짐이 지금 내 마음가짐과 일치가 되는지를 한번 점검해 보라는 겁니다. 세상 모든 단체하고 교회가 차이가 나요. 세상 모든 단체는 지시하는 것이 있고 뭔가 우리한테 요구하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교회는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확인하는 겁니다. “내가 준 것 잘 간직하고 있어요?” 확인해주는 것이 교회에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단체, 교회도 하나의 단체로서 어떤 단체에 등록해서 거기에 머물고자 하고 그 공동체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단체는 어떤 법을 지키고 어떤 원리를 지키면 같은 편으로 먹어줍니까?’라는 이런 것을 자꾸 의식하게 되거든요. ‘이 단체의 장이 뭐라고 요구하십니까? 내가 그 요구대로 들어 줄테니까 내가 이 공동체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이런 식으로 온다 그 말이지요. 뭘 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고, 성경에 나오는 교회를 지금 말하는 겁니다, 흔히들 아는 그런 교회 말고, 성경에 나오는 교회는 “내가 준 것 잘 갖고 있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너에게 허락한 것 네가 고맙다고 하고 감사하고 있지?”라고 하는 겁니다. 진짜 교회가 소위 교회라는 것 때문에 가려져 있거든요. 성경에 나오는 교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교회를 두고 ‘만물의 충만’이라 했다는 말이지요. 이게 에베소서 1장 23절에 나오는 교회거든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만물에 충만하다, 만물에 다 들어있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교회에 나온다, 혹은 안나온다는 그것은 성립이 안됩니다. 진짜 성경의 교회는 교회에 다닌다, 안다닌다, 그게 성립이 안돼요. 어떤 제한된 테두리가 있는 공동체가 있으면 그 공동체에 다닌다든지 안다닌다는 것이 성립이 되는데 세상 모든 만물에 그리스도의 지체가 있다면, 그 자체가 교회라면 뭘 다니고 또는 안다니고, 떠난다, 안떠난다는 그것이 어떻게 성립이 됩니까? 지금 소꿉놀이합니까? 그냥 사세요. 그냥 사는 그것이 교회라니까요. 만물을 충만케 하는 그 원리를 교회라는 원리로 우리에게 제공했으면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제공된 그 원리를 우리 속에서 늘 점검해요. “내가 준 것 잘 간직하고 있지?” “예!”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것 잘 간직하고 있지?” “예,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입니다.” “됐어!” 그게 교회잖아요.

“우리교회 나오세요. 왜 안나오십니까?” 이런 것은 성경자체가 용납을 안해요. 성경에 그런 말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언급하는 것은 특정교회보고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의 편지인 에베소서에 나오는 만물의 충만이라는 그 충만상태에 현재 놓여 있는 사람들은 사도바울 나 자신이 이야기한 세계에 대해서 너도 같이 동감하고 있지? 그렇지?”라고 확인차원에서 말씀을 주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사도본인중심이 아니거든요. 사도바울은 보내심을 입은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본인이 중심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사도바울에게는 어떤 영역이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이나 밖이냐, 그게 중요하지 그 외의 인간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영역, 어떤 공동체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내가 살아온 가정이라는 영역, 교회라는 것, 학교라는 것, 직장이라는 것, 나를 위해서 어떤 단체나 공동체에 속해 버리니까 바깥의 것들을 가지고 나를 좋게 유지하고 키우기 위해서 뭔가 가져오고 습득하는 이것이 습관이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에게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가져와서 한 수 배워서 내 세계를 풍성하게 만든다는 그것이 습관화되고 말았습니다. 가져올 때는 어떻게 하느냐? ‘내가 속한 단체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라고 되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하면 복을 줄 테니까 뭘 하면 하나님의 행운과 복을 제가 추가적으로 얻게 됩니까? 뭔가 하라고 지시만 하시면 언제든지 실천할 마음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결국은 성경해석에 제일 큰 문제가 중심문제에요. 예수님의 중심인데 여전히 우리는 내 중심, 내 가정중심, 내 교회중심, 이 중심을 포기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은밀히 감춰놓기만 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보여주신 것에 대해서 결정적인 표현이 뭐냐? 십자가사건이라는 것인데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어떤 구조, 어떤 배치가 있었느냐 하면, 예수님을 중심에 놓고 양쪽에 두 강도가 있었잖아요. 강도는 뭘 대변하느냐 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것을 대변해주고 있고 예수님은 그 가운데 중심에 있어요. 그 형태를 확장시켜 보면 이 세상은 뭐냐? 예수님께서 거느리시는 질서로 잡혀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어렵지 않지요? 굉장히 쉽지요? 제가 거느린다는 표현을 했잖아요. 거느린다. 굉장히 쉽단 말이지요. 거느리고 다스린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 거느리는 주체가 거느림당하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중앙에 따로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거느림으로 인하여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고 한쪽은 버림받는 자고 한쪽은 오늘 밤에 낙원에 가는 강도가 되는 겁니다. 둘 다 강도라는 점을 참작해주시기 바랍니다. 둘 다 강도, 둘 다 죄인이에요. 둘 다 죄인인데 죄인이 다 지옥가는 것이 아니에요. 죄인이라도 어떤 본질, 어떤 성질로 거느리느냐에 따라서 같은 죄인이면서도 한쪽은 지옥가고 한쪽은 천국가는 거예요.



참 쉽죠! 정말 쉬운 거예요. 그 거느림이 우리 내부까지 침투되기를 바랍니다, 그 거느림이. 만약에 주님이 거느리심, 그 중앙 되심이 침투하지 않으면 우리는 독자적으로 다른 영역을 확보하게 돼요. 그렇게 되면 거기서 무슨 단어가 튀어나오느냐 하면, “주님, 저 성공했어요? 아니면 실패했어요?” 이런 성공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초조, 불안, 이런 생각이 나오게 됩니다. 자기자신이 중심이 되어버리면 ‘나 그 교회 떠날거야, 나 그 교회에 그냥 있을거야.’가 성립이 돼버려요. 뭐가 탈락했느냐 하면, ‘거느리심’이 날라 가버렸어요. ‘다스리심’이 날라 가버린 겁니다. “내가 어떤 말씀을 지키면 복이 나에게 오겠습니까?”만 남지 거느림이고 다스림이고 다 날라 가버렸어요.



거기에 대한 적합한 단어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본문 27절 초반에 나오네요. 한글로 세자로 나와 있습니다. ‘불신자’ 독자적인 자기영역을 확고해 있는 사람을 불신자라고 해요. 누구세계에서? 사도바울이 속해있는 세계에서. 그런데 우리 인간의 세계에서 불신자는 뭐냐? 교회 안다니는 사람,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불신자라고 합니다. 그 말에는 어떤 뉘앙스가 있느냐 하면, ‘나 예수 믿는데?’가 포함이 되어 있어요. ‘나 예수 믿는데’라고 하는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거느림을 받아서 주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심하시고 주님께서 긍휼로 용서로 거느리심이, 주님 주신 것이 계속 확인되고 있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내가 스스로 예수 믿으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불신자에요. 어느 세계에서? 우리세계에서 말고, 이 교회라는 세계에서 말고, 사도바울이 속한 세계에서 불신자가 되는 거예요. 제가 아까 예를 들 때 강도 이야기를 했지요. 주님을 중심으로 해서 양쪽 다 강도라고 했잖아요. 제가 쉽다고 좀 수상한 발언을 했지요. 그게 쉽다고 했지요. 예수님 중앙으로 해서 양쪽 둘 다 강도지요. 그러면 이 말은 쉬운가 보세요. “모든 교인은 죄인입니다. 모든 교회는 다 죄인들의 집합체입니다.” 이것이 쉬워야 돼요. 교회 안나와도 죄인이고 교회 나와도 죄인이에요. 교회 나온 사람은 죄인인줄 알고 나왔고 교회 안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왜? 자기자신이 중심이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교회 나와서도 자기자신이 중심이 되어버리면 거느리심과 다스리심이 탈락이 되기에 자기는 불신자로서 지옥가면서 교회다니는 소꿉놀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사도바울 같으면 이것을 어떻게 정리하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이렇게 정리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나에게서 듣고자 하는 것이 딱 그거 하나다. ‘하나님이여, 제가 뭘 하면 복 받습니까?’ 그런 것을 원하는데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네가 뭘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속해있는 영역과 동일한 안목과 동일한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느냐를 너한테 확인하는” 겁니다.



그것을 실제로 오늘 본문에서 설명해봅시다. 사도바울이 성경을 펼쳤습니다. 제가 불신자라고 치고 성경을 처음 봤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을 존중하겠다는 용의가 되어 있어요. 성경 보면서 ‘자, 오늘도 지시사항이 떨어진다. 이제 뭘 할까?’ 하는데 25절이 나오네요.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먹으라’는 명령이 딱 나오잖아요. 그러면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면 신자가 된다는 일방적인 해석을 내려버린 겁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탈락하는가? 28절, 29절이 탈락해버려요.



29절을 봅시다.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게 무슨 말이에요? 29절의 이런 말씀은 다 귀찮아요. “내가 뭘 하면 신자입니까?” 그것만 하고 싶어서 그거 “시장에 가면 개고기든 영덕대게고기든 먹으라.” “아멘! 사도바울이 이렇게 자유를 주네요. 감사합니다. 제사음식이라도 먹겠습니다.” 이거 챙기고 가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29절은 날라 가버렸어요.



오늘 본문 전체내용은 이렇습니다. 남을 위하여, 남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남의 말을 듣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상대방의 욕망에 휘말리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너는 남에게 휘둘리면서 살 인생이 아니고 그런 영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는 복음 안에서 자유인데 어떻게 남의 탐욕, 욕심에 말려들면서 살아가느냐는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남들이 주는 것은 주님이 줬다고 마음껏 먹되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이것은 귀신에게 바친 제물인데요.”라고 할 그 때는 먹지 말라는 거예요.



왜?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어떤 유익? “너 지옥 간다.” 그런 유익, 그런 복음전파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상대방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부부생활 할 때 이것을 명심하셔야 돼요. 남편 말 들어주는 것이 남편사랑이 아니에요. 그것은 비겁한 굴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힘이 약해서 강자에게 눌리는 것밖에 안돼요.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회피지요. 다른 영역에 속했으면 저쪽 영역의 처지를 우리가 헤아릴 줄 알아야 되는데 저쪽 영영의 처지는 어떤 처지인가? 죄를 짓는 처지가 아니고 죄안에 갇혀있는 처지거든요.



죄를 짓는 것과 죄 안에 갇혀 있는 처지와는 달라요.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날 때 죄에 갇힌 채로 태어나지 죄를 짓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뭘 하는 족족 죄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죄에 갇혀 있거든요. 그 죄가 뭐냐? 아까 제가 언급했어요. 바로 내 중심으로 사는게 죄에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자기자신을 위해서 하는 예배가 귀신한테 하는 제사고 예배라고. 어떤 분이 메일을 보냈어요. 좀 길기는 한데 중간부분만 읽어보겠습니다. 군산에 계시는 어떤 분입니다.


【불과 3개월쯤 들었는지……, 이 근호목사님의 말씀에 완전히 빠져버렸습니다. 처음에 유-튜브에서 듣다가 물결 타고 십자가마을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요한복음 듣다가 구약부터 다 듣고 싶어서 사무엘까지 간 것 같습니다. 신기하게도 예수님만 느껴집니다. 목사가 느껴지지 않고, 윤리도덕도 느껴지지 않고, 내 살아온 삶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빨려 들어갔습니다. 이 근호목사님과 통화를 하고 난 며칠 후에 언니와 이야기하다가 “교회를 그만 다니고 싶다. 교회를 옮기고 싶다.”고 했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십자가마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본인도 들어보겠다고 했는데 다음날 걱정스러운 듯이 이상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씀 안 들었으면 좋겠다.”고. 언니에게 다시 부탁해서 성경강해한 부분의 말씀을 펴놓고 차근차근 들어봐 달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언니는 “차분하게 들어봤는데 더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가 들린다고 했습니다. 제가 참다못해 언니에게 지금까지 교회 다니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그 교회 이름은 밝히지 말라고 해서 지금 밝히지는 않습니다.) 군산의 ○○교회는 하나님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말씀도 철저하게 가르친다는데 나는 그 부분이 납득도 수긍도 안가고 오히려 억지같은 느낌이 듭니다. 글쎄 순종해야 예수 만난다고 한다니까요? 내 자신이 ×표를 지으면서 ‘내가 잘못되었겠지.’ 생각하면서 내 자신을 바꿔보려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주변에서 다들 믿음 좋다고 말할 때마다 미친 것 같으면서도……, 그러니까 남들이 다들 나보고 믿음 좋다고 했는데 나는 미치겠고 믿음 있는 척 애쓴다고 힘이 들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언니한테 했습니다. 그러면서 언니한테 “요즘 내 느낌은 연애할 때의 느낌이다. 말씀과 연애를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라고 이야기했더니 이 말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전도사님께 전화한다고 하고서는 날 만난다고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전도사님도 이 근호 목사님을 아시더군요. (제가 유명한 모양입니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다. 김성수 목사와 비슷한 분”이라고, 이단이라고, 혹시 떠나더라도 잡지는 않겠지만 그 말씀은 안들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상한 반발심이 저에게 밀려왔습니다. 교리와 교회법체계를 빼고 말씀 안에서 어떤 부분이 이단인지 말해달라고 했더니 “말씀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고 교리도 무시하는 것이 이단의 특징중의 하나”라면서 정말 마음 답답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납득이 안간다고 했더니 “이미 제가 빠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옆에서 제 모습을 본 언니가 예전의 제가 아니라면서 “전에는 착했는데 이 말씀을 듣고는 변했다.”고 합니다. 그 날 밤 교회 목사님에게 “더 이상 교회 못 나간다.”고 전화를 드렸더니 “소식 전해 들었다. 하필 그 목사냐? 완전 이단이다.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다. 다른 교회 갔으면 좋겠다. 다른 교회 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목사가 전하는 말씀은 듣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답변을 했습니다. “제가 일으킨 사건이 아니고 주님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본인이 결정내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주께서 좋은대로 인도해왔습니다. 귀하가 귀하 인생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제가 느낀 점은 뭐냐 하면, 왜 쓸데없는 절망에 꼭 빠져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교회 안다니면 되잖아요. 기독교 모르면 되잖아요. 그냥 남들처럼 단풍 구경하러 가고, 밥 먹고 애 키우고, 그러면 되잖아요. 이 분은 왜 얽매이지 않아도 될 절망에 빠져 있습니까? 교회 안 다니면 되지. 예수 안 믿으면 되지. 잊어버리면 되잖아요. 왜 얽매이지 않아도 될 절망에 왜 스스로 매여 있습니까? 언니 말 듣고 그 교회 소꿉놀이하러 다니듯이 놀러 다닌 것 밖에 더 됩니까? 물론 그 동네가 자꾸 이것저것 시켜서 힘들겠다마는.



오늘 본문에 양심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오늘 본문에서 양심을 둘로 나눴습니다. “당신이 거듭난 양심입니까? 아니면 옛날 불신자들 양심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사도바울은 “남의 양심에 휘말리지 마세요.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라만 당신이 새롭게 된 양심을 가지고 당신 양심껏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세요.”하는 취지로 오늘 본문을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양심이라는 것이 과연 뭐냐는 말이지요. 인간의 어떤 것도 자연적인 자연사는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것도 습득된 거예요. 학습 받은 거예요. 양심이라는 것이 뭐냐? 어떤 공동체에서 추방되기 싫고, 배제되는 것을 원치 않기에 계속해서 그쪽 공동체에서 통하는 질서체제, 법체제가 중첩된 것이 양심입니다. 그래서 양심이라는 것은 타고난 집안마다 다 달라요. 환경, 성장과정에 따라 양심이 다 달라요. 양심대로 한다는 것은 뭐냐? 자기변명체제가 확고해져 있다는 뜻이에요. 이것은 로마서 2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지만 이방인들은 양심이 있어서 자기를 고소하고 자기를 변명하고, 고수하고 변명하고, 고소하고 변명하고, 이것이 양심 안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방인들은 자기스스로 찌르고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변명하고……, ‘나는 결백하다. 나는 무죄하다.’ 이 세상에 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말 들어보면 다 무죄에요. 이게 변명과 고소가 교차되는 식으로 한 평생을 계속 끌고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양심과 신자의 양심은 뭔가 달라야 되거든요.



어떤 점이 다르냐?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사건을 반복적으로 폭파시켜버립니다. 그 사람 양심 속에 십자가사건이 지나간 사건이 아니고 현재사건으로 만들어버려요. 요한계시록 21장, 22장에 보면 천국에 어린양의 보좌가 있잖아요. 그 어린양 앞에 무슨 말이 붙어요.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의 보좌”입니다. 그게 우리의 시간적 눈으로 보면 미래 중에서 마지막 미래에요. 마지막 미래가 되면 어린양 보좌에서 물이 나오는데 그것이 생명수고, 천국의 생명수를 마음껏 마시고, 거기는 해와 달과 별의 빛이 필요 없고 예수님 보좌의 빛으로, 그 광채의 조명발로 살아가는 그것이 마지막 도달지점이거든요.



문제는 우리가 그곳에 가지를 못하고 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조치가 뭐냐? 그 미래가 지금의 현재가 되게 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미래에서 현재로 다가와 버리면 그 때부터 성도의 삶은 뭐냐? 삭제당하는 삶을 살아요. 뭘 삭제 당하는가? 자기가 행한 것, 자기가 실천에 옮긴 것, 자기 의로움, 마일리지 쌓은 것, 자기 고상한 것, 이런 것을 계속해서 삭제당합니다. 삭제 당하게 되면 우리는 뭐냐? 주님이 거느리시는 죄인의 일부로 편입이 돼요. 그게 제가 아까 말씀드린 십자가 밑의 양쪽에 거느리는 강도의 그 자리가 우리 자리가 되는 거예요.



이때는 강도가 강도짓을 그만둔다는 조건하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습관과 양심을 뜯어고친다는 조건하게 구원받은 것이 아니에요. 그냥 거느리심이에요. 그 거느리심이 어떻게 구원이 되는가 하면, 중앙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데 피 흘리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내 살과 내 피가 하나님의 마지막 약속이었습니다. 그 전의 약속은 상징이고 그림자고, 마지막 약속은 뭐냐? 십자가 피 흘린 사건이에요. 그 피 흘린 사건의 혜택, 한쪽 강도는 혜택을 입었고 한쪽 강도에게는 그 혜택이 오지를 않았어요.



그것은 피 흘리신 분의 고유권한입니다. 이 세상에 진정한 선택권은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세상구조가 어떤가, 하고 물으신다면 중앙이 있고 양쪽에 배치되어 있는 그 구조가 세상 구조입니다. 지금 그 구조가 현실화되어서 나타난 것이 충만한 성경속의 교회에요. 교회는 나간다, 안나간다가 성립이 안되는 것이, 절에 나갔다가 죽어도 나중에 무덤에서 호출당합니다. 거느리심의 질서체제가 끝까지 가기 때문에. “저는 교회에 바빠서 못다녔습니다.” 이런 변명은 소용이 없어요. 내 변명이 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냥 너는 너대로 살았기 때문에 천국 왔고 너는 또 너대로 살았기 때문에 지옥 간 거예요. 그걸 제가 막 산다고 했지요. 너는 천국 가는 쪽으로 막 살았고 또 다른 너는 지옥 가는 쪽으로 막 산 거예요. 모든 공로는 주님이 알아서 한 겁니다. 원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달음박질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에요.

모든 성경해석이 잘못된 것은, 그 군산에 있는 교회가 잘못된 것은 모든 것이 자기교회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를 키울까?’ 그것은 교회의 자존심이지요. 목사의 생계유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이것이 세 글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불신자. 이게 불신자에요. “양심껏 살았습니다.” 그게 불신자에요. “내 양심 폭파당했습니다.” 그게 신자입니다. 우리는 내부에 공모자가 있어요. 나를 변명하는 내부의 공모자. 로마서 7장이야기입니다. 내 안에 내가 손댈 수 없는, 원초적인, 태어날 때부터 나를 가두어두었던 그 죄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그 죄에 갇혀 있는 거예요. 죄에 갇혀 있는데 그 죄는 아무리 성경보고 아무리 예수 믿고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나의 변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절망입니다. 이 절망을 인정하는 것을 가지고 회개라고 해요. 이 절망 중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겁니다. “오호라. 주님이여, 저 아시지요? 제가 지금 곤궁에 빠진 것을 너무나 잘 아시지요? 제 힘으로 어떤 수단과 노력으로도 제가 저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만은 아시지요?”라고 할 때 이게 바로 회개입니다.

“앞으로 잘할게요.” 그것은 회개가 아니고 반성이고요, 앞으로 잘 할 것도 없습니다. “내 처지는 이런 꼬락서니입니다.”라고 바라보는 거예요. 그게 처음사랑이에요. 날마다 처음으로 돌아가야 돼요. “제가 구원받으려고 목사까지 했습니다만 목사 한다고 구원될 리가 없다는 것을 주께서 먼저 아시잖아요. 남들이 존경한다고 해서 그 존경이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우리는 내 목숨 바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 그 일에 지금 말려들었어요. 내 목숨 바쳐도 안될 일이에요. 요한복음 13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베드로 이야기했을 때 아서라, 말아라, 네 목숨 바친다고 네 문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살한다고 해결되는 문제 아니거든요. 목숨을 건다고 해결될 문제 아니에요. 목숨마저 걸어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 자체로 절망입니다. 절망하세요. 절망해야 주님이 보이고 십자가가 보입니다. 희망을 품지 마시고 절망하세요. 절망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다른 말로 고치겠습니다. 실패하세요. 인생 실패하세요. 다들 지금 실패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 생기고 난 뒤에 강대상에 꽃 올려놓은 것은 처음입니다. 갑자기 향기가 확 풍겨요. 전세계에 생중계 된다고 이야기해줬습니다. 이 꽃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없었는데 있게 하시니까 확 살잖아요. 창세기 1장입니다. 그런데 이 꽃이 불법입니다. 집에서 키운 것도 아니고 돈 주고 산 게 아니라서 불법이에요. 불법이 제단 위에……? 물론 농담입니다. 어차피 우린 불법이니까. 실패자니까. 왜 우리가 죄인이냐 하면, 뻔하게 절망이고 내 힘으로 안되는데 자꾸 꼼수를 써요. 예수 믿을까요, 십자가 믿을까요, 성경공부 할까요, 십일조 할까요, 예배 참석할까요, 자꾸 꼼수를 쓰는데 꼼수 써봐야 자기 마일리지만 늘어날 뿐 전혀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주님은 십자가의 긍휼을 일방적으로 “내가 준 것 간직하고 있나요?” 이렇게 확인작업에 나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특기가 행해서 복 받는 것밖에 할 줄 몰라요. 행해서 30배, 60배, 100배, 맨날 그것만 욕심내면서 행해서 얻는 것밖에 몰라요.

그게 실제로 되는가, 확인하다고 오늘 교인 몇 명 나왔는지, 헌금은 얼마가 나왔는지, 그것 많이 나오고 가정 화목한지, 그것 많이 나오면 복 받고 있는 중이라고 자기가 스스로 판단하고. 그런데 그 가정 누구 가정입니까? 문제는 내 가정이라서 문제 아닙니까? 내 중심주의 가정이잖아요. 모든 의미라는 것이 나왔다 하면 전부 다 나 중심으로 돌아가요. 그렇지 않은 위인이 없어요.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모든 사람이 다 그렇거든요. 그런데 옆에 구원받은 강도는 그 사실을 십자가 피흘림을 보면서 “주님, 주님이 일부러 그랬지요?”라고 그것을 고백한다는 사실입니다.

12년 동안 혈루증 걸려서 허리 꼬부라진 그 여인(마 5장), 우리 같으면 주님한테 달려들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멀쩡한데 저는 12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생하게 했습니까? 제가 뭘 잘못했기에, 저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기에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해도해도 너무합니다.”이렇게 나올 것인데 그 여인은 아주 공손하게 살짝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나를 이렇게 만드신 분이 당신 맞지요? 이젠 제가 알아요.”라는 뜻입니다. “당신이 나를 나 되게 했습니다.” 주님이 돌아보면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막 5:30) 베드로가 하는 말이,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눅 8:43) 예수님께서 “아니, 그거 말고! 자기중심이 아닌 자가 누구냐? ‘이 나의 꼬부라진 허리가 내 뜻이 아니고 주님 당신 뜻 맞지요?’라고 관계성, 연결을 짓는 자가 누구냐?”는 그 말이지요.

믿음이라는 것은 내 믿음이 아니고 저쪽에서 흘러오는 선물이에요. 하나님의 은사로 주신 선물은 하나의 끊어지지 않는 연결고리가 있어요. 내가 목숨 바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하지만 어떤 권세, 권력, 환난과 핍박이라도 끊어지지 않는 그 사랑의 끈, 그것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심어준 겁니다. “내가 준 것 아직 잘 있지?”라고 심어준 거예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내가 알아서 심어준 것이 네 안에 있는데 누가 껍데기만 보면서 너를 욕하리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의 속에는 남이 만든 자아가 있기에 우리는 평생토록 남 눈치 보면서 허송세월 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이미 사도바울은 알기에 오늘 같은 본문이 있는 겁니다. “남의 욕망과 남의 시선과 남의 평가에 휘둘리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가서라. 너는 바로 너 밖에 없다. 네 속에 있어야 될 것이 빠져 있다. 네 속에는 다른 사람들의 욕망이 있다.” 남의 욕망이 만든 나가 내 속에 또 하나의 나로 자리 잡아서 우리로 하여금 변명과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힘들게 살게 합니다.

그거, 내 속에 있는 타인이 만든 나, 우리 손으로 못 뽑아냅니다. 십자가 사건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이너마이트입니다. 자살테러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지요. 십자가가 폭파해버립니다. 그러면 나라는 것이 갈기갈기 찢어져버리지요. 물론 돌아서면, 다음날 되면 또 생기지만. ‘어제 은혜 받았는데 그게 누군지 아나? 바로 나야.’ 나가 또 등장해요. 나 중심의 것은 또 폭파돼야 돼요. “주께서 은혜 주셨지요? 오늘도 주실 뜻이 있으면 은혜 주옵소서. 주실 뜻이 없으면 할 수 없지요, 뭐.” 이런 식으로.

항상 주님 중심으로, 주께서 자신의 행한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피조물로 만드신 거예요. 이런 관계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특별히 할게 없어요. 갈수록 남은 세월이 짐이 가벼워집니다. 그래서 인간은 속상할 권리도 없어요. 왜 속상할 권리가 없느냐 하면, 자기 속만 보면 상하기 때문에. 남을 의식하는 내가 내 안에 괴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나만 보면 속이 상하고 나만 보면 참 절망적이지요
.



하지만 내가 그걸 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내 안에 괴물이라는 것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남들이 다 갖고 있는 것을 내 안에도 갖고 있다는 것이 비로소 보일 때 그 보이는 시선과 안목은 주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비로소 밝혀진 내용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왜? 내 인생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주께서 이곳까지 끌고 왔습니다. 어떻게요? 미래에서 잡아당기는 식입니다. 내가 꾸역꾸역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에요. 올라가봐야 또 주르륵 미끄러질 텐데요. 롤러코스터 타듯이 내가 무거운 짐을 미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잡아당깁니다.



당길 때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자꾸 삭제를 시키지요. 무슨 삭제? 내가 그동안 나한테 고귀했던 것, 나한테 정말 예수님이 뭐래도 포기 못할 귀중한 것들, 그런 것들을 자꾸 놓게 만들어요. “목사님! 그 귀중한 것이 뭔데요?”라고 묻는다면 구체적으로 꼭 말을 해야 되겠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하면 자식! 자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어요? 깨놓고 말해서 자식이 보물이지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이미 믿는자가 맞아요. 하지만 그 결정은 갈대아우르를 떠날 때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 미운 아들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잡아 죽일 때입니다. “후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계열, 노선이 너와 같을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 그 소중한 것이 나의 소중함에서 주님의 소중함으로 넘어설 때 우리는 다른 영역에 속했음을 확인받을 수 있는 겁니다. 또 자식 잡는다고 하지 마세요. 그냥 놔두세요. 그냥 두시되 그것이 이미 주님의 영역에 속했고 가장 귀한 것이 주님의 영역이라면 주님주신 자식보다 더 귀한 것이 뭐냐? 주 예수님이 가장 귀하지요. 주 예수님 앞에서 자식이나 나나 동일하게 거느림을 당하고 지배받는 동일한 위치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종교라는 것, 교회라는 것, 그리고 기독교라는 것을 다시 정리해야 돼요.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어요. 안 믿는 사람들에게, 불신자들, 지금 안 믿는 사람이란 절에 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보세요.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그러면 그들은 들었던 것을 이야기해요.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셔서 그 있는 것을 오늘도 은혜 주셔서 잘 키웁니다.” 이게 정답 같아요. 정답 중에 정답 같아요. 그래서 매일 은혜 중에 잘 사는 것 같습니다.



제 이야기 들으면서 틀린 것을 찾아보세요. 틀린 그림 찾기입니다.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곧 무에서 창조하시고 그 있는 것을 은혜 주셔서 잘 키우십니다.” 지금 뭐가 틀린 것인지를 잘 모르겠지요? 두 번째가 뭐냐? “그 은혜 중에서 죄 용서해주셔서 천국 보내주고 죄 씻어주는 은혜까지 주셨습니다.” 정말 멋져 보이고 믿음 좋아 보이지요? 하나님 앞에서도 이것은 딩동댕! 합격 할 것 같아요. 정말 이것은 바른 이야기 같습니다. 첫째, 둘째, 엉터리입니다. 세 번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궁금하지요? 설교 끝내겠습니다, 이러면 안되겠지요?



세 번째가 뭐냐? 주님이 직접 나타납니다. 나를 살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나를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의 모든 성경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직접 나타났어요. 그전에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주시고 또 메시아를 보내주시면 우리 죄를 용서한다고 다들 그렇게 살았는데 그 공동체, 그 집단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니까 죽여 버렸습니다. 1번과 2번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내 생존문제였고 내 구원문제였습니다. 이게 자기중심이에요. 내게 납득되는 메시아를 내가 고르겠다는 겁니다.



십자가 죽은 것은 너무 추상적이에요.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지금 구체화되어야 돼요. 어디에서? 우리의 심령안에서, 우리이 양심안에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구체화될 때 구체화되는 그 증거가 뭡니까? 로마서 7장 그대로입니다. “주여, 나는 절망입니다. 주님 아시지요? 제 어떤 종교적인 노력, 기도와 헌금과 봉사와 선교와 전도, 순교한다 해도 그것으로 구원이 안되는 것을 주께서 아시지요? 내가 살아온 것은, 그동안 내가 힘들게 살아왔지만 이제 보니 힘들게 끌고 왔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습니다.” 힘들게 질질 끌고 오신 거예요. 내가 내 짐을 뒤에서 밀어댄 것이 아니고 주께서 철딱서니 없는 나를 질질 끌고 온 거예요.



놔 버리라고. “네가 너에게 소중해? 그러면 놔버려라. 네 꼬락서니가 꼴보기가 싫어? 꼴보기 싫다, 좋다, 혹은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그걸 놔버리라.”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것은 우리가 논할 입장이 못됩니다. 우리에게 그런 자격이 없어요. 주님 계시면, 주님이 기쁘게 보시면 그것이 성공이지 내가 따로 독자적으로 내 인생에 대해서 가타부타 평가내리지 마세요. 그런 평가내리면 나중에 사주팔자 봅니다. 궁합이나 봐요. “올해 재수가 좋겠습니~까? 아닙니~까?” 연초에 교회가서 헌금하면서 “목사님, 올해는 어떤 착한일을 해서 복을 받겠습니~까? 아니~다? 그렇~다?” 자꾸 자기중심이 되면 궁합이나 보고 사주를 봐요. 교회 와서 사주팔자보고 있다니까요! 그런 것을 볼 필요가 없다니까요. 그걸 보는 것 자체가 지금 무거운 짐이 있고 뭔가 속상하고 결핍됐다는 뜻이잖아요. 껍데기만 남으세요, 껍데기만. 늙어가는 껍데기만 남읍시다.



인생 아무리 살아봐도, 마치 눈밭에 발자국처럼 지나온 뒤에 바람 불면……, 눈발 막 휘날리는데 눈밭에서 애인하고 “나 잡아봐라!” 하고 뛰면서 발자국 찍어놔도 몇 시간 뒤에 바람 불고 눈 비오면 그 모든 인생의 흔적은 “어디 갔니?” 싹없어집니다. 나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도 나를 괴롭혔던 타인의 시선 속에서도 나란 존재가 소실됩니다. ‘그 사람 누구더라?’ 없어져요. 그게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 미래를 현재화합시다. “주여, 있다고 없어지는데 왜 저를 있게 하시고 구체화시킵니까?” “너 강도거든!” “왜 강도되어야 합니까?” 다스림이라는 그 다스림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냥 다스림이 아니고 십자가용서로, 긍휼로 불쌍히 여기심의 다스림만 너를 통해서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성령 받았다고 여기저기서 이야기하는데 성령 받은 공통점은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것밖에 없어요. 예수증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네 증인은 용납하지 않는다. 성도요? 기적입니다. 특이한 존재입니다. 메일 보낸 그 분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그거예요. “당신은 특이한 존재입니다.” 언니 말대로 교회 안다녀도 되고 다니던 교회 가서 그냥 친목이나 하고 점심이나 얻어먹으면 돼요. 그런데 왜 그렇게 절망하는 겁니까? 이게 바로 특이한 거예요. 요엘서 2장의 말씀처럼.



마지막 때 성령이 오게 되면, 종말이 영이 오게 되면, 특이한 기적들이 등장하는데 나도 어떻게 감당이 안되는 새로운 존재로 변합니다. 그 특이한 존재는, 다른 사람들은 자기잘남을 증거하는데 이 특이한 존재는 예수님의 용서하심만 증거하니까 세상에 이런 특이한 존재가 또 어디 있습니까? 이게 바로 이 세상에 충만한, 그리스도와 통일된 충만한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생존문제와 엮이지 말게 하시고, 내 구원 문제, 그것이 주가 아니라 주님이 직접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사실, 십자가 앞장세워서 나타나셔서 죄인되게 하시고 의인되게 하셨다는 그 사실, 그 방식을 위하여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고 증인되었다는 그 놀라운 기적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