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강-고전 10장 30-33(하나님의 영광)15101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0장 30-33절입니다. 신약성경 275페이지입니다.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방금 읽었던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감사를 통해서 초월적인 세계를 소개하라.” 어떤 가운데? 범사에 감사하면서.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으로 상대방에게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생을 살아라.” 그런 당부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한다는 말, 이것은 부분에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포괄적인, 전체에 대해서 감사가 되어야 되겠지요. 모든 일에 감사가 되어야 됩니다. 사도바울처럼 이미 다른 세계를 알고 있습니다. 다른 세계에 뿌리가 있기 때문에 그 세계에 있는 사람이 옛날 한 때 시달렸던 세상에 다시 와 보니까 참 시시하지요. 전부 다 파편적이고 부분적이고 전부 다 개별적인 겁니다. 포괄적이 아니에요. 그저 코앞에 있는 거기에 집착해서 그것에 울고불고 하고 있으니까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러면 너는 우리하고 다른 점이 뭔데?” 했을 때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모든 일에 감사한다. 너는 감사할 만 해서 감사하지?” 그게 네가 일부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부분만 보고 전체를 알지 못하고 포괄적인 것을 모를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네가 다른 세계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고 코앞에 있는 이 세계에 그냥 갇혀 사는 식이다. 따라서 나는 범사에, 모든 일에 감사하기에 다른 세계, 초월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런 식으로 사도바울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이런 이야기가 뭐냐? 자기가 태어난 곳이 따로 있다는 거지요. 자기의 아버지, 자기의 어머니, 이 모든 것은 다른 세계에 계시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라고 저에게 물어보는 분도 계시고 용기가 없어서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아는 체하는 분도 있는데 이 시간에 짧게 정리해드리면 하늘나라는 한 문장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뭐냐?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있는 곳이다.” 딱 한 문장이에요.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있는 곳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관계에서 우리는 빠져 있어요. 내가 빠진 곳이 천국입니다. 내가 있어버리면 이것은 부분적으로 알고 작은 것밖에 몰라요. 나라는 것 자체가 작기 때문에.
그런데 포괄적인 세계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어떻게 천국을 이루는가? 아버지는 아들을 버려서 저주받게 하고 심판받게 하십니다. 심판해놓고 심판했다는 것이 완료가 될 때, 아버지에게 제대로 심판을 받았을 때 그 심판받은 아들을 도로 건지는 식으로 천국을 구성하게 됩니다. 천국을 이루는 모든 속성과 성질은 어디서 나오는가?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버리고,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버린 자식을 아버지의 이름으로,사랑으로 건지는 그 과정 을 통해서 천국을 영원히 유지할 수 있는 본질이 거기서부터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한번 쥔 것은 안놓치려고 하잖아요. 기어이 아등바등 그것을 손에 쥐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인간은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모도 없어요. 자기가 자기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가생산이라고 하는데요. 자가생산, 이것은 타고났어요. 애들이 어릴 때, 두 살이나 세 살의 말썽꾸리기 애한테 부모가 “얘야, 내가 너를 낳았다.” 하면 애들은 ‘너를 낳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어쩌라고?’ 이렇게 나와 버려요.
이 말은 뭐냐? 아무리 부모가 낳아줬어도 막상 낳아놓은 자식은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이미 자가생산, 자기복제, 자연발생적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시작을 한 겁니다. 이것은 걷잡을 수 없어요. 교육해서나 양육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애들이 하고 싶은대로 다 해준다고 해서 개과천선할 문제도 아니에요. 때린다고 또 인간되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어쩔 수가 없고 멈출 수가 없어요. 인간들이 자기환상을 자기가 만들어내는 이것을.
그런데 그것이 어디로 이어지는가? 자기소모로 이어집니다. 자기소모에서 더 나아가 자기파탄으로 이어지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죽음이고. ‘죽으면 끝이 아니겠는가?’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끝이 아니네요. 끝이었으면 좋겠는데 끝이 아니에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성경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이 뭐냐? 신약에는 구약의 모든 예언이 만료가 되는 시점이 신약입니다. 거기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구약은 안죽으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가생산을 해요. 자가생산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자기 속에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나의 이상형, 그것을 자기투영, 자기자아투영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어렵지만 쉽게 하면, 벽에다 자기 그림자 비추는 겁니다. 벽에다 자기 몸을 불빛으로 비추면 벽에 자기 그림자가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은 이것밖에 안되지만 장차 내가 10년 후, 20년 후에는 이렇게 장관이든 재벌이든 될 것이라는 이 내부의 필름을 바깥으로 크게 확대시키면 그것이 자기투영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비전이라고 하고 그것을 꿈이라고 해요.
그게 비전, 꿈인데 그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이 자가생산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멈출 수없는 자기의 기본적인 속성입니다. 물론 지옥의 힘이에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관심을 둬야할 대목이 이거예요.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서 자기영광만 챙기는데 태어날 때부터 나의 영광만 챙기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몸으로 바꾸는가? 이것이 오늘 설교의 포인트, 초점이에요. 하나님의 영광? 안돼요. 내 영광이 우선이지 어떻게 남의 영광이 우선이겠습니까? 내가 뭔가 잘 보겠다고요? 그것은 다 나의 투영인데요? 자가생산, 그것이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되고 자기영광을 위해서 자기소모를 해요.
우리 앞 집 마당이 있는데 틈만 나면 옆 집 아주머니가 아코디언을 연주해요. 직업도 없는지 툭 하면 그러는데 대중가요도 했다가 어떤 때는 교회를 다니는지 찬송가도 연주해요. 자기소모입니다. 틈만 나면 등산가지요. 자기소모에요. 자기 힘 소모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어디로 가는가? 자기 파탄으로 이어집니다. 기라는 기는 다 빼먹고 이제는 등산가자고 해도 힘이 없어서 못가요. 자기파탄이지요. 젊은 애들은 차 한 대 사서 거기에 내부장식 하고 튜닝한다고 온 신경을 다 씁니다. 자기소모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거의 반평생을 교회놀이에 다 소모해요. 온 교회행사 다 참석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온갖 것, 교회에서 시키는 것이면 시키는 대로 다해요. 그게 자기소모인데요, 결과는 자기파탄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죽고 나중에는 심판받고 지옥 갑니다. 자기투영이거든요. 교회에서 사랑받는 나, 이것을 자기투영으로 그림을 미리 그려놨어요. 미리 그림 그리는 이것이 문제에요.
어떤 인간도 여기에 대해서 멈출 수가 없어요. 자기투영에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자기자신의 영광만을 위해서 자가생산하기에, 자기가 자기를 낳고 또 자기가 자기를 낳고, 자기가 하나님도 낳고 자기가 예수도 낳고, 좋은 것은 전부 다 낳고, 낳고 해요. 자기가 어머니가 되고 자기가 자식이 되고, 자기가 교주고 자기가 신자가 되어서 자기 스스로 반해서 미치고 멋있어하고요. 남자들이 아침에 면도하고 나서 ‘멋있어!’ 하고 거울 한 번 째려보듯이. 전부 다 이것은 자기소모거든요. 평생을 자기소모, 자기파탄으로 일관합니다. 인간은 이것을 어떻게 멈출 수가 없어요. 안되는 것을 어떻게 되게 하는가 말이지요.
인간이 감사할 경우는 언제냐 하면, 자기 뜻대로 잘 될 때는 감사가 나와요. 감사 헌금도 하면서 기분 막 냅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안될 때가 있는데 그 자가생산을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뭐냐하면, 자기 뜻대로 안될 때는 하나님에게 행패를 부립니다. 행패를 부리고 화풀이를 하고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왜 하나님은 나를 즐겁게 못합니까?” 이런 속내를 감출 길이 없어요.
그러니 인생이라 하는 것은 간단해요. 자가생산하면서 자기투영하면서 꿈과 희망을 키웠는데 세상이 만만치 않아서 원대로 안되니까 이제는 하나님에 대해서 분풀이를 하고 행패를 부리는 세월이 우리네 인생이고 소위 교회생활이라는 것이 행패부리는 생활입니다. 화풀이하는 거예요. 안들킬줄 알았어요? 한 번도 주 앞에 화풀이 안하고 하루일과를 시작한 적이 없고 하나님 앞에 행패 안 부리는 식으로 살아본 적이 없어요. 항상 짜증과 화가 밑에 억눌려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에게 하면서 그것을 누구에게 하는가? 보이는 타인, 가족들에게 퍼부어요. 노골적으로 신에게 하면 벌 받아서 자기만 버림받기 때문에. 우리가 실컷 이러한 강퍅한 마음, 짜증나는 마음을 충분히 인정을 해요. 인정합시다, 오늘 본문 앞에서. 왜? 본문자체가 내 힘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없는데 우리가 안되는 것을 되게 하시잖아요. 그게 오늘 본문에 담겨있습니다. 안되는 것을 되게 해요.
어떻게 하는가? 사도바울이 그것을 알아요. 설교다시 해 봅시다. 사도바울은 어느 세계에 속했는가? 초월세계에 속했다고 했습니다. 그 세계는 어떤 세계였다? 그 세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구성된 세계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죄인을 다시 찾는 사랑과 자비의 능력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어요. 자기밖에 모르는 이 인간은 천국에서 배제된, 내놓은 자식이거든요. 이런 인간에게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과 예수님의 그 관계외의 관계는 다 자기밖에 몰라요. 그 자기밖에 모르는 세계에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파견 근무시키려고 친히 보냈습니다. 보낼 때는 이유가 있어요. 안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해서 보내는 겁니다. 보낼 때 안되는 것을 되게 하는 그 힘은 어디에 있느냐? 바로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이미 되게 하는 충분한 모든 조치가 성사가 되어 있고 성립이 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그게 나와 있습니다.
교회 오면서 우리는 자기열심 내는 것, 하나님 앞에 예쁨 받는 것, 그것 자랑하러 오시면 안돼요. 왜 나는 내 힘으로 안되는가를 알아야 돼요. 왜 나는 나의 신앙생활로 내 팔자가 바뀌고 운명이 안바뀌는 그 정도, 나는 왜 그런 인간밖에 안되는가 하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옥의 힘에 휘둘렸고 그 지옥의 힘은 우리 힘으로 이겨낼 수가, 극복될 수가 없습니다. 백날 설쳐봐야 자기파탄이고 있는 힘마저 다 소비시키는 허망한 일의 반복에 지나지 않아요. 기도를 해도 소용없고, 헌금을 해도 소용없고, 전도를 해도 소용없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해도 소용없습니다.
안되는 것은 안되는 거예요. 처음부터 가짜인 것이 어떻게 중간에 바뀝니까? 처음부터 우리가 가짜인생인데, 가짜인간인데. 진짜 인간은 예수님만 진짜 인간이고 우리는 처음부터 가짜에요. 그 가짜임을 발각당하고 폭로당하도록 하기위해서 주께서는 이 교회에 보내신 겁니다. 이 교회에 보내실 때 주께서는 항상 추방원리를 작동시켜요. 추방원리는 뭐냐하면, “니가 왔다면 가 줘!” 그 말입니다. “네 꿈, 자가생산, 내가 여기 살다가 천국 가서 살겠다는 자기의 노림수와 희망을 가지고 왔다면 제발 부탁하는데 좀 가줘!” 좀 가주셔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나에게 가하고 투입시키는 어떤 모든 종교적인 노력은 전부 다 허사로 끝납니다. 나중에 실망감 허탈이 오게 되면 또 행패부리고 “열심히 했는데 내 뜻대로 왜 안해줍니까?”라고 주님에게 삿대질를 할 거예요. 이게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뭐고 전도가 뭐냐 하면, “좀 가세요. 제발 오지 말고 그냥 가세요.”가 전도가 돼요. “가세요!”라고 했는데도 “네가 오라고 했나? 주님이 오라고 했는데 갈 리가 있나?” 이렇게 주께서 오라고 하실 때 ‘야, 이것은 주께서 인간이 안되는 것을 해주시려고 지금 작품에 손대고 있구나.’라고 보시면 됩니다.
가락교회에 공부를 하러 갔더니 어떤 분이 궁금한 것이 있다고 했어요. 자기가 다니던 교회 목사가 교인들에게 따라 배우라고 하면서 홍보용 미국의 이야기가 담긴 비디오를 틀어줬답니다. 어떤 남자가 30년 동안 지하철에서 전도를 했답니다. 그런데 30년이 다가도록 전도하는 동안 자기에게 와서 “어느 교회 가면 됩니까?” 라든지 혹은 “예수가 누굽니까?”라고 물어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래서 그 남자가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하나님께 물었다고 하던가, 아니면 꿈에 물었다던가, 하여튼 “전도를 이렇게 하는데 왜 실패로 끝납니까?”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사인지 뭐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걱정하지 말라. 네가 한 자리에 3년 동안 전도하는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받아들여서 다들 교회에 갔다. 그러니 네가 실패한 것이 아니다.”
이런 내용의 비디오를 목사가 틀어준 거예요. 틀어주면서 목사가 “이렇게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했는데 나에게 질문하기 전에 담임목사에게 물었던 거예요.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왜 전도하는 사람이 ‘내가 전도하는데 왜 단 몇 명도 찾아오지 않는가?’라는 그것을 궁금해 하지요?”라고 했답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전도하면서 그 실적에 대해서 궁금해 하느냐고 물으니까 그 목사가 아직껏 답변이 없답니다.
그 전도자는 자가생산한 거예요. 결국은 자기파탄이고. 그거 심판받습니다. 전도를 하겠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안되는 것을 억지를 부려서, 내가 아무리 해도 영광이 안되는 존재인 것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거예요. 자기인격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모독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신약성경은 모든 인간의 가치와 의미가 스톱, 중지가 되고 마감이 되는 시대입니다. 왜? 십자가, 모든 예언의 완료가 바로 신약성경에 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은 영광 돌리기 위해서 실컷 애써봤어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했어요. 기도, 전도, 이것은 기본이고 제사를 비롯해서 온갖 것 다 해봤습니다. 실패로 끝났습니다.
왜냐? 다른 힘이 나를 둘러싸고 있어요. 그 다른 힘이 지옥의 힘인데 지옥에 가는 사람에게만 통하는 그 힘이 이미 지옥가기 전에 우리를 점령하고 있었고 장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선악과 따먹은 효과지요. 선악과 따먹은 것은 무를 수가 없잖아요. 따먹을 때는 내가 따먹었지만 따먹고 보니 악마의 힘이 나를 굴복시켜서 필히 따먹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어떤 상자 안에 가두어진 거예요.
그 때부터 인간은 포괄적인 것을 알지를 못하고 그저 자가생산, 부분적인 것에만 몰두하는 처지,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목사님, 안되는 것은 알겠는데 지금 그 안되는 것을 어떻게 되게 하느냐는 그것이 관건인데 그것을 이야기해주셔야지요.” 하실 거예요.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 치고, 안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되게 하시는가 하는 겁니다.
제가 학생 때 좋아하는 시조가 하나 있었어요. 남구만의 시조입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여기서 ‘상기’라는 말이 나오는데 잘 안쓰는 단어에요. ‘아직’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나밖에 모르는 나를 가지고 주께 영광을 돌리는가? 이것은 이미 다 갖추어져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상기’ 아직도 여전히 그 시간상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거예요.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의 그 방법은 때,타이밍이 주어지게 되면 ‘아직’에서 뭐로 바뀌는가 하면, ‘이미’ 다 된 거예요. 내가 나만, 나의 영광만 챙기는 이 파탄난 인간 이 자체가 주께 영광이 되는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아는 거예요. 아, 정말 어려워요.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는 그 말입니다.
우리는 나의 욕심만 챙기잖아요. 그래 바로 그거였어! 내 욕심만 챙기는 그것이 영광이 된다니까요? 우리는 성령을 받기 전에는 감히 그것을 상상도 못했어요. 십일조를 하고, 주일성수를 하고, 뭘 어떻게 하고, 그래서 조금씩 나아간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짓을 ‘아직’이라는 시간적 바구니에 집어넣어버리고 그 바깥에 ‘이미’를 둘러쳐버렸어요. 그 ‘아직’이 깨어나니까 ‘아, 처음부터 내가 나만 챙기고 내 욕심만 챙긴 것이 주의 영광스케줄에 이미 포함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내가 안다.’는 거예요.
그러면 신약성경의 십자가의 의미가 뭐냐? 더 이상 내가 나를 생산할 필요가 없어요. 나 말고 다른 분이 살아요. 나 말고 다른 분이 나를 생산한 것이 돼요. 물론 골치 아픈 나지요. 말썽꾸러기 나. 하지만 말썽꾸러기 나라도 이미 예수 안에서 창세전에 나를 말썽꾸러기로 살도록 생산했다는 말이지요. 내가 생산한 것, 내가 자가생산한 것이 아니고 주님 안에서 나를 그런 인간으로, 여자로, 또는 남자로, 말썽꾸러기로 살도록 생산이 돼버린 겁니다.
그러면 생산 된 자와 여전히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구원받겠다고 교회 들랑날랑 거리는 그런 인간, 교회놀이 하는 사람들, 목사들, 자기교회 가지고 게임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과의 차이점이 뭐냐? 질문이 달라요. 자기가 스스로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은 “주여, 나는 누굽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반면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주여, 나는 어떻게 구성되었습니까?” 다시 말해서 “나의 모든 행동은 내 바깥의 어떤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게끔 돼야 되는 겁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어떤 힘에 의해서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처음에 이야기한 포괄적영광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포괄적영광이 마치 인간의 개별적, 부분적영광의 저 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보통 종교고요, 복음은 뭐냐?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서 사람 속에 끼어들어왔거든요. 끼어들어왔으니까 이렇게 증명합시다. 전체 포괄적영광, 이미 장만된 영광, 모든 영광은 가만히 이미 인간 속에, 같은 개별차처럼 끼어든 거예요. 끼어드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볼 때 그냥 목수의 아들로 보는 거예요. “어이, 아저씨!” 이렇게 보는 거예요. 나의 대체 인간인줄을 모르고, 그분이 갖고 있는 영광이 곧 우리의 영광인줄을 모르고, 그 분 안에 담겨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곧 이어서 나의 내부를 장식하고 나의 내부를 채운다는 것을 알지를 못하고, 우리는 나만 챙기는 식으로 살기 때문에 나에게 불리하고 나한테 도움이 안된다 싶으면 자꾸 밀쳐내는 식으로 살아가게 되지요.
진짜 주님의 포괄적영광을 우리는 알고 싶은데, 우리는 ‘아직’이 아니고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싶은데 그 아시는 분이 우리 속에 끼어들었어도 우리는 부지런히 그것을 밀어낸 거예요. 밀어내면 나밖에 모르는, 내 영광만 챙기는 내가 어떻게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느냐, 그 방법이 실패로 끝나지 않느냐? 실패로 끝나는 것은 맞는데요, 우리 쪽에서는 실패인데 주님 쪽에서는 그것을 고난으로 봐요. 예수님이 당하는 고난과 시련과 수난으로 본다니까요? 박해와 핍박으로 봐요.
이 박해와 핍박받은 이것을 십자가로 가져갑니다. 십자가로 가져가게 되는데 누가 그것을 그렇게 하는가? 성령께서 그 죄짐을 몽땅 십자가로 가져가게 해요. 십자가로 가져가게 하고 성령께서 무사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 다음부터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성령에 의해서 일으켜 세워서, 부활시켜서, 깨워서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그 힘도 성령의 힘이에요. 올라가게 해 놓고는 그 다음부터는 성령이 자진해서 그 올라가신 예수님의 영으로서 탈바꿈 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게 됩니다. 전에는 ‘저 사람이 예수인가? 이 사람이 예수인가?’ 이렇게 했는데,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주님의 고난이 우리 내부로 들어오면서 우리에게 상처가 돼요. 아픔이 되고 근심이 되고.
신약의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그거예요. 구약 같으면 “제사장님, 제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안그러면 “모세님, 제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혹은 “선지자님, 제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자꾸 사람 대 사람의 관계, 사람 대 사람의 소통으로서 일을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지금도 성령 안받은 사람들은 누구를 찾고 누구와 내통하려고 해요? 자꾸 사람하고 통하려고 하지요. 사람에게 묻고, 어떤 좋은 교훈이 있는가를 찾아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사람에게 묻지를 않습니다. 요한일서 2장 17절의 말씀처럼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의 추방원리입니다. 교회 오지 마세요. 나가세요.” 할 때 “주께서 보낸 사람을 왜 내보내십니까?” 하는 그 주께서 보냈다는 마음을 갖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에요. 본인이 주님이 관할 하에 있다는 것이 그만 툭 튀어나와버린 거예요. “주께서 내 발걸음을 인도하는데 목사 네가 뭔데 나를 가라 말라 하는가?” 이렇게 툭 튀어나와버린 거예요.
교회 부교역자 되는 분들과 통화를 하거나 만나서 대화할 때 제일 답답한 것이 뭐냐? 탓을 당회장 탓하고, 한국교회 탓하고, 교인들을 탓해요. 제가 보기에는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화풀이요 행패로밖에는 안보이거든요. 당신 내부를 보라는 겁니다. 설교 처음에 한 이야기, 포괄적영광을 안다는 것은 뭐냐? 범사에 감사하는 거지요. 그런 교회, 그런 당회장, 그런 한국교회를 주신 것이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거기서 바꾸기 위한 하나의 기계장치인 거예요. 그런 기계장치가 꼭 필요했던 겁니다.
“우리 당회장 목사님은 꼭 돈만 밝히고……” 네가 그 자리에 가면 돈 안밝히겠어요? “교인들은 복음도 못 알아먹고요.” 너는 네 힘으로 알아들었습니까? 지금도 네가 복음을 네 힘으로 알아들었다니 수상해. “한국교회가 썩었어요.” 처음부터 교회는 원래 썩은 거야. 그 썩은 교회에 너라도 썩지 말라고 보냈잖아. 그러니 썩어도 괜찮잖아요. 본인이 안썩으면 되잖아요. 내부자 문제거든요, 내부자 문제. 주께서 내부자로 있다는 말이지요. 모든 본인의 행동은 내부에 있는 성령에 의해서 그렇게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말이라는 것은 일단 행동해 놓고 말은 뒤에 변명하면서 자기 정당화하기 위해서 붙이는 것이 말이라는 거예요. 행동부터 먼저 하게 되어 있는데 그 행동은 충동과 기분으로 하게 되어 있고 그 행동을 남에게 포장하기 위해서 그렇게도 말이 많아요. 뭔가 켕기는 것이 많다는 그 말이거든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신약성경은 내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나보다 먼저 주님의 포괄적영광이 계셨고 주님과 아버지사이에서 완성한 관계가 있어요.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고 다시 찾는다. 그 버리고 다시 되찾는 그 과정을 그대로 반복해야 될 사람, 피조물을 만들어놓은 것이 말썽꾸러기 피조물인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버림이 되어야 하고 우리 힘으로 나서면 안되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성령에 의해서 다시 찾게 되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 안에서 계속 살게 됩니다. 주님이 살게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관심사가 뭐냐 하면, “주님이 나를 이런 식으로 살게 하는데 그 사는 원리원칙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하게 되면, 너는 사람과 자꾸 통하려고 하지 말고 말씀과 통해야 돼요. 사람은, 말씀이 끊어져버리면 권태로워지고 초조함이 일어나요. 사람이 불안한 것은 말씀이 끊어졌기 때문에 불안해지는 겁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살아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지키라는 말이 아니에요. “가을에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해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모르는 여자는 다 아름답지요. 가을에는 편지를 쓴다는데 편지 쓰지 마세요. 우리가 편지에요, 우리가 편지라니까, 우리가 편지에요! “내가 뭘 할까요?”가 아니라 난 어떻게 구성되는가, 입니다.
이 신약시대, 모든 예언이 완성되고 마감된 이때에 난 어떻게 구성되는가? 예수님에 의해서 구성되는데 예수님에 의해서 어떻게 구성되는가? 말씀의 원리에 의해서 구성된다. 말씀의 어떤 원리에 의해서 구성되는가? 예수님과 아버지사이에 있었던 그 사이, 그 관계를 반복시키는 식으로 우리가 구성되는 겁니다. “제발 좀 버림받아 줘, 제발!” 다시, 제가 세 번째로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찾는 이유가 말하기 위해서 찾고, 말한다는 것은 자기행동을 정당화하고 화풀이하기 위해서 찾는 거예요.
배우자가 죽고 난 뒤에 외롭다는 것, 보통 남자들이 그래요. 아내 죽고 난 뒤에 ‘사는게 사는게 아니’라고 따라 죽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부인도 마찬가지에요. 남편 살아 있을 때 그렇게 남편한테 얻어맞아놓고는 남편 죽고 난 뒤에는 우울증 걸리고 치매 걸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평소에 그만큼 사람만 찾았다는 증거거든요. 왜 사람을 찾습니까? 나를 위해서 찾는 거예요. 왜 말합니까? “날 좀 알아줘.” 왜 알아줘야 됩니까? “나 속에서 열불난다.” 왜 열불이 나는데? “나는 자가생산에서 꿈과 희망이 있는데 그게 안되니 화풀이용으로 배우자에게, 상대방에게 화풀이를 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화풀이를 해요. 그런데 그 상대방이 죽고 난 뒤에는 만만하게 화풀이할 대상이 없어요. 그러면 배우자 죽은 뒤에 또 새장가를 가면 되지 않겠는가? 그 때는 돈이 들어요.
한 마디로 뭐냐? 세상 전부가 자기 화풀이하기 위해서 소비되는 어떤 원료인줄로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세상 돌아가는 전부가. 내 분통 터뜨리는 하나의 대상체로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사람만나서 “우리 친하게 지내자. 말동무 하자.” 그렇게 하는 이유가 ‘나는 이렇게 잘났는데 세상은 왜 이렇게 내 뜻대로 안되는지 모르겠다. 정말 화난다.’ 신에게 화풀이하는 그것을 눈에 보이는 인간에게 화풀이하기 위해서 가족이라는 것이 있어야 돼요. 가족이 있어야 행복해요. 화풀이할 대상이 있기 때문에. 이게 인생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도하는 그 사람이 지하철에서 전도했다고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누구든지 내 말 좀 들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 외로워요.” 그런 뜻이에요. 아무도 없으니까 전도하면서 화풀이하고 있어요. “천사님, 왜 내 말 듣고 전도되는 사람이 없습니까?” 그런데 제게 이야기한 그 분이 아주 날카롭게 질문했어요. 내가 듣고는 그 질문은 내가 5년 만에 처음 듣는 시원한 질문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님, 전도하고서 몇 명 전도되었는지를 왜 궁금해 하지요?” 왜 궁금해 하기는요? 전도하는 그 말을 했다는 뜻이 뭡니까? 날 좀 알아달라고 전도했는데. 나 여기 존재한다고, 그걸 알아달라고 전도했는데.
신약에 와서도 아직도 구약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켜야 되고, 섬겨야 되고, 영광 돌려야 되고. 수고스럽지만 받은 주보를 반만, 좀 수고스럽겠습니다만 반만 들춰보세요. 주보에 설교요약이 되어 있지요. 거기 세 번째 줄에 민수기 12장 1절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하 6:22,23절이 나옵니다. 더 내려가면 요한복음 12장 43절 나옵니다. 더 내려가면 요한복음 1장 14절이 나옵니다. 그 내용을 순서대로 보면 이렇습니다. 민수기 12장 1절에서는 영광문제에 있어서 모세는 포괄적인 영광을 아는데 모세 누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모세 누나가 모세한테 얼마나 잘해줬다고요? 떠내려가는 모세를 건져준 그 누나가 아닙니까? 나일강에서 안건져줬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런데 행세하면 꼭 그 값을 하게 되어 있다고요.
모세가 흑인 여자를 들이니까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그런 시커먼 여자를 들이느냐? 이 누나가 엄마를 대신한다.” 이래서 반대를 했던 모양이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모세는 포괄적인 영광을 아는데 어떻게 너는 네 집구석밖에 모르느냐?” 그래서 그 누나의 얼굴이 영광은커녕 문둥이로 변했어요. 영광과 가장 극대적인 징벌을 받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일부, 하나의 계시입니다. 꼭 우리가 문둥병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은 주 앞에 저주받는다, 심판받는다는 그 말입니다.
자가생산, 자기소비, 자기파탄, 죽음, 죽음 다음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그 심판을 구약 이스라엘 내부에서 미리 보여준 거예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이미 이스라엘 속에는 하나의 상처처럼 온전한 영광이 박혀 있었습니다. 박혀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상처로 보는 거예요. 온전한 영광인데. 그 상처가 어떻게 영광인지 계속 봅시다. 다음에 사무엘하 6장 22절, 23절의 내용입니다. 다윗이 언약궤가 돌아오니까 너무 좋아서 옷을 벗어버리고 춤을 췄다는 말이지요. 그걸 누가 봤는가? 왕비 미갈이 본 거예요.
보면서 ‘저 양반이 이스라엘의, 일국의 권위 있는 임금님인데 옷을 벗으려거든 내 앞에서나 벗어야지 어떻게 저 미천한 하녀들이 있는데 어떻게 옷을 벗어던지고 춤을 추는가?’ 이래서 다윗이 오자마자 잔소리를 늘어놓았거든요. 다윗이 하는 말이 “내가 언약궤 앞에서 이보다 더 더럽고 비천해도 나는 좋아. 더 망가져도 나는 감사해. 왜? 포괄적인 영광 속에서 나를 생산했기 때문에.” 이게 장차오실 예수님의 비천함을 보여주거든요. 전체 우주를 만드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비천하게 오신 그 영광을 다윗은 미리, 일찍 받게 된 겁니다.
그렇게 하고 난 뒤에 미갈이라는 다윗의 부인은 평생가도 자식을 못낳는 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왕비면 뭐합니까? 자식도 하나 못낳는데? 비천하게 되어버렸지요. 이것이 뭐냐? 인간이 인간과 소통할 때의 영광과 그리고 말씀 안에서의 영광이 어떻게 차이 나는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 번째가 뭐냐하면, 요한복음 12장 43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왜 너희들이 나를 믿지 않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영광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영광, 하지만 사실은 무엇이 장착되어 있는가? 내 영광이 가로막고 있으니까 백날 주님의 영광, 영광, 해도 사실은 자기영광을 확대하는 수단으로만 사용될 뿐이다. 인간은 때려죽여도 자기영광을 못버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거예요.
마지막 네 번째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인간의 영광이 아니고 독생자의 영광, 그런데 그 독생자의 영광이 이 땅에서는 비천한, 외면하고 싶은, 꼴보기 싫은, “망했네, 망했어!”라는 평가를 받는 영광, 그게 바로 독생자의 영광이에요. 그러나 그 독생자의 영광을 깨보면 하늘이 영광이, 포괄적영광이 다 들어 있어요. 우리가 범사에 감사한다, 이거, 안됩니다. 감사할 것만 골라서 감사할 마음가짐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안되는데 이 안되는 나를, 안되게 하시는 이것을 주님이 십자가를 증거하는 재료로 사용한다는 거예요. “목사님, 그 말 믿어도 됩니까? 진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말씀을 댈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 꿈속에 베드로에게 찾아갔습니다. “베드로야,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속의 것들을 먹어라.” 했습니다. 베드로는 말씀에 의하면 영광이 안되는 것들이기에, 영광이 안되기에 먹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옵니다. “베드로야, 먹어라.” “제가 저걸 먹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됩니다.” 고집을 부립니다. 떠나갔습니다. 다시 세 번째 옵니다. “베드로야, 먹어라.” “영광이 안되는데 어떻게 먹습니까?” “내가 먹으라고 하면 먹어!”
윤리도덕이요? 성경에 그런 것은 없어요. 까라면 까는 거예요. 가라고 하면 가는 겁니다. 남의 평가 보지 마세요. 남의 평가가 아니라 내가 평소에 내 평가, 내가 잘되기 위해서 그 윤리도덕을 이용해 먹은 거예요. 바르게 살자? 그 속에는 자기영광밖에 몰라요. 주께서 찾아옵니다. “먹으라고 하면 먹어라. 이유가 없어. 네 인생이 아닌데 왜 네가 너를 커버하고 방어하고 그 난리냐? 먹으라고 하면 먹어. 말씀이 너를 생산하는 거야. 네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야.”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단성은 이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어요. 자꾸 지키려고 해요. 자기영광을 위해서. 이것은 가짜입니다. 행패부리지 마세요. 짜증내지 마시고., 남 붙들고 화풀이하지 마세요. 그러나 화풀이하게 되어 있고 행패 부리게 되거든요. 그것을 하나님 붙들고 포괄적영광, 십자가 앞에서 하세요. 오늘 또 새로운 윤리가 나오네요. 십자가 앞에서 마음껏 원망하시고 마음껏 불평하시고 “주님이 왜 저를 이렇게 구성했습니까?”라고 고백하세요. “그러나 주께서 보내시지 않았으면 어떻게 주 앞에 화풀이하면서도 십자가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라고 고백하세요.
성도는 다른 세계에 뿌리가 있습니다. 고향이 다른 세계입니다. 이쪽이 아닙니다. 신약시대기 때문에, 십자가로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개별자가 아니고 주님안의, 주님의 새로운 생산물로서 십자가증거하라고 우리는 성깔대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영광이 착하다고 영광 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발각당하는 이것이 주께서 일하시는 영광인줄 알았사오니 날마다 발각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