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64강-그리스도와 사도와 성도(고전11;1) 1510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0. 26. 07:19

2015-10-25 12:38:34 조회 : 68         
   그리스도와 사도와 성도151025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그리스도와 사도와 성도(고린도전서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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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10-25 13:16 
그리스도와 사도와 성도

2015년 10월 25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1:1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천국은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출입조건은 인간들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정한다고 해서 그 조건이 완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조건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라”입니다. ‘하나님을 본받으라’가 아닙니다. 중보자를 본받는 겁니다. 중보자가 이 땅에 와서 사람들에게 냉담한 반응을 받은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 의하면 ‘어두움’입니다. 하지만 같은 ‘어두움’ 속에 예속된 자들은 세상이 그토록 어두운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게 중에서도 착하고 선한 자들이라고 하늘에서 인정해줄 자가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이상형을 본받는 수가 생깁니다.

인간들 중에서 그중 괜찮아 보이는 신앙적 영웅을 본받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이 기존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각종 인형들이 있지만 뜯어보면 그 안에 동일한 솜뭉치가 들어있듯이 인간들을 내부로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동일한 어두움과 죄가 들어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죄로 인해 하나님이 제시한 기준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오늘 본문 말씀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통보하는 셈이 됩니다. “그만 헤어지자. 갈라서자. 아무리 해도 이 기준에 충족시킬 수없음을 이제 받아들여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이들이 사도를 보고 뭐라고 공박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구원에 성공했느냐?”라고 나오겠지요.

사도 바울에게는 삶의 방식이 전환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넉넉하게 5년 잡고 십자가 믿어보기로 작정한 것이 아닙니다. 한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을 잃는 순간이 말입니다. 사도는 그 때부터 중보자의 경험이 그의 몸과 인생을 통해서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기존의 인간들이 해낼 수 있는 경험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하신 그 경험이 사도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들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믿는 척’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의심하면서’ 믿어보려고 하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하신 일에 의심하는 겁니까?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믿을 꺼리가 따로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욕망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육을 가진 자는 모두 흘러나옵니다. 욕망은 다음의 세 가지 내용을 품게 됩니다. 첫째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나 상황 그 자체를 갖고 싶어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차나 가방이나 아파트나 권력 같은 것을 소지하고 싶어합니다.

둘째는, 자아가 그 물건을 이미 가져서 즐거워하는 그 타인처럼 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셋째는, 나도 부러운 타인처럼 이미 같은 것을 갖고 있음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입니다.  따라서 종교적 욕망도 욕망입니다. 천국을 갖고 싶어하고, 내가 천국에 간 사람처럼 되고 싶어하고, 그렇게 된 것을 남들로부터 진실된 성사된 현실이라고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예수 믿는 것’도 죄요 어두운 세력에서 비롯된 겁니다. ‘예수 믿음’은 나의 능력차원에서 나와서는 아니됩니다. 말씀 성취차원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그 성취 능력은 오직 예수님의 고유 권한에 속합니다. 따라서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방출되고 터져 나오도록 예수님이 개입한 증거의 장(場)으로서 성도는 다루어지게 됩니다.

‘본받음’이란 그 시작점이 중요합니다. 사도에게 있어 ‘예수 본받음’의 시작점은 자신의 내부의 욕심에서 이미 지옥에 터져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이 자시로서는 손쓸 수 없는 상황이다는 사실도 아울러 알게 되었습니다. 곧 말씀이 성취되는 현장이기에 자아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예수님이 등장하셔서 손 써고 계시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고상을 떨어도 5톤 트럭에 정면 충돌하면 평생 가꾸어놓은 고상도 한순간 흙가루로 사고 현장에서 뒹굴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믿는 세계는 충동의 세계요 기분 따라 사는 세계입니다. 그동안 자신을 꾸며온 것은 허겁지겁 때늦게 둘러댄 변명들 뿐입니다. 이는 인간이 내부적으로 때마다 폭발하는 욕심을 당해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본받고 싶어도, 그저 내가 본받고 싶은 지어낸 나의 욕망의 화신으로서 예수상 뿐입니다. 그로 통해서 나의 욕망이 긍정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현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육의 능력이 작용하지 않는 다른 혈연관계를 예수님을 통해서 혈실화시켰습니다.

히브리서 12:6-8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잘 잔다고 해서 사람이 아닙니다. 징계가 없으면 남의 자식이라서 천국에게 배제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관계를 지상에 구체적으로 남겼습니다. 예수님이 생애가 바로 그것입니다. 즉 ‘아들이시기에 당해야 하는 체험’을 또 ‘아들이어야 하는 성도들’에게 제공해주시는 겁니다.

이 새로운 혈연관계에는 ‘사랑의 끈질김’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어떤 힘도 이 사랑의 쳐들어옴을 저지할 수없습니다. 죽음만큼이나 강합니다. 아가 5:2에 보면,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고 되어 있습니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집요함이 다윗언약을 따라서 오신 메시야에서 주어졌고, 그 능력이 성도에게는 징계로 나타납니다. 같은 혈육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더불어 같은 외계인으로 취급받기에 이미 ‘본받음’ 상태에 돌입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관리하고 있기에 그것은 곧 ‘자신이 자신을 계속 해치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자꾸만 거짓 믿음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게 됩니다. 징계를 맞게 되면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쓰레기’임을 알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이 나의 나라가 아니라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나라임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0-25 22:42 

62강-고전 11장 1절(그리스도와 사도와 성도)15102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1장 1절입니다. 신약성경 276페이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짧은 한 구절인데 이 구절 속에 천국은 차단되어 있다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들어오세요.”가 아니라 “이 조건에 안맞거든 도로 집으로 가세요.” 이 조건은 우리가 사정한다고 해서 완화될 조건이 아니에요. 기성품 파는 옷집 말고 맞춤옷 가게에서 미리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옷을 맞춰놓았어요. 사람들이 그 옷을 보고 ‘야, 저 옷 좋다.’ 하고 아무나 와서 “저 옷 주세요.”라고 한다면 “안팝니다.”라고 하겠지요. “이 옷에 딱 맞춰진 자만이 이 옷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하는 겁니다.



신데렐라이야기가 그렇잖아요. 구두 한 짝이 왔는데 신데렐라 언니들이 다 신어 봐도 발에 안맞아요. 그 구두에 발이 딱 맞는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준비된 구두거든요. 사도바울이 알고 있는 천국은 이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방출되지 않거든 아예 집으로 가세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본문말씀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라고 했잖아요. 예수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이 조건, 천국에 들어가는 이 조건이 되려면 우리의 기존의 삶의 방식이 전환되어야 되고 그 전환되는 과정에서 예수그리스도가 방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방출된다는 말은 우리 인생가운데서 우리보다 먼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경험, 그게 상당히 놀라운 경험이거든요. 예수님이 기적행한 그런 경험 말고 예수님의 행함에 대한 주위의 차가운 반응들, 싸늘한 반응들, 그 반응들을 우리가 체험하게 된다면 그 맞춤옷의 주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 세상이 어둡다고 되어 있어요. 거리마다 가로등이 켜져 있어서 밤에도 별로 어둡지 않거든요. 그런데 어둡다고 하는데 어둡다고 누가 이야기했는가? 빛 되시는 예수님의 안목으로 볼 때 어두운 거예요.



그런데 같은 어두움끼리는 어두운지를 몰라요. 오직 빛 되시는 예수님에게만 어둡다는 말이지요. 어둡다고 했을 때 그 때부터 이 세상은 어두운 티를 다 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움직이고 말씀하시고 일을 벌이게 되면 흙을 파헤쳐서 개간하는 것처럼 숨어 있던 어두움들이 다 나와야 되는 겁니다. 세상은 각자 내가 고관대작이니 나대고 혹은 내가 못났느니 하고 절망하는데, 인형들이 보기에 아무리 예뻐도 뜯어보면 전부 다 솜 나옵니다. 솜덩어리였어요. 껍데기의 다양성뿐이거든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시간도 지금 감 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지금 농사짓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그 사람들이 감 따고 있을 때 밑에서 한다는 말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세요.”라고 한다면 “바쁜데 저리 가세요.” 한다는 말이지요. 이 본문자체가 분명히 천국의 조건인데 사람들은 이 조건을 수용할 수가 없어요. 어떤 인간도. 그래서 “목사님, 오늘 본문 내용은 한마디로 뭘 이야기하는 겁니까?”라고 하면 저는 이렇게 하겠어요. 그만 헤어지자는 겁니다. “우리 갈라서자.” 안되는데요, 뭐. 안되면 갈라서야지.



더 쉽게 말해서 밥 먹고 잠잔다고 해서 인생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감 딴다고 인생 사는 것이 아니에요. 삶의 방식이 전환되어야 되지요. 예수님의 그 경험이 나오는 인생, 예수 그리스도를 방출하는 인생으로 바뀌어야 되지요. 그냥 감이나 따고 시장에 팔아서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잘 자고, 그러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는 이 말은 그리스도라는 중보자, 이 중보자의 경험이 너희 속에서도 나올 수 있느냐는 겁니다.



중보자, 교회에서도 이 중보자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중보자가 안나오면서도 자꾸 천국 간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중보자가 나와야 돼요, 중보자. 중보자가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야 돼요. 왜냐? 중보자는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그 메시아이기 때문에 이방인들도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서, 다시 말해서 구약으로 돌아가서 구약에서부터 다시 신약으로 노선을 잡고 들어와야 됩니다.



아까 교독문 이렇게 읽었거든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해놓고 그 뒤에 나오는 말이 있어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그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고 이방인들이 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벌써 성경에서 이방인이 나오잖아요. 이방인의 개념을 사용했다는 말은 “이방인들은 탈락이에요.” 그런 뜻이라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은 탈락이에요. 그러나 너희는 절대로 이방인이 되면 안돼.”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방인으로 태어났어요. 이방인으로 태어났다면 이방인으로 태어난 주제, 입장에서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로 다시 들어가서 거기서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중보자니 바로 그분을 만나야 하는 약간은 복잡한 작업이 성경에 깔려 있습니다. 천국 가는데 그러한 복잡한 작업은 우리를 애먹이려고 하는 것이고 천국 만드는 그 작업과정이 그 순서를 밟아서 그런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외계인이거든요.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보게 되면 수상한 여자들이 등장해요. 그 수상한 여자들이란 이방인들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의 노선에 기존에 육적인 족보가 있는데 그 족보 속에, 이방여자들, 낯선 족보가 끼어들어서 그 낯선 족보의 전철을 따라서 메시아가 와버리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은 일을 복잡하게 하시는가? 그냥 하나님 믿으면 천국 간다, 이렇게 하면 쉬운데 왜 쉬운 방법으로 하지 않는가? 그것은 인간내부에 천국을 방해하는 원수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그걸 몰라요. 인간내부에 천국을 방해하고 천국을 대적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간은 몰라요. 이방인은 물론 모르고요. 이스라엘백성에게는 그것을 율법으로 알려줬지만 그들은 껍데기로 믿는 척을 해서 위장해버렸지요.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망했는가? 믿는척을 해서 그래요. 믿지를 않아요. 하나님을 안믿었는데 믿는척을 했습니다. 믿는 척을 한다는 말은 의심하면서 믿는다는 뜻이에요. 의심하면서 믿는다. 예수님이 무슨 소리 하면, ‘진짜 그렇겠나? 어쨌든 일단 믿어보자.’ 일단 의심하면서 믿어요. 왜 의심하면서 믿느냐 하면, 진짜 의심 안되는 것을 따로 꼬불치고 있기 때문에, 따로 챙기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과학이거든요. 의심 안할만한 것은 근거가 있는데 이 성경이야기가 너무나 이상하고 납득도 안되고, 과학적인식으로는 수용이 안되고, 그렇다고 거부할 수는 없고, ‘그래, 일단 믿는다 치자.’ 그렇게 믿는다 치는 식으로 나갔다가 이스라엘이 망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스라엘나라가 멸망되고 파괴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진짜 이스라엘을 생산해낸 겁니다. 선지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지요. 다니엘이 그런 사람이고.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믿는 척하는 인간과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이스라엘 내부에서 서로 양분되게 하고 뚜렷하게 서로 대조를 시키면서 장차 오실 메시아가 인간사회에서 똑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도는 예수님이 당했던 싸늘한 반응, 냉담한 반응을 똑같이 받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 말은 “안되지? 그렇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라고 한다는 말은 “안되지? 안될거야. 그만 헤어져. 교회 50년 다녔다고? 안돼. 그리스도를 본받는자가 아닌데 될 리가 있겠어? 안돼. 이참에 그만 ~척하는 것 그만해도 괜찮아. 그동안 너무 힘들지 않았어? 힘들었지? ~척 안해도 돼. 네가 믿는 구석은 따로 있는데 자꾸 네가 믿는 방식으로는 주님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왜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척을 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뭘 깨달아서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기분 따라 사는 충동덩어리거든요. 충동덩어리인데 그래도 들은 성경구절이 있어서 충동적으로 일은 저질러놓고 허겁지겁 성경동원해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믿는다고 포장을 하는 데에 너무 신경을 많이 쓴 거예요. 믿지도 않으면서 “이런 일을, 이런 행동을 하니까 신자 맞잖아요.”라고 우기는 식으로 너무 많은 세월을 버텨온 거예요.



성경말씀은 그런 믿는 척을 놓치지 않아요. 예를 들어서 ‘칼로 서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고 성경에 보면 나오잖아요. 우리는 남의 일로 알았지요. 그런데 목사가 회칼 들고 설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칼 들고 설친 그 목사가 옛날에 대구에서 합동측 노회할 때 총 들고 왔다는 사람이에요. 이번에는 총이 아니고 칼이었지만. 칼 들고 와서 목사 찌르고 목사가 그 칼 빼앗아서 또 찌르고. 둘 다 입원했어요. 성경말씀에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남의 이야기로 들었잖아요.



도대체 무엇이 그 목사들로 하여금 화나게 했을까? 무엇이 약오르게 했을까? 달리 말해 무엇이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 하는 그것을 들통 냈을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인간은 예수를 믿어서는 안되는 존재였습니다. 믿으라 하니 믿어지는줄 착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목사 되기까지, 그리고 목사 하면서 그 많은 세월을.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믿음의 대상이 있어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약 1:15) 우리는 그 욕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 욕심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욕심에 부합될 때에 한해서 그 예수와 그 하나님, 삼위일체를 믿게 되어 있어요.



어떤 학자, 라캉이라는 학자는 인간의 욕망을 세 가지로 봤습니다. 하나는, 상대방이 갖고 있는 욕망을 내가 욕망해요. 남자는 차, 여자는 명품이나 아파트, 이런 거지요. 어떤 차가 있으면 ‘저걸 갖고 싶다.’ 욕망이지요. 그 다음에, 차를 갖고 있는 그 사람이 부러워요. 그 차를 갖고 즐거워하고 있는 그 사람이 내 욕망의 대상이 된다니까요? 두 번째 것 이야기하면 첫 번째 것은 다 잊어버렸지요? 첫째는, 차 자체가 갖고 싶다. 두 번째, 그 차를 가지고 즐거워하는 네가 되고 싶다. 세 번째, 나도 너처럼 차를 갖고 있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인정받고 싶다. 이게 세 가지 욕망입니다.



나를 믿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믿고, 나를 인정해주는 너를 믿고 싶고. ‘너’ 그 자리에 예수 이름을 집어넣어 보세요. 그러면 그 예수는 뭐냐?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대로 해주는 예수를 내가 채택하고 조작하고 날조해내고 만들어내는 그 일을 우리는 교회 와서 해온 겁니다. 그래놓고 ‘믿으라’ 하니 ‘믿습니다’하고 우긴 거예요. 인간은 아무리 믿어봤자 자기의 육의 범주를 못벗어나요. 내가 믿는 것을 다 헤아려보세요. 내 육의 욕망과 관련된 사항이 될 겁니다. 이것은 제가 장담합니다. 천국? 내가 가면 좋은 곳이 천국이라는 거예요.



방금 제가 말한 이 욕망가운데 무엇이 빠졌습니까? 중보자가 빠진 거예요. 중보자의 욕망이 빠진 겁니다. 중보자가 육적인 인간에게는 믿어지지 않게 되어있어요. 인간이 처음부터 믿는다는 사실조차도 죄라는 사실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2천년기독교역사가운데서, 한국교회역사가운데 누가 그걸 알았겠어요?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그런데 믿고 싶어요. 왜? 나의 욕망이 가만두지 않으니까. 내가 잘되는 짓을 내가 금지할 수가 없거든요. “선악과 따먹으라.” 할 때 따먹을 수밖에 없듯이 예수 믿으라고 할 때 예수 믿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다 나 잘되는 쪽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 안에 나를 망하게 하는 요소가 있는데요? 나를 멸망시키는 괴물이 들어 있는데요? 어떻게 내가 그 지배에서 벗어납니까? 인간의 모든 것은 혈연관계에서 나온다고 광주강의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자기자신만을 위한다고 하지만, 애 하나 낳아놓아 보세요.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장담을 해도 밤중에 애 울면 달래야 돼요. 육이라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 있다는 것을 자신이 몰랐던 겁니다.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살고 기분대로 살면 그것이 육이 전부인 줄 알았지요? 아니에요. 하기싫어도 해야 되는 일이, 육적으로 해야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식과 부모관계에요. 애먹여도 자식이고 “나가 죽어라.” 하고 맨 날 외쳐도 자식은 자식이고 남이 안돌볼 때 몰래 쌀 퍼다 주면서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부모밖에 없어요. 형제밖에 없고. 이것은 내가 생각 못한 겁니다. 천국 갔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딸이 여기 와 있는가, 찾아보는 거예요. 내 사랑하는 아들이 천국 아니고 지옥에나 가 있지 않은지 걱정이 되어서 천국에서조차 잠못드는 밤이라니. 천국에 가서도 잠도 못자면 어떻게 하겠어요?



미리 상상하는 거예요. ‘만약에 천국에 내 남편 안오는 것은 괜찮은데 내 자식이 안온다면 어떻게 하면 좋아?’ 이럴 때 자식이 고생하는 지옥에서 함께 고생하고 싶은 것이 어미의 마음이잖아요. “어매! 어매!” 전라도 방언으로 엄마라는 뜻이랍니다. 모든 것이 혈연관계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가? 혈연관계 때문에 망한 거예요. 하나님보다 먼저 내 자식, 메시아보다 우선 내 자식. 육에서 난 것은 육인데 누가 거기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까? 아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다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요? 이것은 우리에게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맞춤조건에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도 맞춰지지 않습니다. 갈라지고 헤어지는 것이 아주 속편한 겁니다. 괜히 교회놀이하지 마시고, 괜히 교회 놀이 하다가 회칼이나 들지 마시고.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 사도바울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할 때 이 본받음의 시작점이 어디인가, 그 시작점을 찾아야 돼요. 사도바울 본인에게 그 시작점이란 지옥을 발견하는 거기가 시작점입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아는 그 시점, 그게 본받음의 시작점이에요. 본받는다고 해서 갑자기 성화하고 도 닦고 온유와 화평 한다고 난리 죽이는 그것이 본받는 것 아니에요. 본받는다는 것은 지옥이라는 것이 남이 만들고 내가 피하면 되는 것이 지옥이 아니고, 내가 있는 그곳에서 구더기가 나오는 거예요, 구더기가. 구더기가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생밤인데 까보니까 벌레 들은 거예요. 밤인데 안에 벌레가 들어 있어요. 아침부터 이런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징그럽잖아요. 나요? 괜찮다고 여겨서 까보니까 벌레, 구더기 들어 있어요. 지옥 들어 있어요.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는 손사래를 이렇게 쳐야 돼요. 노! 이것은 절대로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에요. 이 책임은 우리 어머니에게 있습니다.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이것은 절대로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몸짓, 이 말이 뭐냐? “내 안에 지옥이 있습니다.”를 인정하는 몸짓이에요. 그럴 때, 아까 말한 욕망의 세 가지 요소, 그 세 가지 요소는 당연한 겁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당연한 거예요. “죄가 장성하여 사망” 다시 말해서 저주, 심판을 낳고, 지옥을 낳고, 이것은 당연한 거예요. 이제 우리는 알게 된 거예요. 내 몸이 내가 관리할 장소나 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지옥을 묘사하기 위해서 활용하시는 주님의 관리 하에 있는 말씀이 작용하고 있는 자리가 되는 거예요.



말씀이 방출하는 거예요. 책에 있는 문자로 되어 있는 말씀인줄 알았더니 이게 나를 통해서 막 나오는 거예요. 육이 나오고 지옥벌레가 막 나오고. 사람이 아무리 예쁘게 살고, 착하게 살고 “♬보랏빛 향기~” 이래가지고 곱게곱게 살아도 5톤 트럭이 와서 받아버리면 그대로 부서져서 공중에 다 흩어져버립니다. 부서지면 흙이 돼요. 그 아름다운 추억이 흙조각이 되어서 사방으로 튀어버립니다. 한순간에 내가 없어져버려요. 내가 사라진다고요. 흙덩어리니까. 아름다운 기억도, 추억도 순식간에 날라 가버립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찬찬히 믿어라. 5년 동안 생각해서 믿어라.” 그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그냥 한 방입니다. 한방에 쳐버려요. 삶의 방식이 전환되는 순간, 한 방에 쳐버리면 거기서 에너지가 나오는데 그 에너지가 뭐냐? 십자가의 저주의 힘, 다른 말로 구원의 힘, 십자가사건의 재현, 그 힘이 나와 버리지요. 힘이 나오면서 어떤 기쁨을 주느냐 하면, 한 순간 내가 사라지는 기쁨을 줍니다. 내가 없어지는 기쁨, 이게 삶의 전환되는 순간이에요. 내가 사라지는 것. 구더기가 되었든 밤벌레가 나오든 뭐가 나와도 괜찮아요. 왜? 나 자체가 사라지니까. 사라지고 뭘로 변하는가? 말씀이 곧 말씀이 되게, 말씀이 곧 현실인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바구니, 또는 껍데기, 또는 상자로 돌변합니다. 이제는 말씀이 나오지요. 내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말씀의 영원함이 나오지요. 나는 말씀덩어리였던 겁니다. 말썽덩어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덩어리, 로고스덩어리였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속에 같이 섞여 나온 것이 있어요. 우리의 죄와 지옥과 더불어 섞여 나오는 것이 뭐냐? 새로운 혈연관계가 나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어요. 혈연관계는 못빠져 나온다고 했지요? 아무리 아버지가 살벌하고 매정해도 자식에게는 못이기듯이, 아무리 냉정한 아버지라도 자식이 교도소가면 눈물짓듯이 육의 관계는 이상한 관계에요.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맺은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맺어진 관계에요.



사실은 자식부모라도 일단 제가 느끼는 것은 그거예요. 잠잘 때 꿈은 따로 꿔요. 아무리 친하게 지내고 웃으면서 재미있게 놀고 “자 이제 자러 가자.” 해서 잘 때는 각각 남이 돼요. 이걸 어려운 말로 실존이라고 합니다. 내 머리카락 자라는 것을 남이 대신해 줄 수 없고 내몸이 자라는 것을 남의 몸이 대신해 줄 수 없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걸 실존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분명한 겁니다. 아무리 친해도 잠 잘 때는 각각 다른 꿈을 꿉니다. 홀로일수밖에 없어요. 홀로 일수밖에 없는데 그 다음에 이 문제가 해결이 안돼요. 저 아들이 파출소나 교도소에 가게 되면 내 가슴이 왜 아프지요? 그 문제는 뭘로도, 실존으로도 설명이 안돼요. 이게 철학의 한계입니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 그런데 왜 다른 애는 갇혀도 되는데 왜 내 애는 안되는데? 왜 내 마음은 뛰는데? 이게 단순한 기억인가?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혈연관계는 어쩔 수가 없어요.



이게 아담에 속해서 그런데요. 하나님은 새로운 아담 되시는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두 번째 혈연관계를 맺어줍니다. 그 혈연관계에서 안되는데, 도저히 본받을 수 없는데,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 혈연관계, 아버지와 아들관계 속에 이미 갖추어서 장만한 것으로 우리에게 덮어씌웁니다. 지난시간의 결론과 마찬가지에요. 히브리서 12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성도치고 징계 없는 인간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징계가 없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놓은 자식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신데렐라가 아니기 때문에 징계를 안하는 겁니다. 그 옷가게에 걸려 있는 옷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징계를 안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자기성도를 징계하는 이유는 먼저

①그 징계의 모델을 이미 하나님께서 메시아, 그 중보자에게 줬고

②그 중보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아버지와의 관계를 그대로 우리에게 주다 보니까

이렇게 맏아들을 본받으라고 징계가 주어지는 겁니다.

구약에 아가서가 있어요. 아가 5장 1절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라고 되어 있어요. 솔로몬이 마음에 드는 어떤 여인을 지독스럽게 따라다니면서 자기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그 작업이 아가서입니다. 솔로몬에게 본처가 3백이고 첩이 7백인데 또 여자를 이렇게 밝히네요. 하나의 은사니까 할 수 없는 거고요. 아가 5장25절에 보면, “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솔로몬이 여자 하나에 완전히 미쳤어요. 마음을 다 빼앗겼어요.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좋은 용어는 다 가져다 붙이고 있어요.



여기서 “나의 사랑, 나의 누이여” 누이가 뭡니까? 혈연관계에요. 그런데 정작 이 여인은 그 남자의 대시가 부담스러워요. 아가서에 뭐가 있느냐 하면, 우리 힘으로 주님을 본받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내가 본받고 싶은 욕망의 대상이 세 가지로 따로 있어요. 우리는 주님을 본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할 수 없는 경계선을 대시해서 주님의 사랑이 그걸 타넘고 오는 거예요. 타넘고 와서 덮치는 겁니다. 내 사랑은 죽음만큼 강렬하다고 이야기하지요. 아가서 8장에 보면,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네가 지옥 간다 할지라도 내 사랑은 못이길거야. 내 사랑이 지옥가는 너를 건져낼 거야. 네 속에서 벌레가 나오든, 지옥이 되든 내 사랑 앞에서 그것은 문제거리도 아니야.” 이게 아가입니다.



그 아가의 내용을 담아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던 겁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심의 그 효과와 효능이 이제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신부로서 주님의 집요한 사랑의 대상으로서, 이미 딱 점찍어놓은 사랑의 대상으로서 주님이 쳐들어오는 거예요. 이 정열, 이 대시는 우리 쪽에서 멈출 수가 없어요. 기어이 자기여자 만들겠다고, 자기신부 만들겠다고 대시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말릴 수가 없습니다. 이게 중보자의 열정입니다. 그 중보자의 열정이 우리 삶을 통해서 터져나와요.



어떻게? 징계함으로서. 뭘 징계합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자신의 육적혈연관계가 깨어지는 징계를 받는 겁니다. 자식, 부모, 올케, 시누이, 형수, 이런 관계가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까 말했던 욕망의 세 가지를 다시 이야기할게요. 어떤 애가 장난감을 갖고 있는데 그 장난감이 갖고 싶다. 첫 번째죠. 두 번째는 그 장난감을 갖고 좋아하는 네가 부럽다는 거예요. 너 자체가 부럽다. 세 번째는 뭐냐? 나도 너처럼 장난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너한테 인정받고 싶은 욕망, 이거거든요.



그런데 이 모든 욕망이 결국 나 중심의 물질로 되어 있어요. 이것을 주님 쪽으로 가져가 봅시다. 주님이 욕망이 있겠지요? 주님이 우리보고 뭐라고 합니까? “나는 너를 갖고 싶어.” 이게 바로 아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가의 주인공은 다윗의 아들이고, 다윗의 아들에게는 다윗언약이 적용되고 그 다윗언약이 적용되기 위해서 마지막 오시는 다윗의 후손, 로마서 1장에 보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이 생소하십니까? 우리가 너무 이방인이 되어서 그래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만 신경 쓰니까 성경보라고 그렇게 해도 잔소리로밖에는 안들리잖아요.

구약으로 한 번 들어가 보세요. 구약에 들어가 보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이게 사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이게 사는게 아니라고요. 가을철에 감 따는 그것이 사람 사는 것이 아니에요. 말씀을 따야지 감만 따면 되겠습니까? 구약성경 아가서가 있고 그 이야기가 나와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봐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언약인데 그 언약 안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 아들이니까 나는 놓치지 않겠다는 거예요, 내 아들이니까. 내 아들을 왜 놓쳐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가오십니까?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원수가 우리 내부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되고 싶은 것, 육적인 모든 것은 마귀가 우리 배후에서 후원해주고 있었던 겁니다. “메시아 없이, 중보자의 십자가를 우회해서, 십자가가 안들리는 곳으로 돌아가서 직접 하나님을 만나게 해줄게.”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를 통해서, 세례를 받는 방식으로 구원해줄게.”

목사들끼리 칼부림을 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들은 동종업계의 업주들이거든요. 내 손님 왜 빼앗아 가느냐는 그 문제입니다. 다른것 아니에요. 목회 어렵지 않아요. 손님 빼앗기느냐, 마느냐, 그게 업주에요. 노래방, 밤무대, 똑같은 겁니다. 그들이 십자가 안 전했다고, 복음 안 전했다고 화내고 회칼 들고 온 것이 아니에요. “너만 목사냐?” 그것 때문에 회칼 들고 온 거예요. 지금 회칼 안들었다 뿐이지 지금 같이 돈 벌어먹고 살자는 이야기에요. 이 말 하니 속이 다 시원하네요. 다른것 아니에요. 같이 밥먹고 살자는 이야기입니다. 왜 밥 먹고 살아야 하는가? 자기 새끼 있거든요. 혈연관계잖아요.

사도바울은 주님 만나고 하는 이야기가, 아내 있는 자는 없는 것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상당히 매정해요. 이 말은 내가 예수 믿었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예수 믿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를 덮쳤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대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나는 예수 자랑한다는 그것으로 끝이에요. 나는 예수만 자랑한다는 거예요, 예수만.

그리고 이것이 맞춤이고 이것이 조건이라는 겁니다. 나는 나를 자랑한다, 가 아닙니다. 내가 주님 앞에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자랑하는것이 아니에요. 나는 천국을 탐내는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사는 예수가 탐나는것도 아니고, 천국에 들어가서 희희낙낙거리는 내가 탐나는 것도 아니에요. 사도바울에게는 이 본문이 자기징계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주님이 당했던 그 싸늘하고 냉담한 반응, 그걸 인간이 본받을 수 있느냐?” 남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환장한 인간들, 남들이 “너 싫어.” 할 때 우리는 얼마나 좌절하고 죽고 싶어하고 자살하고 싶어하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얼마나 거꾸러지면서, 통성기도하면서 대들고 행패를 부렸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기를 얼마나 지금도 싫어하고 있습니까? “다른 것은 다 하되 나는 예수님처럼 살기는 싫어.” 이것이 우리의 목표처럼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예수를 본받으라고 했으니까 이것이 우리 힘으로는 성사가 될 수가 없지요? 고린도전서 4장 11절에 보면,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회칼에 당한즉 참고, 이게 왜 안되느냐는 거예요.

회칼에 찔려도 참고, 이게 왜 안돼요?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쓰레기같이 되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쓰레기임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 있는, 예수님을 본받는자 외에는 없을 거예요. 우리는 안됩니다. 안되는 것을 되게 하셔요. 뭘 통해서? 징계를 통해서. 징계, 얻어맞는 가운데 순간적으로 내가 사라지고 그 다음에 “내가 이 찌꺼기 되는 이런 기쁨이 다 있나. 찌꺼기가 이렇게 좋을 수가!” 이런 놀라운 예상 못한 희열, 기쁨이 나오게 합니다. 그 희열과 기쁨, 남들은 환란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환란가운데 견딜만한 힘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뭐가 환란인데? “나 자체가 썩은 벌레가 나오는데 밤인데 이정도가 뭐가 환란이야? 자꾸 위로하지마. 오히려 내가 너희를 위로하고 싶어.” 이렇게 나오게 만든다는 말이지요.

모든 문제는 뭐냐? 내가 나를 지키려고 하는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어디까지? 천국까지 지키려고 하니까, 우리는 믿지도 않으면서, 의심하면서 믿고 있으니까 그것이 말이 돼요? 의심이라는 것은 믿음과 반대말인데 어떻게 반대말이 한군데 섞여 있습니까? 의심하면서 믿게 돼요. ‘설마 그럴까? 그래도 믿어놓자. 설마 그럴까? 주께서 설마 재림하실까? 설마 구름타고 올까? 그런 일은 없을거야. 그래도 믿어놓자.’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도박합니까? 파스칼의 <팡세>라는 책에 나와요. ‘하나님 안 믿다가 지옥가면 어떻게 할래? 일단 보험 들듯이 믿어놓으면 안심이 되잖아.’ 이게 팡세에서 사람 전도하는 방식이에요. 그게 말이 됩니까?

오늘 본문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제발 자기자신을 해치지 마세요. 내가 나를 지킨다는 그 행위가 자기자신을 해치는 짓을 계속 꾸준히 하고 있는 겁니다. 가을단풍구경 하지 마시고 자기 속의 지옥 구경하세요. 구더기 구경하세요. 썩으면 구더기 끓습니다. 미리 당겨서 구경하시고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내가 이래야 된다는 사실을 왜 바보같이 이제야 알았습니까?”라고 하면서 자기가 쓰레기 된것을, 이렇게 깨닫게 된 것을 감사하세요.

갈라디아서 4장에 두 혈육이 나와요. 하나는 지옥갈 혈육이 나오고 하나는 천국갈 혈육이 나오는데 아브라함의 자식이 둘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사라의 자식이고 그 사라의 자식은 하늘나라에 연결되어 있어서 그 어머니가 예루살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난 자는 사라계통이고 하갈 계통은 계집종에게서 나온 계통인데 이것은 한마디로 육의 혈연관계에 매여 있는 거예요. 육의 혈연관계에 매여 있는 것은 결국은 그 육 때문에, 예상 못한 육 때문에 그냥 지옥사람으로 태어나서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라는 약속이 있는데 그 약속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라는 “성령을 따라 난 자”라고 갈라디아서 4장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난 자. 성령이란 능력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내가 나 되지 못하게, 내가 지옥으로 가지 않도록 매일 징계하시면서 “내가 네 아버지야. 아버지가 너 때리니까 너는 고마운줄 알아라, 이놈아!” 하고 때려주시는, “네가 쓸데없이 너를 해치는 짓은 그만해!”라고 나무라면서 때려주시는, “네 욕망 따라 살면 너는 지옥가! 죽는다고!”라고 때려주시는, “예수님 자신이 이제부터는 너의 욕망이야. 이제부터는 네 자랑하지 말고 너에게서 건져주시는 이 예수만 자랑하는 이것이 너의 욕망이야.”라고 언급해주시는 징계받는 일들이 저와 여러분에게 늘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내 중심으로 보지 말고 말씀중심으로 다시 정리하게 해주옵소서. 약속을 따라난 자식들이 따로 있고, 그저 태어난 그대로 육신에 묻혀 사는 자식이 따로 있다고 했는데 성령을 따라난 자들이 신기합니다. 그 신기함을 늘 느끼며 체험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