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66강-천사의 권세 (고전11;7-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9. 07:24

2015-11-08 12:43:06 조회 : 51         
   천사의 권세 151108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천사의 권세(고린도전서 1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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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11-08 13:23 

천사의 권세

2015년 11월 8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1:7-12

(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므로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입니다.

(11:8) 그것은 남자가 여자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11:9) 또한 남자가 여자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11:10) 그러므로 천사들 때문에, 여자는 권위의 표를 그 머리 위에 지녀야 합니다.

(11:11)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여자가 남자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남자도 여자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

(11:12)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로부터 생겨난 것처럼 남자는 여자를 통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났습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생명’이란 천사의 권세, 혹은 하늘 권세의 질서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이 ‘천사의 권세’에 논하면서 교회 조직을 벗어나서 일반 가정에까지 확대시킨 것은 모든 복음의 의미가 전 세계 끝까지, 구석구석 천사의 권세가 미치지 않는 곳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교회 생활’이 신앙을 대변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겁니다. 디모데전서 2:11-12에 보면,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가정이라는 곳이 결코 사적인 공간으로 밀폐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류의 역사에서 가정은 누구도 침범해서는 아니되는 사적이 공간으로 여깁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육의 욕구의 만족으로서 결혼의 의미를 ‘자기들만의 행복’으로 고정시켜놓게 된 원인입니다. 이렇게 되면 ‘천사의 권세’가 빠져 있게 됩니다. 이것이 빠지면 생명도 영생도 빠져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란 천사의 권세에 의해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자기만의 공간’이란 곧 스스로 현실을 볼 때에 한계를 일방적으로 만들어면서 산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나타내는 의미, 곧 삶의 보람이란 실은 자기네들이 스스로 처놓은 그 경계, 그 한계 내부에서 통하는 의미일 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밖에 내놓은 것 중요한 인간이 도저히 감할 못한 사태를 인간 세계 내부로 집어넣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심판이요 인간의 죽음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의 ‘의미 만들기’는 순전히 자기 욕심에 의한 일방적 의미요 보람으로 들통나 버리게 됩니다.

“나는 곧 나만을 위해 줄곧 살거야!”라는 단호한 결의를 나타내신 식으로 평소에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런 단호한 결의마저 ‘천사의 권세’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한 양상으로 보는 겁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차이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창세기 3장과 연결시켜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남자와 여자가 있는 것에는 필히 창세기 3장에 재현되는 현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창세기 3장이란 뱀이라는 극단적으로 악한 천사와,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통해 저주로 대처하시는 방식이 나옵니다. 이렇게 되면 남자와 여자라는 것은 사적인 가정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적 요건로서의 대립되는 성별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천사의 권세’가 작렬하는 현장으로서 가정이 다루어지게 되면 이는 필시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는 바가 되기에, 하나님의 약속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이는 모두 ‘정신병자’, 곧 항상 ‘가짜’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짜 세계를 먼저 허락하므로서 그 가운데서 대립적으로 진짜를 뽑아내시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5000명 군중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무한정 제공하십니다. 그들이 배가 불러 더 이상 먹지 못할 지경이 되었을 때, 기적은 멈추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떡얻어 먹은 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가짜 신자’라는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진해서 예수님의 추종자로 자부하고서는 예수님을 붙잡아 자기네들의 임금삼으려는 열의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기적이라는 것이 평소에 인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짜로 살아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적으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진짜는 인간들 가운데 없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어디에 나타납니까? 바로 떡을 먹은 그들이 자진해서 예수님을 배척하는 ‘악한 천사의 권세’를 내부적으로 발휘하는 현장에서 ‘고난받는 권세자’로서 진짜 되시는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단 뒤, 인간의 내부는 단순히 선악과 과일즙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혹자 악마에 의해서 인간은 통째로 장악당했습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에서 최종적인 선은 한결같습니다. 곧 “나의 결정, 나의 선택‘이 곧 최고의 선이요 유일한 선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는 수고까지만 하시고, 믿고 아니믿고는 본인의 결정에 의해서 구원이 된다는 교리가 가장 극한의 악이 되는 겁니다.

즉 최종적인 결정에 ‘나 외에 다른 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보통 행위로 드러나는 악마의 작용 모습입니다. 우상이라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자기를 위하여’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출 20:4) 이는 ‘우리를 위함’이 곧 가짜가 가짜를 위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들의 보편적 태도를 건드리는 것은 곧 악마의 성질을 건드리는 것이 됩니다. 인간들이 사적으로 죄지었다고 해서 비로소 죄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즉 처음부터 자기를 위한 의미만을 생산하면서 사는 보람을 갖는 것이 곧 인간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런 죄를 지었으니 회개합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나는 이런 죄를 지었으니 처음부터 나는 죄인됨을 고백합니다”라고 나와야 하는 겁니다.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남자든, 어느 여자든, 자신의 남자됨과 여자됨은 하자가 없다고 여깁니다. 신체상, 생리적으로 아무리 남성이나 여성다웁다 할지라도 ‘천사의 권세’, 곧 창세기 3장의 사태를 반복적으로 보여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정신병자로서의 남자요 여자입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를 모든 의미의 진원지, 혹은 출발점으로 삼는 식입니다.

여자는 ‘천사의 권세’에게만 복종해야 하기에 이 ‘천사의 권세’를 가진 남편에게만 복종해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본

인이 ‘천사의 권세’ 가짐에 실패하고 악마의 권세로 휘돌면서 살아가는 가짜 남자임을 인정할 때,

그 남자는 전체 보편적 ‘예수님의 신부’에 속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사의 권세’로 인하여 여성이나 남성이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분출하게 됩니다.

사적인 의미는 부정당하고 예수님께서 악한 천사인 악마와의 싸움의 의미만 드러나게 됩니다.

“악마를 이겨라!”가 아니라 “이미 악마를 이기신 분의 혜택을 입고 산다”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곳이 내가 사는 곳이 아니라 주님의 일하시는 일터임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1-09 06:02 

64강-고전 11장 7-12절(천사의 권세)15110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1장 7-12절입니다. 신약성경 276페이지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지금……, 이 본문 내용이 횡설수설 같기도 하고, 왜 성경에 이런 내용이 있어야 되는지,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될지도 모르는 말씀이 사도바울의 복음 안에 이렇게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있는데 무시하고 넘어가게 되면 생명이라는 것을 엉뚱한 데서 환상으로 구성할 수가 있어요. 남자, 여자가 나오잖아요. 보통 성경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교회에 대해서, 교회 잘 돼라, 목회 성공해라, 교회 키우라, 마치 그런 것을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것처럼 하는데 하나님의 이러한 뜻이 교회라는 좁은 범위가 아니라 일반적인 남자, 여자, 가정,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거예요.



교회에서 신자 티내고 사람 대우받는다고 해서 일반가정에서는 잊어도 된다,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교회 이야기는 없어요. 가정이라는 것이 그냥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의 뜻은 교회를 넘어서서 범위가 더 확대되는 겁니다. ‘그러면 남자, 여자 모여서 행복하게 살면 되잖아.’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지요. 남자와 여자가 어떤 서열이 있는데 10절에 그 서열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천사의 권세가 관여되어 있는 가정이 하나님께서 원래가정에게 허락한 요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천사의 권세니까 어떤 질서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권세, 질서가 왜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가정마다 삽입되어 있느냐하면, 영생이라는 것,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국이라는 것, 영생의 나라 그것이 천사의 권세, 다른 말로 하면 질서를 경유하면서 생명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모인다고 해서 생명주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여자입니까? 혹은 여러분이 남자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식으로라도 생명과, 이 천사의 권세, 하늘의 질서와 연관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 말입니다.



연관되어 있는 존재기 때문에 너희가 너 자신을 다루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천사의 권세가 내가 너희들을 다루는 식으로 다루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교회를 안다녀서 이 천사의 권세 이야기를 못 들었다면, 그래서 그것을 모른다고 한다면 사실은 그 사람은 텅텅 비어 있는 사람입니다. 텅텅 비어있으니까 껍데기죠. 형식만 있는 사람이에요. 왜 사는지도 모르는 겁니다. 그 사람은 결국 영생이 없는 거예요. 영생이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천사의 권세의 질서와 순서에 맞추어서 우리는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남자든 여자든 각각 성차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천사의 권세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은 텅텅 비어 있는 사람이 아니고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영생이 개입되고 있다, 영생이 차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지 않고 천사의 권세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완전히 무시해버리면서 나름대로의 어떤 의미체제를 갖춰요. 그것을 가지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의미는 그 안에 한계가 있기에 만들어졌다. 어떤 의미를 만들 때는 어느 정도 경계를 정해놓고 거기서 의미를 찾는 거예요.



만약에 그 경계가 없어버리면 그야말로 시조에 나오듯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가 되어버립니다. ‘그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이렇게 허무가 되어버려요. 보통 사춘기 애들이 집에서 그런 식으로 반항을 하잖아요. “공부 열심히 해.” “그래서 뭐하는데?” “나중에 좋은 대학 가지.” “좋은 대학에 가서 뭐하는데?” “취직하지?” “취직해서 뭐 하는데?” “취직하면 장가가지.” “장가가서 뭐하는데?” “애 낳지.” “애는 낳아서 뭐하는데?” 결국 남는 것은 한 대 맞아야지요. 얻어맞는 수밖에 없어요.



애는 정말 궁금한 거예요.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어떤 한계 내에서만 의미가 주어지기에 이 일을 해야 됩니까?”라고 진정으로 부모한테 묻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는 말하기를 “네가 공부 잘해야 내가 기쁘지.” 이렇게 한다는 말이지요. “엄마 죽고 난 뒤에는 공부 안 해도 되겠네?” 엄마가 한계니까 애는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성경에서 천사의 권세, 여기서 천사라는 것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없이 천사의 권세가 빠져버리면 인간들은 자기 좋은 쪽으로, 자기 잘난 쪽으로, 자기를 절대 신으로, 절대존재로 간주하는 그 한계 내에서 모든 의미를 남에게 강요하는 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자성어로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정신병자에요. 내가 밥을 먹고 일을 하는 의미를 자기가 한계를 만들어놓고 억지로 거기에 집어넣는 겁니다. 가짜지요. 인간들이 이 의미를 정할 때 정한 그 의미에 넣지를 못하고 자기한계바깥에 놔둔 것이 있어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심판문제와 죽음문제에 대해서는 인간들은 ‘늙으면 죽겠지.’ 하고 자기바깥에 내놔 버렸어요. 그 바깥에 나놓은 심판과 그 죽음을 인간이 사는 집에다 강제로 집어넣은 분이 계셔요.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딜 빼? 누구 맘대로 빼?”



애들이 부르는 가스펠송이 있잖아요. 돈으로도 못가요, 맘 착해도 못가요, 예뻐도 안 되고 다 안 되고 오직 믿음으로 간다는 노래가 있잖아요. 애들이 그런 노래 부른다는 말이지요. 왜 우리는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도 예쁜 것, 잘 사는 것, 출세하는 것, 성공하는 것, 왜 그렇게 거기에 모든 것을 올인하고 매진하는 겁니까? 자기 잘되는 것에. 사자성어로 정신병자, 가짜기 때문에 그래요. 가짜에요. 정신이 텅텅 비어 있어요. 의미 없습니다. 비어 있는 껍데기만 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다.



지난 시간에 했듯이, 결혼했다? 결혼의 의미가 뭐냐? 우리 둘이 만나서 행복한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천사의 권세가 빠져버리면 그것은 결혼이 아니고 정신병자 둘이 만난 거예요. 천사의 권세가 빠져버리면 남자 여자가 만나서 행복하기 위해서 가정이루는 그것은 네 생각이고 주님입장에서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행복이라는 것은 어림도 없는 겁니다. ‘우리가락교회’ 공부는 김중우 집사님 사무실에서 하거든요. 그분 취미 중에 하나가 교회 다니는 사람 놀려먹기입니다. 물론 그분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이겠지요.



안양에 공장을 새로 내서 새로 직원이 왔는데 근처에 있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왔어요. ‘우주교회’인가? 그런 교회 이름 들어보셨습니까? 이름은 확실하지 않은데 하여간 이름도 거창해요. 그 교회 다니는 사람이 직원으로 새로 왔는데 사장님의 취미가 발동을 했어요. “아저씨는 집사지요?” 하니까 “아닙니다.” 이유를 말하는데 “우리 교회는 집사 되려면 세 명을 전도해 됩니다.” 그 이야기 듣고는 집사님의 장난기가 발동을 했어요. 그래서 “다단계네.” 했어요. 그 사람이 화가 많이 났는데 사장이 그런 말을 하고 있으니 대들지도 못하고. 김중우 집사님이 보기에 너무 안타까워서 알려줬어요. “아저씨는 우상이 뭔지나 압니까?” 하니까 그분이 “우상이라 하는 것은 출애굽기 십계명에 있는 대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우상이라 합니다.”



그래서 집사님이 듣고 있다가 “제가 하나 가르쳐 드릴게요. 아저씨가 말한 출애굽기 그 본문에 보면 앞에 뭐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교회 다니는 것도 우상입니다.” 집사님이 안타까운 마음에 위로한다고 한 것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화가 더 나게 만들었어요. 자기 교회를 위하여, 그게 우상이에요. 자기자식을 위하여 교회 다니는 것, 그게 우상입니다. 수능 며칠 안 남았어요. 열심히 새벽기도 하는 그것이 우상입니다. 평생을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우상덩어리에요.



그 우상덩어리가 모인 그곳은 우상들이 집합이 돼요. 영생이 없습니다. 생명이란 게 없어요. 그런데 그들은 없어도 좋다는 거예요. 교회가 재미있다는 겁니다. 교회란 자기행복에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의미란 결국 뭐냐 하면, 내가 거기 있음이라는 그 경계 안에서 의미를 새롭게 생산해 내는 겁니다. 주님께서 거기다가 심판과 죽음을 집어넣은 거예요. 집어넣었을 때 의미라는 것은 너 행복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너 자체를 우상화시키는 그 경계, 네가 생각한 네 현실자체가 착각이고 오판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 네가 가짜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돼요. 가짜부터 먼저 나열하고 진짜를 뒤에 배치합니다. 진짜가 누구냐? 예수님이거든요. 그러면 가짜밖에 없는 곳에서 어떻게 진짜를 뽑아내는가를 이제는 복음,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삽입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런 이야기가 돼요. 그들은 받지도 못한 것, 자기 속에 없는 것이 받은 것이 없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나는 그것을 잃어버렸네요.”라는 고백까지 나와야 돼요. 받지도 않은 것을 잃어버린 놀라운 현상, 받아본 적도 없는데 잃어버렸어요. 그 말은 ‘나는 가짜’라는 뜻이에요. 처음부터 나는 가짜였던 겁니다.



놀라운 점은 그 가짜를 가지고 진짜로 바꾸는 거예요. 진짜로 바꾸는데 어떻게 바꾸는가? 옥상위에 주차장이 있는 것처럼 진짜 천사의 권세 안에, 권세의 질서 안에 진짜 우리 자신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케 하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 그게 가짜로서의 한평생입니다. “나는 진짜가 아닙니다.” 나는 가짜라고 이야기하는 그 사람이 진짜 성도에요. 그럴 때 천사의 권세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이 본문을 보시면 이해가 돼요.



이번 주 주보에 <천사의 권세>라는 제목으로 설교요약이 있습니다. 내용을 얼른 읽어볼게요.

남녀됨은 인간을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실제로 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 조성해내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구분된 성차이입니다.

권세로 인하여 서열이 발생되는데

이는 권세를 행사하는 쪽과 받은 쪽에 의해서 현실이 구성되어 있다는 이해가 바르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현실이 구성된다는 말은 천사의 권세가 빠져버리면 이것은 착각이지 현실을 제대로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이 교회도 모르고, 영생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천사의 권세도 모르면서 그저 “우리 결혼합시다.”라고 되어버리는 것은 뭐냐? 자기 좋은 쪽으로 가짜현실을 자꾸 만들어내는 거예요. 가짜현실 속에서 그것이 행복이라고 푹 잠겨서 사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를 끄집어내고. 모든 드라마가 그렇게 세상이 다 그렇잖아요.



비오는 날 국정교과서 문제로 데모한다는 거예요. 그거 찬성하는 쪽도 마찬가지로 데모를 해요. 국정교과서 문제가 과연 비 맞으면서 데모할 일인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래야 나라가 잘되지.” 나라 잘 되서 뭐할 건데요? 보세요. 나라가 잘 된다는 그것이 한계잖아요. 나라 잘 되서 뭐할 건데요? “그러면 국민들이 행복하잖아요.” 네가 행복해서 뭐할 건데? 그 말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심판과 영생, 천국 몽땅 다 빠져있는 거예요.



집에 가서 천사의 권세 아래서 남편은 남편으로 아내는 아내로 살면 그게 영생과 함께 있는 겁니다. 교회 와서 뭐하는데요? 교회에 사람 숫자 모으면 뭐하는데요?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복음 안 전하는 그 교회 다녀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평소에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인데 그분은 좀 용감한 분 같아요. 남들은 쉬쉬 하면서 그런 질문은 천박하다고 안 할 것인데 있는 대로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답변했습니다. “망한 것을 구경하고 싶으면 다니고 아니면 미리 빠져 나와도 되고. 거기 다닌다고 지옥 가는 것은 아니니까. ‘아, 이래서 망하는구나.’ 구경하는 것도 하나의 취미니까 다니고 싶으면 다니세요. 단 돈은 내지 말고.” 왜냐하면 결국 교회는 돈 문제기 때문에. 돈 내는 사람 몇 명이 모이는가가 중요하지 돈이나 써대는 청년들 몇 명 왔는가는 별로 안중요해요.



국정교과서 그 문제처럼 한계, 자기 뜻과 동조하는 그 범위를 넓히면 그것이 천사의 권세냐, 그 말입니다. 아니거든요. 이게 가짜라서 그런 거예요. 그럼 진짜는 뭐냐? 진짜는 천사의 권세에 의해서 이 땅에 입장했습니다. 천사의 권세 이전에 성령께서 요단강에서 동행했지요. 그렇게 올 때 그 오신 천사의 권세로서 지금 사는 우리, 남자와 여자에게 공히 적용시키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주보에 나와 있어요. 【하나님과 천사의 관계가 바로 하나님의 권세의 작용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만 제한해버리면 현재 자신을 성립시키는 권세를 억지로 떼 내는 것이 되어서 정신적으로 혼돈에 빠지게 됩니다.】 가짜라는 뜻이지요.



【즉 권세의 지배 아래 있어야 될 존재가 인간인데 권세의 원천을 상실해버리니】 상실해 버리는 정도가 아니고 저항합니다. 반대합니다. 그 속에, 인간은 비어있는 곳에 다른 요소가 들어왔어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선악과만 들어온 게 아니에요.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주도했던 악마가 선악과정신과 함께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 악마가 시키는 게 뭐냐 하면, “네가 선하다.” 혹은 “네가 악하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선하다, 악하다, 그걸 지시하는 것이 뭐냐 하면, 로마서 2장 15절에 나오는 양심이라는 겁니다. 양심의 특징이 뭐냐? 스스로 고소하고 스스로 변명하는 게 양심이에요.



제가 가락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양심이 가장 예민하게 작용하는 그 예가 상견례 할 때입니다. ‘내가 머리는 제대로 하고 나왔나? 머리가 안 좋게 보이면 사돈 될 사람이 뭐라고 구시렁거릴까? 아니야, 난 최선을 다했어.’ 스스로 고소하고 스스로 변명하고. 변명하고 고소하고, 고소해놓고 또 변명하고. 이게 율법적 기능이라는 겁니다. 선악적 기능이에요. 마귀가 자꾸 그렇게 만들어요. 그 와중에 ‘그래, 난 최선을 다 했어요. 잘 한 거야.’ 이게 일방적인 자기의미고. 혼자 시체놀이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천사의 권세거든요. 【즉 권세의 지배 아래 있어야 될 존재가 인간인데 권세의 원천을 상실해버리니 그 빈자리를 천사인 악마가 점령하게 마련입니다.】 이게 천사의 권세거든요. 천사의 권세라는 것은 “인간은 빠져라.” 천사와 천사끼리 해결할 그 힘의 질서가 이미 인간을 점령했다는 그런 뜻이에요. 【한시도 하늘의 권세가 인간을 떠난 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주위를 살펴도 자신에게 권세를 행사하는 실체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똑같은 인간들뿐입니다.】 똑같은 인간들뿐이니까 “남들 보기에 나 어때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 그게 인생 전부가 돼요. 남들 보기에 어떠냐 하는 그것이. ‘자식보기에 실없는 아버지가 안 되도록 살아온 것을 나는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아버지는 자식을 향하여 그렇게 생각하고 자식은 ‘아버지, 아버지의 명예를 거슬리지 않도록 살았습니다.’ 이것은 둘이 합작해서 만든 내 가정, 내 가문이라는 그 영역 밖으로 못 벗어나요.



인간이 행하는 최고의 선은 뭐냐? 내가 선택했음, 내가 결정했음, 그 자체가 선이에요. 내가 결정했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회의하면서 “이걸로 할까, 저걸로 할까?” 할 때 “저걸로 합시다.” 하면, 어떤 사람은 반대할 수도 없고 어떤 사람은 동의할 수도 있을 거예요. 동의하는 사람이 있으면 순간적으로 기분 좋아요. 하지만 동의하는 사람끼리 모이면 그 다음에는, “내가 처음으로 발의했어. 내가 처음으로 했으니까 너는 내 앞에 꿇어.” 그렇게 돼요.



이것은 뜻을 같이 했다고 해서 기분 좋은 것이 아니고 ‘내가 했음’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인정을 해 줄때 우리는 최고의 선이에요. 선은 이유가 없어요. 내가 했다는 그 자체가 선이에요. 졸부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내 돈 내가 쓴다는데 네가 뭔데?” 그거라니까요. 마귀가 그렇게 한 거예요. 아무리 좋은 일도 남이 하면 기분 나빠요. 내가 시작해야 기분이 좋아요. 계속해서 주보에 보면, 【하나님께서 악마와 더불어 권세 싸움을 계속 하고 오셨습니다. 이 와중에서 인간들은 이 돌아가는 사태를 해명하지 못해 정신적으로 붕괴에 직면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모든 권세 자를 배척하는 입장에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의 권세 배척은 악마를 닮았습니다. 신에게 대적하는 그 성질머리가 그대로 인간에게 전수됩니다. 진리도 싫다, 복음도 싫다, 서열도 싫다, 주님도 싫다. 그렇다면 정작 인간이 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진짜 인간이 원하는 바가 뭐예요? 몰라요. 뭘 원하는지도 몰라요. 이런 이야기가 회사나 교회 문제가 아니고 가정문제로까지 확대시킨 것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주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이 본문 내용을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천사의 권세를 반영하지 않는 남편은 남편이 아닙니다. 폭탄선언이네요. 천사의 권세를 품고 있지 않은 남편은 남편이 아니고 그것은 나를 보쌈 한 도둑놈이지요. 마찬가지로 천사의 권세에 복종치 않는 아내는 아내가 아닙니다. 그냥 여편네지 아내가 아니에요.



여자는 누구한테 복종할 맘이 애초부터 전혀 없습니다. 오랜 만에 아멘이 나왔어요. 여자는 복종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왜냐? 남편 쪽에 천사의 권세 같은 권세가 눈에 보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대체 뭘 보고 복종해야 됩니까? 등산 잘한다고? 노래 잘 부른다고? 뭘 보고요? 사진 잘 찍는다고요?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뭘 보고 복종해야 돼요? 김치 담글 때 잘 도와준다고? 스팀청소기로 청소 잘 도와준다고, 그거 보고 복종할까요? 그것은 이용해 먹는 것이고, 자기가 하는 일을 남편이 도와줘서 고맙다는 뜻이고 애초부터 여자에게는 복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 애초부터 여자는 가짜기 때문에 그래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합시다. 모두가 다 가짜에요. 가짜라서 모든 살아가는 의미는 자기에게로 회귀됩니다. 내가 있음, 그걸로 의미는 끝이에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최고의 선은 뭐냐? 착한 것? 아니에요. 테레사수녀?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것? 아니에요. “어떤 짓을 해도 내가 한 그것에 대해서는 토 달지 말라.” 이게 내 결정이에요. 라면 먹고 아시안게임에서 육상 3관왕 한 선수가 누굽니까? 사실은 임춘애잖아요. 그런데 현정화라고 하니 “현정화 아닌데요?” 하니까 “토, 토, 토, 토 달지 마라.” 하잖아요. 현정화는 탁구선수거든요. 그런데 “내가 현정화라면 현정화야!” 이게 <넘버 3>라는 영화에 나오는 대사에요. “토 달지 말라.” 회사에서 “사장님,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요?” 사장이 듣고 있다가 “내 회사 내 맘대로 하는데 네가 뭔데? 네가 왜 그래?”



그걸 가지고 아주 고상한 말로 두 글자로 ‘보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을 정리해야 돼요. 인간은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왜냐? 사적인 죄는 죄에 포함이 안 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지은 죄는 어디로 인수가 되느냐 하면, 보편적 죄로 인수가 돼요. 죄를 지었기에 죄인 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죄를 지은 것에서 회개해서 “이제는 바르게 살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회개를 내가 결정했기 때문에 이것은 극단적인, 가장 극악무도한 죄가 되어버립니다. 극악무도한 죄가 김일성처럼 사람 죽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도 내가 결정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껏 십자가 지는 것밖에는 안했고 십자가 믿어주는 것은 내가 결정했습니다.” 하는 이것이 가장 악마다운 모습이에요.



침례교에서 그렇게 주장하지요. 침례교 교리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감리교는 어중이떠중이들에요. 반은 하나님이 하고 반은 자기가 한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장로교는, 전적타락, 전적부패,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해놓고 그걸 상품화해서 돈벌이하고 있어요.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그저 한계라고는 자기 교회밖에 몰라요. “당신 집에서 신앙생활 해도 됩니다.” 이런 소리를 못해요. 디모데전서 2장 11절, 1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런 말씀 참 여성들 앞에서 하기 곤란합니다만 성경에 있으니까 순종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라고 했을 때 많은 분들이 심쿵하지요. “세상에 이런? 그러면 여자 자체가 죄입니까?” 이런 식으로 반발하게 되는데 제가 그럴 줄 알고 아까 미리 기쁜 소식을 전했잖아요.



천사의 권세를 품고 있지 않은 남자는 남자가 아니니까 순종하지 말라고. “그러면 천사의 권세를 품고 있는 남자에게 순종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 남자는 없습니다. 왜? 전부다 정신병자기 때문에 없어요. 모든 남자는 자기혼자 노는 재미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아요. 호르몬 기능이 다 떨어지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분간도 안돼요. 전부 다 똑같아요. 전부 다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르는 이 가짜에서 주께서는 생명을 뽑아내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천사의 권세로서.



천사의 권세라면 그것이 능력인데 그 실효성이 있는 능력이 투입되는 겁니다. 그 실효성 있는 능력이 뭐냐? 창세기 3장의 반복이에요. 창세기 3장의 반복, 능력의 반복입니다. 주보 마지막 대목을 봅시다. 【인간들은 엄연히 권세가 작용하는 늪 속에서 빠져 살면서 권세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을 보세요. 그들은 철저하게 주님께 복종합니다. 그리고 그 복종의 의미는 곧 예수님의 주되심을 겨냥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런 주의 권세 안으로 들여놓으려 하십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천사가 철저하게 복종하는 거예요. 철저하게 복종하는 천사가 있고, 그 다음에 철저한 것은 같은데 철저하게 꼭 반대만 하는 그런 천사가 있어요. 그 두 천사의 만남이 이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남자와 여자가 된 것은 들러리지요. 주연이 따로 있는 무대에 우리는 엑스트라로 호명당하고 호출당한 겁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자기 잘난 체, 여자는 여자대로 자기 잘난 체를 하거든요. 철저하게 주님께 반대하는 마귀가 와서 인간을 이렇게 버려놓았어요. 비어 있는 인간 속을 마귀가 다 장악을 했습니다.



마귀가 장악했다면 인간은 이제부터 어쩔 수가 없어요. 인간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거든요. 어쩔 수 없는 것을 주께서는 다른 분을 보내셔서, 천사의 권세를 보내셔서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바꾸는 겁니다. 부산의 어떤 목사님께서 전화를 했어요. “목사님, 요새 설교가 많이 달라졌어요.” 내가 놀랐어요. “저는 달라진 게 없는데요.” “아니요.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 전화를 받고 한 사흘 동안 ‘대체 어느 대목에서 달라졌다고 했을까?’ 가만 생각해 보니 ‘아하’ 알았어요. “평소에 성화를 작살내는 설교를 하면서 ‘흔히들 교회에서 말하는 성화같은 것은 없습니다. 성화같은 것은 시도하지 마세요. 점진적인 성화같은 것은 없고 단번에 거룩입니다.’ 하면서 성화 론을 작살냈는데 목사님의 요즘 설교를 들어보면 좀 바뀌어서 그게 들어간 것 같습니다.”라는 투로 그 분이 이야기한 거예요.



제가 설교에서 “천국은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 자체가 바뀌어야 간다.”는 그 대목이 자기 나름대로 강한 인상으로 박혔던 모양이에요. 그것은 오해십니다. 성화되어야 구원된다는 그 자체가 구원받지 못한 인간이니까 그것이 바뀌어야 된다는 이야기가 제 이야기에요. 무슨 이야기냐?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떻게 살까요?” 죄 지으면 되는 거예요. 예수 믿고 난 뒤의 삶은 죄 지으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사람 자체가 바뀌어야 된다고 하니까 뭘 로 알아들었느냐 하면, 착하게 바뀌는 것으로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 착하게 바뀌어야 된다는 의미는 어디서 형성되었느냐 하면, 예수 믿기 전에 내가 교회 발걸음을 옮기면서 스스로 자신을 그려보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고 술 끊고 담배 끊고…….’ 그런 자신의 모습, 물론 아직도 술 담배 못 끊은 분도 있지만, 그런 자기 모습을 염두에 두는 그 기대성, 희망, 그것은 죄입니다. 그걸 포기해야 돼요.



이제 알아야 될 것은, 훌륭한 내가 되겠다는, 그 훌륭한 나의 존재의미, 대체 어떤 잘못된 가짜 근거에 의해서 그런 쓸데없는 희망을 품었는가? 그것을 되돌아보는 겁니다. 구원받고 난 뒤에. 바뀌어야 구원받는 것은 맞는데요. 그 바뀌는 과정은 우리가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바뀌게 해주십니다. 어떻게? 천사의 권세로 작용하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천사의 권세라 하는 것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서 나온 천사의 권세기 때문에 차이점이 뭐냐? 하나님의 권세라는 것은 싸워야 되지만 예수님에게서 나온 천사의 권세는 이미 싸움이 끝났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싸움이 끝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싸움이 끝나면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싸움이 끝나면 거기에 주님에 의해서 얻어진 전리품들의 남자와 전리품들의 여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 안에는 주님의 의미가 그대로 내장되어 있지요. 내가 스스로 잘 되고 싶은 의미는 죄로 규명이 난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예수 믿고 본격적으로 한 번 죄인 되어보세.’ 이게 사는 재미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게 사는 재미여야 하는 겁니다. 그동안 내가 잘난 체 하면서 ‘내가 이렇게 살면 되겠는가?’ 했는데 이제는 예수 믿고 나서 본격적으로 잘난 체를 하세요. 오늘 또 복음 나옵니다. 본격적으로 잘난 체를 하세요.



이걸 밀어올리기 위해서 주께서 천사의 권세아래 있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죽으신 겁니다. 그 죽음, 우리 한계 밖에 있는 낯선 경험을 우리 속의 경험으로 준 거에요. 미국의 어떤 분이 제가 설교를 많이 하니까 설교 하실 때 목 아프지 말고 위도 좋아지라고 건강식품인 로열젤리를 보내주셨어요. 그런데 이걸 마귀 적 발상으로 생각한다면, “설교 실컷 해라.” 막 하인 부리듯이 설교하는 기계로 만들겠다는……, 제가 마귀 적발상이라고 분명히 단서를 달았습니다. 물론 그런 뜻은 아닐 거지요.



그 로열젤리 설명서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윗부분을 까내고 밑에서 엄지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면 그대로 올라온다.”는 겁니다. 그걸 볼 때 이게 바로 복음인 거예요. “나는 잘났다. 나는 훌륭하다. 나는 앞으로 훌륭하게 될 거야. 나는 앞으로 훌륭한 신자가 될 거야.”라고 했는데 그게 의인 줄 알았지 그게 죄인 줄은 몰랐거든요. 주님께서 엄지손가락을 가지고 밑 둥을 찔러서 밀어 올리는 거예요. 주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되는지의 그 죄 자체가 우리에게서 올라오는 겁니다. 그게 성도의 남은여생이에요.



자기의미, 자기가치옹호하기, 이것 위해서 그게 죄인 줄 모르고 그게 마치 성도의 삶 인양, 성도의 열매인양 착각했잖아요.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그런데 그게 바로 그대로 죄 덩어리였습니다. 남자가 여자의 영광이 된다고 하는 이 이야기는 여러분의 남편한테는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부담됩니다. “너 나 알잖아. 어지러운 것 좀 이야기하지 마. 나 그냥 편안하게 살래.” 하잖아요. 어떤 남자도 영광 품고 있는 남편이 없고 어떤 여자도 천사의 권세를 품었다고 여기고 남편을 존중해주고 순종하는 여자는 없습니다. 둘 다 안돼요. 둘 다 안 되는데 안 되는 것을 주께서는 되게 하십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셔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마태복음 1장을 시간관계상 다 설명은 못하는데 거기에 여성이 등장해요.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거기에 족보가 죽 나오지요. 재미 하나도 없어 하지요. 거기에 ‘에게서’라는 단어가 네 번 나옵니다. 3절에, “유다는 다말에게서.” 5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가 나오고요, 다 여자들입니다. 6절에 보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그리고 16절에 마지막으로 “마리아에게서”가 나와요. 이것은 뭐냐? 여성의 역할인데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어도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형식으로 왔다는 그 정보를 여성 쪽에 담아버린 겁니다.



이스라엘 땅은 텅텅 비어 있고 제사장 외에는 원래 왕이 없어요. 그렇게 비어 있는데 사람들이 그 비어있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했다고 오해를 해서 하나님께 왕을 달라고 하니 하나님께서 그 비어있는 장소에 왕을 허락했는데 그 왕이 어떤 왕이냐? 사람에게 처형당하는 왕을 줘요. 그러한 영광의 질서가 여성에게 있는 거예요. “무시해!” 무시당하는 그들이 오히려 남자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뱀의 맞은 편 자리에는 씩씩한 남자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전쟁할 때 씩씩한 남자가 뱀의 앞자리가 아니고 뱀과 전쟁하기 위해서 딱 붙어 있는 자리가 남성이 아니고 여성입니다. 여자의 자손이 뱀의 자손을 이기게 되어 있어요. 여자가, 여자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가!



그러면 남자들은 뭐하느냐?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남자들 5천명이 떡을 먹었거든요. 5천명이 떡을 먹었는데 5천명이 떡을 먹고 난 뒤에 예수님을 임금 삼겠다고 따라 왔다가 결국 예수님을 버립니다. 떡을 줬는데 떡을 먹은 자가 떡을 준 자를 배척하게 되어 있어요. 그만큼 우리는 가짜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무엇에 유혹받고 있으며, 무엇에 길들여져 있으며, 무엇을 부러워하고 있으며, 이 세상 평생 살면서 뭘 갖기를 소원했던가를 주께서는 찾아와서 의도적으로 들통 내고, 들통 난 그들에게 처형당하는 식으로 이 땅에 진정한 왕으로 왔어요.



이 말은 예수님 빼놓고 다 여자라는 뜻입니다. 남자 여자 다 여자에요. 여자가 받는 유혹을 같이 받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고 주의 천사의 권세가 임한 사람은 이 유혹을 내가 벗어날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제가 바로 가짜입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진짜 정신병자 맞습니다.” 이 점을 고백할 때 주께서 “누가 이렇게 너의 죄, 개인적 죄가 아니고 보편적 죄의 차원으로 너를 밑에서 올려 세웠느냐? 밀어냈느냐?”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께서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제사도 아니고 예배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너 같은 상한 심령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자손을 왕으로 둔 백성들의 공통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사가 품은 주님의 권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위험한 세상에 저희들이 살고 있음을 저희들이 깨닫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한테 가장 위험한 요소인 것도 같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찾아오셔서 가짜인줄도 모르는 우리 자신의 진짜 본질을 드러내시면서 이런 죄인마저 문제를 다 해결하시고 영생을 주신 주님만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