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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54강-깨진 돌판 (신9;13-17) 1510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4. 07:28

2015-10-25 14:52:13 조회 : 120         
   깨진 돌판 151025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깨진 돌판(신명기 9:13-17)

음성 동영상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G--hUSc7KVg, Hit:12
 이근호 15-10-25 15:30 
깨어진 돌판

2015년 10월 25일                            본문 말씀: 신명기 9:13-17

(9:13)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9:14)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고 너로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시기로

(9:1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 오는데 산에는 불이 붙었고 언약의 두 돌판은 내 손에 있었느니라

(9:16) 내가 본즉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서 급속히 여호와의 명하신 도를 떠났기로

(9:17) 내가 그 두 돌판을 내 두 손에서 들어 던져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렸었노라

두 개의 상반된 상황이 만나고 있습니다. 하늘 쪽(산 쪽)에서는 돌판의 취지를 아는 쪽이요, 아랫 쪽은 돌판의 존재조차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신을 찬양하고 섬기는 종교의 축제판입니다. 아랫 쪽의 입장에 헤아려본다면 이러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기에 극히 경건스러워보이고 은혜스럽게 보인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위쪽에서 보면 일괄적으로 ‘돌판이 깨어질 이유를 생산하는 집단’에 불과합니다. 이런 평가를 받아 마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면서 내심 자신만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든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위하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하여’는 필히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으로 간주됩니다. 산 밑에 있던 백성들이 ‘우상’ 섬기겠다고 그들이 금송아지 만든 것은 아닙니다. 애굽에서 자신을 건져내신 그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금송아지를 만든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종교심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기뻐하실 줄을 알았던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터무니없는 일방적 생각에 불과합니다. 모세와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자기를 위하면서’ 섬긴 하나님이 우상임을 아시고 들고 내려오던 돌판을 깨어버립니다. 이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돌판을 받을 자격이 못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에 대한 하늘의 평가는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깨진 돌판 앞에선 백성’이 됩니다.

즉 그들이 뭘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거룩한 돌판을 깨뜨릴만한 이유들을 내놓는 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됩니다. 앞으로 줄곧 그렇게 다루어집니다. 하지만 돌판의 입장에서 볼 때, 돌판 안의 내용은 ‘깨어짐’ 없이는 외부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원칙이 알려진 바가 된 셈입니다.

즉 언약은 그 깨어짐에 의해서 완성이 된다는 원칙입니다. 이는 모세 및 선지자들의 고난으로 반복해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마지막에서 하늘에서 오는 아드님 마저 ‘죽음’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언약을 성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 없이는 창조의 완성도 없는 겁니다.

아무나 죽음이 새창조를 낳는 게 아니라 언약에 의해서 죽게 되는 언약자의 죽음을 통해서 만물은 새롭게 됩니다. 지금 모세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습니다. 경계선상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계선에서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조치, 양쪽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 경계선의 다가옴이 곧 돌판이 완성과 관계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돌판의 내용은 백성이 지키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백성들의 위반을 통해서 그 본래 담겨진 내용이 ‘희생자의 피’를 유발하면서 외부로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돌판이라는 물질이 깨어짐을 통해서 인격체의 등장을 알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완성은 그 돌판을 깨트린 모세에게 새로운 지시사항이 줄기차게 주어지면서 점차 완성도를 더하게 됩니다.

이를 ‘모세 언약’이라고 합니다. 모세에게 쏟아진 내용들, 곧 언약 내용들은 그 완성도를 자체적으로 내다보게 됩니다. 모세 죽고 난 뒤에도 언약의 내용은 새로운 순교자와 희생자를 지상에 유발토록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해서 언약을 위반하게 되는데 이게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깨진 돌판’을 증거해야 될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돌판을 깨뜨린 그 위반적 속성이 그들의 내면에 힘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모세 언약의 완성은 그 내면에 있는 것을 외부사건으로 끄집어 올라오게 하는 방식을 사용하게 됩니다. 내면이 외부가 되는 겁니다. 그를 통해서 평소에 인간들이 얼마나 내부와 외부를 뒤바꿔서 서로들에게 내놓았는지를 들통날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도 쉬지않고 계속 됩니다. 마태복음 23:16에 보면,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눈에 보이는 최종적인 증거물로 성전을 백성들에게 지시하면서 통치해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도 방식에 대해서 마태복음 23:15에서는 이렇게 단언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당시에 유대 지도자와 예수님의 견해서 어떻게 차이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집단적 종교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수용할만한 증거거리를 제시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 건립과 유지에 얼마나 큰 고통과 고난을 보이고 있는지를 전백성적으로 알려서 정치적 세력과 획책합니다.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것이 실은 내부를 숨기기 위해 극렬한 시도라고 보고 계십니다.

이처럼 율법은 인간의 내부를 외부로 끌어올리게 하십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외부가 인간의 내부의 것들로 가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죄입니다. 돌판이나 성전이나 이런 물질적인 것을 최종 믿음의 증거, 축복의 증거로 삼아버리면, ‘돌판의 깨어짐’의 취지가 날아가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입은 선지자들이 주위 세력에 의해서 희생당하고 죽게 되는 아픔을 연속적으로 보여주게 되는데 이는 새언약이신 예수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6:65에 보면,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들의 그 어떤 안목으로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포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죽음은 그 자체로 증거가 되는게 아니라 그 죽음 안에 초대된 자들에게만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말씀은 실제로 성도 안에서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61-63)

깨진 돌판처럼, 십자가에서 깨어진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살과 피가 나오는 취지 앞에서 우리의 모든 일상의 모든 의미는 십자가 의미 앞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대수롭지 않는 일로 신경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0-25 22:44 
54강-신 9장 13-17절(깨진 돌판)1510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9장 13-17절입니다. 구약성경 276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고 너로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시기로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산에는 불이 붙었고 언약의 두 돌판은 내 손에 있었느니라 내가 본즉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서 급속히 여호와의 명하신 도를 떠났기로 내가 그 두 돌판을 내 두 손에서 들어 던져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렸었노라”

여기 두 개의 상반되는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는 그냥 우상숭배 했다고 그렇게 보는데, 그것은 위에서 보는 것이고요. 자기네들끼리는 절대로 우상숭배 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들은 축제를, 종교파티를 열었던 것입니다. 종교파티 여는 방법은 간단해요. 서로가 서로를 보기에 거룩한 모습들을 끄집어내면 되죠. 오늘날 교회에서 방언하는 것을 만들어서 스스로 거룩을 위장하는 그런 경우도 많이 있잖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요들 방언을 가르치면 이렇습니다. 스위스 요들은 두상에서 소리가 나거든요. 머리에 손을 얹어서 두상의 어떤 느낌을 받아야 되고, 그 다음에 오늘이라고 해보는 거예요. 그 다음에 내일이라고 해보는 거예요. 오늘내일~~오늘내일~~을 빠르게 하면 오를레이~~오를레이~~ 이게 요들 방언입니다. 할렐루야 빨리 하면 진짜 방언되거든요. 서로서로, 자기가 자기한테 감동받는 겁니다.

그거하고 딱딱한 돌판하고 아무 상관이 없거든요.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전부 동원해서 자기가 자기를 감상하면서 자기도취에 빠지는 거예요. ‘아! 내가 이 정도로 아주 경건스러웠나?’ 하나의 놀이입니다. 놀이. 놀이인데, 노는 장소를 이렇게 만드는 거예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합시다. 왜냐하면 위가 없기 때문에. 위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경건스럽게 정성과 성의를 다 표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막상 위층과 아래층이 경계선을 이루죠. 그래서 메시아는, 중보자는 그 경계선에 있어요. 모세나 모든 선지자나 경계선에 섰습니다. 한쪽은 하나님 편도 알고 저쪽 인간의 편도 알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 것도 알고, 사람들이 얼마나 죄인인 것도 아는 그 중간에 서있죠. 그 장소가 메시아 장소, 오늘날 성도가 서있는 장소입니다. 성도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양쪽을 다 알아요. 그래서 충분히 세상을 이해할 줄도 압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를 알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하기를, 그들은 우상을 섬겼다. 목이 곧은 백성이다. 내가 그들을 다 없애버리고, 고 다음에 중요한 것은 14절에 너로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겠다. 모세로부터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겠다. 그 경계선에서부터 새로 시작하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제가 생각해도 좀 어렵다 했던 것을 다시 한 번 친절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돌판이 내려왔는데 돌판에 있는 내용은 나중에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가, 그 옆에 있는 모세를 통해서 알려진다 했습니다. 말씀이, 딱딱한 말씀이 하나의 인격체로 달라지게 되면 돌판은 자신의 모든 모습을 다 드러낸 겁니다. 그것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가 십자가 안에 들어있으면 더 이상 율법이라는 돌판은 우리한테 지적질 할 수 있는,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 최종의 근거는 이제는 없어지는 거예요.

모세가 뭘 깼다? 돌판을 깨버렸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율법을 깨버린 거예요. 깨진 것을 주섬주섬 우리가 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저 깨진 상태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지킬 것이 없고, 지킬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만나가 내리듯이 은혜로 주신 것이 모아져서 그것이 능력이 되어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 모아짐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사라고 에베소서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 뭐냐를 찾아보는 거예요. 모든 게 주신 거죠. 그냥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근데 문제는 이거에요. 하나님이 주신 것을 우리는 왜 못 찾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잔뜩 우리가 원하고 있는데 원하지 않는 것이 왔을 때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배척하죠. 배척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오해가 생긴 겁니다.

그래서 돌판에서부터 인격으로 넘어가는데, 이게 두 돌판을 깨는 겁니다. 깨는 이유는 딱 하나에요. 너희들은 이 돌판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돌판을 지켜서 죄인인 것을 알아라.”가 아니라 “아예 돌판 주기 전부터 너는 이미 죄인이었느니라.” 따라서 돌판의 완성은 돌판이 알아서 완성한다. 돌판 주신 주최 측에서 말씀을 성취하시지 너희들이 성취할 대상은 이미 주체의 자리에서 이미 벗어난 겁니다.

모세하고 그들의 차이점이 뭐냐, 모세는 깨뜨린 자고, 우상이 뭔가를 아는 자고, 그 백성들은 자기가 하는 짓이, 요들 방언, 오를레이~오를레이~ 하는 것이 우상 짓이라는 것을 도대체 모르는 거예요. 타고났으니까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돌판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변화는 그 과정은 어떤 과정이 되는가, 이런 과정이 됩니다. 모세로 하여금 새로운 집단이 생겨요. 모세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공동체가 생기게 되게 되면, 그 전에는 그냥 돌판이 주어졌지만 이들에게는 깨진 돌판이 주어집니다.

“너희들은 깨진 돌판의 의미를 비로소 알아야 사는 존재다.” 그런 뜻이죠. 이건 뭐냐, 예수님을 안다? 아니 천국 못 가요. 깨어진 예수님을 알 때 구원받습니다. 오신 예수님이 우리한테 좋은 말씀 주시면 우리는 아주 공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돌판이 깨어져야 돼요. 깨어진 돌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안 지켜도 구원되는, 행함 없이 구원되는 그러한 일들이 이제 일어날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돌판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스스로 깨어지는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6절에 보면 사람들이 아무리 이 대목을 읽어도 무슨 취지인지를 모르는 대목이 나와요. 성경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여기 보면 이래 되어 있어요. 그대로 한 번 읽어볼게요.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다” 요 대목입니다. 이야기 한 사람, 바리새인들은 이걸 무슨 취지로 이야기했으며, 이걸 반대한 예수님은 어떤 취지로 이걸 반대했는지, 우리 제 삼자입장에서는 공격하시는 예수님의 뜻도 잘 모르겠고 그들이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다고 한, 그들 바리새인들이 그런 말을 하게 된 입장도 우리로서는 좀 낯설게 느껴지고 그렇죠.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너희 믿음 없지? 내가 믿음 만들어줄게. 너희 눈앞에 뭐가 보이지?” “성전이 보입니다.” “그렇지! 성전이 보이지. 이 성전 우리가 지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짓도록 한 거야. 그러니까 이 성전을 보거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으라고, 믿음의 증거라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이 성전이 어떤 효과가 있는 줄 알아? 성전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너희들은 만사가 잘 되고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런 취지로 이야기한 거예요.

어떻습니까? 성경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얼마나 이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까? 이 바리새인들이 하는 주장을 오늘날 버전으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여러분. 이 예배당 있죠? 뭐가 보입니까?” “예배당이 보입니다. 이 예배당 지을 때 어떤 장로는 꿈에 계시 받아서 땅 샀고 땅값이 올라서 이렇게 했습니다. 이 예배당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교회를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구원받고 싶습니까? 우리교회를 사랑하세요.” 얼마나 설득력이 있어요.

근데, 바리새인들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전을 성전이라고 우기면서 온 백성을 신자로 만드는 그 책략은 인류가 끝나지 않는 한 계속 반복됩니다. 계속 반복돼요. 그 당시 사람들이 이미 성전을 믿고 성전에 맹세하면 구원받고 죽어도 살아서 복 받는다고 이미 아는 이상, 이미 듬직하게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 이상, 거기에다 추가적으로 예수님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죠.

이미 안정이 되어 있잖아요. 눈앞에 성전이 있고 성전에서 제사하게 되면 영광 받는다. 이게 구약성경에 문자적으로 맞다. 이게 모든 것이 정돈됐는데 거기서 예수님의 말씀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잖습니까? 여러분들이 나름대로의 아마추어 입장에서 복음전한다고 복음 많이 전했잖아요? 먹혀들어가던가요? 아니 예배당이 있는데 그래? 믿는 교회가 이 예배당 지을 때 기적적으로 지었는데 그래? 이 기적적인 것을 무시하느냐? 보통 이래 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그럼 눈에 보이는 예배당, 교회 말고, 교회 역사 말고, 교단 역사 말고, 본인이 보이지 않는 증거로써 제시해보세요.

그러면 그들은 제시할 수 없어요. 또 눈에 보이는 것을 찾아냅니다. 기도해서 갑자기 사업 잘 되는 것, 또 그것을 증거로 찾아요. 이게 뭐냐, 전부다 가시적이고 외면적인 거예요. 외면을 뒤집어야 내면이 나오거든요. 돌판이 왜 깨어졌느냐, 깨어져야 비로소 돌판의 내면에 들어가는 입구가 나옵니다. 그 본질이 나와요. 이게 깨어져야.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 죽지 아니하면 창조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창세기 1장에 그 내용이 없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그냥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그냥 그렇게 되어 있죠. 그러나 그 내막은 신약에서 밝혀집니다. 말씀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되어 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말씀으로 되어졌느니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곧 예수님이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죽음이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다 이루었도다. 간편하잖아요.

한 알의 밀알이 썩어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 죽기 싫어하는 동네에 와서 예수님 혼자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나는 누가 죽이는 게 아니다. 나는 스스로 죽노라. 이것이 나와 아버지의 약속이니라. 그렇게 해놓고 사람들이 메시아를 찾고 있고 자기를 메시아로 인정해주니까,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평가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정말 나를 메시아로 안다면 내 살고 내 피를 먹어라. 다 떠나고 말았어요. 떠나는 그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내게 올 수 없다.” 하나님께 가봐야 천국 못 가요. 하나님을 만나봐야 천국 못 갑니다. 내게로 와야 해요. 예수님께로 와야 되지, 그냥 천국 앞에 서 있으면 “니 표 갖고 있나?” “표 없습니다.” 도로 집에 와야 해요. 예수님에게로 와야 해요. 이게 아버지의 뜻이에요. 우리 뜻이 아니고. 예수 일변도가 제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이에요. 나한테 오지 말고 아들에게 가라. 이게 아버지의 뜻이에요. 그래서 삼위일체는 이게 마귀 이론이에요. 예수님에게로 오는 것을 저지하는 마귀들이 만들어낸 겁니다. 철학 논리적으로. 존재론을 가지고 만들어낸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기죽었습니까? 삼위일체가지고. 목사가 지도 알지 못하면서 삼위일체 그냥 이야기해놓으니까 듣는 교인들이 시어머니가 세 분 되어서, 성부를 섬기려고 하니까 성부, 성령이 삐져서, 성부를 섬기려고 하니까 성부가 삐지고, 도대체 머리가 세 개고 몸통이 하나인데 어느 머리를 섬겨야 하는지. 괴물 이론을 만들어요. 간단하게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삼위일체를 끄집어내니까 천국 가는 사람도 막고 지도 지옥가고 그런 겁니다.

깨진 돌판으로 나중에 메시아를 알려주는 그 방식을 주께서는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자체를 목이 곧은 백성으로 만들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깨진 돌판이라면, 그러면 어떤 경우에 깨집니까? 물론 그 당시, 본문 당시에는 뭐냐 하면 금송아지 만들어서 돌판을 깼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그 다음부터 어떻게 하면 안 깨지죠? 금송아지 안 만들면 되잖아요. 하여튼 피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에요. 금송아지 안 만들면 그러면 돌판 안 깨집니까?

거기 분명히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금송아지 만들 때 취지가 담겨있어요. “우리를 위하여” 우리 나 자신을 위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거든요. 금송아지를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거든요. 애굽에서 자기를 구원한 그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과 나를 위해서는 절대로 만날 수가 없다는 원칙을 수용해줘야 해요. 나를 위한 하나님은 애초에 없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우리’라고 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낸 피조물을 두고 이야기한 겁니다. 죽음을 경유한, 죽음 안에서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한 것이지. 주님의 십자가에서 안 죽었으면서도 성경대로하자?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해서? 그런 것은 없어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 세상이라는 것은 그냥 세상을 말한 것이 아니고 세상 속에 있는, 아버지가 보낸 자를 가지고 언급한 거예요. 그거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니. 물론 설명해야 할 일 때문에 제가 있기는 하지만. 설명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앞으로는 여러분들이 알아서 대신 해주시기 바랍니다. 근데 또 뭘 알아야 설명하죠. 나중에 집에 가서 또 후회하고. 그때 그 말 할 건데.. 하고. 다 그게 설교 들어보면 대꾸할 말이 다 들어있어요. 보통 한 사십분 듣다가 십분 남겨놓고 주무시고 하지만. 많이들 주무신데요. 제 강의나 설교 듣다가. 얼마나 감사해요. 요새같이 수면하기 어려운데 틀어놓고 자고. 또 틀어놓고 자고. 좋지요.

자, 그러면 핵심은 이겁니다. 돌판에서 인격이 나오는 그 세부적인 과정은 어떤 과정이냐 하면 이래 됩니다. 지금 돌판을 깼잖아요. 그러면 돌판 깬 것을 누가 아느냐, 모세만 알아요. 위 말고 아래, 인간세계 이스라엘 속에서는 모세만 알거든요. 그러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뭘 계속 주입중이냐 하면 십계명과 관련된 그런 지시와 명령들이 계속 주어지게 됩니다. 뭐 성막 만들어라, 제단 만들어라, 또 제사장 복장은 이래해야 되고, 절대로 절하면 안 되고 안식일을 지켜야 되고, 그 계명을 모세라는 좁은 입구 깔대기를 통해서 계속 주입을 해버려요.

그걸 가지고 모세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모세언약. 언약이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모세언약은 반드시 인격과 관련되어 있어요. 다윗언약, 다윗도 사람이잖아요. 모세도 사람이고. 노아언약, 노아도 사람이잖아요. 새 언약, 예수님도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언약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다루신 어떤 분이 너희들이 예상 못하는 독특한 어떤 기능을 행사하게 되어 있다. 이 땅에. 그 기능을 행사하는 그것이 언약을 실현시키는 행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을 진 사람이 말하는 것을 지키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우리가 말을 하는데, 이게 또 무식한 소리에요. 왜 그러냐 하면 이미 깨어진 돌판을, “돌판은 반드시 깨어져야 된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돌판은 깨어져야 돼!” 라는 것이 확정된 원리원칙의 인격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언약을 갖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들은 이미 우리를 뭐냐, 위반자로 만들어버려요. 위반자. 위반될 수밖에 없는 사항을 내놓는 거예요.

그러면 위반되는 그 면적이, 법이 미치는, 원래 법이 갖고 있던 그 원래 면적과 같은 면적이 되는 겁니다. 운동장 같은 면적이 있다면 그 운동장이 갖고 있던 원래 면적이 몇 평이냐 하는 것은 너희들이 이 말씀을 인하여 유발되어야 될 죄들이 있어요. 그 죄의 면적이 곧 원래 있었던 율법의 면적이에요. 쉽게 말해서 법은 죄를 지으라고 만든, 주어진 율법이에요. 성전이라는 것도 율법입니다.

성전에 맹세하면 아무 일 없다. 그게 성전을 투입해서 새롭게 밝혀진, 넓혀진 죄의 면적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당 있다. 우리 교회는 기도해서 역사적으로 터를 구했다. 이처럼 뭐든지 나 자신의 문제없이, 나 자신과 관계없이 주어진, 납득이 되어서 천국갈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은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죄를 바깥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서, 내부를 외부로 끄집어내기 위해서 주어진 말씀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이런 겁니다. 악한 의도 없이 우리는 망하게 되어 있어요. 악한 의도 없이. 착하게 살려고, 착하게 살려고, 천심, 천심, 그렇게 해도 결국 망하게 되어 있는 게 결국 우리입니다. 따라서 율법 앞에서 세상 모든 일은 전부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에요. 그걸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안 망하는 것이 아니에요.

어느 날 제가 라면을 끓이는데, 그 라면 이름이 나가사키짬뽕이라는 것인데, 벌써 세 번째 끓여도 또 실패해요. 물을 많이 붓고 해서 또 실패해서 맛이 안 나고. 세 번째 실패했어요. 그냥 저한테는 굉장히 속상하지만 가만히 돌아보니까 이게 복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문제에요. 다음에 끓일 때는 물을 줄이면 되잖아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어요. 목숨까지는 걸지 않았습니다만. 모든 게 사소한 일인데, 그 사소한 일을 왜 중요하게 여기느냐 하면 이미 깨어진 돌판인 것을, 확인차 내 인생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몰라서 그래요.

예수님이 깨어진 몸,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몰라서 그래요.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이 맹세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굉장히 질타를 합니다. 이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욕설로 치장했어요. 쭉 이야기하면서 화 있을 진저, 저주 있을 진저,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해놓고. 결국은 그렇게 예수님께서 욕하신 이유가 뭐냐 하면 외면에다 니 내면을 가지고 외부로 끄집어내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내면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목을 겉옷으로 입는 거예요. 바지 위에 팬티 입는 겁니다. 슈퍼맨처럼. 지구 일곱 바퀴를 돌잖아요. 속옷을 겉옷으로 입는 것처럼 우리의 내면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작업이 예수님의 새 언약이에요. 그래야 내 죽음, 살과 피를 먹지 아니하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이 매치가 된다고요. 연결이 돼요. 아주 쉽게 말해서 우리가 주님한테 가서 “주여. 오늘도 교회 나왔습니다.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한다면 주님께서 이 강대상에다가 번개탄을 피워요. 그리고 비닐로 문을 다 봉쇄해버립니다. 같이 죽자는 거예요. 고 방식입니다.

그러면 왜 죽어야 합니까? 니도 지옥가면서 남까지 지옥가게 하는 그 괴물이 니 안에 들어있으니까, 니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면서 그 다음에 무엇과 매치시키느냐 하면 예수의 살과 피를 매치시키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내부에 어떤 것이 있는가. 러시아에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답니다. 어떤 착한 마녀가, 마녀가 무슨 착하겠어요. 근데 그 착한 마녀가 농부한테 찾아와서 “너한테 소 한 마리 주고 이웃한테 소 두 마리 주는 게 낫습니까? 아니면 당신한테 소 한 마리 뺏고 이웃한테 소 두 마리 뺏는 게 좋습니까?” 하니까 농부가 두 말 할 것 없이 “뺏어주세요.” 이거는 사람은 더 얻는 것보다 남이 잃는 것을 더 원해요.

사람의 참 재미가 남 망하는 재미로 삽니다. 지가 잘 되면 이거 간수한다고 불안, 불안해요. 그럼 남이 망하면 내가 얻는 것보다 훨씬 즐거워요. 그 마지막 끝은 뭐냐 다 망해버려라. 같이 죽자. 다 망해버려. 이정도로 우리는 율법이 이야기한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거리가 멉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을 주죠. 그 원치 않는 것을 줄 때, 내가 이것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극구 밀치는데, 그래도 사랑은 그걸 이기고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니가 원치 않는 것이 오히려 너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니가 원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서 니 현재 모습은 내가 원하지 않아. 하지만 너를 찾아가는 내 모습은 아버지가 원하는 너의 장래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오셔가지고 우리가 어떤, 어떤 것들을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인지 까발리면 다 대수롭지 않는 거예요.

나가사키짬뽕이 맛없다는 이런 것이거든요. 전부다 별로 이렇게 신경질 안 내어도 되는 겁니다. 지금 마산의 NC팬들은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2등 했는데 한국시리즈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두산이 올라왔어요.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중계석에서 보면 아가씨들이 기도하고 난리 났어요. 그거는 본인이 원하는 팀이잖아요. 자기가 원하는 팀이 올라가는 것이 본인이 원하는 거거든요.

여러분들이 자식들을 기도할 때 주님이 원하는 자식들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단 조건이 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이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내 자식이 알게 해달라고 첨부파일로 보내세요. 나는 내 자식이 이런 것을 원하는데 내 뜻대로 마옵시고 이것 말고 아버지의 원하는 것이 있을 거니까 그대로 되게 해주세요. 남동생한테 얻어맞아서 울던 누나. 이거는 부모가 원했던 그 누나 아니죠. 제가 부모 같으면 둘 다 불러놓고 너 나중에 N분에1 그런 유산 없다. 태민이 한테는 유산 안 준다. 이렇게 하면 깨끗하게 해결될 문제를 가지고.

깨진 돌판 앞에서, 다시 말해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다 활용도가 있어요. 이유가 있어요. 왜, 십자가를 알려주는가, 소유하라고 주는 게 아니고, 이미 너는 십자가의 사람으로서 살 때 니가 바로 언약의 사람인 것을, 내 사람인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언약사람 되게 하옵소서. 내가 관리하는 사람 되지 않게 해주시고 모든 게 까발려져서 나의 내부가 외부로 알려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주께서 사용하시는 일인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언약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