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강-신 9장 9-12절(돌판)1510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9장 9-12절입니다. 구약성경 276페이지입니다.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야를 산에 거하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판의 글은 하나님이 친수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사십 주야가 지난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돌판 곧 언약의 두 돌판을 주시고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여기서 속히 내려가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내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었느니라”
방금 읽은 이 이야기는 애굽이라는 나라가 있을 때 성립할 수 있는 것으로 그렇게 보입니다. 애굽에 있던 사람들이, 일단의 무리들이 애굽에서 빠져나와서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두 돌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성사되려면 먼저 애굽이라는 나라가 있어야 하죠. 그러나 우리에게는 현재 애굽이라는 나라는 사실상 없죠. 이집트는 지금의 애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애굽이라는 나라가 없다면 무엇이 성립되지 않느냐 하면 약속, 언약이 성립되지가 않습니다. 애굽에서 나와야 출애굽이 되거든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에게 출애굽, 다시 말해서 구원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애굽을 새롭게 만들어야 되죠. 지나간 그 애굽을, 애굽의 의미와 성질, 지리, 새로운 상황을 주께서 만드시는데, 그 만드시는 방법이 뭐냐, 돌판 안에다 그걸 만드시는 모형과 구조를 집어넣으신 거예요.
어째서 그러냐 하면 전에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어린양을 잡았습니다. 어린양을 잡았거든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어린양을 잡아서 애굽에서 나왔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돌판이 필요 없어요. 어린양 잡았으니까 모든 것이 깨끗하게 끝난 걸로 알았는데, 어린양 잡을 때는 애굽이라는 나라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구분하기 위해서 어린양이 중간에 끼어들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어린양 잡음이 의미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어린양 잡음이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거는 어디까지나 과거에요. 광야에서는 과거지사가 되고 말았어요. 광야에 와서 다시 하나님께서 그 출애굽의 정신을 이어가려면 그 애굽의 역할을 누가 담당하느냐 하면 애굽에서 나왔던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역할을 해줘야 해요. 애굽 역할을 해서, 그 광야에서 주님이 동행한다는 것이 계속해서 출애굽 정신을 이어간다는 뜻이니까. 이런 애굽같은 우리이지만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출애굽의 혜택을, 효과를 지금 우리에게 부어주고 있다. 이게 바로 약속이 되는 겁니다. 약속이 되죠.
그렇다면 그들이 애굽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 12절 끝에 나옵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여기 ‘부패하여’ 할 때, 어떻게 부패하느냐 하면, ‘스스로, 자발적으로’ 부패했어요.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부어 우상을 만들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스스로 우상을 섬기려는 그런 속성을 서서히 조금씩 뽑아내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애굽이라는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지리적으로는 떠나왔지만, 자기 자신이 자기 힘으로 나는 애굽 사람이 아니다는 말을 여기서는 더 이상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 본문을 볼 때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라는 이런 관점으로 보면 안 되고요. 하나님께서 모형을 만드시는 거예요. 모형을. 지난 시간에 연극무대 했잖아요. 같은 의미입니다. 모형을 만들 때, 너는 애굽 역할 해야 하고, 너는 뭐 해야 하고, 너는 뭐 해야 하고, 이렇게 역할이 분담을 해요. 하나의 모형을 만든다는 것은, 모형이 구조가 되어버리면 어떤 이익이 있느냐 하면, 이제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가도 그 구조가 갖추어있으면 시간은 그 구조 안에서만 계속 흘러갈 뿐입니다.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되는 이유가, 시간이 흘러도 구원되는 이유가, 구원이라는 것이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이라는 덮개, 구원이라는 하우스, 구원이라는 창고, 그러한 체육관 안에 구조적으로 갇혀있다 보니까, 내가 아무리 늙어죽어도, 치매 걸려도, 그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구조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이거는 관건이 뭐냐 하면,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만든 구조에 어떤 재료로 들어갑니까?” 이렇게 보면 돼요. “하나님이 만드신 그 모형물에 저는 어떤 식으로 개입되어 있습니까?”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전체라는 구조 입장에서 나는 하나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뭐, 나 하나 까분다고 해서 집이 전체 와르르 무너지고 하는 그런 것은 없거든요. 부속품이 문제가 되면 갈아 끼우면 되니까. 형광등이 깜빡거리면 갈아 끼우면 되잖아요. 그러나 형광등 갈았다고 집이 무너진다면 그거는 집이 부실공사한 집이겠죠.
자, 그러면 그 모형인데, 그 모형의 집에서 핵심요소가 뭐냐 하면 바로 모세가 받았던 돌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돌판 없으면 구원이 안 됩니까?” “안 됩니다.” 돌판 없이는 구원의 하우스가 안 지어져요. 돌판 없이는. 돌판이 왜 그렇습니까? 물으면, 돌판은 투박한 물체죠. 투박한 물체인데, 이 투박스러운 물체가 무엇과 대비가 되고, 대조가 되면서 저쪽의 우상성을 드러내느냐 하면은, 히브리인들에게 자발적으로 우상이 나오는 그 정신세계,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 전체와 이 투박한 돌판이 이렇게 대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들은 마음껏 신을 논해라.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것은 이 투박한, 딱딱한 돌로 만든 판대기다.” 이래 나온 거예요. “돌로 만든 판대기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돌로 만든 판대기에서 무엇을 끄집어낼 수 없느냐 하면 아무리 상상력을 도입해도 돌로 만든 판대기에서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끄집어낼 수 있는 재주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없으면 안 끄집어내야 하는데, 없으면 안 끄집어내면 되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 돌판을 주셨으니까, 이렇게 오해를 해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경건한 것을 주셨기 때문에, 그러한 돌판을 물체로 주셨기 때문에, ‘아! 하나님은 물체와 물질을 되게 좋아하시나보구나!’ 그래서 중세 때 예배당을 지을 때 일 이십년이 아니라 백년, 백오십년, 쾰른 같은 성당은 백오십년동안 지었거든요. 많은 세월을, 몇 백 년 동안 대를 이어 지으면서 거룩한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바친다고 나온 겁니다. 그 성전을 보면 그야말로 거룩하고 장엄하고 고상하고, 인간들의 모든 재주와 기예가 전부다 거기에 응축되어 있어요.
최고의 건축기술과 최고의 아이디어와 예술적인 품격을 그 성당이라든지 교회라든지 거기에 몽땅 다 쏟아 붓는 겁니다. 극한의 아름다움. 극한의 예술적인 미. 모든 것을 건물이나 눈에 보이는 구조에다 다 집어넣죠. 거기에 나온 악기도 뭐 수십억 한다는 파이프 오르간이에요. 그 비싼 것도 아낌없이 헌금해서 신에게 바치는 거니까 제일 좋은 것을 바치는 거예요. 그런데 제일 좋은 것을 바치는 그것이 드디어 폭로된 자신의 우상성입니다. 니가 제일 좋은 것을 바친다 해도 너에게서 나왔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너가 제시한 그것은 모형의 부속물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뭘 바치면 됩니까? 여기에 대해서 지난 시간 6절 끝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니 의를, 니 정성을 가져오지 말라는 거예요. 제가 지금 쉽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렵지 않아요. 교회에 정성을 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헌금할 때, 전도할 때 정성 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어렵지 않죠? 근데 왜 자꾸 정성을 드리고 싶어요. 본인이 우상숭배자임을 티내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니가 해야 될 모형에 박힐 부속품적 기능이 뭐냐,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다. 이것을 영어로 하면 기브스, 깁스Gibbs라고 하는 거예요. 목에 기브스하고 오더라 말이죠. 어떤 분은 손가락에 기브스 한 분도 있지만. 목이 곧은 백성이 이 거대한 구원의 하우스, 모형에서 우리의 위치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이. 참 쉽죠~잉~ 참 쉽죠.
정성은 우리나라에서 토속종교에서 하는 거예요. 정성을 다하여. 그 해변가에서 굿하는 무녀들 보세요. 풍어제 드리고 처녀귀신 불러낸다고 굿하는 것 보세요. 영혼 결혼한다는 그런 것 보게 되면 무슨 긴 천에 쌀을 넣어 던지면 쌀을 먹고, 영혼이 긴 천에 감겨서 오게 되고, 억지도 그런 억지가, 지어내는 것도 그런 소설이 다 있나. 그걸 두 자로 하면 ‘정성’입니다. 정성. 정성은 하늘도 감동한다는 거예요.
요나서에서 배가 풍랑이 일 때 뱃사람들이 요나를 바치잖아요. 그거 한마디로 말해서 정성이에요. 정성을 바치면 바다도 잠잠하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은 니가 애굽에 살면서, 애굽이라는 사람과 함께 살면서 이미 보편화된 거예요. 그런 정성이 결코 너로 하여금 애굽에서 탈출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니 정성이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너의 구원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그 계명에는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그런, 목이 곧은 백성의 역할로 그 모형 안에 기입이 되어 있는데, 그 구원 바깥에는 뭐냐 하면 정성, 정성, 정성으로 지금 버티고 있는 거예요. 왜 교인들이 말씀에 관심이 없고 성경 설교에 관심이 없느냐 하면 따로 하나님께 바칠 정성이 가득하기 때문에, 정성이 있으면 되지 성경 말씀 왜 보느냐 이래 되는 거예요. 참 이 정성이 탈을 내요. 그러면 왜 그렇게 정성, 정성, 정성을 주장하느냐 하면 본인이 소중하기 때문에, 본인의 행위도 소중하다고 보는 겁니다. 본인이 소중하기 때문에.
그러나 오늘 9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모세가 돌판 받으러 산에 올라갈 때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했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진짜 소중한 것은 내가 떡 먹고 물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을 만나기 위해서 산에 오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것 때문에 모세는 자기를 돌볼 필요가 전혀 없어요. 물도 마시지 않고 떡도 먹지 않는, 자신의 꿈과 미래는 전혀 소중하지 않는, 꿈과 미래라 하는 것은 곧 시간에 대한 개념입니다. 자신의 앞날도 소중하지 않아요.
왜?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모든 것이 중지가 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도 흐른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구조적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만 중요하지, 내가 이 구조 안에서 앞으로 십년 뒤에, 오년 뒤에, 구년 뒤에 뭘 하겠다는, 그것은 의미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장만되어 있고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 나보다 더 소중한 것, 나의 운명보다도 소중한 것.
사십일 동안 거기에서 두 돌판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오늘 설교에서 남은 문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 투박스러운 두 돌판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끄집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게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하고 어려운 대목인데, 돌판은 딱딱한 돌덩이죠. 돌덩어리에서 그 안에 담겨진 어떤 인격체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이거는 뭐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 돌판은 이래 봐도 돌이고 저래 봐도 돌인데. 그 돌이 무슨 언약이 되느냐? 물체인데? 차라리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 돌판 속에 들어갔다가 그 돌판 속에서 다시 나오는 겁니다.
힌트를 드릴게요. 돌판 속에서 어떻게 인격이 나오느냐 하면 돌판이 깨질 때 인격이 나옵니다. 돌판이 깨어질 때. 돌판이 깨어졌다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돌판이 소용없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 인간한테는 이 물체적인 언약이 너희들을 구원해낼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돌판에 그 분이 들어있다는 것은, 이거는 어떻게 된 겁니까? 이거 아무리 봐도 돌판이 두 짝 밖에 없는데 거기 어떤 분이 계시다는 것은 어떻게 압니까? 그거는 이렇게 알아요.
자석을 놓게 되면 자석 주변에 쇳조각이, 누가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쇳조각이 모이죠. 중세 과학이 처음 발달한 것이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물체 사이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그 힘을 끄집어내는 것이 우주의 원리다. 그것부터 중세 과학이 시작이 된 거예요. 지금 우리가 그 작업을 하고자 합니다. 돌판이 있는데, 돌판을 놓았을 때 어느 위치에 놓아지느냐 하는 겁니다.
그거는 출애굽기에 보면 나와요. 모든 구원의 구조가 돌판 중심으로 모아질 때, 그때 그걸 돌판이라고 하지 않고 언약궤라고 하고, 그걸 또 증거궤라고 하고 거기에 천사가 두 모형으로 그걸 내려다보고 있어요. 천사가.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언약궤를 가지고 요단강에 들이댔더니만 요단강에 홍수 나서 물이 범람한 요단강이 쫙 갈라져서 그 안에 길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또 뒤에 나오는 언약궤를 함부로 들여다보는 그 웃사 가정에서, 웃사 때문에 동네사람들 전부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돌판을 블레셋한테 빼앗기니까 돌판 때문에 이 블레셋이, 지금의 팔레스타인이죠.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쪽으로 가는 저쪽 동네를 말합니다. 그쪽 동네가 난리가 났어요. 전염병이 돌고 사람들이 죽고이랬어요. 다시 말해서 원인 없는 결과가 돼버린 거예요. 찾을 수 없는 결과물만 자꾸 나오는 거예요. 따라서 그 언약궤가 그런 작용을 한다는 것은, 그 언약궤 원인을 우리 인간 쪽에서 추가적으로 거기다가 집어넣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왜 중요하느냐 하면 내가 난 된 것은 그 원인을 나의 기도나 전도나 정성이나 헌신에서 끄집어내면 안 된다는 것이 이 구원의 하우스, 구원의 구조에서는 이건 철칙입니다. 내가 난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어야 하지, 나의 행함이 거기에 끼어들어서는 안 돼요. 내가 행함의 원인자로서 거기 끼어들 수는 없어요. 왜? 돌판은, 우리가 들어가게 되면 돌판은 깨어져야 하기 때문에. 만졌는데 깨어져버렸어요. 만졌는데 깨어졌어요.
제가 강의할 때 그런 강의했어요. 서양 동화를 예로 들어서, 닭이 있는데 닭이 자꾸 금 달걀을 낳는 거예요. 매일 하나씩 금으로 만든 달걀이 나오니까, 이게 아주 안달이 났어요. 감질나게 딱 하나씩 낳거든요. 성질나서 분명 이 안에 금 있다고 아주 내부를 해부해버렸어요. 금은 무슨 금? 그냥 보통 닭인데. 치킨 해먹으면 오천 원짜리도 안 되는데. 그럼 가만히 놔뒀으면 계속 금 달걀을 낳을 건데. 내가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내가 확인해보겠다는 거예요.
소중한 것은, 나보다 소중한 것은 내가 원인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원인된 소중함을 항상 우리가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한테 소중한 것은 내가 원인이 되어, 내가 주인공이 되어 만드는데 주님은 그걸 비켜갑니다. 왜? 우리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까. 목이 곧은 백성이면 목이 곧은 값을 하면서 살아가면 돼요. 얼마나 목이 곧은 백성인지 주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일체 보태준 적이 없다는 것을, 그것을 명심하고 살아가면 되잖아요.
그런 역할로 해서 돌판 주시고, 우리가 돌판을 깨지는 않지만, 우리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돌판이 깨어져버립니다. 돌판이 깨어져버리면 거기에 모든 인간은 돌판 깨는 사람 편에 서버리고 딱 한 사람만 돌판을 깨는데 관여하지 않는 사람 편에 어떤 인격자가 옆에 서게 됩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모세가 되는 겁니다. 드디어 돌판에서 어떤 인격자가 등장했습니다. 모세가 등장했어요.
물론 그 모세가 등장하기 전에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합니다. 뭐냐 하면 바로 우상을 섬긴다는 그것이, 산 밑에서 우상을 섬겨줘야 해요. 자기를 위해서 우상을 섬겨줘야 하고 부패해서 우상을 만들어야 하고 목이 곧은 백성이어야 하는 겁니다. 자, 돌판에서 인격 나오는 공식 이제 성립됐습니다. 이거는 뭐 서울 강남의 대성학원에서 나온 공식보다 더 중요한 공식이 나온 겁니다.
우리 인생을 살면서 주님을 찾으려면 우리가 죄지으면 돼요.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주님께서는 거기서 그 죄를 받아서 니가 이런 죄지음에도 불구하고 너가 구원되는 이유는, 너의 죄진 행위도 아니고, 너의 착함도 아니고, 너의 선함도 아니고 다른 원인이 있음을 새삼스럽게 밝혀주는데, 그 밝혀주는 그 분이 제시하는 것이 옛날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제시한 언약이 있어요. 내 살과 피가 아니면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 십자가 사건을 일으켰거든요.
그 십자가 사건이 옛날의 십자가 사건이 아니고, 지금, 오늘 죄가 드러난 이 현장이 구원하는 십자가로서 다시 올 때, ‘아! 시간은 흐르지 않았구나!’ 이거는 다른 말로, 어려운 말로 하면 뭐냐, 아무리 사건이 벌어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정말 중요한 거예요. 6.25사건? 아무 일도 아닌 것에 포함됩니다. 2차대전? 아무 일 아니었어요. 가족 중에 누가 돌아가신다? 아무 일 아닙니다. 십자가 빼놓고는 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걸 저는 이렇게 봅니다. 요란 속의 정숙이라. 요란 속의 정숙, 이 단어는 지금 요한계시록 교재를 다 썼거든요. 요한계시록에 포함될 겁니다. 지금 요한계시록이 굉장히 분주해요. 하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고요해요. 정숙입니다. 도서관 같아. 정숙합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11장입니다. 언약궤 보이면, 언약궤 보이는 그 자리에서는 삐지직 번개만 치지 그 위에는 전부다 고요하게 완벽한 상태에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를 날아가면 아무리 밑에서는 태풍이 치고 소나기 쳐도 구름 위에서 비행기는 그냥 고요하게 날죠. 그러면 거기에 맞는 음악이 또 나와요. Welcome to my World 웰컴 투 마이 월드 (아니타 커 싱어즈).
고요해요. 근데 공항에 착륙하려고 하면 번개 치고 난리 나요. 이런 고요의 상태, 고요의 상태에서 우리 지상에서의 번잡함과 요란함. 조희팔 사건, 새누리당 만나서 싸우는 것, 요란스러워요. 청년실업문제, 굉장히 요란한데, 조금만 올라가면 정숙, 고요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 한 마디로 말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죽는 게 아니고 자는 것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이 꿈이고 주님 안에 세계가 유일한 현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껏 목이 곧은 백성이고, 하지만 그 중앙 언약궤가 있는 성막 안에는 거룩함이, 그대로 고요함이 있습니다. 고요함이 거기 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어린양의 피가, 피 흘림이 나중에 인격을 만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앞당겨서 그들 판에 포진해있습니다. 바깥에는 요란스러워요. 정성이 대단하고, 서로 정성 드렸다고 싸우고 까불고 난리 납니다만, 언약궤는 요단강을 가르면서 약속의 땅을 드디어 성사시킵니다.
여러분 속에 이런 고요함이 있기를 바라고, 우리들은 목이 곧은 백성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투박한 물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시시하게 보지만 그 돌판이 있는 곳에서 주의 피가 흘렀다는 사실을 겸하여 같이 볼 수 있는 안목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