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52강-목이 곧은 백성(신9;6-8) 1510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0. 18. 06:45

2015-10-11 14:59:44 조회 : 113         
   목이 곧은 백성151011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목이 곧은 백성(신명기 9:6-8)

음성 동영상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hr-1KHeJSMI, Hit:16

 이근호 15-10-11 16:07 
목이 곧은 백성

2015년 10월 11일                            본문 말씀: 신명기 9:6-8

(9: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9:7)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9:8) 호렙 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존재가 늘 자기네들 뿐이기에 자기네들만 좋다면 일이 잘되어가는 줄로 압니다. 누구나 자신들은 사는데 있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쉽게 말해서 나쁜짓을 멀리하고 착한 일만 도모하면서 자신들의 가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정해줄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목이 곧은 백성’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게다가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다’고 단정지으십니다. 사람들이 애초부터 ‘목이 곧은 채’ 살려고 하지를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적을 하면 금방 고치고 수정에 나설 용의가 되어 있는 자들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런 식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식에 편들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늘 오해된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나름대로 바쁜 자기네들이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노아 당시, 사람들은 노아의 예언에 무관심했던 이유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에 매진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존에 종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활 모습은 모두 ‘혈연관계’가 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을 부정해도 결국 딱 막히는 관계가 바로 ‘혈연관계’입니다. 이 ‘혈연관계’를 신약에서 한 자로 표현합니다. ‘육’이라고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육, ‘혈연관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혈연관계’ 안에서 그것으로 신께서 밀어붙이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8절로 대항하십니다. “호렙 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일괄적으로 세상을 멸하려하시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한 정답은 바로 ‘언약 실시’ 차원이라는 겁니다. 언약에 합하지 아니하면 누구나 저주요 멸망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언약에 대해서 그 취지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율법이나 십계명이나 말씀은 모두 인간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을 때에 하나님끼리 만드신 겁니다.

그렇다면 십계명 취지에 대해서 유일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인간들은 십계명의 취지를 알지 못한 채 그 십계명이나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십계명은 십계명을 만드신 분만이 지켜냅니다. 언약 안에, 아예 언약을 만드신 분이 들어계십니다. 율법이나 십계명 자체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유는,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가 윤택하기 위하여, 달리 말해서 복주고 싶어하셔서 그 말씀을 지키라고 주신 줄로 곡해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5:17-18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과연 하나님의 언약을 본 취지에 부합하게 지킬 위인이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언약 자체를 다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10에서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언약은 저주를 저주로 확립하기 위해서 주어진 겁니다. 로마서 3:19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판과 저주는 필히 ‘죄’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로마서 5:20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놓고서 뒤 이어 나온 말씀이 바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고 되어 있습니다. 은혜가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죄가 죄로 확정된 바로 그 지점입니다. 죄를 지어서 은혜받는 게 아닙니다.

죄를 죄답게 짓게 하신 그 과정이 은혜를 주입시키는 과정입니다. 은혜가 왜 이런 식으로 주입되느냐 하며는 언약 안에 계신 분이 바로 언약의 완성시키는 과정을 펼치는 활동과 운동을 친히 벌리십니다. 이 운동과 활동에 입각해서 보면 인간의 모든 활동은 ‘중지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지된 상태’라는 것을 그 어느 인간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매일같이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활동으로 인하여 주님의 활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덮치게 되면, 인간들은 자기에게도 생소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

그 한 예가 시편 105:17-19에 보면,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운명은 요셉 본인이 결정하고 예측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요셉은 하나님의 언약 작업, 곧 메시야 작업을 증거하기 위해 이용당합니다. 창세기 45:5에 보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난 뒤, 요셉을 팔아먹은 형제들이 요셉이 복수할까봐 겁이 나서 요셉에게 진진하게 묻습니다.

창세기 50:18-21에 보면,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요셉이 달라진 면입니다. 자기를 위한 자기가 아닌 겁니다. 언약을 위한 자기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으로 굳어지게 하시면서 긍휼을 주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활동에 의미두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0-11 18:55 
52강-신 9장 6-8절(목이 곧은 백성)1510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9장 6-8절입니다. 구약성경 276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호렙 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

성경 안에만 운동이 있고 그 바깥은 전부다 정지되어 있어요. 근데 이게 세상 사람들은 성경은 그냥 책으로 인쇄되어 있고 바깥에 설치고 활동하는 것은 자기만 이렇게 운동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성경대로 활동하시는 주님의 활동과 운동이 자신의 그 분주함 때문에 이것이 있을 자리가 없는 거예요. 설 자리가 없어요.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해서 열심히 활동한다고 하는데, 신명기에 분명히 나오잖아요. 나올 때에, 지금은 21세기죠. 옛날에 그랬겠지. 옛날에 그랬다는 거예요. 지금은 본인이 바쁘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하나님이 바빴지만 지금은 본인이 바쁘다는 거예요. 근데 생각해보세요. 옛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 바빴습니까? 되게 바빴거든요.

그래, 옛날 사람들이 자기 일이 바쁘다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같이 동감을 해야 돼요. 동감을 해야 합니다. “에이, 신명기 쓰여 있잖아요?” 신명기는 실패하고 난 뒤에 쓴 거예요. 실패하고 난 뒤에, “너희들 이렇게 살았다. 너희들이 살 때는 몰랐지? 나는 다 알고 있었어. 너희들이 이런 식으로 살아온 거야. 너희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야.” 돌이켜보니까, 이제 망하고 보니까 우리들이 ‘아! 나만 생각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오전에 우리 장로님 기도할 때에 참 중요한 이야기했거든요. 노아 당시에 사람들은 노아를 몰랐다는 거예요. 왜 몰랐을까요? 그들이 한가하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노아 당시를 보면 그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되게 바빴어요. 먹고 마시려면 돈 벌어야 되잖아요. 그리고 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를 한 묶음으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혈연관계보다 더 순순한 것은 없다. ‘혈연관계.’

인간이 모든 것을 다 걷어내도 자식과 남편, 이런 혈연관계, 그것만 남아요. 혈연관계, 이거 네 글자잖아요. 이거도 길어요. 이걸 한자로 줄이면 사도바울이 이야기한대로 육이라고 합니다. ‘육.’ 육으로 난 것은 그냥 육으로만 모든 것을 재해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게 육한테, 혈연관계한테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그것 때문에 교회에 오는 겁니다. 교회 올 때, 영 찾으러 오는 것이 아니고 육 찾아, 혈연관계 유지하려고 오는 거죠.

그래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이렇게만 보지 마시고 왜 버렸습니까? 왜 버렸는가 보세요. 혈연관계가 우선이라서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마찬가지죠. 똑같이 마찬가지죠. 그래서 이 마찬가지라는 말을 방금 설교시작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정지되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성경 빼놓고 정지된 거예요. 백날 살아봐야 거기서 거기에요. 똑같이 정지된 겁니다. 양갱 안에 밤톨처럼 맨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어요. 육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10년 믿어도 육. 20년 믿어도 육. 25년 믿으면 육. 50년 믿으면 육. 우리 어머니 연세가 80이 넘었잖아요. 교회 처음 나온 것이 한 40대로 보고 벌써 40년 됐는데 육. 그럼 90되면 희망 있나? 아니에요. 육.

어떻게 아는가, 그저 자식자랑, 또 시동생 돌본 덕분에 잘산다. 근데 이거는 누구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안 그럴 건데요.” “아이고 저는 믿음 좋아서 80돼도 그리 안 할 겁니다.” 그런 소리하는데, 방금 잊었습니까? 우리는 정지되어 있다고요. 우리는 정지되어 있는 거예요. 뛰어야 제자리 뛰기 입니다. 좀 멋있게 보인다 해도 멋있게 보이는 육이지 보이는 영은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제자리 뛰기 안 하면 일은 누가 하느냐, 그래서 오늘 본문에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되어 있고,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거는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두 자로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 앞에 목이 곧은 백성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 앞에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인간을 도외시하고 만들어졌습니다. 창세전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에 관여하거나 간섭할 수 없습니다. 제가 서울 가면 좀 미안스럽지만 어떤 30대 가정에서 숙식을 제공받거든요. 그 분이 차를 타면서 저한테 이야기를 해요. 십계명 이야기를 끄집어냈어요. 교회에서 자꾸 십계명을 지키라고 한다고. 그래서 십계명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만들었다고 하지 말고 우리가 없을 때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만들었어요.

그러면 우리가 없을 때 십계명을 만들었으면 십계명의 취지에 대해서 누구만 아느냐 하면 만드신 분만 알아요. 우리는 몰라요. 우리는 십계명을 지키려면 십계명에 관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지켰다고 우길 수밖에 없는 그런 한계점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편지를 썼을 때 편지 당사자가 설명해주면 괜찮은데, 남이나 옆에 있는 아무리 친한 사람이 설명해줬다 해도 진짜 편지 쓴 당사자가 왔을 때, “나는 그런 뜻이 아닌데?” 이 한마디만 하면 끝나는 거예요.

십계명은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에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주기는 나중에 아브라함의 언약이 430년 후에 줬지만. 만들기는 창세전부터 만들어졌거든요. 그 약속대로. 인간을 배제한 채로. 우리라는 하나님끼리. 우리에 우리끼리가 끼어들지 않거든요. 그렇다면 십계명을 만드신 분이 잘 지키고 온전히 지키죠. 그 분이 누구냐 하면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십계명을 안다는 자들과 십계명을 직접 만드시고 준수하시고 완성하신 예수님 사이에 이게 거리가 생긴 거예요. 차이가 난 거예요.

그 차이가 뭐냐, 그 차이가 분명한 것이, 굳어진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피 흘림 사건, 사형집행 사건이에요. 주님께서는 구원 할 때 고 차이를 앞장세워서 구원을 해버립니다. 그러면 그 차이남에 대해서 우리는 할 말을 잊어버려요. 오해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도 바울에게 예수님께서 계시하기를 너는 율법을 가지고 이렇게 계시해라 해서 나온 계시가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율법을 준 것은 죄를 더하려함이니라. 십계명을 준 것은 무식하다는 것을 더 폭로시키기 위해서 줬다는 거예요. 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리라. 로마서 3장에 보면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의 입을 막고 모든 것을 저주아래 있게 하심이라.

이 언약이 주어진 곳은 똑같은 이런 방식이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 8절에 보면, “호렙 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 너희를 멸하려 하셨다, 우리를 멸망하시는 주님입니다. 아까 우리 솔다 성도님 기도한 내용대로. 솔다 성도님 이름 부를 때 저는 아직도 의심돼요. 솔로몬+다윗이라는 그런 이론이 정답인지 농담인지 아직도 헷갈리는데. 솔다가 됐든 다솔이 됐든 간에, 멸하려 하셨다는 기본을 카펫으로 까세요. 지금 부산 국제영화제에 레드카펫이 깔려 있잖아요. 거기를 지금 화려한 드레스 입고 걷잖아요.

우리는 지금 주님의 멸하심 카펫위에 용서받은 채로 살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오래 살아봤자 소용없고 정지된 상태, 80을 살든 90을 살든 맨 그 혜택 입은 상태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굳어진 상태, 율법체제, 이것을 언약체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언약아래에서 주님만 운동하고 움직입니다. 우리는 정지된 상태에 있어요. 자, 그러한 공식을 아는 것이 오늘 본문 이해에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이런 도움이 돼요. 여기 보면 6절 끝에 보면,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니까 방금 공식을 여기에다 응용해봅시다.

목이 곧은 것은 나중에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가 아니라 ‘목이 곧은 백성으로 정지되어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목이 곧은 백성으로 줄곧 간다. 쭉 간다.’ 성경에서 뭔가 목이 곧다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그걸 고칠 생각을 해요. ‘그래. 주여, 잘못됐습니다. 두 번 다시 목이 곧지 않겠습니다.’ 이래요. 목이 안 곧을 수가 있습니까? 류마티스 걸려서 기브스하고 있는데. 고쳐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만약에 고쳐지게 되면 우리가 운동하는 셈이 돼버립니다.

설교 다시 합시다. 율법은 우리를 배제하고 난 뒤에 하나님끼리 만든 거예요. 취지에 대해서 모릅니다. 모르는데, 우리는 율법을 주니까, 유대인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이거 고쳐서 훌륭한 사람으로 고쳐지면 그때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한 줄로 착각을 하는 거예요. 이게 자기 나름대로 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뭐라고 했던가요? 일점일획이라도 취소됨이 없다 했죠. 그러니까 그 말을 듣고 이제는 더 발작을 시작해요. 일점일획이라고 하니까 다 지킨다는 거예요. 다~아~

그러니까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이 약을 올려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아래 있다는 거예요. 모든 율법을. ALL. 그리고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ALL IN. 오늘 영어 발음 됩니다.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쉬도 때도 없이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꿈속에서라도 위반하면 안 돼요. 꿈속이라도. 그러면 봐준다가 없어요. 저주아래 있느니라. 갈라디아서 3장에서 십자가를 들이대면서 합니다. “니들이 십자가를 알아?” 게 맛을 알아? 하는 것처럼 “십자가를 알아?” “십자가를 알면 니 행함을 내세우냐? 말씀 지킨다고? 사도나 권면을 지킨다고? 니가 십자가를 알아? 그러면 지킨다고 나서는 그런 소리를 안 할 것이다.” 왜? 정지되어 있으니까.

근데 지키려고 할 거예요. 지킨다고 할 때에 비로소 그 전까지는 몰랐던, 우리가 얼마나 목이 곧은 백성인가를 오히려 폭로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전에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던 그것이, 목이 곧은 백성 중의 하나가 이제는 지키면서 그 차이점이, 어떤 차이냐? 이제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약 안에 언약을 완성하실 인물의 내용에 대해서 언약 안에 담겨있습니다. 근데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보게 되면 문자로 되어 있으니까, 문자로 보기 때문에 내가 최선을 다해서 지켜서 멋있게 된 나를 성경 안에서 그걸 끄집어내서 상상하게 되어 있어요.

십계명을 딱 줘버리면 아, 옛날에는 못 지켰는데 지금은 지켰습니다. 이제는 당당하게 하나님이여, 영생을 얻을 권리를 확보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이 그랬거든요. 어릴 때부터 십계명 다 지켰습니다. 이게 뭐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성경 몇 개 지켜놓으면 이제는 뭐 월요일부터 복이 막 오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말이죠. 어떤 권리라도 확보된 것처럼.

근데 성경 안에는, 성경과 이 말씀의 언약 안에는 말씀을 지킨 분이 들어있어요. 그러면 들어있으면 우리가 들어있는 분을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게 안 돼요. 왜냐하면 언약 안에 들어있는 분은 우리가 기존의 혈연관계, 아담부터 내려오는 혈연관계 사람들에게는 포착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포착이 돼요. 근데 아브라함은 아브람도 미리 예측을 못했어요. 아브라함은 본인이 알아요. 근데 내가 아브라함 될 줄은 처음 부를 때부터 미리 안 것이 아니에요. 살다 보면, 갑자기 노래가 생각나네. 살다보면 주께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 되게 하세요.

아브라함은 본인이 본인의 것이 아니고 탈취당한 거예요. 강탈당한 거예요. 납치당한 거예요. 보쌈 당한 거예요. 주님의 언약 앞에 홈빡 둘려 쌓인 거예요. 지 인생도 지 맘대로 못해요. 본의 아니게 아브람 인생은 청산하고 아브라함 인생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본인도 몰랐는데 남은 알 수가 없죠.

아브라함과 아브람의 차이가 뭐냐, 예를 들어달라고 하면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 아브라함 생각이죠. 왜냐하면 의인이 있는데 죄인과 함께 멸망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근데 사실은 그 소돔과 고모라에 자기 조카가 있어서 조카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요걸 사자성어로 혈연관계라고 했죠. 고걸 한자로 하게 되면 육. 꼭 혈연관계라는 그것을 사람이 끊을 수가 없어요.

보통 부부싸움 할 때 아버지가 “이놈의 자식! 나가 죽어라! 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 나가 죽어라!” 그러면 엄마가 “아이구 여보 자식한테 그거 할 소리가 아니지. 니 아버지 술 먹으면 하는 소린지 니 알지?” 하고 붙들죠. 아니 자식보고 아버지가 나가 죽으라고 한다고 해서 정말 나가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그런 뜻이겠어요? 남의 자식 같으면 그런 소리 안한다는 그런 뜻이잖아요. 이게 혈연관계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불 심판을 내린다고 했어요. 이제는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끝났어요. ‘아, 마땅히 멸해야 되는 분이 멸하는 것이 마땅하구나.’ 어?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조카 롯이 살았어요. 창세기 19장에 보니까 이래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조카 롯을 살렸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 본인 생각 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있는 장차 언약 완성자가 언약 안에 들어 있잖아요. 요새 말로 번역하면 예수님을 생각하사 아브라함도 조카 롯도 구원했느니라. 그러한 경우가 생기는 겁니다. 이게 언약입니다.

야곱 이야기는 지난 시간에 했어요. 거짓말 안 하고 착하게 살던 에서는 지옥가고 야곱은 천국가고. 이것도 야곱 본인도 예상도 못했죠. 얍삭하게 살았는데 주께서는 그걸 묻거나 따지지 않고 천국가게 하시고. 에서는 그냥 바르게 살았는데 지옥 가버리고. 5절 끝에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야곱과 에서의 관계에서는 거짓말해서 구원받고 야곱의 관계에서는 뭐냐 하면 야곱 안에는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요셉이 들어있어요. 요셉이.

요셉 본인의 인생이 아주 우여곡절이 많아요. 제가 지금 예를 드는 것은 처음에 이야기했죠.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사항은 정지된 우리는 알 수 없다고. 그리고 우리는 자꾸 언약을 보고 지키려고 하지 그 안에 우리에게는 정말 낯선 분이 언약을 스스로 성취한다는 사실. 운동해서. 그 점을 우리가 모른다 했죠. 모르는데 제가 알려드리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언약을 인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어떻게 본인도 예상 못한 인간으로 달라졌는가,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야곱이야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죠. 바뀌면서 생긴 현상이 뭐냐 하면 야곱이나 이스라엘로 야곱 본인이 절대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겁니다.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야곱 말고 야곱 언약에 의해서 태어날 그 후손 가운데 요셉이라는 인물로 인하여 야곱과 형제들이 구원을 받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구원받고 이삭은 야곱을 통해서 구원받고. 이 말은 뭐냐 아브라함은 내 행함으로, 내 의로움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신명기 말씀대로 나는 목이 곧은 백성인데, 목이 곧은 백성에게 언약이 덮어지니까, 언약이 목이 곧은 백성까지 건져낼 수 있다는 그 사실을 미리 앞당겨서 아브라함 인생 속에 집어넣은 겁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인데, 시편 105편에 보면 요셉에 대해서 나왔어요. 요셉의 그 대목을 보면 이렇습니다.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라. 그가 기근 가운데 한 사람을 앞서 보냈다. 앞서 보냈는데 종으로 팔렸도다. 두 발이 착고에 상하며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 해놓고 19절에 나오는 말씀이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러니까 요셉은 본인이 설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은 정지 상태에 있어요. 요셉으로 하여금 갈 길을 질질 끌고 가게 하신 것은 말씀입니다. 언약 말씀이에요. 언약 말씀대로 하니까 요셉 본인 입장에서는 굉장히 낯설고 기이하고 이상한 거예요. 아침에 제가 메일 이야기를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만, 그 편지 내용을 다 읽어드리지는 못했지만 그 뒷부분에 그쪽 교회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근호 목사는 지만 성령 받았나? 이래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이거는 수 천 번 들었던 이야기 아닙니까? 지만 믿나? 지만 신자이가? 지만 목사가?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자기만 그러냐고.

그걸 요셉한테 물었다 칩시다. 요셉! 니만 신자냐고 묻게 되면 요셉이 뭘 소개 하냐면, 그래. 나만 신자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낯선 분을 소개해요. 하나님의 언약을 소개하고 언약 속에 있는 예수님을 소개한다고요. 그게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만 증거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니는 뭐했냐? 나는 질질 끌려갔죠. 자기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까. 어디 앞에서? 남들 앞에서? 아니요. 언약 속에, 언약 속에 계신 예수그리스도 앞에서 목이 곧은 백성이에요. 그래야 한쪽은 긍휼을 주고 한쪽은 긍휼을 받잖아요.

제가 안양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어요. 성도는 사람 앞에 죄를 짓지 않습니다. 성도는 왜 사람 앞에 죄를 짓지 않느냐 하면 주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엔 사람 앞에 죄인이라고 할 게 없어요. 주님 앞에 죄인이에요. 만약에 사람 앞에 죄인이라면 용서가 그 사람 앞에 용서를 받으면 되고 내가 누구한테 죄 지었으면 그 사람한테 용서를 받으면 되고 내가 누구한테 피해를 입혔으면 그 사람한테 용서를 받으면 되고 또 용서를 하면 되거든요.

그러나 모든 용서는 둘 다 지가 누군지를 모르는 상태거든요. 니, 나한테 피해를 줬잖아? 라고 해도 그 소리가 니가 오해한 소리라니까요. 남한테 해코지하는 것이 남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한테 해코지하는 것이 남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라니깐요. 자식에게 매를 드는 것은 자식을 미워함이 아니고 오히려 자식을 사랑함이에요. 그러나 자식을 방치함은 도리어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잠언서에 나오잖아요.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자기가 설치고 자기가 행동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성경을 보니까 모든 게 오해입니다. 하나님. 최선을 다했는데 저한테 이래 나오시면 곤란하죠? 이런 식으로. 자기는 최선을 다했다는 겁니다. 최선을 다해도 목이 곧은 백성이고 최선을 안 해도 목이 곧은 백성이에요. 신약에 십일조 없다 하니까 그럼 십일조 하지 말까요? 해도 목이 곧은 백성이고 안 해도 목이 곧은 백성이라니까요.

요셉은 말씀에 의해서 살았는데, 나중에 결과를 보니까 한 아버지와 형제를 살리기 위한 조치로써 자기가 거기에 말려든 거예요. 보니까 자기가 예상 못한 국무총리가 됨으로 말미암아 그 효과와 그 영향력은 누가 입느냐 하면 자기를 팔아먹은 형들이 효과를 보는 거예요. 그 형들도 동생 만날 때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당부에 당부를 합니다. 찢고 다시 하고 다시 싸인 받고 합니다.

나중에 아버지 죽고 난 뒤에 니 나한테 복수 안 할 거지? 요셉도 참 그 이야기 들으니까 답답해가지고 이렇게 나와요. 형들이여, 지금 형 앞에 내가 보입니까? 나는 주님이 보이는데요. 주님이 당신들 앞서 보내서, 지금 당신과 내가 우리 인간들끼리 죄 지었냐, 안 지었냐 하는 그런 논리가 아닙니다. 주님이 당신들 살리기 위해서 나하나 희생시켰는데 뭐 이야기할 것 있으면 주님보고 이야기하세요. 저한테 하지 마시고.

형제들과의 성도들과의 교제라 하는 것은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유를 해야 교제가 돼요. 그냥 교제를 해버리면 한 사람은 덕을 베푼 자고 한 사람은 부담이 되는 자에요. 아, 언제 저거 갚아줘야 되는가? 하여튼 상견례 하면서 골치 아파서..전부다 경우 바른 사람이 되어가지고. 사돈이 뭐 해주면 해주고 또 해주면 해주고..어디까지 해야 하는지..추석 되어 가지고 소쿠리 보내면 이쪽에서는 과일 보내고. 이번 추석에도 또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아이 정말!! 얼마나 경우들이 바른지. 이 목이 곧은 백성이 목이 다 풀렸어요. 우리는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모든 성경이 오해고 오해니까 실천한다는 것이 전부다 자기 마일리지 쌓이고, 자기 성화되는 것, 목이 곧은데다가 목에 기브스를 해요. 목이 기브스를 하게 만들어요.

“십자가 앞에 주여 제가 오해했나이다.”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행하심으로 결과물이 저라는, 목이 곧은 백성도 구원됐다는 그런 주님의 과제물로 이렇게 살아가는데, 거기다 자꾸 내 행함을 끼어 넣은 것에 대해서 참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언약이 없었더라면 당연히 주께서 오늘 8절 말씀처럼 너희를 격노케 해서 멸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멸해야 됩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 유일하게 운동하시는 분은 언약을 이미 창시하시고 언약대로 이끌어내시는 그 분이 우리와 함께 동행해주시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동행! 최성수죠. 누가 나와 함께 동행 할까? 그거는 알 필요 없고요. 이 가을에 참 좋은 노래에요. 가을에 들으면요. 다방 마담들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최성수의 동행이에요. 최성수의 동행처럼 동행하시는 분, 독자적으로 살지 말고, 동행하시는 분이 늘 곁에 동행하시는데, 그 분은 언약대로만 동행하십니다. 니 목이 곧은 백성인데 봐준다. 그 봐줌이 계속, 평생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동행자를 잊어버렸습니다. 혼자 설쳐야 구원되는 줄 알았습니다. 남하고 비교하니까 잘나 보이고 훌륭해 보이고 믿음 좋아 보입니다. 십자가 앞에 설 때에 하나도 못 지키면 저주받는다는 이런 형편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