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강-신 9장 4-5절(하나님의 의)1510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9장 4-5절입니다. 구약성경 276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인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더러운 인간들이 오게 되면 천국이 지옥으로 변모되겠죠.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데, 우리가 만들어내는 의는 하나님께서 반입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든 의를 인정하지 않아요.
우리가 만든 의는 왜 이게 잘못된 것이냐 하면은 우리 자신이 의로워지기 때문에 문제가 돼요. 자신이 착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데, 사람이 착하고 싶은 것은, 그것은 자기의 내부에 더러움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커버하기 위한 위선적인 행위가 되는 겁니다. 착해야 된다. 왜, 그런 말하는 내가 안 착하기 때문에 보다 더 착해야 되는 거죠. 보통 사람들 사귀게 되면 멀리서 볼 땐 다 착해요. 근데 가까이 오게 되면 괴물입니다. 멀리서 보면 천사인데, 남들한테는 천사인데, 자기 집안에서 하는 것 보면 괴물이에요.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고 싶은 것은 그겁니다. 멀리서도 괴물이고 가까이서도 괴물이라는 것을 알자 이 말이죠. 뭐 그 인간이 그 인간이지 인간이 어디 가겠어요? 사람 보기에도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더구나 괴물덩어리죠. 그런데 그 괴물이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그 괴물들이 꼭 자기의 의로움을 또 이렇게 내세우니까 이게 환장할 일이죠. 가만히 있으면 그래도 중간이나 가지 꼭 나대가지고 착한 척을 하고 있으니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특히 교인들. 교회 다닌다고 착한 척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똑같은데, 돈 주고 하는 것 그거는 유별난데, 꼭 그런데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합니다. 물론 돈 1~2만원 같으면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십억 같으면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결국 교회도 돈 놓고 돈 먹기죠. 애들은 가라는 식이죠. 10원 바쳐서 30배 얻는 그런 식으로 하는데.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자기 자신이 소설을 쓰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스토리를 써요. 교회 나와서 성경을 보고 들으면 인간 속에는 무엇을 창작하느냐 하면 연극무대를 창작을 해요.
1차는 이 세상은 닫혀있는 문. 조건이 닫혀있는 거예요. 두 번째는 닫힌 연극무대에서 저쪽 한쪽에는 천국을 만들어놓고 천국 방. 이쪽은 지옥 방을 만들어놓아요. 놓고, 그 중간에는 뭐냐 좋은 일, 웃는 일도 생각해놓고 또 우는 일도 생각을 해요. 그러면 자기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 관객석에 앉아있습니다. 관객석에 앉아있으면서 그 무대에 누굴 올려놓느냐 하면 특히 선배들, 자기 주변사람들을 무대에 올려놓아요. 올려놓고 뭘 바라보느냔 하면 나쁜 짓 하면 벌 받는 경우를 찾아내고, 착한 일 했을 때는 복 받는 경우를 찾아내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저쪽 방은 천국 방이고 이쪽 방은 지옥 방이라면, 고 나쁜 짓 하는 인간들이 지옥으로 갈 때 관객석에 있는 우리는 흐뭇해지고 이 세상에서 나쁜 짓을 해서라도 지옥 가는 그런 연극무대는 상상을 안 해요. 착하게 살았더니만 하나님이 보상을 해주는 쪽으로 천국 보내면 우리는 흐뭇해하는 겁니다. 심청전, 춘향전, 옛날 동서양의 고전들 전부다 반전이 있습니다.
그걸 영웅설화라고 이야기하는데,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나쁜 쪽 집안에서 자기 집안을 모함 해가지고 억울하게 쫓겨났지만 이 영웅적인 사람은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더욱더 인간성이 업그레이드 되어가지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적들을 물리치고 아버지 어머니 행복을 되찾아 와서 드디어는 화려한 귀향, 성공적인 삶을 보여준다. 전 세계에 있는 설화 이만~이만오천가지를 연구했던 러시아의 학자는 모든 스토리가 똑같다는 겁니다. 괜찮았는데 억울하게 어려움을 당했다. 하지만 영웅은 여기서 좌절하지 않는다.
기어이 다시 자기의 자질과 능력을 키워서 자기 힘으로 옛날에 잃어버렸던 영화 그 이상으로 다시 거듭나서 온 천하로 하여금 선한 것이 승리한다는 그 교훈을 다 언급한 거예요. 그것이 모든 민족들 대대로 역사를 따라서 통속적으로 다 전해 내려와요. 도장하다가 적들에게 당했던 그 도장의 원장 아들이 나중에 금오산에서 도사를 만나서 무술을 연마하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중국집에서 만두 먹다가 원수하고 한판 싸워가지고 이겨내는 것. 그리고 ‘킬 빌’ 이라는 영화에 보면 칼 좀 쓰는 여자가 사무라이 칼 갖고 원수 갚는 것. 모든 드라마가 왔다 장보리고 갔다 장보리에요. 모든 드라마가 선이 승리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가짜에요. 이게 바로 가짜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내용을 언급한 적이 없어요.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사람들이 그런 것들만 찾겠다는 것은, 심청전이나 춘향전이나 백설 공주이야기나 그런 것들을 찾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거예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게 모방imitation 때문에 생긴 겁니다. 흉내를 내는 거예요. 인간의 교육이라 하는 것은 항상 모방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비슷하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저는 어릴 때 학교에서 제일 싫어하는 시간이 공작시간이었는데, 모형비행기를 문방구에서 사가지고 고무줄 칭칭 감고 본드 바르고 해서 날리는데 다른 애들은 잘도 나르는데 내가 하면 땅에 곤두박질하고 날지도 않고 짜증나고 돈만 날리고 했던 그런 기억이 나요. 근데 모형비행기의 부속품이 기껏해야 스무 가지도 안 될 거예요. 근데 지금 현대 비행기는 부속품이 백만 가지가 넘어요. 백만 가지가. 너무 구라가 심한데 하여튼 잘 모르니까 많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현대 자동차의 부속품이 이만가지랍니다. 차이점이 뭐냐 하면 모형비행기는 이게 안 간다는 거예요. 고무줄로 해봐야. 근데 실제 비행기는 이게 난다는 겁니다. 수 백 명을 싣고 난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성경을 보고 또는 어떤 교훈을 듣고 자기 마음속에 자꾸 모형을 만들어내요. 가짜 자아상, 가짜 미래상, 가짜 자기 소설, 자기 시나리오, 자꾸 하루 종일 만들어내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주인공이 돼서 내가 영웅이 되는 것, 아까 영웅이야기 했잖아요? 좌절을 딛고 결국은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영웅으로 다시 거듭나는 것. 그런 쪽으로 매일같이 거기에 쏟아 붓습니다. 안 된다는 것을 만류하고 교회에서 철야를 했더니만 드디어 기어이 하나님께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살아났다. 그런 식으로 자꾸 긍정적인 마인드를 심어주는 거예요. 교회에서. 그게 전부다 가짜인데.
그게 왜 가짜냐 하면 인간의 모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모델이 되는데, 이거는 제 이야기가 아니고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의 본성이 뭐냐 하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자꾸 올라가요. 저 높은 곳을 위하여. 그래서 나온 노래가 위~아래~ 위위~ 아래~ 높은 곳을 향하여 자꾸 올라간다고요. 그게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입니다. 그 높은 곳에다 자기 의로움에 플러스 의로움.
그래서 우상은 뭐냐, 우상은 덧셈이에요. 보태기만 하면 돼요.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빼기입니다. 작살나는 거예요.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썼는데 그것마저 작살나게 만들어버려요. 그게 연예인의 세계에서 얼마나 인기 많았습니까? 그 인기 많았던 그런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모함당해서 무너지는 것. 결국 직업이 목사가 됐어요. 김종찬. 또 누가 있어요? 한두 명이 아니에요. 굉장히 많아요. 자신의 의를 누가 쥐새끼가 와서 갉아먹어줘야 해요. 니 의는, 이거는 하나님의 천사 접수 창에서 안 받습니다.
우리가 만든 의는 받지를 않아요. 받지를 않는데, 지금도 교회마다 자기 착함과 의로움과 자기의 의를 마일리지 쌓는 일에 온 투자를 다 하고 있어요. 기도하고 애쓰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남 도와주고 이 모든 것이 마일리지가 쌓여가지고 내 대(代)에는 효과를 못 보지만 내 자식들한테는 참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거는 업보사상이에요. 이거 불교입니다. 불교가 그래요. 선을 쌓으면 언젠가는 복이 되어서 돌아온다는 거예요. 그거는 저기 갓바위나 동화사에서 알아봐야 해요. 전혀 그거는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왜 인간은 자꾸 모방을 하는가, 그 모방의 모델이 있어요. 이 모델이 문제입니다. 그 모델이 뭐냐 하면 착하면 복을 받는다 하니까 주변의 복된 사람들을 찾아봐요. 그러면 내가 이만큼 착한가 안 착한가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면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내가 가지게 되면 지금 하나님께서 나한테 복을 주고 있는 중에 있다. be동사+ing현재진행형이거든요. 일이 잘 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일이 못되면 나는 망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거는 제가 아까 연극무대이야기 했죠. 천국과 지옥이 있는데, 지옥은 나쁜 짓 한 사람이 가고 착한 짓 한 사람은 천국 간다. 자기가 만든 무대 가지고 그거를 단정을 짓고 말아요. 근데 성경은 어떻게 하느냐, 이게 반대로 갑니다. 반대. 그 반대되는 예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만 하겠어요. 그 반대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야곱과 에서이야기입니다.
미리 말씀드릴게요. 거짓말하는 쪽이 천국에 갔고, 거짓말 안하고 순박하게 살았던 형 에서는 저주받아 지옥 갔습니다. 이거 어떻게 하렵니까? 이거 어떻게 하겠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교회 주일학교 아이가 딜레마에 빠졌어요. “엄마 목사님이 거짓말 하라고 했어요. 아빠는 거짓말 하면 벌 받는다고 했잖아요?” 왜 우리가 거짓말을 해야 되는지 해야 될 이유가 있어요. 거짓말 아니라고 하는 그것마저 거짓말이 되기 때문에.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속 눈만 뜨면 거짓말 하고 있는데 거기에다가 어떤 특정 거짓말을 돌출시켜버리면 나머지기는 거짓말 아닌 것처럼 위선을 떨게 되잖아요.
그거를 방지해야 해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남한테 협박과 공갈을 안 받는 방법은 매일같이 내가 협박과 공갈을 나한테 하면 돼요. 율법으로. “니가 그런 낯짝으로 계속 살려고 하나? 인간아!” 내가 나한테 쥐어박으면 돼요. 내가 나를 쥐어박는 그 아픔이 크면 주변에서 하는 시선 같은 것은 이거는 별로 아프지 않아요. 워낙 자기한테 맞았던 맷집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한테 욕하는 것은 욕도 아니에요. 내가 나에게 매일같이 욕해야 해요. “니가 또 바벨탑을 쌓는구나.” “니가 또 마일리지를 쌓는구나.”
그거 마일리지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괜히 마일리지 해봐야 대한항공 좋은 자리 주지도 않고. 주지 않는다고 술 먹고 난동 피워서 바비킴처럼 되고. 마일리지 자체가 하늘나라에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근데 옛날에 착한 일 많이 했으니까 지금 어떤 보상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자꾸 이런 식으로 연극이나 자기 스토리를 꾸미지 마세요. 그래서 이 어려운 말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본질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결과를 먼저 건지는 것이 본질이 아니에요.
본질은 주께서 우리를 하나의 어떤 과정에 몰아세울 때 본질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성경에서 말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현상이 곧 본질이 된다는 어려운 말이 있는데, 그게 뭔 뜻이냐 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체가 의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주께서 하고 계십니다. 자, 어떻게 하느냐, 다시 에서와 야곱으로 돌아와 봅시다. 야곱은 거짓말을 했어요. 거짓말해서 천국에 갔습니다. 거짓말하는데 여기에 공모자가 있죠. 그게 단독 범행이 아니고 자기 엄마하고 단짝이 되어서 아버지를 속여서 천국권을 따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강조하는 것이 뭐냐 하면 거짓말을 하더라도 나는 거짓말쟁이라는 그 수치심을 이겨낼 수 있는, 너 자신보다, 너의 의로움보다 더 중요한 의가 있음을 너가 믿어라. 이 말입니다. 내가 유지하려고, 내가 갖추려고 하는 그 의로움과 나의 자존심과 나의 가치와 나의 체면,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을 능가하는, 그것보다 더 월등한 다른 의가 따로 있음을 너가 간파한다면 거짓말해서라도 놓치지 마라는 겁니다. 그게 장자의 명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에서를 보게 되면, 창세기 25장이야기입니다. 에서는 그냥 순박한 사람이에요. 보통 사람입니다. 순박한 사람이거든요. 그냥 사냥하다가 배고팠어요. 평소에 단팥죽이 먹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팥죽을 먹고 싶었는데 그걸 미리 동생이 간파를 해가지고 팥죽을 미리 끓여 냄새를 온 집에 다 피워 놨습니다. 사냥하고 온 뒤에 팥죽 냄새가나니까 물어볼 것도 없어요. “야야 팥죽 도!” 동생 야곱이 하는 말이 “형 이제부터는 형이 동생하고 내가 형 해주는 조건하에 팥죽 줄게.” 지금 먹고 싶은데 그게 뭐가 문제겠어요. 형이 하는 말이 “그래, 그래. 니 맘대로 해라. 빨리 팥죽이나 도!” 그래서 팥죽 먹었어요.
팥죽 먹고 난 뒤에는 형, 동생이 팥죽 한 그릇에 팔리리라고는 자기도 상상도 못했거든요. 그 팥죽 한 그릇이 뭔데 타고난 서열을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사람이 하나의 영웅이 된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자기 지혜와 면학과 오디세이의 영웅에 보면 자기 수수께끼를 풀어요. 스핑크스를 보고 아침에는 세발로 걷고 하는....하여튼 그런 모든 역경을 딛고 자기 힘으로 모든 결과를 얻어내는 것. 이게 인간은 타고났어요. 이게 자기의 영웅스토리입니다. 그런 내가, 그렇게 잘난 내가 거짓말쟁이요, 속이는 자요, 공모자요, 그저 뭐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바뀌고, 그런 인간으로 취급받는 것을 우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그 추석특집에 안 보려고 했는데 보니까 ‘허삼관’이라는 영화를 해요. 보면서 제가 은혜를 받았어요. 어떤 은혜를 받았느냐 하면, 종달새라는 것이 남의 자식을 키우는 것이 종달새인데, 아버지가 지 자식인 줄 알았더니만 같은 동네의 바람둥이의 아들을 키웠던 거예요. 근데 나중에 아들이 알았는데 문제는 부잣집 아버지한테 가서 “아버지!”라고 하니까 “야야 내 호적에 니 이름 없다. 가라!” 니 키워준 아버지한테 가라고 보내버렸어요. 귀찮으니까 가라고 했어요. 가난해서 피 뽑아서 사는 가정인데, 피가 그만큼 돈이 되는 줄 몰랐어요. 옛날이니까. 만두가 먹고 싶은데 만두를 못 먹었어요. 근데 아들이 부잣집 자기 아버지한테 이런 조건을 합니다. “아버지. 만두만 사준다면 두 번 다시 오지 않겠습니다.” 바로 저거다!! “팥죽만 준다면 형 니가 가져가도 괜찮아.” 하는 것처럼. “만두만 사준다면 다시는 아버지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철없는 걔가 순박하게 이야기해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를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한테 무슨 거래를 했습니까? “하나님. 이번 일만 잘 된다면 내가 예수 믿겠습니다.” 그런 흥정 안 했어요? 전혀 천국은 안 중요한데 나한테 중요한 것을 걸어놓고 이것만 해주신다면 어떤 것도 나는 다 용납하겠다는, 이래 되는 거예요. 임재범씨가 불렀던 ‘고해’라는 노래를 보세요. “이 여자만 허락한다면 나는 뭐든지 하겠습니다.” 하잖아요. 그게 얼마나 인간적이에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자기가 했던 모든 위로는 사실은 세상에 모든 유혹 한 마디에 와르르 다 무너지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을 원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천국갈사람,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성경이에요. 성경은 어느 누구도 천국갈만한 사람은, 자격자는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교회 50년 다녀도 소용없어요. 예수 백번 믿어도 소용없어요. 아무도 못 갑니다.
아무도 못 가는데 오늘 본문이 있어요. 하나님의 맹세가 있어요. 여기 오늘 본문 5절 끝에 보면 “내가 너희들을 이끄는 것은 너희들의 착함도 아니요. 너희들의 의로움도 아니다.” 무슨 말입니까? “착해지려고 하지 말고 의롭게 되려고 하지 마라. 의롭게 되려고 교회 다니고 예수 믿고 하려는 자체가 나는 너를 수상하게 본다. 니 뭐 노리지? 정작 니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근거 삼아서 뭔가 그냥 달라고 하려니까, 미안하니까 착한 일 많이 해놓고 그걸 빌미삼아 정작 니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니가 지금 그럴 셈이죠. 나 그 수법에 안 속아 넘어간다.” “그럼 저는 뭘 해야 합니까?” “니가 악하고 니가 목이 곧다는 사실, 니는 의롭지 못하다는 사실, 그것을 그냥 인정하면 된다.”
여기 4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그 다음에 그런 소리는 하덜덜마라. 내가 착해서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 섬겨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 소리를 하덜덜마라. 그런 소리는 전부다 가짜입니다. 우리는 악하다는 사실을 통보해주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놓고 구원해주죠. 이것은 하나님과 거래해서가 아니라, 너와 흥정해서가 아니라, 너의 착함을 빌미로 해서 주고받아서가 아니라, 니가 구원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다시 말해서 합치면 예수님이 되거든요. 내가 예수님과 약속한 바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약속 때문에, 예수님의 명예와 체면 때문에, 예수님 이름 봐서 너를 그저 천국에 넣어줄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앞에 설치된 무대에 인간들은 빠지고 예수님만 거기에 있어서 십자가 지시고, 그 예수님이 무대에서 관객석에 있는 우리보고 호출하십니다. “너 이리와!” “너 이리와!” 끌어내서 예수님과 우리를 늘 대조시키고 대비시키는 생활을 하는데 그걸 가지고 네 자로, 사자성어로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를 비교하는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거짓말해서라도 얻고 싶은 욕심쟁이라는 것을. 우후훗~ 욕심쟁이! 욕심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시고. 단지 그것뿐이에요.
마일리지 쌓지 마세요! 여러분들을 망하게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주제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뭔지도 모르면서 남들 뒤꽁무니 따라다니기 급급합니다. 성공하면 칭찬받고 실패하면 밉상 받는 세상에서 영웅 되기 위해서 애쓰는 우리의 모습. 그러나 그런 모습이라도 주님께서 십자가로 용서하셨기에, 이제는 예수님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