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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61강-몸과 귀신(고전10;17-22) 1510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0. 6. 07:26

2015-10-04 12:37:34 조회 : 110         
   몸과 귀신151004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몸과 귀신(고린도전서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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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10-04 13:22 

몸과 귀신

2015년 10월 4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0:17-22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10: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10: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10: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10: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사도 바울은 인간들이 알고 싶지 않는 것을 언급합니다. 그만큼 평소에 인간들이 진짜 중요한 것을 빠트리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몸 위주로 태어납니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교육과 양육들은, 어디까지 ‘내가 잘 되는 것이 관건’이라는 식의 내용들입니다.

왜 그런 것으로 해석이 되느냐 하면 태어날 때부터 몸은 수상한 면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수상한 몸이란 곧, 정신적으로 낯선 권세의 지배를 의식하게 되는 그런 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살려내기 위해 ‘도덕적 실패’를 줄이려고 애를 씁니다. 즉 착하게 살면 복받고 나쁘게 살면 벌받는다는 식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말입니까?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도덕적 성공을 기대하는 이 생각은 어디까지 철이 없는 생각이면서도 위선적인 생각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에 온전히 대처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가 군에 가게 되면 인격성을 여지없이 파괴당합니다.

‘전쟁하는 기계’로 재정비됩니다. 이유나 목적이 어떻게 되었든 적을 죽여야 내 쪽이 사는 식의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개인의 품위나 인격이란 고려 대상이 아니됩니다. 그 때까지 유지했던 자아만의 도덕적 가치가 무너져내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본인이 “아니요!”라고 반항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 곧 ‘던져진 상황’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이 사회가 그런 사회입니다. 개인의 품위나 사적 공간을 최우선적으로 우대해주는 사회가 아닙니다. ‘싸워야 돈이 되는’ 사회입니다. 모든 사회 구석구석이 그러합니다. 어느 위치에서 싸움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이나 의지는 용납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원래 자연이란 선과 악이 없이 모든 것이 운명적으로 흘러가고 변화되는 사회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이 운명에 대해서 관여할 처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어느새 인간은 이 자연이나 사회에서 자기만을 위한 질서를 따로 분리해서 자기 것으로 삼습니다.

거기에게 법을 만들고 규칙으로 일관성을 세웁니다. 그러면 본인에게는 본인의 행위의 모두 의로운 일이 되어버립니다. 자기가 만든 변명 안에서 자기에게는 더 이상 정당하게 되어버립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다”라는 성질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는 것이 왜 그리 비참한지요.

경제적인 면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정신으로 인간은 살면살수록 비참을 더 깊게 인식합니다. 사는데 지쳐버립니다. 하지만 슬퍼도 살아야 합니다. 자기로서는 세상의 권세와 질서에 대해서 손쓸 수 없습니다. 던져진 채로 살아가야 합니다. 도대체 어디가 문제입니까? 사도 바울은 인간들이 빠트린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귀신의 존재’와 연계된 ‘하나님의 노하심’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몸에게 담긴 내용을 보다 심도있게 알려줄 특수한 몸의 등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특수한 몸’을 준비했습니다. 그 특수한 몸이란 외형적으로 일반인과 조금도 다를 것없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분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이 생각해두신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노하심으로 인해 버림받는 고통과 저주와 심판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를 경험하셨습니다. 동시에 그런 저주를 거쳐 하나님이 준비해두신 긍휼과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여유롭고 풍성한지도 알고 계십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진정한 죽음과 진정한 생명을 맛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만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서 일반인들의 기억이란 자신의 도덕적 성과를 근거로 ‘자기 위주’로 세상이 잘풀릴 것으로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기억에 준해서 미흡하게 마저 채울 것을 고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신에게 빌게 됩니다. 곧 귀신에게 비는 겁니다. ‘신’ 혹은 ‘하나님,’ 혹은 ‘예수’, 혹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하소연해보지만 모든 것이 자기 기억에 준해서 잘되기 위해 조치를 본인들이 시도해보는 겁니다. 이사할 때나 혼담이 오고갈 때, 부동산 구입이나 가정사에서 병치레가 있거나 아이들 학업 성적이나, 개업이나 사업을 새로 시작할 때만 어김없이 귀신에게 제사합니다.

그 버릇을 그대로 교회까지 끌어옵니다. 교회 헌당식 할 때, 당회장 새로 뽑을 때나, 각종 직분식 할 때나 추도식 할 때나 선교사 파견할때도 어김없이 예배를 드리므로서 귀신에게 예배하게 됩니다. 모든 게 자신에 관한 것이 자신의 기억에 준해서 잘 되기를 원하기에 나오는 행위들입니다.

반면에 특수한 몸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사적인 기억을 ‘우리의 기억’으로 전환시켜주십니다. 그 기억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사랑하기에 버리고 저주한 기억’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들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도 또한 특수한 몸으로 전환시키십니다.

그 작업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보다 더 강한 주님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이로서 성도의 내부는 투쟁의 장이 됩니다. 나의 기억이냐 아니면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서만 유일한 정립된 그 기억이냐를 통해 평생을 싸우게 됩니다. 시편 106:28-29에 보면,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한평생은 예수님을 해내신 결과물로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심만 소개하는 일생입니다. 인간보다 더 강한 자, 곧 예수님 손에서 성도는 이미 영생얻은 자로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어느 누구보다 더 곧 나 보다 더 강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 예속됩시다.

예속이란 곧 주님의 주신 운명에 함몰되어 살아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그동안 귀신 안에서 살아갔음을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0-05 07:08 
59강-고전 10장 17-22(몸과 귀신)15100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0장 17-22절입니다. 신약성경 275페이지입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사도바울이 말을 할 때 우리가 평소에 시사적으로 관심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해요. 우리가 언제 귀신에 대해서 궁금해 했습니까? 언제 우리가 주의 잔, 주의 떡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졌습니까? 일반 사람들은 관심두지 않는 것에 대해서 사도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해줄 때 이 취지가 어떤 취지인가? “너희들이 살아가면서 뭔가 빠트린 것이 있다.” 하는 겁니다. 놓친 게 있다는 거예요. “정작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딴 데 있는데 너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그것만 챙기면 ‘나도 살만큼 살았다.’ 이렇게 자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가 빠트린 것을 보충하고 채워주신다.”는 겁니다.



뭘 빠트렸는가? 요즘같이 똑똑한 세상, 모든 정보가 넘치는 세상에서 빠트린 것이 뭐가 있을까? 그 빠트린 것을 본문에서 여러 가지 단어의 조합으로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17절에 ‘떡’이 나오고 ‘한 몸’이 나오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나오고, 그 다음에 ‘제단’이라는 말이 나오고, 19절에 ‘우상의 제물’이라는 말이 나오고, 20절에 ‘이방인의 제사’가 나오고 특히 ‘귀신’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여기에 ‘귀신’이라는 단어가 나오거든요.



이런 단어는 교과서에 전혀 안 나오는 단어에요. 귀신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계속해서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이 나오고, ‘주의 상’ ‘귀신의 상’이 나옵니다. 중간에 귀신이라는 말을 제가 강조했잖아요. 교과서에는 안 나오는 귀신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특히 22절에 보면 놀라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을 노엽게 한다.’ 또는 ‘주님을 화나게 한다.’는 단어가 나와요. 귀신이라는 단어, 그리고 주님을 화나게 했다는 그 말을 짝을 만들어봅시다. 짝을 이루었다면 우리가 뭘 빠트렸느냐 하면, 귀신의 존재를 우리가 평소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상에 빠져서 삽니다. ‘귀신이 어디 있어?’ 하고 귀신이라는 존재를 도외시하고 살아가고 그것으로 인하여 지금도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입장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이야기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화나게 한 줄을 네가 모르지? 아마 모를 거야. 왜? 귀신이라는 존재를 놓치고 살기 때문에 지금의 네 모습이 하나님을 화나게 한다는 것을 네가 감 잡지 못하고 있는 채 살아갈 거야.”라고 언급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화나게 한 이유가 뭐냐? 귀신과 연루되어 있다는 거지요. 귀신과 연루되었다면 우리가 어떤 식으로 귀신과 연루되었다는 말인가? 우리는 귀신같은 것을 아예 생각도 안하는데. 귀신은 만화책에나 나오고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오는데 귀신이라니요? 귀신 씨 나락 까먹는다는 그 소리가 왜 나왔겠어요?



귀신이라는 존재는 없는 존재거든요.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인간들만의 역사거든요. 인간들 만의 노력과 지혜와 투쟁, 인간과 인간이 서로 싸워서 만든 것이 인류의 역사잖아요. 인류의 역사 속에 귀신이 왜 끼어듭니까? 빼버려야지요. 귀신은 신화적인 존재며 과학시대 이전의 존재잖아요.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의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새삼스럽게 귀신을 언급하면서 귀신과 연루되었다고 해서 결국 하나님을 화나게 했다는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로서 우리에게 이야기할 때 우리는 대체 이 계시의 영역에 침투하기 위해서 어떤 대목을 잡아서 그 출입구로 해야 되는지를 모르지요.



왜냐하면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화나게 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생뚱 맞는 이야기고 교회 와서 찬양하고, 헌금하고, 예배참석하고, 나름대로 정성 다하고 있는데 ‘이 정도 했으면 하나님이 노엽기는커녕 기뻐하시면서 이 번 한 주간 복을 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고 귀신이라는 존재를 인정치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면 하나님을 노엽게 하지 않기 위해서 어느 단어를 집어서 그 단어로 침투해서 그쪽 세계 안에 잠입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거든요.



그 문제에 있어서 오늘 본문에 ‘몸’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각자 몸이 있잖아요. 몸이 있다는 거예요. 네 을 통해서 생각하게 되면 거기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느냐 하면, 권력이라는 것, 또는 권위라는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라고 알고 있고 귀신이라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관총 쏴서 죽일 수도 없는 문제고 쥐 잡듯이 잡을 수가 없어요. 영물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어요. 따라서 우리가 기껏 잡을 수 있는 것은 내 몸밖에 없어요. 내 몸만 잡을 수 있고 내 몸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느냐의 그 문제는 다룰 수 있거든요.



그런데 성경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몸이 있지?” “있습니다.” “그 몸을 가지고 네가 행동에 나서봐라. 행동에 나설 때 너는 어떻게 행동하느냐?” “예, 선택해서 행동합니다. ‘30분 뒤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한 시간 뒤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모든 것이 나의 의지의 선택에 의해서 나의 몸을 다룹니다.”라고 하거든요. 그 말이 맞아요?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몸에 대해서 각자가 선택권을 갖고 있습니까? 남자들은 알아요. 군에 가고 싶어 갔습니까? 20대 초반에 나라에서 군에 가라고 할 때 남자들은 처음으로 생각해요. ‘대체 나라는 것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보고 군대 가라고 해? 네가 뭔데 나보고 고생 하라고 하는가?’



돈 벌기 위해서 군대 갈 수는 있어요. 나도 남자다, 해서 출연료 받고 2박 3일간 예능프로그램에 참여할 수는 있습니다만 지금 이미 내가 선택해서 열심히 하는 일이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따로 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국가가 뭔데, 국방부장관이 뭐 길래 나보고 부모와 헤어져서 강제로 군에 입대하라고 소집영장 보낼 때에 ‘세상은 내가 하기 싫은 일을 강제로 시키는가?’ 하는 거예요. ‘그래, 남자니까 군에 갔다가 와야 되겠지.’ 마음은 그렇게 편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만 막상 군에 가게 되면 그동안 길렀던 머리 홀라당 다 깍지요, 입었던 사제 옷 소포로 다 보내지요, 취침시간과 기상시간 국방부에서 다 정하지요, 이제부터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지요. 기껏 하는 것은 이등병 되어서 질질 짜면서 편지나 쓰지요.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게 얼마나 구차한 변명입니까?



내 인생을 왜 누군가가 강압적으로 지배하느냐는 그 말입니다. 재수 없어서, 우리가 죄 지어서 군에 갑니까? 남자가 군에 갔다 와야 인간 된다는 거예요. 물론 군에 갔다 와도 인간 안 되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군에 가기 전에는 세상을 내 맘대로 사는 줄 알아요. 전부 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죽 세상살이가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 몸에 대해서 내가 주관할 수 있는 권한, 내가 장악할 수 있는 권한이 군에 가게 되면 날라 가버리지요. 특히 여자들은 시집가게 되면, 시집이 뭐 길래 시집의 시선을 의식하고 눈치를 봐야 된다는 거예요. 나는 남편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했는데 왜 낯선 인간들이 등장하는지. “시동생입니다. 시누이입니다.” 나는 시댁식구들하고 살러 온 것이 아니거든요. 남자하고 행복하게 살러 왔는데 왜 낯선 남자, 낯선 여자들과 연루되는지? 특히 웬 낯선 노인이 와서는 “나는 시어머니다.” 해요. 시어머니 눈치 보려고 시집간 것이 아니잖아요. 왜 세상은 내 맘대로, 내 원대로 안 되는 거예요? 왜 주변의 얽히고설킨 관계망이 왜 그렇게 센 겁니까?



무시하고 싶어도 내 마음일 뿐이고 무시가 안 되네요. 나중에는 시집 조카까지 와서는 등록금 대달라는 소리도 나오지요. 돈 빌려준 것도 아닌데 돈 내놔라는 식으로. 이런 온갖 일이 일어났을 때에 비로소 ‘아, 세상이라는 것이 내 도덕적 실패에 의해서 벌 받고 도덕적 성공에 의해서 복 받는 세상이 아니구나.’ 내가 착하게 살면 복 받고 나쁘게 살면 벌 받는 세계가 아니에요.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세상은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걸 던져진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냥 투기, 사르트르의 이야기인데 그냥 던져진 존재, 그냥 던져졌어요. 던져져서 구르다 보니 재벌 3세고 던져졌는데 보니까 보육원에 와 있고, 가난한 집에 와 있고. 주어진 것이 그냥 내 몸만 던져져서 주어진 것이 아니에요. 덩달아 주어진 것이 권력이라는 것, 세상의 질서가 나를 어쩔 수 없이 살수 밖에 없도록 하는 거예요.



그걸 모를 때는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 맨날 이상한 미신 같은 것, ‘남한테 잘해주면 복이 오겠지.’ 잘해주다가 빌어먹게 된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하나님한테 잘 하면 복 받겠지.’ 그것은 사기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상투적이 사기에 불과한 거예요. ‘나쁜 짓 하면 저주받겠지.’ 그렇지 않아요. 나쁜 짓 한 사람이 훨씬 더 잘 사는 세계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어떤 내 행동이 관여할 수 없는 어떤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내 행동으로 변질, 변동이 안돼요. 나를 바꿀 수가 없어요.



그걸 헬라말로 ‘모이라’라고 해요. 운명이지요. 옛날 헬라의 철학가들은 이 자연세계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고 했어요. 이것은 뭐냐? 그 자체로 그냥 운명이라고 했어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거예요. 허무하다는 그 말도 부질없는 말이에요. 허무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냥 흘러가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모든 것이 피동적이고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 어쩔 수 없어.’ 어릴 때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부모로부터 윤리 도덕을 받았기 때문에 ‘착하게 살아야 해. 인간답게 살아야 해.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해.’라고 했어요. ‘남들보다 바르게 살면 내 몸이 우수한 몸이 되어서 칭찬받을 거야, 사랑 받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몸을 가지고 군대 가고, 시집가고, 사회에 나가보니까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내 몸 하나 바르게 산다고 나를 알아주는 세상이 아니라는 거지요.



싸워야 돈이 되는 세계에요. 돈을 번다는 것, 싸움이 없는 곳에는 돈이 안 생깁니다. 오늘 좋은 거 말씀드립니다. 치킨 집을 하든, 이발소를 하든, 어떤 사업을 하든 싸워야 돼요. 싸움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빵집도 마찬가지고 동네 약국도 마찬가지고 병원이나 한의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직장, 어느 기업이든 계속해서 사장은 직원들 보고 싸우라고 들볶잖아요. 영업사원들보고 무조건 싸워서 빼앗아오라고.



제가 지금 죽 전개한 이야기가 앞뒤가 안 맞고 모순되지요? 분명히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던져진 존재다. 어쩔 수 없다. 살아지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라고 했는데 막상 세상은 싸워야 돈이 되는 세계라는 말이지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됩니까? 싸울까요, 그냥 빌어먹을까요? 어느 쪽으로 할까요? 집에서 놀면서 드라마나 보다가 굶어죽을까요? 싸워서 돈을 벌어야 될까요? 모든 게 운명이라면서요? 운명인데 왜 이렇게 힘들까요? 운명은 쉬워야 되고 편해야 되는데 왜 이렇게 힘듭니까?



이유도 모르고 싸우는 목적도 모르고, 그냥 인생은 비참해요. 사는 게 비참하다고요. 부자로서 살아도 비참하고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비참하고요. 그래도, 슬퍼도 살아야 돼요. 슬프다고 쉬면 안돼요. 슬퍼도 살아야 돼요. 뭔가 빠졌어요. 도덕적 실패를 이야기 했지요? 나쁜 짓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저주받고 벌 받고 있는 중인 것 같아요. 그래서 세상에 있는 모든 철학가들은 말하기를 세상을 감옥이라고 했습니다. 감옥이라고 한 말이 비극이 아니고 위로하는 말이에요. 감옥에 있다는 그 말은 저쪽 감옥보다 네가 있는 그 감옥이 편하다는 겁니다. “현재 네가 챙기고 있는 그 감옥을 고마운 줄 알아라.” 하는 식으로 감옥이라 한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같은 감옥이지만 저 북쪽, 북한감옥보다 남한감옥이 좋지 않습니까? 북한은 숨도 못 쉬니까. 같은 감옥끼리 비교해서 그나마 위로받는 식으로 버티는 것이 이 비참한 현실에서 다소 마음 편하게 사는 길이라는 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다. 이 몸은 내 몸이다. 따라서 이 몸으로 착하게, 바르게, 하나님 믿고 살면 아마도 행복해 질 것이다.’라고 여겼던 철없던 시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몸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보니 하나님도 안 알아주고, 양심도 안 알아주고, 바르게 살았다는 그런 것은 전혀 이력서에 쓸 수도 없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은 “싸워서 빼앗아 오너라. 그러면 돈 줄게.” 이거예요. “단지 그것, 무조건 나대고 설쳐서 빼내면 그걸 우리가 갈라먹기 하자.”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세상, 처참한 세계입니다. 남을, 이웃을 사랑하라고요? 개떡 같은 소리 하고 있네요. 자기 살기도 힘든데 뭘 남을 도와줘요? 남 도와준다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솔직하게 하세요. 도와주는 것도 다시 빼먹기 위해서 이용하는 것밖에 안돼요. 인간은 자기 비참한 것이 우선이지 남 비참한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자기 사는 것도 처참해 죽겠는데 뭘 남까지 챙깁니까?



그러면서도 이 몸이 점점 더 피곤해 갑니다. 더욱 더 비참해져가요. 얼마나 비참했으면 행복을 소망으로 삼을까요? 행복을 원한다는 말은 현재 불행하다는 뜻밖에 안 되거든요. 진짜 행복하면 행복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불행하기 때문에 그저 행복이라는 것을 멀찌감치 내다보는 것만으로도 위로삼기 위해서 행복을 언급한 거예요. “장래 우리가 뭐 합시다.” 그 말은 지금 불안불안, 아슬아슬하다는 그런 뜻이에요. 지금 흔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빠트리고 있다는 거예요. 현재 네 몸이 빠트리고 있는 것이 있는데 네 몸을 네 힘으로 관리하라고 준 몸이 아니라는 거지요. 본문 22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라는 생뚱맞은 말을 언급하고 있어요. 이런 뜻입니다. “네가 강한 자에게 예속되어 있느냐? 모든 문제는 네가 혼자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거예요. 네가 너에게만 최고로 강한 자가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너보다 더 강한 자가 있어야 되고 그 강한 자에게 예속이 되어야 네가 안정을 찾는다는 겁니다. 네가 스스로 강한 자가 되면 누가 너를 찌르기라도 하면 그 다음부터는 네가 불안해지고 인생이 파탄 나버려요.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지키다가 어떤 한 구석으로 치고 들어와 버리면 인생이 허물어져버려요. 허물어져버리면 수습을 누가 합니까? 수습 못하면 자살하지요. 죽을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천하에 자기가 제일 강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좀 약해지면 안 되겠습니까? 주님한테 좀 약하면, 좀 양보하면 안 되겠습니까?



강한 분에 예속되시면 됩니다. 얼마나 개가 부러웠으면 ‘오뉴월 개팔자’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개는 주인이 있잖아요. 이사야 1장에 나오듯이 소도 주인이 있고요. 우리 몸은 우리를 증명하라고 있는 몸이 아닙니다. 나 잘났다, 나는 강하다,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간다는 그것을 증명하라고 있는 몸이 아니에요. 이 몸은 나보다 더 강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 몸이 주어진 겁니다. 우리 보다 더 강한 분, 그 분이 누구냐? 오늘 본문에서는 그 분을 귀신이라고 합니다, 귀신.



“어라?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보다 주님이 더 강하다고 분명히 되어 있는데 왜 주님이라고 안하고 귀신이라고 합니까?” 주님한테 가려면 일단 귀신한테 갔다가 주님한테 가야 돼요. 순서가 그래요. 저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마가복음 3장 14,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게 무슨 말인가? 세상 모든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신을 추방하지 않으면 본래 우리 자신과 주님이 접속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보다 강한 자를 발명하고 설정을 하는데 그게 바로 귀신입니다. 영화 찍기 전에 귀신한테 제사 드리지요. 돼지콧구멍에 5만 원짜리 돌돌 말아서 꽂아놓고 하잖아요. 나로호 로켓 쏘아올릴 때 제사지내지요? 공장 지을 때도 제사지내지요? 건축상량식 할 때 제사 지내지요? 돌잔치 할 때도 제사지내지요? 조상한테 잘 보여야 후손들 잘 된다고 추석이니 설이니 명절 때마다 제사지내지요? 차 새로 샀다고 파군재 삼거리에 밤 놓고 대추 놓고 제사지내지요? 먹기는 제가 잘 먹어요. 아침 운동 나가다가 사과니 밤이니 대추, 제가 먹기 바빠요. 때로는 주머니에 비닐봉지 챙겨서 갑니다. 어떤 때는 돈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그렇게 귀신 섬기지요. 결혼할 때 사주팔자, 궁합보면서 귀신섬기지요? 타로 점괘 보고 이사 갈 때는 이사 점괘 보지요?



강한 자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서 다 그런 짓 하거든요. 그런데 그 버릇이 어디까지 가는가? 교회까지 그대로 왔거든요. 교회 임식직 할 때 귀신한테 제사 드리지요. 교회 건축한다고 귀신한테 제사 드리지요. 교회 권사 장로 될 때 귀신한테 제사 드리잖아요. 입주한다고 목사 불러다가 제사지내지요. 추도예배 한다고 귀신한테 제사지내잖아요. 세상에서 귀신섬기는 버릇이 교회와도 마찬가지에요. 군에 가기 전에 목사 불러서 심방해 달라고 해서 또 귀신에게 제사하지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이 어릴 때는 부모로부터 “착하게 살면 복 받고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 그런 식으로 세뇌 받고 교육받았어요. 그러나 남자는 군대 가고 여자는 사회에 나가거나 시집가면서 내 몸이 내 선택과 의지보다 더 강한 세상 속에서 내 몸은 던져진 몸이라는 것, 착하게 산다고 취업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한테 기도한다고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굴복하고 싶지 않아도 굴복해야 될 어떤 권세가 있는 거예요. 권력이 있다고요, 권력이. 그 권력한테 잘 보여야 되거든요.



그런데 자기 마음은 자기 맘대로 몸을 굴리고 싶은 어떤 선택권을 발휘하고 싶은데 세상은 그걸 용납하지 않아요. 강제로 나에게 돈 벌어오라고 시킨다는 그 말이지요. 오직 그 말, 돈 벌어오라는 그것밖에 없어요. 부모들이 자식한테 공부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이거 해야 돈 번다고 시키는 거예요. 이거 안하도 딴 짓하면 돈 못 벌어요. 힙합 노래 부르고 다닌다고 돈이 됩니까? 돈 안 되거든요. 하고 싶은 것은 힙합이지요. 맘은 그렇지만 그것은 돈이 안 되거든요. “아빠, 왜 나에게 그렇게 했어?” “너는 세상을 몰라.” “난 착하게 살거야.” “이놈아! 착하게 살아서 돈 된다 싶으면 착하게 살라고 하지. 착하게 살면 너는 바보 되는거야.” “엄마!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해?” “나도 몰라. 나도 비참하니까. 그래도 덜 비참하려면 돈이 있는 채로 비참한 것이 더 낫다.” 그거 외에는 이 세상에 다른 해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뭔가 빠진 것이 있다니까요? 빠진 것. 그게 뭐냐? 우리가 특수한 몸, 이 몸 말고, 이 던져진 몸 말고 하나님 자신의 뜻을 듬뿍 안고 우리에게 소개한 몸이 있어요. 그 몸은 특수한 몸입니다. 그 몸이 17절에 나옵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어렵게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개인의 몸은 개인의 기억밖에 없어요. 그러나 주님의 몸은 ‘우리’의 기억, 개인의 몸의 기억은 삭제시키고 우리의 기억, 우리의 기억이 있어요. 개인의 기억이 아니고 ‘우리’의 기억을 듬뿍 안고 와서 채웁니다.



개인의 기억에 의해서 살아가게 되면 어떤 잘못을 범하느냐 하면, 내게 중요한 것을 하나님에게 달라고 요청하게 돼요. 내 몸에 중요한 것을 달라고. 내 몸에 중요한 것을 달라고 한다면 이것은 필히 귀신한테 기도하는 수밖에 없어요. 귀신은 현재 이 몸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어서 멸망하기를 바라고 있거든요. 그래서 “네가 뭐가 필요하냐?” “몸이 아프니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그래, 건강주마.” 이게 전부 다 귀신이 하는 거예요. “또 뭐가 필요한데?” “애가 공부가 안되는데 성적을 올려주세요.” “그래, 내가 채워주마.” 그걸 귀신이 예수 이름으로 줘요. 귀신이 예수 이름으로 준다고요. 교회 부흥되는 것, 선교사 파견하는 것, 큰 교회 짓는 것, 한 평생 노후대책 되는 것, 사놓은 부동산 값이 오르는 것, 모든 일 잘 되는 것, 잘 풀리는 것, 이사갈 때 잘 풀리는 집(휴지) 들고 가지요, 이게 전부 다 귀신들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정작 그것은 내 기억 속에 빠진 것, 미흡한 것, 보충해야 될 것을 내가 요청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이것만 주시면 나는 내가 보기에 살만 합니다. 그러니 내 빠진 부분을 채워주옵소서. 우리 남편이 다 좋은데 바람을 피우는 그것만 문제이니 바람끼만 잡아주신다면 제가 아낌없이 헌금하겠습니다.” 이게 귀신한테 하는 거예요.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이것은 원천적으로 자기 몸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특수한 몸을 줘요. 이 특수한 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유일하게 연결된 몸입니다. 그 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예수님의 몸이나 우리 몸이나 차이점이 뭐가 있느냐?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고 우리는 술도가의 아들이고, 다 같은데 무슨 특수한 몸이 있느냐?” 하는데 예수님 몸의 특수한 점은 이겁니다. 죽음을 경험했다는 거예요. 죽음을 경험한 거예요. 죽음을 경험한 그 몸에서 나온 기억, 죽음을 경험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 기억이 능력이 되어서 우리 죽을 몸에 덮쳐버리면 우리 몸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예수님 몸으로 바뀌게 됩니다. 바뀌었다, 안바뀌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전에 우리 기억만 있던 그 기억 속에 주님이 이 땅에 와서 겪었던 모든 체험이 우리 몸에 삽입이 되어서 스며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몸에서 싸움이 벌어져요. ‘내가 과연 내 몸을 지키기 위해서 돈 벌기 위한 싸우는 이것이 내 몸의 전부인가? 아니면 이미 영생을 얻은 몸인가?’ 그 싸움이 계속 벌어진다니까요? 쉬운 예로 이렇습니다. 어제부로 삼성라이온즈가 이젠 편하게 되었어요. 한국야구전기시리즈에서 우승이 확정되었어요. 남은 게임과 관계없어요. 삼성라이온즈 팬이나 선수들은 마음이 어떻습니까? 1등 삼성라이온즈, 2등 NC, 3등은 넥센과 두산, 여러분이 이걸 꼭 알아야 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만, 3등은 두 팀이 나란히 가고 5등은 SK가 유력하고, 이걸 여러분이 꼭 알 필요는 없는데 제가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미 결정났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1등으로 확정난 거예요. 아직 남은 게임이 있는데 그것은 100대 0으로 져도 괜찮아요.



그런 느긋함, 여러분에게 있어야 됩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내 몸 가지고 하면 아슬아슬 해서 항상 적들을 의식해야 돼요. 내 것 누가 찌르지는 않는지. 사랑하는 내 남편, 사랑하는 내 아내가 아프지는 않을 건지. 모든 것이 뒤숭숭하고 그 공포심이 꿈에도 이어집니다. 불안불안해서 못살아요. 이 존재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져요. 애 낳으면 애는 어떻게 키울지 걱정되고요. 저는 옛날에 결혼해서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천근만근이 되었어요. 성경에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라고 했거든요.



복음의 전쟁에 나가는 사람은 가정에 얽매이지 않는다(딤후 2:4) 했는데 얽매일 것이 또 생겨버렸어요. 무슨 수로 키우느냐는 말이지요. 걱정이 되어서 진짜 잠이 안 올 정도로요.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들통내기 위해서 주께서 자식을 준 것 같아요. ‘아, 내가 키울 수는 없다.’ 그래서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책을 막 찾아보지요. 우리 몸이 특수한 몸이 되어서 어떤 몸이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내가 꼼수 써서 나를 구원하는 그런 오류 같은 것, 그런 것들이 다 귀신과 결탁되어 있다는 사실을 까발려 주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구원받겠지요?” 그게 귀신들이 하는 소리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 다니면 천국 가겠지요?” 그것도 사기입니다. 거짓말입니다. 그것도 귀신들이 하는 소리에요. 성경에 있는 모든 말 그대로 하는 소리들이 다 귀신들이 하는 소리로 들리시기 바랍니다. 그런 소리들이 악마의 소리로 들리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경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내 몸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되어야 될 이 몸을 성경을 통해서 윤리도덕적인간으로 변모시키니까 세상이 마치 내 중심으로 돌아가야 정상인 것처럼 착각을 일으켰습니다. 그 착각으로 성경이라는 언어를 맞닥뜨릴 때 언어에 대한 모든 해석이 나 위주로, 내 욕심위주로, 나만 살면 된다는 그 위주로, 나만 급하고, 나만 비참하고, 나만 답답하니까,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식으로 종교생활, 기독교생활,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귀신이 아니고 뭡니까? 야고보서 2장 19절에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하지요. “하나님 믿고 벌벌 떤다고 신자가 아니다. 그것은 귀신들이 하는 짓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네 몸을 주께서는 특수한 몸으로 바꿔요. 시편 106편 28,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이스라엘은 특수한 민족이거든요. 이 특수한 민족이 광야에서 바알브올, 브올지방의 바알신, 우상신을 섬겼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만 명 죽였거든요. 이것은 그 당시에 특수한 거예요. 특별한 몸이라는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그 때 그 몸처럼 우리 몸을 내 몸이 아니고 특별한 몸으로 바꾸기를 원하는 겁니다. 바꾸기를 원하는데 내 몸을 어떤 몸을 모델로 삼아서 특수한 몸으로 바꿀 수가 있는가? 우리 몸은 우리가 바꾸지를 못합니다. 삼성라이온즈라니까요? 그냥 있으면 돼요. 그냥 있으면 1등 확정된 거예요. 우리 몸을 어떻게 바꿀 수는 없어요. 그냥 사시던 대로 사시면 돼요.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보냈는데 그 몸이 사랑하는 독생자에요. 아버지께서 그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여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독생자를 버리고 저주해버렸어요. 이것은 누구만 할 수 있느냐 하면, 우리 인간은 못하고 누구만 할 수 있는가?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낼 수 있습니까? 미운자식이야 나가 죽으라고 할 수가 있지만 정말 내가 기대가 넘치고 좋아하는 자식을 지옥가라든지 저주받으라고 할 수 있는 부모가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 누구도 그럴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 가면 뭐라고 합니까? “사랑은 온유하고, 화평하고, 오래참고…….”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와 있어요. 하지만 내가 나 위주로 사는 한 그것은 전부 다 귀신이 하는 짓이라니까요? 오늘 아침에 어떤 늙은 신부가 와서 하는 말이 “사랑은 온유하고 화평하고 어쩌고.” 그 신부복이나 좀 벗으라고 하세요. 성경 전체가 악마의 말이고 귀신의 말이에요. 왜? 내가 그걸 나 위주로, 내 행복위주로, 나 잘되는 위주로 차용하고 도용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을 보세요.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여러분도 눈이 있고 저도 눈이 있으니까 보고 있습니다. 한 번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볼까요? 우, 리, 가, 주, 보, 다, 강, 한, 자, 냐. 글자 하나도 안 틀렸지요? 그런데 이걸 믿는 사람이 없다니까요? 내가 성경말씀을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뭡니까? “이 세상에 나보다 더 강한 자는 없다.”가 돼요. 이게 귀신들리고 마귀 들린 거예요. 정말 주님이 여러분보다 강하십니까? 정말 강해요? 주님이 1등이고 여러분은 2등입니까? 진짜 그게 믿어져요? 그러면 1등한테 그냥 의존하고 매여 살면 돼요. 내가 나에게 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윤리적 도덕적질서 이전에 그냥 던져진 존재, 그걸 운명이라 했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운명, 그 특수상황에 던져졌으면, 그리고 강한 분이 있으면 Don’t worry! 일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합격이 되었는데, 이미 천국에 합격이 되었는데 왜 우리가 설칩니까? 교회 충성봉사 한다고, 전도한다고, 헌금 낸다고, 선교한다고, 착한일 한다고, 이웃사랑 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사세요. “그러면 목사님! 그냥 살기만 하면 구원 받습니까?” 내가 그냥 사는데 얼마나 힘들게 살았기에 구원받는가, 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탈락이에요. 그냥 살아도 돼요. 누구 안에서? 강한 자의 품안에서. 주님의 행하신 그 행함이 우리에게 새로운 기업으로 삽입되어 들어옵니다.



그게 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주님이 하신일은 이런 효과를 드러낸다.”는 것을 소개하는 소개물로서 “너 같은 인간도 봐라. 내가 용서했잖아.”하고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잖아요. 사랑은 온유하고 화평하고 ……, 이것은 누가 하실 일이냐 하면, 우리보다 더 강한 주님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이라는 글자 그대로 우리에게 덮어주는 거예요. 성경은 주님한테 가져가시면 돼요. 성경을 주님에게 내미시면 고린도전서 13장, 고린도전서 10장, “주보다 강한 자냐.” 이 말씀을 우리라는 그릇에다가 담아요. 막 담는다니까요?



담아버리면 우리 안에는 내가 한 것은 일체 없고요, 주님이 하신 것만 고스란히 다 담겨있어요. 이걸 모르고 우리 힘으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랑하는 자식을 우리 힘으로 버릴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식마저 버렸습니다. 이것은 어떤 인간도 모방하거나 흉내 낼 수 없어요. 인간이 무질서한 세계, 신화의 세계에서 과학의 세계로 넘어오면서 모방을 통해서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그 질서 속에서 원칙을 뽑아냈고 그 원칙이 과학이 되었고 과학은 방정식이라는 언어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방정식, 과학은 누가 누구를 살리는가 하면,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 그 방식 외에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오늘날은 과학시대에요. 과학이 진리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에 빠진 것이 있어요. 사형집행사건이 빠져 있습니다. ‘사형집행자, 유대인. 사형당한 자, 예수님.’ 그게 빠져 있어요. 과학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그것뿐입니다. 죽음이 뭔지, 내가 죽고 나서도 과연 하나님 앞에 사랑받을 수 있는 그 문제, 그 내용에 대해서는 사형사건의 현장, 십자가 그 현장 외에는 어디에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내가 알아야 되겠다고 해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는 우리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귀신을 손에 잡을 수 없으면서 급하면 무조건 기도하고, 제사지내고, 예배드리고, 주여, 살려달라고 귀신한테 비는 것, 뭔가 보이지 않으면서도 뭔가 나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그 여분의 세계를 우리가 탈취할 수 없듯이 주님에게서 일어나는 그 특수한 죄 용서함이 내 소유로 바뀌지는 않아요. 다만 주님의 사랑의 소개물, 사랑의 생산물, 주님의 사랑이 행사됨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그 결과물로서 우리가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가 이야기하기를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주보다 강한 자가 없다. 그런데 왜 너희는 주님을 대신해서 귀신으로 강한 자를 세웠느냐? 정말 네가 모신 주님이 진짜 주님이라면 나 좋으라고, 내가 복 받으려고 교회 다니는 그 짓은 하지 말라.” 하는 그 말입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예수 찾고 삼위일체 찾고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냥 주님이 시키는 대로 살면 되지, 주님 주신 은혜대로 살면 되지 왜 내 미래, 내 계획, 내 목적, 그걸 따로 챙겨야 되느냐는 거지요. 그렇게 챙겨버리면 일곱 귀신, 2천 귀신 막 들어옵니다.



발걸음을 오늘도 인도하시는 분이 주님이시고 머리카락도 다 주께서 세신다는 데 우리보다 강하신 분이 계십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이런 문제를 드렸어요. “들풀로 만든 옷과 솔로몬의 옷 중에서 어느 것 입을래요?” 우리의 안목은 솔로몬 옷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목에서는 들풀이 더 귀해요. 우리의 안목, 우리의 기억은 삭제당해야 되고, 솔로몬 옷에 대한 기억은 점차 허무하게 삭제당해야 되고 “들풀이라도 좋습니다.” 하는 주님의 기억, 주님의 용서의 기억이 여러분의 속을 꽉꽉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쩔 수 없이 삽니다. 손쓸 수 없이 삽니다. 던져진 채로 삽니다. 세상 바꿔보려고 하다가 우리 자신만 피곤해지고 처참해지고 비참해져버린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어떻게 설쳐봐야 변화되지 않는 세상, 주여, 어떻게 살까요? 모든 것이 주께서 바꿔치기 한 작업현장인 것을 저희들이 받아들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