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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60강-참 신의 증거 (고전10;14-17) 15092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9. 29. 07:40

2015-09-27 12:38:43 조회 : 121         
   참신의증거 150927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참신의 증거(고린도전서 10: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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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9-27 13:20 
참 신의 증거

2015년 9월 27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0:14-17

(10: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0:15) 나는 지혜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인간은 자신이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세상을 판단하기 때문에 자기가 믿는 신과 동일하지 아니하면 우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이 그 어떠한 신을 믿던 ‘내가 믿는다’ 그 이유만으로 그 신이 우상으로 돌변한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요? 즉
인간이 태어나면서까지 우상 제조자 경향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본인이 과연 어떤 식으로 알아차려야 할까요?

인간쪽에서 ‘참된 신’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실은 인간의 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일에 대해서 인간은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주목해서는 아니됩니다. 인간은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관을 늘 설치하고 설정해놓고 삽니다. 예를 들어서 도심 한 가운데 있는 한적한 풀밭이 널려있는 공원에 나갔다고 해봅시다.

시야에 들어오는 조각품이나 벤치나 푸른 잔디나 나무 숲은 나름대로 모두 안정적인 자기 위치를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그런 사물들로 구성된 체계가 안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돌이라고 여겼던 조각상이 예상 밖으로 죽은 사물체가 아니라 산 사람이 되어 자기에게로 걸어온다면 아마 기겁을 하고 그 안정적인 공원 세계를 버리고 도망칠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소의 세계관 속에서 신은, 인간들이 배정하고 배치해놓은 여러 가지 사물과 더불어 어느 한 자리를 조용히 차지하면서 인간들로부터 대접을 받는 어르신 같은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인격체를 갖추었다고 하지만 실은 그림 속의 노인처럼 그냥 사물 덩어리일 뿐입니다.

이 신은 인간들의 자기만을 위한 현실채비에 전혀 훼방이 되거나 방해하지 않는 위치에 있습니다. 마치 여름철에 파는 아이스께끼 뽑기판 위의 그림 속의 인물과 같습니다. 매주간 반복되고 반복되는 일상 중의 하나가 ‘일요일에는 교회 가기’가 들어있는 겁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이로 인하여 사도 바울의 현실판과 인생판은 허물어져버립니다. 즉 자신이 세상 중심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는 자신이 세상 판단할 자격도 없고, 더구나 우상과 참 하나님을 가려낼 그런 입장에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여 누구십니까?”라는 물은 곧 자기 자신의 근원을 다시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즉 “왜 나는 매사가 하나님이 행하심에 대해서 극렬하게 훼방하고 방해하는 우상적 태도를 보이는 그런 존재인가?”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나로부터 출발하는 그 ‘하나됨=1’를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고 허물어야함의 정담함을 보이기 위해 우리들이 사용되어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됨’이란 세상 중심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의 신체를 도외시하는 그런 중심점과 하나됨을 감히 상상하지를 않습니다. 천국을 생각하고 지옥을 생각해도, “내가 들어가야 될 나라와 내가 결코 들어가서는 아니될 나라”로서 판정내리고 맙니다. 하지만 이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해결책은 이외로 우리가 매일 대하는 일상 속에 있습니다. 즉 하늘에게 내리는 비와 공기와 햇빛은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우리가 여기 있음 자체를 기적의 산물로, 곧 하나님의 작품으로 간주하게 하시는 내용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짜로 이것들을 주시지 않습니다. 받을 때는 공짜 같지만 주신 분을 알지 못하고 그분에게 종속되지 못한다면 지옥에 가서 받은 은혜가 저주의 형벌이 된채 영원히 토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참되시고 햇빛과 공기와 단비를 주시는 분에게 종속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구약 때부터 눈에 보이는 가시적 모양으로 자신의 뜻을 인간들 속에 삽입시켜 오셨습니다. 문제는 인간들의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인다는 점입니다. 즉 보고도 개무시한 겁니다.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 알고 있었습니다. 기껏해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바로 판단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자기만의 세상관’ 고수 때문에 발생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안다면 ‘나 →우리’가 아니라 ‘우리→나’의 원리로 달라져야 합니다.

즉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그런 집단으로서의 ‘우리’가 아니라 생뚱맞게 ‘우리’부터 먼저 만들어졌는데 가만히 보니 그 ‘우리’ 안에 ‘나’가 이미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절차가 요구됩니다. 이를 위하여 ‘나’는 구약때부터 계속해서 반복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이로서 ‘나’ 개인이 하는 모든 행위와 지식과 시도가 전혀 나 구원에 보탬이 되지 못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구약 모세 때, 모세에게는 지팡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팡이는 분명 모세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수천 개 지팡이, 수만 개, 지팡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느 지팡이도 홍해를 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팡이는 바로 ‘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일은 의도적으로 ‘나’와 ‘나의 것’을 피해가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인간이 알아맞출 수 있는 그 어떤 법도 하나님의 일에 참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됨을 예수님의 ‘성전부정’에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성전의 존재와 활동’은 그 당시 사람들의 정성이 집대성한 것입니다. 바로 이 성전을 부정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 행하는 모든 행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원천적으로 거부한다는 의사표시입니다.

참된 신을 증거하는 증거가 다음의 세 가지 제시하십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한일서 5:8) 여기에 나오는 ’성령과 물과 피‘는 인간쪽으로 제시한 증거물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이란 과연 어떤 신이 참된 신인지 아닌지를 판정할 권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참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성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세 가지를 남기고 가신 겁니다. 인간으로 인해 발생된 상처, 그곳은 곧 물과 피와 성령이십니다. 물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받은 물세례로서, 이 세례로 인하여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처럼 죄를 짊고 가야할 신세가 된 것입니다.

피란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내리신 불세례로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심판의 끝을 보여주십니다. 성령이란 곧 예수님의 사역이 처음부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기에 인간들이 원하는 스케줄이나 요구사항과 상관없이 움직이신 메시야라는 겁니다. 이 세 가지 증거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범 우주적으로 본격화됩니다.

이로서 성도는 “더 살 필요도 없는 본인에 대해서 본인이 더 이상 신경쓸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는 고백을 하게 만듭니다. 손전등이나 촛불이나 들고 인생 개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양 앞에서 인간은 원천적으로 그 어두움 뿌리가 다 노출되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행한 것으로 우리가 구원되는 게 아님이 우리의 유일한 즐거움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9-28 11:57 
58강-고전 10장 14-17(참 신의 증거)15092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0장 14-17절입니다. 신약성경 274페이지입니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오늘 본문에 보면 ‘우상’이라고 말이 등장해요. 그 당시 사도바울이 보기에 우상인데 그 당시 우상을 섬긴다는, 사도바울 측에서 이야기하는, 복음을 아는 쪽에서 이야기하는, 우상을 섬긴다고 이야기하는 쪽의 본인들은 참된 신을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자기와 다른 신을 섬긴다고 함부로 우상이라는 용어를 써가면서 일종의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것이 과연 옳은 태도일까요? 너희들은 신이 잘못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 신은 있지도 않는 신이고 그런 신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러한 안목은 어디서 나왔는가?



우리가 믿는 신은 참된 신이고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 너희가 믿는 신은 잘못되었다는 평가를 지금 사도바울이 내린 것같이 보입니다. 말이 좀 복잡한데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평가를 ‘내린 것 같이’ 보여요. 그런데 네가 믿는 신이 우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가 평소에 해 본적이 있습니까? 내가 믿는 예수, 내가 믿는 삼위일체, 이것이 인간에 의해서 조작된, 날조된 신이라는 것, 내 편리를 위해서 믿는 우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는 내가 믿는 여호와, 내가 믿는 삼위일체, 내가 믿는 예수가 진짜 신이고 나머지 사람들이 믿는 부처, 알라, 이런 것은 다 거짓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것이 옳다면, 지금 우리가 하는 생각이 옳다면,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이렇게 어렵게 끌고 가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하겠지요. “너희들 예수 믿나?” “믿습니다.” “예수 믿는구나. 예수 말고 다른 신은 다 거짓이야.” 이렇게 이야기하면 깔끔합니다. 별 어려운 것이 없어요. 그런데 우상이라고 언급을 하면서 그 뒤에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17절에 보면,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우리’라는 것은 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다수를 이야기 하지요. 다수가 한 몸에 속했다, 라고 언급을 합니다. 이 말은 뭐냐? “너희들이 진정 믿는다는 그 예수가 진짜 예수라면 그 뒤에 나오는 내 말도 알아먹어야 된다.” 그러면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뭐냐? “우리는 전부 다 한 몸 맞지?” 이걸 언급하는 거예요. “네가 예수 믿는다고 우기니까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은 네가 믿는다는 그 예수가 진짜 예수인지 가짜 예수인지 내가 한 번 판정해 봐? 내가 한 번 판정해 볼게. 우리는 다 한 몸 맞지? 한 몸이지?”라고 언급하는 거예요.



한 몸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부부도 한 몸이 아닌데 무슨 한 몸처럼 살아가요? 진짜 예수 믿는다면 생판 모르는 사람들, 생판 모르는 사람끼리라도 딱 보면 알아야 돼요. 딱 보면 “한 몸이네.”라고 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평생 동안 자기 몸 밖으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몸 밖에 모르는데 내 몸 말고 또 다른 한 몸이 있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의 “너희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 하는 그 취지를 제대로 알아야 돼요. 우상 섬기지 말라는 그 취지 안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누구 좋으라고 예수 믿는가?’ 하는 것까지 포함이 되어 있어요. 내 한 몸 좋으라고, 내 한 몸 좋으라고 믿는 예수는 가짜고 하나님이 생산해 낸, 하나님이 따로 만들어낸 ‘우리’라는 몸이 따로 있는데 그 우리 몸을 위한 한 예수님일 때 비로소 너는 제대로 예수를 안다는 겁니다.



나를 위한 우리는 없고 우리에 편입, 우리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 ‘우리’라는 그 일부로서 가담되어 있는 것이 바로 너 자신이어야 바른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 자신 챙기는 것도 급한데 우리 말고 따로 다른 몸 챙기는데 까지는 여력이 없어요. 우리는 다른 몸까지 신경 쓸 수가 없습니다. 우선 나부터 안정감을 취하고 나부터 생존이 되어야 남도 돌아보지, 당장 내가 굶어죽는 판국에 ‘우리’라는 남까지 신경 쓸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라는 것은 좀 있다 챙길게요. 당장은 내가 급하고 바쁩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나 챙기기 급급한 사람이 우리라는 것을 나중에 돌본다고 할지라도 그 우리는 우리가 아니고 나의 확장, 내 몸의 확장에 불과합니다. 가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내용은 이거예요. “우리는 예수 믿을 수가 없다.” 간단해요. “우리는 우상숭배자다. 왜? 우리는 나를 위한 신 외에는 다른 신을 믿을 의사가 없기 때문에.” 뭐든지 나를 예뻐해 주고 나를 보호해주고 내가 죽어서까지 나를 천국 보내주는 그런 신이 아니면 우리는 믿을 의사가 전혀 없는 몸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페이스 북에 어떤 분이 이런 것을 해 놓았어요. “아무개 씨, 태어난 날을 축하합니다.” 태어난 날이 축하할 일인지 그걸 욥한테 하게 되면 욥한테 귀때기 맞을지 싶어요. 욥은 말하기를 “왜 저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렇게 나오는데. “태어난 날을 축하드립니다.” 욥의 입장에서는 축하할 일이 아니에요. 욥은 이것뿐입니다. ‘내가 날 없애야 하는데…….’ 욥의 고민거리가 뭐냐? 내가 날 없애지 못해서 문제가 돼요. 이게 골칫거리에요. 왜 나를 없애야 되느냐? 내가 하나님의 일에 방해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일을 공격하는 요소가 내 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한 번 따져 봅시다. 햇빛과 공기와 물을 마시잖아요. 그거 우리 공짜로 얻어먹습니까? 돈 주고 먹습니까? 햇빛, 공기, 소나기, 이런 것들, 이거 공짜로 얻어먹잖아요. 돈 낼 대상이 없기 때문에. 수도세 낸다고요? 정수기 물 먹는데? 수도 물 냄새난다고 안 먹는데요? 돈 주고 정수된 물 사먹는데요? 햇빛과 공기를 주신 것이 공짜인데 이것들을 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공짜라는 것이 사실은 없어요. 햇빛과 공기, 이런 것을 공짜로 주신 것을 모르게 되면 이것을 다 토해내야 됩니다. 어떤 가운데서? 저주스러움 속에서 다 토해내야 돼요.



“받아놓고도 이게 누가 준지도 모르는 체 받아먹었어? 지옥 가서 혼나봐라.” 받은 은혜 다 지옥 가서 토해냅니다. 마태복음 8장 12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를 갈며 있으리라.”고.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를 갊이 있다는 말은 ‘왜 내가 그동안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놓고도 당연히 주는 것으로 여겼는가? 그 주신 분을 몰랐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햇빛과 공기가 그냥 공짜인줄 알고 막 썼어요. 주신 분에게 감사할 줄을 몰랐어요.



그걸 왜 주셨는가 하면, 네가 여기 살아 있는 것, 존재하는 그것이 기적인 줄을 알라는 그 말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기적이에요. 내가 여기 있어서 뭔가 하면서 꼼지락 거리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없어도 되는데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없어도 되는데! 울고불고 하면서 몸이 아프니 어쩌니 하는 그것은 나중 문제라니까요. 애가 공부를 잘하니 못하니, 그런 것도 나중문제고 ‘네가 왜 있니?’ 내가 있다는 그것이 이상스러워야 돼요. 네가 있다는 것이 이상스럽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이상스러워야 돼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햇빛과 공기 그리고 단비 때문에 있는 거거든요. 태어나면 끝입니까? 햇빛 안주면, 공기 안 주면, 물 안 주면 어떻게 삽니까? 태어나면서 계속 살아온 이것이 계속해서 추가적인 은혜와 기적이 공급이 된 거예요. 누구로부터? 알 수 없는 분으로부터. 알 수 없는 분으로부터. ‘알 수 없다면 모르면 그만이지.’ 모르면 그만이 아니에요. 받아놓고 채무관계가 형성된다니까요. 돈을 빌려놓고 ‘누가 빌려 준지를 모르는데 모르면 그만이지.’ 나중에 돈 갚으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세상 모든 문제에서 남과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남과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를 여기 있게 한 그 분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분과의 관계. 그래서 인간은 평소에 행동하거나 생각할 때 자꾸 빠뜨리는 것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내가 왜 있어야 되며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해야 됩니까?” 그걸 햇빛과 공기와 비를 주신 분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인간은 자기하고 상의하잖아요. 자기하고 상의한다고요. 모든 것을 자기하고 상의하고 결정해서 선택해 버리잖아요.



내가 나를 천국 보낼 수 있는 자격이 됩니까? 내가 나를 지옥에 못 보내게 만드는 그런 권한이 있어요? 아무 권한도 없고 아무 자격도 없는 나, 왜 내가 그런 나하고 상의를 합니까? 미친 거 아니에요? 이건 미쳤어요. “그러면 목사님, 하나님 믿으면 될 거 아닙니까?” 하는데 그 하나님이 필히 우상이 된다는 것이 문제가 돼요. 내가 믿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상이었어요. 그 명칭이 예수든, 여호와든, 삼위일체든, 부처든, 알라든 상관없어요. 내가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무조건 우상이에요.



왜 우상이냐 하면, 나 위주로 돌아가는 신이기에 우상이 되는 거예요. 나 말고 우리여야 하는데 ‘우리’가 아니고 나 위주거든요. 우리라는 것은 우리 속의 일부가 나인데 그게 아니고 나부터 출발해서 내 취미에 맞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덩어리, 단체, 집단, 그게 새로운 우리로 등장되거든요. 그걸 흔히들 교회에서 말하는 공동체라고 하는 거예요. 그 공동체가 우상이에요. 왜? 자기가 좋아라, 해서 다니는 단체니까. 우상에서 발 빼기 힘들어요. 타고난 우상숭배자, 이것은 타고났어요. 이것은 소질이에요, 소질. 길에서 엎어져도 하나님, 뭔 일 만나도 하나님, 전부 다 부르는 것이 우상이에요.



정작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은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아무도 관심이 없고 ‘나를 지켜줄 경우에만 당신은 나에게 의미 있는 신이 된다.’ 그것뿐입니다. 문제가 있어요. 그 문제를 찾아내야 돼요. 문제를 밝혀내야 됩니다. 이 문제를 찾아내기 위해서 쉬운 예를 들겠어요. 어느 넓고 적막한 공원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푸른 잔디밭, 벤치, 누가 만든 조각상도 있고 그 벤치에 내가 앉아 있다. 참 멋진 광경이지요. 그럴 때 저 벤치와 조각상 이 모든 것은 내가 보고 있는 세계의 하나의 사물, 물체입니다. 조각상이 있다고 해서 내 세계가 해체되거나 부서지거나 하지 않아요. 벤치가 있다고 해서 내 세계가 허물어진다든지 그런 일이 없어요. 공원에 누가 몇 명 들어와서 벤치에 앉아 있다고 해서 내 세계는 끄떡도 안 합니다.



그래서 내 세계 안에 전부 다 배정이 되고 배치가 되어 있는 거예요. 아주 안정되고 고정된 세계관이 유지되는 겁니다. 그런데 분명히 조각이라고 여겼던 그 사물이 나중에 조각이 아니고 어떤 살아 있는 인간, 인물이 되어서 저벅저벅 나에게 걸어온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럴 때 우리는 뭘 느끼는가? 우리는 공포심을 느끼면서 지금 내가 꾸며놓은, 내가 어릴 때 소꿉놀이 하는 것처럼 꾸며놓은 이 세상에 아주 낯설기 짝이 없는 예상 못한 어떤 것이 침입해서 나에게 다가온다면 내 세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한 채 해체되고 허물어져 버리잖아요.



지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일단 소꿉놀이하는 것 같은 내 세계가 먼저 있어요. 그게 있고 난 뒤에 ‘이것은 우리 삼촌, 시동생, 올케……’ 이렇게 안정되게 죽 있는데 거기에 교회 다니기, 예수도 하나의 사물처럼, 조각처럼 배정을 해놓은 거예요. 일요일은 교회 간다. 예수님은 거기서 만난다. 이렇게 배정을 해놓는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중에 죽어서 만납시다. 이렇게 배정을 해 놓았어요. 그런데 그 세계에서 어떤 낯선 분이 하나님이라고 우기면서 나에게 다가오게 되면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딱 보니 목수의 아들이에요. “어이! 목수의 아들? 잘 있었어?” 그런데 그 쪽에서 하는 말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하나님…….”으로 와버리면 지금 내가 안정되게 고정시켜 놓은 나의 세계가 허물어지고, 찢어지고, 해체가 돼버려요. 그러면 거기서 “아하, 그 하나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이게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거예요. “주여! 누구십니까?” 예수님 당시에 어느 누구도, 열두 제자든 어느 누구도 그 분을 예상 못했습니다. 보고도 몰랐고, 만져보면서도 그분을 몰랐고, 그분의 설교, 그분이 기적을 행해도 그 분을 몰랐습니다. 왜 몰랐는가? 그동안 내가 소꿉놀이하듯이 만든 그 세계에 숟가락 하나 얹어놓은 식으로 거기에 예수 하나 덜렁 얹어 놓은 거예요.



내 세계는 꿈적도 안 해요. 아주 안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가족 있지, 친척 있지, 모든 사람이 다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우리는 편안하게, ‘이제 죽어서 주님 만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동안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교리를 배웠습니까? 조직신학, 구원론도 배우고 성화론도 배우고 많이 배웠어요. 그거 배워놓았으니 배운 그것이 보험이 되었어요. 성경도 10 독 하고, 기도도 할 줄 알고, 선교 회비도 냈고 다 했어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우상덩어리, 우상덩어리로 갖추어진 장치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누가 알려주겠어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동안 우상놀이, 재미있는 소꿉놀이 같은 우상놀이를 한 거예요.



그러면서도 교회 안다니는 사람, 절에 가는 사람을 얼마나 질투하고 욕했습니까? “예수도 안 믿고 조상한테 제사나 드리고 있고. 제사상 엎어버릴까?” 제사상 엎으면 벌금이 50만원 입니다. 형법 제 158조에 제사상을 엎으면 500만 원 이하의 벌금이나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어요. 본인은 자기한테 제사하면서 남 제사하는 것에 시비를 걸고 있어요. 본인은 교회 와서 자기한테 제사하잖아요. 자기한테 예배하잖아요. 어느 놈이 예수 본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어요? 자기 마음대로 상상하면 그만이니까.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우상을 언급했어요. 우상을 언급할 때 내가 믿는 신이 아니면 우상처럼 간주합니다. 그런데 그게 맞다면, 내가 믿는 신이 맞다면 사도바울이 우상을 언급한 뒤에 나오는 그 말에 우리가 예속이 되고 그것이 나의 현실이 되어야 됩니다.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말한 ‘한 몸’이라는 게 성경에 나오니까 지식으로는 안다고 우기지만 실제 우리의 생활과 몸에 대해서는 내 몸 빼놓고 다른 한 몸을 상정하면서 살아가지를 않아요. 내 몸 챙기기도 바쁜데 어떻게 남의 몸까지 챙깁니까? 남의 몸까지 챙길 여력이 없어요.



사도바울이 우상을 언급하고 난 뒤에 제시하는 그 예문에 대해서는 우리하고 안 맞는 거예요. 안 맞으면서도 이름만 삼위일체고, 예수고, 교리 같은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거잖아요. 그동안 우상인 하나님, 삼위일체 가지고 장난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뭐냐? 진짜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면 그 뒤에 나오는 ‘한 몸’과 연결이 되어줘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상이 아닌 것이 뭐지요?”라고 할 때 실제로 “우상이 아닌 것을 골라잡아라.” 1번) 예수. 2번) 부처. 3번) 알라.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 믿다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개종을 했을 뿐이지 그것은 아무 의미 없거든요.



어떻게 연관시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연관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믿는 예수가 대체 누구를 위한 예수인지, 나를 위한 예수, 흔히 우리가 아는 예수인지, 그걸 어떻게 알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제가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한 일인 것을 언제 느꼈습니까? ‘내가 산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 하면서 햇빛과 공기와 물이 은혜로 온다는 것을 언제 알았습니까? 이것 주신 분 모르면 우리는 언젠가는 다 토해내면서 지옥에서 이를 갈면서 후회해야 돼요.



주님은 공짜가 없습니다. 낭비가 없어요. 그냥 막 낭비한다는 것이 절대로 없습니다. 다 채무관계에 있어요. 제대로 주신 분에 대해서 모르면 준거 도로 다 뽑아냅니다. 그것도 아주 저주스럽게 뽑아내요. “실컷 받아놓고도 내가 준 것을 모르다니!” 하고 패버립니다. 우리는 할 말이 없지요. 왜? 받은 것이 맞으니까.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 맞기에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실컷 받아놓고도 기껏 나를 위해서 산 것밖에 없거든요. 왜? 주님은 눈에 안보이니까. 주님은 항상 추상명사가 되어서 관념이 되고 모호한 개념이 되고 말았어요. 구체적이지가 않아요.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 구체적으로 왔어요. 막상 오니까 다 똑같아요. 열 두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도 그 분을 못 알아봐요.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것도 심사숙고해서 부인한 거예요. “난 저 사람을 저주한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은 그만큼 훈련이 덜 되어서가 아니라 인간은 자기 안에 무슨 괴물이 들어 있는지를 몰라서 그래요. 본인 자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적대적인가 하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내가 구미에 맞춘, 내가 창작해 낸, 내가 만들어낸 신이기에 전혀 적대적이지 않지만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왔을 때는 우리는 발작을 일으킵니다. “왜 괜찮은 나를 건드리십니까? 내 인생을 왜 이렇게 망하게 하십니까? 왜 나를 힘들게 하십니까?” 아주 강력하게 반발하고 적대적이에요.



이러한 성향은 오늘날 우리뿐만 아니고 옛날 구약 때부터 계속 있어 왔습니다. 우리는 구약을 보면서도 이것은 과거지사고 남의 일인 줄만 알았어요. 우리하고 상관없는, “참 철딱서니도 없는 인간들, 그렇게도 하나님을 못 알아보나? 우리는 대번 알아보겠는데.” 하고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하지마세요. 하나님은 인간이 본인 위주로 산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절대로 그 취향과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쪽으로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뭘 노리는지를 알아요. 자신의 가치와 체면과 자존심과 위신, 그리고 자신의 생존문제, 이것 외에는 관심사가 없어요. 나 잘났다는 그것 외에는 관심사가 없어요. 그것만을 위해서 교회 다니고, 철야하고, 기도하고, 선교헌금 내고, 목사 섬기고, 그런 거예요. 그런 짓이나 한 거예요.



네가 망해봐야 “아, 내가 왜 태어났지?” 하는 소리도 나오지요. 그런데 우리는 망해도 안 망하는 요소가 또 있어요. 망해도 끝까지 우리의 자존심만큼은 지옥 가서도 놓지 않는 식으로 남아 있어요. 구약성경에서 찾아오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대결과 충돌, 대결과 충돌사이에서 우리라는, 집단적으로 일괄 동일한 성향을 나타냈다는 것을 뽑아내는 식으로 주께서는 일을 하셨습니다. 모든 자, 하나님을 안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구약성경의 일을 통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몰래 오셨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모습으로 몰래 오신 거예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모습으로 몰래 오신 겁니다. 몰래 오신 분이 이스라엘을 강제로 건져내는 방식을 사용하신 겁니다. “몰래 왔다면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겠습니까?”라는 질문이 필연적으로 나오겠지요? 정답은 이렇습니다. 모르면서도 은혜로 하나님에게 구원받았다. 그들은 모르면서도 왠지 주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모든 사태가 하나님께로 갈 수밖에 없는 사태가 계속해서 일어났어요. 계속해서 벌어졌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2장 9절에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이렇게 했을 때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 해당되는 자들이 따로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제 말이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따로 있는 그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기 때문에. “저요! 제가 그 사랑에 해당되는 그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고 손들고 나온다는 말이지요. 손들고 나오는데 그 뒤의 말이 뭐냐 하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 여기에만 눈독을 들이고 그것만 욕심이 나서 “저요, 저요!” 하지만 막상 실제로 성경에 해당되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쪽에서 거부하는 요소가 있어서 눈으로 봐도 모르고, 귀로 들어도 모르고, 놀라운 것은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에 호소해서 알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 우상숭배 자에요. “나는 마음으로 이렇게 열심히 기도해서 알았어.” 그것은 전부 다 가짜입니다. 성경 말씀 자체가 마음으로는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마음으로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마음으로도 모르면 되잖아요. 꿈에 예수님 봐도 안 본 척 하고 귀로 주님의 음성 들었다고 해도 안 들은 척 하세요. 실제로 그것은 들으나 안 들으나 마찬가지지만. 문제가 뭐냐? 내 쪽에서 하나님을 포착하려는 그것이 문제라고 하나님 쪽에서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포착 안 해도 우리는 구원되는데 우리는 내가 나대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내가 우상이라는 것을 계속 만들어내는 거예요. 삼위일체, 예수, 또 히브리말까지 동원해가면서 백날 해도 다 소용없거든요. 내 쪽에서 안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설칩니까? 뭐가 문젠데요?



평소에 살아온 것이 다 기적이라. 햇빛과 공기를 주신 것도 기적이라. 내가 죽어서 지옥 가는 것도 기적이라. 모든 것이 주의 기적인데 아쉬운 것이 뭐가 있는데요? 아쉬운 것이 없다고 가하시면 예,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제직회 할까요? 아쉬운 것이 없다고. 뭐가 아쉬운데요? 아무것도, 극렬하게 아무것도 안하면 되잖아요. 삼송카드 하나면 다되는 것을 가지고 왜 하는 거지요? 뭐가 문젠데요?



그것은 내가 이 세상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두렵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따라와요. 공포.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겁니다. 누가? 타인의 시선이. 내가 죽는 것? 아니, 우리가 죽는 것은 겁나지 않아요. 남의 시선이 겁나요. 남의 시선이 겁나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가? 손전등 가지고 자기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손전등 들고서 어두운 세상을 찾아가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손전등 든 나는 어두운 줄을 모른다는 사실이에요. 촛불 들고 가는 거예요. 촛불 들고 손전등 비추고 가면 얼마큼 아는가? 내가 아는 범위만큼 알아요. 이것은 지식의 한계에요. 지식의 한계라면 이것은 세상 보는 눈의 한계이고 세상 보는 눈의 한계가 되면 반성의 한계, 회개의 한계가 되는 거예요. 기껏 자기가 아는 죄만 회개하고 반성해요. 촛불 켜고 손전등 비추는 그것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태양은 어떻습니까? 촛불과 태양의 차이점은? 태양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어요. 내가 죽더라도 태양은 웃고 있습니다. 웃는 것인지 그저 불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내가 죽더라도 태양은 그냥 비추고 있는 거예요. 오리지널입니다. original sin, 원죄라고 번역하는데 원래부터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체 지금 발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쫓아오는 두려움, 죽는 두려움, 지옥 갈 두려움, 벌 받을 두려움, 저주받을 두려움, 사업 망할 두려움, 이것에 온통 찔리면서 달려가고 있으면서 계속해서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의, 삼위일체라는 이름의, 성령이라는 이름의 우상들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거 백날 의미 줘봐야 다 헛짓이고 그 의미 준 것으로 인해서 두려움이 생깁니다. “예수님, 제가 기도한 것 기억나시지요?” 이것 때문에, 그 다음에 기도응답 안 될까봐서 두려움이 또 생기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지요.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각에서 빠진 것이 있다고요. 그 빠진 것이 뭐냐? 그 빠진 것이 17절에 나옵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여기에 ‘한’, ‘하나’라는 것, 하나가 세 번이 나오지요. 뭐냐 하면, 중심입니다. 우리가 중심을 몰랐던 거예요. 그동안 중심을 몰랐기에 중심 대타로 누구를 세웠느냐 하면, 내가 세상의 중심인양 행세깨나 하면서 살아왔어요.



뭐, 교회가 공동체라고요? 그 교회가 날 무시하면 대번 이단집단이라고 욕할걸요? 이게 뭐냐 하면, 중심이 나예요. 내가 중심이에요. 그런데 성경에 보세요. 진짜 하나님은 중심이 나라고 쳐주지를 않습니다. “이 근호? 누구십니까?” 우리는 내가 아는 것을 중심으로 삼는 경향이 있어요. 청와대에 아는 사람이 있다든지, 혹은 국회에 아는 사람이 있다든지, 군대 가려고 하면 사단장이 우리 삼촌이랄지, 이렇게 아는 사람을 끌어 모아서 그걸 하나, 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아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로 뭉치자고 해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 말은 우리 자신은 중심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 말은 우리가 그동안 중심으로 생활해온 이것을 중심 아닌 것으로 해체시키는 작업에 나서겠다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하는가? 구약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어요.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사람 중에 지팡이를 든 사람이 모세 한 사람만이 아니었고 집집마다 지팡이 꺼내면 아마 수천 개 나올 거예요. 그 수천 개의 지팡이가 다 같은 지팡이로 보이십니까?



자기 집 지팡이 꺼내서 금호강에 넣어보지요. 물이 갈라지는지. 갈라집니까? 왜 집에 있는 등산 스틱으로는 금호강이 안 갈라질까요? 내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중심에서 나왔기 때문에. 왜 내 기도가 응답이 안 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동안 헌금한 것, 그냥 돈 날린 거예요. 전도한 것 다 헛수고입니다. 전도한 사람 안 받아주십니다. 기도한 것도 다 헛짓이에요. 얼마나 응답이 없었으면 기도응답 받았다고 자랑 질을 할까요? 이것은 다 조작된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수는 작업을 하는데 왜 우리는 교회 와서 나를 새롭게 재편하고, 세우고, 구성하는, 그야말로 하나님께 막 대드는 그 짓을 왜 그렇게 오기로 하는 겁니까? 언제까지 교회 와서 우상숭배 할 거예요? 교회까지 와가지고. 포장은 그럴싸해요. 예수, 삼위일체 다 붙이고 복음 언급하니까 그럴싸한데 따지고 보면 다 우상이라니까요? 아마 이를 갈고 있을 걸? 지옥 가서. 중심은 내가 아닙니다. 내 바깥에 그 중심이 있어요. 그 중심은 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지팡이 가지고 뒤통수 앞 통수 다 때리는 거예요. 지팡이를 가지고 나를 부숴주는 거예요. 아주 나를 가루로 만들어요. 매일같이.



가루되면 다시 한 덩어리 되어서 일어나면 또 때리고 또 일어나서 한 덩어리 되면 또 때리고. 그걸 어떻게 하는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을 잡았어요. 우리 집에서 잡은 어린양은 효과 있고 너희 집의 어린양은 효과가 없고, 그게 아니에요. 주님께서는 일체 형식을 묻지 않습니다. “야, 너희 집 양은 하얗지가 않고 검은 털이 있던데 그래가지고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겠느냐? 나처럼 뽀얗게 하얀 양이어야지.” 그런 것은 묻지를 않습니다. “가만 있자. 줄자를 대보자. 어린양을 잡을 때 몇 센티짜리를 잡아야 되는가?” 그런 것은 묻지를 않습니다.



교회에서 사순절, 오순절 지키고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지키는 것, 그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앞자리 앉았는가, 뒷자리에 앉았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대표기도 5분했는지, 5초 동안 했는지 그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왜 그걸 묻지 않는가 하면, 안 해도 구원되니까. 안 해도 구원되거든요. 초점이 내가 뭐든지 안하게 되면 내가 나 된 것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이 내 수고와 내 노력과 내 열심과 내 절제 있는 행동, 내 관리,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지요. 햇빛과 공기와 비가 외부에서 주어지듯이 나의 구원도 외부에서 주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외부가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잖아요. 그 추상적인 외부가 이제는 구체적인 어떤 인물로 우리에게 찾아온 겁니다. 인물로! 인물로 찾아와서 뭘 했느냐 하면, 제사장을 뒤 엎은 거예요. 그거 벌금 50만 원짜리에요. 성전을 모독한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을 부순 거예요. 그 성전에는 인간의 모든 수고와 헌신과 정성이 집대성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예배가 정성, 정성, 정성으로 집대성되어 있는 것처럼. 때마다 커튼 색깔 바꿔가면서요. 조금이라도 더 정성스럽게. 십일조 할 돈은 다리미질 너무 해서 누렇게 될 정도로 정성으로 드려야 되고.



우리교회 보면 특징이 있어요. 처음 등록해서 출석하면 옷을 잘 입고 오셔요. 한 달 지나면 등산복 입고 와요. 다음 스케줄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은 “내 구원이 내가 신경 쓴다고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즉에 저는 알았습니다.”라는 고백이에요. 세상 모든 것이 내 중심의 배치물들이고 내게 필요한 것들만 꼽아 놓았다는 거예요. 이것은 내 직장이고 내 아내고 내 딸이고, 거기에 일요일 날은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 그것도 놓고, 전부 다 안정된 내 판을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뒤집기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에라, 인간아!” 하고 박살내버리지요. 그걸 뒤집어버리지요. “어떻게 내가 준 햇빛과 공기를 가지고 네가 희희 낙낙하고 있나? 네가 어떻게 영광을 취하나? 내가 준 것을 가지고 한평생 희희낙낙 하면서 네 행복을 추구해? 내가 준 것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하느냐? 내가 준 것은 십자가 피를 알라고 준 햇빛과 공기와 단비였다.”는 겁니다. “주여, 말도 안 되는데 왜 태어나게 했고 말도 안 되는데 왜 햇빛을 주십니까? 나밖에 모르는 인간에게 왜 은혜를 주시고 나밖에 모르는 인간에게 오늘도 왜 공기를 주십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이끌어 내기 위함입니다. 그 십자가 뭐냐? 이세상의 몸은 두 몸도 세 몸도 아니고 오직 한 몸밖에 없다고 해서 ‘하나’에요. 그 한 몸에서 나온 것이 뭐냐? 피와 성령과 물입니다. 주보 뒤에 보면, 물론 늦게 오시니 읽을 새도 없겠지만, 하여튼 여기 나와 있어요.



【참된 신을 증거 하는 증거로 다음의 세 가지 제시하십니다.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한일서 5:8) 여기에 나오는 ’성령과 물과 피‘는 인간 쪽으로 제시한 증거물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이란 과연 어떤 신이 참된 신인지 아닌지를 판정할 권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참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 성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세 가지를 남기고 가신 겁니다. 인간으로 인해 발생된 상처, 그곳은 곧 물과 피와 성령이십니다. 물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받은 물세례로서, 이 세례로 인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처럼 죄를 짊고 가야할 신세가 된 것입니다. 피란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내리신 불세례로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심판의 끝을 보여주십니다. 성령이란 곧 예수님의 사역이 처음부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기에 인간들이 원하는 스케줄이나 요구사항과 상관없이 움직이신 메시야라는 겁니다. 이 세 가지 증거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범 우주적으로 본격화됩니다.】



내 기능이 아니에요. 내 기도도 아니고 내 헌신도 아니고 내 낮아짐도 아니에요. 내 충성과 봉사도 아닙니다. 나는 물 건너갔어요. 나는 나하고 결별하세요. 모든 구원은 예수님 혼자서 이룬 그 물과 피와 성령, 물이라는 것은 물세례, 피라는 것은 불세례, 성령이란 성령세례, 예수님 한분이 하신 결과물로 온 거예요. 그 결과물이 뭐냐고 저한테 묻는다면, “나는 나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필요도 없고 해도 소용없습니다.”라는 놀라운 고백이 나와요. 이런 놀라운 고백이! “앞으로 죽이든 살리든 그것은 주님이 알아서 할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놀라운 고백이 나온다니까요.



원천적으로, 우리 엉덩이까지 원천적으로, 내가 손들고 까불대면서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깔고 앉은 그 바탕, 엉덩이까지 몽땅 주님의 보혈의 피라는 쟁반 위에 있습니다. 보니까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같이 똑같은 인간들, 똑같이 죄지은 인간들이 한 쟁반에 뭉쳐서 한 몸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와 보니까, 나를 부인하고 보니까 비로소 그동안 우리라는 것이 나의 필요에 의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집단을 만들었어요. 사람은 혼자 죽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죽거든요. 같이 죽으면서 마치 자기혼자 살고 남은 다 죽는 것처럼 평소에 그런 느낌으로 살아온 것, 그것 문제 있습니다.



이럴 때 우상 아닙니다. 이럴 때만, 이럴 때만 우상 아니에요. 부산의 황령산(해발 427미터)이라는 산 위에서 어떤 여자가 살려달라고 소리를 치는 소리를 듣고 경찰에서 강력사건인줄 짐작하고 주변에 있는 “3개 경찰서에 연락해서 당직 형사 30여명을 비롯해 112타격대, 지구대 경찰관 등 70여명이 현장으로 긴급 출동”했어요. 별 거 없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취업준비생이 취직이 안 되니까 하나님한테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면서 빌었던 거예요. 죽여 달라고 했어야지요. “주님은 취직을 안 시켜 주는데 이 못돼 처먹은 나, 취직하려고 애쓰는 나를 죽여주옵소서. 내가 주의 일을 훼방하고 도전하고 있는 악마적인 짓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외쳐야 될 것 아니에요?



물론 죽여 달라고 해도 경찰은 출동했겠지요. 사람 사는 것이 꼭 뽑기 판 같아요. 백날 사는 것이 일요일 교회가기, 월요일 회사가기, 뽑기 판이 뱅뱅 돌아가잖아요. 맨 그 자리, 그 자리를 뱅뱅 돌아요. 회전목마라, 월화수목금토일, 월화수목금토일, 뽑기 판을 아예 뽑아내야 해요. 그 뽑기 판을 들어내 버리고 거기에 주님의 뽑기 판을 집어넣으면 매일같이 피용서, 매일 같이 물세례, 매일같이 햇빛과 공기주시는 은혜로 살려줌, 살 가치도 없는 것을 또 살려줌, 또 살려줌, 주님의 은혜만 계속 돌아가는 거예요.



거기서 뭘 뽑아도 전부 다 주님의 은혜에요. “주여, 제가 없어도 되는데 왜 있어야 됩니까?” 이것부터 출발하세요. “주여, 우리가 왜 있어야 됩니까? 없어도 되는데 그냥 있다고 하면 안 되고 없어도 되는데 왜 있어야 하며 왜 살아야 됩니까?” “너는 내가 생산한 우리에 속했기에 살아야 된다.” 아무 가치도 없는데 살았다는 말을 할 때는 “너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증거 하라고 지금 매일 같이 주님의 뽑기 판 위에서 이렇게 돌고 있다. 어지럽지?” 그런 식으로 돌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뭔가 두렵다든지 쫓기고 있다는 것은 자기 것이 있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 때문에 계속 두려워하고 있어요. 개척교회 했다. 아는 친척들이 왔을 때 그 개척교회 목사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아는 사람, 아는 시선이 없을 때는 “우리끼리, 아는 우리끼리 모여도 행복하고 숫자 적어도 참된 교회는 숫자를 묻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친척들이 와서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동안 목회 10년 동안 해놓고 사람 얼마나 끌어 모았느냐?” 이렇게 할 때 얼마나 수치를 느끼겠어요?



수치를 느낀다, 무섭다, 두렵다, 이것은 내 것, 개인이 따로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남들의 시선에 쫓기면서 살아가는 바보 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남의 시선은 그냥 촛불이고 손전등이에요. 제대로 보려면 태양 같은 주님의 빛 앞에, 어떤 것도 숨기지 못하는 그 빛 앞에 우리 자신을 노출시켜야지요. 잠언서 25장 2절에 보면,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숨어 있는 하나님의 본심을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다 공개했습니다.



그 인간들 예수님 죽였습니다. 베드로도 부인했습니다. “나 저 사람 저주한다.”고 했어요. 거기에 우리가 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다 같은 아담의 자손이라 똑같은 성질이에요. 이제는 우리 성질을 압시다. 우리 속에 괴물 들은 것을 아시고 이렇게 매일 같이 주님 앞에 철딱서니 없이 반발하고 반항하는데 이상스럽게 주님께서는 꾸준하게 끊임없이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생명 주셔서 결국 살려내는 이유는, “네가 사는 근거는 네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에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하라.”고 우리를 지금도 살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한 몸임을 깨닫게 하는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라는 용어 입에 담았다고 구원에 성공한 줄로 착각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평소에 교리 공부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는다고 신앙이 증가 한다고 착각하지 말게 하옵소서. 도리어 매일 같이 시달리고, 지옥 같은 세상에서 힘들어하면서 자신의 원천과 뿌리를 하나님 앞에 노출당하는 그 사람이 성도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