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시키는 언약
2015년 9월 20일 본문 말씀: 신명기 8:17-20
(8:17)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8: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8:20)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하나님의 관심사는 언약에 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내편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그 착각이 뜯기는데 있어 혹독한 과정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실은 ‘인간은 오늘도 고생한다’는 주장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고생을 하던, 힘들게 살던 거기에 대해서 불평한 입장이 되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고집도 만만치 않습니다. 호락호락 하나님에게 순종할 자들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도리어 하나님을 걱정합니다. 너무 많은 낭비를 하신다고 말입니다. 즉 은혜를 쏟은 만큼 만족스러운 성과가 나오지 않다는데 대해 하나님의 비효율성에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그 예가 바로 오늘 본문에도 나오고 창세기 6장을 가지고도 언급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언약을 어긴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힘들게 이끌고 온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 하나님 체면이 뭐가 되냐고 인간들이 따지고 들고 싶어합니다. 이스라엘 만큼은 순종하지 않더라도 특별 취급해서 몽땅 원래 약속대로 구원해주셔야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조언하고 싶어합니다.
창세기 6:5-7의 경우를 두고서는 이러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적어도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다면 자신이 만들어진 인간에 대해서 뒤늦게 후회하거나 근심할 사항을 예측하셨다면 애시당초 그런 불상사가 생겨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해야 옳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을 것입니다. 선악과 나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따먹어서 죽게 될 가능성이 있는 그런 위험한 나무에 대해서 아예 접근금지 조치가 완벽해야 되지 않으냐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의 범죄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책임져야 될 대목이 엄연히 있기에 모든 징벌을 인간에게나 악마에게만 쏟아넣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싶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이 매사가 정확하게 추진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근원적으로 모르고 있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타인에게, 남에게 일어난 일이 실은 본인의 내부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형편에 있다는 것을 감안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내부는 인간이 보이에 낭비의 연속입니다. 이것은 충동입니다. 충동이란 우발적입니다.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이란 이유가 있어, 의미가 있어 허락맞고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와 이유란 이미 벌어진 상황을 대충 수습하기 위해 위장책으로 행사하면서 짜맞춘 겁니다.
사람이 누구를 보든지, 누구를 대하든지 인간 내부의 충동을 멈출 때가 없습니다. 인간의 기분이란 일정하게 리듬에 맞추듯이 정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맹목적입니다. 당위성이란 아예 없습니다. ‘그냥 그러고 싶을 뿐입니다’. 인간들의 직업 구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그 일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차후적으로 이유와 의미를 달아봤자 구차스러운 변명만 늘어놓은 것입니다. 그래가지고서는 말끔하게 정당한 것으로 처리되는 게 아닙니다. 17절에 보면,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태여 왜 이점을 염려하는가 하며는, 인간은 아무리해도 근원적으로 이 고백에서 못벗어남을 익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 ‘익히 아심’이 바로 ‘하나님의 침착성’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언약’이고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고집하시는 이유는, 인간들의 걷잡을 수 없는 충동성 삶을 고려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주장하는 합리성이란 실은 인간 내부의 충동을 모른척 하며 내숭떠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속으로 “내 능력과 수고로 이런 재물을 얻었다”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억누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침착함으로 인정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시편 118:22-23에 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하는 그 필연성을 내용으로 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구원받아야 될 이스라엘이라면 바로 이 내용이 누락없이 그대로 장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일하시면서 약한자, 죄인, 장애자, 가난한 자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소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나아가면 진정 예수님의 참모습은 12제자들을 통해 보다 뚜렷하게 됩니다. 그중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됩니다. 즉 충동과 욕망의 근원적인 자리까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그 성취성을 제자들의 내부에서 발현코자 하십니다.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인간 마음 내부에서 그 성취성을 스스로 드러내십니다.
왜 하나님에게 있어 일체의 낭비가 없으신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 본심과 관련지으면서 아버지의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아 버려진 돌’ 바로 이 ‘돌’이 시작점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진짜 자기 백성을 예수님처럼 ‘버려진 돌’로 몰아세우고자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언약 구성 내용에 인간의 잘남이나 인간의 수고나 인간의 성실함이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자진해서 스스로를 ‘버려진 돌’로 여기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언약을 통한 지적을 통해서 성사시키십니다. 즉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까지 예수님의 자기 공로를 위한 재료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사용하십니다. 이런 작업이 이미 12제자들 상대로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사람에게나 버려진 돌이 되어 마땅함을 인지하는 자가 바로 버려진 돌로 만든 성전의 일부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 어떤 대우를 받더라도 고마워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9강-신 8장 17-20절(멸망시키는 언약)1509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8장 17-20절입니다. 구약성경 275페이지입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 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 함이니라”
민족들, 하나님을 모르는 민족들이 멸망함같이 너희들도 멸망하리라는 이 뜻은 내가 너희를 구원하려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개개인을 구원하려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은 언약을 만들어내고 언약을 살리려고 하는 겁니다. 언약을 구체화시키고, 이 땅에 언약의 세계로 전환시키는데 너희들은 그냥 소품으로 동원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 피조물의 입장이죠.
근데, 이게 피조물의 입장이고 하나님의 뜻인데요,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부터 나보다 중요한 것이 없게 돼요.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 그러한 인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마지막은 내가 제일 중요하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일들이 다 쓸데없는, 어떤 계산되지 않는 낭비같이 느껴지게 되죠.
바다에 비를 내린다, 바다에 물이 많잖아요. 많은 물이 있는데 거기다 또 비를 내리면 어쩌라는 겁니까? 낭비잖아요. 사람들은 자기가 이해 안 되면 무조건 낭비라는 거예요. 특히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나 일반교인들도 그와 같은 생각들을 많이 갖고 있어요. 그래서 성경해석을 이렇게 해줘도 그들은 상당히 거부감이 강렬한데요.
예를 들어서 창세기 6장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절,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는 그런 이야기네요.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쓸어버릴 인간을 뭣 때문에 만들어놨느냐? 이것도 낭비 아니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것도 낭비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죽일 것을 왜 태어나게 했느냐 말이죠. 죽을 것이 왜 태어났느냐 이 말이죠.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의 계획이 악함을 아시면 악하지 않도록 그렇게 해야지, 실컷 악하게 해놓고 혼자 근심하시고 걱정하시고. 근심걱정 하기 전에 조치를 하시든지.
그래서 학자들이나 목사들이나 일반교인들은 왜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는지를 몰라요. 쉽게 말해서 성경 백독, 만 독 읽어도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뜻을 몰라요. 그 모르는 이유를 지금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도 망한다, 이방인도 망한다, 그러면 망할 인간을 왜 만들어놓고, 망해야 할 나라를 왜 이렇게 억지로 만들어놨습니까? 그것은 낭비라는 그 생각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저들처럼 안 되면 우리가 구원받습니까? 라는 생각이 깔려있어요.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건너와서 죽었잖아요. 죽었으니까, 아! 그들은 죽었다면 우리는 안 죽기 위해서는 저들처럼 되지를 말자. 그러니까 이 성경 해석이 이게 전부다 자기위주로 성경해석이 되어서 신앙생활 몇 년을 해도, 성경 몇 독을 해도 모르게 되어 있어요. 딱 하나를 놓쳐서 그래요. 그게 뭐냐 하면 구약에 있는 모든 이야기는 그 사람들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내 속에 있는 어떤 괴수나 괴물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저 사람과 내가 일대일로 대응하면 안 돼요. 저 사람도 한 사람, 나도 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 속에 있는 것이 바깥에 투명하게 드러나게 되면 구약성경입니다. 내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저들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내 속에 들어있는 그 무엇을 이야기한 거예요. 그걸 충동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충동.’ 충동은 부글부글 끓어요. 어떻게 조절이 안 됩니다. 조절이 안 되는 이유가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조절이 안 돼요.” “관리가 안 됩니다.”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그 이유는 몰라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왜 멸망하실까? 또 대표적인 것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 뻔히 알면서도 왜 사전조치가, 예방조치가 안 되느냐? 예방조치 안 된 것은 하나님 책임이지, 그 따먹으라고 유혹하면 기어이 아무리 참아도 결국 따먹을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많은 책임이 있다는 거죠. 애가 분수대에 빠졌다, 그러면 분수대에 빠지지 않도록 어떤 조치를 해야지, 밥 먹고 있다가 애가 없어져서 두 시간 동안 찾아보니 분수대에 빠져있다는 거예요. 그 뭐 일을 잘못 한 게 아닌가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낭비처럼 보이는 이것이 우리들의 생각 내부에, 인간 내부에, 그게 낭비라고 보인다면 우리는 더 많은 낭비가 우리 내부에서 들쑤시고 있는 겁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몰라요. 왜 이래야 되는지도 몰라요. 나는 왜 이리 살아야 하는지 몰라요. 우리는 이유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욕망의 충동대로, 그냥 폭발하는 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뿐이에요. 그래서 항상 우리는 어디로 튈지 몰라요.
우리 식구들이 저한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꼭 물가에 내놓은 자식 같다고. 어디로 튈지를 모른다고. 멀리서도 걱정을 얼마나 하는지 몰라요. 침착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 침착이 오늘 본문입니다. 굉장히 침착해요. 근데 침착한데, 이 하나님의 침착하심이 우리의 충동과 일치가 안 되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쓸데없이 낭비를 했다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여,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애를 먹이죠?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거든 그들을 다 죽여야 하나님의 뜻이 맞습니다. 근데 잠시 질문 있습니다. 죽여야 할 것을 왜 만들어놨죠? 하나님, 고거 낭비 같은데요?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바로 죽어야 될 것, 그 낭비라고 느껴지는 그것이 바로 사실은 니 속에 있는데, 니 속에 있는 것을 니가 다 설명을 못하니까, 니는 그 속에 있는 충동이 바깥으로 나오니까 니는 낭비로 보는데 사실은 그 낭비요소가 니 안에 가득 들어있다는 겁니다.
가득 들어있으니까 우리는 침착하지를 못하고 그냥 되는대로, 튀어나온 대로, 불쑥불쑥 성깔대로, 성질대로 그냥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요. 모든 인간은 사실은 막 살고 있는 겁니다. 막 살고 있는 것을 막 산다고 하니까 저만 욕 얻어먹고 있는데. 사실은 모든 것이 막 살고 있어요. 사람들이 어떤 직업을 하면 됩니까? 라고 이야기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것도 잘못된 질문이에요. 사실은 사람들의 모든 일은 할 일 없어서 하는 겁니다.
농사짓는 거요? 포도농사 짓는 분이 계시니까 이런 소리하면 안 되지만, 그거 안 지으면 할 일이 없어요. 사람이 제일 괴로운 것이 심심한 거예요. 외롭고 심심한 거예요. 외롭고 심심하면 사람들 모이는데 가서 이야기하면 되느냐, 사람들 속에 있다고 해서 안 심심할 줄 알아요? 대화가 통해야 안 심심해요. 천명 모아놓아도 심심해요. 피하고 싶어요. 그 자리를. 대화가 안 통하는데 말을 끄집어낼 수가 없어요. 그것은 나의 충동을 그 사람이 자기 충동 간수하기 바빠서 내 충동에 신경을 못 써줘서 그래요.
내 충동은 어디에 담겼느냐, 포대기에 담겼는데, 그 포대기가 주님의 침착이라는 포대기에 담깁니다. 쉽게 말해서 니 속에 있는 우글우글거림을, 이제는 니 속에 있는 뱀 한 오천 마리를 니 속에 있는 포대기에 담지 말고 내 포대기에 담아라. 그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언약이 돼요. 그게 언약이 됩니다.
자,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봅시다. 제가 낮에 이런 이야기 했죠. 무법자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걸 설명할 필요가 있는데, 세리와 창기와 장애자들, 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냥 불쌍히 여기는 것 외에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 라고 한 거예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여 나는 이런 법을 지켰습니다.” 라고 내밀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창기가 욕 얻어먹기 바쁘지 창기가 무슨 잘난 것이 있겠습니까? 강도가 구원받은 것도 그거거든요. “잘했습니다. 마땅합니다.” 지금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이여, 참 일을 침착하게 잘 하셨습니다.”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여, 저를 제대로 보셨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주님이 우리를 보는 안목을 본인이 같이 공유하고 있다는 것, 이게 기적이고 이게 은혜에요.
남들이 보는 시선 말고 주님이 보는 시선에 내 안의 현장에 아직도 녹아있다는 것, 아직도 살아있다는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인생의 무게가 갑자기 제로가 되는, 제로 그램이 되는, 그 짧은 순간이지만 몸무게가 새털처럼 가벼워져요. 내가 구태여 나를 안 따져도 되는구나! 라는 그런 기쁨이 지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세리와 창기가 다 있는데, 문제가 예수님께서 세리, 창기, 문둥병, 절름발이 하다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고아와 과부로 인식이 넘어가고, 가난한 자에게 인식이 넘어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그냥 신체적으로 장애자들만 불쌍하다는 인식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장애자들에게 주목하는 거예요. 사회적 장애자들. 가난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거는 가난이 노력에 의해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가난이라는 사회적 구조자체가 필수적으로 가난을 유발하게 되어 있어요. 상대적으로 가난을 유발하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반드시 가난한 사람이 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충동은 그것이 용납이 안 되지만. 가난하게 되어야 해요. 이게 잠언서에 나와요. “가난한 자도 부한 자도 다 내가 지었다. 니가 신분 상승하려고 까불지 마라. 내가 다 지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가난한 자라도 기죽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만 알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개인으로 했던, 세리와 창기, 장애자들,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다. 무법자다. 이렇게 했는데, 그 무법자가 사회적으로 약자라 하죠. 사회적으로 약자한테 전가하다가 그 다음에 뭐로 넘어가느냐 하면 열 두 제자로 넘어갑니다. 열 두 제자. 열 두 제자가 뭐냐, 이스라엘이에요. 예수님으로 인하여 새로 구성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헤롯 왕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을 완전히 쑥대밭 만들죠.
그 베들레헴에서 억울하게 죽었던 아기들, 그 아이들을 라헬의 아이라고 선지자는 침착하게 예언을 했어요. 라헬이 이 땅에서 메시아가 등장하면 통곡해야 된다는 시나리오가 있거든요. 그 통곡해야 될 때, 알아서 통곡하면 소용없어요. 통곡하는 요인이 찾아와야 되는데, 그 통곡하는 요인이 마침 타이밍 맞추기를, 예수님과 같은 마을에 살았던 주민들이 그 아이를 잃어 통곡하는 라헬의 역할을 맡아버렸어요. 자식이 생뚱맞게 공권력에 의해서 다 몰살당했으니까요. 아기 예수 찾는다고 엉뚱한 아기들을 다 죽여 버린 거예요.
그런데 침착한 성경에 의하면 반드시 그렇게 돼야 돼요. 언약에 의하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죽음과 엮어진 사람이 되어 버려요. 개인이 구원받았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관심사는 개인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실제적으로 이 땅에, 침착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성하느냐, 초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어떻게 만드는가? 이스라엘이 언약대로 실행되면 되죠. 언약의 결과로서. 그러면 언약이 올 때 어떻게 오는가? 그것은 사람 구원, 나는 니 위주로 일하지 않는다. 그거에 대해서 받아들여야 되죠.
그게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세리와 창기. 이 사람들이 뭐 나쁜 짓해서 세리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강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잖아요. 흘러가다 보면 강도되었고, 세리 되었고, 창기 되었고. 흘러가다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되었고, 절름발이 되었고, 장애자 되었고, 그렇게 된 거예요. 된 것인데,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는 이거는 하나님이 쓸데없는 짓을 했다, 낭비를 했다, 하나님의 낭비로 본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의 충동은 남들처럼 되고 싶어요. 그런데 자기는 남들처럼 못되고 굉장히 억울한 느낌이 든다 이 말이죠. 왜 나만 가난해야 되고, 왜 나만 힘들어야 되고, 왜 나만 장애자고, 왜 나만 교통사고 일어나서 15년 동안 누워있어야 되고, 왜 하필이면....., 우리 남편이 15년 동안 누워있는데, 이게 나는 드라마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거예요. 하여튼 뭐 안 되면 다 드라마 탓하는데. 이거는 누구나 무작위적으로 일어날 수가 있는 겁니다. 누구나에게 일어날 수 있어요.
왜 그런 것만, 나쁜 것만 이야기 합니까? 드라마 배우들이 너무너무 예쁜데, 나도 어느 날 거울을 보니까 립스틱 하나만 발랐을 뿐인데 완전히 배우가 따로 없어. 이런 드라마 같은 것도 한 번쯤 생각해보세요. 항상 좋은 쪽으로. 그러나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한테 주어진 과제는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침착하게 이루어진 그 의미와 취지에, 우리의 충동 때문에 거기에 매치가 되는 마음을 안 갖고 있다는 이것이 우리의 허점이 되고 이 작업을 위해서 오늘 본문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한 번 봅시다. 17절에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지금 하나님께서 염려하고 계시는 거예요. 니가 어떤 재물을 얻을 때 니 손과 니 능력과 니 기술과 니 요령으로 재물을 얻었다고 니가 생각할까봐 걱정된다고 하시거든요. 근데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보느냐 하면 하나님의 쓸데없는 낭비로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런 말씀을 준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월급 탔습니다.” 라고 마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참, 한 달 동안 고생했는데 에고 이것밖에 안 되나?’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한 달 고생했는데 이천만원밖에 수입이 없다니?’ 이렇게. 전부다 자기 충동에 자기가 감당이 안 돼요. 자기 충동을.
제가 옛날, 1978년도에 교사생활 할 때 십 칠 만원 받았거든요. 제가 얼마나 교사를 그만두고 싶었는지. 왜냐? 내가 일한 것보다 더 많이 줘가지고. ‘나는 도대체 이런 식으로 남한테 피해 입히며 살아온 적이 없는데....,’ 일은 요만큼 했는데 월급은 너무 많이 주는 거예요. ‘이렇게 미안해도 되나?’ 진짜입니다. 나는 객지 생활하면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았지 이렇게 그것 외에 돈이 남는다는 것은 뭔가 도둑질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지금은 제가 봉급을 언급한 것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하고 연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도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힘을 믿습니다.
문제는 이게 아무리 돈을 주고 해도 우리 마음속에는. 우리는 알죠. 신명기 8장을 알아도. 알면 뭐합니까? 다 날아가 버리고 실제로는 정말 너무 힘듭니다. 이것밖에 안 됩니까? 이렇게 적은 것으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이것밖에 안 되거든요. 하나님의 언약과 매치가 되지가 않아요. 그게 하나님께서 쓸데없는데 힘을 쏟고 정작 내가 원하는 것에는 힘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근데 이 마음이, 근데 그것 때문에 걱정하지 마세요. 바로 그 마음은, 사실은 신명기 8장이 이미 우리 속에 들어있었어요.
우리 속에 있는 우리의 솔직한 마음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신명기 8장을 우리에게 읽게 하신 겁니다. 근데 이게 들추어내는 작업이 열 두 제자에게 주시던 주님의 행했던 그 작업과 동일한 작업이에요. 예수님께서 “내가 죽어야 너희들이 구원된다.”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제가 있는데 주님을 왜 다치게 하겠습니까? 제가 있잖아요? 신앙 좋은 제가 주님을 지키겠습니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탄아 물러가라” 했다 이 말이죠.
그 말은 뭐냐, 베드로에게 사탄의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주님을 슬프게 하고 주님이 싫어하는 마음이 베드로 속에 있다는 것을 베드로가 인정을 하지 않은 거예요. 근데 그걸 주께서는 들추어주셨다는 것, 이게 뭐냐 이스라엘이 되고 있는 과정 속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지키려고 생각하지 마시고, 아, 낭비가 아니고, 나는 성질이 급하고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정신없더라도, 내 속은 바로 나를 질타하고, 내 속에 어두운 마음을 들추어내는 이 신명기 8장의 말씀은 내 안에서 여전히 언약으로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언약을 지키려고 하지 마시고 언약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 누구와 함께? 니 충동과 함께. 니가 자제하지 못하고 절제하지 못하는 너의 욕망과 함께 언약이 함께 있는 겁니다. 왜? 그게 이스라엘이니까.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니까요. 지금까지 모든 해석은요, 성경말씀을 앞에 두고 내가 성경말씀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내 허락도 없이 성경말씀이 들어와서 내 안에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러니까 해석이 안 되는 거죠. 자꾸 지키려고 하니까.
군에 가서 처음 교회를 갔는데, 그 전에 교회 간 적이 있지만, 교회에 대해서 안 좋아하고. 진짜 진지하게 이제 하나님 믿고 교회 다니려고 교회를 갔는데 군에 가보니까 어떤 특징이 있었느냐 하면 군에서 나 하나가 일을 안 해도 군대가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해변을 지키는 부대인데 동해안 방위사, 동방사에 근무했는데, 해안 아무도 안 지켰어요. 위에 대대장부터 중대장까지 아침에 출근하면 전부다 놀러가기 바쁘고 부대에 아무도 안 나와요. 아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간첩 하나 안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어가지고 해안 초소 지키라고 할 때부터 간첩이 있는 대로 다 들어왔어요. 이런데 저런데 간첩이 다 들어와서 전쟁 나고 난리가 났잖아요. 지켰는데...그러니까 군대 요령이 뭐냐 아무것도 안 해야 군대가 된다는 사실을 군대 가서 알았어요.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극렬하게 아무것도 안 했어요. 나만 안 한 것이 아니고 전부다 족구하고 축구하고 그냥 놀았어요. 아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어요. 근데 빡세게 군기가 들어갈 때 사고사고가 왜 그렇게 많이 나는지.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충동을 조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놔두면 충동인지 아닌지 모르는데, 충동을 억지로 억압을 하니까, 전에 이야기 했지요. 욕망이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억압되는 것이라고. 이게 억압이 되니까 용수철처럼 튕겨 나오는 거예요. 우리의 충동은 우리가 누르려고 하지 마세요. 누르는 분이 따로 있습니다. 주님의 침착함대로 주께서는 그걸 사용을 해요. 여기 멋들어진 소품이 있네! 요기 멋들어진 재료가 다 있네!
그래서 신학자들, 목사들, 교인들이 성경을 왜 해석을 못하는가? 이 사람들을 교육을 시켜서 교회 사람으로 억누르기 하니까 해석이 다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근데 시편에 118편인가, 거기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18편 22절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시편에도 나오지만 베드로전서 2장 7절에 보면 버린 돌이 성전이 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로 해석하는 제일 처음 입구가 그거에요. 사람에게 버려진 돌이 성경 전체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버림받을 때 어떻게 하면 되냐, “나는 죄인입니다.”는 쪽으로 버림받으면 돼요. 오늘 신명기 8장 보셨잖아요. 이거 안 됩니다. 못 지킵니다. 그런데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의 말씀대로 버림받아야 마땅합니다는, 그게 느낌이 오시면 이미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그 언약과 관계있는 열두 제자이며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어느 누가 자기 자신이 버림받아 마땅하다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성령을 받게 되면 말씀을 통해서 아! 버림받은 자 맞구나! 예수님이 이것 때문에 우리 대신 버림받았구나! 십자가가 바로 그 사건이구나! 비로소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깨닫게 돼요. 버림받은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서 사람들이 기이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성전인 새로운 나라가 거기서 만들어져요.
그걸 위한 작업으로서 주께서는 이것이, 신명기 8장이 우리 내부에 들어와 버려요. 내부에 들어와서 니가 월급을 받으면서 니 힘으로 벌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 하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니가 언약대로 멸망 받아도 마땅하다는 겁니다. “오케이 마땅합니다.” 이러면 돼요. 아무 문제없어요.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관리하려고 하지 마세요. “니는 버림받아도 마땅해!” “예. 죽어도 마땅합니다.” 이러면 관계없어요. 왜? 그게 바로 하나님의 침착함이니까. “나는 니에게 분명히 이야기한다. 언약대로 안 하면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이든 다 죽인다.” “예. 주의 뜻대로 시행하소서.” 그러면 돼요. ‘안 되는데....그러면 내가 지옥 가는데.’ 이러면 그거는 아주 수상합니다.
교회 그렇게 오래 다니고 성경 그렇게 많이 봐도 성경해석이 안 되는 게 뭐냐 하면, 내가 애초에 내놓은 자식이다. 그것도 물가에 내놓은 자식. 버림받았다는 생각부터, 그것부터 출발합시다. 그러면 성경해석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 “주께서 이 말씀대로 침착하게 내 안에서 시행하셨기에 내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라는 그 고백. 그거 성령의 고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니가 재물을 얻을 때, 절대로 니가 애써서 얻었다고 하지 말라는 그 말씀, 그 말씀과 우리가 정말 너무나 거리가 먼 우리의 속성을 갖고 있음을 주의 은혜로 폭로 당했으니, 이제는 주의 언약의 사람이 되게 해주시고 나의 사람 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