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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50강-장대한 원주민(신9;1-3) 15092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9. 30. 07:20

2015-09-27 14:51:38 조회 : 56         
   장대한 원주민 150927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장대한 원주민(신명기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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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9-27 15:33 
장대한 원주민

2015년 9월 27일                          본문 말씀: 신명기 9:1-3

(9:1)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9:2) 그 백성은 네가 아는바 장대한 아낙 자손이라 그에게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9:3) 오늘날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그들을 멸할 것이라

하늘의 뜻이 지상에 얼룩을 남기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입장에서 지상에 남겨진 역사의 얼룩과 흔적을 통해서 하늘의 뜻을 파악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11에 보면,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늘의 일을 자꾸만 지상에 쏟아지고 그 쏟아짐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마감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인생이란 그냥 막연하게 주님만 기다리는 그런 삶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도중에 그만둘 리가 없습니다. 역사 속에 특이한 현상을 남기는데 제자들을 활용하게 됩니다.

즉 하늘의 뜻을 하늘에서 찾아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보여주면 믿을게”라는 자들에게 성도는 자신의 몸과 인생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지상에 새겨졌음을 성도들도 명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런 하나님의 취지가 쉽게 상실되어버립니다.

신명기 9:2에 보면, “그 백성은 네가 아는바 장대한 아낙 자손이라 그에게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낙 자손 앞에서 기죽고 있음을 미리 알고 계십니다. 의도적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난공불락의 종족으로 길을 가로 막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셔야 할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안일한 구원관을 거부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천국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나 잘 사는 곳’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개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내가 잘되는 곳이 아니라 언약이 언약대로 실행되는 곳이라서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곳입니다.

이 ‘하나님의 만족’은 필히 인간들의 고유의식이 무산되는 작업이 치러져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인간들은 천국도 자기들의 세계인 줄 착각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본인이 원하는 세계일 경우에만 소망의 대상으로 집어넣습니다. 본인이 원치 않는 세계라면 안들어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곳 뿐입니다. 다른 천국은 없습니다.

이러한 하늘의 뜻이 지상에 역사적으로 펼쳐집니다. ‘아낙 자손은 감당 불가한 민족’이라는 인식이 이스라엘이 확고히 박혀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께서는 넣어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희망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처리 이후’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즉 인간들이 감당못할 일을 좋으신 하나님이 감당하므로서 본인들은 거저 먹을려고 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가지 없는 짓입니다. 자기 이익에 최종 의미를 둔 마음 자세를 보여준 것입니다. 장대한 민족이 있든 없든, 또다른 장애물이 있든 없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어쨌든 말끔하게 치워놓은 빈 터에 발을 들여놓고 싶어합니다. 자신들이 입성하기 전에 그 어떤 요란스러움이 있든 없든 자신들은 챙기기 수월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입니다. 마태복음 26:26-28에 보면,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제자들 입장에서 예수님의 제안에 대해서 난해하거나 거부거리가 전혀 있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먹는 음료와 양식을 먹으면 되니까요. 떡은 먹고 포도주는 마시면 그만입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이를 먹고 난 뒤에 예수님과 헤어져야 한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는 겁니다. 즉 제자들 입장에서 예수님이 주신 살과 피로 인하여 보다 안락하게 평안한 여생이 보장될 줄로 알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언약을 제자들 자기 신상에 유리한대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제자들의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상황을 연이어 들이닥치게 하십니다. 왜 꼭 그래야만 했던걸까요? 그것은 바로 ‘감당거리 치워줌’의 형태가 ‘더 불가한 감당거리’를 만나게 상황 안에서 드러내보이도록 하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나 제자들에게 있어 그 감당 안됨은 곧 제 자신의 본질의 대변해준 상황과 연관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이상이 되는 경우를 자기 속으로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낙자손은 주변 민족의 선망의 대상입니다. “우리도 재들처럼”이라는 구호를 외칠만 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희망을 스스로 단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희망없음은 곧 ‘나 없음’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생각을 도외시해서 그러합니다. 창세기 6:3-4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장대한 민족인 네피림이 나옵니다. 이들의 자손은 그 시대의 유명한 용사였습니다. 하지만 이들 민족은 하나님의 무서운 분노 앞에서 소멸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들은 자신의 희망하는 것들로부터 떨치고 빠져 나올 수 없는 약점을 보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16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외부의 시선으로 주어지는 내부적 수치심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가지고, 복음의 전리품으로 대외적으로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개인적으로 지속적으로 부끄럽고 실패스러운 일을 유발하시면서 오로지 ‘복음으로 인해 수치를 당하지 않음’만 자랑하게 하십니다. 이게 바로 구원된 자의 영역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속에 내가 극복할 수 없는 자존심이 있음을 알게해주시고, 복음은 죄악된 자존감을 사용해서 예수님만 자랑케 하는 작업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9-29 06:47 
50강-신 9장 1-3절(장대한 원주민)1509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9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275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그 백성은 네가 아는바 장대한 아낙 자손이라 그에게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오늘날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

하늘의 일이 땅에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구약 성경 제대로 보시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알랴, 이렇게 자꾸 생각하지 마시고,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기의 본심을 이 땅에, 구약 성경 역사에다가 이렇게 쭉 깔아버렸어요. 카펫 깔듯이 깔아 버리니까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는 진행 방향을 따라서 희한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 희한한 일들이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 쳐다보면서, “하나님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 취직시켜 주세요.” 라고 자꾸 그러지 말고 지상에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다 나와 있거든요. 지상에. 지상을 통해서 하늘의 것을 세우면 됩니다. 평지에 얼룩덜룩한 주님의 무늬를 바로 이렇게 세워버리면 그것이 지상과 하늘 사이에 연결하는 사다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나실 때 여전히 사람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거든요. 천사가 하는 말이 “왜 하늘을 쳐다보느냐?” 지금 하나님은 너를 통해서 일을 시키고 있는데 하늘만 쳐다본다고 해서 하늘에서 뭐 감이 떨어지겠어요? 뭐 홍시가 떨어지겠어요? 지상에서 우리를 통해서 주께서는 하늘의 요소를 우리 속에 담아서 그 뭐 하나님 찾지 말고 니가 하나님을 표현하면 되고 하나님의 기적을 발산하면 되거든요.

요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니잖아요. 요나가 가면서 물에 빠졌다, 그거 하나님의 뜻입니다. 빠졌는데 고래 속인지, 큰 고기 속인지 거기서 다시 나왔다, 고거는 뭐냐 장차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요나 속에 미리 일부를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다른 표적이 없다 해서 옛날 주님이 요나를 일찍 다루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나만 다루었겠어요?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도 다루고, 이스라엘만 다루었겠어요? 오늘날 우리도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늘의 뜻, 저 천국의 뜻을 감히 미천한 우리를 통해서 지금도 마음껏 발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뜻이 무엇인가? 그 뜻을 알고 싶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 뜻을 오늘 본문 신명기 9장에 나와 있음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 보면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한 나라에 들어가서”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단을 건너가는데, 요단을 건너가게 되면 약속의 땅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근데 그 땅을 누가 선점하고 있느냐 하면 아낙 자손들이 있습니다. 근데 아낙 자손들이 어떤 자손이냐, 2절에 보면 “그 백성은 너가 아는바 장대한 아낙 자손이라” 너가 알고 있듯이, 너가 벌벌 떨 듯이, 장대한 아낙 자손이라 하는 겁니다. 이 장대한, 키가 크고 힘이 세고.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이 아낙 자손을 어벤져스로 보면 되는 겁니다. 영웅들이라 아무도 이길 수가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근데, 아낙 자손이 이스라엘이 가야 할 땅 정면에 저지하고 있고, 지금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거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고 할 때 사람들은 누구나 오해 하죠. 아! 약속의 땅이 비어있구나! 하나님의 뜻인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 자신을 집어넣는구나! 라고 오해하는데, 오해이십니다. 그러면 그 땅에 누가 가느냐, 아낙 자손을 이기는 자만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장치를 둔 거예요.

“너희들 그 땅에 들어간다. 조건이 있다. 아낙 자손을 이기면 들어간다. 근데 아낙 자손이 너희들 생각에는 누구도 이기지 못하고, 우리가 능히 당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소문난 자손을 깔아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한 마디로 말해서 너희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그겁니다. 천국? 어림도 없다는 겁니다. 천국은 내 나라, 예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아무도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부자도 못 들어가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수가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천국도 이와 같은 거예요.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못 들어가면 우리는 삐져서 안 가면 되지. 이렇게 우리는 삐지잖아요. 못 들어간다는데 안 가면 되지. 이러잖아요. 그러니까 어깨를 툭툭 치면서 “못 들어간다!” “안다니까요.” “근데 들어가게 해줄게.”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못 들어간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깔아요. “못 들어가는데 들어가게 해줄게.” 그러면 그제야 인간은 오해해서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서라 말어라 가만히 있어! 분명히 니가 그렇게 설치니까 못 들어가는 거야.”

이렇게 정합시다. 설치면 못 들어가고 안 설치면 들어가는 것으로. 그게 천국이에요. 설치면 못 들어가고 안 설치면 들어가는 나라. 물론 안 설친다고 다 넣어줍니까? 그건 아닙니다. 안 설친다고 들어갈 나라가 아니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거기에 들어가는 백성은 자꾸 나라고 선점하지 말고 그 과정을 보면 돼요. 주님이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아낙 자손을 어떻게 이겨내는가, 그 과정만 살피고 주목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기지 못하지만 주님이 어떻게 이겨냈을까? 주님은 쎄신 분보다 더 쎄시구나! 더 대단하다는 것을 알면 되죠.

근데 여기서 어려워요. 자, 방금 지금까지 쉬운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못했다, 근데 주님이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한 약속이 미리 우리한테 왔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못 넘는 장벽마저 주께서 너끈히 들어가게 해주실 것이다, 여기까지는 쉬워요. 문제는 주님 하신 말씀이 주께서 해주는 그것을 니가 하라고 이래 나오시는 겁니다. 그게 어려운 거예요. 분명히 처음에 우리보고 못 한다고 해놓고는 나중에 이야기 스토리 전개 과정을 보게 되면 “니가 가라 하와이!” 이래 돼서 “니가 해라!” 이래 되어버려요.

우리는 가만히 있다가 쑤욱 들어간다고 약속했잖아요? 글쎄, 쑤욱 들어가는데, 나는 안 다치고 가만히 있고 주님께서 수고하셔서 우리는 공짜로 쑤욱 들어간다고 이해했는데, 그렇게 쑤욱 들어가게 하시면서, 내가 편하다는 게 니가 아는 편함 말고, 니가 고생, 고생 하면서도 이런 편한 것도 있나! 그걸 체험케 하시는, 고 체험을 우리에게 들이닥치게 하시는 겁니다. 고 뒷부분이 상당히 찝찝하죠? 가만히 있어서 넣어주면 되는데. 그 힘들다는 아낙 자손을 이겼잖아요. 그러면 이겨놓고 이제는 니가 아낙 자손을 이기면 된다는 식으로 나갈 때, 우리는 덥석 겁이 나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6절을 보면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절,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절,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셨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그 당시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참 쉬워요. 왜? 주님이 주시는 그 잔을 마시면 되고, 주님이 주시는 그 떡을 먹으면 되거든요. 아니 떡 못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포도주 조금 못 마시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취하고 비틀거리고 그런 겁니까? 그것이 최고의 언약, 이제는 더 이상 약속은 없어요. 이것이 마지막 언약이에요. 뭐 이것 해놓고 딴 것 추가해서 “미안하다. 더 해라!” 이런 것 없습니다. 요걸로 마감되었습니다. 이걸로 계약 성사되었어요. 더 이상 계약금도 없습니다. 중도금도 없습니다. 끝났어요.

예수의 주시는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돼요. 요한복음 6장에도 내 살고 피를 먹고 마시면 영생 얻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제자들은 이걸 먹으면 되거든요. 먹었잖아요? 마셨잖아요? 그런데 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합니까? 왜 그러면 예수님이 잡혔을 때 다 도망갔죠? 뭘 하나 빠트렸어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떡을 줬잖아요. 피를 줬잖아요.

그 예수님의 떡과 피가 주님과 연결되기 때문에 우리 속에 있는 떡과 우리 속에 있는 피는 내 소유가 되지 않고 주님의 소유가 되어서 이제는 그 피를 마시고 그 떡을 먹은 우리가 주님의 제2의, 제3의 모습으로 사는 인생으로, 운명으로 이게 달라지는 그러한 언약 속에 우리가 말려든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속았어요. 주님한테 걸려든 겁니다. 우리는 받아 챙겨서 옛날처럼 내 세계에서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도망갈 수가 없어요. 그게 뭐냐, 우리의 기초는, 우리의 본질은 외부에서 주어지거든요. 우리의 기초가 주님 쪽에서 와버리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면 세상 앞에 내놔요. 내놓고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자는 세상에 어디에 내놓아도 수치스러울 없노라고 뒤에서 주님께서 외쳐 버려요.

우리를 이렇게 자신의 생산물로 내놓고, 이만한 상품은 어느 시장에도 없다고 내놓고, 이 상품보다 더 거룩하고 깨끗하고 완벽한 상품은 없다고 내놓고, 뒤에서 주님이 우리를 앞장세워놓고 주님이 흐뭇해하고 만족해하시는 주님의 동업자로서 말려든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인생과 몸을 통해서 하늘의 소식이 지금도 파급되고 있는 겁니다.

주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뭘 더 가집니까? 그렇게 할 것 없어요. 이미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주께서 다 활용하시는, 주의 일의 일부로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걸 저는 ‘삼킴을 당했다.’ 라고 하는데, 성경적인 용어가 더 확실하겠죠. “복음 안에서 부끄러움 없나니” 이래 되어 있어요. “복음 안에서 부끄러움이 없나니”

그럼 복음 안에서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은,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너희들 보기에 장대한, 아주 큰 아낙자손이라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곳만 이스라엘을 데리고 다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장대한 자들을 물로 깨끗하게 해놓고, 까짓것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들어가지. 비어있는 자리를 우리가 못 들어갈 것이 뭐 있어요. 우리가 못하는 것을 주께서 다 치워놓았으니 우리는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내 차지가 되는데. 우리는 이런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근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낙자손을 이기심을 우리한테 심어놓고 외부에서 아낙자손보다 더 큰 장대한 자들이 온다 할지라도 너는 조금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이런 쪽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만족감과 승리감을 축하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용합니다. 이 시점에서 요 질문에 대한 답변 하나 정리해봅시다. “목사님.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수 천 번도 더 이야기했어요. “그냥 사세요.” 너무 길잖아요. 네 자로 “막 사세요.”

막 사세요. 여러분들한테 주어진 환경은 절대로 여러분들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환경을 의도적으로 맞닥뜨리게 하십니다. 의도적으로.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한없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게 만들어요. 그 대표적인 수치가 뭐냐, 나는 인생 실패했다는 겁니다. 나는 망가졌다. 내놓을 게 없다. 나는 동창회 가서 고개를 못 들겠다. 저는 동창회 참석 안 합니다. 회비 아까워서 참석 안 합니다. 내가 보기에 내 인생 왜 이리 됐느냐, 차라리 자살하는 게 편하지. 나는 더 이상 못 살겠다. 어디 마포대교 없는가, 뛰어내리고 싶다. 이런 쪽으로 하게 만들어요. 주님께서는 성공이다!!

복음 안에서 수치가 없잖아요? 수치가 없는데 우리는 그걸 깜빡 잊어버리고 수치가 나왔죠? 바로 진짜 적은 아낙자손이 아니고 내 수치를 내가 이기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내 자존심을 내가 이기지 못하는 겁니다. 그게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라는 겁니다. 가을철 되면 남자들 또 바바리 깃 세우고 미사리 카페 앞을 걸으며 7080노래 들어가면서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집에 있는데 괜히 와가지고.

내가 내 적을 못 이기기 때문에 그동안 꼼수를 쓴 거예요. 하나님이 깨끗이 청소해놓으시면 그때, 고맙습니다. 내가 복 받겠습니다. 이런 꼼수를 썼는데 주님한테는 그런 꼼수가 통하지를 않아요. 니가 적을 못이기는 것이 아니고 니가 너를, 니 자신을 못 이겼어요. 니가 니 존재를 감당을 못해요. 70이 되면 인생이 가벼워질까요? 80이 되면 가벼워질까요? 여기 80되신 분한테 물어보려고 하면 딴소리해서 물어보지 못하고. 도대체 내 존재의 무게는 언제, 몇 살 쯤 되어서 홀라당 벗어질까요? 갈수록 무거워 집니다.

그 이유가 창세기 6장에 보면 나옵니다. 창세기 6장 역시 거인족속이 나옵니다. 장대, 장부라고 했는데, 이름이 장부인데, 네피림이라는 장부가 나와요. 얼마나 힘이 센지. 그가 자식을 놓으면 전부다 용사라, 영웅이 돼요. 어벤져스라니까요. 초월적인 힘을 가진 자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자기의 수치를 커버할 수 있는 모델로서 등장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아! 나도 저것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나도 삼성그룹 좀 갖고 있으면 좋겠다.’ ‘나는 뭐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보통 남자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차사는 거예요. 차 못 사서 환장을 했어요. 옛날 같으면 좋은 말 못 타서 환장한 거예요. 이게 뭐냐, 평생 동안 억눌려 숨 못 쉬고 참았고 그래서 수치스러웠던 그 수치를 한방에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 뭐냐, 외제 차.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이 세상과 우리가 한통속이 되어서, 세상 자체를 못 빠져나와요. 왜냐하면 빼내면 세상이 묻어서 나오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의 작업은 세상 속에서 니가 못 빠져나오고, 세상과 한통속이라는 것을 분명히 일러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 세상과는 전혀 이질적인 다른 외부적인 세상이 우리 속에 삽입될 때, 그 삽입된 것이 내 힘으로 이겨낼 수 없던 세상을 그때는 이겨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 증인으로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네피림 자손을 하면서 여기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뭐냐, 그들은 영웅이라고, 그들은 장대하다, 이름 자체가 장대하니까 되는데, 그걸 포괄적으로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육체다.” 라고 되어 있어요. 그들은 육체다. 그러면 육체라는 말은 반대말이 등장해야 의미가 나타나는데 “그들은 영이 되지 못했다.” 하나님과 합세할 수 없었다. 그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은 육체가 됨으로 그들과 함께하지 않겠다. 하나님과 한 패밀리, 한 가족이 되지 못한다면 천국 못 갑니다. 한 가족이 되어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익히 우리 가족들이 있습니다. 추석 때 모이는 그 가족들. 만나면 보고 싶고 가면 더 속 시원한 그런 가족들이 추석마다 모입니다. 그들은 육체가 됨이라. 그들만 육체입니까? 우리는 육체 아니에요? 육체의 때를 목욕간다고 해서 벗어낼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내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이 뭐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있음의 의미가 뭐냐, 그것은 육체가 영으로 못가니까 영이 육체를 찾아왔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아, 주님이 나한테 찾아왔구나? 아니 너가 선망하는, 너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니 모델에게 찾아온 거죠.

그 모델이 누구냐, 이스라엘에게는 아낙자손입니다.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면 아낙자손은 뭐냐, 바로 우리의 대표자가 되는 겁니다.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하는. 내가 참 저런 집에서 한 번 살아봤으면 하는. 나도 저런 월급을 한 번 받아봤으면 하는. 하는 그 모든 것을 대변해주는 것이 아낙자손이고, 창세기 6장에서는 네피림이었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네피림을 물로 쓸어버리게 하셨거든요. 그리고 아낙자손은 멸망하게 만들어버렸어요. 결국 이 말은 뭐냐, 내가 기대하고, 선망하고, 기도하고, 소원 빌고,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원수된 것들만 나는 추구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은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일괄적으로 설명한 것이 뭐냐 하면 출애굽기 7장에 나옵니다. 어떤 분은 출애굽기 7장을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을 쓴 사람도 있는데. 이것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 쓰려면 참 통과하기 힘들어요. 복음을 빼야 박사학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 7장 22절에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요 대목인데 이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바로 왕이 처음 약속대로 자꾸 안 하고, 보내주겠다고 해놓고 안 보내줘서 얻어맞았다가 원상회복 되면 살았다고 헤헤거리며 또 안 보내주는 거예요. 고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의도적으로 바로 왕의 마음을 강퍅케 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높이뛰기를 하는데 1미터만 하면 천국 보내줄게 하다가 딱 뛰니까 1미터 50으로 높이는 거예요. 1미터 50 뛰니까 2미터로 높이는 거예요. 결국 누가 이렇게 하느냐,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내 힘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그 모든 시도를 좌절시키는 방법으로 우리 한 평생을 살게 하시는 거예요.

교회를 50년 다녔다, 나는 복음 들었다, 이것이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매일의 실패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실패했다는 이야기만 하면 돼요. “나, 너네한테 하나 내놓을게 없어. 부끄러워.” 이게 증거입니다. “자랑할 것 하나도 없고, 다만 자랑할 것 없는 나도 구원해줬다는 주님의 솜씨만 자랑할 뿐이지. 딴 거 자랑할 것 없어.” 이것만을 우리가 내놓을 수밖에 없어요.

실패하시고, 이번 추석도 실패하시고, 고스톱 쳐서 돈 잃어주시고, 부끄러워하시고, 요번 가을에는 바바리 깃 세우고 한평생 이 나이에 내가 돈 얼마 벌었는지 헤아려 보시고, 아이고 인생 이래 사는 게 인생인가 하고 좌절하시고, 낙엽 떨어진 것을 자근자근 밟아보면서, 그렇게 한 번 해보시면서 자기 자신한테 실컷 실망하세요. 주께서 구원의 성공이라고 보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의도한 장치에 우리가 말려들었습니다. 예수님만 자랑하라고 했지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나도 같이 자랑하고 싶은 나의 체면과 자존심이, 주님을 용납하지 않고 떨쳐버리는 그것이 구원의 작업인 것을 저희들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