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강-신 8장 15-17절(하나님의 시험)1509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8장 15-17절입니다. 구약성경 275페이지입니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사실은 오늘 해야 될 이 설교가 제가 평생 동안 한 그 모든 가운데 가장 난해하고 어려운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어렵다는 내용이 뭐냐 하면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곳으로 가게 한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낮출 수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물이 없다, 건조하다, 불뱀 있다, 전갈 있다, 그 속에 어떤 인간이 들어가도 마음이 낮춰지겠습니까?
오히려 마음을 낮추기는커녕 실제로 들어갔던 사람들의 보이는 반응이 낮춘 것이 아니고 원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원인이 뭐냐 하면 불뱀과 전갈이 있는 곳에 가면 인간이 달라진다는데, 막상 실제로 해봤던 자들은 달라진 게 아니고 자기의 본색만 드러냈을 뿐입니다. 실패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그들의 실패로 마감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들의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주어지거든요.
우리가 성경을 안다고 하지 말고 성경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합시다. 모른다고 치고, 집에서 직장생활 하다가 그냥 교회 왔다고 칩시다. 그러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아주 간단해요. 하나님은 지시만 하고 나는 그 지시에 호응만 하면 좋은 관계가 유지됩니다. 이것보다 더 골치 아프게 생각하기 싫어요. 우리 인간이. “저 어른신네. 지시만 하세요. 제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요것 외에는 골치 아프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근데 저는 지금 골치 아프게 설교를 해야 됩니다. 왜냐 하면은 성경 본문이 “어르신네. 그냥 말씀하세요.” 이게 아니고 “너는 전갈과 뱀과 건조한 땅으로 들어가라” 라는 명령을 해버리면 왜 우리가 그러한 험악한 곳에 들어가야 될 이유가 납득이 안 된다니까요. 우선 우리가 납득이 안돼요. 우리는 그냥 교회 오는 것도 힘들어 죽겠어요. 차 밀리고, 벌초하고, 가을 되면 단풍 보러 간다고 해서 차 막히고 난리날겁니다. 한 번 교회 출석하고 나면 너무 피곤해서 집에서 퍼질러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교회 만들어놓고 교회 왔나? 잘 들었지? 빠이빠이bye-bye. 이렇게 간단하게 일을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고, 전갈과 물 없는 곳과 불뱀이 있는 곳으로 가라. 에이, 그걸 왜 가야 하느냐 말이에요. 뭔가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실 때는 명령하신 취지와 나의 어떤 동일성이, 그 취지를 우리가 품어서 합치된 행동을 내세울 수 있는 겁니다. 내세울 수가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명령 내용을 모르게 되면 무슨 행동을 해도 “결재 다시 해와! 내가 그런 지시 안 했어!” 이렇게 내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실컷 준비했는데. “하나님. 이런 뜻 맞죠?” 라고 실컷 준비 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내쳐버리면. “다시 해와!” 이거는 뭐 김부장도 이런 김부장이 없잖아요? 뭐 장그래도 아니고요. 정규직도 아니고. 그렇게 설움 받아서 일 하겠어요? “치워라! 나 회사 그만둔다.” 이게 뭐냐 하면 “치워라! 나 이 교회 안 다닌다.” 하고 똑같은 거예요.
제 이번 설교가 어렵다는 것은 어떤 점이 어려운가 하면, 여기 8장 2절에 그 말씀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너를 시험하사’ 라는 말이 나와요. 너를 테스트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보통 사람은, “우리 보통 사람입니다.” 이 동네 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 보통 사람이었거든요. 우리 보통 사람은 이렇게 골치 아프게 테스트 같은 것 하지 마시고 그냥 넣어주세요. 그냥. 안 그래도 바쁜 일이 많은데 언제 주님 앞에 나와 가지고 “저 테스트해주세요.” 라고 할 그런 생활여유가 없어요. 우리는 뭐든 간단하게, 딱딱 간단하게 하고 싶어요.
물건 살 때, 뭐 세일한다고 할 때, 이 제품은 어디에 좋고 하는 것 다 귀찮아요. 얼마입니까? 정가 얼만데 몇 퍼센트 할인해줘요? 딱 그거만 원해요. 물건 좋고 뭐고 없어요. 이렇게 하시면 복 받습니다. 딱 그거만 해달라는 거예요. 교회 와서 이것 해주시면 복 받습니다. 반드시 받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달랑 그 소리만 해야지. 하나님은 여러분을 시험하사, 이런 건 질색이거든요.
근데 성경은 그걸 이야기해요. 그만큼 교회가 지금 가짜라는 뜻입니다. 성경대로 해야 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의 지시대로 해야 됩니다. 그거는 테스트하는 겁니다. 테스트한다는 말은 나한테 나온다고 넣어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테스트 통과한 사람만 넣어주겠다는 거예요. 이거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거예요. 하나님에게 나온 사람이, 지원자가 한두명이 아니거든요. 근데 테스트 통과해야 한다는 겁니다. 근데 테스트 통과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그 테스트를 우리가 출제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출제하고 우리가 푸는 것이 아니고 출제는 주님이 내요.
그게 불뱀과 전갈과 건조한 땅을 통과케 하는 겁니다. 그럼 통과하기만 하면 됩니까? 안 돼요. 그냥 통과하면 밀림에서 고생하는 그러한 예능프로밖에는 안 됩니다. 통과하고 난 뒤에 마음이 얼마나 낮추어졌느냐를 보겠다는 겁니다. 지금 오늘 본문이 그 내용이거든요.
자, 테스트하기 위해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집어넣는다, 광야는 그냥 광야가 아니고 거기에는 전갈과 불뱀과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이다, 왜 집어넣었습니까? 테스트하기 위해서. 그 테스트의 합격자, 합격 수준이 어떤 수준이 되어야 됩니까? 마음을 낮추는 수준이 되면 된다. 그럼 마음을 안 낮추면은요? 탈락이죠. 테스트에서 탈락입니다.
근데 이 출제를 우리하고 사전에 의논하거나 조율한 적이 없어요. 이거는 물어보지 않았어요. 이거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내민 테스트에요. 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으로는 별로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하는데, 제가 왜 어렵다, 어렵다고 이야기하느냐 하면은요. 우리가 하나님께 테스트 받고자 하는 의사가 우리한테는 전혀 없는 상태에서 난데없이 들이닥치는 하나님의 제안이기 때문에 이게 어렵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한테 테스트해달라고 하는 마음이 사실은 없어요. 없고, 그건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실시한 겁니다. 우리는 그냥 바치라면 바치고 봉사하라면 봉사하는 것이지 테스트한다는 것은, 우리가 테스트해서 하는 테스트 말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와 의논하지 않고 우리가 모르는 테스트를 제시한다는 것은 우리를 상당히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합격테스트 여부는 바로 아브라함부터 시작되죠.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테스트를 하죠. 하는데, 그 테스트가 뭐냐 하면 니가 사랑하는 독자를 내게 번제로 바치라는 그거였습니다. 교회 나오너라가 아닙니다. 니 아들을, 니 사랑하는 아들을 내게 바치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게 이정도로 어려워요. 아브라함이 테스트를 통과했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는 자가 되고 말아요. 행함의 조상이 되고 말아요.
근데 아브라함은 믿음이 조상이 된 겁니다. 따라서 아들 받치라는 테스트를 하는 그 와중 속에서 아브라함이 이것은 내 행함으로 가능하다는 선입감을, 이거는 내 행함으로 하지를 못한다는 것으로 바꾸어지는 그 절차를 가지고 하나님이 추후적으로, 사후적으로 믿는 자라는 준비된 신분이 주어집니다. 믿음.
오늘 본문을 봅시다. 오늘 본문에 마음을 낮추라는 그 정도에 대해서 17절에 나와 있어요.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재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있어요. 있는데,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 한다면 이 테스트에서 불합격이에요.
근데 합격이 뭐냐 하면,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이 재물을 얻은 것이 아니고, 이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테스트를 제시하는 테스트 안에, 나한테 이런 재물과 이런 것들이 나한테 주어지도록, 이미 테스트 과정 안에 이미 포함된 채 저한테 제공되었습니다.” 라고 받아들이면 이거는 마음을 낮춘 게 돼요.
마음을 낮춘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마음을 낮출 수 없고 항상 마음을 높이며 사는 그런 존재이기에, 마음 높은 이런 상태에서 나오는 이런 행위는 하나님이 일체 받지를 않는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문장이, 점점 논리가 길어집니다. 어떻게 감당할지를 모르지만 한 번 해봅시다. 아브라함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치면서 하나님의 테스트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믿는 자로서 나왔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지금 아들을 바치는 그 행위만으로 자기가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이삭을 바치라 해서, 이삭이 출현한 그 내력이 있잖아요. 그 내력을 아브라함은 자기에게서 나온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약속에 의해서 제공된 자식이라는 것까지 더불어 알게 된 거예요. 그러면 이 테스트는 하나님이 나하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 본인하고 하는 테스트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테스트하는 겁니다.
그와 같은 예가 아브라함과 같은 시절의 욥이라는 사람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테스트할 때에 그것은 욥하고 테스트한 게 아니고 그런 욥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이 테스트를 한 것입니다. 이거는 장차 신약에 와서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앞당겨서 욥과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운명이고 우리들이 가야할 팔자이기도 합니다.
욥 같은 경우도 여러 번 했습니다만,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사탄과 이야기하면서 이 세상이 이만한 욥 같은 믿음을 못 봤다 했을 때, 누구나 욥의 그 입장을 보고 나면 우리는 관객이 되잖아요. 관객이 되면서 하나님에게 욥에게 그렇게 자신만만할 때, 사람들이 어디다 집중하느냐 하면 욥에게 집중을 해요. “욥 파이팅! 힘내라. 하나님이 너에게 믿음 있다고 하늘나라에서 자랑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너가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아.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될 만한 그러한 신앙인으로서 한 번 버텨봐라 말이야!” 하고 우리는 욥을 응원합니다. 0 그런데 이상하게 이야기가 끌려가네요. 하나님이 자랑할 만한 것 같으면 자랑할 만한 요소가 욥에게 나와야 되잖아요. 근데 정작 욥에게 나온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그러한 멋진, 신앙적인 모습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자랑할 만한 어떤 요소가 안 나와요. 이거는 뭐 하나님에게 불평은 불평대로 다하고, 원망은 원망대로 다하고, 짜증은 짜증대로 왕짜증을 내고, 가만 보니까 욥이나 나나 똑같아. 하나님이 칭찬을 한 그 인간이나 칭찬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나나 똑같네요. 손톱 끝에 가시 있으면 아프고, 이빨 아프면 아프고, 똑같아요.
사도 바울에게 만약에 아픔이라는 가시가 있으면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웃으면서 넘겼겠습니까? 노자나 공자처럼. 아니에요.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몇 번이나? 세 번이나. 가시 빼달라고. 이 사탄의 가시 빼달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됐네. 이 사람아.” 하고 끝났어요. 니가 은혜가 니게 족하다는 겁니다. 그 순간 바로 뭘 알았습니까? 나와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와 테스트해서 내가 합격하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 안을 접수하고 나를 점령하신 그 분이 점령할 때, 점령하신 그 분이 나의 어떤 한계와 어떤 약점을 극복한 채, 이미 극복이 된 채, 나에게 왔느냐를 알려 주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나의 한계와 나의 약점을 들추어내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개시되는 겁니다. 그게 테스트입니다. “욥아! 니 자신에 대해서 모르지? 나는 이미 너를 마귀한테 자랑했다는 말은 너에게는 그 자랑이 상당히 낯설지? 니가 보기에도 자랑할 만 해?” “할 만 합니다.” “좋다 누가 자랑할 만한 지 한 번 보자. 자 이래도? 이래도?” 하고 가시를 푹푹 찌릅니다.
처음에는 뭐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요, 얼추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직접 육체의 아픔이 왔을 때는, 육체가 아플 때는 썩은 미소도 지을 수 없어요. 이거는 뭐 아픈 것은 아픈 거예요. 아프리카 선교사의 어떤 부인이 아프리카 선교사로 갔는데, 예수님 하나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이 오니까 하늘에서 온 사람들인 줄 알고 그 말을 다 들었죠. 어느 날 선교사 부인이 막 토해버렸어요. 토하니까 아프리카 사람들이 보고 저 사람도 인간이네? 저 사람도 사람이네? 이래 된 거예요.
저 사람도 사람이네? 그럼 그 전에는 뭡니까? 저 사람도 천사인 줄 알았죠. 하나님 이야기하니까 천사인 줄 알았죠. 저 사람도 사람이네? 목사도 방구 뀌네? 하고 똑같은 거거든요. 그럴 때 선교사 부인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도 원주민 없을 때 토하게 하든지 하지. 있는데 하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체면이. 이래 나오면 테스트에 불합격이에요. 이제는 원주민보다 더 지저분해도 상관없어요. 그럴 때 그 선교사와 선교사 부인은 제대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욥이 아픔으로써, 욥이 하나님께 원망함으로써 제대로 복음 전한 거예요. 오늘 낮 설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제대로 매일같이 음란하고, 매일같이 간음하고, 마음속으로 남을 미워해서 살인하고, 수시로 뭐가 있다 없다고 하나님께 틱틱 거리면서 원망할 때, 제대로 이미 테스트에 합격한 성도입니다. 뭐 남들 들으면 참 희한한. 복음이 아니고 복음의 극한까지 갔다고 궁시렁 거릴 수도 있어요. 초현실주의적인 복음이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많은 신학자들이, 인간들이 그 말을 이해를 못했어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지금도 그 말을 이해를 못해요.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이 지금 연극하고 있나? 사실은 안 버린 것을 뻔히 알면서도 멘트만 그냥 날려서 남을 속이려고 하는가? 실제로 버림을 받는다면, 실제로 버린다면,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중인격자인가? 인간들이 마음으로 끄집어낸 온갖 이론을 다 동원해도 그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리석게 보여야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지혜 있다는 인간들에게 어리석게 나타난 것이 십자가의 복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테스트를 하실 때에, 테스트는 뭐냐 우리가 미처 모르는 내용까지 테스트 안에 다 담겨있습니다. 모르는 내용까지 다 담겨있어요. 그 담겨있는 내용이, 여기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이제부터 어떤 의미에서 본격적이 되는데, 15절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가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테스트를 하는데 꼭 장치가 이렇게 물이 없고, 뱀 나오고, 전갈 나오고, 이런 장치들이 뭐하는 장치냐 하면 사람을 살리는 장치가 아니고 사람을 죽이는 장치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장치에요. 그러면 이런 장치가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부터 낯설다고, 자기 속에 있는 자기의 본질하고 안 맞는, 이게 뭔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잘못된 장치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기대를 잔뜩 했거든요. 물이 넘치고, 가는 곳마다 오아시스가 준비되어 있어서 원주민들이 어서옵쇼! 하면서 환영하고요. 그동안 애굽에서 탈출한다고 애 먹었죠? 완전히 시리아 난민 왔을 때 독일군들이 환영합니다 하면서 빵 주고 숙소 제공하는 것처럼. 그런 환대가 있을 줄로 알았죠.
자, 그렇게 하나님께서 불교에서 기독교로 종교 바꾸면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우리를 환대하고 우리의 하는 일마다 잘 될 줄 알았죠. 그 잘 된다고 이야기한 사람이 있어요. 조용기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모든 것이 강건하기를 원하노라. 이걸 3박자 축복이라고 해요. 3박자 구원. 영혼 잘 되기. 죽어서 천당 가기. 그 다음에 범사에 잘 되기. 사업 잘 되기. 인간이 제일 고통스러운, 늙어도 젊어 보이고 아픈데도 없는 것. 이 3가지가 곧 하나님의 뜻이랍니다. 그것이 순복음 쪽에서 하는 테스트에요.
하나님 쪽에서 그런 테스트를 줬다는 겁니다. 그게 3박자 구원의 테스트라면, 오늘 성경의 테스트는 뭐냐 바로 불뱀과 전갈과 물 없는 곳입니다. 진짜 교회라면 이래 되면 안 돼요. 진짜 불뱀 키워야 해요. 뱀 한 이 백 마리 키우고. 막 기어올라 와야 해요. 그 다음에 전갈, 이거 한 번 쏘이면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퉁퉁 부어서 아프다 죽는 거예요. 말벌에 쏘이듯이 그렇게 죽는 거예요. 그 다음에 뒤에 뭐 커피 따라 마시라 하는데 거피 필요 없어요. 물도 없어야 돼요. 양식이고 뭐고 점심이고 뭐고 없어요. 미역국도 없어. 전부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야 돼요. 그게 우리한테 합당해요. 왜? 그 자리에서 뭐를 발견하기 위해서? 진짜 나와 함께 테스트 받는, 어떤 테스트? 아버지로부터 십자가 테스트 받는, 예수님의 테스트에 우리가 같이 동참하는 것이 테스트에 통과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나를 위한 테스트도 아니고.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몰라요. 내가 왜 이런 대접받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항상 환상과 욕망에 있기 때문에 나는 마땅히 사랑받아야 되고, 나는 마땅히 이쁨 받아야 되고, 나는 남한테 욕 얻어먹으면 안 되고, 나는 항상 간섭받으면 안 되고, 마음껏 살아야 되고, 이게 이미 우리의 울렁증이라. 우리는 항상 자기도취에 빠져있는 인간이라.
자기도취에 빠져있는 인간에게 딱 적합한 테스트는 바로 니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강건하고, 그게 아니고 불뱀과 그리고 전갈과 양식도 물도 없는 그곳이 우리한테는 딱 맞는 테스트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요한 3서 2절에 나오는 “니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그건 덫이에요. 그 본문 말고도 모든 성경 말씀은 덫입니다. 인간이 뭘 덥석 잡는가를, 무엇에 유혹받아서 덮치는가를 다 알아요.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선악과가 뭐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거든요.
그러한 내용들을 신약성경에 깔아놓고 자기주제파악도 안된 채 덥석 무는 거예요. 그러한 것들을 원해서 예수 믿는 척을 해주는 거예요. 십자가 믿는 척을 해주는 거예요. 십자가, 십자가 하는 것은, 사실은 십자가가 좋은 것이 아니고 십자가 전함으로써 내가 목회하는 교회가 커지고 내 생계가 보장되는 그걸 위해서 십자가 복음 운운하고 있는 겁니다. 목사들이.
이제는 말한다. 이제는 말한다는 것을 수백 번 했지만. 십자가 사건에 관심 없어요. 십자가에 적셨던 그 피를 내 것으로 소유하기를 원하지. 왜? 나는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일체 인간의 호응과 인간을 변호해주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어떤 변호도 호응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호응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하고 관계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아들과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다만 이스라엘은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예수님이 가신 불뱀과 예수님이 가신 전갈과 예수님이 가신 물 없는 곳에 그들이 같이 예수님 때문에 끼어들게 해줬다는 그것 자체에 대해서 영광이라는 고백을 해야 돼요.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자기를 믿지 않아요.
자기 행함도 믿지 않고. 믿음은 뭐냐, 내 곁에 누가 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의 이름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 주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신약에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나오는 예수님입니다. 그게 바로, “주 예수여! 당신을 믿나이다.” 이 말은 바로 옛날 이스라엘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집어넣었던 그 주님과 함께 있게 된 것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마음 낮춘다는 것은 고생하라는 뜻이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 때문에 살았다는 것을 고백할 때 그 사람은 마음을 낮춘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이삭은 내 자식이 아니고 처음부터 없던 자식이 내 곁에 붙었다는 거예요. 장차 오실 예수님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요청한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알아서 오셨어요. 알아서 왔습니다. 별이 알아서 움직였고 동방박사는 뒤따라 온 거예요. 별 따라 온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고 나서 보니까 우리가 살아왔던 천구백 몇 년도, 제 나이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특히 생일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이 다 주님이 의도적으로 주님 증거 하라고, 예수님 몰랐던 그 시절부터 예수님 증거 하라고 태어났고, 그걸 디모데전서에서는 창세전부터 이미 우리를 예정하사 구원했다고 사도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창세전부터 예정된 거예요.
이미 주님이 합격한 테스트가 십자가에요. 십자가 안에 들어오니까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주님의 자기 테스트에 ‘합격축하’ 퍼레이드인 것을. 자기가 이렇게 이미 십자가로 완성했다는 것을 자랑질 하고 싶어서 우리 개개인을, 성도를, 없던 사람을 만들어 낸 겁니다. 마치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성공한 테스트가 날마다 우리에게 구원의 효과를 낳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행위로 주님 앞에 직접 나서지 말고 십자가 안에서 고마움으로 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