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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46강-징계와 선물(신8;7-10) 15083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8. 31. 07:43

2015-08-30 15:03:24 조회 : 35         
   징계와 선물 150830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징계와 선물(신명기 8: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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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8-30 15:43 
징계와 선물

2015년 8월 30일                          본문 말씀: 신명기 8:7-10

(8: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8:9)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8:10)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요즈음 사람에게 ‘배불리 먹는다’는 것은 그다지 매력적인 내용으로 전달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먹어서 탈이 날 지경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시된 제안으로는 관심을 끌지를 못합니다. 뿐만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자연환경은 굳이 성경 속에서나 발견되는 이상향(理想鄕)이 아니라 지구 도처에 늘려 있습니다.

쾌적한 삶의 환경은 인구조절이나 거주자 조정을 통해서는 가능하고, 자연 환경은 과학적인 영농기법에 의해서 얼마든지 개선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인간에게 제시된 효과있는 경품거리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잠시 배고프고 어려울 때는, 이런 하나님의 내미신 조건에 구미당길 수 있지만, 막상 그 어려울 때가 지나고 나면 별개 아닌 게 됩니다.

따라서 말씀에 순종하는 조건하에 제시되는 복이 이 정도라면 차라리 순종 안하고 소박하게 형편대로 사는 쪽을 선택할 가능성도 큽니다. 사람이란 누가 자신에게 넉넉하게 과분하게 주어도 지속적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값없이 주어지게 되면, 은근히 준 쪽에 자신이 종속되는 기분이 들어서 싫어집니다.

그리고 아무리 넉넉하게 배불리 먹어도 인간들이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나 내 것이냐’를 분명히 해주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한 후, 선악과 의식으로 무장되면서 발동하는 것은 ‘내 것’과 ‘네 것’의 구분입니다. 내 것이 전혀 없는 식으로 배부른 것보다, 다시 배고프더라도 ‘나의 것’이 종자씨처럼 있어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겁니다.

즉 인간은 ‘내 것’이 되지 못하는 한, 제대로 감사할 마음이 나지 않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기 것’ 안에서 절대적인 신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합니다. 욕심내지 않고 어렵게 살아도 내 것이 따로 절대적으로 있는 한 사람들은 그것을 키운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아무리 쓸 것이 많아도 어느 것 하나, 내 것이 아니라면 살 재미를 못갖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제시된 복의 상태의 취지는 5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즉 징계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복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징계하시겠답니까? 무슨 기준에 입각해서 징계하시겠답니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 유지’를 기준으로 삼으신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정상적인 관계의 사례는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 사이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어 사셨습니다. 한 번이라도 자기 뜻대로 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는’ 범위 안에서 본인도 일하십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39) 하지만 인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선악과 따먹은 이후, 자기 것 안에서 자아가 절대적인 존재로 탈바꿈 되어 있습니다. 항상 내 것으로 등기 이전될 것을 감안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징계란 이런 독자적인 성향에 대한 징계입니다. 곧 “네 것은 아예 없다. 네 소유물도 아예 없다. ‘너’라는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입니다. 이런 면을 예수님 말씀식으로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징계가 마감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정상적인 ‘아버지- 아들’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징계가 마감된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다 ‘말씀’ 스스로 활동하고 노동한 대가로 주어진 것임을 아는 겁니다. 시편 1:2-3에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말씀 자체에서 과실을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요인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삼손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는 태어나지 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나실인(구원자)의 사명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소에 자신의 욕망에 휩싸여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이 그를 방치하지 않고 징계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정상적인 관계에 기준해서 하나님의 신이 작용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삼손에게는 희귀한 일이 일어납니다.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가더니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는지라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행하며 먹고 그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취하였다고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삿 14:8-9)

썩어야 될 짐승 사체에서 먹을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이 나옵니다. 삼손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삼손을 장악하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사명성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주체로 해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었고, 그것을 통해서 블레셋을 쳐부수는 빌미로 삼았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징계는 그 인간이 하는 욕망을 ‘아름다운 욕망’이 되도록 조치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받고 누리는 모든 것이 징계 조치에 따른 하나님의 선물이 됩니다. 인간은 자꾸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탈선합니다. 그것은 ‘자기 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나름대로 자기 의로움을 따로 구축해서 간직하려 합니다. 이게 바로 징계감입니다. 따라서 징계란 ‘내 것에 손상이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고 여긴 것에 손상이 가는 것’입니다. 그동안 내 것이라고 간주되기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내 것 자체가 와해되어 버리게 되면(이게 징계), 지금 있는 모든 것이 그대로 다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 바로 이점을 성도는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본디 주인님이 나타나서니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전혀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징계를 행사하시면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추잡스러운 사적인 욕망마저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아름다운 욕망’이요 ‘주님이 시키신 욕망’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8-30 20:58 
46강-신 8장 7-10절(징계와 선물)1508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8장 7-10절입니다. 구약성경 275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본문을 쉽게 이해하면 이렇습니다. “너희들이 말씀대로 살면 살기 좋은데 넣어 줄게.” 여러분 이렇게 느껴지죠. 그런데 문제는 이거에요. 그 땅이 누구 겁니까? 라는 문제에 접어들면 우리는 우리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아무리 좋은 땅, 좋은 것이라도 그게 내 것이 되어야 최종적으로 우리는 만족을 하게 되어 있어요. 내 것이 되어야.

근데,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거니 맘 놓고 먹어라.” 하는 것이 이미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그게 불만스러워요. 적게 먹고 내 것 되는 것. 적게 먹어도 좋으니까 내 것만 있으면, 내 것으로 전환이 될 경우에만 우리는 족하게 살아가는, 이미 인간 자체가 그렇게 변질되고 말았어요.

원숭이한테 중국의 주인이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아침에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줄까?” 이렇게 하니까 원숭이가 막 길길이 화를 내는 거예요. 그래서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줄게.” 하니까 그렇게 좋아하는 겁니다. 합해 봐야 일곱 개 인데. 똑같이 일곱 개인데 아침에 세 개 준다고 하니까 그렇게 화가 나는 거예요.

그 원숭이 보고 하는 이야기가 우리 자신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평생 배부르게 살았다, 얼른 보면 우리는 그것에 만족하는 것 같지만 내 것으로 인하여 내가 배불렀을 때 우리는 만족하는 겁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남이 주는 것으로 배부르면 우리는 기분이 영 상해요. 속상해요. 내 노동으로 내가 배부를 때 우리는 만족합니다. 이걸 로마서 10장 3절에 ‘자기 의’ 라고 합니다. ‘자기 의’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죄를 짓과 난 뒤에 나로 인하여 피해를 본 사람이 나를 용서할 때, 그 용서가 그렇게 비참하게 들릴 수가 없어요. 차라리 벌 받는 것이 나아요. 누가 용서해 주는 것만큼 기분 나쁜 게 없습니다. ‘니가 씨 뭔데 나를 용서해? 니가 뭔데?’ 용서 받았다는 말은 평생 그 사람에게 어떤 채무를 지고 있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러면 독자적인 자기만의 가치나 의미를 언제 구사하겠습니까? 그런 기회를 놓치잖아요. 차라리 내가 지은 죄 내가 갚아버리고 이제는 니는 니고 나는 나다. 게임 끝났다. 깨끗이 끝내고 나만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는 그것이 우리의 본성에 굉장히 부합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사람들이 보면서 거기가 얼마나 살기 좋은지, 여기 7절, 8절에 보게 되면 산지에 시냇물이 흐르고 샘이 나오고 밀과 보리가 있고 포도와 무화과가 있고 석류와 감람나무가 있고 꿀의 소산지고 그리고 먹는데 결핍함이 없다. 그리고 돌이 철이고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는 것을 우리 21세기 사람들이 보게 되면, 만약에 목사님들이 하나님이 이렇게 좋을 것을 주신답니다. 어떻습니까? 하면 교인들이 뭐하고 하겠습니까? 이거 성경 아니라도 지금 이슬람 믿는 사람들이 이것보다 훨씬 좋은 것이 많아요. 지구상에. 이거는 가짓수가 몇 개 안 돼요. 밀과 보리 포도...

미국에는 다녀 온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게 되면 과일이 그렇게 많대요. 여기는 포도, 감람나무, 무화과, 석류...네 종류밖에 없잖아요. 거기는 수십 종류의 과일이 있어요. 차라리 약속의 땅에 사느니 미국 땅에 살겠어요. 그리고 배불리 먹는다는데, 지금 배불리 먹어서 똥배 튀어나와서 다이어트 한다고 난리잖아요. 지금 못사는 중국도 똥배 다 나와요. 북한은 김 정은 혼자 똥배 나오고. 지금 먹을 게 너무 많아서 그래요. 너무 많아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영 기분 좋게 들리지 않아요. 이거 없어도 지금 살 빼는데 급급하지 뭘 먹을까 걸식 들린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본문이 전혀 은혜가 안 돼요. 우리를 말씀으로 끄는 유혹거리가 되질 못해요. 주께서 기껏 대시한다는 게 배부르게 해줄게. 결혼식에 뷔페 가보세요. 어떤 결혼식에 보니까 만원 내고, 지금 만원내고 점심 먹는 사람도 있어요.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드라마 보니까 그런 게 나오던데. 하여튼 돈 만원 내고 실컷 먹는 그런 이야기가 드라마에 있어요. 부조 한 5만원 내고 뷔페 실컷 먹는데 뭐. 그리고 집에 가서 저녁 안 먹고 다이어트 하고.

그래서 오늘 본문 보면 옥토라 하는데, 이정도 옥토는 인간들이 언제든지 개간해서 해낼 수 있습니다. 지금 이러한 것을 주님이 조건으로 제시한다면 우리는 이 조건에 매료되지를 못해요. 매료의 요소가 아닙니다. “이 정도야 하나님 이 정도는 우리 힘으로도 해냅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취지가 완전히 죽어버리죠. 세상에 이것보다 좋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고 많으니까. 인도네시아라도 이만큼은 잘 살겠어요.

그렇다면 이 본문 내용이 뭐냐, 5절에 나옵니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이야기 쉽게 갑시다. 지금 제가 아까 언급했듯이 아무리 하나님이 좋은 것을 줘도 이게 내 소유로 등기이전 돼야 돼요. 내 것이 있어야 돼요. 적게 먹어도 내 것이 있어야 사람이 만족스럽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고 자꾸 주위에서 뭔가 줘가지고 먹게 되면 자기의 자존감이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얻어먹어도 별로 기분이 안 좋게 되어 있다니까요. 이게 원래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에덴동산이 거저 주는 거예요. 그러나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이제는 거저 줘도 싫어요.

내 것으로 되어서 이제 하나님이라도 내 것을 손대지 않는 그런 상황을 우리는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주시옵소서. 하지만 줘놓고는 가져가지 마세요.” 이미 인간이 이런 식으로 변질되고 말았어요. “하나님, 니 것은 니 거고 내 것은 내 겁니다. 내 것 안에서 나는 영원한 신이 되고 싶습니다. 영원한 절대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게 진짜 인간이 하나님께 요구하는 기도의 내용들이에요. 사실은. “하나님 주시옵소서.” “줄 테니까 니 자신의 것은 다 없어져도 괜찮나?” “그거는 아니고요. 내 것이 될 것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 취지를 아시겠지요? 징계라는 것이 어떤 차원에서 징계하느냐, 징계를 할 때에 도적질하고 간음했다고 징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은 징계한 결과물로 나온 것이고. 징계하는 근본적인 요소는 뭐냐 하면, 바로 내 힘으로 내가 살아가는 그 자체, 그 자체가 되어 버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에요. 5절에 보면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징계할 때 하나님이 징계하는 고 기준이 있어요. “제발 아들다워라. 니하고 나 사이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인데, 니 그거 원하느냐? 원치 않느냐?”는 것을 묻는 겁니다.

징계할 때는, 우리가 독자적으로 자기만을 위해 살기 때문에 누구의 아들로 사는 것은 딱 질색이죠. 그것 때문에 징계가 온다니까요. 뭐 큰일 했다고, 나쁜 짓 했다고 징계 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착실하게 살아도 징계가 와요. 착실하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거 여러분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로 인하여 자기가 사는 거, 그거는 참 지옥 갈 만한 사람이죠. 그래서 어떤 가정에도 그런 게 있는데, 참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참 훌륭하고 사랑이 넘치는 부모인데, 이상하게 그 부모한테 복음만 전하면 부모가 발작을 일으키네. 복음만 전하면.

“야야 니 좋은 게 내 좋은 기다.” 라고 분명히 말은 그렇게 해놓고. “엄마 나는 복음이 좋아” 그 복음과 십자가 이야기에 대해서는 “고건 빼고. 그건 빼고 나머지기 니 좋은 게 내 좋은 거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줄게.” “그러면 어머니 교회 가서 복음을 받아들이죠.” “그거는 말고. 야야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어머니 인생 없거든요.” “야야 그런 소리하면 안 된다. 니 왜 내 인생이 없는데?”

사실은 우리 믿는 사람들도요, 그 불신자들을 통해서 참 많은 것을 배워요. 어떤 것을 배우느냐 하면, 딱 저 모습이 내 모습이다. 평소의 모습이 저 모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사실은 나는 나로 인하여 즐겁고 나로 인하여 기쁘고 오직 나 때문에,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 때문에 기쁜 그런 독자적인 인생을 살아가잖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난해하기 시작하는데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징계를 할 때 기준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유지되는 그러한 것을 목표로 삼아서 징계하는 거예요. 그래서 징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징계 받고 난 뒤에 상태가 제대로 된 아버지와 아들 상태가 아니면 그거는 징계 근처에도 안 갔어요. 이거는 고생만 들입다 했지 지가 스스로 고생한 것뿐이에요. 징계가 있고 결과가 뭐냐 하면, 이래 되어야 해요. “나는 아버지만 있으면 족해요.” 이렇게 나오면 그거는 제대로 자리를 찾은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만 있다면 아무런 인생 이렇게 살아도 상관없어요.” 이렇게 나오면 제대로 징계 받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이정도 은혜 주셨으니까 이제부터 내가 감사하겠습니다. 또 은혜 주시면 또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이거 징계상태에 있어요.뭐 니 것을 니가 바쳐? 우리가 우리 게 있어야 바치죠. 다 주님 것인데 뭘 바칩니까? “이번 일만 잘 되면 제 아들 신학교에 보내서 하나님 종으로 쓰겠습니다.” 이건 뭐 이상하고 수상해요. 우선 아들이 지 아들 아니기는 마찬가지고. 그 다음에 드린다 해서 아들이 만무하게 드릴 아들도 아니고. 드려봤자 아들은 그 책임을 엄마한테 지울 거고.

쓸데없이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데 자꾸 맹세를 하는 식으로 기도 뒤에다가 그 내용을 삽입을 시킵니까? “이거만 해주신다면 이거 해드리겠습니다.” 자꾸 뒤에다가 기도할 때 맹세하지 마세요. 기도라 하는 것은 그냥 성질대로 기도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저는 6자로 ‘아름다운 욕망’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욕망’ 욕망이라 하는 것은 본인이 생각해도 추잡스러워요.

그런데 그 추잡스러운 욕망을 하나님이 나서서 그걸 아름답게 바꿔요. 행동은 바뀌지 않습니다만. 자기는 내가 봐도 더럽고 추잡하다는 욕망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 일의 진행과정을 보니까 세상에 내가 이런 것을 욕망한다는 자체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왜? 나중에 보니까 주께서 시키신 욕망이어서 아름다워요. 그 욕망을 자제하거나 절제하지 마세요. 아름다운 욕망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자 징계를 하는데, 왜 내 욕망을 더럽다고 하느냐, 독자적인 안목, 독자적인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생각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이런 나쁜 짓을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분명히 슬퍼하실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 요건 징계감입니다. 내가 나이트클럽에 가서 부비부비 했다, 불신자들만 하고 있는 그런 곳엘 갔다, 내가 참 전에는 갔지만 교회 다니고 나서 한 12년 동안 안 갔는데, 12년 만에 요새는 어떻게 놀고 있나 해서 가보니까, 물 흐린다고 한 번 쫓겨났는데 다시 시도해서 가보니까 이래 노는구나! 그냥 호기심에 갔다, 하지만 주여 두 번 다시는 안 가겠습니다. 또 뒤에다 맹세를 걸어요.

두 번 다시는 안 한다는 소리를 하지 마세요. 다시는 이런 일을 안 하겠습니다는 그런 말을 제발 그만 하세요. 제발, 제발 그만 하세요.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자제하거나 절제할 수 있는 대상자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손에 놀아나는 인간의 존재가 아니에요. 인간은 결심을 하든, 맹세를 하든, 스스로 혈서를 쓰든, 그야말로 손가락을 자르고 귀를 자르고, 오른 눈을 빼고 할지라도 나머지기 몸 가지고 또 그 짓 할 거예요. 왜 본인이 본인을 징계합니까? 주제넘게. 왜 본인이 본인을 벌 세워요. 그건 마귀의 수작에 놀아난 거예요.

인생 그러면요 굉장히 피곤해요. 참 피곤합니다. 아름다운 욕망이라니까요. 아름다운 욕망. 욕망치고 추잡하지 않은 욕망이 없어요. 다 더러워요. 더러운데 한 번 하고 난 뒤에 뒤돌아보세요. 하나의 예를 들면, 수요일에도 그런 예를 들었는데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 할 때 이거 추잡스러운 욕망이에요. 십자가 왜 믿는가, 십자가 피 믿고 천당 가려고 믿는 거거든요. 이거 얼마나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추잡함입니까?

그런데 그 추잡스러운 욕망이지만 우선 살아야 되니까 십자가 믿고 그 다음에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입시키는 십자가의 의미가 있어요. 그게 뭐냐, 예상 밖의 일들이 벌어져요. 인생이 내 맘대로 안 된다고요. 그런데 그 자체가 뒤돌아보니까 그게 주께서 나한테 알려준 십자가의 길인 거예요. 그러면 내가 십자가 믿고 구원받겠다는 나름대로의 추잡하고 더러운 욕망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한 경우를 발생시킨 겁니다.

우리가 나서서 스스로 겸손에 떨고, 스스로 마음을 낮추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굉장히 괘씸한 거예요. 그냥 성질대로 막 살면 되는데, 막 안 살겠다는 것이 두 배 세배나 주님 보시기에 더럽게 막 사는 거예요. 그게. 자,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를 지금 해야 하는데요. 시편 1편 3절을 보겠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여전도회, 헌신회 하게 되면 꼭 이걸 외워서 시작하는데. 여기 3절에 보면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하잖아요.

오늘 본문 신명기 8장에 나오는 모든 것들이 주님이 주신 선물이거든요. 여기 동이니 철이니 무화과니 보리 석류...인간들은 지금 내가 노동해서 내가 얻은 것을 좋아해요. 누가 공짜로 주게 되면 그 사람한테 짐이 되고 그 사람한테 종속되기 때문에 그게 딱 싫은 거예요. 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내 힘으로 얻을 수 있는데 뭐 남의 도움을 받아요? 그렇잖아요? 여기 보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거는 뭐냐, 말씀이,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하거든요. 말씀이 결실을 내게 되어 있어요. 말씀이 스스로 말씀대로 된다면 결실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근데 그 말씀 안에는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주인공이 있어요. 그 말씀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어서 그 말씀의 결실을 내는 겁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주야로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은 본인이 그만큼 시간이 있어서 한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묵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으로 몰아넣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은 자기 생존에 더 신경 쓴다는 것을 뻔히 아시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몰아넣게 되면 진짜 성도는, “그래 내가 잘못한 거야. 나를 벌 줘야지. 벌주면 하나님께서 기특하다고 원상복귀 시켜주겠지.” 이게 아니고 분명히 여기는 어떤 내가 잊어버렸던 말씀이 기억나게 하실 거라는 겁니다. 내 사명이 기억나게 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사사기 14장에 보면 거기 삼손이 나오는데요. 14장 8절에 보면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가더니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는지라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이래 되어 있어요. 사자가 죽었습니다. 사자의 사체거든요. 죽은 시체가 되어 버리면 썩습니다. 근데 썩은 데서 뭐가 생성되는가, 꿀이 생산돼요.

썩은 데서 꿀이 나온다는 거, 썩은 가운데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것, 귀한 것이 나온다는 것, 약속의 땅의 열매가 나온다는 말은, 삼손으로 하여금 삼손의 원래 사명이 나실인, 구원자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삼손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삼손이 사자를 때려잡아 죽이게 했고 거기서 꿀이 나오게 했고 사자와 꿀을 가지고 블레셋에게 이야기했고 그걸 핑계로 블레셋 사람들을 징벌하게 된 근거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그 일련의 모든 사태들이 하나님의 일관된 하나님의 사명을 누가 감당하는가, 본인 삼손이 감당하는 것이 아니고 사명을 주신 하나님이 사명대로 감당해 나가도록 그렇게 조치를 해나가시는 겁니다. 삼손이야기는 그만 하고 우리이야기로 돌아오면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는 것은, 그것은 징계이후에 주어진 것입니다. 징계이후에.

그러면 징계를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주셨구나!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말씀의 사명을 유지하고 계시는구나! 왜냐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다는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데 그 약속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이 없고 이것이 약속이라 할지라도 내 것 만드는데 애썼다 이 말이죠. 그래서 중간에 하나님의 징계가 주어진 겁니다. 징계가 주어지니까 우리가 노선을 이탈했다가 다시 노선으로 온 겁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처럼 됩니까?” 가 아니라 “하나님이여, 제게 준 이 상황 속에서 제가 할 일은 뭡니까? 제 사명은 뭡니까? 제가 알아야 될 핵심은 뭡니까?” 이게 중요한 거예요.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아들 관계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그겁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순간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일은 이 순간 내가 무엇을 해야 됩니까?” 그것이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였어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거는 예수님이나 할 일이지 감히 우리 같은, 이 미천한 우리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미천한 방식대로 또 사명이 있습니다. 다시 해봅시다. 인간을 징계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에게 종속되기를 싫어한다는 거예요. 그거는 나만의 독자적인 나의 세계를 따로 구축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걸 내놓게 해요. 그걸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내놓게 해요. 모든 욕망과 욕심과 행동은, 이것도 내 것 되겠습니까? 저것도 내 것 되겠습니까? 어디까지가 내 거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내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칩니까? 자꾸 이렇게 끌어 모으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어디서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는데, 요새 개콘 재미 하나 없거든요. 개콘보다 더 재미난 것이 있어요. 개혁주의에 속한 어느 교단에서 청춘 남녀가 사귀었는데 속도위반을 한 거예요. 속도위반을 떡 해놓으니까 배가 불러올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둘이 결혼하기로 했는데 교회에서 허락을 안 하는 거예요. “우리 교단은 말씀대로 사는 교단입니다. 둘의 결혼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정 결혼하고 싶으면 우리 교단한테 징계를 받으시고, 징계 받고 난 뒤에 결혼 하세요.” 이렇게 나온 거예요. 징계 받고 난 뒤에 결혼 왜 하죠? 징계 받고 난 뒤에?

제가 우습다는 말은, 왜 남의 인생에 교단이 왜 끼느냐 말이죠? 남의 인생에? 둘이 속도위반해서 결혼을 하든지, 헤어지든지, 그 교단이 왜 끼느냐 말이죠? 그게 하나님 뜻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징계를 받고 난 뒤에 하라는 거예요. 징계가 뭐냐 하면 성만찬 참석 못하고 교회 며칠 동안 출석하지 못하게 하고 그런 거죠. 그런다고 생긴 아기가 지워집니까? 그게 다시 과거로 돌아갑니까?

자, 교단에서 그런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냐면, “우리의 젊은 철없는 행동이니까 잘못했습니다.”는 것을 회개하라는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회개가 되려면 애가 사라져야 되죠. 애가 유산되든지. 애가 생긴 것이 죄악의 열매라면 회개하고 난 뒤에는 죄악의 열매가 없어져야 하거든요. 죄를 지어서 벌을 받았으면 그 뒤에는 죄가 없어져야 되잖아요. 제가 지금 개콘보다 웃기다고 한 것이 이 말이에요. 지금 애는 커가고 있다고요. 애는 들리지도 않아. 엄마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 엄마 뱃속에서 발로 차고 놀고 있는데. 중간에서 바깥에 있는 교회 어른들이 “니들 잘못했으니까 징계 받으라. 뭐 징계 받고 난 뒤에 결혼 승낙해줄게.”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결혼을 허락 못해주고 뒤늦게 억지로 결혼을 시켜주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함 사세요! 그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얼굴에다 오징어 쓰고 돈 안 주면 다시 돌아가고 돈 주면 들어오고. 이게 뭐야? 밀당도 아니고 이게 뭡니까? 더 웃기는 것은 그렇게 하니까 여자 쪽 집에서 기분이 나빴던 거예요. 기분 나빠서 결혼식에 참석 안 했어요. 안 하니까 남자 쪽에서 결혼하고 난 뒤에 사돈끼리 싸우는 것이 찝찝했는지 서울에서 결혼식 했는데 대구에서 친정집을 위해서 한 번 더 했어요. 대구 사람들 참석 안 한 분들을 위해서 결혼식을 곱빼기로 했는데, 이번에 결혼식을 할 때는 주례하는 목사가 다른 교단이에요. 교신 측 교단인가 와가지고 하는데 배가 부른 것을 보고 주례는 해주되 징계 받고 난 뒤에 해준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또 징계라.

지금 보세요. 오늘 본문에 관련된 징계라는 것이니까 한 번 생각해봅시다. 지금 젊은 신혼부부는요, 징계고 뭐고 빨리 결혼식해서 애 키우는 것에만 관심 있어요. 징계라는 것이 뭐냐 하면 징계하시는 분의 취지가 계속 남아 있어야 그게 징계가 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징계가 있으면, 아! 우리가 독자적인 나만의 세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 청춘남녀, 우리 자신을 봅시다. 너무 좋아서 절제를 못해서 고만 임신이 되었습니다. 근데 임신 된 것을 징계를 받게 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양쪽 목사님들. 다시는 이런 짓을 안 하겠습니다.” 뭐 둘이 결혼했는데 다시는 뭐....,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하겠다는 것을 그들은 요구를 하고 있는데 그거는 징계의 본 노선이 아니에요.

‘주여, 이런 것도 아름다운 욕망이군요. 내가 저 여자를 보고 임신케 한 이것이 분명히 나는 죄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마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군요.’ 오늘 놀라운 윤리도덕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거예요. 그럴 때 잘잘못을 떠나서 그 관계가 아버지와 그 아들 관계가 다시 원상태로 됐잖아요. 그러면 애도 있고 같이 사는 전체가 뭐냐, 다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이게 바로 감람나무와 젖과 꿀이 되는 겁니다. 이게 천국이 되는 겁니다. 애를 하나 낳아도 천국이고 둘을 낳아도 천국이고. 애가 유산 되도 천국이고.

매일같이 이런 징계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자존심, 내 의, 내 체면, 타고난 마귀의 속성을 우리가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관심도 없고 나만 잘되면 축복이라고 여기는 이 잘못을, 이런 욕망마저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욕망으로 바꾸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