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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47강-풍족함의 위험(신9'11-14) 15090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9. 8. 07:27

2015-09-06 14:52:46 조회 : 53         
   풍족함의 위험 150906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풍족함의 위험(신명기 9:11-14)

음성 동영상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7XSDEG6mE3M, Hit:4
 이근호 15-09-06 15:43 
풍부함의 위험

2015년 9월 6일                            본문 말씀: 신명기 8:11-14

(8: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8: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8: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8: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우리의 구원의 최고 방해자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구원되고자 시도하는 것조차 우리의 구원의 방해할 정도입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진행되는 구원작업을 통해서 밝혀지게 됩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희한한 기적을 나타내십니다. 그것은 바로 모세의 자기 손을 자기 품을 넣었을 때에, 졸지에 문둥병자의 손이 되는 기적입니다.

외부인인 보면 모세의 사적인 경험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란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한 사람을 보내어 히브리인 집단을 모세가 받은 언약적 운명 속에 종속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손만이 문둥병이 아니라 전체 이스라엘이 저주받아 마땅한 집단인 것이 현 실정입니다.

모세의 손이 문둥병자가 되는 것은 그의 외부에서 벌어지는 뱀과의 전쟁의 여파가 이미 모세의 자리까지 점령했다는 말입니다. 마치 핵폭발이 먼 발치에서 일어난 것을 목격하는 그 순간, 이미 관찰하고 있는 목격자 목숨을 앗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곧 모세와 그에게 예속되는 이스라엘 나라는 출애굽 사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언급하는 이 말씀도 출애굽 사건과 연관지어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나는 이 말씀을 경청해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아야지”라고 다짐을 해버리면 이 사람에게는 ‘출애굽 사건이 누락이 되어버립니다. 출애굽 사건이 함유된 존재가 된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평생을 두고서 계속 이 사람의 육을 통해 발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실시하면 두 종류의 자아로 벌여놓으셨습니다. 하나의 자아는, 스스로 자기 인생와 운명을 조절하고 조정하려고 시도하는 자아와 또 다른 자아는 인간이 전혀 예상 못하고 출애굽 사건의 결과로서 새로 생겨나버린 자아가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의 결과로 도출된 자아는 이미 자기 가능성에 실패하고 그 한계가 드러나 버린 자아를 전제로 해서 정립된 자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아의 입장에서 볼 때,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하려는 자아는 유령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 자아는 욕망과 죄와 사단에 의해서 조정되는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제거하고 끊고 사라지게 한다고 우기지만 실은 욕망은 잠시 억압될 뿐입니다.

자아가 자아의 욕망을 스스로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다고 우기는 것은 기껏 ‘계량적 윤리’만 나올 뿐입니다. ‘계량적 윤리’란 선과 악과 구분지어놓고 어느 쪽이 분량이 많은가를 통해서 자아의 운명도 평가받는다고 여기는 윤리관입니다. 복식 장부에서 차변과 대변을 두고서 마지막에 당기순이익을 정리해내는 것처럼, 선과 악을 양적으로 까나가서 마지막 남은 쪽의 성분으로 운명이 결정된다는 인식입니다.

선한 것이 악한 경우보다 많았다면 51%의 지분을 넘어섰기에 선한 자가 되어 천국가고, 그렇지 않고, 악한 경우가 51%을 넘어서면 지옥간다고 식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 어릴적부터 착한 일의 마일리지를 많이 쌓아놓은 사람들은 늙어 악한 일을 하더라도 마음 창고에 선한 물량이 많이 확보되었기에 괜찮다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이런 식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만을 보고 심판의 주는 그냥 넘어갔습니다. 이 과정을 늘여보는 것이 마태복음 12:28-29에 보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자신이 뭘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전개되는 세간 훔쳐가는 도둑의 일관된 작업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구체화하는데 있는 자신의 처지와 팔자와 인생이 참여되었음을 압니다. 도둑으로 오셔서 그동안 자아를 지배한 욕망의 지배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시는 과정을 증거하는 자가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을 지배하고 억압했던 그 실체에 대해서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악마가 자신을 어떤 식으로 죄 속으로 갇히게 했는지를 압니다. 그것은 바로 욕망의 레벨이 자꾸만 상승하는 그런 교만을 갖게 한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먹고, 사업하고, 갖고하는 그 모든 것이 결국에는 ‘나의 것’으로 귀환되는 요소가 내부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욕망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사람을 지배하기에 한 번 올라간 자리에 대해서 쉽게 내 소유 아닌 것으로 포기하기 힘듭니다. 이게 바로 교만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이 벌고 아무리 많이 먹고, 좋은 집에 살아도 인간들은 그것이 자기 욕망의 끝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보다 더 높은 상황으로 가는 것으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확률을 줄이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내 것’이라고 전환되었기에 오로지 그것을 확장시키고 그것 위에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이 뭘 소유해서 생긴 결과가 아니라 욕망이 인간을 소유해서 소유물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점을 스스로 찾아보기를 악마는 부추깁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이 가져도 인간은 자신을 교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작게 가져도 인간도 자신은 그것으로 족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은근히 지금보다 더 크게 욕망의 만족을 채울 것을 고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만족스럽지 않는 마음 자세가 곧 이 신명기 9장의 말씀에 입각해서 ‘교만’에 해당됨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즉 “주님, 저는 늘 욕망의 화신입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이 바로 모세가 자기 품에 넣었던 그 문둥병 손의 연속된 작업과 같은 결과를 낳습니다.

이 때, 성도는 나의 한계를 드러낸 바깥 전쟁을 주목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 전쟁에 참여하게 된 새로운 자아로서의 자아상도 정립하게 됩니다. 즉 나의 구원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을 보여주는 전쟁에 우리 자신에 가담해 있음을 압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교만상태에서 살고 있음을 사후(事後)적으로 압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사건, 곧 십자가 사건이라는 외부적 사건이 성도 내부에 입히는 영향력입니다. 이럴 때 성도는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증거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작업과 관련된 모든 일인 것 뿐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9-06 21:20 
47강-신 8장 11-14절(풍족함의 위험)1509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8장 11-14절입니다. 구약성경 275페이지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이렇게 한 번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배불리 먹고, 증식되고, 세상에 이런 일도 나한테 생기다니!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소유가 풍부하고, 교만해지더라도 그때 가서 처리하고, 일단 교만을 이끌어내는 그 과정에 한 번 접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겁니다. 내가 나의 구원을 방해한다는 것이죠. 내 자신이 나를 방해해요. 하나님께서는 나와 나를 출애굽하면서 둘로, 내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끄집어내어서 두 개의 나로 만들었습니다. 두 개로 만들고 난 뒤에, 만들면서 무엇을 성취하려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한테 관심 없어요. 뭘 성취하려고 하느냐 하면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끄집어 낸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는 그 과정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해요.

“쟤들 봐라! 아무것도 아닌데 천국백성 됐잖아!”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랑질을 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온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어떤 것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라는 그 취지가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로 전달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알아요.

뭐냐 하면 오직 그리스도의 하신 일만 자랑하고 기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만 십자가에 죽게 하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라고 인정하므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겁니다. 그러면 영광 받으시는 코스는 이미 정해져 있어요. 비록 우리가 정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뭐냐,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그 공식 하나밖에 없어요.

근데, 그 공식에 있어서, 우리가 주님께 영광 돌리는데 주님이 어떤 코스를 밟으셨는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빌립보서 2장 8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그를 주라 인정하면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십자가를 빼버리고, “주여 이렇게 복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이거는 아니에요.

그러면 십자가를 믿으면 될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바로 또 우리의 오해에요. 우리는 십자가를 믿고 싶은 마음이 되지를 못하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나의 구원은 내가 막아요. 그러면 내 구원은 내가 막는 요소가 뭐냐,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방금 몇 가지가 나왔는데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다 내 것, 내 것, 내 것, 내 것....니 거 아닌 내 거 같은 거 말고. 진짜 내 것. 내 소유. 내 것 잘 되면 나는 그것으로 족합니다가 구원을 방해해요. 그렇다면 이 구원을 방해하면 거기서 하나님께서 내 것을 없애면 되지 않느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없애지를 않습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내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그렇게 유도를 해요.

이유가 뭐냐,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이유가 뭐냐, 주님께서는 출애굽 기능만 드러내도록 원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저 어때요? 이렇게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습니다.” 이걸 하나님께서는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너를 한껏 이용해서 출애굽 기능만 드러내게 되면 주님께서는 만족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일에 만족하지 우리를 위한 일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기능이 기능대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대만족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하나의 재료로 활용당할 뿐이죠. 따라서 여기에 너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 평가를 했다고 해가지고, “주님 저는 아니에요. 저는 김치하고 김만 있어도 삽니다.” 하면서 이런 식으로 막 사는데, 오늘 식사당번이 세상에 10시 45분까지 오지를 않아가지고, 식사 준비하는 주최 측에서 아이고 뭐 김치 있겠다, 김이나 사와가지고 먹으면 되지. 라고 하는데 마침 그때 차타고 왔어요.

그런데 김치에다가 김만 먹어도 괜찮은데, 짜장 밥은 왜 하죠?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오해가 있어서 그래요. 우리가 욕망을 부리고 욕심을 부린다고 하는데 그거는 너무너무 오해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판단 착오가 많아요. 내가 욕망을 부리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욕망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뒤늦게 이 땅에 태어나야 했어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목사님. 이제는 기도 많이 해서 욕망을, 욕심을 줄였습니다. 욕망을 없앴습니다.” 하는데 욕망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억압되는 거예요.

프로이드가 이걸 발견한 거잖아요.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이라는 것은 물침대에요. 한쪽이 눌리면 한쪽이 눌린 물은 옆에 자고 있는 사람한테 올라가 있어요. 전달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한쪽을 참으면 그거 참았던 그 욕망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잠재되어 있다가 언제 어떤 계기를 통해서 이게 화산처럼 폭발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공부하라고 하니까, “공부해!” 공부를 억지로 하고 나서는, 시험 다 치르고 나서는 ‘해방이다!’ 하고 폭발해버리잖아요. “시계 사 도!” “폰 바꿔 도!” 아이고, 그동안 폰 바꿔 달라는 그 욕망을 얼마나 억눌렀을까요?

사라진 게 아닙니다. 일본말로 하면 ‘요시~요시~’ 두고 보자는 거예요. 두고 보자. 착한 일 많이 했으니까 나쁜 일 많이 해도 이제는 용납해 주실 거죠? 이게 뭐냐 하면 이 윤리를 계량적 윤리라고. 양적으로 따지는 윤리. 대차대조표 따지는 윤리에요. 착한 일을 많이 하게 되면 마일리지가 쌓이고, 이 마일리지가 많이 쌓이면 나쁜 짓해도 충분히 커버가 되는 정도로 미리 앞당겨서 착한 일을 많이 해놓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 나쁜 짓 했을 때에 착한 일로 상쇄가 되는 조치를 우리가 단단히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어요.

대차대조표라니까요. 차변에서 대변을 빼면 당기 순이익이 나와 가지고 주식 51퍼센트만 되면 천국행이다고. 지가 지 맘대로 생각하는 겁니다. 선과 악을 자기 행위로 결정하는 거예요. 악한 행위와 선한 행위 중에서 선한 행위가 많으면, 저울이 이렇게 선 쪽으로 내려가면 천국이고 악 쪽으로 내려가면 지옥행이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릴 때부터 착한 일을 많이 했거든요. 그러면 60넘어서 나쁜 일 해도 괜찮아요. 왜? 창고에 선한 것이 넉넉하게 있으니까. 나쁜 짓해서 많이 써먹었어도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이 문제가 오해가 된 것이 뭐냐 하면, 욕망이라 하는 것은 내 소속이 아니고 다른 쪽에 소속이 있어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관할권이 바뀌게 되어 있어요. 육신이 바뀌고 난 뒤에 전에는 하나님이 관할했던 것이 어디로 이동되었는가 하면, 세상 신이 마귀니까, 마귀의 종노릇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죄의 종노릇. 마귀의 종노릇.

천국은 뭐냐, 지금 마귀의 종 된 그 세간을 주님이 담타고 넘어가, 도둑놈처럼 넘어가가지고,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마귀를 꽁꽁 묶어놓고, 그동안 마귀한테 꼼짝 못했던 그 세간을 가져가는 그 과정이 바로 천국의 과정이에요. 따라서 천국은 가만히 있으면 돼요. 아! 오늘 복음 하나 또 나옵니다. 가만히 있으면 돼요. 가만히 있으면 착해집니까? 아니요. 절대로 착해지지 않아요.

그럼 가만히 있으면 뭐가 보입니까? 누구 하나 담타고 넘어와 가지고, 내 주인 묶어놓고, 나를 보쌈 해서 데려가는 그 과정이 보이신다면, 출애굽 기능이 탑재된 사람으로 간주해서 천국 갑니다. 출애굽 사건이 탑재된 사람이에요. 내 스스로 구원된 적이 없습니다. 출애굽 4장에서 굉장히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겨서 주신 기적이 있는데, 그 기적이 뭐냐 하면 모세가 자기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는 기적이에요.

바깥에서 일어나는 그 사건이 나를 구원한다고 했는데, 그 바깥이, 바깥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나 자신도 바깥에 일어나는 그 전쟁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기적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니 손을 가지고 품속에 넣어라!” 멀쩡한 손이죠. “넣어봐라!” “뭐 있다고? 자 넣었습니다.” “빼봐라!” 빼보니까 문둥병 손이 되었어요.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 놀랬죠.

바깥에 있는 사건이 바깥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에 이미 우리 자신이 휘말려 들어갔다는 사실을 증거자로, 목격자로 이미 포함을 시켜버린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하시는 말씀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안 보이냐?” 라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죠. ‘나만 보이나?’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꼬시더냐? 어떻게 니 인생을 니가 해결하려고 하느냐? 니 바깥에 십자가 사건이 벌어져버렸는데. 벌어졌잖아요.

요즘 같이 뭐, 저녁 되면 벼락치고 소나기 내리잖아요. 특히 밤중에도 소나기 내리고 벼락치고 해서 정전되고 이렇거든요. 정전되고, 벼락치고, 낙뢰 떨어질 때마다, 저는 영화 하나가 생각이 나요.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입니다. 마리아라는 수녀가 가정교사로 취직을 했는데, 트랩 대령 애들이 말썽꾸러기에요. 그래서 애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가정교사들이 왔지만 전부 다 퇴짜당하고, 이 마리아는 기타 하나 들고 와서 가정교사를 하는데, 애들이 전쟁 무서워하니까 전부 다 마리아 선생님 방으로 다 와요. 그래서 침대에서 통통 뛰면서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그동안 멀리했던, 멀찍이 떨어졌던 그 무서움 하나로, 엄마 품에 오듯이, 선생님 품에 다 하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각자 흩어져 있는 히브리인들을 하나로 집결시키죠. 모세가 알던 그 사건 하나로 다 집결시킵니다. 모세라는 이름이 뭐냐, 물에서 건져냈다고 해서 모세에요. 그게 모세 개인의 인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모세의 인생을 확장시킵니다.

모세 인생을 확장시킨다는 것은 모세가 받았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언약을 확장시켜버리면 나라가 돼버려요. 어떤 나라? 물에서 기어 올라온 나라. 이게 시편 135편에 나와요. 물에서 건져온 희한한 나라. 물에서 건져온 나라기 때문에, 그 뒤따라서 물에서 나온 나라가 있었으니, 그게 요한계시록에서 나온 짐승의 나라에요. 둘 다 공통점이 바다에서 기어 나와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은 허깨비고, 실제로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것은, 물속에서 있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전쟁에 의해서, 땅 위에 있는 본질적인 운명이 확정된다는 겁니다. 바다와 땅이 갈라지면서 주도권이 땅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땅에서 바다를 보고 겨냥한 자는 메시아이신 예수님 그 시선밖에 없어요. “빨리 기어 나와라! 다니엘서의 예정대로 바다에 있는 짐승아 기어 나오라고! 바벨론, 바사, 마케도니아, 로마 빨리 기어 나와!”

사실은 이러한 안목은 우리 인간들에게 요구하기 힘들어요. 왜, 인간은 그런 성경적인 안목을 갖고 싶지도 않고, 또 가져봤자 이미 나를 지배하고 있는 욕망이, 그런 성경 지식을 욕망 쪽으로 전환시켜버려요. “하나님! 이거 다니엘 알고 요한계시록 알면 목회 성공하겠습니까?” 또 내 소유, 내 배부름, 내 농사 잘 되는 것, 내 사업 잘 되는 것, 항상 기도 잘하면 포도 농사 잘 되겠습니까? 성경 많이 알면 뭐, 뭐가 잘 되겠습니까? 항상 내 소유가 나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를 둘로 나눠가지고 한쪽은 마귀에 속한 나고, 또 하나의 나는 이게 없는 나에요. 없는 나인데,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면서 거기서 딸려 나온 새로운 나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도출되는 거예요. 거기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지배하는 이 욕망, 이 욕망이 어디서 나오는가, 그걸 차출된 유령이라 하는데, 차출된, 뽑아져 나온, 떠도는 유령.

12절 봅시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라고 있잖아요. 이 말을 우리가 평생 가도 우리가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부자가 된다 할지라도 그걸 부자라고 만족하지 않아요. 음주측정이라니까요. 더더더더더.....,

아까 점심 때 김치하고 김만 있으면 됩니다. 거기에 동의할 사람 없어요. 에이, 그래도 짜장 밥은 해야지. 왜냐하면 이미 욕망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에 한 번 올라선 욕망은 두 번 다시 내려갈 수가 없어요. 윤도현 노래가 있잖아요. 이별이 만남보다 쉽다고요. 이별이 만남보다 쉽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여자와 사귀다가 헤어지면 처음부터 안 만난 것으로 하면 되잖아요. 이게 우리의 전지에요. 알아요. ‘에이, 뭐 여자 니 하나밖에 없냐?’ 여자 니 하나밖에 없나를 왜 웃으면서 편하게 안 하고 술집에서 혼자 술 마시면서 그런 소리를 하냐 이 말이죠.

그냥 편하게 여자 니 하나밖에 없어? 이렇게 하면서 헤어지지 않고, “아줌마, 이모 여기 술 한 병 더” 이렇게 하면서 왜 자꾸 여자 니 하나밖에 없냐고 술집에서 그런 소리를 하냐 이 말이죠. 괴롭다는 뜻이잖아요. 이미 올라선 욕망은, 욕망의 허락 없이 뒤돌아설 수 없어요. 뭐, 김치하고 김만 있으면 되지, 라는 이게 백back이 안 된다니까요. 안 돼요.

사람은 욕망에 올라서게 되면 사람은 착각을 해서 그게 나답다고 여겨요. 그래서 욥기에 나오는, 주신 자도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나오거든요. 욥은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인데, 우리는 욥의 변종이라.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또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이래 돼요. 그게 통성기도가 되면, 주여! 집 사 주세요. 집 사 주세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요, 라는 말을 절대로 넣지를 못해요. 왜? 그렇게 하면 내가 아니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은요, 언제 아느냐, 당하고 난 뒤에 뒤돌아서서 이 내용을 알아요. 내가 그때 김치만 있어도 넉넉한 상태였구나! 얼마나 교만하지, 에이, 오늘도 김치뿐이고 컵라면 뿐이가? 라고 했던 것이 이게 교만이었던 거예요. “엄마! 우리 집은 왜 이렇게 지하방에서 살아? 왜 남들은 햇빛 나오는 2층, 3층에서 사는데 우리는 햇빛 구경하기 힘들어? 햇빛은 고사하고 왜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리는 거야?” 엄마가 믿음 있으면 “니가 교만 하구나” 이래 돼야 돼요. “그래 조금만 참아. 돈 벌어서 탈출하게 해줄게.” 이게 아니고 “니가 교만 하구나”

하나님 말씀 못 지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이에요. 하나님 말씀 못 지킵니다. 우리의 욕망이, 내가 말씀을 방해해요. 만날 음주측정입니다. 더더더더더더더...우리요? 우리의 모습이요? 떠도는 욕망이에요. 유령이에요. 우리는 유령 같은 존재에요. 욕망에 사로잡힌 나는 나가 아닙니다. 욕망 사라진다고요? 아닙니다. 억압된 거죠. 우리는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요. 다른 걸로 폭파돼요. 니가 나 무시했지? 한 번 두고 보자. 니 코를 납작하게 해주지. 그렇게 노린다는 자체가 교만입니다.

우리는 그걸 모르고, 또 안다 할지라도 이 신명기 8장에 관심 없어요. 왜? 욕망이 나를 가만두지 않기 때문에. 이 쪼다야! 지고 사나? 내같으면 죽겠다. 자꾸 나를 변종으로 바꿔요. 떠도는 유령으로 바꾼다고요. 이 떠도는 유령, 차출된 유령이라는 용어를 제가 쓰는 이유가 있어요. 옛날에는 자연과 친화했어요. 상공, 농공, 단계가 있었잖아요. 못사는 것은 철공이 못살았고요. 그 다음에 개 잡는 것은 제일 밑바닥이고요. 그렇게 살던 시대에서는 자연친화적이었습니다.

그때의 상공업이라는 것은 주문생산이었습니다. 뭘 주문하시겠어요? 신발 만들어드릴까요? 자, 근대의 자본주의가 되면 이거는 주문받고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물건을 대량으로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사가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농사짓는 사람들 이거는 계급이 다 떨어지고 무역하는 사람, 그리고 사업하는 사람, 이 사람들이 자본의 주도권을 쥐면서 이게 최고 귀족계급이 된 거예요. 재벌 2세, 3세 까부는 꼬라지하고는. 그런 인간은 베테랑 형사한테 걸려야 돼. 영화이야기입니다. 하여튼 혼이 나야 돼요. 명동에 가서 얻어터져야 돼요. 그런 영화 있어요. 베테랑.

이미 그 말은 뭐냐 하면 “엄마. 나 농사지을게.” 라는 그 말이 아닙니다. 떠도는 유령이에요. 서울 진입하려다 실패해서 경기도 살고, 공장에 가고, 공장 갔다가 돈 준다고 하면 울산에 내려오고, 떠도는 유령이에요. 미국 갔다, 한국 갔다, 홍콩 갔다, 떠도는 유령.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걸 누가 종잡느냐? 그것은 어디에 정착한다고 종잡는 것이 아니에요. “너는 이미 출애굽 기능을 보여주는 내 사람이다.” “주여, 그걸 어떻게 압니까?” 소급해서 바로 내가 주인이 아니라 사탄이, 죄가 내 주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 자체가, 이미 출애굽 기능에, 우리가 주님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다면 하나님 백성이에요. 그러면 작은 것 하나, 겸손해 보여도 겸손한 것조차도 교만인 것을 깨닫게 되죠.

오늘 본문을 보면서 ‘그래 풍부하면 교만하지 말아야지’ 이게 아니고 풍부하겠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이 현재를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주여 날마다 나에게 출애굽을 일으켜주시옵소서. 이제는 주께서 출애굽 기능이 발휘되게 해주시옵소서.” 종 되었던 너를 백성 되게 했다는, 그것도 윤리도덕이 아니고, 오늘 아침에 말한 윤리도덕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십자가 피 때문에 너는 마음껏 교만해야 돼. 어디에 근거해서? 오늘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아직 집도 없는데요? 아니 집을 추구하는 자체가 이미 교만의 시작이에요. 우리는 평생 교만할 거예요. 이게 우리의 자랑입니다. 저, 평생 교만할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십자가 피만 자랑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주의 일에 말려든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맘대로, 내 욕망대로 하고 싶었는데, 너는 내 백성이야. 내 아들이라 하시며 다시 한 번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의 현 모습과 활동성과 본질을 알려주시니, 정말 우리는 떠도는 유령으로서 주의 출애굽 기능에 참여케 된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