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강-신 8장 3-6절(떡과 말씀)1508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8장 3-6절입니다. 구약성경 274페이지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 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 할지니라”
하나님도 아세요. 우리가 어디에 가장 신경 쓰는지를. 인간은 자기를 위하는 일일 경우에만 가장 진지해집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 자신에게 진지하니까 그런 진지함을 이 광야에서 맘껏 니가 드러내보라고 광야로 보내십니다. 여기 3절에 보면 “너를 낮추시고, 너를 주리게 하시고, 또 너도 알지 못하고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이 말은 톡 까놓고 “니는 니 밖에 모르지?” 라는 그런 뜻입니다.
니는 니 밖에 모르는데 너한테 입에 뭐가 들어가든지, 주변이 어떤 환경이든지 간에, 니 주변에 있는 환경과 니 입에 들어가는 그것이 너를 통해서 바깥으로, 행동으로 표출될 때는 어떤 식으로 표출되는지를, 그것은 니가 이제는 알 차례라는 겁니다. 어디에서? 광야에서. 아무것도 없을 때, 그냥 나만 집중적으로 생각할 때, 진정 내 속에 뭐가 들어있는가를 비로소 나에게서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힌트가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나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이런 말씀 하셨어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걸 누구한테 이야기하시느냐, 광야에서 인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아무도 없는데 누구한테 이야기하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한테 찾아온 사탄, 악마보고 이야기하죠.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들어가서 본문에 있는 말씀을 니가 알지도 못하는 만나를 너에게 먹이신 것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이 이야기를 그 당시에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들한테 이야기한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정답을 미리 보게 되면 이것이 나한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괴물한테 이야기 한 거예요. 괴물한테. 심판은 인간 심판 이전에 이미 마귀 심판이 하늘에서 이루어졌어요. 마귀는 그걸 참지 못해서 땅에 내려와 인간을 인질로 잡았죠. 그 인질로 잡힌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바로 우리들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누가 나를 잡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고 나한테만 진지해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나한테만 진지하다보니까, 내 속에 또는 나를 붙잡고 있는 마귀보고 하는 줄을 모르고,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니까 “예. 우리가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나와 버린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 속에 있는 마귀가 그렇게 우리 보고 시킨 겁니다. 평소에 내가 나를 지키는 식으로 살다 보니까, 그거 외에는 다른 방식이 없으니까, 내가 나를 보살피지 않으면 누가 나를 보살피겠어요? 내 영혼은 내가 지켜야지.
그러나 이러한 속성은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속성이 아니거든요. 처음에 창조할 때는, 하늘의 새와 들풀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맡기면 됩니다. 근데 맡긴다는 것은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는 인간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에 속합니다. 맡겨놓고 걱정해요. 맡겨놓고. “주님 맡깁니다.” “그래. 맡겨라.” 그래놓고 걱정해요. 자기가 자기 아들을 군에 맡겼잖아요. 군에 가면 머리 깎이고 옷 싸서 보내고. 이제는 뭐 나라가 알아서 훈련시키는 줄 믿습니다. 그래놓고 그 다음부터는 철야에 들어가요. 그저 후방으로 빼주세요. 휴가 한 달에 열두 번 나오게 하옵소서. 평소에 자기가 자기 자신을 지키던 그것을 맡기질 않았어요.
과연 이렇게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면 그 백성은 약속의 땅에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지키라고 해놓고, 분명히 본문 6절에 나오거든요.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고 그 도를 행하고 그를 경외하라” 분명히 했다 이 말이죠. 했으니까 이거는 어른들이 이걸 보고 지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해놓고 정작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천국 백성은 어떤 백성이냐 하면, 궁금하죠? 말씀을 줘놓고 말씀 지키면 말씀 지키는 사람이 천국 가잖아요. 그게 마귀의 발상이에요. 그게 아닌 거예요.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럼 당신이 이야기해보세요. 내가 이야기할게요. 마태복음 18장에 나옵니다. 18장에 보면 제자들끼리 누가 더 높으냐고 이야기할 때, 주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했어요. 어린아이는 그냥 우리가 아는 식대로, 주는 대로 먹는 거예요. 그냥 주는 대로 먹어요. 그러니까 어른이 아니잖아요. 자의식이 있는 게 아니고 어린아이니까. 주는 대로 먹으니까.
주는 대로 먹게 되면, 어린 아이가 쑥쑥 자라는 것은 주시는 부모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부모가 챙겨줬으니까 그만큼 자랐잖아요. 지가 알아서 농사지어서,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아이고 허리야’ 하면서 농사 지어 먹는 게 아니잖아요. 다 챙겨주잖아요. 연세 많으면 어린아이 같다는 그 말이 그거잖아요. 애들처럼 다 챙겨줘요.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엄마 없이는 못 사는 줄을 압니다. 근데 연세 많은 분 챙겨줘 봐야 자기 잘나서 사는 줄로 아는데. 어린아이들은 그게 없어요. 엄마, 아빠 없이는 곧 죽어요. 못 삽니다.
어린아이에게 제일 무서운 벌은 뭐냐 하면, “이래 가지고 집에 못 간다.” 집에 못 간다는 이 말을 애들이 제일 무서워해요. 청학동 예절교육 받으러 가서 청학동 훈장님이 집에 못 간다고 하니까 큰 애 울고, 둘째 울고, 셋째 울고, 대한민국만세 다 울어버렸어요. 잘못도 없는데 지가 따라서 울고. 집에 못 간다는 그 소리 듣고. “집사님. 천국 못 갑니다.” 하면 우리도 같이 울어야 되는데, “못 가면 안 가지. 뭐, 죽을 때 내가 알아서 갈게.” 이래요. 본인이 알아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평소에 우리가 아는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우리를 챙겨주시던 그 분과 합류하는 세계에 가죠.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 말고. 평소에 우리가 말씀도 못 지키고 모든 게 어설프고 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챙겨주시는 분, 내 행동에 대해서 탓하지 않으면서 계속 살려주시는 그 분의 세계에 합류합니다. 왜? 그래야만 천국 가서도 우리는 그냥 놀다시피 살기 때문에. 이 땅에서 거저먹듯이 천국 가서도 영원히 거저먹게 되어 있어요.
누가 그걸 방해하느냐, 내가 방해하죠. “내가 알아서 챙기겠습니다. 내가 알아서 살겠습니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내가 알아서 말씀 지켜 마일리지 쌓고 상급 받아서 살겠습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참 이야기할 것이 많아요. 시간관계상 일일이 다 못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것만 언급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집단적으로 그들에게 광야에 보낸 것은 꼭 하나의 음식만 동일하게 먹었다는 사실, 단수입니다. 복수가 아니라 단수. 자기 음식 지가 알아서 삼시 세끼 지가 알아서 먹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음식만 줘요. 하나의 음식만.
셰프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요리사에요. 만나만 줄곧 먹이시는 거예요. 이 말은, 그들은 만나를 먹었다고 하면 안 돼요. 만나가 필요한 인간으로 개조가 됩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니 속에 투입된 만나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 만나를 뭘로 보느냐 하면 “니는 만나를 먹은 게 아니야. 말씀을 먹은 거야.”
오늘 본문에 나와 있어요. 40년 동안 만나를 먹이게 해놓고 하시는 말씀이, 너도 알지도 못하는 만나를 먹이신 것은, 그 다음에 만나 이야기가 나와야 되는데,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 같으면 “너는 만나로 사는 것이 아니야.” 그래야 되는데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만나를 먹여 놓고 “니 눈에는 만나로 보이냐?”는 겁니다. 이거는 말씀이 니 속에 들어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냥 양식을, 떡을 먹는 것은 내부에서 소화되면 사라지는 거예요. 하지만 이 말씀은 들어갔다 하면 이 안에 잠복되어서 파장과 신호를 외부로 보내요. 마치 성폭행범에게 전자 팔찌 채운 것처럼. 족쇄를 채우는 겁니다. 우리 내장에 어떤 전자파를 보내는 기계를 집어넣었으면 우리가 이동하는 그 사이에 경찰에서 이 사람은 지금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파악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나를 집어넣어요. 말씀을 집어넣습니다. 말씀을 집어넣게 되면 우리가 말씀을 주관하거나 다스리거나 하는 것이 이게 안 돼요. 우리가 말씀을 사수하고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윤리와 도덕은 말씀 지키는 것과 가장 정반대에 서있다 이래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아는 윤리도덕이라는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본 정신과 가장 극단적으로 극히 대비되어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천국에 먼저 들어간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고집하는 것은 윤리와 도덕으로 천국 간다는 거예요. 착해야 천국 간다는 거예요. 근데 착함의 근거가 어디서 나왔는가, 선악과를 따먹은, 거기서 유발된 착함을 가지고 나온 거고. 주님께서 말하는 선한 것, 착한 것, 착한 행실로 영광 돌리라는 이 모든 말씀은, 이 착함은 로마서 1장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 한 거예요. 예수님의 행하심이 반짝반짝 우리 안에서 작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조용할 때 귀 기울여보세요. 뭔가 반짝반짝 주님의 행동이 나오죠.
임신 4개월 되게 되면 안에서 뭐 억눌린다고, 뭐가 어떻고 하는 그런 소리한답니다. 자기 몸 말고 제 2의 자기가 자기 몸 안에 들어있다는 것은 정말 굉장히 신기한 일이죠. 정말 신기합니다. 그래서 디모데 전서에 보면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짜 완전히 남자는 제켜 버리고 여자만 구원받는 것처럼.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받는, 시집 안 간 여자는 구원도 못 받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나와요. 극단적인 고통과 그 고통이 비로소 우리에게 구원의 재료가 된다는 거예요. 고통 없는 구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고통인데, 그 고통은 나 말고 다른 인격체, 다른 인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느끼는 고통, 그 고통이 오늘날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의 방정식고 그게 공식이 된다는 겁니다. 나로 인하여 내 잘못에 의하여 고통 받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들어오신 분이 고유의 자기 기능을 발휘한다고, 그 껍데기에 불과한 우리가 심한 고통을 당하는 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욥의 친구가 욥이 왜 소통이 안 되는가? 왜 의견차이가 나는가? 욥 안에는 낯선 인물의 십자가의 고통이 있으니까. 욥의 친구는 그게 없고. 그러니까 말이 통하지를 않는 겁니다. “야! 니가 나쁜 짓해서 벌 받는 거야.” 라고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진즉에 욥이 제대로 알면요, “니 같은 인간이 지옥 가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해줘야 돼요. “니 같은 인간이 지옥 가는 거야.”
다시 말해서 지옥과 천국을 규명하는 것은, 지옥 가는 사람들은 우리가 나쁜 짓하면 지옥가고 좋은 일하면 천국 간다는 자기의 행위에 의해서 지옥이나 천국이 결정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 가는 거고. 내가 천국가고 지옥 가는 이 문제는 내가 아니고 다른 분이 들어와서 일방적으로 저질러버리는 그 짓에 의해서 이미 판정이 나버렸습니다. 누가 와서 발로 차고 해산해버리면, 천국의 주인공이 들어와서 마음대로 거기서 자기 인생을 꾸려나간다면, 바로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어디에 가느냐? 천국에 갑니다. 왜? 그 일이 똑같이 일어나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에.
그래서 천국의 특징이 뭐냐, 행위 책에 있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가요. 행위와 상관없이 살았다는 사람만 천국에 가는 겁니다. 참 쉽죠.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걸 못 받아 들이냐 하면 선악과 따먹으라고 자꾸 부추기는 존재가 있어요. 그 괴물이 허락도 없이 내 안에 들어있으니까. 괴물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행함 없이 되는 것은 무조건 저항하라!” 이런 식으로 자꾸 우리를 배척하는 거예요. “이번에 벌 받은 것은 니가 나쁜 짓해서 그렇다.” 이런 식으로 자꾸 우리로 하여금 참새 키우고 들풀 키우시는 그 은혜가 차고 들어오는 것을 극단적으로 거부를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이렇게 했으면, 머리 좋은 사람은 대번에 그 다음으로 진도 나갑니다. 그러면 말씀 안에 뭐가 들어있기에 우리 행함을,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구원하십니까? 딱 이렇게 되거든요. 도대체 말씀 안에 뭐가 들어있기에. 그냥 말씀이 우리를 구원한다. 그러면 말씀이 알아서 하겠지. 근데 말씀이 어떻게 나를 대체하는, 나의 존재를 대신하는, 그런 내 존재를 대신하는, 제 2의 나의 존재로서 이것이 어떻게 번져 나오고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그것이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런 뭐냐 하면, 그 말씀이 어떤 여인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과 관련 있기 때문에. 여인을 자꾸 지칭해요. 그 여인을 어머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우리 어머니라고 했어요. 자칫 하면 안산홍이 되는데. 우리 속에 있는 뱀은 우리가 원인이고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출발을 여자부터 출발해야 돼요. 우리 속에 어떤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분이 우리가 내쫓을 수 없는 악마를 이겨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광야는 지금 이 말씀을 누구한테 이야기했는가. 바로 마귀부터 이야기한, 악마부터 한 이야기가 광야 떠나서 누굴 만나도 그 전에 광야에서 만났던 그 마귀가 내 곳에 다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따라서 말씀을 받을 때 그냥 받지 말고, 내가 받지 말고 내 안에 마귀에게 직접 말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직접 생각하게 되면 그 말씀 속에 어떻게, 우리 말씀 안에 어떤 여인네를 출몰시키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여자의 후손이라고 나와 있지만, 성경 창세기 진도를 더 나아가보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창세기 24장 60절에 보면 이래 되어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시집을 가려는데 남편 얼굴도 몰라요. 그냥 중매쟁이가 와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건 하나님의 뜻입니다.” 라고 했어요. 그 중매쟁이가 아브라함이 보낸 중매쟁이에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자아가 소멸되고 내가 하는 모든 자아는 하나님의 자아로서 다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삭을 바치고 어린양 하나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바로 준비된 자에 참여하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된 자로서 자기가 참여된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며느리 감 고르는데 자기 늙은 종을 보내죠. 늙은 종이 “제가 어떻게 며느리 감을 고릅니까?” 하니까 “하나님이 순적히 만나주게 하실 것이다.” 니나 내나 하나님이 참새 키우듯이 들풀 키우듯이 모두가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는 거예요. 우리가 발걸음 세는 것도 하나님의 터전에서 걷는 거고. 내 것이라는 것은 없어요. 하나님의 것에 터치하는 거예요.
우리가 먹는 과일 하나, 숟가락으로 먹는 밥 전부다 하나님의 주신 것 앞에 터치하는 거예요. 딸 못났다고 머리 쥐어박지 마세요. 하나님이 주신 머리입니다. 터치하지 마세요. 다 하나님이 깔아놓은 거예요. 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알아서 스스로 말씀을 성취하는 하나의 무대라니까요. 무대. 하나의 소품들이고 배경들이고 그래요. 근데 그 하나님이 하신 일이 보이지를 않거든요. 보이지는 않지만 썩어짐을 아는 다른 피조물들은 그걸 알아요.
돌이 없는 바둑 두는 것과 같아요. 흑백 돌이 없는데 바둑이 두어지고. 그게 우리네 인생이에요. 소리 없는데 음악이 들려지고. 지은이가 없는데 책이 나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말씀의 책이에요. 이 성경책이에요. 사도들이 지은 것이 아니에요. 성령님께서 지은이 없이 성경책을 준 겁니다. 우리는 뭐 마태가 썼네, 마가가 썼네, 이거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성령님이 쓴 거예요. 성령님이. 신구약 전체를. 그걸 그대로 우리에게 응용하게 되면 나도 직접 주님께서 저자가 되게 하시고, 주님께서 하나의 음악이 되게 하시고, 주님께서 하나의 바둑 게임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를 가지고. 하나의 바둑돌로, 하나의 장기 말(馬)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누구를 상대로? 보이지 않는 적들, 마귀를 상대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거예요.
창세기 24장 60절에 보니까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 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라고 했는데, 시집가는 여동생 보고 이렇게 거창한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게 아닙니다. 잔다르크도 아니고. 천만인의 어미가 된다? 천만이 0이 몇 개입니까? 그 다음에 원수의 성문을 연다? 뭐 리브가가 합기도, 태권도 합쳐도 8단쯤 됩니까? 지금 결혼하러 가지 전쟁하러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라반이 계시를 받아서 “여인아! 여인아! 지금 너로 인하여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야말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표상이 리브가, 이 여인에게 나타났어요. 이게 말씀 안에 잠재되어 있어요. 말씀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여인에게 했다는 말은, 모든 족보는 남자로부터 남자에게 이어지거든요. 남자의 성, 남자의 족보를 따르잖아요.
근데 여인을 통해서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적인 그런 집단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 육으로서는 파악이 되지 않는, 아까 이야기한 소리 없는 음악, 돌 없는 바둑, 그리고 지은이 없는 책, 그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너희들은 보이는 것으로 오해하고, 오인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역사를 만드는 가운데서 너희들 때문에 고난 받는 그 분에 의해서 너희들이 말씀의 성격이 날 것이다. 그래야만 너희들이 내 힘으로 구원했다는 그런 소리가 안 나오잖아요. 여러분들의 친절과 약점을 오인하면 안 됩니다.
누가 남한테 친절을 베푼다고 해서 그것에 약점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친절을 베푼다고 주님을 약점이 있다고 보면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복, 불행, 이것을 미끼로 봐요. 마귀가 던져준 미끼로 봅니다. 불행해도 안 돼요. 왜? 불행이라는 것은 행복을 내가 해보겠다는 은근히 욕심을 내는 거예요. 행복의 그림자가 불행이에요. 그러니까 호시탐탐 불행하게 되면 언젠가 내가 이 지역을 벗어나서 행복해질 거라는 노림수가 아직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행복과 불행, 그 자체를 벗어나는 것은 뭐냐,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마태복음 18장입니다. 그냥 어린애처럼 주는 대로 사세요. 내가 따로 만들어놓은 나는 행복하다. I am happy. 그런 것 따지지 마세요. 행복한 순간에 박살나버리니까. 행복이니 불행이니 그것은 우리의 관심사고, 관심사 그것을 넘어서야 해요. 그냥 오늘도 주는 대로 산다. 행복 주면 행복대로 살고 슬픔 주면 나는 울 거야. 왜, 우리 아빠가 계시니까. 보이지 않는 분이 나를 살리니까.
말씀도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주께서는 보이는 만나를 줌으로 말미암아, “그 만나가 보이냐?” “잘 보입니다.” “잘 보이나?” “잘 보입니다. 새벽에 많이 주웠습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측면으로 그걸 이동시켜라. 수순으로” 보이는 만나에서 보이지 않는 만나의 기능으로 바꿔야 돼요.
우리는 몸은 분명히 보입니다. 하지만 이 몸속에 말씀의 기능까지 볼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매일 살고 있는 것은 말씀이 살아있기에 말씀의 결실물로 저희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힘대로 살면서 우리가 스스로 구원하고자 하지만 정작 구원은 우리한테 무시당하는 어떤 여인네의 자식으로서 오신 분이 구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그 보이지 않는 고통이라도 우리는 그것이 구원의 고통인 것을 우리가 인식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