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34강-하나님 사랑(신6;4-9) 1506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6. 10. 07:59

2015-06-07 15:03:32 조회 : 68         
   하나님 사랑 150607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하나님 사랑(신명기 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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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6-07 15:49 
하나님 사랑

2015년 6월 7일                               본문 말씀: 신명기 6:4-9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6: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6: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법은 누가 만들지요? 인간들이 자기를 위해서 만든 법이 아닙니다. 법이 있기 전에 이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틀어져 있습니다. 이미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만약에 법을 인간들이 만들었다면 필히 인간들의 수고에 의하여 완성된 상태에 이르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최선을 다하여 사랑하면 그것을 사랑의 최고 경지로 쳐주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내세우는 ‘최선’이라는 하나님 보시기에 변명에 불과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만들지 않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변명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변명하는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한 예를 들면, 만약에 어느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화를 받았다고 칩시다. “너 왜 나에게 빌려간 항아리를 돌려주지 않는데”라는 식으로 항의를 받게 되면 여기에 대한 세 가지의 답변이 나타납니다.

첫째, “나는 너에게 빌린 적이 없어” 둘째로, “이미 갔다 주었잖아” 세째로 “네가 나에게 깨진 항아리를 주었기에 도저히 돌려줄 수 없어 내다 버렸어” 이 세 가지 변명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는 “나는 의롭다”입니다. “나 잘못은 아니다”입니다. 이미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뒤틀려진 상태에서 “마음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라”고 한다면 똑같은 변명들이 나타납니다.

첫째, “성의를 다하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다하라는 말씀으로 알고 있었는데 마음을 다하고 목숨까지 다해서 사랑하라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둘째, “이미 충분히 줄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하나님도 잘 아시고 계시는 게 아니겠습니다. 지금으로는 더 이상 많은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은 제 역량과 믿음으로서는 감당 못할 일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제시하는 요구는 자체로 문제점이 많습니다. 번짓수를 잘못 알고 보내신 요구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도저히 지키지 못 지킬 것 같아서 중도에 포기했습니다.”가 됩니다. 이러한 변명은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하나님 사랑에 담겨있는 내용을 마치 알고 있다는 식으로 대처할 때 나오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 사랑’이라는 법을 제시한 이유는 신약에 와서 최종 해답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2:21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무용지물한 일로 만들고자 한다면 간단하게 ‘율법을 지켜 의인되어야지’라는 식으로 나오면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변명으로 일관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일을 헛일로 뭉개려는 사단의 의도에 근거한 사상입니다.

인간이 율법 수행으로 해내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해내시고 그것은 ‘은혜’로 포장하셔서 성도에게 제공되면 성도는 의롭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의롭게 되는 통로와 절차에서 율법지킴에 들어설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에 대한 인간들의 인상이 자기 의를 돋우는데 필요한 것처럼 오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눈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물건처럼 바꾸어서 보게 됩니다. 물건이란 필요한 물품인양 다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율법이든 타인이든 모두 인간 본인에 있어서는 나를 대체할 수 없는 물건일 뿐입니다. 쉽게 말해서 중심에 버티고 있는 자아성을 빛내고 꾸며줄 그런 대상으로 해석을 내리게 됩니다.

율법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주를 피하고 복을 더 추가적으로 얻어내기 위해 법을 활용코자 합니다. 율법조차 물건으로 다루어버립니다. 최선을 다해서 법을 지키고 성심성의껏 법을 지키려고 애쓰면 그만큼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해줄 것이라는 의도를 내비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십자가 복음을 믿고 지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합당한 상를 내리고 구원도 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눈 앞의 대상’을 ‘마음 안의 대상’으로 변신시켜버리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며, 바로 율법 완성인 사랑이 매개(媒介)로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매개란 관계가 끊어진 둘 사이를 이어주는 기능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매개를 알아 먹지 못하고 본인 내부에 있어 성실함과 착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색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계속해서 자기 의로움이 누적이 될 것이 뻔합니다.

원래 물건이란 그것을 가지려는 자의 소유물일 뿐입니다. 사람이 십자가도 소유하고 언약도 소유하고 하나님도, 예수님도 소유하면 구원이 될까요? 아닙니다. 중보자가 탈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보자가 등장하면 ‘나의 소유’는 허용될 수 없습니다. 나 조차도 내 것이라고 우길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나만이 절대 주인이고 상대방은 의 갑질을 증명해줄 소유물로 바뀐 채 나로 인해 의미가 부여됩니다. 구약에서의 ‘사랑하라’는 신약에 와서 ‘원수마저 사랑하라’로 내용이 확장됩니다. 따라서 사랑에 관한 율법이 인간을 상대로 궁지에 몰아넣게 됩니다.

결국 사랑을 해내지 못한 이유가 우리들의 망가진 마음에 원인이 있음을 밝혀내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죄인’이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4:10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성도는 ‘죄인’이 됩니다. 사랑으로 인하여 졸지에 죄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성취에 가담하게 된 것입니다. 죄인이 중보자만의 가치와 의미 달성에 ‘죄인된 자격’으로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중보자가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인하여 성도는 모든 일에 있어 ‘두려움을 품을’ 자격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두려움을 방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들 보기에 성도가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성도 안에 있는 예수님께서 자기 사랑을 위해 성도를 동원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매사에 중보자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6-08 07:21 
34강-신 6장 4-9절(하나님의 사랑)1506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6장 4-9절입니다. 구약성경 271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 할지니라”

신명기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이 있는 그 장소, 그 말씀을 새긴 장소에 피가 발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최종적인 합격자 통보, 마지막 최종 시험에 합격자 통보에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얗게 희어졌다는 똑같은 고백을 내놓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무엇이 삭제되느냐 하면, “나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라는 공통된 고백을 내놓게 되어 있어요. 교회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겁니다. 교회는 계속 추리고 또 추려나가는 그런 단체입니다. 계속 추려나가는 거예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또 나중 된 자가 먼저 되었다가 잘려 버리고.

그것은 바로 천국에 부합되지 않은 사람은 숫자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탈락입니다. 그 원칙이 있습니다. 방금 읽었던 신명기 6장에 나오는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는데 있어서 거의 모든 인간은 백퍼센트 실패합니다. 다 엉터리 해석을 내놓죠. 사도 바울이란 사람이 이미 예수님 만나기 전부터 율법에 능통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주셔야 합니다. 율법에 정통했다는 말은 사적으로 율법을 해석했다는 말이 아니고 대대로 누적된 인간의 지혜의 총체, 총합. 그 안에서 그는 성경을 보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율법에 흠이 없고, 율법에 남한테 뒤처지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하셨는데 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다면, 사도 바울이 최종적으로 합격하고 난 뒤에 나오는 고백은 기존에 자기가 알았던 율법 해석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말씀이 새롭게 받아진다고 성경에 나와 있거든요. 그 대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 보면, 이 말씀을 먼저 제가 읽어드리는 것은 이 말씀을 먼저 아시고 신명기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가 뭐냐 알아보자는 거죠. “너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지금 사도가 율법을 알고 있거든요. 율법을 알고 있으면서, 신명기 6장을 알고 있고, 십계명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한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신명기나 십계명이 우리 인간에게 도달될 때, 도달 되면서 그 율법 안에 품어 있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이 뭐냐 하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는 내용이 이미 신명기 6장이나 그리고 십계명 안에 들어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들어있다는 겁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한테 케이크를 주니까 여자는 배고파서 케이크를 막 먹어요. 또 어떤 남자는 여자한테 비빔 면이나 쫄면을 주는 거예요. 주니까 여자가 먹는 것을 좋아해서 오른 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벼서 홀딱 먹어버렸어요. 먹었는데 그 다음에 보니까 다이아가 목에 걸렸어요. 안에 다이아가 있는 줄 모르고 그저 비벼서 먹으면 되는 줄 알고. 케이크 그냥 먹는 줄 알고. 안에 프러포즈용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는데. 그럼 진작 이야기하지. 손가락으로 파서 다이아몬드 빼내고 먹을 걸.

율법 안에는 바로 니가 이 율법을 받는데 받은 내용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 내용 안에 이미 삽입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걸 누가 알았겠어요? 진작 십계명 줄 때 그런 이야기를 첨가해서 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처음부터 신명기 6장에서 그 말씀 담아서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 이래 놓고 여러분이 알았다 치고, 알았다 치고 입니다. 율법으로,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이 아닙니다. 신명기 6장에서 사랑하라는 말씀이 의롭게 되지를 못해요. 시킨다고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의롭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율법으로 새삼스럽게 의롭게 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헛되이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사탄의 일꾼입니다. 자, 그래 놓고 오늘 신명기 6장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사랑하라! 명령이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라는 이 구절을 딱 떼어가지고 방금 갈라디아서 2장 21절하고 대비를 해보시면 그 차이점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오늘 본문 6장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본문만 딱 놓고 본다면 이 안에서 “니는 이것 지킨다고 의가 되는 것이 아니야” 라고 이것을 찾아낼 위인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해석에 실패합니다. 개코도 모르면서 성경을 본 거예요.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성경을 본 겁니다. 그저 우리 내부에는 천국가고 싶어 환장한 그 욕구 외에는, 여기서 살았으니까 또 살고 싶은 욕구 외에는, 욕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 들 통 난 거죠. 하나님께서 이 신명기 6장을 주신 것은 성경 전체로 볼 때 이렇습니다. 이미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끊어졌어요. 단절되었어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이미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단절 된 것에 대해 추궁하기 위해서 신명기 6장의 말씀을 주신 거예요. “니가 나를 사랑한번 해봐라. 마음을 다해 몸을 다해 나를 사랑한번 해보라. 니가 될 것 같아? 어림도 없어!” 그런 뜻이라니까요. 추궁을 하는 거예요.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 죄 되게 하시기 위해서 주셨다고 로마서 3장에 나옵니다. 죄를 더 확대시키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그럼 확대되는 방법이 뭐냐, 방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추궁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으로 일관하느냐 하면 비겁한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자, 우리 쪽에서 나오는 변명, 내가 이럴 줄 알고 교회에 파리채 하나 사놨는데. 파리가 날아다니잖아요. 우리 내부에서 파리 같은 게, 변명 같은 게 늘 나와요. 근데 이 변명은 가만있으면 나오지를 않습니다. 꼭 추궁처럼 다가올 때 우리는 마중 나오면서 변명으로 완전 무장한 채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그 변명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를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친구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합시다. “야! 니 항아리를 돌려줘야지?” 라는 전화를 갑자기 받았다 칩시다. “내가 빌려준 항아리를 빨리 돌려줘야지?” 그런데 친구한테 그 전화 받고 난 뒤에 세 종류의 변명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나는 니한테 항아리 빌린 적이 없어.” 항아리 빌려 놓고 갑자기 교통사고 나서 기억상실증에 걸렸을 수도 있고. 두 번째 변명이 뭐냐, “전에 돌려 줬잖아?” 세 번째가 뭐냐 “처음부터 깨진 항아리 줘놓고, 깨진 항아리 줬기 때문에 깨져서 없다. 처음부터 니가 깨진 항아리 준 거야.” 이 세 가지 변명을 토하면서 나오는 공통점이 뭐냐, "나는 의롭다."

아까 분명히 갈라디아서 2장 21절 이야기했죠? 율법으로 인간은 의로울 수 없다고 한 거예요. 이미 하나님께서 사랑하라는 율법을 준 것은 니한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니가 의로울 것이 없다고 줬는데 그 취지에 아주 딱 맞게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서 변명의 여지로 일관하는 겁니다. “전에 돌려줬잖아?” “주님, 저는 주님 사랑하고 있잖아요?” 이런 뜻이에요. “전에 주님 사랑했잖아요?” 두 번째는, 첫 번째나 두 번째나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나, 주님 사랑하라고 들은 적 없습니다. 몸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나 그런 소리 들은 적이 없는데. 니가 몸을 다하여 정신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그런 이야기는 잘 못 들어 봤는데요. 안 들어봤으니까 봐 주이소.” 이런 뜻이잖아요. 세 번째는 “너무 어려운 걸 이야기하면 못 지키잖아요?” 이게 세 번째.

진도 너무 빨리 나갔는데 다시 해봅시다. 첫 번째, 나는 항아리를 빌린 적이 없다. 두 번째, 전에 항아리 갖다 줬다. 세 번째, 깨진 항아리를 줬기 때문에 돌려 줄 게 없다. 첫 번째 같으면 “하나님 내가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라고는 들었지만 목숨을 다하여 라는 것은 들은 적 없습니다. 니 생명을 다하여, 니 혼을 다하여, 니 정성을 다하여 그 정도 까지는 들은 적 없습니다.” 두 번째, “주여, 지금도 주님 사랑하고 있잖아요?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래 나와요. 이 정도 하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여기서 더 어떻게 합니까? 여기서 더 요구하신다면 저는 뭐 그냥 돌아버립니다. 한 번 제자리 돌아볼까요? 저 미쳐버립니다. 여기서 더 어떻게 사랑합니까? 딴 일도 있는데. 교회 한 번 나와 주는 것도 보통 힘든 게 아닌데 이정도 해줬으면 됐잖아요?”

주께서 “니가 잘났다는 말이냐?” “아니 잘났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했으면 주께서 뭔가 내 사정을 참작해주는 그런 자비심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잘못됐다는 말인가?” “아니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고.....,” “아니고 뭐고 니 잘났고 내는 못났네.” “그리 됐습니까? 그럼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소리가 별로 진정성이 없네.”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니 배짱이가?” “배짱입니다.” “십일조 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십에 이조를 어떻게 합니까?” 이런 식이라니까요.

“십일조는 본 교회에 내고 십의 이조는 네팔 갖다 줬습니다. 이만하면 됐지 않습니까? 유니세프에 줬습니다. 그만하면 다른 사람은 일 퍼센트도 안 하는데 나는 십일조까지 내고 거기다가 더 내는데 더 이상 어떡하란 말입니까?” 주께서는 “니 목숨을 바쳐라 했잖아?” “아이 그거는 너무 심하죠? 그거는 믿음 좋은 사람 테레사 수녀한테 이야기하고 나한테는 그런 요구하지 마세요.” 이것이 1번, 2번, 3번, 연이어서 우리에게 계속 변명이 되고 말죠.

그렇다면 신명기에 나오는 니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에 담긴 내용은 그동안 인간이 쏟아낸 변명의 자국을 밟고 주께서는 그 내용의 깊이를 더해주십니다. 그 변명의 자국이 뭐냐, 바로 원망으로 튀어나온 이스라엘 역사를 두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나름대로 사랑했다고 하면서 주님 보시기에는 우상숭배하고 있는 그 역사의 현장을 관통하게 만들어요. 진달래꽃에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하듯이. 주께서는 진달래꽃, 벌건 핏자국을 뿌려놓습니다. 그걸 밟고 니가 변명하는 그 변명들의 종류들을 니가 스스로 감수하고 가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진정 주님의 사랑의 내막이 차츰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신약에 와서. 신약에 와서 예수님을 통해서 사랑의 내용이 얼마나 확대되었는지를 제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46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절,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큰일 났어요. 왜 큰일이냐면 최선을 다하면 사랑인줄 알았는데, 이게 아니라 여기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거든요. 원수를 사랑하라. 어느 정도로? 니가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듯이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 사랑하라는 할 때 그 측정법은 간단합니다. 아침에 이야기했듯이 맨홀을 봅시다. 맨홀 뚜껑이 열렸다는 사실을 그 앞에 슈퍼마켓아저씨는 봤어요. 뭔가 공사하면서 안 덮고 가서 맨홀 뚜껑이 열린 것을 딱 안 겁니다. 근데 내가 나서서 신고하고 뭐하고 하면 귀찮으니까 귀찮아서 안 하고 있는데, 마침 학교 파하고 오는 사랑하는 딸이, 그것도 무남독녀 외동딸이 맨홀 뚜껑 열린 것도 모르고 까불면서 오더라 이 말이죠. 그때 곧장 나서서 “애야! 스톱 맨홀에 빠진다. STOP!!” 이거 사랑입니다. 근데 지한테 잔소리해댔던 이층 아줌마, 하여튼 남자들은 이왕 이야기할 것 예쁜 여자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못생긴 여자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짜증나요. 얼굴도 못생기고 뚱뚱하고 잔소리해대는 아줌마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맨홀에 가까이 오고 있을 때 가만 놔둬버려요.

그때 주님이 나서서 원수를 사랑하라, 멈추라고 이야기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마음이 안 땡기는데 어떻게 합니까? 근데 그 아줌마는 이층에 사는 아줌마라 그렇게 하면 의리 없다고 하니까 봐준다고 합시다. 북한의 김정은이 온다고 합시다. 어떻게 합니까? 저거는 빠진데다 아예 뚜껑을 덮어버려야 돼요. “잘 됐다. 신음하는 북한 주민들을 생각할 때 너 같은 인간은 죽어야 돼. 내가 안 죽이면 천사가 와서라도 죽여야 돼.” 근데 뚜껑 열며 주님이 와서 하시는 말씀이 “원수를 사랑하라” 이럴 때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죠.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내가 내놓는 것은 이미 고장 난 마음이고 고장 난 성품이라는 거죠.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서 이미 관계가 끊어진 상태거든요. 내가 갖고 있는 역량, 내가 소유한 어떤 역량, 능력가지고 사랑을 맞추려고 하니까 맞지도 않을뿐더러 거기다가 비겁한 변명만 쏟아내는 거예요. 누가복음 14장 말씀도 마찬가지인데 한 번 들어보세요. 12절에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13절,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14절,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그러니까 점심 초대할 때 사돈 청하지 말라 이 말이죠. 이 사돈을 청해놓으면 사돈이 꼭 되갚아줘요. 사돈이 이뻐서가 아니고 지 자식들 생각해가지고 꼭 되갚아줘요. ‘내가 사돈한테 잘해주면 내 딸내미한테 얼마나 잘해주겠나. 구박하지는 않겠지.’ 다 노리는 것이 있어서 그래요. 

사람이 손님을 청할 때는 나한테 되갚아 줄 사람을 청하지 말고 요모조모 아무리 따져도 도저히 되갚을 수 없는 자들을 초빙해서 맛있는 것을 대접하라. 그러면 부활될 때 너희에게 상이 있으리라. 이거 뭐 정의실천연대입니까? 뭐 그런 거예요?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 속에 들어있지 않는 것을 언급한다고. 니 마음 가지고 이 신명기 6장의 사랑을 이룰 수 없고 예수님 내 마음만 신명기 6장 하나님의 사랑하라가 성립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니 마음은 고장 났기 때문에. 니 영혼은 고장 났기 때문에. 만일 어떤 사람이 진짜 거리의 밥 퍼 주는 사람처럼 하면 그 사람에게 주께서 행하지 못한 더 심한 과제가 주어져버립니다. “이제부터 너는 김정은이 데려다가 대접하라” 이런 식으로.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계속해서 무한대로 확장시킬 거예요.

기어이 너는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는 영혼과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예. 내가 그런 마음 지니고 있습니다.” 라고 자백하고 고백하는 인간들이 아니에요. 그럴 것 같으면 인간이 점잖게요. 그게 아닙니다. 그걸 대체해서 변명들을 쏟아놓게 되어 있어요. 변명들을.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 신명기에 담긴 내용들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눈앞에 있는 대상을 우리 안으로 집어넣어버려요. 굉장히 어려운 말을 지금 제가 한 거예요. 근데 참 고마운 것은 미국의 어떤 성도님들이 제 설교 듣고 “목사님 설교 하나도 어려운 게 없어요.” 합니다. 저는 어려운데 그쪽은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아이고,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자, 이 말은 뭐냐 하면, 아까 왜 항아리 예를 들었냐 하면, 인간은 누구를 사랑할 때는요 그걸 물건으로 바꾸어서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건으로 바꾸면 이게 사랑의 대상이고 소유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결혼이에요. 저 남자를 사랑한다, 미쳤습니까? 무슨 사랑이 있어요? 사랑 안 해요. 저 남자를 물건으로 바꾸어 놓고, 집에 개 한 마리 키우듯이 남자 하나 키우는 거예요. 그냥. 내가 저 여자를 사랑한다, 저 여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쁘장한 반려견 하나 집에다 들여놓은 거예요. 웨딩드레스 입혀서 잔치 벌려 들여온 거예요. 모든 게 인간은, 자기 빼놓고 나머지기 인간은 자기에게 필요한 물건들입니다. 이게 처음에 결혼할 때는 좋아서 아무것도 안 보이죠. 나이 한 60, 70 되면 들통 다 나게 되어있죠. 그렇죠? 권사님들 다 아시죠? 자기 본색 다 드러나죠. “밥해 도!” “미쳤어? 어디서 밥해달라고 하노? 니는 손 없나? 니는 입 없나? 배고프면 니가 알아서 먹지 내가 밥해주는 물건이가?” 그렇게 한다고 쥐어박고. 이상해. 남자는 나이 많아도 힘이 세네.

너는 처음부터 나를 위한 물건이었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거기에 말을 더 붙이면 너는 처음부터 내 앞에 얼씬거리는 물건이었다는 겁니다. 감히 물건이 나한테 지적질 하면 안 되죠. 잔소리 하면 안 되죠. 감히 물건인데. 내가 쓰다가 쓸 게 없으면 갖다 버려도 되는 물건인데. 어디 감히 나한테 지적질을 해요? 니가 하나님이가? 내 존재밖에 모르는데. 결국 물건 없다는 말은 어렵게 해서 매개가 없다는 거예요. 매개. 중재자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 1장에 보면 누가 죄 없다 하는 자는 진짜 죄 있는 사람이고. 죄 없다 하는 자체가 바로 죄가 된다는 거예요. 죄 없다 하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변명 늘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아까 사도 바울 이야기 다시 할까요?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 이었습니다. 그 중에 최고였습니다. 줄곧 변명으로 일관했어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율법으로서는 의롭다 할 위인이 없다. 다시 말해서 변명조차 추잡스럽다 이 말입니다. 내 입에서 나온 나를 지키는 변명조차 추잡스럽다는 거예요. 변명을 늘어놓는다는 것은 나는 나만 있으면 되지 외부의 중재자는 필요 없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요한일서 4장 10절에 보면 드디어 사랑은 여기 있나니 니가 아니고 하나님과 니 사이의 중재자가 사랑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이미 신명기 6장은 날아갔습니다. 신명기 6장 이미 날아가 버렸어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신명기 6장은 우리 죄를 위하여 투입된 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발명품이에요. 어떤 발명품? 우리 죄를 지적하기 위한 특수한 발명품입니다. 우리는 그 율법까지 내 물건으로 바꿔서 내 의로움을 정당화시키는 빌미로써 사용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 하니까 왜 그렇게 안식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은지. 전부 지옥 가 있습니다. 지금 지옥 가 있습니다. 지옥가면 안식일 지킨 사람들, 십일조 한 사람들 수두룩하게 다 앉아있습니다. 자칭 변명으로 일관했던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모르고 전부 다 갔어요. 아마 지옥 가서 서로 싸울 거예요. “나는 일요일에 성경 다섯 장 읽었다.” “나는 석장 읽었다.” 하고 싸울 거예요.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신구약 전체를 다 주신 거예요. 십자가로 죄인 되게 하신 거예요.

십자가 믿는다고 의인되는 게 아니고 십자가 능력으로 의인되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서 의인되는 거예요. 내가 십자가를 쥐어버리면 그거는 하나의 물건이 되고 십자가가 대상이 되는데, 내 앞에 있는 대상이 내 안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내 안을 점령한 그 십자가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런 식으로 우리는 의인이 되는 겁니다. 미국 가신 집사님이 참 쉽다고 하실 거예요. 여러분들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말은 어렵게 했지만 들어보면 쉬워요. 왜, 성령 받은 사람은 어려울 게 하나도 없어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으니” 그 아들이 중재자입니다. 매개자입니다. 끊어진 거리를 연결시킨 중보자예요.

그러면 사랑은 뭐냐, 중보자가 사랑이에요. 그 분이 사랑해서 우리는 구원받은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세 번 부인할 것을 뻔히 익히 아시죠. 하지만 그 전에 익히 아시고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가룟 유다는 아니고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 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전체가 사랑이잖아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죄인으로 등장하는데, 어떤 죄인? 우리는 우리의 대상으로 예수든 하나님이든 이걸 하나의 나를 위해서 내가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는, 그런 자기 잘남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 “십자가는 어디에 필요할꼬?” 이런 식으로만 살아왔던 것입니다. “예수의 피도 내 구원에 필요하면 가져와야지.” 마치 마트에서 카트에 물건 담듯이 담은 거예요. 그 담은 물건 치매 걸리면 다 날아가 버립니다. “예수님이 누꼬?”

어떤 분이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제 아내한테 보내왔어요. 뭐 치매 비슷한 이야기인데. 대구의 어느 병원에서 메르스 환자 양성반응 나왔다고 난리 났어요. 감기가 걸려온 환자인데, 할아버지 어디서 오셨어요? 물어보니까 중동에서 왔다는 거예요. 중동에서 감기 걸렸으면 완전 메르스잖아요. 나중에 알고 보니 수성구 중동. 말도 상황 봐서 이야기해야지. 여럿 의사들이 깜짝 놀라서. 진짜 의사들 도망가기 바빴을 거예요. 자기가 확진 받으면 큰일 나니까.

요한일서 4장에 사랑하는 사람아 이같이 우리를 사랑한즉 더 이상 두려움이 없다. 그 사랑이 어느 정도 대단 하냐, 변명 안 해도 되는 사랑. 온전한 사랑. 가난한 사람 초청 안 해도 되는 사랑. 원수사랑 안 해도 되는 사랑. 왜, 어차피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능력이 없어요. 이제는 원수 사랑하는 몫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주께서 사랑한 사랑을 마치 내가 한 것처럼 인수인계 받는 대상이 되는 사랑. 주님이 다 해놓고 주께서는 나를 통해서 주께서 하셔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삐져나왔는데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오해케 하는 그 사랑. 그 사랑 속에서 우리는 “주께서 다 하셨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거죠.

정말 다음 시간에는 파리 잡읍시다. 파리가 이 귀한 사랑을, 파리한테도 훼손당하지 않을 이 귀한 사랑, 주께서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눈앞에 보이는 이미 완료된 상태입니다. 그 십자가 이미 우리 안에 장착되어 있음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 해도 된다가 아니라 하게 하시는 그 사랑에 이끌려서 주님만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