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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5강-다른 축복(신6;10-15) 1506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6. 17. 07:59

2015-06-14 14:58:52 조회 : 70         
   다른 축복 150614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다른 축복(신명기 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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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6-1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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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14일                            본문 말씀: 신명기 6:10-15

(6: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6: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 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6: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6: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6:14)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6: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하나님의 약속한 복은 인간들이 갖기를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들이 원한다고 여기는 것을 줬다 뺐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나타나시고 사라지시는 그런 성격을 지니는 복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복은 인간 소유용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복은 ‘나 소유물’라는 조건을 만족하면서 우러나오는 기쁨까지도 포함하게 됩니다. 즉 기쁨이 되지 아니하면 복이 아니며 그리고 그 기쁨은 필히 ‘나의 소유’라는 요건의 충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은 복보다 자기 자신의 존재가 더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이러한 의식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지시한 복에 대해서 늘 오해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들이 기대한 그런 복이 오겠지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 신이 주신 그 복으로 인하여 자신의 소유는 늘어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존재성은 더욱 탄탄하게 강화가 된다고 여깁니다.

이게 인간 존재를 받치고 있는 욕망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주시고자 하시는 복은 인간의 소유에 대한 열의를 비켜가십니다. 왜냐하면 주신 그 복이 철회될 수 있다는 여지를 달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을 복으로 거주한다 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의 취지에 어긋나면 멸절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복을 소유한다는 의식으로 복을 가진 자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든지 주신 분으로 인해 도로 빼앗기지 모를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병주고 약주기 보다는 아예 병에 안 걸리는 것이 더 낫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기대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병 주시고 약을 복으로 주십니다. 이는 인간들이 기대한 복을 피해가면서 참된 복을 주시려는 겁니다. 주고 뺐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기존의 기대와 꿈과 마음까지도 다 복을 주시는 분에 의해서 탈취당하야 합니다. 주시고 빼앗는 것이 아니라 주시면서 빼앗습니다. 즉 복을 주시겠다는 것은 너희들은 사고방식을 빼앗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주시고마 하는 그 약속의 땅은 실은 인간들의 근본적 의식과 사고방식 자체를 지적하고 약속에 부적절한 것으로 제거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과 그 접수과정에서 자신들의 평소의 사고방식에 무슨 큰 문제가 있는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그것마저 복의 능력에 해당됩니다.

사람들은 뭔가 가질 때는 자신이 이만한 재산을 가져야 마땅한 자격자인 것처럼 행세하기에 막상 빼앗게 되면 격분합니다. 단순히 돈이나 재산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형성해놓은 자신이 정립한 가치가 손상입는 것을 도저히 묵과하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내부를 약속의 땅을 통해 밖으로 노출시켜놓고자 하십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며는, 복의 실체 속에 어떤 분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인간들에게 자신의 속성을 실어 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8:17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셨다”고 무심코 말하지만 성경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병을) 친히 담당’하시고 짊어지십니다. 이는 고쳐 받은 건강이 나의 소유된 건강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병을 예수님쪽으로 가져 가시므로서, 병자의 자아성은 그때부터 ‘병 들어야 마땅한 자아’로서 영원히 예수님 소유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 쪽으로 병자를 건강하게 변화시킨다면 그것은 일방적으로 주님의 것으로 삼기 위해 주님의 조치가 되니, 다시 ‘나의 것’, ‘나의 소유’로 넘어올 게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방식으로 약속의 땅에서 성도는 영원히 살게 됩니다. 즉 약속의 땅은 ‘주신 것이라도 도로 뺏는 작용’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땅, 그 축복이 인간의 소유용으로 넘어오는 것을 허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이라고 지칭된 그 가나안 땅을 입성하는 방식에서는 이러한 성격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시편 44:2-3에 보면,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원주민이 없는채 만들어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자기 것을 철저하게 사수하려는 의지가 강렬한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그 땅에 주시고자 하십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의 힘으로는 그 땅에 들어갈 능력이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이 약속의 땅은 오직 ‘하나님의 오른손의 팔과 얼굴 빛’으로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인간의 힘과 칼은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오른손의 팔이 작용하는 방식이 벌어지는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다니엘 3:24-25에서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불 속이라는 곳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바로 그곳에 약속의 땅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드러내기 위한 조치에 의해서 죽어야만 하는 방식으로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구원하느냐 하면, 바로 ‘주의 이름’이 장차 십자가 죽음으로서 천국에 들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을 담고 미리 이스라엘 역사 속에 구체성을 띠고 펼쳐지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 건너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도, 하나님께서 앞장 세우게 하신 것은 바로 장차 메시아의 희생을 나타내는 언약궤였습니다. 이는 곧 복아 신약에 오면 복이 땅의 문제가 아니라 ‘죄 속에서 의인으로 변화되는 것’이 복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의 진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말씀을 주셔서 그 어느 것 하나 죄 아닌 것이 없는 그런 자아상에서 나온 죄를 주님이 대신 가져갔음을 알려주십니다. 주님이 가져가신 그 죄 속에서 성도는 의인으로 다시 출생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속성에서 나온 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것을 내 것으로 가져오지 말고 도리어 우리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안에 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5-06-15 11:11 
35강-신 6장 10-15절(다른 축복)1506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6장 10-15절입니다. 구약성경 271페이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땅을 주신다는 이 대목에서 평소에 부동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땅을 주신다는 데 교회 나오지 않을 이유가 없죠. 만날 전화 와서 받아보면 “혹시 땅 필요하지 않습니까?” “좋은 땅 있는데 혹시 투자할 생각 없습니까?” 그 전화 만날 온다 말이죠. 교회 가서 말씀 들어보면 마태복음 5장에 마음이 온유한 자는 땅을 얻는다고 했는데, 갑자가 교회 땅 필요하면 다같이 온유하면 요 가까운 카페베네부터 시작해서 요 근방을 주실지 혹시 알아요?

그런데 땅 준다는 것, 땅 주는 것에 왜 사람들이 구미가 당기느냐 하면 그걸 “땅 줄게.”가 아니라 “복으로 땅을 줄게.” 이렇게 하니까 복이 오게 되면 땅을 얻게 된다, 따라서 현재 땅이 있다는 것은 이미 복을 받고 있다는 그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이미 복 받은 입장에서 더 많은 부동산을 주셔가지고 남들로 하여금 나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해달라고 그렇게 우리는 요청을 하게 되죠.

지경을 넓혀 달라, 그러니까 이것이 뭐냐 하면 대지를 넓혀달라는 거죠. 건평 말고 대지. 일단 대지가 중요하니까. “대지를 넓혀주세요.” 이런 식으로 기도하게 되는데. 성경 끝까지 보셔야 되요. 신명기 6장 15절에 너가 거기서 쫓겨난다는 겁니다. 줘놓고 뺏는 분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에요. 줘놓고 뺏어버리니까 차라리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안 줘놓고 안 뺏기는 것이 훨씬 좋을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병 주고 약 주지 마시고 아예 안 아프게 하시면 훨씬 더 좋은 걸 가지고 병 주고 약 주니까 다시 우리는 옛날 병 없었던 시절이 그리워가지고 우리가 시큰둥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면서, 땅을 주신다하면서도 왜 축복의 땅에서 쫓아내시느냐 하면은 복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땅을 주셔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셔도 이게 영원히 우리 소유가 되지를 않아요. 우리는 내 소유가 되지 않으면 주셨다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를 않는 법이거든요. “빌려줄게.” 뭐 시큰둥합니다. “아예 그냥 가져라.” “고맙습니다.” 하죠. 하나님께서 내 것 만들어 줄 때 고맙지, 잠시 빌려줄게는 우리에겐 영~~ 성이 차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기로 해놓고 쫓아낸다는 것을 전제로 해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주고 뺏는 것을 통해서 뭔가 새로운 것을 알게 하시는 거예요. 옛날에 KTX표 할 때는 그냥 카드를 꽂아놓고 다 하면 뽑아야 하는데 지금은 카드를 읽게 되어 있죠. 내려가기만 하면 되잖아요. 하나님은 어디에 나타나시는가. 하나님은 주고 뺏는데서 나타나요. 주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주시고 뺏는데서 진짜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욥에게 건강 주시고 뺏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고 욥에게 자식과 재산 주시고 뺏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요. 그러니 우리는 그냥 뭔가 이용당했다는 사실이 강렬하죠. 하나님 앞에 이용당했다는. 근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용당한 것을 영광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용당하는 신분은 천사도 부러워할 직위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큰 은혜죠. 하나님께서 복이라고 주실 때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네게 주는 땅에는 니가 일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큰 건축한 아름다운 성읍을 주게 하시고 니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고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를 얻게 하시고.” 이런 말씀 하실 때는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그냥 주시는 걸로 오해되잖아요.

그러나 막상 이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벌써 원주민들이 버티고 있는 땅입니다. 그 사람들 비워놓고 빈 집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는 아주 휘파람 불죠. 그게 아니고 “어딜 넘봐?” 하고 강력하게 버티고 있는 땅을 우리보고 들어가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쳐다보며 뭐라고 합니까? “주여, 약속하고는 다르잖아요?” 그럼 주님이 뭐라 합니까? “니가 지금 무슨 약속을 니 맘대로 생각하고 있느냐? 준다니까.” 그럼 우리는 “약속대로 하면 저 사람들이 놓고 나가야 되는데 저 사람들이 주인이라고 우기는데 이거는 약속하고 틀리지를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니 약속이라는 개념을 니가 바꾸면 안 되겠느냐? 니가 생각하고 있는 약속의 개념은 현재 가나안 땅에 버티고 있는 그 원주민들의 사고방식과 똑같은 사고방식이다.” 이 말입니다.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약속한 분의 사고방식과 일치되어야 살 수 있는 땅인데 쫓겨나야 될 원주민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니가 약속의 백성으로 거기에 산다고 큰소리 칠 수 있느냐?” 하고 묻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고방식이 어떤 사고방식이기에 현재 있는 사고방식은 안 되고 바뀌어야 하는 겁니까?” 라고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바뀌게 해줄게.” 라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바뀌게 하시는데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깜놀!!” 깜짝 놀라게 만드는. 깜짝 놀라게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기겁하고 질겁하고 절망한 상태로 바꾸어주는 겁니다. 어떻게 대책이 없게 만들어버려요.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실력과 우리의 잠재력, 아무짝도 쓸모없게 만들어버려요. 상황이. 어제 어떤 전도사님하고 저하고 한 시간 이상 통화를 했는데, 요 근래 한 시간 이상 통화한 적이 별로 없어요. 한 시간 이상 통화했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한 거예요. 그 분이 전화한 내용은 뭐냐 하면, 장신대 들어갔는데, 장신 들어가기 힘들어요. 근데 교수들이 말씀은 안 가르치고 쓸데없는 거 가르쳐주고 자기는 성경 보니까 십자가 모르면 구원 못 받는다고 하는데 저 어떡해하면 좋겠어요? 이런 이야기에요. 그래서 제가 칭찬을 좀 했지요. 다른 사람은 십자가 몰라도 잘도 사는데 그게 그렇게 고민거리가 된다는 것이 참 희한한 일이네요.

약속의 땅은 저쪽에 있다고 사실은 이야기했지만, 정작 약속의 땅을 알아보는 것은 그 땅에 들어가야 할 이쪽 사람, 인간들 내부가 바뀌어져야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은 거저 주신다는 것을 이쪽 정신상태, 마음 자세가 달라질 때 비로소 깨닫는 겁니다. 아는 겁니다. 설교 다시 해볼게요. 하나님께서 복 준다, 우리는 대박 오해합니다. 아! 내 소유로 등기이전 해주시는구나. 고맙네. 뭐 달라고 안 해도 주시는구나. 그러면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른다, 야 이거는 뭐 일 안 해도 그냥 밥 먹고 사네. 내 소유의 땅인데, 그 땅이 얼마나 좋으냐 하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땅. 이거 멋지네. 하나님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고 떡하니 약속의 땅에 들어서니까 그 원주민들이 이마를 밀면서 “니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뼉다구야.”

이미 비전 품고, 희망 품고, 꿈 품고 애굽에서 나왔고, 들어가기는 들어가야 하는데 거기 사는 주인네들이 밀어내면서, 이거 남이 잘 사고 있는 남의 땅에 왜 들어오느냐고 할 때, 반박할 여지가 없어요. 예를 들어서 밤새 기도하고 있는데 “여기에 팔공 1차 노태우가 살던 아파트를 너한테 줄게.” 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을 합시다. 아직 노태우가 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노태우가 살던 50평 아파트 두 개를 터서 100평짜리 만든 그 아파트를 너한테 줄게.” 라고 했을 때 그 아파트 찾아가서 그 다음에 가보세요.

벌써 경비원에 걸려서 경비실에서부터 오지마라고 하는데요? 그럴 때 뭐라고 해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해서 얻으러 왔습니다.” 하면 “누구라꼬? 누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그럼 그쪽에서 “나는 여호와 알 바 아니요. 나는 지금 보살 믿습니다. 난 절에 갑니다.” 이러면,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준다면 할 말이 없잖아요?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준다면. 그러면 우리는 돌아서가지고 누구한테 항의합니까? “하나님이여, 내가 원치도 않은 쓸데없는 약속을 줘가지고 나만 곤란하게 만듭니까?” 그것이 뭐냐 하면 주님께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 사고방식을 빼내기 위해서, 뺏기 위해서 하시는 거예요. 그걸 빼내기 위한 전략이 내가 오해케 하는 상황을 도입해서 내 속에 문제 있음을 빼내는 작업을 해주시는 겁니다.

그 예를 들어보면 이런 겁니다. 그 예가 시편 44편에 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열방이 사는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해놓고 거기서 번성케 하셨는데, 3절에 보면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되어 있어요. 칼로, 팔로, 인간의 힘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의 온갖 가능성을 동원할 수 있는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총력이 다 동원해서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말은, 그 땅을 맞닥뜨렸다는 말은, 너희들이 약속의 땅을 생각할 때에 기존에 니가 갖고 있는 니 지혜와 솜씨와 그리고 너의 능력으로 그 땅을 차지했다는 소리를 못해야만 그게 약속의 땅에 합당하다는 겁니다. 그럼 뭐로 가는가. 오직 주의 오른손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나니. 시편 44편 3절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성경에 이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고 수십 군데에 이 대목이 나와요. 수십 군데가. 그럼 우리는 막 넘어가죠. 수십 군데를 막 넘어가죠. 뭐 그런가 하여, 주의 팔과 얼굴이 있구나. 누가 물어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우리는 기억해가지고 “주의 팔과 오른손이 했습니다.” “주의 팔이 몇 센티쯤 되고 오른손이 몇 센티쯤 됩니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해는 되지만 거기에 대한 적당한 답변을 준비한 적은 없어요. 왜? 관심이 없으니까. 에이, 얻어 챙기면 되지 어떻게 하든지 관계없다는 거예요.

얻어 챙기는 것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쫓겨나요. “어떻게?”를 모르면 언젠가는 쫓겨나게 되어 있어요. 근데 정작 “어떻게?”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오른 팔인데 뭐 뽀빠이 팔입니까? 시금치 먹고 알통 나온 그 팔입니까? 도대체 오른팔이 어떤 팔이고, 오른쪽이 이상한 능력이 있는 쪽인데, 어떻게 그렇게 오른손에서, 주님의 얼굴빛이 어떻게 강력하게 버티는 원주민 열 족속을 이기게 됐습니까? 그 과정, 그 프로세스process를 물으면 아무도 답변을 못해요. 답변을 못하고 꼭 나오는 것이 “믿으세요.” “뭐 이야기를 해줘야 믿지. 이야기를 해주세요. 내가 믿을게. 어떤데?” “그냥 믿으세요.” “안 믿어지네요.” “당신은 어린애 같은 믿음이라서 못 들어간다고요.” 이게 뭐 지도 말도 못하면서 성경 구절은 어디서 알아가지고.

알려드리겠습니다. 다니엘 3장 25절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어디를 가느냐 하면 불 속에 들어가요. 불 속에 들어가거든요. 자,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있었던 불 속은 새 주소로 몇 번지입니까? 다니엘 세 친구가 불 속이 대구시 중구 지묘동 어디 몇 번지입니까? 235번지? 어떻게 됩니까? 신동아 빌라 1동 201호에요? 그 번지가 어떻게 나옵니까? 그 번지수 있어요? 없어요? 예수님이 변화했던 그 변화산의 번지수가 몇 번지입니까? 그게 헤르몬산이에요? 어느 다른 산입니까? 분명히 그 장소는 있는데, 그 장소에 가도 못 들어가는 장소에요. 고 중간에 뭐가 있느냐 하면 주님의 오른팔이 개재되어 있어요. 주님의 얼굴빛이 개재되어 있어요. 그 다니엘 세 친구가 들어갔던 불 속에는.

그럼 다니엘 세 친구는 어떻게 들어갔는가? 본인이, 다니엘 세 친구가 거기에 들어있는 줄도 몰랐죠. 본인이 어떻게 들어가야지 하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그들에게 어떤 상황이 닥쳐왔는데 그 상황이 뭐냐, 죽으라는 상황이 닥쳐온 거예요. 죽으라. 니가 사자 굴에 들어가든지 불 속에 오든지 간에, 거기에 대해서 개의치 말고 그냥 약속대로 죽으라. 죽으면 니가 갈 수 없는 곳에 이르게 되리라 이거거든요. 죽으면 죽으리라 그거잖아요. 죽으라. 그러면 니가 아무리 문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던 문이, 가보니까 그곳이 약속의 땅이에요.

마치 거울을 비쳐보고 거울 속에 내 모습이 아닌 다른 것이 들어있다면, 우리는 그 거울 속에 다른 것을 찾기 위해서 거울 속에 들어가면 자기 머리만 아파요. 심지어 거울만 깨지고 그 이미지도 날아가 버리잖아요. 분명히 있는데, 예수 안 , 성령 안, 십자가 안이 분명히 있거든요. 있는데 들어갈 길이 없네. 남자한테 이 산수유가 참 좋은데 이거 설명할 길이 없네. 들어갈 길이 없어요. 들어갔다는 사람은 있어요. 들어갔다는 사람은 있는데 들어갈 방법은 없네요. “그 안에 계신 아브라함님. 어떻게 천국에 들어갔습니까?” “죽어서 들어왔습니다.” “자살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이요. 그것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그거 아브라함님. 어떻게 알았습니까? 로마서 6장 1~2절에 나온 이야기인데 그거 어떻게 알았습니까?” “나중 된 것이 먼저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중된 것이.”

이게 뭐냐 하면, 왜 우리가 영적인 세계,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느냐 하면 이 나중에야 드러나야 할 상황이 지금은 모형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그 모형을 보는 우리의 안목이 세속적인 안목가지고 그 모형을 소유해서 구원받고자 시도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십자가 능력은 안 받으면서도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닙니다. 한국에 전부 다 십자가 믿어요. 심지어 교회마다 십자가 다 있습니다. 그게 십자가 능력입니까? 진정한 십자가라면 그냥 교회가 없어질 때, 교회가 해체될 때 그 뒤에 나타난 ‘한 병 더’ 그게 교회거든요. 교회가 없어지면서, 동전을 긁으면서 나올 때, 에이, 처음부터 있었네. 교회가 처음부터 있었어요.

교회 일곱들 모아서 연합한다고 교회가 되는 게 아니에요. 그 연합한 교회, 그 일곱 교회가 다 날아가고 비로소 나타난 교회가 하나밖에 없어요. 오늘 아침에 우리 김00집사님이 교회이름 아이디어를 줬어요. 우리교회 하니까 너무 흔하니까, 차이성이 안 나니까, 이걸 아예 줄여서 뭐지? 저 이름은? 하는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이름으로 해서, 우리교회를 줄여서 울교회. 그러니까 이게 코미디에 보면 우리 엄마를 줄여서 울엄마 나오잖아요. 울교회로 만들면 어떻겠느냐.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울교회로 하면 저 교회는 만날 울기만 하는 교회인가 하는 그런 약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것은 나중에 교회 쪼개질 때 그때 따로 하고. 울교회, 우리교회로 합시다. 뭐 이렇게 했는데.

예수님께서 있는 십자가는 예수님의 상처입니다. 못 자국, 창 자국, 그 상처가 미리 앞당겨서 아브라함, 이삭에게 집어넣어준 거예요. “아브라함아 니 아들 바쳐라.” 이거는 아브라함에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이룰 수 없는 상처로 남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가 있으매 아브라함은 가뿐하게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거죠. 주의 상처 없으면 천국에 못 갑니다. 왜냐하면 그 천국에 있는 그 보좌는 이미지가 뭐냐 하면 어린양의,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 그냥 재수 없어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고 일찍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죽도록 예정된 그 죽음이 있는 곳.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시간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깔려진 양탄자 같은 것. 카페트 같은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그 장모가 메르스 걸렸는지, 그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손으로 만졌는데 열병이 나았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다시 말해서 그냥 복을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 천국을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 육적 사람이죠. 이런 사람에게서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쳤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아니야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니까.” 병을 고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건 천국에 못 들어간 사람이에요.

주님은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졌죠. 병을 짊어진 것이죠. 병을 짊어졌지 병을 고친 것이 아닙니다. 어느 의사가 자기가 병을 대신 걸리고 낫게 해 줄 의사가 누가 있습니까? 나의 문제가 주님의 문제로 옮겨간 거예요. 내 문제로 끙끙 앓는데 “니가 뭣 땜에 고민이냐?” “죄 때문에 고민입니다.” “내가 가져갈게.” 예수님이 가져감으로 말미암아 나는 멀쩡한 내가 아니라 내 병을 가져간 그곳이 바로 진짜 나가 되는 거예요. 그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나가 되면서 예수님 계신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불 속을 견디기 때문에 우리도, 다니엘 세 친구도 불 속을 견디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포위되었는가, 주님의 오른손의 능력에 포위되었기 때문에, 그 안을 약속의 땅이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 신명기의 복대로, 대대로 복을 주시면서 그 복의 증거로써 가나안 땅을 선택해서, 요단강으로 옆구리를 치고 들어옵니다. 치고 들어와요. 치고 들어오면 거기에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곳이 어디냐 하면 길갈이고, 그 다음에 여리고성에 들어가요. 여리고 성이 강력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이 얼마나 강력한지 여리고성은 이중으로 되어 있고 그 성벽에 마차가 달릴 정도로, 중국 만리장성에 다니듯이 큰 성이죠.

근데 그 성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한 것은 뭐가 있는가.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상처를 미리 앞당겨서 선포하는 일을 제사장이 했어요. 어떻게? 언약궤. “피 묻은 언약궤를 가지고 이미 이 성은 하나님의 장래에서 우리 것이 되기로 이미, 일찍이 약속되어 있는 바입니다.” 라는 것을 통보하면서 한 열 세 바퀴 돌아보니까 하루 한 번씩, 안식일에 일곱 바퀴 도니까 여리고성은 안 내주는데 성 자체가 내어 주내요. “알았습니다.” 하고 저절로 무너져버리네요. 무너졌어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있을 자격이 못 됩니다.” 하고 스스로 주저앉아 버린 거예요. 주저앉았을 때 거기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동하지도 않은 많은 전리품들을 그들은 마구 취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온 축복이에요.

소유가 축복이 아니고 그 과정, 절차를 통해서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을 가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 축복대로 하면, 우리교회도 만날 세 주지 말고 빨리 땅 사가지고, 지경을 넓히소서, 온유하게 기도해서 이렇게 복 주시면 좋을 텐데. 왜 그런 복을 안 주십니까? 여러분 같으면 이런 말이 안 통하겠지만 속으로 은근히 노릴 수도 있어요. 세 내는 것도 지겹고 소유됐으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거든요. 누구 어느 집사들 로또 안 사나? 이래 가지고. 로또 사겠죠. 근데 이만 원짜리 사면 소용없잖아요. 그런 복을 안 주시나 하는데 이미 복을 주셨어요.

그 복이 뭐냐, 땅이라는 부동산 소유가 아니고, 예배당 처소가 아니고, 죄에서 의를 끄집어내는 복을 주셨어요. 죄에서 의를 끄집어내는 것. 그러면 죄에서 의를 끄집어내려면 우리가 죄인인줄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21절에 보니까 율법을 주셔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죄 아닌 게 하나도 없게 만들어요. 사도바울의 권면과 말씀 전체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생산해냅니다. 죄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게 죄에 걸려요. 죄에 그걸 가두어놓고 그 안에서 약속을 얻게 해요. 그 약속 안에 뭐가 있는가. 죄 안에서만 비로소 나오는 것이 뭐냐, 준비된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데, 그 의는 약속 속에 꾹 참았다는 나의 의가 아니고 이미 마련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대신 담당했던 그 의가, 준비된 그 의를 우리에게 안겨줄 때 우리는 복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복 속에 살게 만들죠.

‘그리스도의 의’ 안에 살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의’ 안에 존재하는 새로운 위상을 우리에게 허락하는 거죠. 그 의가 있다면 우리는 죽어도 살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우리에게는 영생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하면은 나의 의가 없기 때문에. 주님의 의에 혜택을 입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의 의의 혜택을 입을 정도로, 그걸 방해할 정도의 나의 의는 아예 일체 남기지 않고, 여리고성 무너지듯이 매일같이 나의 의를 다 부수시는 작업을, 주님의 의에 집어넣어주는 절차의 과정의 일부로서, 이미 우리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범사에 감사하게 되죠.

오늘도 ‘자기 의’ 무너지세요. 사람들은 자기 의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이게 뭐 마일리지처럼 쌓여가지고 “나한테 의 있으니까 여기에 합당한 상을 주세요.” 이걸 자꾸 내밀려고, 자기만이 갖추고 있는 의를 만들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새벽기도 안 빠지고 나오고, 왜 그렇게 성경 필서 한다고 안 빠지고, 늘 기도하는 이유는, 요거 마일리지 모이면 탕수육 하나 주거든요. 뭐 중국집 쿠폰 모으면 주잖아요. 그거 줄 때 “봐라 나도 하나님 복 받았잖아. 니는 의롭지 않고 나는 의롭다.” 이거 지 자랑하려고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 달라고.

십일조 하면 30배, 60배, 100배 준다니까 그거 계산하고 있고. 이거 돈 놓고 돈 먹는장사가 어딨어요? 십 원 내놓고 삼천 원. 십 원 내놓고 삼 백 원인가? 십 원 내놓고 삼 백 원이구나. 삼 십 배니까. 그럼 이왕 10억 주면 백 배, 100억. 이거는 대출 받아서 할 만한데. 저축은행에 가서 일 년에 이자 25% 붙여가지고. 10억 내고 백 억. 그러면 내가 만약에 부흥사 사기꾼이라면 “여러분 저축은행 가지 마시고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주님의 은혜에 맡기시고 하시면 얻습니다. 주님의 은행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돈 내시면 백 배 받습니다.” 이런 사기를 쳐도 되겠네요. 칠까요? 그 방식이 바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내가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고 소유한 내가 죄란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 죄를 십자가에 데려가서 진짜 의인은 주님의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저주받을 때, “나는 그동안 저주받을 것을 가지고 축복이라고 우겼구나!” 하고 자기 자신을 여리고성으로 알고 부셔지는 그것이 바로, 그 현장에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얻어지는 하나님의 의가 거기서 발생되는 겁니다. 왜, 줬다 뺏느냐? 줬다 뺏는 사이에 내 카드, 나의 자존심과 나의 의미도 같이 찢어지라고. 내가 찢어지게 되면 주님의 의만 드러나기 때문에, 찢어지게 해서 의만 고스란히 천국을 유지하는 힘이 됨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의 눈에는 바로 하나님의 의가 약속의 전부라는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그 약속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의롭다 했던 그 의로움이, 우리가 받아 챙길 최고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소유되는 축복 말고 차라리 주님 앞에 소유 당하는 축복을 주시옵소서. 그 복이 주님만 증거 되게 하시고 나의 의와 나의 자랑질은 나오지 않는, 주님만 증거 되는 그런 복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