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강-신 6장 1-3절(순종)1505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6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271페이지입니다.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
하나님이 양보할 수 없는 게 거룩함입니다. 완벽한 거룩함을 하나님께서 어디다가 담아 두셨는가. 하나님의 말씀, 규례와, 명령 안에 담아두셨습니다. 따라서 그것에 담겨진 말씀의 거룩을 뽑아내게 되면, 말씀 안에 있는 거룩이 뽑혀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자동적으로 복이 더불어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거룩이 우선이고 복은 나중이거든요.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을 확장시켜주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들이 물어요. 복이 뭡니까? 복이란 확장, 팽창을 복이라고 해요.
창세기 1장에 보면 복이 있으매 바다 속에 있는 물고기는 번창하고 공중에 있는 새는 번창했습니다. 땅위에 있는 인간들은 번창하고 이게 단순한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질에 합당한, 같은 질들의 풍부함, 풍성함. 그 질의 반복적인 번창. 이런 현상을 가지고 복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복이라고 할 때는 숫자가 많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고 질적으로 주의 거룩에 합당하냐? 라고 생각하시면.....,주님의 질적으로, 주님 생각에 의해 합당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그 거룩을 어떻게 얻느냐 하면 그 거룩은 이미 십자가로, 예수님이 단번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되어 있죠.
말씀을 주시고 말씀 앞에 두 종류의 신체를 둡니다. 한 신체는 뭐냐 하면, 육신과 육신에 연대해서 나왔던, 아버지가 자식을 놓고 자식이 또 손자를 놓는 그 육신을 세우고. 그것 말고 육신에서 나오지 않은 신체, 성령에 의해서 잉태된 신체를 그 앞에 두어 가지고 누가 이 말씀을 일점이라도 다 완벽하게 완수해서 거룩한 분인가를 보라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그 거룩을 완성했고 그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아니고 주님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거룩함이 쏙 들어오고 말았죠. 그 대목에서 사람들은 또 주저합니다. 주춤하는데, 예수님이 거룩한 것은 알겠는데, 거룩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아버지께 영광 되는 것은 알겠는데, 그 거룩이 어떻게 나의 거룩으로 계속 전이 되는 방법이 뭡니까? 그걸 모르겠다고 하는 거죠.
예수님은 훌륭해서 구원받는 거 합당한데, 그 예수님과 동떨어진 몸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 그 거룩이 어떻게 전달되는지 그걸 모르겠다는 거죠. 히브리서 10장에서는 마치 사람들이 그게 궁금한 것처럼 그렇게 사도바울이 간파를 해서 더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뭐냐, 우리 앞에만 택배 배달시키고 그냥 떠나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그냥 사인(sign)만 받고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차마 손 못 대는 우리의 마음까지 칩(chip)처럼 쏙 집어넣어버렸어요. 이걸 하나님의 인침이라고 하는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들어올 때 그 안에 그리스도의 거룩함도 함께 우리 안에 들어온 겁니다. 이미 우리가 지어졌기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하죠. 마치 아담이 여자 나온 것에 대해서, 여자는 이렇게 되어야 하고 여자는 내 맘에 들지 않고 궁시렁궁시렁 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담이 잠들 때 갈빗대 빼어서 여자 만들었기 때문에 아담이 거기에 대해서 관여할 바가 못 되잖아요.
내가 거룩한 것에 대해서 내가 관여하지 못합니다. 내가 천국 가는데 있어서 내가 관여 못해요. 뭐 이런 팔자가 다 있습니까? 내가 가고 싶은 대로 못 간다 이 말입니다. 내 안에 주님의 거룩이, 완전함이 들어와 버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했음이,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는 사실은 내가 집어넣은 것이 아니거든요. 주님이 집어넣었기 때문에 내가 거기서 손 댈 수가 없어요. 다만 그것이 왜 소중하고 귀중한가를 상대적으로 육신을 갖고 있는 우리들이 실패를 통해서 그걸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하신 일만, 공로만 높이게 되어 있습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마찬가지고 거룩이란 말씀을 주실 때에, 여기에 사람들에게 눈에 확 들어오는 말씀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모든 명령을 지켜라. 법도를 땅에서 행할 것이고, 모든 법도를 행하고 명대로 지키라. 삼가 그것을 행하면 네 복을 얻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만 달랑 줬으면 우리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말씀을 지키자 이렇게 되겠는데, 하나님께서 이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니고 주변에 뭘 깔아두셨느냐 하면 우리가 생존하기 힘든 환경 조건도 같이 나란히 깔아둡니다. 그러면 배부를 때는 지킨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배고플 때는 말씀 지키는 것이 뒷전이 되는 거죠. 그러면 순종을 못하는 것이 되어버려요.
그냥 여유 있을 때, 편안할 때는 말씀을 얼마든지 순종할 것 같은데 갑자가 무슨 집안에 우환이 있다 하면 사람이 육신적으로 대번에 환원되고 말아요. 다급한 불부터 꺼야 되니까. 그러면 여유 있을 때나 주님 생각하지 여유 없을 때는 자기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우선 살고보자.’ 그러게 되면, 그 다음에 신명기 8장에 그게 서서히 나오죠. 너가 생존 문제 때문에, 너가 뭔가 잘 풀리기 때문에, 언약을 잊어버리게 되면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 할 것이다. 이래 돼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몰아가시는 게 이상스럽게 우리보고 지키라고 명령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처한 환경은 “제가 지킬 수 있습니다.” 하는 이것을 자꾸 배제시켜요. “에이, 그 정도는 우리가 지킵니다.” 이런 자신감을 빼앗아버리는 식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주께서는 양보 없이 “이 언약을 지켜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89편 3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낼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 35절,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번 맹세하였은즉”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룩을 요청하는, 요구하는 이 계명에 대해서는 너희들이 뭐, “형편이 어렵습니다. 바빴습니다. 거기에 정신을 쏟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라는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주께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를 궁지로 몰아세우시는 겁니다. 순종하고 싶죠? 그런데 덩달아 우리에게 찾아온 환경은 순종에 실패한 환경이라면 과연 순종이 되겠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군데에서 순종하라 했지만 결국 신약에 와보면, 하여튼 구약은 신약이 있어야 돼요. 신약이 없으면 해답이 없어요. 신약에 와서 보면 이게 순종 자체가 되지를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여기에 불순종이 나옵니다. “전에 너희가 불순종의 지시를 따랐잖아? 그래서 너희들은 불순종의 아들들이었어.” 라고 아예 규정을 해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에베소서 2장에 대해서 “제가 언제 불순종 했습니까? 어릴 때부터 교회 다녔는데 언제 불순종 했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반박이 되죠.
제가 노래 가사를 하나 불러드릴 테니까, 이거는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빼놓고 다 아는 가사인데, 이 가사를 들으면서 속으로 노래 제목을 맞춰 주시기 바랍니다. 날씨도 덥고 잠도 오는데 퀴즈나 내야지. <다시 어둠이 내리면 혼자라는 게 나는 싫어 불빛거리를 헤매다 지쳐버리면 잠이 드네 그댄 그렇게 내게 남겨둔 인형처럼 쉽게 웃으며 떠나갔지만 나의 마음은 인디안 인형처럼 워~~~~~~~까만 외로움에 타버렸나봐 오 마이 베이비> 나미가 불렀다는 <인디언 인형처럼> 노래입니다. 여기에 보면 다시 어둠이 내리면 혼자라는 게 나는 싫어 불빛거리를 헤매는 것, 지금 우리 보기에는 전혀 하나님하고는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죠. 이게 불순종의 영이 역사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외로우냐 안 외로우냐가 더 중요해요. 내가 지금 한 달 수입이 얼마냐가 그게 중요해요.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순종이라는 말은 거룩이라는 말은 거룩을 의식하고 말씀을 의식할 때만 지켜볼까? 그 말씀 순종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볼까? 이게 있는 것이지, 아예 말씀이고 뭐고 눈 돌릴 사이도 없이 허겁지겁 살기 바쁜데, 순종 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순종 했냐, 안 했냐 하는 자체가 이게 내 인생하고 관계없는 거예요. 그저 나는 외롭다. 슬프다. 흐물거리는 거리에서 나를 같이 반길 사람은 없느냐. 왜 그대는 나를 인형처럼 남겨두고 혼자 떠나 버리고 나를 힘들게 하느냐 이런 거만 남지, “주여 지금 저.... ”이런 것은 묻지도 않죠.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뭐냐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불순종이라는 겁니다. 그 말은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불순종이에요. 뭐 새삼스럽게 순종, 순종, 하지 마세요. 평소에 살아가면서 그게 불순종인데 무슨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돌립니까? 성립 자체가 되지를 않는데.
그래서 이걸 안타깝게 여겼는지 옛날 70년대, 80년대, 미국의 팝송에 보면 <침묵의 소리>라는 노래가 있어요.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Sound Of Silence(침묵의 소리)-Simon & Garfunkel 거기에 보면 가사가 그래요. <잘 있었나 어둠이여 나의 오랜 친구여 나 당신하고 이야기하려고 왔네 어떤 환상이 내 머릿속에 기어들어 왔는데 그 환상이 바로 침묵의 소리라네 너희들은 네온이라는 이 도시의 불빛을 섬기고 절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전할 것은 바로 이 침묵의 소리라네 지금도 침묵의 소리는 어떤 경고를 보내는데 그 경고는 지하철 벽과 그리고 허름한 아파트 너희들이 시시하게 보는 허름한 아파트 복도에 침묵의 소리의 경고가 낙서처럼 쓰여 있다네 너희들은 이 침묵의 소리를 잃어버리고 있다 이 현대인들아> 현대 문명에 대한 고발의 노래에요. 노래가 이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영어는 지금 제가 자신 없어서 안돼요.
왜 하나님께서는 거룩을 요청하면서 왜 우리가 태어나서 처해있는 환경은 이처럼 거룩이나 순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런 환경을 따로 조성해 가시는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 자체가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인공이 따로 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습니다. 돈 아까울까 싶어서 그러는데. 그 대신 이스라엘에 가 본 사람이 동영상 촬영한 것을 제가 자주 보거든요. 말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데. 예수님의 무덤이라는 사진에 보니까 입구에 이런 영어로 되어 있어요. HE IS NOT HERE 그는 여기 계시지 않다. 왜냐하면 FOR HE IS RISEN 그는 살아났기 때문에. 근데 거기서 제가 보기에 뭔가 미흡한 게 있어요. 그는 여기 계시지 않다는 것은 누가복음에 나온 것을 쓴 거거든요. 그는 여기 계시지 않다. 왜 그는 부활했기 때문에. 이런 뜻인데, 사실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여기 계시지 않는 방식으로 여기 계시다." 이게 정답이에요.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오늘 낮에 주일학교 설교도 그걸 했습니다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분명히 주님은 부활하셨어요. 근데 우리가 여기 있는 방식으로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리 되면 해답이 뭐냐, 층을 두 개의 층으로 만드는 겁니다. 이 두 개의 층을 만드는 이유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두 개의 층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자, 오늘 본문을 보면 말씀을 지켜라 그러면 너가 거룩해지고, 거룩해지면 너희에게 주어질 혜택이 이러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서 너희는 오래 살 것이다. 요거거든요. 딱 요거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앞에 있는 조건이 만약에 틀어진다면 뒤에 있는 조건은 물 건너 간 거예요. 앞에 조건이 거룩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말씀 순종하지 아니하면 뒤에 조건은, 그거는 닭 쫓던 개다 되어 버려요. 이거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거는 우리한테 약 올리는 것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약속에 땅에 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약속에 땅에 어떻게 들어갈 수가 있느냐 이게 문제거든요. 두 개의 층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제시한 방식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두 개의 인간형을. 그 인간형을 만드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가 동원이 돼요. 그러면 같은 명령으로 어떻게 두 개의 인간을 만들어내느냐 하면 한쪽은 그 말씀을 다는 아니지만 지켰다고 여기는 사람, 하나의 형, 이거는 지옥 갑니다. 두 번째는 때려죽여도 못 지킨다고 발생되는 아주 희한한 형이 등장하죠.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제 소관 아닙니다. 제가 갈 곳이 못 됩니다. 당최, 왜, 나는 처음부터 주님의 뜻이 주님의 거룩에 있는데 나는 거룩에 미흡하기 때문에 당연히 욕심내면 안 되죠.” 라고 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을 만들어내요.
그러면 두 부류의 사람을 만들 때, 여기서 좀 어려운데요. 첫 번째 부류부터 먼저 합시다. 두 번째 부류는 좀 특이하기 때문에. 보통 우리가 아는 부류는 뭡니까? “다는 못 지켰지만 그래도 틈틈이 주의 말씀을 기억해서 지켰습니다.” 하는 이 부류, 지옥 가는 사람, 요 부류가 문제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나는 안다. 두 번째, 알기 때문에 아는 대로 행한다. 요런 골이 있어요.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 눈치 챘어. 따라서 나는 눈치 챈 이상은 나는 최선을 다해서 지키는 거야. 그래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나는 딴 건 못해도 이거는 행했다 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새삼스럽게 이걸 어렵다고 하는 것은 어려워서가 아니라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이거예요. 무심코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이겁니다. 주부가 설거지한다. “여보 설거지 어떻게 해?” 갑자기 40년 동안 설거지 하다가 그렇게 물어보면 이미 그건 치매 3등급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설거지에 대해서는 이미 자기가 알고 있어요. 따라서 안다는 것은 행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근데 어느 날 “여보 설거지 어떻게 해?” 라고 묻는 것이 굉장히 특이하죠. 지금껏 하나님의 영광, 기도 이렇게 하는데 갑자기 “목사님! 기도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기도 잘 하더구먼. 아까도 봤잖아요. 기도 잘하잖아요? 기도 그렇게 잘하는데 새삼스럽게 “목사님! 저, 기도 어떻게 하는 줄 모르겠습니다.” 특이한 현상입니다. 정말 두 번째 인간형이 막 튀어나오려고 해요.
두 번째 인간형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에게 ‘대책 없음’에 순종하라. 처음에 순종은 말씀과 명령에 순종하라고 해놓고 그 다음에 순종은 뭐냐, 어떤 행함이나 대책이 나한테는 없다는 그것을, ‘대책 없음’에 순종하는 거예요. 그게 첫 번째고, 두 번째 대책 없게 만드는 그 모든 사태에 대해서 순종하는 겁니다. 내 인생을 내 식으로 해결하려는 그 대책을 주께서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특이한 인간성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어요. 방금 길게 이야기한 것을 주님은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제자들이나 모든 사람들, 오늘날 사람들도 그 소리 듣고 죄인 되려고 고난주일 지킵니다. 굶어가지고. “뿌족합니다. 부족합니다.” 할 때는 이상하게 목소리가 변조가 돼요. “뿌족합니다. 할렐루야!”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라는 것은 부족합니다, 라는 것을 미리 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부족한 것을 안 이상은, 내가 설거지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설거지하듯이, 부족한 것을 자기가 잣대를 만들고 기준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맞추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들은 나를 본받으세요. 내가 여러분들을 책임지고 구원하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살아가니까 저처럼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을 다 목사 만들어놔서 목사들 실업자 다 만들어놓고. 정말 목사는 이렇게 해야 돼요. “내가 구원받는 방법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아는 것은 나에게 알지 않게 하시는 주님의 숙제의 능력이 나를 구원한다는 사실 뿐입니다.” 나로 하여금 스스로 구원 못하게 막으시는 그 능력이, 나를 탕자 만드시는 그 능력이 아버지에게, 주님에게 계속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는 이 사실, 이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되죠.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형(形)이 생깁니다. 여러 번 했습니다만 하나는 이스마엘 있고 그 다음에 이삭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부부가 이삭을 볼 때마다 뭘 생각했겠어요. 저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영토에, 나에게 나오지 않는 이질적인 요소로서 내 영토를 점령하고 있는 자식이 이삭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살지 않는 방식으로, 내 아파트에, 내 주택에 턱하니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인정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계시지 않는 방식으로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신체에다 터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너는 이 모든 말씀에 대해서 어떤 대책이나 어떤 해답을 내놓을 필요가 없다. 나올 수가 없다. 이미 내가 너를 점령하고, 이 말씀과 거룩과 완성과 관련된 것을 너에게 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다음부터 알 것은 간단한 것밖에 없죠. 뭐냐 하면, 매일같이 우리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하는 육신적인 본성과 그것이 해답이 아닌 것으로 계속 제켜버리는 주님의 구원의 능력과, 그 두 능력이 우리 안에 같이 공유해있다는 사실. 그걸 통해서 나를 구원하신 것은, 나를 거룩하게 하신 것은 말씀을 주신 주님의 고유권한이지 나는 거기에 하나의 열매고 딸려가는 처지에 놓여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어떻게 됩니까? 그 땅은 오전에 언급했어요. 그 땅은 주인공이 떠나버리면 함께 그 땅도 같이 위로 올라가버려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같이 위로 올라가버리면 나머지기 있는 것은 죽음의 땅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고 감람산이고 전부 죽음의 땅이에요. 거기에 지상의 어떤 의미라는 게 없습니다. 해외에 나가봐도 뭐 별로, 제 동생 부부가 베트남에 갔다 왔다는데 “베트남에 가니까 좋더냐?” 하니까 “덥더라.” 답변이 덥다는 거예요. 36도까지 올라가서 덥더라는 그거밖에 없어요. 이 더운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왜? 이곳에 미련두지 말라고. 여기서 어떤 의미두지 마세요.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지독하게, 극렬하게 싸우는 가운데서 왜 주님께서는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나를 천국 보내는 사람으로 우리 속에 거룩을 집어넣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거룩보다도 내 손으로 번 돈과 내 명예와 자존심과 체면을 우선시하는, 이것 때문에 나는 내가 내놓은 대책으로는 구원을 안 받게 하는 이것이 얼마나 우리한테 다행스러운지. 참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죠. 신명기 8장을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신명기 8장 12절에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절,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아! 이거 남의 이야기처럼 또 느껴지잖아요? 우리도 언제 이런 시절이 오겠나? 그런 생각이 들죠. 그렇게 될 때에 오히려 걱정을 더 하는 거죠. 14절,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보세요. 이 말씀이 뭐냐 하면 벌써 우리는 교만함이 잠복되어 있잖아요. 내 속에 교만함이 들끓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미처 몰랐죠. 그런데 좋은 집 짓고 재산이 늘어나고 잘 되니까 잠 자고 있던 교만이 위로 올라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마음을 가지고 무슨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무슨 순종을 하고 어디를 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우리는 대책이 없습니다. 우리는 현재 어렵게 살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는 것 같지만 만약에 우리에게 갑자기 재산이 생기고 잘되게 되어 버리면 갑자기 우리에게 교만이 막 올라오는 거예요. 그때 누가 지적질 해주면 감사하죠. 지난 수요일에 설교하고 나니까 대번 제 딸한테 지적질이 딱 왔어요. 안식일, 월삭 어렵다고 제가 그렇게 하니까 아버지가 왜 무시하는 소리를 하느냐? 아버지는 잘났나? 해가지고 제가 아이고! 설교 잘 들었구나!
항상 인간은 교만이 대기하고 있어요. 무슨 거룩을 합니까? 무슨 말씀을 지켜요? 아예 알아요. 주님이. 아예 우리 사정을 아시니까 아예 십자가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이제부터는 왜 십자가뿐이냐. 왜 주님만으로 우리가 천국을 가느냐. 내 힘으로 못 가느냐를 날마다 되새길 수 있도록 그렇게 주께서 이 말씀가지고 같이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두 가지 인간형을 통해서 주의 거룩이 우리 힘이 아닌 것을 알게 되옵고 천국이 내가 원해서 가는 곳이 아니고 주께서 원해서 데려가는 곳인 것을 알게 되었사오니 주여, 어떤 일이 있더라도 느긋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