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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2강-법도 지키기(신5;28-33) 1505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5. 28. 08:52

2015-05-24 15:23:39 조회 : 79         
   법도 지키기 150524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법도 지키기 (신명기 5:28-33)

음성 동영상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8V1W5v9WGk, Hit:10
 이근호 15-05-24 16:08 
법도 지키기

2015년 5월 24일                           본문 말씀: 신명기 5:28-33

(5:28)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의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5:29)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받기를 원하노라

(5:30) 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고

(5:31) 너는 여기 내 곁에 섰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에서 그들로 이를 행하게 하라 하셨나니

(5:32)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5: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흔히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들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큰 핵심을 빠트린게 됩니다. 바로 인간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더라도 이미 벌써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의해서’를 인간 입으로 ‘하나님의 위해서’ 바꿔 이야기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 영광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바로 이 지점, 곧 불타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나타났다는 그 현실을 유지하는데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8-21에 보면 “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모세는 자기의 형편이나 입장을 챙길 여유가 없습니다.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했습니다. 바로 관계를 연속을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무섭게 떨린다면 인간이 사적인 형편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대들지를 않습니다. 자기 입장을 이해해달라고 호소하지도 않습니다.

그 위엄스러운 영광 속에서 자기 자신을 놓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족하게 여기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법도를 지키는 것이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모습이 됩니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영광이 주신 말씀 속에서 함축되어있어 현실이 이 말씀이 품고 있는 내용의 전개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과 약속의 땅의 성취란 실은 인간들이 신경쓸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하면서 약속의 땅 입성을 생의 목표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들이 약속의 땅에 도달하고 난 뒤의 그들의 목표는 그것으로 다였습니까? 끝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도 목적도 망가져야 했습니다. 마치 다음과 같은 예와 같습니다. 어항에도 물고기 사료를 주면서 폐쇄된 투명한 플라스틱 막대 안에 담아서 물 속에 집어넣습니다. 물고기들은 플라스틱으로 인하여 사료가 막힌 줄도 모르고 입을 쫑긋거리면서 먹이를 먹겠다고 사료 막대 주변에 몰려들지만 다 실패로 끝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플라스틱 막대에 담아서 이스라엘 속에 집어넣으니 이스라엘은 나름대로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막상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니 그들이 원래 기대했던 목표가 하나님의 목표와 같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을까요?

그들은 마지막 때가 되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몰라서 그러했던 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2) 그런데 사람은 이 아들로 말씀하시는 방식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들 나름대로 말씀에 대한 인상과 그 성취성을 정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했던 메시야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쪽이 아니라 인간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점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목적을 내세우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살고 있다’는 것은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위협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28절에서 “너희 말은 옳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며 누가 평가를 내릴 수 분이냐 하는 점에 있어 오직 홀로 계시는 하나님의 몫이다 는 것을 분명히 해두십니다. 즉 인간은 개인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안다는 겁니다.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벌받고 저주받더라도 그것조차 하나님께서 내리신 조치이기에 기꺼이 감사하겠다는 입장이 바로 거룩한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바입니다. 왜 이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가 하며는, 녹차를 따스한 물에 타는 것과 같습니다. 녹차 주머니를 물을 담그면서 서서히 녹차 성분이 주머니를 떠나 물속으로 흡입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녹차의 깨어짐이요 분열이요 파급이요 확산이요 녹차의 희생이요 녹차의 죽음입니다. 동시에 녹차 안에 들어있는 법도의 완성태도 같이 확산됩니다. 그 확산되는 지점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 바로 약속의 땅에서 사는 백성들의 마음입니다. 땅만 있으면 말씀의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이 유발시킨 성도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이런 현상을 지형적으로 어느 장소에서 발견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의 발생은 오직 하나님만이 1로 간주하고 나머지는 0으로 존재성을 나타낼 때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즉 참으로 두렵고 떨린다면 그것은 여럿이 아니라 오직 홀로 계신 분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옳도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옳은 판단의 근거가 홀로 계신 하나님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즉 하나님도 옳지만 너희들도 옳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들의 자기 주장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소멸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옳음만 부각되는 ‘옳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옳은 상태 아래서 이스라엘은 자연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형성됩니다. 이는 곧 말씀이 전체 일상 시회생활 속으로 구체적으로 파고 들게 된다는 말입니다. 특별한 신비로움과 신비주의를 피해서 일상의 소소한 일을 통해서 성도는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과 배려와 생명의 적용을 경험케 됩니다.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1의 기준으로 삼고 무심코 살아가게 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살면 장래 늘 행운이 주어지리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두렵고 떨리는 마음’ 유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무지(無知)합니다. 이 무지를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따로 계시고 그 분의 업무 속에 성도가 운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에서 내가 손을 떼어서 벌써부터 주님이 손대로 일방적으로 관리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5-25 13:59 
32강-신 5장 28-33절(법도 지키기)1505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5장 28-33절입니다. 구약성경 270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의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고 너는 여기 내 곁에 섰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에서 그들로 이를 행하게 하라 하셨나니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이번에 여름 수련회를 하는데 제가 임의로 정한 제목이 있어요. ‘의심의 시절’이라는 제목을 그렇게 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의심의 시절에 거처했던 때는 사사기 때에요. 사시기는 이미 약속의 땅에 들어온 거예요. 이미 약속의 땅에 도착을 해버렸어요. 목적지점에 도착을 했는데, 막상 약속의 땅에 도착을 해보니까 목적지점이 아니었습니다. 전에 광야에 있었을 때는 목표가 뭐냐, 약속의 땅에 입성을 하기만 하면 되는 걸로 알고 있었죠. 드라마 항상 끝이 뭐냐 하면 둘이 행복하게 결혼해서 사는 것으로 끝나요. 결혼식 단체 사진을 찍는 것이 드라마 마지막 장면이거든요.

그런데 결혼이 끝입니까? 막상 도달해보니 그게 다가 아닌 거예요. 그럼 거기서 또 새로운 목적을 임의로 만들어야 할 것인가? 또 가야 될 곳이 어디인가? “에이, 그거는 교회에서 잘 배웠죠. 천국이 목표죠.” 이렇게 생각하는데, 천국 가서도 이 모양 이 꼴이라면 그때 어떻게 하시렵니까? 내가 생각한 천국이 그것이 끝이라고 여겼는데 그 끝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전혀 내 마음에 만족하지 않고 미흡할 때는 그럼 천국에서 도로 나와야 되는 겁니까? 그런 문제가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은 하나님을 마지막 때에 알아야 되는데 미리 처음부터 자기가 갖고 있던 이미지를 그렇게 형상화시킨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아들로 이야기했잖아요.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해서 이야기 했다고 할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 하나님! 마지막 때에 나타나계시지....,”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아들로 통해서 이야기해요. 그전까지는 선지자를 통해서 이야기하는데 마지막은 아들을 통해서 모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만 들으면 사람들은 굉장히 쉬워요. 아들만 통해서 하나님을 알면 되는데 문제는 전혀 자기들이 생각했던 그 인상으로, 자기들이 상상했던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쪽이 문제냐 하는 거죠.

예수님은 분명히 메시아인데, 우리가 그 메시아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어느 쪽이 문제겠어요. 우리가 그동안 뭔가 잘못 생각하고 오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상상력이 너무 발달해서 너무 엉뚱한 생각을 해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 음탕한 생각을 바꾸는 방법은 “우리가 이만하면 됐습니다. 이것이 주의 뜻이겠지요.” 하는 그것을 항상 틀어지게 하는 방식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주여, 이만하면 제가 착한 일했으니까 복 받겠죠.” 근데 전혀 내 뜻대로 일이 안 될 때 도대체 처음부터 어디서 문제냐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죠.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의도했던 것하고 하나님이 의도했던 것하고 핀트가 안 맞는 겁니다.

그럼 지금까지 설교했던 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뭘 기대하고 있습니다. 희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겁니다. 근데 하나님은 뭐냐 하면은, “날 위해서 살지 말고 니가 하는 그것이 바로 이미 하나님이 일이 개시가 된 것이다.”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과 연결시켜 보려고 하는데 내가 하는 일은 없어요. 주께서 그 일을 하게끔 우리를 몰아세우신 겁니다. 몰아넣은 겁니다. 근데 평소의 우리의 버릇이 “이 정도 같으면 나도 할 수 있는데...”라고 생각을 해요. 집에서 설거지를 한다면,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설거지를 시킬 때 남편들이 걱정하는 것이 있어요. 남편들 마음을 몰라서 그러는데. 남편들이 설거지 한 번 할 수는 있어요. 문제는 한 번 이것이 전철이 되어서 계속 시킨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야, 이거 계속 시키는 거 아닌가?’ 그게 겁나서 아예 안 하는 겁니다.

우리는 생각 합니다. ‘이거 하게 되면 요걸 근거로 해서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지.’ 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기대하고 희망하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에 대해서 곡해하고 오해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고 지금 니가 하는 일이 너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바로 숨겨져 있는 나,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리는 결론은 아주 간단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목적과 희망을 자꾸 만들게 되면 그만큼 감사 안한다는 뜻이거든요. 이거는 영~ 성이 안 찬다는 뜻입니다. 실망했다는 거죠. 그러나 주님은 말합니다. “니는 실망할 쨉이 못된다.” 실망을 할 수 있는 그런 입장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도 인간인데 실망할 때는 실망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할 자격도 안 됩니까?” 그럼 주께서 “니가 니 주제파악이 안 되기 때문에 실망하는 거야. 니가 진정 너를 안다면 실망 대신에 감사가 나오는 것이 그게 정상이야.” 라는 겁니다.

자, 그래놓고 오늘 본문 들어가 봅시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희망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32절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33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했잖아요. 이런 말씀 주셨단 말이죠. 그럼 이 말씀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튜브에다 이런 말씀을 집어넣고 물속에다 집어넣었다 합시다. 쉽게 말해서 금붕어 먹이를 위에서 뿌리면 될 텐데 뿌리지 않고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담아가지고 어항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럼 물고기들이 “야! 식사시간이다.” 하고 뻐끔뻐끔 하면서 먹이를 먹으려고 해도 이게 플라스틱에 담겨 있어서 먹을 수가 없죠. 투명해서 먹이는 보이지만, 바로 코앞에 있지만 먹으려고 하니까 뭔가 막혀 있잖아요. 그럴 때, 물고기는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하나님의 방식이 이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아! 우리가 원하는 소망은 이제 이루어진다. 봐라. 우리가 알고 있는 말씀이야. 주신 명령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바르게 행하면 우리가 나중에 복을 얻고 영원히 산단다. 오래 살고 싶지? 말씀 지키면 오래 살아.” 우르르 달려들었는데 막상 거기에는 막혀 있는 거예요. 플라스틱 통에 막혀 있어요. 그럼 괜히 약만 자꾸 살짝 오르는 거예요. 복 준다 해놓고 복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은 주님께서 막아놓았다 이 말이죠. 어떻게 그걸 빼먹겠습니까? 방법은 플라스틱 통으로 하지 말고 녹차로 만드는 거예요. 뜨거운 물에 녹차 티백을 타게 되면 점점 파급이 되면서 전체가 먹을 수 있는 녹차가 되겠죠.

근데 그걸 하려면 주머니에 있는 녹차가 바깥으로, ‘차의 희생’, 제가 지어낸 용어입니다만. ‘녹차의 아픔’ ‘녹차의 고난’이 바깥에 번져 나와서, 삼투압 현상으로 번져 나와서, 사람들이 녹차 맛있다고 마시면서 사실은 녹차가 깨어지고 찢어진 녹차의 아픔과 희생을 먹게 되면, 그 마음이 우리의 강퍅한 마음까지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번지게 되고 퍼지는 겁니다. 그러면 녹차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주실 때, 이제 본격적으로 설교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주실 때 어떤 장소에서 주셨는가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어떤 자리에서. 아까 어떤 집사님께서 설교 시작하기 전에 중요한 것을 물었어요. 요한계시록에 큰 환난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는 전혀 환난을 못 느끼고 있다는 거예요. 그럼 요한계시록이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적용이 안 되는 것은 아닌가? 도대체 요한계시록에서 큰 환난에서 흰 옷 입고 피로 나왔다는데 도대체 큰 환난이 어떤 환난인가? 그렇게 설명했거든요.

근데 그 요한계시록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만 그것이 파악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 받은 자에게만 이게 알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보면 성령 이야기가 먼저 나오거든요. 성령 이야기가 먼저 나오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은 너무나 여유롭게 살고, 아파트도 다섯 채고, 집도 한 이 십만 평 되고, 애도 공부 잘하고, 아무 일이 없는데 성령 받게 되면 이 자체가,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이 다 환난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우리 집 요리사도 가난하고, 우리 집 정원사도 일곱 명인데 얼마나 힘들게 사는가. 내가 가슴 아프다. 집 안에 엘리베이터도 고장 나고...고민이다. 고민. 정원에 금붕어가 있는데 두 마리나 죽었다. 요새 금붕어 값이 올라서 고민이다. 고민.’ 지금 남의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남들 보기에는 고민거리도 아닌데, 본인은 자기가 이 세상에 있다는 자체가 지겨운 환난이라고 여길 때, 그게 요한계시록의 녹차처럼 이미 그 사람 속에 말씀화 되어서 스며들어가는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이것을 알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만 듣게 되어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것을 전도 한답시고 그것을 세상 말로 옮겨서 하면 안 돼요. 자, 그러면 어렵지만 오늘 본문 내용으로 들어가 봅시다. 오늘 본문 내용은 뭐냐 하면, 지금 출발점이 2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의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옳도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한 사람 이야기하고 여러 사람이 듣습니다. 근데 한 사람이 말합니다. 그 한 사람이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이 말하기를 “다 옳도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설교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백성들은 들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 입장에서 다 옳은 이야기에요. 한 분에서 출발한 이 일이 다수에게 퍼지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개인에서 사회로 말씀이 퍼진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 하면 오늘날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면 개인으로 끝나버려요. 그리고 자기가 속해있는 직장이나 사회나 농장이나 일반 정치판이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이 안 되는 것으로 자꾸 오해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단체로 만들고 하나님 본인을 홀로 만들어버리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전체로 파급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로 파급이 되죠.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를 지킨다는 것은, “저, 하나님 섬깁니다. 하나님! 저 훌륭합니다. 하나님! 저 좋아합니다.” 이것은 소용없어요. 니가 이 사회에 나와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정과 가정 사이의 모든 입장에 있어서 내 도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잘 지켜내는가를 주께서는 말씀이 진행되는 과정과 함께 지켜볼 거예요. 그렇다면 사회에 퍼져나가 버리면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영적인 일, 신앙적인 일 그거 다 빠집니다. “신앙적으로 어떻게 합니까?” “영적으로 어떻게 합니까?” 그거 없애버리세요.

시장가서 콩나물 사고 마트에서 물건 사는 것 꼭 영적인 것이 필요합니까? 물론 좀 이렇게 교회에서 잘못 배운 사람들,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생각할 거예요. “주여, 꽃게 새로 나왔다는데 신선한 걸 찾게 하옵소서.” 기도하고 갈 수는 있어요. 근데 그거 성공률이 별로 안 높아요. 그냥 우연히 카트 몰고 가는데 “자, 방금 나왔습니다.” 가까운 거리에 미끼 상품을 잡아가지고 횡재하는 수가 있거든요. 우리는 소급해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만 그걸 미리 노리고 “오늘도 미끼 상품 제가 제일 가까이, 바로 코앞에 나타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해봤자 마트 갈 때부터 정신적으로 피곤해서 안 돼요. 매사가 피곤해요. “주여, 버스가 빨리 오기를 원합니다.” 요새는 버스 오는 시간을 알려주어 알아서 가겠지만 옛날에는 그게 없어서 버스 기다리고....,모든 매사가 그저 내 편할 대로, 내 이익대로 해놓고 “주여! 영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영적으로 기도 한 것 다 빼세요. 그거 하지마세요.

사회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영적이고 신앙적인 것 다 빼고 ‘나는 오늘도 내가 살면서 내 것을 얼마나 손해 봤고 빼앗겼느냐. 얼마나 남한테 이용당했느냐.’ 그게 영적인 겁니다. 그게 아까 말한 녹차의 희생. 예수님께서 사회 속에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살아가면서 예수님도, 뭐 예수님 가는 곳마다 오병이어고, 물 위를 걷고 안 그랬어요. 예수님도 힘들게 살았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참 세종대왕은 불쌍하다고. 아니 고등학교 때인 것 같은데, 그때도 참 철이 없었어요. 지금도 철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참 세종대왕은 불쌍하다. 왜냐? ‘웃으면 복이 와요’를 못 보니까. 그 당시 TV가 없는 것이 얼마나 불쌍하냐? 코미디가 없는데 무슨 재미로 살았겠는가? 그럼 옛날에는 무슨 재미로 살았겠는가? 풍월을 울려라 하면 꼭 느릿느릿한 노래가 이~이~잉~♬ 재미하나도 없어요. <난 알아요> 이런 것도 없고. 그냥 느린느린...뭐가 재미있어요? 재미 하나도 없는 걸. 참 불쌍하다.

예수님께서 TV없는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를 다 지켰어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다 지켰어요. 따라서 우리에게 TV있다는 것이 환난이에요. 그것도 큰 환난이에요. 항상 말씀을 받을 때 “지키겠습니다.” 그거 하나님께서 안 받아줍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거 안 받습니다. 예수님이 당했던 그 현상을 되풀이해서, 예수님이 이미 거쳐 간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되풀이해서 적용시키면 우리는 항상 삐딱하게 세상과 이게 안 맞는, 내가 세상을 품고자 해도 세상이 나를 밀어내는 그런 아픔을 겪는 그것이 주께서 유발시키는 말씀이에요. 주님이 우리 속에 주신 녹차에요. 내 쪽에서 사료를 먹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나로 하여금 원치 않는 주님의 아픔과 고난을 우리에게 먹고 마시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내 안이 내가 지키지도 않았는데 불구하고, 내 안에 신명기 5장이 여기에 성취되어 있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무슨 수로 이걸 지킵니까? 좌측이 어딘지 알아야지. 이게 삐딱한 우측인지 우리가 판정을 어떻게 내립니까? 좌측도 모르고 우측도 모르고 중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근데 주님께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가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일방적으로 정해요. 이거는 바른 길이고, 이렇게 가면 이거는 좌파고, 이거는 우파고. 일방적으로 정해요. 그렇게 해놨는데 본래 하나님의 도는 결국은 아무런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는 겁니다. 이거 나중에 와보니까 내가 생각한 하나님의 뜻은 좌로나 우로가 아니고 우리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우리는 주님이 내 대신 하나라는 사실을 우리가 놓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신명기 5장의 말씀을 받았던 그 대목인데, 20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21절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심히 두렵고 떨린다면,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정신 차려야 돼요. 심히 두렵고 떨린다면 요거는 모세의 사적인 느낌이에요. 모세가 심히 두렵고 떨렸다는 말은 지금 모세 눈에는 하나님의 실존이 나의 실존보다 대신하고, 우선하고 있어요. 바로 ‘주님이 여기 계시는구나!’를 아는 겁니다.

나는 뭐냐, 0, 제로가 돼버려요. 주님이 한 분 계시기에 내가 여기 한 사람이 있는 겁니다. 일대일로 대응하는 게 아니에요. 신앙생활, “주님 나하고 놉시다.” 이게 신앙생활 아니에요. “나를 제로로 만들어주시고, 제로를 만들어주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만 계셔서 주님이 지금의 나를 이렇게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들으면 되게 간단하죠. 그 증거가 뭐냐 하면 28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26절에 “하나님의 그 소리가 땅을 진동했다. 진동치 아니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이, 하늘과 땅도 지진이 일어나 다 떠나간다.” 라고 하시는 말씀에, 그 말씀이 내가 인생 살면서 경험한 것 보다 더 우선될 때,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 순간이 백성이 되는 거예요.

제가 처음에 그렇게 했잖아요. 범사에 감사하라고. 내가 하는 일을 내가 관리하다 보면 감사가 나올 수가 없어요. 그리고 더 나쁜 것은 “내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이렇게 되면 이거는 신앙과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동안 한국교회가 그렇게 교인들에게 가르쳤어요. “지금 여러분 형편이 어려운 것은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똑바로 못해서 그렇습니다. 신앙생활 똑바로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여러분의 인생을 다시 회복해주고 보상해주십니다.” 그 소리 듣고 그 다음부터 더욱더 열심히 하면서 보니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제부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를 쓸수록 점점 더 자기 자신이 더욱 강렬하게 이게 집착이 되는 걸 어떻게 해요.

저, 어떤 목사가 밥 퍼주는 목사가 있답니다. 제가 그걸 보고 그 사람에게 밥을 퍼주는 것은 마약을 주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데, 죽으면 주님 만나는데, 이게 주제넘게 스데반 집사 친구나 동생이 나서서 “스톱! 이거 죽으면 안 돼! 스데반 집사야 내가 지켜줄게.” 하면 스데반 집사가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니 뭐야?” 나는 잊었어. 지금 주님만 바라보고 나를 잊었는데, 니가 중간에 나서므로 말미암아 잊어버린 나를 다시 각성하고 또 다시 나에게 돌아오게 만들어버렸으니까 니가 내 신앙의 훼방자가 되어 버린 거예요.

우리의 신앙을 누가 방해하느냐, 내가 방해해요. “주여, 잘하겠습니다.” 뭐, 주님이 어디 시어머니입니까? “잘하겠습니다. 앞으로 바르게 살겠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바르게 살지 마세요. 바르게 사는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지금 바르게 사신 분, 여호와가 계신데 왜 내가 바르게 살아야 하죠? 그 분의 실적이고 그 분의 열매가 난데. 왜 그 열매를 나한테 돌립니까? 이거 미쳤어요. 정말. 왜 우리가 바르게 살아야 돼요? 좌가 뭔지 우가 뭔지 그 분이 알아요. 우리는 몰라요. 한 이십 년 하면 아는 줄 아십니까? 삼십 년 신앙생활 하면? 몰라요.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요. 몰라도 돼요. 그게 바로 구원된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구원된 거예요. 다만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를 주께서 구원했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말씀을 이루는 것은 그 바탕과 그 토대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기 말씀을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 주님이라는 것, 그거만 알면 돼요. 나머지기는 몰라도 돼요.

다음 차기 민주당 대표가 누군지 그거는 몰라도 돼요. 북한 핵은 언제 터트릴지, 산사태는 언제 일어날지, 마지막 심판... 그거는 몰라도 돼요. 나 말고 아신 분이 있으면 알아서 다 하시잖아요. 그게 믿음이잖아요. 아! 미치겠다. 왜 내 인생 내가 관리합니까? 내 것도 아닌데. 시작하신 분이 주님이라면,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알아서 마감할거예요. 왜 중간에 내가 뺏어갑니까? 내가 뭔데 주님 인생을 내가 뺏어가요.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주께서 만드셨기에 앞으로 만들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한테 프러포즈 하면서 멘트를 이렇게 날립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30년 까지 살아온 것이 다 당신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앞으로 내가 살아야 할 30년도 당신을 위한 삶입니다. 내 사랑 받아주세요.” 멘트 멋있지 않습니까? 어떤 변호사가 자기 애인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답니다. 물론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30년 동안 살았다는 겁니다. 얼마나 복음적입니까? 복음이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은 뭐냐, 여호와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이 사회 전체가. 자기를 생각하지 않게 하는 그런 사태가 일어날 때,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손길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께서 시작한 일, 우리는 여호와만 쳐다봐야 할 그 상황인데 자꾸만 우리 자신을 쳐다봅니다. 자칫 하면 벌 받을까, 자칫 하면 인생 망가질까, 자칫 하면 보상 안 될까, 자칫 하면 내가 실패할까, 주여, 이것이 바로 주님보다 남을 의식한 그러한 불신앙인줄 압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끄집어내어서 주님만 쳐다볼 수 있고 늘 감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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