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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1강-총회(신5;22-27) 1505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5. 26. 08:24

2015-05-17 15:00:49 조회 : 121         
   총회 150517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총회(신명기 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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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5-17 15:55 
총회

2015년 5월 17일                        본문 말씀: 신명기 5:22-27

(5:22)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5:23)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5: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5:25)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5:26)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5:27)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사람은 자기 살 궁리가 늘 최우선 관심사가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실제로 너무나 두려운 존재입니다. 자칫하면 죽는 일일 일어날 수 있다는 위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령들과 장로들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합니다. “살려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사나 호기심 간데없고 늘 그랬던 것처럼 살길 찾기에 다급합니다. 장로들의 제안은 이러합니다. “우리는 당신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기에 모세 당신이 하나님과 자기네 사이의 가름막이 되어 달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네들하고 너무 가까이 있다는 겁니다.

모세가 나서서 중재역할을 해주는 길만이 자기네들이 살 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의 불구덩이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서 돌아온 유일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에게 당부합니다. 자기에게 주목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모세 본인이 살게 된 것이 당신네들처럼 자기 살 궁리에 우선해서가 아니라 말씀 자체의 본질을 드러내는데 있어 자신도 동원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어쨌거나 지금 이스라엘이 사고방식은 모세의 의식과 너무나도 달리 이기주의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총회’라는 단일체계를 염두에 두고 다루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살 궁리만 챙겨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총회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총회가 되려면 모세가 지니고 있는 율법의 최종 완성상황을 미리 짐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 즉 ‘생명’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생명이란 기존 목숨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잃었다가 얻어지는’ 절차를 거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잃어버림’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인간들이 생명나무의 곁을 떠난 입장에서 기대하는 절차로서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생명이 있는 총회’를 만드시는 절차는, 이 단체를 개인들의 단체로 허락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인간들에게는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욕망의 형식으로 발산되고 있습니다. 이러다보면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기 유리한 쪽으로 타인을 이용하게 됩니다.

즉 “같이 놀자”라고 요청하면서 화합을 시도해보지만 그 모임 안에서 “나를 알아줘”라는 식으로 곧장 속셈을 드러내고 맙니다. 나를 알아주면 계속 모임을 가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같이 안 놀겠다는 의도가 애초부터 본인들마다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몸’이라고 우기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것도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 일종입니다.

즉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지시에 성실하게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움이 누적되게 되면 그것을 밑천삼아 정당하게 자신이 기대하는 바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내겠다는 심보가 작용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우상숭배적 성격으로 다루는 바가 됩니다.

자신을 위한 하나님상을 가지고서는 ‘총회’를 하나로 간주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총회 만들기에는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 각 사람의 마음을 관통해버리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그 관통하는 지점은, 각자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나님으로 얻어내기 위해 축적해놓은 인간의 의로움의 창고입니다.

하나님이 제공하신 철심이 인간의 중심을 관통하게 되면 인간은 마치 철심에 꽤뚫인 바베퀴같은 신세가 됩니다. 더 이상 하나님에게 이것 달라 저것 달라 요구할 처지가 못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최후의 보루처럼, 보물처럼 간직하는 그 자기만의 의로움을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근거로 뚫어버리십니까?

로마서 3:22-25에 보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을 요구할 그 어떤 말씀을 담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모세가 갖고 내려온 그 계명과 말씀은 최종 완성을 위하여 예수님과 이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담보는 인간의 열심히나 경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말씀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살 길을 확보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애씁니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그 생명의 근거를 가리게 됩니다. 즉 인간들 본인들의 사적 목숨을 부지 하기 위해 ‘총회’에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영생을 알지 못한다 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적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내려다 주십니다.

그 방식은 모든 인간들이 결코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자격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하는 방식입니다. 죽는 것이 무서워서 영생을 구할 것이 아니라 이미 오신 예수님의 죽으심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반기시고 인정하시는 화해방식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시도하신 ‘화해’의 본질은 ‘파괴’입니다.

예수님께서 파괴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총회간의 화해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세계를 유지하게 되면 주변을 자기 세계를 위한 회해로 변질시키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자기 주장, 자기 권력의 출처로 작용하는 그곳을 죄로 규정해서  수용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들고 나타난 계명 안에서 앞으로 인간을 총회를 대해서 죽으시는 화목제물의 관한 내용만으로 누적이 되고 축적이 될 것입니다. 그 관계로 서로 이어질 때만 진정 나님의 총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예수님의 피로서 관통되었음을 항상 감사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5-21 22:09 
31강-신 5장 22-27절(총회)1505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5장 22-27절입니다. 구약성경 270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장로들이, 그 당시 모세 빼놓고 나머지기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너무 가까이 있으면 자신들이 살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자기들 사이에 모세가 계속 계셔 가지고, “모세 당신은 불 가운데서 말씀 들었는데 살았다. 당신은 살았지만 우리는 살 가능성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당신이 늘 계셔서 말씀을 대신 전달해주면 우리는 그 말씀 지키면서 살 수 있습니다.” 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만약에 당신이 중간에 빠져버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불 타 죽습니다.” 라고 걱정스러워서 이 말씀 하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 입장이나 하나님 입장은 뭐냐 하면은, 모세가 너희들보다 더 뛰어나고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모세는 모세가 들고 온 돌판의 그 효능과 효과의 혜택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도 생존할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너희들이 나처럼 말씀의 효과를 보면 되잖아요. 보면 되는데, 평소에 말씀 없이 살던 버릇이 되어놓으니까 그냥 기존의 목숨만 부지하는 식으로 계속 우기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모세의 말을 오늘날 신약시대 식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생명이라는 것은 잃었다가 얻어지는 것이 생명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서 나타나시는 것은 기존의 니가 목숨이라고, 생명이라고 하는 그것을 폐기처분 시키고, 그 폐기처분 시키는 손길 안에 생명이 들어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먹질 할 때, 우리는 얻어맞는 것만 아프고 그것만 걱정하잖아요. 그런데 그 주먹 안에 생명이 있다면, 때리면서 준다면 우리는 맞는 것이 복이죠. 그것을 가지고 잃었다가 얻어지는 절차를 늘 유지해주는 그것이 생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산 것은 너희들이 아는 기존 목숨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 때문에 나는 이렇게 산다는 겁니다.

그 모세가 나중에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화할 때 나타납니다. 지금 천국에 가 있습니다. 그쪽 바람 시원해요. 세상 고생 끝났습니다. 엘리야와 더불어서, 아브라함 이삭과 더불어서 아주 넉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이 결코 자기가 고생을 많이 했다든지, 열심히 바르게 했다는 그런 게 아니고, 누구 덕분이라는 거예요. 주님의 덕분에 자기가 이렇게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주님의 덕분으로 산 것, 나도 좀 얻어먹읍시다.” 라고 할 거잖아요. 그 주님의 덕분이 말씀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말씀이 적용되고 말씀이 실시가 되게 되면 그 안에서 뭐가 나오느냐 주의 생명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은 날마다 적용해야 됩니다. 지키지 마라 하니까 아예 말씀을 안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말씀을 늘 대하면서,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 안에서 “아! 이런 것 때문에 주께서 십자가의 생명을 우리에게 그냥 공짜로 주셨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게 되면 이게 누구용으로 들어오게 되어버리느냐 하면 내 개인용으로 들어와 버려요. 개인용으로. 개인용으로 들어와 버리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 22절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여기 총회란 말이 나오거든요. ‘총회’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그거 숫자는 많아도 그걸 하나도 다루겠다. 한 사람, 한 개인을 다루듯이 다루겠다는 겁니다. 요새 말하면 법인 개념이죠. 회사가 있으면 그걸 한 사람의 인간으로 다루어서 계약을 하는 것처럼. 전체 집단이 있더라도 나는 한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요. 전체 집단이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겁니다. 집단이 한 사람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개인이 서로서로 힘을 합쳐서 집단 만드는 것은 실패입니다. 그것은 성사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은 개인이 갖고 있는 자기 욕망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두 사람만 모여도 이게 하나가 될 수 없어요. 애들이 자기 친구들한테 이렇게 하잖아요. “누구야! 놀~자.” “밥 먹었나? 같이 놀자.” 자꾸 같이 놀아달라고 하잖아요. 어릴 때는 그냥 노는 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어른이 되니까 “놀자” 라는 말이 사실은 속셈은 따로 감추어져 있어요. “놀자”가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나를 알아 도!”로 바뀝니다. 그럼 날 안 알아주면 그 다음부터는 안 놀아요. 철저하게 자기 이기주의입니다.

“자기야! 우리 결혼하자.” 같이 노는 것처럼 여겨졌죠. 결혼하고 난 뒤에 “날 알아 도!” 이걸로 점점 자기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딸하고 같이 놀아준다면 노는 방법은 딱 한 가지에요. 자기 딸 자랑해주면 돼요. “니가 최고야. 니가 공주야. 니보다 더 예쁜 애가 없어.” 이러면 놀아주는 거고, 서서히 잔소리를 하게 되면 딸 쪽에서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나 아빠하고 못 놀겠다고 합니다. 딸이 엄마에게 달려오면 엄마는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이야. 무조건 잘했다고 칭찬해주니까 아쉬우면 엄마하고 이야기하죠. 인간은 자기 위주기 때문에 총회가 성립이 안 됩니다. 사람 몇 명 모여도 결국은 자기가 최고가 되려고 전부 다 은연중에 노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총회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총회가 되지도 않는 인간을 대상으로 해서 총회라고 표현했다는 말은, 니들 각자의 욕망과 욕망으로 연결되지 않은 다른 단체를 염두 해두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욕망과 욕심에 의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면 자기밖에 모르니까. 그것을 어떻게 서로 연결시키느냐 하면 이걸 다른 방식으로 엮여지게 해가지고 어느 누구도 자기 자랑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로 엮는 겁니다. 그 내용이 하나님의 모세가 들고 온 그 계명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이 계명의 내용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지금부터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계명 안에는 뭐가 들어있느냐면 인간이 기대하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걸 기피해버려요. 기피. 다른 분들 잘 모를 거예요. 제가 마을 이름을 이야기 할 건데 공통점을..이거 나만 아는 수수께끼인데 이거 이야기해봐야 정답은 모를 겁니다. 영양, 영천, 의령, 의성, 이런 마을들의 공통점은? 모르죠. 우회도로가 있어요. 이 우회도로가 있다고요. 인간의 욕망은 하늘의 계명을 주게 되면 인간은 계명을 통해서 자기 미흡한 것을 신의 이름으로 마저 채우려고 달려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걸 모두 피해 가버려요. 인간의 모든 기대와, 아까 오전에 했잖아요. 인간의 희망하는 자체가 실수라고요. 인간의 모든 희망과 기대를 우회, 피해 가버립니다.

피해가게 되면 인간은 그 욕망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계명을 지키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면 계명은 저 만치 앞에 가는데 저 계명을 잡아야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인정을 받고 의롭게 되면 내가 원하는 복을 따낼 수가 있기 때문에, 예를 들면 애가 지금 군에 훈련소에 갔는데 전방으로 빠질까, 아니면 후방으로 빠질까, 아주 긴박한 상황에 있다 말이죠. 별로 빽도 없고 보안사 빽도 없어 잘못하면 전방으로 빠질 수가 있어요. 옛날에는 보안사 빽만 있으면 전부 다 후방으로 빠졌어요. 그것도 안 통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입장에서 갑자기 엄마는 새벽기도에 나오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의 기대가 뭐냐 하면은 애가 전방에 안 가고 후방으로 빠지는데, 빠지는 방법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되는데, 행운을 얻어야 되는데, 행운을 얻으려면, 애는 교회에 나왔다 안 나왔다 시원찮게 하니까, 열심히 할 사람이 자기밖에 없으니까, 자기라도 바짝 기도해서 기도빨로 전방에 있는 애를 후방으로 빼돌려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된다 이 말이죠.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도 나는 계명을 지켰다고 자부할 수 있는 어떤 성과를 내야 됩니다. 바짝 열심히 새벽기도 나와요. 새벽기도 나오는 게 힘들지만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는 이만한 고생은 감수해야 된다면서 하잖아요. 자갈치 시장에 아줌마들 지옥 가는 이유를 알겠죠. 자식을 위해서 뭐라도 다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이 계명을 지켰다는 것이, 진짜 계명은 우회하기 바쁜데, 이거는 계명의 발목을 잡았다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복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도망치기 바쁜데 도망치는 주님의 발목을 잡고 자기 쪽으로 질질 잡아 땡기는 겁니다. “복 주세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했던 것처럼 나도 잡아 땡기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계명 완수는 자기한테 누적이 되어 버립니다. 계명의 결과가 누적이 돼버려요. 소유가 돼버려요. 이렇게 되게 되면 총회가 아니고 단독적인 자기만의 우상숭배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계명이 그런 식으로 안 되면, 계명은 우회를 해서 어디로 자꾸 가시느냐. 그 가는 곳, 최종 지점을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계명이 마지막 가는 지점이 어디냐. 로마서 3장에 나옵니다.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결국 마지막 남는 것은 은혜거든요. 은혜라는 것은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왜, 공짜로 주시는 은혜만 남느냐? 모든 계명은 나를 우회해주는 효과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한테 안 붙잡히는 그것이 나한테 복이에요. 내가 계명을 못 지키는 그것이 나한테 행운이었습니다. 계명이 나한테 붙잡히면 안 돼요. 내가 계명을 지켰던 경우가 생겨서는 안 돼요. 이게 사적으로, 내 의로 누적이 되기 때문에 그럽니다. 내 것으로 저축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쯤해서 다시, 아까 했던 것 잊어버렸죠? 생명이란 잃어버리고 난 뒤에 주께서 주시는 거죠. 뭐, 중국 펀드 넣었다. 다 날아가 버려야 돼요. 다 날아가 버리고, 중국 펀드, 브라질 펀드, 깡통 펀드, 마이너스고, 없고, 그리고 다시 주어질 때, 그때 비로소 은혜의 펀드가 되는 겁니다. 마지막 남는 것은 은혜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거예요. 내가 노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함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들이 어디가도 그게 은혜의 자리가 되죠. 꼭 후방으로 빠져야 은혜가 아니고 어디가도 내 아들은 총회의 일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 총회에. 애를 망치려거든 그런 기도하세요. 후방으로 빠지는 기도. 가만 놔두면 애가 잘 되는 것을 가지고 괜히 기도해가지고 망쳐버리고. 왜 그러냐 하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나의 피가 아닙니다. 나의 희생이 아니고, 나의 봉사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하나님께서 화해를 했다는 겁니다.

다시 오늘 본문 돌아가 봅시다. 이 총회의 장로들이 걱정하는 것이 뭐냐 하면 “모세 당신은 불 속에서 살았으나 우리는 그렇지 않으니까 하나님 좀 물러가고 모세 당신만 우리 곁에 있으면 목숨이나 부지하겠다.” 이래 나오는 겁니다. 모세는 그게 아니고 “내가 가져온 계명 안에 여러분들도 나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화해의 말씀이 이 계명 안에 있습니다.” 라고 모세가 지금 말씀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화해가 당신들, 당신들, 개인들, 개인들 사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총회라는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화해가 되어서 삽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집단을 이루면 되겠네? 이루는 방법은 없어요. 사적인 욕망들이 있기 때문에. 어디 가봐야 지가 대장질하려고 하지 이게 사적으로 안 되거든요. 그러면 인간들이 노리는 욕망을 피해서 우회해가지고 다 도망쳐서 계명이 원하는 그 골인지점에, 목표지점에 골인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은혜가, 은혜가 되거든요. 그러면 그 피해가서 화해가 됐던 그 화해가 뭐냐, 화해가, 화해가 됐던 상태에서 우리를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려면 그냥 값없이 주는 것이 아니고, 그 값없이 라는 은혜가 우리가 그동안 저축해놓고 누적해놓았던 자기의 의를 완전히 관통해버려야 합니다.

성도는 바비큐에요. 바비큐. 관통하는 철심이 있어야 해요. 뭐가 지나간 것 같은데. 뭐가 지나갔어. 내 중앙을 어떤 철심이 지나갔어요. 철심을 보니까 이미 화목했다는 예수의 피가 발린 철심이 관통해버린 겁니다. 그러면 나는 잘난 존재가 되지를 못하죠. 어떤 금융회사에서 실수를 해가지고 카드를 폐기하는데 구멍을 뚫어야 하는데 구멍을 안 뚫고 폐기해서 폐기할 그 카드를 가지고 돈을 인출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런 실수를 안 하십니다. 우리를 그냥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화목제물, 십자가로 구멍을 뚫어요. 십자가 뾰족하잖아요. 구멍 뚫기 괜찮아요. 톡톡 뚫으면 돼요.

우리 안에 십자가로 구멍을 뚫어버리면 그 뚫린 지점이 뭐냐 하면 나름대로 계명 지켜서 저축해놓은 그 의를 가지고 필요할 때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써먹기 위해서 하나님께 당당하게 기도하려는 밑천으로 삼고자 하는 그러한 것을 다 톡톡 깨버립니다. 어떤 사람이 솔직하게 그러한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은 진리가 아니다. 왜냐, 인간은 적용할 것과 적용하지 않아야 할 것을 지 맘대로 정하기 때문에 그렇다.” 적용해야 할 것과 적용하지 않아야 할 것을 본인이 결정하기 때문에 인간은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2+3=5다. 2더하기 3은 5고, 삼각함수가 어떻고, 미적분이 어떻고, 이거는 현재 요양병원에 가야하는 할머니한테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적용 안 해요. 그거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근데 지금 수능을 앞두고 있는 학생한테는 반드시 이걸 해야 돼요. 왜? 자기한테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의 진리라는 것은 나한테 유리하냐? 불리하냐? 로 본인이 알아서 본인이 결정한다는 본인만을 위한 진리지 그게 무슨 보편적인 진리겠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인간에게 진리라는 것은 없다. 그런 실용성밖에 없다. 그러니 어떻게 인간이 진리를 아느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맞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의 이 말씀을 하나님이 계획하고 있는 총회를 위해서 해야 될 걸, 이거는 총회는 내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시큰둥하고 별로 관심을 안 두어요. “하나님의 총회를 너무나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그 총회를 위해서 봉사하면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이 뭡니까?” 꼭 이렇게 나한테 돌아오는 총회를 항상 염두에 두고 “돌아오는 것이 있으면 그때 총회를 위해서 봉사하겠습니다.” 이래 나오더라는 말이죠.

여기서 말하는 총회는 대한예수교 합동 측 총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총회라는 것은 인간의 사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한 총회는 감추어져 있어요. 몰라요. 알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피곤하시니까 길게 하지 않고 조금만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총회 만드는 데는 반드시 꼬챙이처럼 꿰뚫는 게 있어야 돼요. 파프리카 넣고, 고추도 넣고, 버섯도 넣고 그 다음에 가슴살도 넣고, 소고기도 넣고, 돼지고기도 넣고 해서 꼬챙이에다 다 끼워 불에 굽는 꼬치처럼. 그걸 가지고 우리를 푹 쑤셔야 돼요. 예수님 피로 쑤셔버립니다. 쑤시게 되면 그 쑤신 지점이 무슨 지점이냐 하면 우리가 내 위주로 사는 지점이에요.

그렇게 되면 “니나 나나 똑같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총회가 되었구나!” 하고 비로소 우리는 잘 이해가 되겠죠. 근데 우리는 머리로는 이해되는데 실제로 생활에서는 전혀 이해가 안 됩니다. 그 한 예가 사무엘상 28장에 보면 나옵니다. 사무엘이 죽고 난 뒤에 사울 왕이 사무엘을 굉장히 보고 싶어 했어요. 왜냐하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과 똑같아요. 사무엘이 있어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전했으면 참 좋았는데 이제 사무엘이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의 뜻을 물을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6절에 보면,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우림이라는 것은 제사장이 점치는 거,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신접한 여자 무당을 찾아가서 묻게 됩니다. 왜? 응답을 안 해주니까. 누가 답답해요? 본인이, 사적으로 본인이 답답하니까.

그래서 죄가 뭐냐, 본인에 대해서 본인이 관리한 모든 것이 죄입니다. 난 나쁜 짓 안 해야지. 그게 나쁜 짓이에요. 내가 두 번 다시 담배 피우면 나는 개다. 그게 나쁜 짓이에요.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는 그것이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총회를 만드는데 이게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총회의 존재를 내가 훼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거죠. 나만 의로우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전에는 나쁜 짓을 많이 했다는 겁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부터는 나쁜 짓을 한 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죄에요. 자기 관리가 안 되는 범위에 들어가야 하는데, 여전히 자기 인생은 자기 관리 범주 안에 있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겁니다. 그게 사울하고 똑같아요. “하나님이여, 저 인간 될랍니다. 인간 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응답을 안 해주니까 할 수 없이 점쟁이 찾아갔죠.” 이게 처음 출발 자체가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해야 한다는, 아까 낮에 이야기했죠. 사르트르하고 똑같아요. “내 역사는 내가 만든다.” 내가 관리해서 내 실적은 내가 결정한다. 이 말이거든요. 그렇게 이야기 하면 별로 어렵지 않죠. 왜 어렵지 않냐 하면 내가 평소에 사는 것하고 똑같네. 그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에 사는 것하고 똑같아요.

사울이 하는 말이 주께서 응답을 안 해주니까 나름대로 내가 설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라고 해서 뭐했느냐 하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어요. 살림 차리려고 찾아간 게 아니고. “여인아, 죽은 사무엘을 다시 나한테 불러내어라.” 했습니다. 보세요. 얼마나 마음이 가상합니까? 끝까지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죽은 사무엘을 불러낼 정도로 요청하는 그 믿음이 가상하지 않습니까? 자기를 비우고 사무엘만 생각하면서 불러낸다는 것. 이게 사탄의 짓이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가 인생의 해답, 인생의 목적을 몰라서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신의 뜻을 알고자 하는 그 시도 자체가 이미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사울과 진배없죠. 똑같죠.

전부 다 사적인 영역의 확장, 자기 생각, 자기 욕망의 화신입니다. 자기 관리 안 해도 되는데, 왜 유독 나만이 자기 관리 체제하에 자기를 둡니까? 모든 것이 값없이 줬다고 했는데, 이미 속에 바비큐 되어가지고 피가 흐르고 있는데, 또 화살 꽂혀가지고 독자적으로 나서려고. 화살 꽂혀가지고 독자적으로 나서면 옆에 있는 화살하고 잘라내야 되고, 그렇게 되면 총회가 안 되고 니 화살, 내 화살 따로 돼버려요. 그러면 문제가 돼요. 그래서 신접한 여인을 불러내었습니다. 불러내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진짜 사무엘이 등장 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게 가짜다. 어떤 사람은 이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게 하나의 환상일 수가 있다고들 하지만 진짜 사무엘이 나타나서 사울을 나무랍니다. 말씀은 이게 사무엘이 진자냐. 가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짜라고 한다 하더라도 사울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는 거고.

문제는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관, 살아있으나 죽어있으나 계명이라는 그 범주를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사람이 공간적으로 이 공간을 못 벗어난다는 것은 전도서에 나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니가 아무리 설치고 발악을 해봐야 그게 바로 헛되고 헛된 세상 가운데서 촐싹거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헛된 세상에서 나 어떻게 삽니까? 라고 물으면 그건 간단하죠. 헛되게 살면 되는 거예요. 헛되게 사는 게 어떻게 사는 겁니까? 물으면 니 맘대로 사는 게 헛되게 사는 거죠. 결혼했으면 결혼했음을 보여주지 말고 말씀을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말씀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결혼했습니까? 그럼 매일같이 어떻게 삽니까?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게 살면 되는 거예요. 그냥 살면 나중에 보면 헛된 삶이 돼요. 그거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원래 인생이 그래요. 괜히 자기 위주로 고민한다는 것이 또 그게 오버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로 인하여 화목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화목했기 때문에 우리는 화목에 대한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입장에서 새삼스럽게 나 때문에 일이 잘 됐다고 거기에다 자꾸 내 의를 집어넣으면 그건 반칙이 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주님께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서, 이제 산자나 죽은 자나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화목 속에 있다면, 그 화목이 뭐냐, 화목이라는 증거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느냐. 화목의 증거는 파괴입니다. 파괴. 깨진 거예요. 누가 내 대신 깨어졌느냐를 찾으면 되는 거예요.

그것이 로마서 3장에 나옵니다. “그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누가 죽었기에 화목한 거예요. 따라서 그 죽음을 잊지 마세요. 우리가 모든 걱정하는 것은 자기 죽음을 미리 땡겨서 생각하기 때문에 걱정하는 거예요. 내일 일어나다가 죽겠다 하는....., 자기 죽음만 생각하니까 마귀의 시험에 드는 겁니다. 마귀한테 지금 놀림을 당하는 겁니다. “아이구 목사님 죽겠습니다.” 당신 죽는 것은 원래 죽게 되어 있어요. 죽게 되어 있고. 내 죽는 것이 주님의 죽음을 방해하지 마세요. 이미 주님이 죽어서 그동안도, 그 죽음 덕분에 그마나도 살아왔어요. 그리고 우리가 죽게 되면 만나는 분에게 “그동안 저를 이렇게 살려줬잖아요.” 하고 감사인사 하라고. “주님 죽으심 덕분에 그동안 평생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그 이야기하라고 이 땅에 살아가는 겁니다.

사적 관리하지 마세요. 내 죽음 생각하지 마세요. 내 죽음이 주의 죽음을 가릴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우리의 형편이.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신명기에서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모세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잘나서 하나님이 주신 불 가운데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덕분에, 예수님이 화목 제물이 되셔서 나는 불 가운데서도 이렇게 살아있었단다.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더라도 이렇게 살아있다. 이것이 너희들의 세계에서 모르는 주님이 주신 생명의 일부다.” 그것을 모세가 지금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는 나를 찾지 말고 이 계명을 순종하고 이 계명 안에서 장차 우리가 죽어도 사는 분을 만나라는 그런 조로 신명기에서 모세가 그렇게 교훈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죽음만 신경 썼지 주님 죽음은, 아픔은, 신경을 못 썼습니다. 근데 주님 죽으심 덕분에 우리가 나만 챙겨도 아직도 여전히 살고 있는 것은, 주님 죽음에서 나온 은혜의 선물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이 은혜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