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30강-탐내지 말라(신5;21) 1505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5. 26. 08:23

2015-05-10 15:04:23 조회 : 178         
   탐내지 말라 150510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탐내지 말라(신명기 5:21)

음성 동영상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HrNvZ7C-rCI, Hit:21
 이근호 15-05-10 15:56 
탐내지 말라

2015년 5월 10일                        본문 말씀: 신명기 5:21


(5: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인정으로 우리 인간을 생각하신다면, 그리고 ‘탐내는 죄’를 근원적으로 싫어하신다면, 인간이 연약해서 지을 수밖에 없는 죄가 유발되지 않도록 하는 환경 조성이 우선이 아닐까요? 인간 근처에 인간이 탐을 낼만한 것들을 아예 치워버려 눈에 띄지 않게 하시는  조치를 취해주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 것은 우리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해 의도하신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이 조치가 처음 등장한 것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선악과 나무의 존재입니다. 나무만 덜렁 동산 한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먹지 말라”는 말씀으로 세팅되어 있습니다.

이는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전달받을 피조물의 필요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면서 중간에 인간, 곧 범죄해야만 하는 인간을 매개체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피조물의 역할이 원래 그런 겁니다. 인간이 본디의 의미를 떠나서 유사(類似) 신으로 행세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은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게 하십니다. 

독자적인 가치를 가지라는 것이 피조물의 원래 사명이 아닙니다. 성도 또한 그러합니다. 독자적으로 살라고 성도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증인’되라고 성도되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 본인의 증인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내가 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했던 그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도중에 사단의 개입으로 인해 변질된 자아상입니다.

이 변질된 자아상을 긍정해서는 아니됩니다. 하지만 각자 자신의 자아상을 변질되거나 왜곡되거나 범죄의 온상이라고 알아 채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는 인간이 꾸준히 어느 강한 세력에 눌려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죄가 되게 하는 데는 상황에 갇혀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사단에게 인간들이 사로잡혀 있기에 사단은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을 다루게 됩니다. 그 방법은 모든 의미와 취지를 인간 그 본인부터 출발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이 험난하고 괴로운 인생을 빨리 마감하고 그 좋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옳지 하나님쪽에서 제시한 그 명령과 말씀을 지켜야지”라고 출발하게끔 사단이 시킵니다.

창세기 3:15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을 인간들이 대하면서 이 말씀을 자신이 구축한 현실의 일부로 장착하기 위해 의미를 찾고자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보면서 제일 우선 궁금한 것이 이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여자의 후손’은 누구이며 ‘뱀의 후손’은 누구일까?” 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자 할까요? 그것은 그 둘의 정체를 파악하고 난 뒤, 여자의 후손으로 자신을 소속시키고 뱀의 후손 쪽을 배척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시도가 곧 ‘뱀의 후손’의 통치를 받고 있는 증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은 사단의 통치를 받고 있기에 아무리 분석하고 연구해도 ‘뱀의 후손’을 알 길이 없게 되어 있는 처지입니다. ‘뱀의 후손’을 모르면 당연히 ‘여자의 후손’도 모릅니다. 이렇듯 무지한 상태에서는 인간은 자신의 형편을 옹호하고 변명하기 위해 그때그때마다 엉뚱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즉 어느 누구도 뱀의 후손이 누구인지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형편에 처해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십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일어났던 그 투쟁의 내용으로 역사를 전개하십니다. 이게 역사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 내용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발꿈치가 상한 남자를 찾아다니는 것으로 ‘여자의 후손’을 찾아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발굴작업은 인간의 이성과 분석력에서 출발하겠지만 그것 자체가 악마가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은 채 인간들을 농락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따라서 투쟁의 현장은 오직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난 분의 몫입니다.

그분이 오직 예수님 뿐이며 그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조정하심에 따라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알게 해주십니다. 그 사람 중의 하나가 사도 바울입니다. 오늘 신명기 본문에 나오는 “탐내지 말라”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 설명하면서 ‘예수님이 증인’임을 드러내는지 봅시다.

로마서 7:7-9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는, 선한 율법이 노리는 곳이 바로 우리 행함의 현장이 아니라 우리 내부라고 언급하십니다. 율법이 나타나면, 인간은 사단의 지배 하에 마중 나가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선한 자인 것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발휘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곧 율법을 반대하는 잠복된 악이 기지개를 펴면서 더 이상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 속에 인간의 절제력으로도 도저히 다스리거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어떤 괴물의 존재를 확인케 합니다. “탐내지 말라”는 말씀은 곧 ‘탐내는’ 식으로 그동안 인간을 통치했던 낯선 존재를 들추어냅니다.

그리고 율법은 인간을 사용하면서 인간을 거쳐서 예수님에게로 달려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 이루심의 결과로 자기 백성에게 찾아드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용서’를 가지고 성도를 찾아오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율법의 아내로부터 성령의 아내로 신분이 바뀌게 됩니다.

성령의 아내는 용서의 증인이기에 죄를 최종적으로 묻지를 않습니다. 이미 사단의 권세를 이기신 분의 능력의 혜택을 성도는 영원토록 받게 됩니다. 따라서 ‘탐내지 말라’는 말씀과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사건은 모두 장치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위해 미리 보여준 사건의 증거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입장이 예수님이 주되심을 위해 의도된 입장인 것을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5-05-18 10:19 
30강-신 5장 21절(탐내지 말라)1505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5장 21절입니다. 구약성경 270페이지입니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도 말지니라”

이 말씀 보고 머리 좋은 사람은 단박에 이게 주께서 문제성 있는 말씀을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탐내지 마라 해놓고, 하나님이 탐내지 마라는 그러한 요구를 하시면서 우리 앞에 이웃의 아내와 이웃의 집과 밭과 남종과 여종과 그의 소와 나귀와 이웃의 소유물을 우리 눈앞에 보이는 곳에 허락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탐내라는 이야기인지, 탐내지 마라는 이야기인지,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걱정하고 우리를 생각하신다면 우리로 하여금 탐내는 속성이 있다 할지라도 그걸 치워버려야 돼요.

제가 총각 때 막 군에서 제대해가지고, 삼촌하고 할머니하고 같이 살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제가 철없는 그때가 있었어요. 그때 어린 조카가 있었는데, 기어 다닐 때인데, 매운 고추장이 방에 있었습니다. 저보고 어린 조카를 보라하고 숙모님은 가시고 저는 집에 있었는데, 뭐 제대해가지고 백수잖아요. 고추장그릇에 사촌동생이 몇 번이고 가서 가지 말라고 “어허! 어허!” 했지만 계속 가는 거예요. 그래서 방치했죠. 먹고 매워봐야 두 번 다시는 안 먹는다는, 그러한 내 철딱서니 없는 논리에 입각해서 좀 먹었어요. 애가 난리 났습니다. 애보다 더 난리 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그의 어머니, 우리 숙모입니다. “애가 먹으면 그걸 치워야지. 왜, 그걸 먹게 했느냐?” 저는 당당하게 이야기했죠. “한 번 먹어봐야 다시 안 먹죠.” 우리 숙모님이 이야기합니다. “애가 뭘 아느냐?” 그때는 참 철없이 행동을 했거든요.

오늘 본문을 보니까 주님이 더 철이 없는 것 같아요. 분명히 탐내지 마라 했으면 치워버려야지 갖다 놓고 탐내지 마라 하면 이거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탐낼만한 것으로 유인하는 것 같은 느낌, 일부러 탐을 이렇게 발산시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것은, 이 말씀은 이겁니다. 너라는 인간은 하나님의 전체 계획 속에 뭔가 필요해서 너라는 것도 하나의 배치되어 있다는 겁니다. 너 앞에 네 이웃의 소와 네 가족의 재산과. 이 원칙은 어디서 나오느냐, 바로 선악과 따먹지 마라 하시면서 선악과 놓고 그 앞에, 선악과 없는데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가 바로 보이는, 늘 보이는 에덴동산 최고 중앙지점에, 그거 의미 있는 자리거든요. 왜 중앙지점이 의미 있는 자리냐 하면,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서 생명수가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생명수가 흐르는 바로 그 지점에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가 심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선악과는 어떤 계획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심겨져 있고, 그 계획 중에 하나가 따먹지 말아야 되는 대상 하나를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 따먹지 마라는 계명이 품고 있는, 숨어 있는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실험쥐로, 하얀 쥐로서, 그 말씀 자체가 품고 있는 창조적 원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따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거기에다 두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그거 따먹고 고생하면 인간만 손해 보잖아요? 할 때 하나님은 그렇지 않아요. 인간을 하나의 유인책으로, 미끼로 사용하는 거예요. 인간을 미끼로 던져서 인간을 갖고 등장하는 제 3의 인물, 사탄이 주님의 쳐놓은 미끼를 물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조치를 한 겁니다. 일종의 쥐잡기에서 우리는 한 멸치로, 쥐덫에 멸치로 활용한 거예요. 쥐가 우리를 물고 우리는 쥐의 지배와 통치를 받으면서 마귀가 받아야 할 저주를, 이건 재수 없게 같이 받도록 해주심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힘으로 이 힘든 여건을 벗어날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을 통해서 처음부터 누가 나를 만들었습니까? 를 되묻게 하는 장치를 만드신 거예요.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 되심을 위하여,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주가 되셨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절차들일 필요한 거예요. 마귀, 인간, 이런 피조물들이 필요한 거예요. 모든 것을 예수님 중심이라고 할 때에, 당신은 왜 하나님 중심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 중심이라고 하느냐? 왜 그렇게 자꾸 우기느냐? 하면서 속에서 시비 거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신학교 때도 있었는데, 그것은 모든 말씀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말씀은 그냥 글자로 되어 있지만 여기 희생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 말씀을 해석할 때는 주님의 희생을 경유해서 그걸 증거 하면서 나와야 됩니다.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그 다음에 성경을 보더라도 내가 이 말 안다는 증인을 대지 말고 예수님의 증인되는 거예요. 그걸 그대로 창세기 1장에다 응용해보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장 1절에 되어 있잖아요. “쉿! 아니야,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야.” 글자대로, 문자대로 해석해서 그걸 하나님 앞에 합격점을 받으려는 유대인들의 짓 이예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거 틀린 거예요. “태초에 하나님이 예수님과 더불어 창조하시니라” 그렇게 해야 이 글을 읽는 방법입니다. 그래야 그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니까.

문자로 해석하지 않고 성령으로 해석하게 되면, 바로 성령이 가르친바, 성령 없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성령 있는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그러한 내용이 여기 나와야 돼요. 그게 안 나오면 유대인들처럼 성경 다 안다. 성경 달달 외웠다. “니 뭐야?” “우리는 모세 율법이다. 근데 예수 당신은 왜 율법을 어겼느냐?”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이상합니다. “모세가 나를 경유해서 해석하는데 너는 왜 나를 경유해서 해석하지 않느냐? 모세 법을 어긴 것은 바로 너다.” 유대인들은 “니가 바로 모세 법을 어겼다.” 그래서 싸우다 죽었잖아요. 예수님께서. 그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기절하죠.

그리고 그 살아난 영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이제는 유대인이 옳지 않고 예수님이 옳았다고 이렇게 증거 하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게 해서 창조에 나와 있는 것들에, 그들이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고, 구조와 배정의 설계도를 앎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우리가 예수 믿기 전부터 이미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탐내지 마라는 말하기 전에 먼저 이거부터 설명을 해줘야 돼요. 왜냐하면 오늘 본문 탐내지 마라가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신명기에 나오는 여기 탐내지 마라 하는 것은, 이웃집, 뭐 눈에 보이는 것을 탐내지 마라고 되어 있지만 요것을 바로 성령 안에서 해석하신 분이 계십니다. 누구냐 하면 사도 바울이 해석을 했어요. 사도 바울이 요 본문을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로마서 7장 7절에, “그런즉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나니”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이 아니면 진짜 나를 알지 못하는,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나는 가짜 나가 되는 거예요. 가짜 나를 유지하기 때문에 나는 율법을 지킨다고 우기는 것이 되는 겁니다. 진짜 나를 경유하게 되면 내가 애초부터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돼요. 선악과나무는 애초부터 따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 이유는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고, 내 구원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 하나의 미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감사히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해석을 합니다. 율법이 온 것은 율법은 나빠서가 아니라, 나쁘지도 않은 율법 왔는데 그 결과가 너희가 죽는다면 그것은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니고율법이 다가온 니가 나빠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렵지 않잖아요? 성경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을 지키려는 그 자체가 이미 틀려먹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을 안 지키면, 안 지켜서 조금 덜 다치겠다는 그것이 틀려먹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안 틀려먹은 것은? 안 틀려먹겠다고 생각한 그것이 틀려먹은 거예요. 주께서 실패하라고 주신 인간을 가지고 마치 실패 안 해도 되는 것처럼 생긴 그 이미지를, 마귀가 엉터리 인간상을 심어줬기 때문에 그러한 징후를, 징조를, 증상을 드러낸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예가 바로 탐내지 마라는 예를 듭니다.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신명기 5장 21절이 없었으면 나는 마치 탐 낼 때는 내지만 탐 안 낼 때는 탐 안 낸다고 자기 자신을 선악으로 분리해서 선한 쪽으로 몰아세울 것인데 그게 바로 율법이 와서 밝혀낸 가짜 내 모습이라는 겁니다. 마귀가 만들어낸 낸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은 자체로만 선할 뿐 아니라 율법의 모든 활동도 선해요. 왜? 나를 죄라고 끄집어내기 때문에 참 선합니다.

그 남자가, 총각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난 것은 남자한테는 큰 행운입니다. 남자에게 자기가 전폭적으로 사랑하지 않은 여자를 만나게 되면 남자는 우쭐대면서 세상 천하에 지가 제일 잘난 남자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자기가, 도저히 남한테 선 볼 필요도 없어요. 다른 여자는 말도 꺼내지 말아야 되요. 그 여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그 짧은 순간에 비로소 그 남자는 여자에게 희생이라는, 도저히 자기가 상상도 못한, 그 여자를 위해서 아낌없이 희생한다는, 그 희생의 능력이 자기 속에서 나와요. 여자가 죽겠다고 간 속초 앞바다에 뛰어죽겠다고 가서 뛰어들고 하잖아요. <압구정 백야>에 나오는 야야 이야기에요.

보세요. 그 잘나가는 그 사람이 그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본의 아니게 자기를 낮추고 낮추고 완전히 낮추잖아요. 도대체 그 능력이.....,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말이 맞아요. 율법은 우리를 죄로 짓밟고 군화발로 가면서 이게 어디로 가는가? 쳐다보니까 밟고 지나가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십자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부활로 성령 오셔서 도로 주니까 내가 못하는 것을 주께서 다 하셨는데 그게 바로 사랑이란 이름으로 율법을 지키도록 하셨구나! 하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7장 1절로부터 나옵니다. 그동안 율법하고 부부되었느냐? 이제는 끝내라. 이제는 사랑이 너의 남편이다. 따라서 사랑 앞에서는 죄가 없다. 율법은 죄를 지적질 하지만 사랑은 죄를 덮어주니까. 너는 사랑받을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간주하셔서 사랑해주시는 겁니다. “아이고 요것 예쁘기도 하여라!” 남들 보기에는 별로 이쁘지도 않은데. “아이구 이쁘기도 하여라!”

왜? 누가 그렇게 하는가? 남편이기에, 남편은 눈이 삐었는가? 아내 앞에서는 남편의 눈이 삐었어요. 삔 것도 불구하고 없습니다. 모든 게 사라졌습니다. “당신만 있다면, 나는 당신 앞에 서있는 것으로, 도대체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참 그런 경험들을 한 번 해봐야 되는데. 남자가 여자를 너무 사랑하게 되면 남자는 접근 못해요. 이 더럽고 저질적인 내가 다가가는 자체가 그 여신에게 먼지를 묻히는 것 같아서, 죄책감 들어서 함부로 다가가지를 못해요. 세상에! 아내를 그렇게 사랑해야 되는데. 그런데 아내를 쥐어 패요. 말이 안 돼요. 꽃으로도 때리지 마세요.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하니까 이런 생각이 나는데, 하여튼 TV 본 것이 문제인데, 영화배우 최민수가 오토바이 타고 아주 상남자처럼 해요. 상남자 최민수란 사람이, 지 이야겠지만, 그 상남자가 자기 집 안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아내보고 한 마디 하는데, “여보 제발 좀 때리지 마세요.” 얼마나 사랑하면 힘센 그 남자가 여자한테 맞는데서 어떤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 정도로 사랑해요. 아내한테 맞는 게 즐겁다고 아내한테 대들어요. 그거 말도 안 되죠.

로마서 7장 계속 봅시다. “율법에서 탐내지 말라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했으리라” 이 말이 뭐냐 하면 율법은 우리 속에 또 따로 있는 다른 두 번째 인격을 겨냥해서 율법이 지금 다가오고 있는 겁니다. 나로 하여금 배려먹게 만든 그 음흉한 세력이, 그 세력을 향하여 율법은 뚜벅뚜벅 옵니다. 우리는 철딱서니 없이 “주의 율법이다. 지켜서 구원받고. 율법이다. 지켜서 복 받자.” 이래 나오는데, 진짜 우리 주인은 “자, 슬슬 탐을 내봐” 내면서 핑계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신께서 탐을 내라고 했다면 탐을 낼 것을 지워버리는데, 탐 낼 것을 만들어 놓고 탐을 내지 말라고 한 것은 당신의 의도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탐내자.” 라고 탐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도저히 어떻게 저항할 수 없는 죄가, 진짜 우리 주인으로 그동안 지배했던 죄가 설치기 시작합니다.

그게 사탄인데, 죄인데요. 그걸 언급을 하기 위해서 창세기 3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번거롭지만 짧게 하겠습니다. 창세기 3장 14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라는 이 대목에 대해서 보는 사람은 제일 궁금한 게 뭐냐, “여자의 후손은 누구며 뱀의 후손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누구지요?” 라고 궁금해 해요.

그 자체가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 하면은 이미 뱀의 후손에 들어있는 입장에서 우리가 궁금해 한다고 우리를 지배하는 뱀이 그걸 제대로 가르쳐주겠습니까? 안 가르쳐주죠. 뱀의 후손 출발점이 나로부터, “뱀의 후손 어디지? 여자의 후손 어디지? 나 여자의 후손 채택할래. 뱀의 후손 저리가!” 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뱀의 후손의 지배를 안 받을 경우에만 그게 성립이 되는데, 이미 뱀의 후손 속에 지배를 받고 있는 입장에서는 우리는 출발점이 우리가 궁금해 하고 우리가 알고자 하는 모든 시작이 이미 뱀에서부터 시작이 된 거예요. 사탄의 지배 하에서, 사탄의 조종을 받아서 질문이 시작된 겁니다.

그래서 “누굽니까?” “어디에 있습니까?”를 물으면 안 돼요. 어디를 주목해야 하느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 내용에 주목해야 돼요. 그 내용이 뭐냐,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고 그리고 여자의 후손은 무는 순간 그 머리를 때리는 그러한 사건인 유발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탄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우리로부터 출발한다면 그때부터 메시아 찾는 일은 쉬워요. 왜냐하면 성형외과에 가가지고 발꿈치를 다친 사람을 조사해보면 돼요. 그리고 발꿈치 다친 사람뿐만 아니고 망치를 들고 있는 사람, 그래서 한때 뱀 머리 쳤던 사람, 뱀 꾼이면서도 발꿈치 물린 사람. 큰 망치 들고 내려치는 사람. 그런 사람 찾으면 될 겁니다.

그런데 아담은 이 이야기 듣고 그런 사람 찾으면 될 거 아닙니까? 근데 아담은 그거 찾는 거보다 더 정신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니 살 궁리하느라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기 때문에. 그 틈새,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 틈에서 나온 사건에 대해서 아담과 하와가 그거 찾는데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안 됩니다. 그러면 모른다는 이야기냐? 예. 우리는 몰라요. 그러나 이미 말씀을 줬다는 것은,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이러한 정황이 점차 하나님에 의해서, 이러한 상황을 조정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유발되는 그 사건이 창세기 4장으로 넘어오면서 완성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죽은 아벨대신 등장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하나님 쪽이고 그리고 이 땅에 있는 탐심을 내는 모든 인간들은 가인 쪽. 가인 쪽이니까 이미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중에 우리가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왜? 로마서 7장이 바로 우리보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탐내지 마라 하는 순간 우리 속에 잠복되어 있는 탐심이 드디어 등장합니다. 탐심이 등장하면서, 그 탐심은 우리가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우리가 사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데, 이 터져 나오는 탐심은 조절이 안 돼요. 도저히 조절할 수 없습니다.

탐심이라는 게, 이게 욕망이라는 게, 우리는 뭘 욕망하느냐 하면, 욕망을 욕망한다고 이야기 했어요. 라캉이라는 철학자는. 그 제대로 된 이야기에요. 욕망을 욕망한다. 다시 말해서 욕망이 죽는 순간 우리는 재미없어서 못 살아요. 그래서 천국을 못 가는 것이 아니라 못 가기도 하고 안 갈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천국에 욕망이 없는데 재미없어 못 살아요. 심심해서. 천국에 프로야구도 있고, 축구도 있고, 그래서 메시도 뛰고 호날두도 뛰고 천국에 북한도 있고 중국의 드라마도 있어야 그 낙으로 긴긴 세월을 보낼 건데. 그거 없이 어떻게 삽니까? 근데 이 땅에서는 드라마도 있고 북한도 있고 축구도 있고, 있으니까 그건 그때그때마다 임시 땜빵으로 채워주잖아요. 채우고 더 재미있는 거 없나? 또 채우고 더 재미있는 거? 그러다 보면 세월 가겠죠.

탐내지 마라 하는 것은 이런 뜻이에요. 내가 너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이미 주님의 말씀 성취 차원에 말려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죠. 이 땅에서 모든 일어나는 일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투쟁을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과연 하나님은 말씀에 맞추어서 일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제가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개인적인 윤리라는 게, 그게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더 큰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세상에 현재 움직이는 모든 것이 개인이나 집단의 윤리로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에 의해서 움직여요. 그게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저도 가끔은 시골에 가보는데, 시골에 가면서 이렇게 묻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사시다보니까 여자의 후손 느껴집니까?” 이래 안 물어요. “농사 잘되셨습니까?” 이렇게 물어요. “농사 잘되셨습니까?” 와 “여자의 후손이 좀 알아집니까?”의 차이가 뭐냐 하면 “농사 잘되셨습니까?”는 내가 나의 주인공이 되어서 내가 농사 잘 짓느냐 못 짓느냐에 따라서 내 팔자가 결정된다는 그러한 체제 속에 있어요. 이거는 뭐냐 하면 나의 싸움이지 창세기 3장 15절하고 관계없는 겁니다. 관계없다는 말은 그게 바로 사탄이 자기 정체를 감추고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중심으로 몰아세운 거예요.

로마서 7장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율법이 오기 전에는 탐낼 때만 탐내고 탐 안 낼 때는 안 내는 거예요.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점잖은 사람이에요. 어떤 부자 청년이 주님한테 왔잖아요. 어릴 때부터 십계명 다 지켰답니다. 십계명 속에 탐내지 말라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의도적으로 십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탐 안 냈던 사람입니다. 근데 진짜 율법을 만드신 주님을 만나면서 그는 그동안 십계명을 지켰고 바르게 살았던 자체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증거로 드러나고 말았던 거예요. 인간은 내가 선하고자 하는 그것도 욕심이고 탐욕인 것을 주님 만나기 전에는 몰라요.

내가 선악과를 알았기 때문에 선한 쪽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지금 모든 교회가 다 그래요. 선한일해서 영광 돌리자 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다 그런 쪽으로 해석 하는 겁니다. 예수님 빼버리고. 말씀 속에 희생 있는 것 다 빼버리고. 피 다 빼버리고. 바리새인처럼, “말씀 왔다. 선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 말씀 지켜서 더욱더 선해지면 선한 만큼 영광되겠지.” 단지 모든 설교가 딱 그거 하나에요. 모든 설교가. “여러분 회개합시다. 죄인이니까 회개합시다. 왜? 회개해서 바르게 살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회개만 하면 구원 못 받습니다. 회개만 하는 것은 십자가고 우리는 십자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더 나가서 부활의 새 생명까지 가야 됩니다. 그만큼 선이 증가해야 영광됩니다.”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아요. 왜? 사탄의 지배를 받는 목사들이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출발해야 될 이야기를 자기로부터 출발합니다. 자기의 고난과 고생과, 생로병사, 자기의 힘든 인생 한풀이부터 출발한 거예요. “어릴 때 고생했지만 주께서 목사 시켜서 이제 잘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오늘날 우리 이야기입니다. 아까 불렀던 찬송가 333장을 이렇게 보게 되면, 제가 가사를 한 번 바꿔 볼 테니까 바뀐 가사하고 이 가사하고 어느 것이 울컥 눈물이 나는지 한번 보세요. 우선 가사를 한 번 바꿔보겠습니다. “방탕한 길로 가다가 주님 기도 못 잊어 나 집에 돌아갑니다.” 별로죠. “주님 기도 못 잊어 새 사람 되어 살려고 나 집에 돌아갑니다.” 이거 별로죠.

근데 원래 가사 대로 하면 “방탕한 길로 가다가 어머니기도 못 잊어 나 집에 돌아갑니다.” 하는 순간, 엄마가 보고플 때~~흑흑 엄마!! 갑자기 전부 다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요. “지금쯤 엄마가 나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시겠나. 나 엄마기도 배반하면 안 돼. 그런 나쁜 자식이야. 엄마 새 사람 되어 돌아갈게. 엄마가 보고 싶어~ㅠㅠ” 갑자기 뭐 맹숭맹숭하다가 가사 바꾸니까 이거 완전히 실감나잖아요. 또 가사 한 번 바꾸면 “방탕한 길로 가다가 옆집 아줌마 기도 못 잊어~~” 영~ 감이.....,옆집 아줌마 안 돼요. 내 엄마여야 돼요. 얼마나 우리가 사탄적입니까? ‘내 엄마’, ‘내 것’, 모든 출발을 사탄으로 출발하지 않고 나로부터 출발해버려요. 주님은 우리를 밟고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한 주님이 드디어 예수님께로 골인합니다.

“탐내라! 그리고 사랑받아라!” 그것 때문에 신명기 5장 21절이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멋있고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돌아서면 전부 다 탐내는 것 밖에 없고 탐내는 것 이상의 죄가 탐심을 내 기도와 내 절제로 그것을 커버했다고 여기는 죄가 또 다시 반복됩니다. 주여, 십자가 피를 담은 채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