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28강-도적질(신5;19) 1504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5. 4. 08:02

도적질

2015년 4월 26일 본문 말씀: 신명기 5:19

(5:19) 도적질하지도 말지니라

십계명을 받게 된 자들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살다가 애굽인과 특이한 기준에 의해서 따로 구분되어 광야까지 들어오게 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애굽인들이 생각하는 ‘도적질 하지 말라’에 대한 이해와 근원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성도의 차이남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대하는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을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겁니다. 자기 잘되는 쪽에서 세상을 읽고 받아들이는 자들이 바로 애굽인이라면 거기서 분류된 히브리인들은 세상을 다른 식으로 봐야함에 강요받는 자들입니다. 그 안목이라는 곧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이요 견해입니다. 여기에 동조하고 동의 하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애굽에 살다가 그냥 가나안 땅에 사는 것은 이민이요 이주에 불과합니다. 같은 방식의 삶을 지속한다면 바로 그 약속의 땅이라는 곧이 제 2의 애굽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또 출애굽되지 아니하면 구원되지를 못합니다. 어쨌든 출발지가 애굽이라면 도착점은 어딘가 하는 겁니다.

그곳은 바로 율법의 취지가 완성되는 곳입니다. 이는 법에 대한 합당한 벌칙이 만족스럽게 치르진 곳인 동시에 율법의 완성인 사랑 또한 최종적으로 적용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충분한 벌칙과 충분한 적용이 다 해당되려면 율법 수용자 선에서 이런 성취가 발생되어야 합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예수님께서 율법에서 요구하는 벌칙과 동시에 사랑의 구현을 다 만족스럽게 해내시게 되고, 그 성과로 구성된 나라가 바로 예수님의 나라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고 그 ‘예수의 나라’가 곧 약속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야 될 백성들은, 율법이 품고 있는 벌칙과 그 법칙 내부에서 움트는 사랑과 용서의 형성에 참여되어야 합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자력으로 버텨낼 수 없는 황량한 광야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율법을 시내산에서 제시하므로서 생존보다 더 우선시되는 상황을 위해서 그들이 부름받았음을 인식시킵니다. 어떻게요? 그들 심령 내부에서 원망과 불평을 유발시키시면서요.

육신의 불편함에서 토해지는 본성을 감출길이 없습니다. 목마름과 배고픔과 장래에 대한 절망감과 불안감을 그들이 속 깊은 곳에 담아둘 수가 없는 겁니다. 일단 그들은 스스로 절박합니다. 그런 와중에 율법과 십계명이 투입됩니다. 감당할 수 있을까요? 생존이 우선이 아닐까요? 도덕, 윤리는 나중 문제요 배부른 자들이라 하는 여유가 아닐까요?

율법을 주신 이유는, 각 개인마다 자신을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는 애굽적 사고방식의 색출에 있습니다. 즉 나를 위하여 율법을 주었다는 의식이 곧 율법의 취지에 맞지 않다는 겁니다. 율법은 받는 사람 위주가 아니라 주신 분 위주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 내내, 율법을 주신 분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 위반과 관련된 벌칙과 그 와중에서 피어나는 용서의 흔적으로 보여주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와서 그 완성을 보입니다. 마태복음 5:25-26에 보면,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송사는 율법에 의한 고소사건입니다. 출애굽기 22:1-6에 보면 도적질에 관한 법과 벌칙과 해결책이 나와있습니다. 소 한 마리를 도적질한 도둑은 주인에게 5마리로 갚아주고, 양을 훔친 도둑은 양 주인에게 네 마리를 갚아주고, 만약에 훔친 장물이 그대로 살아있다면 곱빼기로 갚아주고,

만약에 갚을 능력이 없다면 몸이라도 노예로 팔아서라도 주인에게 갚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둑 당한 사람 입장과, 도둑 맞은 사람의 입장은 이 법에 대해서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할 것입니다. 도둑질한 사람은 가혹하다고 느낄 것이요, 도둑 맞은 사람은 횡재했다고 신이 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모든 자를 도둑으로 몰고 가십니다. 이것이 곧 기적입니다. 도적질하지 않는 것이 기적이 아니요 도적질을 어려움 가운데 어쩔 수 할 수밖에 없게 된 게 기적이 아니라 도적질 하나 아니하나 다 도둑으로 몰아가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 운동이 기적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도적질 하지 말라’의 확대시키시는 겁니다. 이미 인간은 율법에 의해서 벌받기로 갇혀 있는 형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혹한 율법에 대해서 인간 쪽에서 골라 잡을 입장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17-18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모든 인간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고 도리어 위반자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전제로 해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거론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도적질하지 말라’의 반대말은 '도적질 하지 말라‘가 아니라 희생과 봉사입니다. 마태복음 5:40에 보면,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개인이 자신의 율법 지킬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안목으로서 도저히 율법에서 찾아낼 수 없는 추가적인 요구입니다. 곧 율법 자체에 희생과 봉사가 배후에 받혀져 있음을 인간들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어느 인간이 찾아낼 수 있다면 또다시 추가적인 조항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불가능함을 겨냥해서 하나님의 법을 찾아들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 죽음 안에서 모든 인간들은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로 확정적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적질하지 아니했다. 나는 결코 도둑이 아니다”고 우길 수 없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자신이 도둑에 불과함을 자인하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생존차원에서 말씀을 밀치지 말고 주님께 영광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말씀을 적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8강-신 5장 19절(도적질)1504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5장 19절입니다. 구약성경 270페이지입니다.

“도적질하지도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말씀 주신 것은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가 아니고 애굽에서 나와 있었을 때죠. 애굽에서 딱 나와 있을 때, 애굽에서 있을 때와 나와 있을 때의 차이점이 뭐냐, 애굽이라는 나라에 자기는 하나의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분리되고 난 뒤에 같이 살던 애굽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배울 것도 없고, 그들과 상관할 일도 없고. 문제는 히브리인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대해서, 기껏 애굽에서 알고 왔던 그것이 자기 인생의 전부였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런 마음 가지고, 이런 생활 태도 가지고 어디로 갈 거냐? 하는 거죠. 그래 가지고 새로운 새 땅에 이민 가서 살아봤자, 이거는 마치 전염병 퍼지는 것처럼, 애굽 사고방식이, 애굽 바깥으로 번져 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잖아요? 어디가도 똑같은 인간 같으면 거기 가서 살아봤자, 또 출애굽 돼야 돼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히브리인들과 애굽을 갈라지게 한 것이지, 막상 히브리인들은 그렇게 애굽 사람이 싫어지고 미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워지고 정겹죠. 그런 경험은 많잖아요? 절에 다니는 보살인데 너무 친하게 지냈다. 근데 그 사람은 교회를 안 다니고 만날 점 보러 다니고 그냥 사주 보러 다니고 그런 미신만 찾는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게 너무너무 잘해준다. 어떻게 그게 미움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사람을 지옥 보내는 하나님이 밉죠. 하나님이 미운 거예요. “나는 천국 가서 좋지만은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저 사람을 꼭 지옥 보내셔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니가 천국 간다고 누가 이야기하더냐? 나는 출애굽 시켰는데 니 마음은 전혀 출애굽 아니다.” “그때가 좋았는데.....,” 이런 식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그 마음 가지고 어디 써먹을 데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 쓸모 짝이 없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자기 스스로 갖고 있는 이것을 하나의 부분으로 만들어버리는 새로운 전체라는 것이 그들에게 다가옵니다. 옴빡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뭐로? 말씀으로, 십계명으로, 그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옴빡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내가 뭐를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그것도 애굽적 사고방식이고, 그게 애굽적 사고방식이었어요. 오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예수 믿는 것도 마귀일이라고.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이런저런 일을 하겠다는 그 의식 자체가 전혀 출애굽 되지 않은, 전혀 성령 받지 않고, 인간의 종교적인 욕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 조심하고, 이것 피하고, 이것 말씀 지키면 구원받는다.” 누가 그렇게? 아니 무슨 하나님이 그렇게 말을 해요? 그럴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따로 한 몸을 준비하지 않았어요.

“똑바로 해! 제대로 해!” 이래야 끝나지, “너희들이 못 지키는 거, 내가 다 지켰어. 내가 따로 한 몸을 준비했으니 그 몸으로 말미암아 이미 너희들이 거룩하게 되었느니라” 그런 히브리서 10장의 말씀이 필요치 않아요. 중보자가 필요치 않습니다. 십계명을 주셨다. 이 십계명을 주신 것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십계명 말씀 하나가 이 전체에요. 전체 안에 옴빡 빠져버립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는 말씀 앞에서 도적질 안 하게 된 것이 기적이 아니고, 전부 다 도둑놈이 되게 하시는 그게 기적이에요. 안 되고 싶어도 도둑놈이 되게 하시는 그게 바로 옴빡 뒤집어씌우는 기적이에요.

“도적질하지 말라” 라는 그 말씀에 니가 그것을 증명하는, 인생이 거기에 합류된 것을 축하하노라. 컨그레츄레이션congratulation. 내가 왜 도둑놈이냐, 그것을 비로소 도둑놈이 되게 하시는 그 기적. 이것은 제가 오전에 이야기했지만, 우리 속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주님의 기적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과 동시에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내 앞에 누구 계시다.’ 이걸 직감해야 돼요. ‘나는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누구로부터 뭔가 관찰당하고, 응시당하고, 누가 주목하는 대상의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나를 주목하시고, 관찰하시고, 나를 관찰에서 빼놓지 않으시는, 그 분의 세계에 우리가 지금 합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분의 세계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의한 관찰과 주목받음이 우리에게 끊어지면 안 돼요. 계속해서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애굽 사람과의 차이점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신이 있다면 본인이 나가서 찾아가는 거예요. 본인이 신에게 해야 될 그 절차와 법도를 본인이 정하는 거예요. 본인이. 가인처럼. “하나님께 제사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니가 제사하는 방법은 니 손에 의해서 알려질 것이다.” “그게 뭡니까?” “니가 니 동생 죽여라!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제사였다.” “저는 동생을 죽일 의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니가 나한테 제사를 드려도 내가 안 받아야 할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니가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너는 그대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통해서 주께서 하셔서 우리를 그 안에 집어넣어버리면 나는 안 했는데 주께서 하십니다가 성립이 되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도적질하지 말라, 이거는요, 어지간히, 그런 보통 가정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거는 실천에 옮길 수 있다고 자신만만합니다. ‘도적질 안 하면 되지. 뭐. 안 하면 되지. 그 뭐 남의 물건 탐낼 필요 없잖아. 요 말씀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내가 지켰으니까 이거는 제켜두고. 내가 못 지키는 거 남아있나 살펴볼까.’ 이런 식으로 행동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은 도둑놈한테 이야기하고, 도적질 할 가능성이 있는 집안에 이야기하고, 나한테는 이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자기를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애굽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전부요. 말씀은 자기의 전부를 지키기 위한, 자기를 빛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 밖에 안 돼요. 그렇다면 구태여 애굽에 있을 때 이 말씀 주시지, 애굽에서 분리시켜서 이 말씀을 주셨느냐. 애굽적인 사고방식에서 십계명을 보는 그 안목과 애굽에서 분리된 사람이 십계명을 보는 안목이 이게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틀려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쪽은, 착한 사람 같으면 필요치 않지만, 이쪽에서는 이미 말씀에 의해서 말씀의 최종상태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겁니다. 말씀의 최종상태는 뭐냐, “우리가 심판받아야 되고 우리가 저주받아야 합당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우리의 시작점이 되고 우리의 출발점이 되는 겁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지? 내가 왜 죽지? 주여, 이유가 뭡니까?” “도적질하지 말라” “아! 도적질하지 말라에 마지막 노리는 것이 주께서 나를 노리는구나! 그리고 그 노림수에 의해서 도적질하지 말라의 말씀의 위신을 드높이기 위해서 필히 나를 도둑놈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정당함이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도적질하지 말라가 구약성경에 있죠. 구약성경의 의미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앞에서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그들의 취지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못 지켰다면 우리는 지키면 되겠네. 그렇게 하는데 구약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의 대표자에요. 대표자가 못 지키면 다 못 지키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도적질 하지 말라는 말씀을 제대로 지킨 사람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 25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사화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합의를 봐라’는 말이죠. ‘급히 합의를 봐라.’ 이어서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절에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이 성사가 되려면 도적질하지 말라가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벌칙이 반드시 있어야 돼요. 벌칙 없는 말은 공연한 말이 되거든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공부하라!” 그러면 애들이 “쌤요! 시험 있습니까? 없습니까?” “시험 없다.” 미쳤다고 공부합니까? 시험도 없는데 왜 해? 시험도 없는데. 시험 없는데 공부를 왜 하죠? 공부하는 이유가 뭐냐, 시험 잘 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왜 시험 잘 쳐서 뭐 할 건데? 뭐 할 건데?? 시험 잘 치면 그 선생님이 요구한 것에 내가 합격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나는? 나는 합격자가 되는 겁니다. 안양에 누가 편찮으신 분이 있어서 제가 심방을 가가지고 그 분에게 성경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분은 교회를 건성건성 다니다가 이제는 암에 걸렸는데 병원에서 포기한 분이에요. 할머니 되시는데 교회도 모르고 성경도 잘 몰라요.

그래서 이 분에게 뭐라고 말씀해드려야 하는가, 쭉 생각하다가, 병원 침상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할머니 마지막 때 시험 칩니데이.” 할 수 없어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쉽게 할 수 밖에. 시험 칩니다. 그 분이 배운 분이고 똑똑한 분이기 때문에 시험 친다는 말에 잠이 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시험 친다면 반드시 합격하고 싶은 욕망도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거든요. “하나님이 시험 칩니데이. 제가 시험 문제 지금 내드릴 테니까 합격인지 불합격인지 한 번 해봅시다. 제가 이것 때문에 왔습니다. ①번. 내 착함과 자식 잘 키워서 구원받는다. ②번. 나의 행함도 없이 예수님께서는 공짜로 데려가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몇 번 입니까?” 뭐, 눈치로 때려잡죠. “②번.” “합격입니다.”

그걸 생각하면서 지금 그 말을 하게 하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굉장히 감사했는데, 왜냐하면 그 분은 제가 지금 그 말을 하기 전에 모든 걸 전부 다 놓아버렸어요. 병원에서 이미 포기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말도 먹혀 들어가는데, 왜 오늘날 우리들은, 요 정말 중요한 말씀, 시험문제를 듣지도 않아요. 귀담아 듣지도 않습니다. 왜? 포기를 안 했어요. 포기 안 했다는 말이 뭡니까? 내가 아직은 포기할 만큼 그렇게 망가진 존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게 불합격이에요. 그게 바로 도적질인 거예요.

도적질의 그 범위를 하나님께서 넓혀버리는데, 넓힐 때, 반드시 법은 그 벌칙이 있어요. 그 벌칙이 뭐냐, 그 벌칙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니가 갇혀있다는 것을 니가 아느냐?” 이게 시험 문제에요. 이게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시험문제에요. “니가 현재 갇혀있다는 것을 아느냐?” 굉장히 어려운 문제에요. “뭘? 뭐가 갇혀있어?” 아무것도 갇혀있지 않죠. 그러나 마태복음 5장에서 보면 니가 갇혀있는데 호리라도, 조금이라도,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 갚지 아니하면 결단코 나오지 못한다. 그러면 도대체 뭐가 갇혀있는데요? 라고 물으면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하신 말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말은 뭐냐, “나, 너희들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온전한 율법을 통해서 보겠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내 앞에 재롱잔치나 제물이나 예물 그런 것 갖다 바칠 생각하지 마라. 나는 율법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저는 한두 개 지켰습니다. 한 50퍼센트 지켰습니다.’ 이런 소리 하지 마라. 온전하게 다 지키지 못하면 반드시 나는 호리라도 다 너한테 갚아내게 하겠다.” 이렇게 언급하시는 거예요. 갇혀있는 겁니다. 갇혀있는 입장에서, 그 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그래서 제가 시험 치기 전에 먼저 언급을 했어요. “할머니, 본인이 병들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병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할머니가 계신 겁니다. 지금까지는, 젊을 때는 병을 자기가 다스렸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입장에서는 그러한 망상은 걷어치우시고 나는 딴 것은 이겨도 병한테는 졌구나! 그렇게 수용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쪽으로 이야기를 했어요.

병이 나를 이긴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애초부터 병한테 이기지를 못해요. 암한테 이기지를 못합니다. 암을 누가 이깁니까? 물론 암도 살아있는 생물체라고 해서 누가 욕 얻어먹은 사람도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암, 암은 무엇의 앞잡이냐면 죽음이거든요.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이길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애굽 사람은 제쳐놓고, 갸들은 죽든 말든 지옥가든지 놨두고, 따로 뽑아내서 애굽 일부를 정해서, 하나의 시료죠. 시료. 애굽의 시료를 딱 떼어서 광야에 옮겨놓습니다. 광야에 오게 되면 어리둥절해요. 의지할 게 없어요. 정들었던 애굽 사람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어디로 갈지 우왕좌왕하고 있어요. 하나의 시료니까.

저주받아야할, 지옥의 심판받아야 할 시료를 딱 해놓고 “니가 이렇게 죽어야 하고, 죄지어야 되고, 원망해야 될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야.” 하고 내세우는 것 중의 하나에 도적질하지 마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약에 보면 도적질하지 마라는 대목이요 그냥 단독으로 안 나와요.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이렇게 묶음으로 되어 있어요. 로마서 13장도 마찬가지고.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이런 게 있더라도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이루느니라. 이렇게 묶음이 되는 거예요. 묶음이 된다는 말은, “나는 살인은 안 했지만 도적질은 어릴 때 했습니다. 어머님 서랍에서 돈을 끄집어냈습니다.” 하는데, 자식치고 보이스피싱 아닌 자식이 어디에 있어요.

다 아빠, 엄마 믿고 사업 벌리는데. 뭐 은행 믿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은행 융자 엄마, 아빠가 다 갚아주는데. 자식들이 크면서 제일 먼저 살피는 것은 현재 아버지의 부동산이 어디에 있는가. 그걸 유심히 살핀다고요. 자식들이 다 도둑놈이라는 게 맞아요. 물론 딸은 도둑년이라고 하고. 맞는데, 그것이 부모공경 이런 것하고 한 묶음이 되어가지고, 뭐, 부모한테 잘 찾아가고 전화한다고 해서 공경되는 게 아니에요. 마음에 다른 구석이 있어버리면 그게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한 방법은 뭐냐 하면, 이 방법을 써요. 도적질하지 말라에서 도적질을 확대시켜버립니다. 그러면 도적질의 반대가 뭐냐 하는 거예요. 반대가.

그러면 도적질이 규명이 되겠죠. 도적질의 반대말은 희생입니다. 도적질 안 함이 아니에요. 희생입니다. 그리고 봉사입니다. 그게 바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나오죠. 39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40절,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이 대목에서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해봐야 되는데 출애굽기 22장에서 도적질을 당한 사람은 나중에 범인이 잡히면 요구를 할 수 있어요. 1절,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 하여 잡거나 팔면” 법이 나와 있어요. 그 법대로 할 때 소를 한 마리 잃었으면 다섯 마리로 갚아주고, 양을 한 마리 잃었으면 양 네 마리로 갚아줘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도적이 밤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죽이면 그거는 죽여 마땅하지만, 낮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죽여 버리면 이거는 평소에 니가 그 인간 죽이고 싶어서 딱 벼르고 있었던 게 되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 낮에 온 도적놈을 죽여서는 안 된다. 밤에 온 도적놈은 죽여도 죄 없다. 이래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낮에 도둑 오거든 돌려보내세요. 밤에 오라고 하세요. 그리고 배상할 물건을 장물아비한테 아직 안 넘겼거든 두 배 갚아줘라. 그리고 갚아 줄 것을 이미 다 팔아서 갚아 줄 것이 없거든 니 몸 팔아서 갚아줘라. 니가 노예로 팔려서 그 돈 가지고 그 주인에게 갚아줘라.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가져간 가축이 아직 살아있거든 그때는 네 배도 아니고 다섯 배도 아니고 두 배 정도로 합의 봐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될 때에, 이 말씀을 누가 줬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줬죠. 하나님께서 해줬는데 여기서 사람의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자기가 도적질을 당한 사람 같으면 이 하나님의 말씀이 굉장히 반가워요. 왜? 소 한 마리 잃었는데 다섯 마리로 되돌려 받아요. 세상에 요새같이 이자가 약한데 이런 장사가 어딨습니까? 일부러 소 잃어버리려고 도둑놈이 오는 곳에다 풀어놓아서 다섯 마리 잃어버리고 스물다섯 마리 챙기면 이거는 보통 투자가 아니잖아요? 이게 도둑을 맞은 사람 입장 같으면 참 좋은데, 가족 중에 도둑질을 한 피고 측에 있는 사람은 너무 가혹한 거예요. 도적질 한 번 했다고 아예 사람을 잡아.

마태복음 5장에서 다시 봅시다. 송사하는 사람이 겉옷을 달라는데 속옷까지 내어주어라. 그러니까 당신은 나한테 원금 오백에다 오백 이자 쳐서 천만 원 갚으라고 하니까. 사채업자가 그렇게 하니까 이 빌려간 사람이 천만 원을 갚는 것이 아니고 집 다 팔고 지 몸까지 다 팔아서, 팔 수 있는 장기는 다 팔아서 1억 만들어서 “받으세요.” 하고 내밀어라 이 말입니다. 그러면 구천 만원 더 받은 쪽이, “에이 이것 밖에 안 돼?” 이런 소리 하겠어요. “아이고, 당신이 그리 나오면 우리가 미안하지.” 미안하다고 하겠죠.

그게 바로 율법의 완성이고, 그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예수님께서 야박하게 더 힘들게 하는 성경말씀만 우리한테 줬다고, 그거만 생각하는데, 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 못 만들어서 환장할 정도로, 그렇게 죄인 만들려고 하신 이유가 이미, 모든, 어떠한 죄도 처리가 끝났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제발 좀 말기 암 환자로 살아가달라는 거죠.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죄가 나를 이긴 거예요. 죄를 안 지을 수가 없다는 그런 입장에 설 때에, “세리와 창기가 천국 간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말이 비로소 그 사람한테는 합격점이 되는 겁니다. 이게 시험의 테스트에 통과가 되는 거예요. 지금 잘나가는 재벌한테 “모든 걸 놓으세요. 그렇다면 당신은 구원받습니다.” 하면 놓습니까? 안 놓아요. KAL기 부사장한테 가서 “땅콩 먹으세요.” 하면, 감옥에 가기 전에는 “땅콩을 왜 먹어?” 하지만 지금 감옥에 있으면서는 “아이구, 땅콩 좀 먹고 싶어라.” 감옥소에서는 아마 땅콩이 안 나올지 싶어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아무리 집이 세 채 있고, 네 채 있고, 자동차 번뜩거려도, 아무리 부동산을 많이 가져도, 성령이 임해버리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같이 놓여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간주해버립니다. 그것이 주님의 게임이에요. 우리 의미의 게임이 아니고. 제가 오전 설교 하면서 중요한 것을 했습니다. 우리는 나의 의미에 마귀한테 놀아나고 있다. 내 의미를 내가 포기를 못해요. 주께서는 그 위에다가 말씀을 주어서, 그게 가둬놓은 거예요. 그게 바로 율법과 죄와 저주에 가둬 둔 거예요.

그런데 저주가 있는 바로 그 곳에, 암이 발생하는 그 곳에, 그렇게 찾기 어렵다는 영생이 거기에 있어요. 교회에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의, 나의 일상의 확장에 불과한 거예요. 정말 일상 속에서, “교회 왔냐?” “구원해줄게.” 이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내가 도적질 한 것, 어떤 도적질? 갚아야 될 것을 갚지 아니하고, 다시 말해서 내가 희생하고 봉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양 한 마리밖에 안 훔쳤기 때문에 다섯 마리 주면 끝나지. 나머지기 한 이백 마리 있는 것은 손대지 마라. 너한테 다섯 마리 줄게.” 라는 식으로 나는 율법 지켰습니다. 하는 그것. 그것 언제 다 손 놓을 겁니까? “니 왜 봉사 안 했어? 나머지기 이백 마리 다 왜 안 줬어?” 라는 소리를 할 때, “그거 내 건데 왜 줍니까?” 라고 나올 때, 그게 바로 확장시킨 도적질에 해당되는 도둑놈입니다.

마지막으로 말라기 3장에 보면, 이 도적질이라 하는 것이 목사들한테는 말라기 3장 구절에 있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왜? 십일조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십일조 했다는 것은 뭐냐 하면 몽땅 내 거라는 거예요. 니거 내가 받는 게 아니에요. “이거 주님 것 맞지요?” 라는 게 십일조에요. 근데 그 사람들이 십일조 안 함으로 말미암아 왜 하나님 것을 도적질 했느냐 할 때 도적질이 나옵니다.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 했다.” 도적질 나오거든요. 그래서 도적질 하지 말라는 것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신 분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항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남하고의 관계에서 도적질이 아닙니다. 남과의 관계가 아니고, 그 사람한테는 네 배나 다섯 배 갚아주면 그만이에요.

중요한 것은 주님의 것을 우리가 건드려놓고는, 우리는 남의 것을 건드렸으니까 도둑놈이라고 하고 남의 것을 안 건드렸으니까 도둑놈이 아니다 라고 우기는 그런 생각을 하지마라. 신약에 오면 그걸 확장시켜버려요. 모든 게 너의 것은 없고 값을 주고 산 내 것이다. 내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아침에 눈 뜨고 애들하고 같이 사는 것, 다 주님의 용서의 욕조 안에서 지금 헤엄치고 있는 중이에요. 온 천지가 전부 다 도적질에서 용서받은 사랑 속에 헤엄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그 사랑 속에서 헤엄치거든 내가 바로 도둑놈이라는 사실을 유감없이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내가 도둑놈이다. “엄마, 용돈 도!” “맡겨놨나?” “니 벌어 니 쓰라.” “나 아직도 미성년자다.” 그럴 때는 그렇게 하지 마시고 “자, 써라! 너는 주의 자식이기 때문에 써라. 그리고 이것 준 것도 내가 준 것이 아니고 나를 통해서 주님이 주셨다고 해라.” 그렇다면 자식은 부들부들 떨면서 그걸 가지고 함부로 못쓰죠. 참이슬 못 사먹고, 담배 못 사고. 주의 것 가지고 술 취하면 말이 안 되니까. “이건 엄마가 준 거니까 엄마 몰래하면 되겠지.” 이런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항상 주의 돈을 주는데, 내 몸이 주의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용서가 먼저, 사랑이 먼저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빼놓고 우리가 다 도둑놈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게 애굽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오직 구원받은 성도에게만 도적질하지 마라는 것이 곧 사랑의 음성인 것을, 그런 혜택을 입은 것을, 그 혜택 속에, 그 사랑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