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강-신 5장 20절(거짓말)1505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5장 20절입니다. 구약성경 270페이지입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지도 말지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십계명 모든 말씀은 마지막 때에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판결하는 판결문으로 사용됩니다. 주의 말씀은 한번 지나갔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게 아니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 기준해서 부합되지 않은 자를 주께서는 처단하고 제외시키는 그 기준으로써, 우리에게 미리 땡겨서 알려준 거예요. 이걸 먼저 우리가 눈치 챘다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위반하면 저주받고 이걸 지키면 복 받는다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신약에 와서는 주를 사랑하게 되면 구원받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 받는다는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말씀처럼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주님으로 어떻게 천국과 지옥이 결판이 나는가 이 말입니다.
그러면 신명기에 나오는 이 말씀은 괜히 겁주는 용어로 끼어들었는가? 그럼 처음부터 아브라함 보내시지도 말고, 아브라함 오지도 말고, 아브라함 이삭 그런 거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예수님이 짠~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짠~ 예수 믿어라 짠~ 하면 끝나는 문제를 가지고 왜 아브라함 나타나고 이삭 나타나고 모세 나타내서 왜 그렇게 번거롭게, 일처리를 깔끔하게 못하느냐.
마지막 때에 나타나버리면 그럼 세종대왕은? 이순신 장군은 우에(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강감찬 장군은요? 연개소문은 그럼 지옥가라는 말입니까? 소크라테스는? 부처는? 아직 복음이 오지 않았던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은 기회조차 박탈당한다면 기획균등, 평등의 원칙에 위반되는 거잖아요? 뭔가 공평치 못하는 느낌을 우리가 받지요. 아직도 감리교회에서는 그거 걱정하고 있어요. 조선시대, 고려시대 사람들은 천국에 어떻게 가느냐? 그 문제를 아직도 혼란스러워서 어떻게 할 줄을 몰라요. 그때는 복음으로 말고 양심으로 구원받는다고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양심이 뭔데요? 비겁한 변명인데요. 양심으로 구원받다니? 따라서 예수님이 오시는 그 시점부터가 아니라 그전부터 예수님이 손대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오시기 난 뒤에 드러난 사실입니다. 율법을 해보고 예수 믿자 이런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예수님이었고 창세전부터 예수님이었고 창세기 1장에도 거기에 예수님이 함께 있었던 거예요. 칡뿌리 캐내려고 파내보면 뿌리가 온 천지에 다 퍼져 있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뭐 암 치료하려고 뜯어보니까 양쪽에 암이 전이된 경우와 마찬가지로 온 천지에 밑바닥에, 근원에 그리스도의 손길이 다 있는 겁니다.
따라서 신명기를, 유대인들은 신명기를 문자로 보지만 우리는 신명기를 뜯어내면서 그 안에 그리스도와 같이 뜯어낼 줄 아는 안목이 우리한테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안목으로 보지 말고 그냥 문자로 보면 “내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지 말지니라” 이렇게 하게 되면, “아! 요거 지켜서 천국 간다면 요거 쉽네! 거짓말 안 하면 되겠지.” 라고 하는 거예요. 누굴 위해서 거짓말 안 하겠다는 겁니까? 누굴 위해서? 그건 내 구원을 위해서 안 하겠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거짓말 되는 거예요. 내 구원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그런 취지에 포함이 안 되어 있습니다. 모든 창조는 예수님을 위해 있지 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닌데 그 사실을 외면해버리고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세상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나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이 있을 것 같으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처음부터 예수님 보내시면 되지,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그런 것도 복잡하고 귀찮아. 차라리 에덴동산 안에 예수님이 함께 살면 끝나는 문제에요. 나를 위해서라면. 나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그런데 선악과 따먹고 하는 그 모든 선악과는 우리와 관련된 게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와 관련된, 따먹는 사건이어야 되는 겁니다. 자꾸 자기를 위해서하니까 “에덴동산에 뱀은 왜 집어넣었는가?”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뱀을 집어넣어야 유혹을 받아 따먹지. 그래야 인간은 죽지요. 죽으라고 만드는 게 인간인데.
죽음은 현실 속에 이미 있습니다. 낯선 현실이라고 죽음을 현실에서 밀어내지 마세요. 우리는 죽음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아직도 여전히 살아있는 거예요. 결국은 죽을걸. 결국은 죽잖아요. 그럼 죽을 때만 죽는 게 아니에요.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죽음은 시작이 된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음은 시작된 거예요.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 했습니다. “인생이란 게 뭐냐, 곧 씻겨내려 갈 모래위의 형체다.” 했습니다. 파도치면 없어질 모래위의 형체다.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한 사람은 아느냐. 근데 씻겨 갈 걸 왜 있느냐? 그건 몰라요. 그건 모르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알고 또 알아야 합니다. 이웃에게 거짓을 증거 하지 말라는 것을 우리가 지키려고 한다면 이웃을, 우리가 결정한 이웃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거짓말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그 판단을 내가 내리게 되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겁니다. 재판할 때 “피고 거짓말 하지 마세요.” 하면 피고가 하는 말이 “보편적으로 저는 거짓말 안 합니다.” 보편적으로. 일반적으로는 안 합니다. 그런 말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변명하기 위해서 자꾸 그런 말 하거든요.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한 거짓말 심리학이란 책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쓸데없는, 추상적인 말을 자꾸 집어넣게 되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에요.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말이 사실은 거짓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거짓말하는 것을 누가 콕 집어서 이야기하면, “거짓말이잖아?” 라고 한다면 그쪽에서 진짜 본심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꼭 진실을 말해야 돼?” 진작이야기하지. 진작. 이 세상은 진실을 말하지 않기로 이미 묵과적으로 합의를 본 상태에요. 진실을 말하지 않기로, 그저 결과만 말하기로, 과정은 따지지 않기로 이미 확정된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대해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도 말라고 한다면, 여기 이 말씀에서 심판이 결정되거든요.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이 결정내린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십계명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말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와 똑같은 말이에요. 그게 똑같은 말이 되려면 여기에 나온 말이 네 이웃에게 거짓증거하지 말라 라고 할 때, 이웃의 개념을 어디까지 연결시켜야 하면, 이웃 자체가 예수님만이 이웃이 된다는 사실까지 연결시켜줘야 합니다. 내가 골라잡은 이웃, 옆집에 산다고 이웃, 그 이웃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웃에게 거짓말 할 줄도 몰라요. 왜? 거짓말이 입에 달렸으니까. 뭘 새삼스럽게 거짓말해요. 나를 위해서 산다는 자체가 우주의 원리에 위반되는 거짓인데. 그래서 거짓말을 하기, 예수님까지 이르기 전에 그 중에 들러야 할 곳이 두 군데 있어요.
먼저 열왕기상 3장부터 들러볼게요.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솔로몬이 재판하는 과정이 나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받아놓고 이 지혜가 인간에게 얼마나 이해를, 인간의 이성을,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하나님이 주신 일방적인 지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온 사례가 이 솔로몬의 재판입니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창녀 두 사람이 한 집에 사는데, 또 우연히 같은 날 애를 낳았어요. 둘 다 해산해서 3일 동안 있는데, 요 말씀을, 열왕기상 3장 그대로 보게 되면, 한 옆에 있는 애기 엄마, 창녀 한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덮쳐서 아기가 숨이 막혀 죽어버렸습니다. 덮쳐서 죽은 자기 아들은 다른 엄마에게 주고, 생생하게 숨 잘 쉬고 있는 다른 아기를 자기 아기로 바꿔치기 해가지고 딱 해놓은 거예요.
아침에 보니까 옆에 있는 남의 아기가 내 품에서 죽은 거예요. 내 아기를 찾아보니까 옆에 있는 이웃의 창기 품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오!” “주세요!” 했지요. 그러니까 “니 아기 죽여 놓고 왜 내 아기를 달라고 하느냐?” 이거는 누가 봐도 이웃에게 거짓말 한 거예요. 그래서 너무 억울해서 지혜롭다고 소문난 솔로몬 왕에게 가서 판결해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쯤해서 보면 애 죽인 그쪽은 나쁜 쪽이고, 원고, 고소를 한 쪽이 억울한 쪽이라고 누가 봐도 판결 내리겠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게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던 생각이에요.
솔로몬의 재판 과정이 어디까지 계속 밀어붙이느냐 하면 그 억울한 엄마로 하여금 애기를 포기할 지경까지 몰아세웁니다. “니 애기 포기해라.” 이게 재판의 결정문입니다. “둘 다 애기 포기해!” 솔로몬이 들어보니까 서로가 자기 애기라고 우기더라 말이죠. 그래서 솔로몬은 칼 가지고 오라고 해서 애기를 반으로 쪼개겠다고 하는 겁니다. 둘로 쪼개겠다는 그 판결을, 수용자, 그러니까 그 판결을 받고 들었던 그 수용자의 상반되는 두 가지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 재판의 마무리에요. 판결이 마무리가 아니고. 우리가 보통 판결하면 재판이 끝나는데, 판결이 마무리가 아니고 판결을 가지고 양쪽에서 서로 상반되는 반응을 나타낼 때까지 가야 그게 하나님의 지혜로운 판결의 마무리입니다.
근데, 그 판결은 어느 쪽도 승자가 되지 못하도록. 어느 쪽도 승자가 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어느 쪽도 재판 이긴 자가 아니라면 반드시 희생자는, 판결이 그렇게 되면 한쪽이 억울함을 품고 포기를 해야 돼요. 한쪽은 포기의 모습을 드러내고, 한쪽은 포기할 게 없어요. 왜? 자기는 애 하나 새로 건졌으니까 남는 장사 했으니까 포기할 게 없잖아요. 그래서 포기한 쪽을 찾아요. 포기한 쪽이 그 아기의 엄마입니다. 이것은 포기한다는 말은, “나는 잘났는데 저 여자가 내 애 죽였어요.” 라는 말을, “쉿! 그 말하지 마! 하나님의 지혜 앞에 어떤 누구도 나는 마땅히 내 애는 살아있어야 된다는 권리를 주장하지 마!” 이게 바로 십자가 속의 판결을 미리 땡겨서 솔로몬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신명기에서 이웃에게 거짓말하지 말라 할 때, 중요한 것은 거짓말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이웃을 새로 생산해내는 겁니다. 왜 그래야 하냐면 사람은 자기 이웃에게 그다지 큰 억하심정이 없는 한 거짓말 안 하게 되어 있어요. 친하게 지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 나누고 사는 게 중요하거든요. 제가 울산에서 한 강의 내용을 잠깐 예를 들게 되면, 사람 사는 게 하나님 때문에 사는 게 아니고 정 때문에 사는 거거든요. 제가 예를 든 게 뭐냐 하면은 자기 집 근처에 미장원 하나 있는데, 미장원 주인하고 정치 문제 가지고 좀 다투었나 봅니다. 새누리당이 어떻고 새정치민주당이 어떻고 하다가 삐졌다 이 말이죠. 그래서 꼴 보기 싫다 하고 미장원 원장하고 싸우고 난 뒤에, 이제 머리 하러 갈라고 하니까 자기 집에서 15키로 있는 곳에 미장원이 있는 거예요. 괜히 따지다가 자기만 차타고 가느라 휘발유만 손해 본 거예요.
제가 그 이야기를 왜 했느냐 하면 사람이 사는 것이 하나님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고 , 진실, 진리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냥 정 주고 정 받는 게 최고에요. 삼위일체, 예수 필요 없어요. 그저 저 사람 옆에 붙어 있으면 어쨌든 간에 빼먹을 것 빼먹고 이용해먹으면 최고에요. 내 사는 게 전부에요. 편하게 사는 게 전부고 내 행복이 전부에요. 무슨 종교? 거기다가 예수를 왜 찾는데? 십자가 왜 찾는데? 그저 지 몸 편하면 됐지 뭐. 지 몸 편하면 됐잖아요?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 편함, 자기 의, 자기 행복을 포기 못합니다.
그런데 솔로몬 재판에서는 하나님께서 옆에 있는 애기를 그렇게 만들어가지고 과연 포기 안 되는 것, 다시 말해서 나의 행복, 나의 편함, 나의 이익, 나의 의, 나의 잘함, 나는 이렇게 착하다, 그걸 포기한 자만이 천국에 입성할 사람입니다. 그 만이 합격할 사람이에요. 영생 얻을 사람이에요. 자기 의, 자기 편함, 자기 행복을....., 따라설 우리는 포기 못해요. 근데 포기해야 갈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요? 기도하신 말씀처럼 우리에게 수시로 난데없는 사태가 계속 일어납니다. 그 사태가 겨냥하는 것은 뭐냐, “니가 누구 덕으로 사는데? 이만큼 살았는데 뭐 뭐 뭐 뭘 더 해? 이만큼 살았잖아? 뭘 더 원하는데? 뭐 욕심을 부려?”
십자가라는 것은 한번 알고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영원히 나와 함께 있어야 돼요. 그 앞에서, 우리는 영원히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되어야 됩니다. 그럴 때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체제에서 하나의 자리를 점유하는 셈이 돼요. 언약체제, 예수 안이라는 언약체제, 여기서 십계명 안, 신약에 가면 예수 안, 예수 안에서 하나의 점유된, 자리를 점유하고 있으면 그 점유까지 찾아오는 것이 뭐냐,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찾아오시는 거예요. 완전히 매트릭스에요. 모든 게 구조입니다. 녹색 글자가 위에서 막 내려와요. 예수님의 피가 막 내려옵니다. 그걸 십자가 안, 예수 안, 성령 안이라고, 성령 안에 있을 경우에는 우리는 제자리 뛰기 하고 있으면서, 항상 우리는 거기서 주의 피가 왜 필요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냥 나만 챙기고, 나만 잘났다, 나는 남한테 거짓말 한 적 없어, 이런 것만 주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솔로몬에게 재판받으러 온 이 여인에게는 바로 멀쩡한 자기 아들의 죽임을 당해서, 마치 자동적으로 내 애를 내가 가져야 될 권리를, 솔로몬 앞이 아니라 하나님 지혜 앞에 그걸 미리 땡겨서 포기하게 만드는 사태가 일어난 겁니다. “임금님, 제 아기 포기할게요. 저 사람 아이 맞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솔로몬이 하는 말이 “아직 재판 끝나지 않았다. 니가 바로 이 아이의 엄마다.” 우리라는 죄인이 왜 필요하느냐 하면 재판 과정에 들어가서 재판 마지막까지 우리가 필요해요.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하고 마지막 나올 때 재판이 끝나는 거예요. 한쪽은 죄인이라고 하고 한쪽은 십일조하고 안식일 지키고 구제하고 금식했다고 자랑질하는 그러한 순회재판에서, 주님 앞에 순회재판에서 그쪽은 그쪽 자랑하고 지옥이죠. 이쪽은 나는 죄인이라 고개를 못 들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합격점입니다.
진정한 거짓은, 우리가 거짓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웃 쪽에서, 거짓이냐 아니냐는 그 이웃 쪽에서 판결이 나오는데, 그 이웃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이웃이 우리를 판정해 내립니다. “내가 너를 사할 테니까 너는 자유를 얻어라” 이러한 판정을 받게 되면 그것만이 진실이요. 그것만이 진리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들 앞에 진리를 말하지 마세요. 진실을 말하지 마세요. 오직 주님 앞에 늘 이야기하고 사람 앞에서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혹시 여러분, 비자금 때문에 잡혀가거든, 카메라 막 찍거든, “검찰 앞에서 성실히 답변하겠습니다.” 하고 그냥 가세요. “성심 성의껏 답변하겠습니다. 검찰 앞에 다 이야기하겠습니다.” 하고 그냥 가세요. 괜히 거기서 “국민아 들어라!” 이럴 필요 없어요.
남들한테는 진실을 말하지 마세요. 왜? 진실을 개한테 팔아먹어버립니다. 돼지한테 진주를 던지는 거예요. 예수님은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진리가 뭐냐? 하니까 말 안 해줘요. 입 다물어요. 말 안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마세요. 주께서 복음을 전할 때 전하세요.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라고 소리 지르면 잠만 깹니다. 새벽인데 그러지 마세요. 그런 기회가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실 거예요. 어떤 기회? 내가 복음 전하는 것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회를 주실 거예요. 복음 전해서 구원받지 않거든요. 십자가 피로 구원받지. 복음 전하는 것도 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본인이 수긍할 때, 진정한 구원은 주님의 용서지, 나의 선한 행위, 열심 있는 행위가 구원의 바탕이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예가 뭐냐, 여호수아 2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기생 라합이 나와요. 역시 창녀입니다. 하여튼 성경 창녀 아니면 이야기가 안 되는 것 같아요. 여기서 이스라엘 스파이가 여리고 성에 침투하죠. 침투할 때에, 거기는 멸망당하기로 이미 정해진 곳입니다. 쉽게 말해서 여리고 성에는 구원할 이웃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의 놀라운 점은 여리고 성에 살고 있는 기생 라합이 그 정탐꾼한테 복음을 전한다는 사실이에요. 누가 누구한테 복음을 전할 입장인데. 이스라엘 사람이, 여호와와 함께 있어서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그들이 이미 하나님과 복음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은 공격해야 될 저쪽 안에, 공격 대상 안에 복음이 들어 있는 겁니다. 은혜는 누가 받느냐 하면, 정탐꾼, 스파이들이 은혜를 받아요. 희한한 이야기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기생 라합이 자기 동족들한테 거짓말을 했거든요. “성문 문 닫기 전에 도망갔습니다. 빨리 따라가면 성문 문 닫기 전에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찰들한테 이야기했는데 경찰들이 나오고 난 뒤에 성문 닫혔고, 성문이 닫혔다는 말은 다시 이리로 못 온다는 말이고, 경찰관들이 나루터까지 갔어요. 가보니까 없어요. 그러면 범인들, 스파이들은 어디 있느냐, 그 기생 라합의 집 옥상에 숨어 있어요. 숨어 있는 그 스파이한테 찾아가서 하는 말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두 사람이 눕기 전에 기생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냥 올라갔겠습니까? 식혜 좀 만들고, 주무시는데 올라가가지고 하는 말이, 9절에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즐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0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그런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 있는 하나님임을 나는 믿습니다.” 라는 말이 돼요. 근데 정작 본인들은 그걸 안 믿어요. 문제는 본인들은 안 믿는데 기생 라합은 그걸 믿는다는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거짓이냐 아니냐의 판정을 어디서 해야 하느냐 하면, 여리고 성 사람들도 내리면 안 되고, 그리고 여기 이스라엘 사람들도 내리면 안 되고, 누가 내릴 수 있느냐 하면 사람은 내릴 수가 없는 거예요. 이웃에게 거짓말 하지 말라는 이 최종 판정을, 십계명의 판정을 내가 내려서는 안 되고, 나를 반대하는 사람도 내려서는 안 되고, 어떤 인간도 이 판정을 내려서는 안 돼요.
그럼 누가 내리는가? 예수님이 판정을 내리셔버리면 평소에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았던 모든 것이 진실을 말해도 그것은 거짓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없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생존을 위해서 비겁한 변명조로 했던 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진실들을, 말을 많이 합니다. 여기 주유소에 가게 되면 “절대로 우리는 정품입니다.” 라는 말을 하죠. 그런데 왜 정품만을 팝니까? 주의 영광을 위해서? 아닙니다. 정품만을 팔 때, 소문나서 우리 집이 장사 잘 되니까. 장사 잘 되면 뭐? 우리 집 돈 벌겠지. 우리 집 돈 벌면 뭐? 맛있는 거 사먹겠지. 맛있는 거 뭐? 그 중에 소고기 사먹겠지. 그래서 뭐? 죽지. 왜 죽는데? 진실을 말했는데 왜 죽죠?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진실을 말하지 마세요. 해도 안 해도 진실 아니에요. 진실해도 진실 아니고. “아이구, 이거 옷 남는 거 하나도 없습니다.” 이거 진실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일 되면 세일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미리 정보를 알아서 오지. 이제 지난 상품을 남겨놓고 헐값에 판다고.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거고, 정 때문에 하는 거고 행복 때문에 그런 거고, 내 몸 편하게 하는 거, 그거 전부 다 진실 아닙니다. 거짓입니다. 그 거짓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는 기생 라합 같이 성령 받은 사람뿐입니다.
십계명 보면서 예수님 안에서 십계명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진실한 분은 예수님이고, 그 진실이 우리 속에 용서를 함으로써, 우리는 거짓된 사람으로서 구원받는 그런 진실, 죄인도 구원받는다는 진실을 주께서는 우리 몸을 재료로 해서 우주에다가 증거케 하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말씀 안에서 진실 덩어리인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증명된 것을 감사합니다. 주의 앞에서 진실한 것을 가지고 마치 내가 의롭고 진실한 사람처럼 행세한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