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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9강-기적 경험(신4;32-34) 15022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2. 28. 08:20
2015-02-22 14:54:43조회 : 109         
   기적 경험 150222이름 : 이근호  

기적 경험(신명기 4: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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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5-02-22 15:34 
기적 경험 

2015년 2월 22일                     본문 말씀: 신명기 4:32-34 

(4:32)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4: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4:34)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성을 넘어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예 없는 시절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절, 우리가 하나님에게 뭐라 요구할 처지나 입장에 있지 못한 그 시절에 일어난 그 일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가 있게 되었기에 우리가 거꾸로 소급해서 그 상황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여기 있음’을 전제로 해서 모든 의식이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시오. 이미 여기 있는 내가 행복해지고, 내가 사는데 유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힘써 주세요”라고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여 차라리 나를 없애주시는 한이 있더라도 처음 그 계획하신 바가 차질없이 진행되게 해주옵소서”라고 요청하지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생각을 시도하는 출발지점이 하나님과 비교해서 훨씬 후대에 속합니다. 이는 우리 자신이 선택하지도, 만들지도 않는 환경에 태어나서 정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정착 상황 위에서 무엇이 건설되고 구성되든지 상관없이 이 기초에 대해서는 여전히 인간은 무지합니다. 

이 무지성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어떤 대단해 보이는 업적인 달성해도 출발 지점이 하나님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궤멸될 대상일 뿐입니다. 마태복음 7:24-27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기초공략에 집중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이는 인간들이 고대하고 기대하는 대단한 업적 달성을 위해 말씀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기초나 기원, 즉 왜 인간은 생겨나야 하며 어떻게 생기게 되었느냐에 대한 무지는 곧 멸망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왕 생겨난 인간들이 자신의 근원을 찾아가는 것은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 한계란 다름 아닌, 분석방법에 대한 한계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노숙자가 밤에 술을 마시고 자기 집 열쇠를 잃었습니다. 경찰의 협조 하에 열쇠 찾기에 나서는데 어디서 찾는가 하면 가로등 있는 곳에 국한해서 찾게 됩니다. 과연 가로등 밑과 열쇠 잃어버린 장소가 동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들은 가로등 불빛을 비추는 그 자리만 고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찾았다, 아니 찾았다. 덜 찾았다’를 판정내릴 환경이 가로등 불빛이 비취는 그 자리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과학이나 철학이나 신학은 인간 본인의 최종 판정자로 삼는다는 기본 취지를 인정해주는데서 벌리는 시도들입니다. 

이런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서는 아니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언급하십니다. 하나는, ‘불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이렇게 살아남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다’는 것과 또 하나는, ‘숱한 기적이 동원되어 특정 민족에서 강제로 갈라져 나온 민족이 생존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기적이 일어나려면 하나님쪽에서 ‘불 속’이라는 상황과 ‘숱한 기적’이라는 상황이 유발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대목을 보면서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나도 그런 상황이라면 신앙인으로 평가받을텐데 …”라고 말입니다. 

더  아가서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주신다면 나도 그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을텐데…”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생각들이 불신앙적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인간은 자신이 딛고 있는 기초가 어떠하기에 주님께서 그때마다 상황을 변화시키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미리 예상할 상황을 비켜 가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한 기적이 좌절되기 때문입니다. 좌절이 되어야 그들 자신의 문제점을 느끼게 됩니다. 즉 세상은 내가 기대한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유발시킨 모든 일은 다 말씀에 준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기초를 밝혀 보이는 일과 상관없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는 그 토착민들이 믿던 신들을 서슴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왜 이스라엘 민족들인 이방민족들의 신들을 그토록 선호했을까요? 그들은 그들의 심성이 부합되는 기적들을 경품으로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신을 우리 식대로 믿으시면 당신네들이 고대하는 이런저런 기적들을 획득할 수가 있습니다.”는 식으로 이방종교들은 운영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내심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참된 신의 세계처럼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예상한 대로 기적이 일어나주어야 자신들이 참된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확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말처럼 뭔가 살려고 발바둥치고 날개짓으로 파닥거리면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추락하고 있다는 말이요 실패하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기초 바꾸기입니다. 인간들의 애씀과 성과를 받쳐주고 인정해주는 그런 기초를 일체 허용하지 않고, 인간의 모든 ‘있음’을 추락시켜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못하는 하는 기초로 바꿔주시려는 겁니다. 

하나님의 참된 기적이란 어서 심판날이 찾아와서 비로소 세상이 사람의 뜻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창세전의 계획대로 진행되어 왔음이 드러나는 겁니다. 기초쪽으로 흡수, 통합되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바국 3:17-18에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심판날이 왔음이, 그대로 나의 모든 것이 다 날아가버리는 날이 왔음에도 기뻐하고 즐거운 것은 창세 전의 기초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만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에 참여시킨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일보다 아예 그리스도만 느껴지는 일만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5-02-23 21:39 
19강-신 4장 32-34(기적 경험)1502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4장 32-34절입니다. 구약성경 268페이지입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기적 자체를 논할 수 있는 입장이 되려면 우리가 없는 자리에 가야 돼요. 우리가 이미 생기고 난 뒤에 기적을 논하려면 거기서 뭐가 빠지느냐 하면 우리가 자신이 여기 생겼다는 사실마저 이게 빠지게 되는 겁니다. 없는데서 있는 것 기적에 포함을 시켜줘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 산다는 것 마저 기적이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기적을 내가 여기 있다는 것으로 보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걸 자꾸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창세기 3장에 보면 우리가 힘들게 살다가, 고통 중에 살다가 허무하게 흙이 되어 가는 이것도 기적입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없는데서 생겨난 입장에서는 이러쿵저러쿵 거기다가 시비 걸 수 있는 처지가 못돼요. 우리가 그런 입장이 못 됩니다. 왜 나를 힘들게 합니까? 라고 따질 처지가 안 된다니까요. 이 말은 우리가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고, 우리가 만들지도 않는 그런 환경 속에 이미 태어나서 우리가 정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지도 않고 우리가 선택하지도 않은 환경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딱 그거밖에 없어요. 누가 만들었습니까? 왜 만들었습니까? 연속적인 질문과 그 답변을 찾는 그러한 인생이 돼야 됩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그냥 진공 속에 통과하는 것이 아니고, 고 자리에 있는 것이 다 의미 있거든요. 그럼 왜 나는 이 자리에 있어야 되고, 저 사람은 저 자리에 있어야 되는가. 왜 서로가 만나야 되고, 헤어져야 되고, 울어야 되고, 웃어야 되고, 그 모든 해답은 성경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일어난 일을 마치 장기판에 장기알처럼, ‘졸(卒)’처럼 이렇게 움직였다가 저렇게 움직이고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움직임의 그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움직이고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러한 본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그거는 그 바탕에 있어요. 자리에 있습니다. 이 자리가 굉장히 중요한데요. 그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마태복음 7장에 산상설교 끝나는 그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우리한테 이야기해줬습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고, 25절에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그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돼있어요. 근데 우리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이렇습니다. 비가 안 내리고, 창수가 안 나고 바람이 안 불면되잖아? 이래 나와요. 

항상 자기의 자리는 숨기고 싶고. 뭐 그럴싸해 보이는, 자기가 평생 애썼던 것은 자랑질 하고 싶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뭘 나타내고 싶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가 감추어 두고 싶은 대목을 들추어냅니다. 그걸 집중해서 노리면서 공격해오죠. 26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그 집을 모래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고 돼있어요. 

이게 조건이 뭐냐 하면, "내 말을 듣고", "내 말을 듣지 않고"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기초다지기’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기대하는, 뭐, 근사해보이고, 멋있어 보이는, 이것 말고 우리가 있었던 자리의 기초를 바꿔치기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근사한 인생이 기적이 아니고, 내 기초가 바뀌는 걸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려야 되겠죠. 

사람들이 교회 와서 자랑질 하고 그리고 내세우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기초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근사해 보이는 그 모습과 화려해 보이는 그런 멋있는 인생, 그런데다 집중 치중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또 나름대로 애쓰고 그렇게 하죠. 그런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이미 내가 있고 난 뒤에, 있는 내가 얼마나 멋있는가에 관한 문제지, 내가 어디서부터 없는데서 내가 있느냐 그 문제에서는 거기서 누락이 되어 있고 빠져있어요. 물론 생각하게 되면 그러한 기초가 뭐가 중요하겠느냐. 빠져도 그만이지. 라고 하겠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노리는 것은 기초를 집중해서 그걸 응시를 하면서 일하기 때문에 기초가 든든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거기에다 화려하고 멋있는 인생을 세워도 그거는 무너짐이 아무 심하게 무너진다는 거예요.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해서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좌절과 실망감이 더 크도록 그 사람한테는 그러한 합당한 조치가 내려지는 겁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 불났잖아요. 근데 그 시간에 서울에 빌라도 불났거든요. 서울에 빌라에 불난 거는 아무 관심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바이 세계 최고층에서 불난 거는 그렇게 이슈가 되지요. 왜, 그 무너짐은, 160층이 무너지게 되면, 아, 그 무너짐이 대단할 건데요. 아마 소리 크게 날 겁니다. 와장창 무너질 거예요. 그러나 빌라 2층 무너져봐야 사람들 관심도 없잖아요. 높아질수록 위험해요. 높을수록 위험합니다. 일반 보통 사람은 늙은 자기 아내 죽으면 신문에, 방송에 안 나와요. 근데 김종필 마누라 죽은 것은 나오잖아요. 그만큼 사람이 높아진 거예요. 살만큼 살았어요. 팔십여섯살. 뭐 박정희 대통령의 뭐가 어떻고, 유명인사 부인이 죽을 때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유명해지는 겁니다. 

우리가 멸망당할 때까지 유명해질 필요가 있을까요? 멸망당할 때까지 유명하다는 말은 그만큼, 얼마나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살았느냐는 겁니다. 차라리 납작 엎드려 살았으면 무너져도 누가 무너졌다는 소리 안 할 건데. 항상 기초를 크게 보고, 내가 평생 쌓아온 것은, 그런 것은 중요치 않고 기초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 그런 사람에게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기적의 연속인 것을 비로소 온 몸으로 실감하게 될 겁니다. 

바람이 불어 아슬아슬한, 그러한 멋있는 것 붙들려고 하지 말고. 아무리 바람 불고 창수가 난다 할지라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데서 오는 안도감과 든든함.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자신감이거든요. 괜히 세상 것 가지고 자꾸 추구를 하게 되면 본인이 공포와 불안감을, 본인이 자꾸 불러 세워요. 집나간 일곱 귀신을 다 불러요. 일곱 귀신만 오면 괜찮게요. 7x7=49, 49귀신 다 불러들인다니까요. 왜, 안 믿는 사람들이 조상 제사 왜 드립니까? 그거 안 드리면 불안하기 때문에. 근데 조상 제사 드리면 조상 제사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이왕이면 잘 드려야 되고. 이왕이면 묘지 잘 써야 되고. 점을 한번 보게 되면 점을 또 봐야 돼요. 그 점을 피할 수 있는 점. 그 굿을 피할 수 있는 굿. 이거 뭐 맨날 점 보러 다니고. 맨날 굿하러 다니고. 그거는 스스로 자기 인생을 망치는 겁니다. 아예 눈에 보이는 기적은 기적이라고 취급하지 말고, 기적을 찾지 마시고 있는 기적이라도 충분하게 행복하게 평생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32절에 “네가 있기 전에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니가 있기 전에. 

그러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여기 있고 내 잘되기 위해서 말씀 이해하게 되면 그거는 해석이 안 들어갑니다. 해석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튕겨 나와 버립니다. “내가 없다면 주여, 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해석해야죠. 내가 여기 없다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어떻게 일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있기 전에는 예수님하고 일하셨죠. 예수님하고. 그렇다면 그 다음에 나를 거기다 갖다놓으면, 나는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성경해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말은 참 쉬운데, 교회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하나님이여, 우리 교회 참 어렵습니다. 어느 성경말씀 같으면 빨리 이 문제에서 벗어나서 이 상황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벌써 묻는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예배당 크게 지어놨습니다. 근데 사람들은 불황이 되어서 전부다 교회 안 나오고 돈 벌러 다닙니다. 이 예배당 크게 지었는데 사람이 텅텅 비었습니다. 어찌할까요?” 벌써 묻는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의 응답이 있다면 이럴 거예요. “그 예배당 팔아먹어라” 이게 응답이거든요. 

그러면 “제가 목사 일을 못합니다.” 그 다음에 응답은 간단해요. “목사를 안 하면 되지.” 세상에 이렇게 쉬운 정답이 어딨어요. 안 하면 되는데. 안 하면 되잖아요. “안 하면 못사는데요.” “죽으면 된다.” 왜 진작 그걸 몰랐을까. 죽으면 되는 사실을 가지고. “그럼 내가 없어지는데요.” “없어져라.” 그게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원했던 자리거든요. 사람들이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그냥 빈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이적이나 캐낼까 싶어서, 어떤 놀라운 행운이나 얻을까 싶어서 성경을 보는 겁니다. 

이런 해석이 논리적으로 잘못되었어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봅시다. 어떤 노숙자가 술 먹고 비틀거리다가 자기 집 열쇠를 잃어버렸어요. 열쇠를 잃어버렸을 때, 술 먹었기 때문에 열쇠를 어디에다 잃어버렸는지 몰라요. 근데 사람들은 경찰하고 동원해서 열쇠를 찾는데 어디서 찾느냐. 가로등 밑에서 찾아요. 가로등 밑에서. 참 이상하죠. 열쇠는 가로등 밑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찾는 것은 가로등 밑에서 찾아요. 이 말은 사람들은 진리를 찾는 그 방법으로, 방법의 조명불 아래에서만 찾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뭔가 진리를 찾고 신을 찾을 때, 찾는 동원된 방법이, 과학도 마찬가지고, 양자역학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관찰될 수 있고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그 방법을 가지고 찾지요. 그러면 가로등 밑에서 열쇠 백날 찾아야 열쇠 있습니까? 없습니까? 열쇠 잃어버릴 때, ‘자, 한번 열쇠 잃어버려야지. 어디서 잃어버릴까? 찾을 때 쉬운 데로 해야지. 어? 가로등 있네? 가로등 밑에서 열쇠 잃어버려야지.’ 이렇게 잃어버린 사람 봤습니까? 그거는 열쇠를 거기다가 던져놓는 것이지 잃어버린 것이 아니잖아요. 

사람은 내가 왜 사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요. 모르는데 기껏 찾는 방법이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가로등이라는 불빛이 있는 범위 내에서 찾는 거예요. 이거는 과학뿐만 아니고 신학도 마찬가지고 철학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찾는다는 것이, 이것은 내가 찾아봐야 다 엉터리다는 것을 각오하고 찾아야 돼요. 내가 백날 찾아봐야 다 엉터리다. 제가 오늘 낮에 민수기 25장이야기 했지요? 해봤자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는데. 민수기 25장에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모압 여인들이, 자기들 축제, 신전을 섬기는 그 모압 여인들이 유혹했을 때, 왜 이스라엘 남성들이 거기에 말려들어갔느냐 해놓고 제가 답변을 내렸습니다.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했지요? 

왜냐하면 남자치고 여자한테 안 넘어가는 남자 없으니까 그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에 가서, 여인들이 마음을 휘잡아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그들의 신이 있어요. 자, 이게 중요한 거거든요. 왜 그 뒤에 이스라엘 역사 내내, 이스라엘 역사 내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를 했는가. 그 이유가 성경 아무리 봐도 그게 밝혀지지 않아요. 우리 같으면 여호와를 버리지 않을 건데, 왜 그들은 여호와, 여호와라고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왜 그렇게 이방신에게 휘돌릴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요, 신이라는 개념자체가 인간들이, 자기가 가로등 밑에서 찾을 수 있는 신의 세계를 그들은 신의 세계라고 확정지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적으로 어떻게 행복하고, 희열이 넘치고, 즐겁기 그지없고, 행복하기 그지없을 때, 그들은 신이 주신 축복이라고 단정을 지어버린 거예요. 근데 오늘 본문 봅시다. 본문에 보게 되면 33절에 봅시다.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이래 되죠. 불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생존한 민족이 있느냐 라고 묻는 거예요. 지금 니가 살아난 게, 불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고 하나님께서 언급을 하시는 거예요. 

근데 이 말을 딱 들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그러면 그런 기적이 계속되려면 주위에서 계속해서 뭐가 나와야 됩니까? 계속해서 불이 나와야 되잖아요? 다니엘 세 친구 같은 경우에는 불에 들어갔는데 살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듣고 그걸 본 사람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나도 넣어줘. 넣어줘.” 나도 불 가운데 들어갔다가 몸이 안 타고 건강하게 나온다면 나도 신앙인 중에 포함이 되는 이 기쁨을 누리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를 불 가운데 넣는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북한에 갔는데, 예수쟁이입니다. 그렇다면 갑자기 북한의 보위부한테 알려가지고, 용광로에다 불 해놓고, 여기 남한에서 넘어온 예수쟁이가 있는데, 다니엘서에서 보니까 안 탄다더라. 이 자를 집어넣어라. 막 집어넣고, 카메라 돌아가고 있고, 그런 일을 여러분 한번 해봤으면 어떻습니까? 아니 해보고 싶어요? 어데에~~안 그러면 두 손으로 X해서 안 하고 싶다고 표시하고. 아예 그런 상황을 안 하고 싶죠. 그런 상황은. 하나님께서 불도 주지 않고 그런 말씀 주는 것은 공평치 못합니다 라고 지금 항의하고 싶은 겁니다. 불 가운데서 살아난 민족이 있었느냐. 없었잖아. 그만큼 너희들이 기적 받았다고 하나님 쪽에서 하니까 “에이, 우리도 옛날에 불 가운데서 있었으면 우리도 칭찬받았을 텐데.” 이런 생각하는 것이 우리다 이 말이죠. 

그럼 그 다음에 34절 봅시다.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했어요. 있느냐, 라는 말은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다른 민족의 그러한 강대한 가운데서 너희들은 내가 지켜서 살아났잖아. 이게 바로 기적이야. 라고 하나님 쪽에서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전에는 불가지고 이야기하더니 지금은 뭐 애굽 군대가지고 이야기하고.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는 불만이에요. 우리도 지금이라도 북한이 쳐들어오고, 러시아하고 중국 쳐들어와도 하나님이 지켜주셔 가지고 대한민국이 산다면 우리도 신앙인 맞다고 만세 부르면서 노래하고 누리겠습니다. 또 이래 나오네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기적이 그때그때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홍해를 건너온 사람 중에서, 홍해를 건너온 사람이 요단강 앞에서 백날 지켜봐도 요단강 물은 꿈쩍도 안 해요. 요단강에서의 기적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이 한복판에 들어가야 비로소 강물이 그치는 거예요. 그걸 알았다고 해서 한강에 가가지고, 낙동강이나, 금오강에 가가지고 백날 상자 메고 있어봐야 물 안 갈라집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물 안 갈라져요. 일본의 어떤 사기꾼은 무대에다가 욕조를 만들어가지고 종이를 덮어가지고 “자 물위를 걷습니다. 차력사가 종이 위를 걸었어요. 사람들은 우와!!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때그때마다 기적이 달라요. 제가 분명히 정답내리겠습니다. 기적이란 나의 기초가 보이는 것이 기적입니다. 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금 있게 하고, 살게 하고, 이 지경으로 이 인생을 몰아세우는 그 원천을 새롭게 발견할 때 그게 기적입니다. 이제 다 무너져도 괜찮아요. 다 없어져도 괜찮아요. 하지만 그 기초위에 포함이 된다면 그것처럼 든든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기적이라고 할 때 우리가 기대하는 기적은 자꾸 비켜나갑니다. 우리가 뭘 원하고, 뭘 기대하는지 자꾸 비켜나가요. 비켜나가면서 우리의 기초되신 그리스도와 만나게 하시는 겁니다. 

제가 어려운 말 하는 게 아닙니다. 쉬운 말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어요. 만나서, 니 몸이 우물이 되고 생수가 넘친다는 기적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신났죠. 아! 이제는 물 길러 오지 않고 계속 욱하면 생수 나오고, 욱하면 뭐, 삼다수 생수가 목에서 막 나오니까 얼마나 신나겠어요. 그런데 갑자기, 니가 남자 다섯명 사귀었고 지금 여섯 번째다. 이런 이야기 할 때, 뭔가 내가 기대하는 그 우물이 아니고, 주님께서 오히려 나를 기초 삼으려고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죄인인 나를. 주의 기초 만들기에 필요한 재료로 나를 가져가는 겁니다. 주께서 기적을 이야기합니다.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이게 바로 기적입니다. 

그러니까 기적이 어떤 상황이냐 하는, 상황이나 묘사나 그 상황은 우리 속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준비해놨다가 준비한 그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덮어씌워버립니다. 우리한테 덮어씌워버려요. 애가 학교에서 만든 고깔모자를 가지고 집에 왔다가, 피곤해가지고 지금 퇴근하고 온 아버지한테 갑자기 씌워놓고 우와!!하고 갑자기 지 혼자 좋다고 박수치는 거예요. “아빠! 진짜 귀엽다!” 이래 나온 거예요. 이거는 아버지 의사가 아니에요. 지가 고깔모자 만들어 놓고, 지가 아버지한테 씌워놓고, 지는 자기 미술시간의 계속 연장으로 즐거워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기적입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마태복음 17장 20절에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할 때에 여기서 기적을 찾아보라고 하면, 산을 옮기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못할 것이 없다는, 그게 기적입니다. 못할 것이 없다는 그 고깔모자를 주께서는 우리에게 집어 씌워버립니다. 씌워버리면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께서 생각해 놓은, 주님의 너를 사용하시는 고유의 기능이나 역할은 반드시 성공해내고야 만다는 것. 그걸 우리가 돌아서서 알 때, 우리는 주의 기적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박국 3장 1절과 2절에 보게 되면 교회들이 오해하는 대목이 나와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부흥이라는 말이 유일하게 나와요. 그래서 출판사도 부흥출판사가 있어요. 몇 년 내에?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부흥이 뭐냐, 이 부흥케 한다는 말이 뭐냐 하면, “주여, 약속대로 심판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출판사를 부흥출판사라고 하지 말고 심판출판사라고 해야 돼요. 그게 거기에 뜻이 맞아요. 교회고, 집이고, 뭐고, 다 심판하시옵소서. 이렇게 하박국 선지자는 기도합니다. 누구 좋아라고? 뒤에 나와요. 

17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우리는 오직 구원의 하나님만 좋아지도록 그렇게 조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그런 고깔모자를 씌워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이 나의 유일한 행복과 즐거움이 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갖도록 주께서 고깔모자를, 말씀의 모자를 씌워주시옵소서. 이게 바로 주께 주신 말씀대로의 기적입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지금 곧 죽어도 행복하기만 한 내 마음. 비행기 사고 나가지고 비행기 추락해도 감사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그 마음. 

지금 우리 추락하는데 날개가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열심히 살아보려고 파닥파닥 거리며 날개 짓 하는 것, 지금 중력에 의해서 추락중입니다. 그럼 추락하면 뭘 만나는가. 반석을 만나게 돼있어요. 따라서 저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이제는 추락하지 말고 반석에서 날마다 떠오르시기 바랍니다. 떠오른다. 떠오른다. 반석에서. 십자가에서 다시 기어 나오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죽었는데 눈 떠보니까 또 하루를 살았네. ‘이게 웬 하루지?’ 또 다시 날개 치면서, ‘아! 행복하게 살라고, 주님께 감사하라고 또 하루를 살게 하시는구나!’ 하고 씻고 직장에 나가시고 일터에 나가시기 바랍니다. 

상가 세놓은 사람은 지갑 들고 ‘상가세’, 따박따박 받으시기 바랍니다. 떼어먹어도 고마운데 돈을 주는 고마움을 만끽하면서. 그런 기쁨으로 머리 자를 때는 미장원에 가셔가지고 확 잘라도 되는데 이쁘게 해주는 고마움을 누리시고. 아무 소식이 없는 자식이 오히려 고맙고. 감사하고. 명절 날 “안 오냐?” 하지 마시고. “오든 안 오든 니 맘대로 해라.” 그런 정말, 이 마음을 품으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마음을 품는, 그런 기적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말씀이 우리에게 기적의 행복을 주시고자 하는, 복을 주시고자 하는 주의 조치를 우리는 까먹고 있었습니다. 기억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주신 은혜와 기적과, 우리가 아는 기적과 너무나 이른 차이가 나기에 이제는 주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 일하고, 움직이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