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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7강-소멸하시는 하나님(신4;22-24) 1502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2. 17. 08:23
2015-02-08 15:01:44조회 : 131         
   소멸하시는 하나님150208이름 : 이근호  

소멸하시는 하나님(신명기 4: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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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5-02-08 15:40 
소멸하시는 불 

2015년 2월 8일                           본문 말씀: 신명기 4:22-24 

(4:22) 나는 이 땅에서 죽고 요단을 건너지 못하려니와 너희는 건너가서 그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니 

(4:23)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약속의 땅이 되지 않고 광야라는 중간 갭을 하나님께서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이라는 곳, ‘천국’이라는 곳이 자기위해서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이 ‘나를 위해서’라는 의도를 가질 때,  ‘내가 만들 수 있다’를 전제로 한 의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만들지 말라. 너를 위하여’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24절의 말씀과 대립적으로 짝을 이룹니다. “이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만들어놓은 것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잘 만들었네” 혹은 “못 만들었다”가 아니라 그 의도 자체를 문제 삼으신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신을 생각하면서 형상화해서 만들 생각으로 마음이 들썩 거린다는 겁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인간들의 그런 의도를 소멸해서 부정하고 배격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매번 어떤 식이라고 행동에 나서야하고, 참된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들의 시도를 매번 밀치시고 부정하시는 분으로만 나타내신다는 겁니다. 

인간들의 신을 대하면서 어떤 식으로 형상화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자기 존재를 우선시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를 감안한 신을 섬기려고 하니 그 신의 형상화 작업에 어떤 식으로도 자신 위주가 끼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오자마자 약속의 땅에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거치게 하신 이유는, 그런데 자기 중심성을 허락하는 곳이  결코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약속의 땅이 사람 좋아라 는 곳이 아니라 무슨 세계란 말입니까? 바로 광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개입시키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천국은 사람 중심이 아니라 언약 중심입니다. 약속을 위하여 사람이 있지, 결코 사람을 위하여 약속이 있는 게 아닙니다. 

약속의 땅에 모세와 및 이스라엘 사람들이 못 들어가는 것은, 그 ‘못들어감’을 통해 언약의 내막을 보여주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약속의 땅에 들어갔어도 그 약속의 땅에서 고요하게 살 수 없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멸망당하게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소멸하시는 불이요 질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불’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불’로서 이해하게 되면 이 또한 형상화될 게 뻔합니다. 하지만 막상 오신 하나님의 형상은 불이 아니라 그냥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구약 내내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과 질투성’이 내내 언약 안에 포함된 채 유지되고 왔습니다. 

소멸하는 불은,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에서 매일같이 활활 타 올랐습니다. 성전 안에 있는 번제단을 말합니다. 거기서 심판의 불이 피어납니다. 언약은 이처럼 우리 존재 중심이 아니라 심판 중심입니다. 그 심판성이 언약 속에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은 심판받아도 마땅하다”것을 말씀해주시는 것이 곧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제사마저 형상화해서 그 제사를 통해서 신에게 나아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정도로 인간의 형상화는 지독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대처하십니다. 질투란 ‘밀치시는’ 겁니다. 배격하고 부정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모든 형식화된 제사에 대해서 자신의 죽음으로 부정하십니다. 

마태복음 26:26-27에 보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 교회를 통해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마저 형상화되고 말랐습니다. 예수님을 존재로 바라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건으로 일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존재성에 입각한 형상화와 싸우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주면 그것을 가지고 반복하므로서 거기서 구축된 그 형상화를 스스로 부정할 줄을 모릅니다. 

제사의 규칙과 제사 그릇에 대해 성스러움과 거기에 대한 벌칙 조항들 같은 것을 경건스럽게 유지하므로서 자동적으로 하나님과의 접선을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 내내 투입되는 사건들은 인간들의 우상숭배적 형상화를 계속 끄집어내어 줍니다. 급기야는 그런 의식이 메시야를 살해하는 동기로 작업입니다. 

그 근거가 바로 ‘성전 고수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형당해야만 한 이유는 ‘성전 모독’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멸과 질투가 언약의 기본 성격인 것을 알지를 못한 겁니다. 형상화된 거룩과 경건스러움을 그들을 포기할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언약의 반복성이 제사의 반복 속에서 ‘불과 제물’과의 만남으로 성사되는 이유를 그들을 몰랐습니다. 

이 점은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꼭 죽으셔야 하는 이유는 그들은 구약을 통해서 연결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양 죽음 속에서 ‘인간이 그 양을 손수 잡는다’는 형상화를 자진해서 철회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는 행동을 자신이 스스로 더러운 것으로 부정할 수 있는 안목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질투란 사랑의 극치입니다. 죄에 비해서 너무 많은 용서를 투입시키기 됩니다. 용서의 많음을 위해서 인간들에게 지속적으로 죄를 지적하는 법들이 뛰어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언약을 알려주는 사건들이 됩니다. 예수님의 새언약은, 번제단 위에 올려지는 어린양의 죽음을 내용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묘사된 형상은 인간의 손으로 반복가능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에 근거한 반복적 사건으로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죽으셨다는 은 모든 형상화는 무의미한 것으로,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발현된 것으로 확정지어지게 됩니다. 형상화를 따로 신과 접선하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는 다 헛것으로 확정나게 됩니다. 

이제는 심판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만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심판을 이길 위인은 없습니다. 그 심판을 이기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예수님의 형상을 입은 자들이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만 ‘용서’라는 이름으로 심판을 이기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숱한 죄를 고발하는 법이 있음으로서 도리어 우리의 우상숭배적 경향이 폭로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5-02-12 20:50 
17강-신 4장 22-24(소멸하시는 하나님)1502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4장 22-24절입니다. 구약성경 267페이지입니다. 

“나는 이 땅에서 죽고 요단을 건너지 못하려니와 너희는 건너가서 그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땅이 우선인지, 아니면 언약이 우선인지 여기 같이 나오니까 우리로서는 어느 것이 우선이 되는지가 잘 분간이 되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중요합니까? 우리가 살 약속의 땅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약속의 땅은 있다. 하지만 언약 미워하면 못 들어간다.” 이 두 가지의 말을 겹쳐보면 이렇습니다. 그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의 완성 상태로 있다고 하면 앞뒤가 다 결합이 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설교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천국이라는 것, 그곳은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가로막혀 있고, 그리고 그 언약이 완성된 상태가 천국이라면 그 언약은, 그걸 우리가 해내지 못하면 땡! 탈락이 되는 겁니다. 

이걸 봐서 약속이 땅이 우선입니까? 아니면 언약이 우선입니까? 하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고, 제대로 질문하려면 하나님 제가 우선입니까? 약속이 우선입니까? 라고 이런 질문을 해야 올바른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은 약속 중심입니다. 지옥에 간 사람들 생각해보세요.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살던 부자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부자를 생각했다면 절대로 지옥을 만들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부자를 기어이 지옥에 보내야 될 이유가 하나님의 약속이 약속대로 진척된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 속에 지옥이 있다면 있어야 되고, 그걸 채워야 될 사람이 있어야 되면 있어야 됩니다. 에서를 미워해야 한다면 에서는 태어나야 되고, 미움 받아야 되고, 천국이 있다면 야곱은 사랑받아야 되는 겁니다. 이런 것이 전부다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근데,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일이 잘못되어 꼬여있거든요. 꼬여있다 보니까 하나님의 약속 중심이 아니고 내 중심이 돼버렸어요. 내 중심이 되어 있으니까 우리 나름대로의 뭘 끄집어내야 하냐면 약속을 끄집어내야 되고. 내 중심이 되어 우리는 계속해서 약속을 끄집어내야 되는데, 그 끄집어낸 나의 약속은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내가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나만 잘되면 좋다, 좋다는 식으로 하나님과 흥정에 나서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만 잘되면 되기 때문에 내가 우선이 되잖아요. 내가 우선이 된다면 언약이라는 것이 아무리 하나님 언약, 약속, 약속해도 우리는 그걸 전부다 잘못되게 해석을 해버립니다. 다 나좋아라고 있는 언약이고, 십자가 다 나 좋아라고 있는 십자가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돌아가는 거라고 이렇게 곡해를 해버립니다. 

그것이,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끄집어내죠. 끄집어내자마자 바로 약속의 땅에 가는 것이 아니고 광야라는 텀을 줍니다. 그러니까 아까 봤던 22절 말씀, 21절도 마찬가지고요. 여기 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로 인하여 내게 진노하사 나로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요단을 건너지 못하게 하시고 진노한다는 그런 이야기,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내 중심이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내 중심이 아니다 이 말이죠. 내 중심이 아닌데 우리는 입만 열면, 기도했다 하면, 그 내용이 전부다 내 중심으로 돌변해버리죠. 그렇다고 기도 안 하려고하니까 너무 답답하고. 뭔가 그저 빌어야 되고 해야 되니까. 점치듯이, 사주팔자 보듯이 그냥 답답해서 빌어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박수를 치면서 “그래, 이제야 니 본색을 드러내는구먼. 기다렸다.” 이래 되는 겁니다. “드디어 니 본색임을 니가 숨길 수 없구나!” 이래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좋아요. 말씀이 우리의 인생을 수정해 가시는 것이라고 본다면 제일 좋습니다. 아까 기도하실 때도 그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기뻤습니다만. 말씀이 날마다 우리 자신을 수정해갑니다. 수정해 가는데, 그 수정하는 원칙이 이래요. 어떤 누구도 부르심보다 앞설 수는 없다는 겁니다. 주께서 부르시는 그 내용보다 본인이 앞설 수는 없어요. 불러주심을 뒤처지는 우리가 수정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나서는 것과 주께서 이미 부르심의 내용이 있는데요. 그 내용과 우리가 나서서 하는 것과 주인공이 되는 것과 이게 격차가 있으니까. 그 격차를 좁히고 줄이는 방향으로 말씀으로 수정해나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수정해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침에 이야기했지만,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은 확인용입니다. ‘내가 이렇게 까였구나!’ 이렇게 수정해가는 거예요. ‘아, 전에는 내가 말씀보다 저 멀리 있었는데, 다시 주님께서 개입하셨구나. 개입하셔가지고 이렇게 차이를 좁혀주시는구나!’ 차이를 좁혀주시는데, 그 원리가 뭐냐, 내 중심이 아니고 세상은 이미 부르심의 중심이라는 것. 불러줄 때는 언약의 완성 나라에 가야되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간다고 생각을 못하게 만들고, 언약에 이끌려서 간다는 고걸로 수정해가는, 마음 자체가 그렇게 수정해가도록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내가 아니고 언약이다.” 이 말입니다. 참 목사 입장에서는, 설교자 입장에서는 이래요. 온 교인들이, 모든 사람들이, 언약! 언약! 언약! 언약을 가르쳐주세요. 뭐 이렇게 데모가 나오면, 뭐 그런 데모나 촛불집회해도 기분이 좋아요. 세월호 가지고 촛불집회하고 이러니까 이상해. 언약가지고, 언약을 알려주세요! 이런 것 가지고 시위하고 데모했으면 좋겠어요. 

이번 여름수련회 할 때, 사사기 할 텐데요. 제가 사사기를 보고 있습니다. 보면서, 꼭 아쉬울 때 찾아요. 아쉬울 때. 아쉬울 때 찾아본들 자기중심은 안 바뀝니다. 다만 아쉽지. 내 중심으로 살았는데 이게 불편하니까 하나님한테 요청하는 것이지 내 중심을 양보하거나 포기하려는 그런 마음은 전혀 없어요. 사사기에. 그러니까 또 터지고, 또 터지고, 계속해서 터지는 겁니다. 오늘 언약 내용을 말씀드릴 텐데요, 그 전에 먼저 언약 중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이 말씀을 드린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 중심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언약 중심으로 이루어진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우리가 어떻게 간파할 수 있느냐. 어떻게 감 잡을 수 있느냐. 그 문제죠. 하나님은 지금도 언약 중심으로 활동하는데 우리가 감이 없어가지고, 촉이 없어서, 전혀 이게 언약이야? 뭐야? 왜 세상이 이상해야 돼? 그렇게 되거든요. 

어제 잠이 오는 걸 참아가면서요. 내일 설교해야 하기 때문에 일찍 자야하는데, 우연히 평소에 tv 잘 안 보는데, 보다보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해가지고 전쟁 일어난다고 이야기하고. 억지로 보고 있는데, 천안에서 메시지 보내가지고 “목사님 종교행각 뜹니다. 한번 보세요.” 열 한 시 넘었는데 메시지 보내가지고. 제가 거기서 도대체 이 사람들이 왜 전쟁이 일어난다는 그런 풍문을 듣고 직장 다 때려치우고 보따리 싸서 태국으로 속아 넘어갔는지. 도대체 무엇에 의해서, 왜 속는지, 그 속는 게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잠을 좇아가면서 끝까지 봤어요. 왜 속는지. 뭣 땜에 속는지. 그래 가지고 태국에 있는 여자 선교사를 sbs에서 취재하러 찾아 간 거예요. 가가지고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12월에 전쟁 일어난다고 했는데 전쟁이 안 일어났잖아요? 라고 기자가 물으니까 전쟁이 벌써 일어났다는 거예요. 억지도 그런 억지를. 무슨 전쟁? 의정부 아파트에 불났다고. 하여튼 이단들이요. 보이지 않는 전쟁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 보이지 않는 전쟁, 예수님 오실 때부터 계속되었어요. 

전부다 돈입니다. 돈. 뭐 간단합니다. 그거 전부다 돈이에요. 돈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에이 그거였어.’ 실망하고 tv 확 꺼버리고 잤는데, 결국 전쟁이 안 일어난 것을 아니까 돈은 챙겨야 되겠고 핑계는 대야 되겠고 “봐라 사고 일어났잖아.” 사고 일어난 것을 전쟁이라고 왜곡시키는 겁니다. 그 심성이 여전히 우리 속에도 있어요. 우리 속에 있습니다. 저는 교회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여전도사 같은, 그런 여선교사 같은, 그런 교주 후보감들이 한 둘이 아닌 걸 알아요. 남자만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배운 가락이 그 가락밖에 없어요. 속여가지고 빼먹는 재미가 그게 괜찮은 재미거든요. 그거밖에 할 줄 모르니까. 이렇게 보시면 딱 돼요. 두 종류니까. 나의 존재로부터 출발할거냐. 아니면 주님의 심판부터 출발할거냐. 요거에요. 딱 요겁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에요. 딱 요겁니다. 

모든 걸 내 존재로부터, 내 존재 지키기 위해서 신이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하는 세상에서 나는 뭐냐? 그걸 하든지. 출발점이 주님의 심판부터 출발하게 되면 ‘나는 왜 구원받았지?’ 이렇게 되고. 나부터 출발하게 되면 “하나님이여, 뭘 하면 날 도와주시겠습니까?” 이래 되고. 한쪽은 심판부터 출발하게 되면 이단이 아닌데, 꼭 나의 존재부터 출발하게 되면 모든 게 이단이 돼요. 그러고 보면 한국교회 전체가 이단이에요. 왜? 자기 존재부터 시작하니까. 그렇게 해서 사람 끌어 모았으니까. “이렇게 하시면 여러분 존재가 활짝 펴집니다.” 딱 고거 하나, 그 소리 듣고 싶어서 교회 왔고, 완전히 장악 됐고, 꼼짝달싹 못하게 됐고, 완전히 시킨 대로 다 해야 되고, 다 바치고, 다 한 거죠. 

그렇다면 언약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언약 속에는, 간단하죠. 하나님의 심판이 들어있습니다. “그 심판이 들어 있다는 증거 대세요.” 하면 오늘 본문 24절에 나오죠.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다.” 하나님의 언약 속에 비로소 하나님의 진짜 뜻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입니다. 이 세상에 두 개의 구조가 있거든요. 하나는 물의 구조가 있었고, 하나는 불의구조가 있습니다. 물의 구조는 노아 때부터 마지막 세상 심판, 불 심판 올 때까지는 물의 구조에요. 그 다음에는 불이 심판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불의 구조가 되는 겁니다. 모든 게 다 사라지잖아요. 하나님이 노아 홍수 때, 물로써 심판해가지고, 물로써 심판하고, 심판을 먼저 전제로 시작해서, 전제를 깔고 그 다음에 무지개 피워 올려가지고 “물의 심판 받아도 싼데, 내가 단지, 너희들 때문이 아니고 언약 때문에, 너희들이 언약을 증거 하라고, 두 종류로, 저주받을 자와 복 받을 자로 나누어서 이 땅에 인간들을 내가 생산케 한다.” 이렇게 돼있습니다. 

제가 고린도전서 5장에 음행 나오고, 음행 이야기 계속 나오는데 그 이야기 할 거예요. 부부의 목적은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의 목적은 자식 낳고 키우라고 부부가 있는 거예요. 거의 동물적 차원, 새끼 놓고 잘 키우라고 한 거예요. 부부가 짝이 잘 맞아야 자식도 잘 키워지는 겁니다. 자식이 왜 필요 하냐, 자식을 낳아야 언약의 두 가지, 저주와 복을 보여줄 수 있는 재료가 자식이기 때문에. 그래서 부모라고 하는 것은 뭐냐, 그냥 자기 자식만 배태하고 자기는 빠져 나오는, 하나의 통로 역할 밖에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일 밉상스러운 남편이 바로 내 자식 몰라라 하는 남편이 제일 밉상스럽죠. 일반적으로. 근데 특수한 경우에는 그게 또 용납이 돼요. 하나님의 용사는 가정에 매이지 않는다는 그 대목도 나옵니다. 그러니 참, 그런 설명하는 것이 난처하거든요. 곤란하다 그 말이죠. 그래 가지고 아내가 “당신은 자식 낳아놓고 내 몰라라 하면 되겠냐?” 이렇게 하게 되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사람은 존재 중심이 아니고 심판 중심이다.” 이렇게 핑계 댈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하나님은 물의 구조 속에서, 이미 심판 속에서 뭘 쳐다보느냐, 불의 소멸을 언급합니다. 불이 다 태울 텐데, 그 태울 시점이 뭐냐, 언약이 완성되게 되면 불에 다 날라갑니다. 언약이 완성이 되게 되면. 그러면 언약 속에 이미 이러한 구조가, 이런 내용이 들어있단 말입니까? 하면 들어있습니다. 어디에 들어있습니까? 물어보시면 하나님의 번제 안에 들어있어요. 제단 불. 제단 불 아닌 것으로 향로 피우면 성전 내에서 나답과 아비후 두 제사장처럼 즉사합니다. 불에 태워 죽습니다. 고라 자손이 들고 있던 향로에서 불이 나와 가지고 불이 막 자기를 태우잖아요. 레이더스 세 번째 영화 보면 거기 독일군들 향로에서 불이 나와 가지고 다 타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 그 속에서 주님이 이야기하잖아요. 

자, 그렇다면 제 의견이 맞다면, 예수님께서 사람 모습으로 오지 말고, ‘불의 사나이’, 불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 더 확실하겠죠? 불 속에, 온 몸이 불타면서, 제자들도 겁이 나가지고 “다 데겠다.” 이렇게 와야 되는데. 불 자체가 형상이 아닙니다. 불 자체가. 소멸하는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해놓고 하나님 쪽에서 불로 제시해버리면 불 자체가 경배의 대상이 돼버려요. 불 자체가. 그래서 불을 경배하는 종교가 있다는 그런 소문이 있어요. 배화교, 조로아스터교 라고 해서 이란에 있는 B.C 660년경에 있던 그런 종교도 있는데. 사실은 그 종교가 불을 숭배하는 것은 아니고요. 여기 불로써 언약을 구성하는데 있어 불이 개입하는데, 불이 개입하는 이 기능이 뭐냐 하면, 홀라당 다 태워요. 번제를.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기능이냐 하면, 불의 기능이 아니고, 불 위에 누워있는 어린양의 기능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에다가 불을 집어넣었고, 그 불씨는 이스라엘 내에 번제라는 형식으로, 번제단이 있어요. 번제단에서 매일같이 연기가 피어오르고 제물이 타죽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성소 안에 있는 사항이 언약이고요. 성소 바깥에 텐트치고 포진하고 있는 그 많은, 수십만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운명은 성소 안에서 연기가 멈추느냐, 계속되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운명이 절단 나느냐, 아니면 유지되느냐 그 차이가 나요. 방금 이야기한 이걸 가지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동행하심이다.” “하나님의 이름의 동행하심” 하나님의 동행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의 동행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진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성소 안에, 화목제 드릴 때, 번제를 드릴 때, 그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아무리 2.0으로 그걸 봐도 거기는 하나님의 인격체가 보이지를 않아요. 그냥 불타는 제단불만 보이고 양고기나 소고기 타는 냄새만 나오지. 그 안에서 별로 뭐. 제사장은 제물 잡는다고 바쁘고. 그 모습뿐이지. 그 외에, 제사장이 얼쩡거리는 그 모습뿐이지 다른 모습은 보이지를 않아요. 그냥 하늘거리는 불꽃 그런 것만 보이지 아무리 봐도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죠. 안 보이는 이유는 어떤 형상이라도, 인간의 보이는 형상에 어떤 형상으로도 하나님께서는 형상화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지난 시간에도 쭉 나오고.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 

그리고 여기 4장 16절 보면,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 여자의 형상, 짐승의 형상, 새의 형상, 땅에 기는 곤충의 형상, 땅 아래 있는 어족의 형상” 어떤 것도 만들지 말라. 그러면 창조 안에 있는 어떤 형상이라도 신의 형상은 아니라는 거죠. 그게 아닌 겁니다. 그러면 오실 메시야를, 오신 메시야가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죠. 왜냐 하면, 우리는 눈에 보고 있는 것은 세상에 창조 안에 있는 형상만 보고 있는데, 오실 메시야인지 가짜인지 우리가 무슨 수로 압니까? 여기에 대해서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라고 해놓고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다” 모든 형상을 다 소멸해버립니다. 근데, 그 뒤에 나온 말이 있어요. 그게 바로 형상입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이게 어떻게 형상화될 수 있느냐 하면, 특히 남자들은 여자의 질투에 대해서 이해 못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질투가 뭐냐 하면, “나 질투하거든” 이런 질투는 생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질투가 성립되려면 한쪽을 밀쳐야 됩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모든 형상을 밀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밀치는데, 그 밀침의 대상이 뭐냐 하면, 그 밀침의 대상 가운데 우리가 있어요. 우리는 신과 나서서 신을 섬기기 위한, 신을 형상화시키는 그 작업을 합니다. 근데 그것 자체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그게 싫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고 언약의 완성 상태가 천국입니다. 그러면 여기 있는 이 모든 말씀은 우리가 손댈 말씀이 아니고, 주께서 조용히, 조용히 주님께서 다가오시기 위해서 이 말씀 속에 숨어있는 거죠. 

그러면 이 말씀을 왜 주셨는가. 이 말씀을 들여다보고 지키려는 우리를 밀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게 아니거든. 그게 아니거든.”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하냐면, “아니, 형상 만들지 말라면 만들지 말지.” 아닙니다. 이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추가되는 새로운 율법이 주어져요. 그래서 유대인은 성경에 보면 600가지의 율법이 있다고 해요. 600가지의. 뭐, 365가지 더 돼요. 600가지의 율법이 있다는 말은, 계속 세월이 가고 시대가 가면서 추가되는 법이 계속 주어집니다. 추가되는 법이 계속 주어진다는 것은 계속해서 우리를 밀치는 거예요. 그 말은, “이 언약은 니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룬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합니다. “그 ‘내가’라는 ‘내가’가 누군지 얼굴 한번 봅시다.” “아니야. 아직도 멀었어.” 우리는 계속해서 밀치는 가운데 숨어있는 그 분이 비로소 자신의 형상을 드러내게 되는 거죠. 

이 작업이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죄로 드러날 때까지 갑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것이 죄 정도가 아니고 우리 자신이 아예 죄에서 태어났다는 것, 우리는 죄의 산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확정지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 언약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 앞에서 하시는 말씀이 “자 먹어라.” “뭡니까?” “이거는 내가 주는 내 피다.” 하고 ‘피다’하면서 주는 것이 뭐냐 하면 포도주에요. 다빈치코드라는 영화에 보게 되면 뭣이 그렇게, 다비치코드나 레이더스-인디아나존스 영화에 보게 되면 예수님의 성배라고 해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잔을 나누었던 그 잔이 유물이 되어서 고이 간직하고 있었는데, 메로빙거 왕가에서 간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하고 결혼해서 피신하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프랑스 메로빙거 왕가가 되어서 그 메르빙거 왕가에서 다빈치코드가 이 사실은 진짜인데 천주교가 이게 있으면 일이 안된다 해가지고 핍박해서 숨어 지내고 드디어 레오나르도다빈치 작품에서 암호로 푸는 뭐 그런 소설이야기거든요. 근데 그 소설이야기를 하든지, 아니면 레이더스에서 잃어버린 성궤가 있었는데 그 성궤가 어떻게 숨겼다는 그런 이야기의 핵심은 뭐냐 하면, 그 예수님이 썼던 잔이 있잖아요? 성배. 성배가 레이더스에서 인디아나존스 아버지, 숀코너리가 손이 아팠는데 그 손에 그걸 부으니까 세상에 상처가 깨끗이 나아요. 이게 뭘 의미하냐면, 인간은 어떤 귀한 것, 예수님에 관한,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빵구난 옷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모든 것, 그리고 성경의 모든 것을 전부다 우상화할 수밖에 없는 죄덩어리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내가 곧 나에게 유일한 신이에요. 내 모습이 나의 형상입니다. 신의 형상이에요. 나 닮은 신을 내가 믿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뭐냐, “니가 눈뜨고 살아있는 한 내 모습 안 보인다.” 이게 언약의 완성입니다. 자, 천국은 가야되겠습니다. 천국은 가야되는데 언약이 가로막혀 있어요. 우리는 언약을 내가 지키면 되지. 그런데 언약이 계속 추가가 됩니다. 지켰다 싶으면 새로운 죄가 드러나고. 지켰다 싶으면 또 새로운 죄가 드러나고. 마지막에 언약의 완성이 뭐냐 하면, “니가 나와 함께 죽을 수 있느냐?” 하니까 “미쳤습니까? 내가 죽게. 살라고 믿지 죽을라고 믿습니까?” 이래 나오니까 “그러니까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는 니한테 양보할 생각이 없어. 니 중심 세계에 나 중심 세계를 나는 양보할 생각이 없다. 니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해라.” 하면 “니가 죽어야지.” 하고 예수님 죽였잖아요. 

죽고 난 뒤에 모든 것이 죽음의 세계고, 조용했는데 사흘 만에 예수님을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언약은 그동안 평소에 꾸준히 진행해왔고 이제 언약이 완성됐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질투가 변해서 뭐가 됐느냐, 지독한 사랑이 되는 거죠. 너무 많은 용서를 해줬어요. 너무 많은. 하나님이 너무 과한 용서를, 너무 심한 용서를 해줬어요. 뭔가 우리가 회개하고 잘못했다고 해서 용서하면 괜찮은데, 이거는 회개할 줄도 모르고, 회개 자체도 또 교만이 되니까. 회개할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미리 먼저, 창세전에 그게 디모데후서에 나온 것처럼 창세전에 이미 우리를 구원해버렸어요. 이제는 그것을 확인차원에서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물으면 하나님은 모든 걸 없애버리십니다. 소멸하는 불입니다. 이유가 뭐죠?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바로 그 두 문장이 24절의 내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중심, 우리 존재 중심, 죽을 때까지 아마 사라지지 않을 줄로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우리가 왜 구원됐는지, 왜 용서받았는지 그 내막을 아는 그 차이점을 날마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