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강-신 4장 25-29(증거)1502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4장 25-29절입니다. 구약성경 267페이지입니다.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열국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열국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하나님께서 먹지도 못하고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신들을 철거를 해버리면, 그렇다면 신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인간들이 어떤 목석을 만들고 신을 만드는 것은 그게 신이라고 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신을 형상화시켜서, 그걸 매개로 하여서 정작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나아가고자, 정성을 다하고자, 일단은 눈에 보이는 조각 같은 것을 만들어서 하나님께 고걸 하나의 매체로 생각하는 거예요.
저한테 어떤 분이 계속해서 질문을 하시는 분이 있는데, “목사님 저는 주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신앙생활 할까요?” 이래 나오는 거예요. 간단한 겁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그게 주님의 증거잖아요? 살아있다는 게. 여기 오늘 26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증거를 삼는다는 말은, 전부다 증거용도가 되는 거예요. 주님을 증거 하는 용도지, 내가 어떻게 신을 잘 섬겼다고 칭찬받아서 내가 독자적으로 영생을 얻고 구원받는, 그런 독자적인 것은 용납하지 않고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증거를 삼는다는 말은 숨어있는 세계가 따로 있다는 거고, 이 세계라 하는 것은 거기에 한 흔적으로써만 존재하는, 남기는 거예요. 그걸 지평이라고 합니다. flatland 평지라고 하는데, 그 6070이런 사람들, 옛날 젊을 때, 60대, 70대 사람들 중에 김지평씨가 쓴 유명한 노래 가사가 있어요. 김지평 작사, 김학송 작곡, 노래는 방주연이가 불렀던 노래인데 가사를 한번 들어보세요. 제목은 <당신의 마음> 그림을 그립니다. 당신을 그립니다. 이게 목석이에요. 목석인데, 눈으로 보지 못하고 코도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을 만듭니다. 해변의 모래사장에다가 그림을 그립니다. 당신을 그립니다.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 턱 밑에 있는 점하나까지 그립니다. 입가에 미소까지 그렸지만은 마지막 한 가지 못 그린 게 있어요. 지금도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
그렸지만 다시 물결이 치면, 파도가 치면 그렸던 거 다 날라갑니다. 우리 인생 한평생 살았잖아요? 우리 한평생 사는데 주께서 와가지고 쓸어 가면, 한평생 언제 그 인간 살았나? 하고 내리 잊어버려요. 일 년만 지나면 다 잊어버리고 한 오년 십년 지나면 다 잊어버려요. 증거용도라 하는 것은 바로 그, 제가 제일 설교할 때 힘든 게 뭐냐, 원인과 결과를 설명할 때,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를 같은 모래사장에서 그릴 수 있는 그 원인과 결과를 자꾸 생각하는데, 제가 말하는 원인은 바닷가 모래밭에 그릴 수 없는 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까 기도 담당 누구하니까 딱 X가 됐어요. 근데 옆에 한집사님의 말씀이 가관이에요. “아예 기도 없애버립시다.”
지금 바닷가 모래사장에는 원인을 거기서 끄집어낼 수가 없어요. 우리가 산다는 것 자체가 결과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이렇게 정리될 수가 있어요. 죄사함이라는 것은 한 순간이 아니고 우리의 삶 전체가 죄의 사함을 보여주는 증거로써 끝까지 가요. 끝까지. 죄사함에다가 시간 요소를 가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건 구원파에서 하는 거예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가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는 구원받은 증거로 살 거예요. 이게 정리정돈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의 증거물이기 때문에 원인을 나에게서 찾아서는 안 되고, 따라서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내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돼요. 우리는 책임질 게 없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이렇게 목석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석과,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그런 목석을 만나고 섬기게 된다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평소에 니가 니 잘되게 하는 원인을 니 안에서 제조해냈기 때문에 그걸로 인하여 니가 다른 나라한테 망하게 됐다는 겁니다.
니가 이렇게 망하고 결국에는 저주받고 다른 나라한테 팔려가는 것은, 그것은 니가 니 속을 모르기 때문에, 니 안에 무슨 작용이 일어났는지 니가 감 잡지 못해서 그렇다. 그런데 니 하나가 증거가 되기 위해서 니한테 딱 맞는 나라에 보내줄게. 그게 바벨론이에요. 그게 바로 우상 섬기는 동네에요. 그래서 모든 인간의 신, 여호와, 예수, 성령, 삼위일체, 전부다 우상입니다. 모든 인간의 신은 우상입니다. 그러면 신이 있어서 섬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물으신다면, 신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안 섬긴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럼 어떻게 안 섬기느냐, 나 자신을 안 섬기는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섬기려고 하지 마시고 나를 안 섬기면 돼요. 주님을 믿을라고 하지 마시고 나를 안 믿으면 그게 믿음입니다. 그게 지평선, 바닷가에 가가지고 쓸데없이 그림 그리고 하지 마세요. 파도가 와서 다 쓸려가는 것처럼. 하나의 증거물로 남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될 그런 요소가 있죠.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신명기 4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렵습니다.
어떻게 어려우냐 하면, 목사님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만납니까? 할 때, 저는 인간을 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주지 않습니다. 제가 오전설교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하나님은 인간의 호의에 부응해서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주지 않습니다. 만나는 장소는 하나님 쪽에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게 뭐냐,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여기 앞에 커피집 이름이 뭡니까? 카페베네죠. 카페베네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끝나고 이야기할 별 장소가 없어요. 근데 생겨가지고 뭐 하면 카페베네 갑시다. 이러거든요. 장소가 생겨버린 거예요. 장소가. 뭐 교회에서 이야기하지만, 집사님 피아노 연습한다고 쿵닥쿵닥하시고. 어떤 특정 만남의 장소는 주님이 제공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제공한 장소가 뭐냐, 이스라엘이에요. 야, 그럼 이스라엘에서 만나면 되겠네. 근데 만나는 장소 이스라엘이, 이게 바닷가 그림처럼 분명히 있다고 했는데, 이스라엘이 날라가버리고 거기엔 아무것도 남지를 않습니다. 분명히 있었는데 날아갔죠.
그러면 우리는 이스라엘이 만남의 장소라는 말은 특정지역이나 특정시간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마음씨나 우리 마음씨나 동일한 마음씨인데, 하나님께서 그 마음씨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을 멸망케 했다. 그렇다면 만남의 장소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만남의 장소인데, 어쨌든 내 마음은 하나님이 만남의 장소로 적절치 않다는 것을 통보하는 방식으로 이 마음을 만남의 장소로 삼으신 겁니다. 복잡해요. 이 논리가. 간단치 않습니다. “니는 구원받기 적절치 않아” 라는 것으로 다가온다는 자체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가 되는 겁니다.
그 구체적이고 확실한 예가 있습니다만, 열왕기상 18장 19절에 보면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장소가 나오죠. 이스라엘 장소니까. 그 이스라엘에,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가 제단을 쌓아놓고 물을 열두 통이나 갖다가 붓습니다. 축축해요. 제단에다 송아지 얹어놓고는 물을 갖다 붓는데, 물을 열두 통이나 부으니까 축축한 거예요. 그리고 성냥, 휘발유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요. 있으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이 곳에 불을 내려주옵소서. 하나님 살아계심의 증거를 보여주옵소서.”
근데, 엘리야가 이렇게 하게 된 것은 850대 1로 배틀 들어간 거예요. 게임에. 하나님이 누구와 접촉하는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게임에 방법이 뭐냐 하면, 제단 쌓아놓고 신이 제단의 제물을 홀라당 다 태우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그렇게 한 겁니다. 오늘도 우리 한번 해볼까요? 자, 제단 쌓아놓고, 송아지 해놓고, 송아지가 좀 비싸면 마트에서 닭 반 마리 사다놓고 불붙는가 한번 해봅시다. ①가만히 있는다. ②일방적으로 기도한다. ③포기한다. 안 될 줄 알고 포기한다. 몇 번 입니까? ③번이 정답인 거예요. 제단에 제물 얹어놓고 포기한다는 것은, 주님이여 저한테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표시할 때 그 장소가 하나님 만나는 장소에요.
그런데 앞에 있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는 딱 얹어놨잖아요. 딱 얹어놓고 남한테 대외적으로 보여주고 싶어가지고 그들은 설치는데, 부흥회를 하는데, 목사는 강대상에 여기 있고 전도사는 그 밑에 금요철야 하기 전에 1부 순서 때 치면서 막 때려 부순다고. 막 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노래 부르면서 막 하는데, 밤새도록 하는 거예요. 손바닥만 벌건해가지고 나중에는 안 되니까 본문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몸을 상하게 한다. 하여튼 애들은 나중에 일어서서 춤까지 추고 그래요. 왜 그렇게 합니까? 믿음 없다고 그렇게 합니까? 믿음 있는 척한다고 그렇게 하는 겁니까? 믿음 있는 척 하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걸 하면은 하나님께서 시끄럽다고 가버린다니까요. 하나님께서 그 장소에 시끄러워서 안 와요. 하나님은 자기의 공로를 사람에게 빼앗기지를 않습니다. 포기를 해야 돼요. 포기를 할 때, 포기하는 그 마음이 죄사함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만약에 잘나버리면 우리는 죄사함이 대상이 안 됩니다. 머리 잘못 굴리면 지옥 갑니다. 머리 잘 굴려야 돼요.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 이 말이죠. 이미 우리는 어떤 인간도 자기 행함으로 구원 못 받는다는 것이 분명해졌잖아요? 분명해졌다면 그 다음에 처신은 간단한 겁니다. 그 앞에서 기죽으면 되는 거예요. 졌습니다. 항복하면 되는 거예요.
너무나 쉬워요. 참 쉽습니다. “주여! 내 힘으로 안 됩니다.” 근데 내 힘으로 안 됩니다에 뒷말 붙이지 마세요. 내 힘으로 안 되지만 주께서 하십니다. 붙이지 마세요. 붙이면 행여나 또 안 되는데 해줄 줄로 아는데, “ 내 힘으로 안 됩니다.” 하면 하나님께서 “오냐 알았다.” 끝내버리죠. 이스라엘이, 유대인들이 옛날 구약 때 자기들이 실패했으니까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겠다고. 그게 역사의 교훈이라고 하는데, 역사의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의 실패를 바로 잡아서 두 번 다시 그런 역사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개과천선하자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고 목적이잖아요.
따라서 유대인들은 전에 이렇게 나쁜 짓 했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자 하면서 그들은 “내 탓이오. 내 부족입니다.” 라고 그들은 열심히 고난주간 했습니다. 근데 막상 주님이 오셔가지고 그 고난주간에 참석하지 않고 제자들하고 음식잡수고 술 잡수러 가버렸다 말이죠.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왜 너희 선생은 고난주간에 참석하지 않느냐? 왜 스스로 자기를 학대하지 않느냐?” 하니까 “나는 잘난 사람을 위해서 온 게 아니고 못난 사람을 위해서 왔다. 자 봐라 못난 사람이다. 나도 못났다.” 증거를 니가 왜 만드느냐는 겁니다. 주님의 증거를 왜 우리가 만들죠. 그리되면 우리는 또 하나의 원인제공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의 결과물이 되어야 되지, 우리가 내 구원에 조금이라도 원인제공자로서 설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뭘 여러분들에게 요구하고 싶으냐 하면, 성경 어떤 대목을 보면서 항상 정리정돈이 돼있어야 돼요. 정리정돈을 하세요. 그 노숙자들이나 치매환자들을 보면 특징이 있어요. 뭐냐, 옷이 정리정돈이 안 되어 있어요. 입은 데 또 입고 안에 것 바깥에 입고 이게 다 벗겨야 돼요. 이게 순서가 없어요. 이상해요. 꼭 그 육신적으로 세상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사고방식이 정리정돈이 하나도 안 되어 있어요. 돈 벌면 기분 좋아서 술값 내가 낸다고 하다가 또 뭐 안 되면 술 먹고, 이래나 저래나 술 먹는다는 핑계인데, 휘발유통 들고 돌아다니고.
뭔가 인생에 정리정돈이 하나도 안 되어 있는 거예요.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니가 뭘 대단한 것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정리정돈을 깔끔하게 하라는 겁니다. 정리정돈을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우리가 수정이 돼야 됩니다. 그러면 시간요소는 빠져야 됩니다. 우리의 시간요소는. 그 예를 한번 들겠습니다. 여기 본문이 얼마나 어려운지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25절에 보면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 이래 돼있지요.
이건 누가 봐도 우리가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화내는 원인제공을 우리가 했다라고 할 거예요. 그런데 28절에 보면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도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자, 이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상을 섬겼던 그 벌로 인하여 뭔가 벌을 받는데 그 벌을 받는 벌이 뭐냐, 우상 섬기는 것이 벌이 되고 말았어요. 이상하잖아요? 우상을 섬겼는데 그 벌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마치 이런 뜻이에요.
부모님이 손님 주려고 음식을 따로 해놨는데, 학교 갖다 온 자식이 그것도 모르고 그 손님 주려고 한 음식을 지가 손대는 겁니다. 제가 전에 여러 번 예를 들었는데 듣는 사람들은 또 식상하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서울에 조카 결혼식에 갔는데 결혼식도 안 끝났는데 하객 중에 어떤 애가 웨딩 케익을 잘라먹었어요. 손을 대가지고. 저 같은 경우에 나중에 먹으나 땡겨 먹으나 마찬가지지만 그 혼주들은 기가 차죠. 그럴 때 그 애한테 벌주는 방법은 케이크 더 먹이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체가 증거가 되기 때문에 우상을 안 섬기는 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상을 더욱더 섬기게 해서 증거용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때 할렐루야가 나와야 돼요. 주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에 죄를 더 짓게 하신다니까요. 기가 차죠. 우리가 죄를 지어줘야 이 죄 때문에 이 죄로 말미암아 내가 죄사함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짓는 겁니다. 죄를 더 짓는다는 것이 어감이 별로 안 좋으면 제가 바꾸겠어요. 지은 죄를 더 깊이 있게 알게 만드는 겁니다. 먹는 것 입는 것을 족한 줄로 알라. 이걸 서울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디모데전서6장하면서.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로 알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했을 때에 “그래요. 이제 주님께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돈을 사랑하지 않을 테니 돈 주세요.” 이런 계산을 인간들이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제는 모든 것이 돈 사랑하는 것과 연관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죽을 때까지 그걸 파헤치고 계속 들추어내는 인생을 살게 하는 겁니다. “우상숭배를 한 게 이게 왜 죄야? 죄 아니야.” 라고 했던 그들을 아예 우상숭배한 나라로 집어넣어가지고 “아! 우상 숭배한 결과가 결국 이런 결과를 나았구나!” 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래야 주님의 희생만이 점점 더 커져 나오기 때문에. 내가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이미 다 해결해주셨구나!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간요소가 빠져야 되죠. 점점 더 거룩, 없습니다. 점점 더 착해지는 것, 없습니다. ‘점점 더’ 라는 시간요소는 필요치 않아요. 이미 했던 죄사함이 평생을 걸쳐서 왜 죄사함을 받은 인생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그 전에 죄 아니라고 여겼던 것도 다 돌아가면 전부다 주님을 분노케 하는 죄에 해당 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도대체 우상숭배를 안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게 아까 제가 이야기한, 인간은 증거가 되기 위해서. 내가 살기 위해서는 우상숭배를 안 해야 되지만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거예요. 선악과는 따먹으라고 있는 겁니다. 선악과는 따먹으라고 있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지고 한 사흘 간 참았나? 사흘 간 참은 것 소용없어요. 그러면 일주일 참았다. 사흘 참으나 일주일 참으나 이천육백사십년 참으나 소용없어요. 따먹으라고 한 것은. 주여, 이천육백사년을 참았습니다. 따먹겠습니다. 이천육백이십오년을 참으나 이만년을 참았던 관계없어요. 따먹으면 그걸로 죽게 되어 있어요. 차라리 아예 삽가지고 가서 선악과를 뿌리채 뽑아야 돼요.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 일을 누가 하느냐. 바로 마귀가, 오늘날 우리가 한 겁니다. 그게 바로 언약이 없는 것은 우상이라고 해서 그래서 인간은 우상숭배를 하게 된 거예요. 나를 지적질 하는 것을 아예 통째로 빼버린 거예요. 우리의 평소에는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을 덮어버리는 거예요. 안 보는 거예요. 뭐 이런 소리 하면 양심에 찔리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죠. 아예 성경을 교회 올 때만 보고 아예 안 보는 겁니다. 안 그러면 차 트렁크에 놔두든지. 구원 받았는데 왜 봐? 아니에요. 구원 받았으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왜 내가 산다는 자체가 왜 죄를 짓는 상황이냐를 알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도 우리가 성경을 안 보면 그만이지. 그럴 줄 알고 주께서 성경을 안 봐도 성경 안에 내용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가지고 우리를 옴팍 뒤집어 씌어가지고 뒤늦게 “주여, 제가 말씀대로 돈을 너무 사랑했군요.” 라는 이런 고백이 막 튀어나오게 하는 겁니다. 우리 입에서 성경 말씀이 막 나오도록 하는 거예요. 성경은 글자에 매이는 것이 아니고 활동성 자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라 할 때, 우상 숭배하는 그 가치가 뭐냐 하면은, 어차피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그 작업을 하는 그것.
그렇다면 니가 앞으로 포로 잡혀 가는 그 나라에 가보게 되면 그 때는 성경 보고 싶어도 안 보이는 그런 나라에 가게 될 거예요. 어떻습니까? 생각만 해도 기분 좋죠? 기독교 가정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났다가 미국으로 이민 가서 성경도 없는 그런 곳에 가가지고 아이구 이제 속이 다 시원하다. 이제 교회 안 가도 되고. 얼마나 속이 다 시원해요. 그래. 그게 바로 너의 고향이었어. 그게 니 마음의 고향이었다 말이죠. 그냥 그동안 억지로 아버지 따라 엄마 따라 교회 나오는 것이 얼마나 내한테 힘들었어. 아이구 고생했다. 그래. 니가 바로 니밖에 모른 우상숭배자야. 그걸 새삼스레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한번씩 교회 안 나와야 돼요. 그래서 교회 안 나가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느껴져야 하는 겁니다. 한번씩 나이트클럽에 가서 술을 마시고 술 맛이 언제 이렇게 맛있었는지!! 해야 돼요. 하면서 술 취하지 말라는 그 말씀을 깨닫고요.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주께서는 술 먹고 싶은 상황을 만들어가지고 에이, 술 한 잔 먹어야 되겠다. 참았는데. 이백육십오일동안 참았는데 술 한 잔 먹어야 되겠다. 그래서 술 한 잔 먹고 이왕 먹는 거 취해서 먹어야 맛이 나지. 또 취해서 마셔놓고. 그 다음에 가서는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이 뒤늦게 와서 후려치면 이거는 뭡니까?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구나 하는 기쁨을 주시는 겁니다. 제 말이 굉장히 이상하죠. 주의 기쁨 돌리기 위해서 술 먹으라는 소리 같은데. 그렇게 기쁨 돌리기 위해서 술 먹으라고 하는 것은 또 원인결과를, 또 내 쪽에서 내 행동으로 원인을 만들고 내 행동에서 행동으로 어떤 결과를 유도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아예 해변가에 모래밭에 있는 방주연 노래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모방할 수 있어요. 믿는 사람. 심지어 눈과 턱 밑에 있는 점하나까지. 심지어 그림을 더 잘 그리면 입가에 미소까지 더 잘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어디서 왔습니까? 그거는 주님이 쥐고 있죠. 내 마음을. 죄인일 수밖에 없는 내 마음. 우리 선조 아담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일 수밖에 없는 그 마음. 그 마음, 이미 시간을 초월해서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우리의 평생이 죄사함의 평생이라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증인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떻게 하나, 이렇게 하나 주의 증인인 것을 늘 확인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죄지을 수밖에 없고, 조상이 그래서 우리도 따라서 범죄 할 수밖에 없는 것을 도리어 감사함으로 확인하고 수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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