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강-신 4장 37-40(하나님의 사랑)1503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4장 37-40절입니다. 구약성경 268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너보다 강대한 열국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
방금 읽었던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말씀입니다. 근데 이스라엘은 이제 망하고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주신 말씀은, 말씀 자체가 없어지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이 말씀이 오늘날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성도에게 그대로 이렇게 이전이 되는 겁니다. 이전이 되는데, 그럼 여기 땅이 나오고, 열조가 나오고 하는 그것은 뭐냐, 여기 나오는 땅을 주겠다, 어떤 너희 열조에게 하는, 그 모든 내용은 이스라엘에게서 바로 오늘 교회 우리에게 바로 넘어오는 것이 아니고 한 군데를 거쳐서 넘어옵니다.
그 거치는 곳이 어디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참,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을 경유하면서 뭐가 사라져야 하느냐 하면, 내 중심으로, 하나님을 통해서 내가 사는 이곳을 영원히 만들어보겠다는 그러한 모든 수완과 그러한 기대가 날아가 버립니다. 구약 때 이렇게 복을 줬으니까, 심지어 이 땅에서 오랫동안 산다 했으니까, 우리가 이 교회 오랫동안 유지하고 나도 오랫동안 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해서 하나님이 약속대로 우리에게 해줘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 약속을 해놓고, 이 약속 우리한테 안 해주면 안 되지요? 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뭔가 빠졌어요.
예수님을 경유해서, 경유해야 이 말씀이 완성된다는 것이 빠지고, 우리 자신이 완성되는 것이 마치 말씀의 완성인 냥,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노렸던 우상입니다. 니가 바로 우상이다. 우상섬기지 마라, 우상섬기지 마라고 했지만, 이스라엘이 망했던 이유도 니는 모르지?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꼭 니 같이 생각해서 망했다는 겁니다. 꼭 너 같은 생각을 해서 망한 거예요.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다 같은 인간이에요.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뻔하죠. 자기밖에 모르는 것. 그것 때문에 망하는 겁니다.
제가 광주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해서 벌 받는 게 아니고, 말씀을 모르고 있는 자체가 지금 벌 받고 있는 중이에요. 벌을 받고 있기 때문에 말씀에 관심도 없고, 성경에 관심도 없고, 복음에도 관심이 없는 겁니다. 지금 벌서고 있는 겁니다. 믿음이 없는 것, 그것 자체가, 믿음이 없어서 벌 받는 게 아니고, 믿음이 없는 것 자체가, 니 손들고 있어. 지금 벌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저주주고 있으니까 믿음이 없는 거예요. 믿음이 안 생기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있었다가 없어졌다는 말은, 이 세상에 인간도 없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없어졌으니까 이제 이스라엘이 받을 복을 우리가 받을 거다, 은근히 기대하지 마세요.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런 것 없어요. 결혼식에 부조내지 않는 사람한테는, 물론 결혼식에 가면 뷔페 음식이 많이 남아 있을 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 결혼식에 부조 안 낸 사람은 음식 없습니다. 그 결혼식에 일가친척이나 친구가 아니면 음식 있다고 해서 자기 게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왜 그렇게 성경을 볼 때, 그러니까 성경을 펼치기만 하면 우상들이 튀어나와요. 이게 뭐냐, 자기 입장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런 오류들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공무원 준비하는 학생들, 시험 준비하는 학생이나 청년들 보게 되면, 노량진에 가면 많아요. 제가 서울 노량진을 오랫동안 거쳤습니다. 왜냐하면 총신 버스 타는 곳이 거기였기 때문에. 공부해서 시험 치러 간 것이 아니고. 근데, 노량진에 학생들이 굉장히 많아요. 경찰 공무원 시험, 일반 공무원 시험 많은데, 그 노량진 학원 중심에 뭐가 있느냐 하면, 노량진 경찰서가 있어요. 그 경찰들 보게 되면 그게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나도 한 일 년 만 공부 바짝 하면 나도 저렇게 순경 계급장 달고 근무해야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경찰서 안을 보게 되면,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이 보게 되면 굉장히 그게 안정적으로 되어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경례 한 번 하고 들어가서 나중에 월급 받고. 들어가면 무조건 월급 받고 얼마나 좋습니까? 근데 그 경찰서가 전쟁터거든요. 일제시대 때 그 한국인의 자격으로서 파출소장 한다는 거예요. 제가 아는 분도 파출소장 했습니다. 파출소장 한다는 것, 그거는 그 지방의 유지입니다. 옛날에 우는 애들도 그친다는 순사, 순사 중에도 파출소장이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지만 일제시대 때 그 파출소장, 뭐 했느냐, 독립투사들 잡아다가 고문했습니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고문한 거예요. 왜? 자기가 출세해야 되니까.
남들 보기에는 멋있어 보이고 그럴싸하게 보이죠. 특히 한가한 사람한테는 그 분주함조차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근데 그 분주함 속에 있는 사람은 내가 지금 분주한지, 한가한지, 이것조차도 몰라요. 지금 정신이 없어요. 정신이. 너무너무 힘들어서. 항상 생각하는 게, 언제 일 때려 치우냐? 나도 언제 일 때려치우고 돈 쓰는 재미로 여생을 보내나? 그거만 생각하죠. 너무나 일에 시달리고 보니까 그렇습니다. 학교 조용해 보여요. 학교 앞을 지나가는 행인1, 행인2, 행인3, 행인4가 보면 학교 조용해 보이죠. 학교 안에 교사는 압니다. 이거 난리도 아니에요. 책상과 책상 위를 뛰어다니는데 이거는 난리도 아니에요.
회초리 들고 몽둥이 들고 있어야 돼요. 들고 있어도 때리지도 못하지만. 때리는 시늉이라도 하고 돌아다니면서 따라 붙어야 하고. 말썽 피우고, 쉬는 시간에 나가서 담배 피우고, 그거 검사한다고 돌아다니고, 한시도 앉아 있을 시간이 없어요. 만날 그거 감시한다고 돌아다녀야 하고. 애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하나 하면 하나 또 말썽이고. 그런데 학교 앞을 가는 행인들은 학교가 그저 고요하고. 가끔 들리는 소리는 딩동댕동~ 수업 끝나는 소리밖에 안 들려요. 교사들은 그거야 말로 지옥 같은 거고 골칫거립니다. 얼마나 힘든지, 출근할 때부터 오늘도 제발 무사히! 하고. 퇴근할 때면 아이고, 오늘도 살았나! 할 정도로 그렇게 모든 직장이 다 힘들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스라엘을 남들 보기에는 참, 구원받아서 좋겠다, 하지만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만날 전쟁이 벌어지고 투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런 것은 학교뿐만 아니고 병원도 마찬가지일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여기 언급을 해놨는데, 여기 우리 눈에 띄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너를 사랑한다는 거예요. 3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 고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사랑을 하신다는 것이, 참 이게 낯설어 보이고 이상해보여요.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이 인간과 인간들끼리만 적용되는 것으로 알지, 하나님이 사랑한다, 이것은 그동안 인간의 사랑에만 목말라 하고, 인간의 정에만 굶주린, 보통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사랑한다니까 겁부터 덜렁 납니다.
하나님이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만큼이나 나를 사랑해줄까? 이것부터 출발하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아는 사랑이란 나를 예뻐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누가 나를 예뻐해 주면 나는 굉장히 사랑을 느끼거든요. 근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니까, 사랑의 덩어리도 얼마나 대단하겠느냐. 그럼 지금 사랑받는 것도 좋은데, 거기다 사랑을 해준다니까 얼마나 큰 사랑을 해주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찬송가 404장에 보면 사랑을 크기로 묘사를 해놨어요. 여기에 보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라고 해놓고 3절에 가사를 보니까 상당히 낯설어 보이는 게,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웬 서예가 등장했어요.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다.
하늘을 용지로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서. 그럼 붓은? 붓이 빠졌네. 주께서 낑낑 붓을 들고 바다 먹물에 척 적셔서 사랑을 다 기록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우리가 붓을 들고 바닷물을 먹물 삼아서 다 쓴다는 말인가. 아마 가사 내용 보니까 하나님이 한다는 게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한다는데. 우리가 꼭 이거 해야 됩니까? 먹물 삼아서 이걸 꼭 적어야 돼요? 3절 가사를, 특히 다 채우지 못한다 해서 사랑이라는 것을 꼭 다 채워야 될 그러한 공간적인 크기를 갖고 있는 것이 사랑일까, 아니면 관계일까, 라는 것을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이 3절 가사가 마음에 들지를 않아요.
그러면 당신이 말하는 사랑의 적합한 표현은 어떤 것이냐. 시편 131편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게 뭐 먹물보다 낫지 않습니까? 두루마리 뭐 용지 사용하는 것 보다 이게 더 나은 것 같은데요. 내 생각에는요. 왜냐하면 두루마리에다 먹물로 우리가 써야 되지만, 뭔가 해야 되지만, 이 시편 131편은 뭐냐 하면 아무것도 힘쓰지 않아요.
힘쓰면 힘쓸수록 사랑을 모독해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니 앞으로 두 번 다시 미안하다 하지 마라!” 물론 드라마에 나온 이야기지만. 쉿!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거예요. 얼마면 돼? 얼마면 돼? 그것도 필요 없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거다. 젖 뗀 아이가 젖을 먹고 만족해서 그냥 있음 자체. 그래서 말하기를 내가 교만치 아니하고 내가 어떤 특이한 일을 힘쓰지 않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무장해제. 내 것 다 뜯어가세요. 다 가져가세요. 뜯어 가면 뜯길수록 나는 사랑을 느끼는 겁니다. 뜯기는 사랑.
그냥 쓸데없는 것, 거추장스러운 것, 다 뜯어가 주시니까 고맙습니다는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요. 덕지덕지 붙어있던 나의 죄책감, 나의 실패와 실수담. 다 가져가세요. 제가 얼만 전에 중국 가서 그걸 느꼈습니다. 중국 강의 끝나고 어떤 온천에 같이 갔는데, 내 아니면 그 목사님들 온천 가지도 않아요. 내 핑계대고 갔는데, 가가지고 닥터피쉬 라는 조그마한 물고기인데 거기에 발 담그라고 했어요. 발을 담갔는데 간질간질해요. 왜? 전부다 닥터피쉬가 내 피부를 뜯어먹고 있으니까. 나는 그냥 뜯기는 즐거움에 있었어요. 사랑 같아요. 주의 사랑 같애요. 다 쓸데없는 것 다 뜯어가고 있어요. 내 몸에서 모든 걸.
그래서 이것이, 소위 말하는 까이는 재미가 있다는 데, 뜯기는 재미, 즐거움, 이것이 사랑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제 생각에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항상 의식하는 것이 39절입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라고 되어 있어요. 다른 신은 없다 했어요. 너를 사랑해 줄 신은 나 여호와 밖에 없다 이래 돼요. 자, 이 본문이 어려워요. 이 본문을 제가 좀 설명을 해야 되는데요.
신이 있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고 그래서 그 신만은 진짜 하나님이고 다른 신은 아니다, 하는 것이 진짜 주의 뜻인가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의 뜻이 아니고 그게 우상이에요. 신이 있고 우리를 사랑한다, 이게 머리로는 맞는 이야기인데 실제로는 그것이 우리가 상상해낸, 우리가 고안해낸, 우리가 창작해낸, 우리가 만들어낸, 신일 가능성이 백퍼센트입니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것은 나를 위하여 준다면 누구나 그걸 내가 모실 용의가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이걸 바꿔야 돼요. 어느 종교치고, 알라신이고 뭐고, 자기 사랑하지 않는 신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다 각자 신에서는 우상이 아니고 참된 신이고 지가 믿는 신 빼놓고 다 우상이 되니까.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특히 제가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런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망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자기를 망하게 하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왜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느냐는 거죠. 제 생각에는 모든 인간들이 이미 자기에게 잘해주면 ‘사랑의 하나님이다’는 사실이, ‘이미 확정적이다’는 사실부터 먼저 이야기하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뭐든지 나를 잘해주면 나는 좋은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그 오류, 그 오류부터 이야기가 시작돼야 돼요.
그러면 이 성경 말고 세상 사람들은 신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쪽에서 생각해야 해요. 엠페도클레스라는 BC 5세기, 490년에서 435년 사이에 태어난 철학자가 있어요. 제가 지금 그걸 기억하는 것은 얼마 전에 그걸 봤기 때문에 기억하는 건데, 요새 안 외웁니다. 쓸데없는 것. 근데 그 철학자가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랑과 미움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랑과 미움으로. 어떤 물질이 있든, 그 물질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과 미움의 힘이다. 미움은 밀어내고 사랑은 딱 들어붙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저는 그걸 생각하면서 그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느냐. 그 엠페도 그 사람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니까. 나도 동일하게 생각한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나를 잘해주면, 딱 들어붙어 있으면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느끼고 하나님이 나에게서 떨어지면 미움이라고 할 거니까. 복음을 모르는 철학자가 하는 이야기가, 나도 얼마든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 이게 우상일 가능성이 농후한 거예요. 자, 그렇다면 그 철학자는 어떻게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을 사랑과 미움으로 다 해결해버렸느냐. 가만히 따지고 보니 그 말이 맞아요.
인간관계보세요. 좋아하면 내 편이고 밀쳐내면 원수가 되고. 그렇잖아요? 모든 동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컷수컷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세상의 변화라는 것은 사랑과 미움, 미움과 사랑, 이 두 가지로 다 설명이 된다? 아, 이 탁월한 해석이네요. 가만히 보니까 이것이 모든 게, 해석이 안 되는 게 없어요. 심지어 신학까지. 복음까지 다 해당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엉터리입니다. 그게 엉터리에요. 사랑이란 개념이 바로 인간에게서 나올 때는 자기중심적 에서 나오는, 그렇게 되게 되면 ‘원수를 사랑하라’에 어긋나버려요. ‘원수를 사랑하라.’
혹시 내 돈 떼먹을 사람, 제발 좀 찾고 있습니다. 그런 광고는 안 내요. 나한테 도와 줄 사람, 나한테 투자할 사람, 내 사업에 동조할 사람만 찾지, 내 돈 떼먹고 도망갈 사람 찾는다는, 이런 것은 없거든요. 왜, 그런 사람은 미우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의 사고방식은 어디서 나왔느냐. 그 신이라는 개념, 세상이라는 개념은 자신의 감정에서 나왔어요. 자신의 감정에서 나와서 그러한 오류를 범한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우리는 안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감정 없이 하나님을 생각합니까?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나한테 잘해주면 좋으신 하나님이고 나를 싫어하면 나쁜 하나님이고. 산타클로스가 왜 좋은데요? 울지만 않으면 선물 준다는 거예요. 그런 좋은 분이 어딨어요. 오죽했으면 세인트saint, 성자겠어요. 울면 안 돼. 울면 선물 안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감정은 이게 사랑이 아니고, 사실은 지킬과 하이드처럼, 이게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은 미움의 원인이 돼요. 그래서 나훈아의 데뷔곡이 뭐냐,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 사랑인데 왜 눈물의 씨앗이냐, 미운 거예요.
사랑은 사실은 미움의 다른 형태입니다. 날 사랑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그건 자신의 최악의 신이죠. 악한 신이죠. 근데 그게 바로 우상을 섬기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만 사랑해주는 신을 원하니까, 교회가 가짜 우상을 만들어줘야 장사가 되죠. 그러니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는 갈라디아서 말씀은 날라가 버렸어요.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너희들이 좋아한다면 내 말 못 알아듣는다. 그 이야기입니다. 못 알아듣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걸 못 알아듣는다면 저주를 받는다. 내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사랑을 어디서 찾습니까? 사랑은 본문에 봅시다. 여기 보게 되면 37절에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택하시고’ 돼있어요. ‘택했다’는 이 말을요, 지금 이천 년 교회 역사 아니, 유대교 역사까지 합해서 무려 육천 년 역사 가운데서 이 택했다는 말을 사람들은 제일 오해를 많이 해요. ‘사랑하니까 나를 택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아닙니다. 택했다는 속에 뭐냐 있느냐, ‘버려도 상관없지’가 포함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걸 놓쳐버린 거예요.
“내가 너를 택해놓고 버려도 너는 상관없지? 너는 군말 없이 니가 동의하지?” 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택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선택할 사람을 거기다 심어놨습니다. 누구를 택하는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택합니다. 예수님을 택한 거예요. 이래야 이스라엘의 멸망이 납득이 가고 설명이 되는 겁니다. 택한 백성 버려줘야 버린 가운데서 진짜 택한 것 나옵니다. 택한 것 버려야....., 어떤 남자가 프로포즈 할 그러한 징후를 발표하면서 만난 케이크를 사주니까 여자는 그 징후를 눈치 채고 케이크를 먹는데 급한 게 아니고 케이크를 파헤치죠. 혹시 다이아 있는가 싶어서. 보니까 다이아 나왔네. 남자친구는 케이크를 사준 게 아니고 다이아를 사준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유일하게 사랑은 니 안에 없어요. 니는 사랑받을 자격도 없어요. 사랑 받을 것 같으면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추방시켰다는 말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없는 사랑을 예수님 보내셔서 예수님 중심으로 다시 뭉쳐서, 거기서 이스라엘을 예수님 중심으로 만들어내는 그 작업이 택함의 작업, 사랑의 작업입니다. 그 작업이기 때문에, 그 작업 가운데서 예수님은 어떤 걸 보여 주었느냐 하면 아버지한테 버림받는 것을 보여줬어요.
거기에 사람들이 경악해버려요. 분명히 요단강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너를 택했다고 해놓고는 십자가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버려버려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주께서 내어버려 두사, 버려둡니다. 버려두고 난 뒤에 다시 사흘 만에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 건져냅니다. 왜 그러느냐, 사랑도 개뿔도 모르면서 같이 붙어 올라오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걸 처리한다고. 버려놓고, 진짜 택함은 다 죽여 놓고 그 다음에 택할 때에,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주께서 창세전에 택했군요.”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될 때에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따라서 주님의 사랑은 반드시 주님의 버림, 주님의 미움이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은 이제는 너희들이란 케이크 속에 진짜 택한, 하나님의 장자, 내 아들을 케이크 헤치고 부숴내고 해서 그 안에서 찾아내기 위한 작업을 하신 겁니다. 그걸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신을 받아서 미리 알았더라면, 그들은 자기에게 잘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아, 모든 일은 주께서 알아서 이미 창세전에 계획 잡힌 거군요.” 하고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수용할 것입니다.
그 일이 아까 이야기한 시편 131편입니다. 이 말씀이 좋아서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같이 좋아지기를 원하는데요.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집에 뭐 성경 액자 같은 거 하나 하려면 이런 것 붙여놔야지. 젖 뗀 아이같이 쳐다보는 거예요. 시선을 맞추는 거예요. “맛있어 엄마.” 나는 아무것도 한 것 없어요. “엄마가 나를 낳았잖아요? 하나님 중심으로 나를 낳았잖아요? 나는 주님이고 뭐고 성령이고 뭐고 나는 관심도 없고 아무것도 몰랐어요. 근데 주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젖 뗀 아이같이 구원받는다고 이렇게 만들어놨잖아요? 용서해주실 것 다 용서해주시고, 실패한 것 다 그런 것 보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일방적인 사랑덩어리로 만들어놨잖아요?” 라는 그런 고백. 그 고백이 바로 예수 안에서의 구원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분이 장거리 전화를 하시면서 “목사님. 말씀은 다 이해가 되는데,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게, 어떤 알라신을 믿는 사람에게 잡혀버리면, 그 분이 뭐 선교사인가 그런 것 같아요. 서른여섯 번을 찔러 죽인다는데, 지금 내 신앙 같으면 두 번만 찔러도 예예, 예수 안 믿겠다고 할 그 정도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제가 답변했어요. “실수하면 되잖아요. 실패하면 되잖아요. 자기 믿음에.” 실패해도 상관없다는 믿음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왜 자꾸 성공하려고 합니까? “엄마 젖 먹을 때 너무 아프지 않았어요?”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세요. 그냥 어린아이가 주는 대로 먹으면 되지. “근데 엄마 젖꼭지를 앙하고 깨물어서 미안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자기 걸 그냥 줘서 내부적으로 새로운 창조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새로운 창조, 새로운 피조물이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주님이 주시는 젖만 출렁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의 완성, 용서했다는, 사랑했다는 말씀만 우리에게 힘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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