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강-신 4장 41-43(도피성)1503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4장 41-43절입니다. 구약성경 268페이지입니다.
“때에 모세가 요단 이편 해 돋는 편에서 세 성읍을 구별하였으니 이는 과거에 원혐이 없이 부지중에 오살한 자로 그곳으로 도피케 하기 위함이며 그 한 성읍으로 도피한 자로 그 생명을 보전케 하기 위함이라 하나는 광야 평원에 있는 베셀이라 르우벤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길르앗 라못이라 갓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바산 골란이라 므낫세 지파를 위한 것이었더라”
여기 도피성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도피성이라는 것이 나오면 일단은 도피해서 살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전체가 왜 도피성이 아니냐 하는, 하나님께서 전체를 다 도피성 만들면 되는데, 왜 이스라엘 안에 또 따로 살 곳을 만들어야 하느냐, 그럼 나머지는 뭐가 되요. 이 도피성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자기 자리에는 없습니다. 없고, 레위지파가 사는 땅에만 도피성이 있어요.
레위지파는 48군데 장소, 그 중에 도피성은 아마 6군데인가 될 것 같은데, 민수기 35장에 보면 42군데 성읍이 있고 6군데가 따로 있어요. 그러면 레위지파하고 사는 것 하고 우리 사는 것 하고 다르다는 말입니까? 예, 다릅니다. 에이, 똑같은 땅위에서 사는데? 아니에요. 레위지파는 땅위에 살면서 땅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지파는 땅위에 살면서 이거는 내 땅이라고 우기는 지파고. 고런 차이가 나요.
그리고 또 차이는 뭐냐, 다른 지파가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농사가 될 것인 지, 안 될 것인지, 보장을 못 받습니다. 그거는 농사가 이 약속의 땅에서 잘되고 못되고는 다른 출처에 일어난 일로 결정이 나요. 레위지파가 제사를 바르게 드리면 레위지파뿐만 아니고 다른 지파가 덕을 보고, 아무리 그들이 농사를 제대로 지었다 할지라도 레위지파에서 제사가 잘못되어버리면 그 해 농사는 전부다 말아먹습니다. 뉴스에 보니까 전라도에 배추농사 짓는 사람들이 갈아엎는다고 난리에요. 뭔가 청와대에 문제가 있는가.
이거는 내 소유인데 내가 알아서 열심히 하겠다가 이스라엘나라에는 통하지를 않습니다. 너의 운명은 니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 달려있어요. 다른 곳이 원활하면 너도 절로 원활하고 다른 곳이 문제 생겨버리면 니가 아무리 애써도 그거는 다 소용없는 그러한 특징이 있습니다. 만약에 천국에 나와 여러분 자신들을 위해서 어떤 부서가 갖춰져 있다면, 부서 알지요? 개인적인 방이 있다면 그거는 더 이상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개인이라는 것이 용납이 안 돼요.
비행기 타고 가든지 ktx 타고 가게 되면 전부다 각자 자리가 있어요. 근데 그게 언제 깨지느냐 하면 비행기 타고 갈 때 갓난아이가 마구 울 때, 그 때 지정된 자리가 소용없습니다. 그 울음소리가 다 들리니까. 서울서 대구까지 두 시간 걸린다면, 출발할 때부터 갓난애가 울기시작하면 이거는 밤 열시고 열한시고 관계없어요. 잠 다 잤어요. 계속 울어대요. 뭐 다른 자리 가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다른 자리는 이미 좌석이 꽉 차있으니까. 금요일 저녁에는 자리가 없어요. 다 차요.
근데 하필 그 객석에 애가 하나 울었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승객들 다 우는 공동체죠. 그 애 우는 것에 다 같이 이제는 하나가 되는 겁니다. 용납이 돼요. 비행기 타고 갔다, 비행기 탔는데 한 사람이 술 먹고 행패를 부린다, 근데 그게 바비킴이다, 할 수 없어요. 미국까지 그 술주정 받아내야 합니다. 문 열고 비행기 밖으로 집어던질 수가 없잖아요. 바비킴인데. 그래서 제가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은 장애가 발생됨으로써 하나의 공동체로 확인되는 겁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바로 의도하지 않은 장애를 일부러 생산해내요. 의도하지 않은 장애를. 사람은 말썽이 없고 탈이 없으면 지가 지금, 자기 나름대로 잘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복을 받는다고 생각을 해요. 방금 제가 말한 것처럼 내 잘하고 못하는 것하고는 상관없어요. 다른데서 잘하고 있는 것에 따라서 내가 혜택을 입는 식으로, 공짜로 선물 받는 식으로 살아가는데, 우리는 아무 일이 없으면요, “역시 나는 인생 제대로 살았어.” 자기 잘난 맛에 그런 편안한, 말썽 없는 인생을, 평탄한 인생을 살아간다고 오해하는 겁니다.
항상 장애요소를 유발하게 되어 있어요. 말씀에는. 장애요소가 자극이 되고, 자극이 될 때, 우리는 내 중심의 구조가 아니고, 내 구조가 아닌, 다른 분의 구조 안에서 우리는 그냥 같은 상황 속에 놓여있다는, 그 필드 안에 놓여있다는 것을 다시 새롭게 느끼게 되는 겁니다. 마술사들이 마술을 할 때 보면 참 신기하죠. 근데 그 마술사들의 조건이 있어요. 마술을 벌리는 모든 기구는 본인들이 집에서 가져온 거예요. 여자 있는데, 여자 중간을 톱으로 끊었는데, 너무 놀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반씩 분리된 몸체가 다시 합쳐서, 천 하나만 슬쩍 얹었을 뿐인데, 천 거두니까 여자가 멀쩡하게 나오더라 이 말이죠.
진짜 마술사면 그렇게 기구를 집에서 가져오지 말고, 현장에서 여자 하나 불러내가지고, 톱도 지가 가져오지 말고, 현장에 있던 톱으로 가리지 말고 슬근슬근 톱질해야 돼요. 그래야 마술사인데, 마술사의 모든 기구는 꼭 중요할 때 천으로 덮어가지고 고렇게 자기만 아는 식으로 하죠. 율법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켰다 어겼다 하는 그 조항을 하나님이 율법 안에 같이 그걸 하나님이 따로 만들어요. 만들어놓고 하나님이 아는 그 구조와 그 현실 판과 그리고 그걸 구경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 판이 이렇게 조금만 지나면 또 차이 나고 또 구별되고 갈라지고 벌어진다는 겁니다.
장애요소, 어떤 방해요소, 순탄치 않는 요소가 등장해야 내가 살아왔던 모든 그 새로움이 그 장애요소 사건으로 말미암아 끝이 나고 사건 안에 포함된 새로운 시간이 또 새로운 미래로 우리에게 열려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1 2 3 4 5 6 7 8 9 10이 아니고 1 2 3 4 5 6 7 또 1 2 3 4 5 6 7, 또 1 2 3 4 5 6 7 계속 7로 가요. 7x7=49+1=50 희년. 이처럼 1 2 3 4 5 6 7로 끝나는 것은, 마술사가 마술의 새로움을 창조하는 기계는 하나님 쪽에서 준비하지 우리 쪽에서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1 2 3 4 5 6 7이 아쉬워요. 그냥 뭐 2746, 3689, 계속 가고 싶어요. 1234...근데 끊어줍니다. 끊어줄 때, 우리가 미처 예상 못한 새로움이 또 등장하는 겁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하다가 나이 뭐 칠십사셨다, 팔십사셨다 하는데,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은 서른 세 살 까지만 사셨거든요. 사실은 서른세 살 이상 사는 사람들 다 제대해야 해요. 주님은 서른 세 살 까지만 살아도 천국 가는데 주님은 아무 지장 없었습니다. 팔십을 살았다면 팔십 사신 그것이 사실은 팔십 살았다고 하지 말고 그걸 도로 삼십 삼 세의 인생에다가 압축이 돼야 되는데, 압축되는 방법은 말씀을 통해서 나의 팔십 여섯의 인생은 철회시키고 주님이 만든 33세의 예수님의 공생애에 이걸 갈아탈 수 있어야 돼요.
갈아탈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늘 우리 어머니는 32년 10개월. 32년 10개월. 늘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좋겠어요. 늘 내 인생은 아무리 길어봐야, 백 살 살아봐야 내 인생으로 구원받는 법은 없고, 율법 완성인 예수님의 공생애로 인하여 내가 그 시간대에 합류함으로 내가 구원된다는 그 생각을 늘 가졌으면 좋겠는데, 그게 우리 마음대로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율법에 입각한, 율법의 완성에 입각한 사태가 우리 인생 속에 잠입해, 스며 들어와요. 강제로 끼어들어 온다고요.
그 강제로 끼어들어온 표현을 제가 울산강의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요구르트에 강제로 빨대를 꽂아버리면 뻥하고 구멍이 뚫리죠. 그러면 출렁이는 요구르트가 보고 “누군데 우리 지붕 위다 함부로 구멍 뚫습니까?” 이래 되겠죠. 고게 잠입이에요. 빙그레 바나나 우유를 위에 껍데기를 떼 내야 되는데 이거는 빨대로 그냥, 이거는 난입한 거예요. 과도 들고 뛰어든 거예요. 그냥 빨대로 뛰어든 거예요. 그러면 뻥하고 구멍 뚫리고, 그 구멍에서 천국에 합당한 시간과 거기에 들어간 예수님의 용서의 피를 빨대를 통해서 그냥 쏟아지니까, 남들은 그냥 이 세상만 쳐다보다가,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 위아래 위위 아래 해가지고 우리는 위만 쳐다보고 살면 되는 거예요. 오늘 집에 가서 위아래 노래 좀 들어보세요.
위를 쳐다보고 사는 겁니다. 위를. 빨대가 꽂힌. 그러한 방식이 구약에서는 뭐냐, 도피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도피성. 그렇다면 도피성은 어떤 장소가 아니고 장소를 차지하면서 장소 없다가 되는 겁니다. 도피성은 장차 올 신약 때의 천국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에 자리는 있어도 그 자리와, 그 기존의 자리와 바깥 자리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면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다른 장소는 지 수명대로 살면 되지만 이 도피성은 거기에 시한의 한계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민수기 35장 25절에 보면은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 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 제사장이 죽을 때 까지만 거기 머물 것이라.
여기 도피성에 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완전히 자기 인생에 장애요소가 발생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살인한 자에요. 살인자로 몰린 사람입니다. 고의가 아닌데. 예를 들어서 밭을 갈다가 호미 자루가 빠져서, 그 아래 도로가 있어 차가 가는데, 차도 뚜껑 없는 차였는데, 그 차 안에 어떤 어린애가 타고 있었는데, 호미가 두 바퀴 반을 돌아 착지해서 애 머리를 때렸는데 죽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살인자 되는 순간입니다. 이거는 자기 인생에, 그 때 호미로 밭을 갈 때가 46세라도 고 순간을 통해서 33세까지 살았던 예수님의 생애 시간에 관여하는, 개입하는, 또 주님의 공생애의 시간이 내 인생에 강제로 잠입해오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근데 그 애가 바보 같은 애가 아니고 아이큐가 150이 넘고 어릴 때부터 한자를 다 뗐네. 4살인데. 그것도 애가 세 명이 되는 게 아니고 딱 그 애 하나밖에 없는데, 천재로 키우기 위해서 온갖 것을 다하고. 그 애가 네 살이지만 일주일 뒤에 미국으로 유학가게 되어 있는 애인데, 웬 난데없는 호미를 맞아가지고 죽어버렸을 때, 엄마 아빠가 차에서 내려 밭가는 사람 잡아가지고 체포해서 고소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죽은 애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그 분이 안 풀려가지고 이제는, 그리고 고소했는데 고의가 아니라고 해서 과실치사로 벌금형 정지밖에 안 되었을 때, 화가 나서 니도 한번 니 자식 죽어봐라 해서 도끼 들고 칼 들고 설치고 들어오니까 그 사람 어디 갈 수 밖에 없느냐, 도피성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어요. 도피성으로.
땅이 있는데 땅이 없는 땅. 이 땅이 아닌 땅. 그렇다면 그 사람은 도피성 바깥에는 죽은 목숨이에요. 그리고 그 죽은 애, 뚜껑 없는 차타고 가다고 죽은 그 애의 삼촌이 태권도 8단이고 고모가 태권도 국가대표 하다가 호위무사하고 큰 아버지가 또 레슬링 선수고, 온 집안이 그 사람 죽이려고 달려들 때, 그 사람은 그 바깥에 나가면 죽어요. 따라서 도피성에 가야 법적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그래서 이거는 하나님의 조작된, 하나님의 의도된 낯선 인생을, 그 사람은 레위지파가 사는 곳에서, 레위지파도 아닌 자가 레위지파에 들어와서 사는데, 그 사람의 목숨 값은, 본인은 이미 박탈당하고 그 사람의 목숨 값은 제사장의 목숨 값으로 대체되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목숨 값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예수님의 목숨 값, 곧 하나님의 의죠.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자기는 영원한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그 법칙을, 그 율법의 법칙을, 마술사의 그 희한한 법칙을, 죽어도 다시 잘려진 여자의 몸체가 결합되는 그것이 도피성 안에서 마술처럼 신기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실입니다. 구약 때에 도피성에 간 사람이 다시 자유로운 몸이 되어 살아 온 것이 그 사람에게는 신기하게 보이는 것처럼, 이 시대는 십자가 피를 믿는 사람은 신기하게, 세리든, 창기든, 강도든, 관계없이 신기하게 지금 천국 가 있어요. 돈만 밝히는 그 세리가 지금 천국 가 있다니까요.
사기 당한 사람은 지옥에 가 있고 사기 친 사람은 천국 가 있고. 지난 시간 주일 낮 설교에서 음행한 사람은 천국 가 있고 음행 했다고 고소한 사람은 지옥 가 있고. 세상에 뭐 이런 판이 다 있느냐. 그게 니 인생하고 예수님 공생애 인생하고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실 속에 다른 현실이 있었던 거예요. 위아래, 위위 아래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신앙생활, 종교생활 그거는 참 위험한 겁니다. 그거는. 자기 도 닦는 거 밖에 안 되거든요. “내 인생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라는 반복적인 행위밖에 안 돼요. 그래가지고서는 천국 간다고? 처음부터 천국 가지마! 사람이 처음부터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서 이미 죄인으로 확정된 상태에서 살면 되는데, 거기서 죄인 된 입장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동원한다는 그 심보는 정말 더러운 심보에요.
주제파악도 못한 심보에요. “니가 뭔데 천국을 가? 아이구 웃기는 애 봤네. 왜 천국 가야해? 니가?” “그래도 혹시나??” “혹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혹시나가 역시나로 끝나버려요. 죄인이면 죄인답게 “주여, 지옥 보내주소서” 이래야 되죠. 지옥 간다는 사람은 결국 천국가고 안 가려고 애쓴 사람은 지옥가고. 수시모집이라니까요. 죄인인 사람은 천국가고. 잘나고 애쓴 사람은 지옥가고. 성경은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야 그게 보입니다. 신과 나의 존재의 만남으로는 그게, 절대로 성경은 바리새인밖에 안 됩니다. 지옥 간 바리새인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도피성의 제사장은 뭘 의미하느냐. 거룩한 땅에는 인간의 배설물이 나와 버리면 다 더러워요. 피부 바깥으로 나오는 것, 다 더러워요. 피를 흘리는 것, 모든 게 더러워요. 그래서 민수기 35장은 이 땅에는 더러운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더욱더 저주가 일어나니까. 피 안에는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더러운 생명으로 확정된 상태에서 그 더러운 생명이 이 깨끗한 생명에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땅이, 약속의 땅이 유지되는 것은 니 피 말고 다른 분의 피, 마지막 아담의 피, 오실 메시아의 피만이 사는데 그 피의 관리자가 누구냐, 그 당시의 대제사장입니다.
피가 다른 거예요. 피가. 우리 피하고 주님 피하고 달라요. 베드로가 자기 목숨 내놓고 천국가려고 껍죽대다가 단칼에, 니는 죽어도 내 못 따라온다. 죽어도 갈 수 없는 곳에 내가 간다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아무리 우리가 이 땅에서 구원받고자 시도해도 다 헛짓이 되는 거예요. 헛짓이. 그러면 구약에서 신약으로 어떻게 넘어옵니까? 여러분들이 롤러에다가 이렇게, 둥그런 롤러 있죠? 롤러에다가 끈끈이를 붙여놓고 여름에 놔두면 파리가 한 마리 달라붙죠. 그러면 롤러를 한번 돌려보세요. 파리가 있다 하는 것이 나중에 돌려보면 파리가 없다가 되죠.
왜? 고 지평선이 자꾸 넘어가니까.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계속 가잖아요. 이렇게 지평선 하듯이, 도피성이라는 곳이 있고, 그걸 돌려버리면 나중에 등장하는 것이 도피성에 부합되는 새로운 예수님의 세계가 도피성과 결부되어서 새로운 지평선에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도피성처럼 집 지어 놓고, 여기로 피하세요. 우리 기도원은 영빨이 쎕니다. 그거는 옛날 구약 때 시대에요. 사울 왕 같은 사람은요, 사무엘이 있는 기도원 근처만 가도 벌거벗고 하나님의 신으로 예언했어요. 근데 뭐 요새도 그런, 하여튼 갈멜산 기도원 있다 하면 갈멜산 기도원부터 뭐 사람들이 반하기 시작해요. 터가 보통 터가 아닌 모양이라.
그거를 롤러로 봐야, 옛날 구약 때 시대라니까요. 실제로 그런걸 뭐 느꼈는데, 옛날에 신학교 다닐 때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야 하는 줄 알고 기도원에 찾아다닐 때, 옛날 양산 통도사 근처에 가면 무슨 유명한 기도원이 있어요. 기도원 이름은 잊어버렸어요. 갈멜산 기도원은 딴 데 있고. 대구에 유명한 기도원은 무학산 기도원이라고, 음식이 별로 안 좋아요. 무학산 기도원. 근데 교인들은 거기 올 때부터 벌써 기를 받았어요. 올라갈 때부터 할렐루야! 할렐루야! 3보 1배 하듯이 하여튼 그런 심정으로. 기도처가 저 바위 괜찮겠나 하면서 지가 마음 추슬러요. 마치 논산 훈련소 들어갈 때 머리 깎고 들어가는 것처럼.
새롭게 오는, 새 시대라는 이것은 그런 눈에 띄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의 반복으로 주어지는데, 그거는 율법의, 전 세계가 롤러에서, 전 세계가 지배를 받아요.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그 십자가가 거침돌로써, 장애요소로서 찾아오는 겁니다. “나는 부자 되었다.” 했는데 갑자기 십자가 등장할 때, “그래 그것도 소용없어.” “니 영혼 돈 많나?” “예” “니 영혼 데려가 줄게” 하면 “아이구 저게 무슨 소리냐?” 갑자기 어떤 난입함, 요구르트에 빨대 꽂히는 것처럼. 십자가 사건이 쳐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이 바로 도피성에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오늘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그런 사람을 가지고 두 번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두 번 산다는 것이 드라마이야기가 아니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두 번째 사망, 두 번째 부활이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 말고 예수 안에서 죽느냐 사느냐, 그게 롤러를 끝까지 땡겨 버리면 십자가 안에서 그게 결정되는 거예요.
십자가가라는 도피성에서는 왜 구원되느냐, 그게 예수님이 제사장이 되어서 주의 천국을 이루는데 조금도 하자 없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의 피만으로 성취된다고,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그렇게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약속이 밀려와서, 우리는 마술사 조수도 아닌 것이 마술사 속에, 기구 속에 빨려 들어 가가지고, 우리는 천사들 보는데 앞에서 “나 세리인데 살았지롱~” 하고 마술을 보여주는 기능인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피성 장치 괜히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 놓칠 것이 없이 십자가를 증거 하는데 다 재료가 된 것처럼 오늘날 저희들이 모든 일상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재료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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