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16강-형상 (신4;15-18) 15020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2. 6. 08:39
2015-02-01 14:58:37조회 : 87         
   형상 150201이름 : 이근호  

형상(신명기 4:15-18)

음성             동영상

 이근호15-02-01 15:38 
형상 

2015월 2월 1일                            본문 말씀: 신명기 4:15-18 

(4:15) 여호와께서 호렙 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4:16)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4:17)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4:18)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사람들은 보는 것으로부터 일을 시작하게 마련입니다. 신을 믿는 일이던, 땅을 파는 일이던, 고기 잡는 일이던 일단 눈으로 손으로 뭔가 그 대상의 존재성이 잡혀들어올 때 상대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다 대고 일하는 자는 바보이지요. 따라서 누구를 상대한다는 것은 일단 상대방의 존재성이 특정한 지점을 점유하는 상태이어야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섬기는 것도 과연 이런 식으로 가능할까요? 물론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모두 다 가능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바가 그런 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직접 물어보면, 하나님은 아니라 고 답변하십니다. 하나님은 ‘형상없이 나를 섬겨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을 내리신 상황이 불 붙고 있는 시내산 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산 밑에서 둑딱둑딱 하나님의 형상 만들기를 시도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냥 그 분위가 너무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형상이든 하나님 형상을 마“라는 명령이 실제로 이루어지려면 단지 말씀 뿐만 아니라 이 초기 상황이 재현되어야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시내산 위에서 불이 꺼지고, 산 밑에서는 백성이 떠난 자리에 바람만 휑〜하게 불 뿐입니다. 그 자리를 떠난 이후에 이스라엘에게는 신의 형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는 “형상 만들지 마”라는 명령은 이미 인간 내부에 나름대로 형상 꾸미기를 통해서 신과의 접촉하는 성품을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주신 말씀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신이란 각양 우수하고 좋은 것들의 결집체입니다. 인간에게 잇어 ‘좋다’, ‘아름답다’, ‘선하다’라는 것은 개인의 특성에 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신을 떠올리면서 나타나는 이미지가 같을 리가 없습니다. 인간의 두뇌는 어떤 개념을 생각하면서 머리 속에 ‘그림’을 일단 그려놓는 방식으로 개념을 정립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을 염두에 둘 때도 신에 대한 인상을 머리 속에 그려놓게 마련입니다. 아무 것도 그리지 않고 신을 떠올리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내 형상 만들지 마’라고 지시하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본 자리로 끌어오기 위한 방법이십니다. 즉 ‘형상에 대한 지시 위반자’의 자격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다루시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이스라엘의 자리는 그들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그곳은 ‘불붙는 시내산 아래’입니다. 즉 형상 만들기 말라는 말씀에 대한 위반이 이스라엘의 본래의 자리에 되돌아가는 능력의 말씀이 됩니다. 그곳은 바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로 무서운 자리입니다. 감히 시내산 밑에서 형상 만들 생각을 못하고, 더나아가 화염에 덮힌 시내산을 쳐다보면서, 자아에게 그 화염이 도달되어 자신이 타 죽어 마땅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착하고, 선하고, 아름답고, 곱고, 귀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다 소멸되어버립니다. 그저 무섭고 떨릴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문턱 앞에 놓이게 되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그 길 앞에 놓여있는 바가 됩니다. 창세기 3:24에 보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화염검이 늘 순찰한다는 겁니다. 화염검이란 움직이나 불 붙은 칼이요 천사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은 이 세상 속에서는 ‘무(無)-형상’이 아니라 ‘다(多)-형상’입니다. 너무 형상이 없어서 특정 형상이 없는 바가 됩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나타나는 형상은 그 천사가 해야 될 기능과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유혹당할 기능이라면 소돔과 고모라 성에 나타난 두 천사는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얍복강가에 나타난 천사는 야곱으로부터 위협이 되는 형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인간이 시도하는 무-형상 작업으로 에덴의 문턱을 도로 넘어갈 수 없음을 확실하게 해두시려는 겁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과 만남은 무(無)-형상이 아니라 인간의 속성이 그대로 폭로되는 식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방석처럼 활용됩니다. 그 방석 밑에서 도르래가 깔려있는 신약 때까지 이끌림을 당합니다. 신약에 가면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하나님의 형상은 불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다 무서워합니다. 감히 그 앞에서 형상을 따로 만들 마음을 먹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다시 창조 때의 그 인간으로 귀환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이미 인간 마음들이 항상 ‘자기를 위해’ 신의 형상 만들기에 나선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간주하시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신처럼 행세하기에 신의 형상이란 실은 자신의 자랑거리로 뭉쳐진 자아 이미지의 형상화입니다. 신은 자아에 대한 멋진 이미지의 투영입니다. 그래서 다시 자기 잘남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의 형상을 실제 신이라고 절대로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다만 신을 섬기기 위해 정신을 모으기 위한 상징물에 불과합니다,”라고 변명합니다. 

이는 자신이 곧 신임을 감추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렇게 단단하게 굳어진 지아상을 이끌어내면서 이 자아상을 방석이 실어서 신약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까지 끌어당깁니다. 거기서 성도는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그것은 ‘피’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자기 신체에다 면도질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로부터 공격받아서 생긴 피입니다. 신명기 시내산 밑에서 불이 무서워서 떨었던 그 인간들이 신약에 와서 피가 쓸데없는 과도한 지적질이라고 여겨서 외면해버립니다. 자비로운 예수상을 사람들은 찾지 피흘리심의 기능 그 자체를 찾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신약 시대에 깔고 앉은 방식은 ‘예수님 안’입니다. 

곧 예수님의 피흘리심이 있어서 체결되는 언약입니다. 거기서 성도는 가해자가 되고 예수님만 피해자가 됩니다. 즉 신을 찾겠다고 나선 그 인간의 행위마저 피 앞에서 죄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의 자기 형상 외에는 마음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피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최종적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피 앞에서 ‘나’라는 신은 이미 악마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5-02-05 17:33 
16강-신 4장 15-18(형상)1502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4장 15-18절입니다. 구약성경 267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방금 읽었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화염 가운데서 그 당시 있었던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봤냐?” 묻는 거예요. “우리는 못 봤습니다. 불 이외에는 못 봤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 못 봤지?” “못 봤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하나님, ‘나’라고 여기고 형상 만들지 말라!” 그 이야기거든요. 그렇다면 문제가, 이 지시에 대해서 굉장히 우리는 아, 이런 일 같으면 우리가 충분히 행동에 옮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러나 그거는 오산이고요. “하나님의 형상을 못 봤습니다. 불밖에 못 봤습니다. 형상은 없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화염이 있는 속에서, 하나님의 무서운 불구덩이에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만났던 그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형상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실천에 실제로 옮기려면 우리 자리가 어떤 자리여야 하면 불구덩이 속에 있을 자리, 그리고 하나님도 불로써만 나타나고 다른 모습이 없는 자리 같으면 우리는 형상을 만들래도 만들 수 없는, 안 만들겠지요. 그렇지요? 우리의 자리가 그 시내산 밑에서, 그 시내산이 그냥 시내산이 아니고, 지금이 시내산이 아니고, 불붙는 시내산, 실제로 불길이 솟는 그 시내산, 그 찰각한 그 순간, 스냅사진 찍듯이 그 찰나적인 그 순간, 불붙었고, 우리는 밑에 있었고, 그리고 거기서 나온 말씀이 ‘형상 만들지 말라’는 말씀 들었고, 그 상황이 유지된다면 형상을 만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 시내산이 불이 안 붙었고, 혹시 누가 불장난했는지는 모르지만, 불이 안 붙었고, 이미 그 밑에 백성들은 시내산을 떠났고, 그 상황 아니고, 신은 섬겨야 되겠고, 그럴 때, 백성들은 뭔가, 신의 형상을 만들 필요가 있는 이유가 생기게 된 겁니다. 이슬람교에서는 뭐냐 하면, 이슬람교는 구약을 믿거든요. 믿는 건지, 이용하는 건지 분간은 안 가지만 하여튼 구약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형상을 만들지 않는 형상을 만들어요. 그게 뭐냐 하면, 코란이라는 글자를, 그 모스크라는 이슬람 성전에 온 벽에다 디자인을, 아람어 글자로만 쭉 새겨놓고 이렇게 합니다. “우리는 형상 안 만들었지롱~” 이렇게 이야기해요. 

설교 다시 해볼까요. 그거 형상 입니까? 아닙니까? 참 질문이 어렵습니다. 그게 형상이겠어요? 아니겠어요? 그것도 형상이에요.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불붙는 하나님을 안 보고 있고, 그들의 자리가 시내산 밑이 아니고, 뜨거운 화기를 느끼지 않는 이상은, 그들이 뭐를 어떻게 피하든 간에, 형상 안 만들려고 애를 쓰던 간에, 그들은 지금 자기를 위하여 형상을 만든 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주신 것은, 니들이 결국은 형상 만들면서 이 시내산 밑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한 것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한 것이 아니고요, 니가 있는 자리, 우리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요, 우리가 있는, 불붙은 시내산 밑에 그 자리보고 이야기 한 겁니다. 이 이야기가 더 어려운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방석을 깔고 앉아 있는데, 형상 만들지 말라고 한 이야기는 방석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근데 방석에 앉아 있는 자기들 보고 이야기한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겁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 말씀을 마치 하나님이 우리보고 이야기 한 것으로 오해하잖아요? 근데 우리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깔고 있는, 우리를 떠받치고 있는 그 자리, 예수 안이라는 자리보고 이야기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니가 속해 있는 예수 안은 돈 사랑 안 해도 구원받는 자리라는 겁니다. 돈 사랑 안 해도, 반대로 이야기하면 돈 사랑 해도 구원받는 자리에요. 니가 돈을 사랑하지 않을 때만 보존한다는 자리가 아니고, 돈을 사랑하나 안 하나 구원받는데, 니는 필히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에 의해서 위배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가 니한테 예수 안이라는 십자가 방석을 깔아놨다는 겁니다. 

방석 없이 돈을 사랑하지 말라 하면, “예. 돈 사랑하지 않을게요.” 그러면 우리는 방석 없이 돈 사랑 안 하는 사람이 돼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은 없어요. 그런 인간 같으면 우리는 구약시대지, 신약시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피와 내 살이라는 그 언약이 투입될 하등의 여지가 없이 돼버려요. “내 살과 내 피로 구원받는다.” 하면 우리는 뭐라고 하냐면, “주님이여! 우리는 그런 것 필요 없습니다. 제가 주님 말씀 지켜서 구원받을게요.” 이러면 주님의 십자가 피가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아니, 잘났는데, 잘나도 너무 잘났는데, 어떻게 그게 왜 필요한데요? 우리가 못났으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가 필요하거든요. 이거는 이해되시죠? 우리가 못났으니까. 문제는 우리가 어떤 점에서 못나며, 어느 정도로 못났는가를, 그거는 차후에 좀 들어야 되는데, 그거는 이상하게 듣기 싫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찾아갑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하는 순간, 우리는 가난했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부자 됐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돈을 사랑했다는 내 마음의 문제 때문에 우리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죠. 그걸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니는 형상 만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뭐든지. 형상 만들게 돼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여기 15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죠.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습니다. 자, 그러면 이걸 제가 잠시 말을 바꾸겠습니다. 만일 그들이 어떤 형상을 봤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형상을 봤다면? 

형상을 봤다면, 사람들은 옛날에 형상을 봤기 때문에 그 다음에 대대로 어떤 하나님을 섬기느냐 하면, 그 선조가, 선배가 봤던 형상을 그대로 만들어서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섬길 수밖에 없는 그 자질과 성질을 우리가 타고난 거예요. 타고났다니까요. 아무 형상을 보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사람들은 어떤 형상을 만들까요? 거기에 대한 질문에 답변은 간단합니다. 아무 형상도 없는 형상을 만들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아무 형상도 안 만들면 그거는 형상 만든 게 돼요. 참, 제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닙니다만. 설교 다시 시작합시다. 지금 사람은, 신약에서 정답은 이거에요. 우리 힘으로 구원 못 받고, 방석을 깔아줘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정답이거든요. 근데 이게 정답이라고 해놓고 다시 구약 신명기에 와버리면, 와서 주의 명령을 들어버리면 우리는 무슨 존재를 잊어버리느냐 하면, 방석 존재를 잊어버리고, “야! 방금 주의 말씀 떨어졌어. 우리 같은 성도니까 지키자.” “그래, 지키자.” 갑자기 방석은 날아가 버리고 지키자로 나오는 거예요. 지키자로 나오니까, 형상 만들지 말라고 하면, 또 우리는 뭐라고 하냐면 형상 안 만들겠습니다로 나오는 거예요. 근데 형상 안 만들겠다고 하는 것이 뭔 뜻이냐 하면, 만약에 진짜 형상을 보여주신다면 그 형상대로 만들 가능성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명령을 줄 때는 니가 어떤 ‘하라’ ‘하지마라’ 하는 것은, ‘하라’는 것은 어떤 안 할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고, ‘하지마라’ 하는 것은 그걸 할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준 것은 죄를 더하기 위함이고 그 죄는 우리 안에 장착되어 있거든요. 괜히 말을 어렵게 해가지고, 좀 쉽게 갑시다. 여기 그 뒤에 18절에 보면, “땅 위에 기는 거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거나”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의 뜻은 이거예요. 내가 창조 때 그 모습 아니면 내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 땅에 있는 것, 물속에 있는 것, 전부다 창조 때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창조 때, 그때서 만나자는 이야기입니다. 창조의 자리에서 만나자는 겁니다. 근데 이거는 인간에게 터무니없는 요구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만들어진 이상에는 창조 때로 되돌아 갈 수가 없습니다. 창조 때와 그 이후 때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이미 인간이 변질돼버린 사건이 있기 때문에, 변질된 사건을 도로 타넘어서 변질되기 전으로 도로 돌아설 수가 없어요. 우리 조상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잖아요. 쫓겨났으면 도로 돌아가면 된다고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회사에 들어갔다. 근데 쫓겨났다. 그러면 어디로 돌아가야 하냐면 쫓겨난 자리로 다시 들어가면 된다 이 말이죠. 돌아가서 사장 나오라고 고함지르면 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내시고 다시 돌아올까 싶어서 천사를 배치해서 못 들어오게 했다 이 말이죠. 못 들어오게 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원래 자리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그러한 존재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근데 못 돌아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처음으로 돌아가라고 지금 주께서 요구를 하고 계시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잊어버린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못 돌아가느냐 하는 그 요소를, 주의 명령을 통해서 그 본래 자리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서 그것이 하나둘씩 전부다 노출되게 되어 있고 그게 다 발각되게 돼있어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그 말씀을 통해서 인간은 반드시 형상을 생각하고서 신을 믿게 되는 것이 니 본질이고 본성이라는 겁니다. 꿈에 예수님 보신 적이 더러 계실 거예요. 예수님 보신 적이. 그럼 저는 묻죠. “그게 마귀가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증거를 대세요.” 그러면 뭐라고 답변합니까? “내가 예수라면 예수인거예요.” 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성경에 보면 이미 예수님을 봤잖아요. 봤는데, 시내산 밑에서는 하나님이 말합니다. “니가 나를 본 적이 있느냐?” 보니까 불밖에 없는 거예요. “본 적 없습니다.” “본 적 없지? 앞으로 봤다고 한 인간들 다 손들어! 다 매 맞을 준비해!” 이런다 이 말이죠. 

근데, 인간은 신이라는 이미지, 신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 그 이미지와 유사한 것을, 온갖 지가 본 것 중에서 조립을 해가지고. 짜 맞추게 돼있어요. ‘신은 착하다.’ 그러면 자기 중에서 착한 사람, 인상을 골라내는 거예요. 뭐, 그런 모습을 멀리서 찾을 것 없죠. 부처보세요. 부처가 눈썹이 얼마나 순하게 생겼어요. 화내는 부처 제가 못 봤거든요. 부처는 전부다, 특히 부처가 관상학적으로 대단한 관상입니다. 특히 귀가 길어요. 귀가 긴 사람은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귀가 긴 사람이 많답니다. 이마가 넓고. 노태우도 귀가 길걸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인상 좋은 것들은 다 뽑아서, 그걸 신의 자비하심이라는 본드 갖고 붙여서, 이게 내가 그리워하고 있는 신의 이미지로 그려놓고 있는 거예요. 마음속으로 그려놓고 손으로 직접 조각하지 않았다고, “주여, 저는 신을 형상 만들 없습니다.” 라고 이렇게 우기는 겁니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하라는 사람이 유명한 말을 한 거예요. “모든 인간의 신은 자기의 모습의 투영이다.” 그래서 신의 모습이 다 달라요. 자기 모습의 투영이거든요. 자신을 확대한 거예요. 자기의 사진을 포샵한 게 신입니다. 내가 믿는 신이에요.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을 정리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니는 내 있는 곳에 못 온다는 겁니다. 니 힘으로는 내 있는 곳에 합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창조를 거스릴 수 없다는 겁니다. 반드시 너는 어떤 형상이든 있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누가 지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쪽에서, 예수님 쪽에서 이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지킵니다. 그러면 어떻게 지킵니까? 온갖 형상을 다 만들어서 지킵니다. 

성경에서 천사들이 나오거든요. 천사들이 나올 때 사람들이 천사들을 숭배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천사가 나올 때 그 천사의 모습이 꼭 사람모습이에요. 마노아 가정도 그렇고, 소돔과 고모라에 있던 천사의 모습은 완전히 꽃미남, 요즘 같으면 아주 잘생긴 아이돌 가수, 뭐, 현빈 정도, 한 번에 봐도 와! 너무 잘생겼다고 할 정도로. 정말 아름다운 모습으로 왔습니다. 그러면 천사가 늘 아름다우냐, 또 그건 아니에요. 천사는, 언제 그런 이야기 했죠. 천사의 모양새는 그 자리에서 지가 맡은 기능과 관련되어서 적합한 형상으로 그때그때 달라요. 형상은 그때그때 달라요. 그러니까 주님의 형상은, 우리가 주님의 형상을 만들 수 없는 이유가 주님의 형상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너무 많아서. 하나 콕 집어서 형상이라 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형상이라는 것을 가지고, 어떤 특정한 것을 형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은, 결국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냐면, 주님의 기능에 초점을 맞춰야 돼요. 주님의 기능에. 형상이 아니고 어떤 기능에. 

이제부터 본론 들어갑니다. A.D.8세기경에, 726년인지, 동로마하고 서로마하고 갈라질 때에, 그때에 로마황제가 네오 3세인데, 네오, 기억하기 좋아요. 밀림의 왕자 네오. 네오 3세가 어떤 신의 형상도 다 만들지 말라 해서, 그 신의 형상을, 성상파괴운동이 벌어집니다. 신의 성상을 파괴시켜요. 동로마에서. 그럴 때, 많은 학자들이 반대했어요. “황제님. 그거 부순다고 사람들이 신의 형상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형상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동상이나 모양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걸 통해서 신의 이미지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하나의 도구로 잠시 사용할 뿐이지, 여기에 무슨 신기한 능력이 나온다고 해서 그걸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형상 그만 부수고, 이콘, 또는 아이콘, 신에 대한 어떤 상징물, 그런 그림도 찢지 마시고 그냥 그게 신앙에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요즘 우리가 어디서 들을 수 있냐 하면, 절에 가서 들을 수 있어요. 스님들이 아주 안타까워합니다. 가슴을 치면서. “너희들은 부처를 섬기지, 우리들은 절대로 부처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부처의 금신상, 부처의 돌신상, 갓바위는 그냥 우리의 부처님의 자비의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환기시키기 위해서, 자극하기 위해서, 잠시 이용할 뿐이지 결코 우리는 돌부처를 섬기는 것이 아니고, 부처의 금신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거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다 거짓말이에요. 왜, 거짓말이냐면, 진짜 그들이 부처를 섬기는 것도 아니고, 돌부처를 섬기는 것도 아닌 것이 맞아요. 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을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감추기 위해서, 우회적인, 상징적이라고 하면서 신적인 존재를 다른 어떤 상징물, 부처라든지 예수십자가라든지 이런 걸 통해서 실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자기 자부심을 감추는 시도로 그렇게 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모든 것을 자기만 위해서 살아가는 그 성품을 감추기 위해서, 나는 나를 섬기지 않고 신을 섬긴다는 핑계로 그런 것들을 해놓고, 그것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그렇게 하면서 마치 그걸 내가 스스로 부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근데 오늘 본문에 봅시다. 여기 16절에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했거든요. 하나님께서 형상 만들지 말라는 이유가, 여기 ‘자기를 위해서’ 라는 그것은 이미 창조 이후에, 인간이 문턱을 넘어버렸어요. 죄 속에 들어오고 난 뒤에는 인간은 자기 외에는 아무것도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아시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 다시 말해서 자기를 위한 신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제 끝으로 그러면 이 말씀을 왜 주셨는가. 제가 아까 방석이야기 했죠. 방석이야기 하면서 그 방석이 구약에는 고정된 방석이 아니고 신약으로 끌려들어가는 방석이 되는 겁니다. 방석 밑에 도르래가 있어가지고, 바퀴가 있어가지고, 방석에 앉아있으면, 주님께서 슬슬 잡아당기면 신약의 십자가까지 쿵 받치게 만들어요. 형상을 만들지 말라 라고 받쳐놓고 잡아당깁니다. 당겨버리면 마지막에 최종적인 형상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죄가 나옵니다. 그 죄가 나와요. 그 죄를 유도하기 위해서, 확산하기 위해서 형상 만들지 말라고, 자기를 위해서 형상 만들지 말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으려고 하고, 형상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겠죠. 바로 그것이 결국은, 그것이 모아져서, 나는 나를 위해서 살지도 않았고, 나는 형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가 뭉쳐지게 돼요. 이 뭉쳐진 것이 어디에 유효하냐면, 오신 메시야에, 메시야를 정통으로 죽여 버리는데 큰 힘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나는 이런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런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 갑니다. 나는 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나는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라는 그것이 뭉쳐져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는, 예수님이 필요 없는 존재로 이미 그 자체가 죄 덩어리가 된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진짜 하나님의 형상은 옛날에는 불이지만, 지금은 피다.”는 겁니다. “피” 그 피라는 것이 예수님 스스로 면도날로 째서 피낸 게 아닙니다. 누가 때려서 생긴 피거든요.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형상 만들지 말라는 모든 말씀과 그 외에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피와 만나게, 주선하기 위해서 밑에다 도르래를 깔아놓고 잡아 땡긴 거예요. 그러면 진짜 형상은 뭐냐, 예수님의, 옛날에는 무서운 불이었지만, 신약에는, 새 언약에는 내 살과 내 피,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불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못 봤죠. 신약에는 외면해서 못 봐요. 외면해서. 외면해요. ‘에이씨, 나는 하나님 섬기는데, 저 양반은 왜 피를 흘리지? 에이 나하고 상관없어.’ 그러면 예수님께서 니 때문에 내가 피 흘렸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만남을 주선하시는 거예요. 

그 놋뱀이야기 있죠. 놋뱀에서, 그 하나님께서 아주 재미난 일을 벌렸어요. 무슨 일이냐 하면, 사람들이 불평하니까 뱀이 와서 물었습니다. 뱀이 와서 물으니까 사람들이 모세에게 와서 요구하기를, 저 뱀을 치워달라고 했어요. 저 뱀을 멀리 가도록 해달라. 그래서 살게 해달라 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재밌는 것이 뭐냐 하면, 그 뱀을 치우는 것이 아니고 그 뱀을 딱 붙어서 동행하게 만들어버렸어요. 놋뱀을 만들고 놋뱀을 쳐다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니 실수와 니 죄와 더불어서 살게 되면 그게 사는 길이라는 거죠. 놋뱀을 치우는 것이 아니고 뱀한테 늘 물릴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아는 그것이 하나님과 근접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늘 깨닫는 식으로 동행이 되지, 그 외에는 없습니다. 그게 놋뱀과 같이 가는 거예요. 쳐다보면 삽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그 놋뱀이 예수님 본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내가 죽었다가 높이 들린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산다. 끝으로 한 가지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호주하고 한국하고 축구하는데 신경써가지고 두시간 동안 응원했습니다. 그런데 2대1로 졌습니다. 뭘로 보상할겁니까? 그 아픔을 뭘로 보상할 거예요? 십자가 피가 보상이 돼요. 축구 응원한다고 놋뱀을 못 쳐다봤어. 져도 괜찮은데 우리는 이겨야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냐면 축구를 이기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형상이 돼요. 보세요. 내가 있으매 우리는 형상을 매일 만들잖아요. 나에게 딱 맞춤, 맞춤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잖아요. 그때마다 신명기 4장을 생각해보세요. 너희가 형상을 본 적도 없는데 니가 형상을 만들고 있다. 그게 가짜다. 그게 죄다. 

우리는 주님의 방석 위에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내 입맛에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내고, 생산해내고, 조작해내고, 제작해내는, 우리의 죄의 솜씨에 화들짝 놀라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형상 만들지 말라 하셨지만 사실은 나 좋아라 하는 신을 날마다 만들고 있고 제작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 다시 한 번 놋뱀 쳐다보듯이 십자가 매일 생각하면서 이미 구원받았기에 죄가 노출되는 현상이 일어남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