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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5강-십계명과 돌판(신4;12-14) 1501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2. 6. 08:38
2015-01-25 14:56:18조회 : 136         
   십계명과 돌판 150125이름 : 이근호  

십계명과 돌판(신명기 4:12-14)

음성                  동영상

 이근호15-01-25 15:45 
십계명과 돌판 

2015년 1월 25일                            본문 말씀: 신명기 4:12-14 

(4:12)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4:13)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4:1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로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하게 하심이니라 

음성을 문자로 남기면 기록물이 됩니다. 그게 돌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문장으로 보존이 되면 음성의 순간성을 날아가버립니다. 사실 인간은 일시적으로 순간적인 보다 오래 보존이 가능한 형식을 원합니다. 그것은 인간들 마음밭이 이미 법적인 체제로 가동되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의 마음은 선과 악이라는 대조가 되는 속성이 서로 충돌하는 정신적 영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악쪽으로 많이 기울면 자신은 악인이 되고, 반대로 선쪽으로 많이 기울면 전체적으로 자아는 ‘선한 인물’이라고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판단이 가능하려면 순간적으로 소실되지 않는 바탕이 유지되는 것이 기본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늘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합니다. 자신에게 이미 장착되어 있는 선악체제에 의해서도 그다지 꿀리지 않는 선한 존재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을 노리고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그것은 바로 ‘나의 존속’입니다. ‘나의 영구성’입니다. 과연 십계명이 이런 결과를 야기시키기 위해 주셨을까요? 

아닙니다. 출애굽기 20:1에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출애굽을 한 의도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고자 십계명을 주셨다는 겁니다. 출애굽이란 ‘탈출’, ‘벗어남’, ‘이제는 그곳에 있지 않음’입니다. 이는 현재 살고 있는 곳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동을 명령하는 겁니다. 이동을 명령하시면서 왜 십계명을 주시지요? 그것은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언약으로 만들어버리면 이 언약을 기준으로 해서 악과 선, 그리고 빛과 어두움이 결정지어집니다. 즉 인간들이 자체적인 노력에 의해서 빛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언약의 일부로 함몰시켜 나가시려는 겁니다. 

인간이 자체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짓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의해서 구분되도록 십계명 받은 자들이 동원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언약 완성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입니다. 인간은 단지 출애굽 작업에 참여된 자가 됩니다. 출애굽 없이는 십계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출애굽이나 십계명이나 모두 언약에 속하게 됩니다. 

언약의 기입은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언약이나 십계명을 준수하는 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들은 주어진 말씀을 법제화해서 자기 마음내부에 장착된 선악의지에 준해서 그 기준에 충족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음성입니다. 사도행전 9:3-5에 보면,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예수님으로 음성으로 인하여 사울이 자신이 처해있는 모든 환경이 어두운 애굽적 세상인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출애굽의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는 세계에 자신이 놓여 있고 그동안 활동해온 것입니다. 사울을 십계명 잘 지켜서 예수님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 준수와 상관없이 그냥 주님께서 그를 찾아와서 출애굽시켜 버리십니다. 그 이후에 사울은 그의 사상체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즉 십계명 지켜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십계명이 더 이상 필요없다 가 아니라 애초부터 십계명과 돌판 꼭 필요한 것인데 그것이 인간의 자체적은 시도로 구원되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언약완성을 겨냥한 출애굽 작용에 필요한 겁니다. 

문자를 도로 음성으로 전환시키므로서 왜 이 세상에서 성도가 탈출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음성화한다는 것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개입으로 전환시켜서 그동안 법제화된 문자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작업을 위해 악마가 동원됩니다. 로마서 8:33-34에 보면,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소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고소’ 혹은 ‘정죄’라는 말이 나옵니다. 

고소와 정죄 기능은 악마가 전담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시켜서 그런 활동을 합니다. 성도도 예외에서 악마에게 늘 시달리고 들볶이고 있습니다. “내가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지. 그런 실수만 안했어도 오늘날 내가 당당할건데 괜한 짓을 해서 지금 내가 이렇게 힘들다. 어서 제정신 차려 반성하고 회개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빨리 원상회복의 혜택을 입도록 자숙해야지”라는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바로 십계명을 덫으로 주신 취지에 합당합니다. 인간은 십계명을 받고부터 그것을 준수하여 자신의 삶의 형편을 낫게 하기 위한 작업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성도는 출애굽 되어야 할 당위성을 갖추게 됩니다. 악마의 내면의 음성은 주님의 음성의 전조입니다. 

마치 바늘 가는데 실 가는 것처럼, 악마라는 바늘이 성도의 마음을 찌릅니다. “너는 완벽해야 돼. 너는 성도야. 따라서 완벽에 완벽을 기하면서 주신 말씀을 다 지켜서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해야 돼. 그럴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기쁘하시고 영광이 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악마의 음성 자체가 하나님의 의로움이 이미 확정된 상황을 보여주는 선행과정이 됩니다. 즉 이미 의로움을 입은 자가 그 일방적으로 입혀주신 의로움이 어떤 형편에서 성사된 것인가를 추후에 알려주시기 위해 쉬지도 않고 악마로 하여금 마음껏 성도를 정죄케하고 고소케 합니다. 

이미 의로움을 입었기에 하나님께서 악마로 하여금 그런 식으로 다루어지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출애굽이란 판 자체를 뒤집어엎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세상판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의가 아니라 의를 생산하는 판 자체가 이미 성도는 그 어떤 행위도 의롭지 않는 그런 판에서 벗어나야 나타날 현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 누구도 정죄하지 못할 구원의 판 위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5-01-27 22:29 
15강-신 4장 12-14(십계명과 돌판)1501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4장 12-14절입니다. 구약성경 266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 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로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십계명을 언급하면서 흑암 중에서 십계명을 줬다는 것, 어두움 가운데서 십계명을 줬다는 것이, 일단 배경성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신약적으로 설명하면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되는 겁니다. 어두운 가운데서 촛불이 되는 것이고 등불이 되는 것이죠. 이 말은 언약이 없는 곳에는 다 어둡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형광등 꺼지면, 정전되면 다 어두운 줄 아는데, 정전되지 않더라도, 환한 백화점 한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언약을 알지 못하면 그 자체가 어두운 세상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 언약이 우리를 살리느냐, 아닙니다. 언약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우리를 죽이죠. 언약으로 우리를 죽여 놓고, 그러면 사는 게 우리가 아니냐, 우리가 아닙니다. 뭐냐, 언약만 다시 살죠. 언약으로 죽여 놓고 그 언약만 다시 건질 때, 거기에 딸려 나오면 살고, 못 딸려 나오면 죽습니다. 여러분 종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분석해 봅시다. 종교가 뭐냐 하면은, 보이지 않는 신과 보이는 나 사이에서, 내가 구원되는 그러한 경우와 절차 방식을 법칙화 시킨 것이 종교입니다. 그 주인공은 뭐, 이렇게 신을 언급하고 초월자를 언급하지만 항상 주인공은 본인이 주인공이지 않을 경우가 없었어요. 항상 본인이 주인공이에요. 

그러나 성경은 언약이 주인공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언약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건 창세기 1장부터 계속 끝까지 계속되는 법칙인데요. 창조될 때, 피조물 좋아라고 된 게 아니고, 창조물 좋아라고 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숨겨진 언약을 위하여 피조물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이 완성되고 난 뒤에는 폐기처분 되는 겁니다. 모든 걸, 만들어진 것도 이제는 전부다 구겨버리죠. 꾸깃꾸깃 꾸기고 없애버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왕 없어지는 것, 주님의 증인으로 없어지면 그거는 하나님의 언약적 상황 속에서 건짐을 받는 상태에서 없어지는 겁니다. 

우리의 몸은 후패하고 우리의 몸은 날로 새롭도다 할 때, 그 새롭다는 게 뭐냐 하면, 나한테 없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지 못하고 구상하지 못한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들어온 거죠. 마치 물고기에 낚시 바늘이 들어오면은 그 물고기는 아무리 헤엄치고 싶어도 낚시 바늘이 땡기는 대로 끌려 갈 수밖에 없는 그런 형편과 처지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되죠. “주님이여, 언약의 낚싯대로 왜 저를 땡기십니까?” 물으면 “이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빛의 자녀는 어둠 가운데서 이렇게 땡겨져야 하는 겁니다. 

십계명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 입장 속에서, 우리의 상황 속에서, 십계명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십계명을 원래 줬던 상황은 출애굽 상황 속에서 십계명을 줬다, 라는 것을 우리가 놓치면 안돼요. 출애굽기 20장에서 처음에 십계명 주실 때, 앞에 먼저 앞서서 나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거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20:1) 이것이 먼저 전제가 돼요. 이것이 먼저 전제가 됩니다. 한국에 법이 많아도 헌법 전문이 모든 법을 지탱하는 원리가 되는 것처럼, 십계명의 원리는 뭐냐 하면, 바로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건져내었다는 겁니다. 

십계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애굽 땅에서 살았다는 그것을 우리의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고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거기서 자유인이 아니고 종이었다는 사실을 인정을 해 줄 필요가 있어요. 근데, 사람들은 그걸 인정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서, 역으로 상황을 애굽과 종의 상황으로 만들어나가는 그 능력을, 십계명을 통해서 드디어 시작개시를 하는 겁니다. 십계명을 통해서 한다는 말은, 십계명이 언약이니까, 그 십계명이 완성된 것을 새 언약이라고 하고, 그 새 언약으로부터 십계명으로, 십계명으로부터 다시 애굽과 종 되었던 상황을 유발해내는 작업을 하나님이 해나가시는 거죠. 

자, 그렇게 보게 되게 되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하나의 들러리에 불과하고 하나의 엑스트라에, 보조하는 배우에 지나지 않는, 대역배우, 또는 우리가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이 땅에서. 실제로 모든 활개치고 활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힘이고, 우리는 거기에, 그 부는 바람에 같이 휘말려 들어가는 겁니다. 하지만 이 언약이라는 것이 제가 이렇게 설명해도 들을 때 뿐이지 돌아서게 되면 허황된 말로 들릴 수밖에 없죠. 그 허황된 말로 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가 아시느냐, 주께서 친히 아십니다. 에, 걱정하지 마세요. 주께서 아셔서 우리로 하여금 실패케 하십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실패하는 데 주님은 전공이거든요. 

참,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데, 실제 나가면 전혀 허황된 말이니까. 그 허황된 말이 다시 들으면 맞기는 맞는데,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되니까, 주께서는 허황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데서부터 허황된 그것을 다시 되새기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늘 실패를 반복시키는 겁니다. 실패가 주는 즐거움이 성공이 주는 즐거움보다 더 월등해요. 성공은 허무를 주지만 실패는 영생을 주십니다. 그 실패를 언급하기 위해서 12절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 뿐이므로” ‘음성 뿐’ 음성 뿐입니다. 그 뒤에 나온 게 십계명을 기록하라. 기록이 나와요. 자, 기록한 것은 눈에 보입니다. 기록한 것은 폭이 있습니다. 면적을 가집니다. 요거는 손에 쥘 수 있어요. 

하지만 음성이라 하는 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입니다. 들을 때 그 뿐이지 돌아서면 없어져요. 그러니까 이 음성이라는 것이, 마치 들을 때 음성인데, 잠시 시간이 지나가다 보면, ‘실제로 들은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우리 기억에 가물가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허황되지 않는 이 삶은, 하나의 문자로 만든, 그러면 어려우니까, 법으로 만든, 법과 문자로 체제가 잡혀있는 세상입니다. 거기는 음성은 용납되지 못해요. 문자 중심입니다. 법 중심이고. 계약서 할 때도 뭐, 도장 찍고 바빠요. 말로, 구두계약은 효력이 없습니다. “내가 언제 했는데?” 끝납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언제 했어?” 그러면 끝난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하도 요새는 이게 문서화되었기 때문에 결혼을 하더라도 미리 여자 쪽에서 남자보고 각서를 쓰게 만들어서 도장 찍고, 뭐, 뭐하고 다해요. 사랑한다고 해놓고는 “내가 언제? 미쳤는 모양이지? 내가 술 한 잔 먹어서 헛소리 했나보다.” 하고 그러면 끝나기 때문에 각서를 쓰게 하고 사인 받고 공증해서 결혼하는 거예요. 아이구, 유별나도 참. 그런데 이 문서가, 십계명이라는 문서가 결국, 이게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우리가 이미 몸에 문서화되고 법제화되어 있어서 그래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판 자체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법으로만 이해하는 속성이 되고 말았어요. 법으로 이해해서. 법으로 이해하니까, 선악을 따먹었으니까. 악한 나무를 따먹은 것이 아니에요. 악한 나무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선,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었거든요. 

선도 뭐고, 악도 뭐다는 것을 알아요. 알면서도 그걸, 선과 악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그러한 몸은 갖추어지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심판주가 아니기 때문에. 이래요, 마귀는 심판주도 아닌 우리에게 선악과 따먹게 해서 본인을 본인이 심판하는 그런 지경으로, 궁지로 몰아세운 겁니다. 이건 딜레마에요. 딜레마. 인간은 끝내 해결할 수 없는 거고, 끝내 인간은 파탄 나 버립니다. 그런데 설교 다시 이야기 해봅시다. 하나님은 이걸 아신다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미 아시는 거예요. 

이걸 아셔서 십계명을, 십계명에서 음성으로 돌리는데, 음성 하니까 이래 생각하면 돼요.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사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니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렇게 음성으로. 음성으로 남기는 것. 판에 언어 문자에서, 문자에서 음성으로 바뀌게 하는 방법을 주께서는 사용하는데, 거기에 동원된 존재가 있어요. 그게 누구냐? 마귀입니다. 주께서는 마귀 없이는 일을 안 해요. 마귀 없이는 일을 안 합니다. 정말 마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제가 오전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지요? 위반 없이는 천국이 없다 했지요? 후딱 지나가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요? 위반이 없는 자는 천국에 못 갑니다. 마귀 없이는 천국을 갈 수가 없어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모든 해결을, 자기 잘났다는 것을, 선악과에 기초해서 하는 거예요. 그 기초하는데, 똑같이 기초한 존재를 인간에게 줍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음성을 이야기합니다. 고소합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이 역할 담당자가 누구냐 하면, 악마가 당당합니다. ‘고마운 악마’ ‘훌륭한 악마’ 악마가 와서 계속해서 우리를 질책하죠. “바보같이 왜 그런 짓 해가지고. 니가 그거만 안 했으면 니가 괜찮은 인간인데. 그 때 그 실수 해가지고 인생 망쳤잖아. 그러면 어쩌면 좋아?” “착해야지. 선해서 빨리 그걸 캄푸라치 해야지. 니가 악해서 받은 벌을 착함으로 보상하면 원상복귀 되는 거야. 회복이 되는 거야. 회복이.” 힐링이 돼요. 

아, 요새 힐링 하면 짜증이 나. 전부다 중고를 만들어 놔가지고. 완전히 인간 자체가 죽고, 아침에 이야기 한 대로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로 살면 되는데. 죽을 때는 과거에 대한 나! 새로 살 때는 과거마저 은혜구나! 요렇게 날마다 새로 살아나면 되는데. 이 바보야! 바보! 해가면서 자기 채찍질 하고 자기 자학하면서 이제는 바르게 살아 볼란다. “뭘 노리고? 뭐 노리는 게 있지? 뭘 노리는데?” “회복해야지.” 회복 같은 소리하고 있네. 회복해봤자 거기에 악이 또 있어요. 어떤 수준이, 착한 수준이 또 돼보세요. 그러면 더 착한 사람, 더 착한 사람이 있다니까요. 제가 뭐, 이런 예를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지만 할 수밖에 없어요. 

어떤 교회에 집사가 있는데 너무 자기 남편을 잘 섬기고, 암에 걸린 자기 남편을 보호해가지고 밑반찬 천 가지 하더라. 그 교회에서 목사님 칭찬이 늘어졌는데, 근데, 어떤 교인 하나 새로 등록했는데 밑반찬 이천 오백 가지 하는 사람이더라. 자기는 새벽 기도 두 시간 했는데 새로 들어온 교인은 세 시간 반 하는데. 여기서 질투가 나오고, ‘니한테 질까보냐’ 하고 배틀을 해요. 우리 교회는 헌금 없으니까 기도 배틀을, 경쟁을 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안 질라고. 

출애굽은 판을 바꾸는 거예요. 그 선악과 판을 바꾸는 게 출애굽입니다. 어떻게 바꾸느냐, 죽여서 다시 판을 떠냅니다. 죽여서. 홍해에 죽여서, 어린양의 죽음에 죽여 버려요. 죽여서 다시 판을 짰는데, 마귀가, 고마운 마귀가 도와줍니다. 자책하는 것, 반성이라고 하죠. 또는 회개라고 이야기 하죠. 회개 없이는 구원 없습니다. 맞는 말이에요. 근데, 그 회개라는 것이 다시 자기 자신을 근사하고 대단한 존재로 바꾼다면, ‘내가 앞으로 바르게 살아야지!’ 이렇게 회개한다면, 그거는 막달라 마리아하고 전혀 다른 노선에 속한 사람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제 내가 다시는 이런 짓 안 해야지.’ 이런 게 아닙니다. 그냥 ‘주여 감사합니다.’ 왜? 미래에서 왔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면서, 뭐든지 감사한 거죠. 

십계명에서 출애굽을 언급하고 그 다음에, 제 일계명이 뭐냐 하면, 너를 위하여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해서 죽 나열되는 겁니다. 그럼 계명 하나 하나가 출애굽의 반복이고, 출애굽해서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담겨있는 십계명이라고 보시면 돼요. 출애굽 보시고, 질책을, 그리고 시도를 하세요. 선악과니까. 그리고 십계명에 위반된 짓을 안 하기 위해서 시도를 하세요. 하시면서 결국 질책으로 돌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마귀가 옆에 서서 아주 그 일을 잘 도와주십니다. “니가 오늘도 마음속으로 탐욕을 했잖아?” 라고 마귀가 옆에서 아주 잘 질책해줘요. 고거, 그 세미한 마귀의 음성. 그걸 양심의 음성, 내면의 음성이라고 하죠. 사람은 몸 둘 바를 모릅니다. 아무리 봐도 마귀 말이 맞아요. 내 어쭙잖은 변명은 마귀한테 안 통한다는, 안 통합니다. 통하지를 않아요. 

마귀가 이렇게 지적질 하지 않으면 자꾸 인간은 자기를 정당화해요. 심지어 어린애도 그래요. 어떤 영화에 이런 게 있답니다. 아버지가 집이 없으니까 집을 사주기 위해서 애들끼리 아버지 집 사준다고. 집값이 얼마인 줄 모르죠. 근데, 전봇대에 보니까 평당 오백만원이 붙어 있어가지고 야! 평당이라는 동네에 가면 오백만원이면 집을 사는 줄 알았어요. 그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라는 그 영화에 있어요. 그러니까 평당에 가게 되면, 평당이라는 동네에 가면 오백만원 밖에 안 한다는 거예요. 집을 사기 위해서 부잣집 개를 훔쳐가지고 개를 찾아주면 오백만원을 얻을 게 아니냐 해서, 어린애의 어떻게 보면 순진한 이야기인데, 그 순진함이 우리에게 아직도 들어있습니다. ‘내 힘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했다.’ 이렇게 주장하고 싶어요. 

그런 일을 하면서 뭘 잊어버리느냐 하면, 뭔가 누가 나를 고소하고, 정죄한다는 사실을 자꾸 놓쳐버립니다. 로마서 8장 그 대목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누가 송사하리요” 그 다음에 말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의롭다 하신 이”가 음성입니다. 우리의 선악체제에 의해서는 뭔가 의로운 일을 해야 결과로 의가 나왔는데, 주님께서는 송사하는, 마귀가 나를 송사하고, 악마가 나를 정죄하는 고 타이밍 자체 속에, 고런 자체 속에 바로 하나님의 의가 포함이 되어 있단 말입니다. 제가 어려운 말을 괜히 했다. “바늘” 가는데 “실”가죠. 바늘이 콕 찌릅니다. 마귀가 나를 고소하고 정죄합니다. “이번 일 실패한 건 니가 행동을 똑바로 안 해서 그런 거야. 앞으로는 조심해!” 정죄합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항상 완벽, 완벽이기 때문에. 완전. 완벽. “니가 완벽해야 의롭고, 니가 완벽해야 복 받고, 완벽해야 앞 일이 창창 풀린다.” 완벽을 이야기해요. 근데, 그게 성경에 보니까 마귀거든요. 마귀가 하는데, “마귀야 물러가라!” 하고 싶은데, 마귀를 보내신 분의 실이 뒤에 있어요. 그 실이 뭐냐, 의로운 실이에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십니까? 출애굽 때문에 그래요. 왜? 바로 이 세상을 애굽으로 만들어요. 선악으로 알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애굽 그 자체라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한 지리적인, 제한적인 애굽이 있다면,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전 세계가 바벨론이고, 전 세계가 애굽이에요. 

혹시 복음으로 핍박을 받습니까? 그러면 그것이 십자가 달린 장소요, 애굽이라고 요한계시록 11장에서 두 증인에게 소개하면서 그렇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은 폭이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항상 양쪽에 폭이 있으니까 양쪽을 보지만, 십계명을 응축해서 주의 완성된 십자가의 음성으로 돌려버리면 그때부터는 우리가 ‘나 죄인 맞다’가 되고, ‘맞다’고 이야기하면서 그게 바로 의롭다 하기 위해서, 선언하기 위해서 밑그림 깔아놓은 거예요. “니 죄인 맞지?” “맞습니다.” “그러니까 니가 의인이지.” 니가 의인이 아니면 그런 소리 안 나오게 되어 있다 그 말입니다. 

참, 이게. 저는 젊었을 때, 신학교 초창기 때는 순진해가지고, 지금도 순진하지만, 저는 사람이 나이 많으면 다 회개할 줄 알았어요. 나이 많으면. 왜, 살만큼 살았기 때문에.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나 허무하다고 해서 자기 죄를 아는 게 아니에요. 허무하다고 해서. 허무한 가운데서 나름대로의 자기 즐거움과 재미와 행복의 자리를 또 찾아 만들고 있어요. 참, 마귀가 찾아가주면 좋은데, 택한 백성이 아니면 마귀가 또 찾아가지도 않아요. 마귀가 좀 찾아가가지고 지적질 좀 해주면 좋은데. 그러니까 ‘나는 뭐 교회 안 다녀도 나름대로 행복해.’ 이래 돼버려요. 교회 안 다녀도. 

음성이 아니고 자기의 판을 가지고 있다니까요. 자기 판. 자기 나름대로의 행복한 판. 이만하면 됐다. 저는 수련회 마치고 오용익 목사님이 수련회 평 했잖아요. 그 평을 보면서 오 목사님이 솔직하게 이야기 했어요. 나는 이만하면 됐다는 자기 인생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금이 났다는 거죠. 그 ‘금’속에서, ‘선’속에서, 쟁반, 횟집의 쟁반, 사달라는 소리 아닙니다. 벌써 세 번째 이야기하는데. 점점 갈수록 사달라는 이야기처럼 들리네. 쟁반에 담겨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 쟁반이 언약이거든요. 종과 정실부인의 언약. 그러니까 우리는 들러리로써 감사해야 해요. 

주께서는 우리에게 마귀를 보내서 정죄케 하고 우리는 거기에서 마귀에게 온갖 변명을, “이거는 어쩔 수 없었어. 바빠서 그런 거야. 형편이 그런 걸. 그래서 어떡하지?” 변명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찌질해지고. 자꾸 뭘 느끼냐면 내 자체로서 의로워지려는 성향이 변명을 통해서 점점 더 노출되는 거예요. “에이, 니 말 맞다. 그래. 나는 살 가치도 없어.” 바로 그거야!!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의로운 실이 되는 겁니다. 이런 말해서 그렇습니다만, 아예 주께서 미싱으로 박았으면 좋겠어요. 바바바박 드드드드득 미싱을 밟아가지고 온 전체를 아예 주께서 미싱으로 박았으면 좋겠어요. 드드드득 바바바박 미싱으로 밟아가지고 온 천지가 의로운 실로 완전히 포장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늘 지적질을 마귀한테 당해야 합니다. 십계명한테. 

십계명을 우리가 무시하자는 게 아니에요. 십계명을 우리가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고 십계명을 가지고 활용할 정도로 우리는 선악 판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살아가면 갈수록 점점 더 ‘이만하면 복음 알았지. 이만하면 나는 착하지.’ 라는 또 자기 판을, 자기 애굽을 자꾸 만들어요. ‘이만하면 됐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음성입니다. 그리고 음성은 어두운 가운데 나오죠. 니가 주장하는 그것이 바로 어두움의 일부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어두움 속에서 음성을 듣게 합니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를 내가 건져주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언약으로서, 선악과에 있는, 하나의 거기에 눌러 앉아서 이만하면 족하다고 하는 그것에 대해서, 주께서는 출애굽을 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나는 니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니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이게, 예수의 세계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키려고 시도하고 또 다시 엎어지면 일어나서 이번에는 지킬 수 있으리라고 마음 다짐하고, 또 어떤 보상을 기대하면서 또 십계명을 받아드립니다. 하지만 그걸 통해서 우리가 정죄 받을 일이 점점 더 늘어나게 된 것에 대해서 도리어 하나님 감사케 해주시고, 그 자체가, 그 작업이 하나님의 의를 집어넣는 작업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