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14강-기억하라(신4;9-11) 이근호 150118

아빠와 함께 2015. 1. 20. 08:01

기억하라(신명기 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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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5-01-18 15:43 
기억하라 

2015년 1월 18일                               본문 말씀: 신명기 4:9-11 

(4: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 속에서 떠날까 하노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4:10)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 하시매 

(4:11)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 유암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도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비록 이스라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결코 본인들의 의도가 하나님의 뜻인양 끼어들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기억하라”는 말씀은 먼저 하나님께서 기억할만한 사건이나 일을 만들어놓으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인간들이 나름대로 자기 역사 속에서 기억하거나 중요하다고 여긴 것들은 철회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네 기억 말고 내 기억함을 기억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주체는 하나님의 기억 안에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성 속에는 자기 백성의 주체성도 들어가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주체성을 임의대로 자기 입맛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성 코드와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주체성도 하나님의 절대성의 일부가 됩니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주체는 하나님에게 하등 쓸모없는 것입니다. 기억이란 실은 인간의 자아형성의 기반입니다. 인간이 “내가 누구지?”라는 스스로 묻는 것은 자신의 기억창고를 다시 더듬어 찾아들어가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기억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억으로 대체해버립니다. 그 내용은 호렙산입니다. 호렙산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금 거론합니다. 출애굽기 19: 18에 보면,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입니다. 

시편 18:7-9에 보면,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 보기에 이런 상황은 상당히 낯선 상황입니다. 

마치 비현실적인 것처럼 여겨지고 중국 무협소설처럼 황당무계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고정적으로 묶는다는 사실입니다. ‘고정성’이란 인간들의 부지런함과 역사를 이어가고자 시도하는 그 모든 수고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고정성이란 곧 “이 자리로 되돌아오고 고수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억 자리를 만듭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도망쳐도 멀리 못간다 는 말입니다. 비록 인간들에게는 이질적 상황이지만 하나님에게 원천적 상황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곳이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주하신 거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되 고정성을 목적으로 일하신다면 인간들의 그 모든 수고도 이 목적성 범위 안에 머물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설쳐도 하나님의 처소에 일어난 일에 확장에 불과합니다. ‘불과 어두움’의 조합은 곧 심판 기능을 전제로 한 조합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신의 처소 마련에는 심판없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심판에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이유 있어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기준부터 먼저 책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자기가 세운 백성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심판 받아야 될 이유는 오직 하나 ‘우상숭배 죄’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처소 만들기에 오직 하나님만 합당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디 이 세상에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신의 처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상에 대한 심판 행위’를 통해서만 성사된다는 겁니다. 그만큼 인간 세상에 본 창조주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혹은 다른 신에 의해서 점령당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악의 점령지 속에 하나님의 자신을 처소를 세우시면서 심판의 불을 동원하셔서 어두움의 실체를 폭로시켜내십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선과 악 사이의 두 이질적 대립 성질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를 숫자로 표시하면 ‘2’가 됩니다. 

즉 1에서 2가 된 게 아니라 따먹지 말아야 하기에 0에서 2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 후에 따먹어도 되는듯한 생명나무 과실을 인간의 헤아림 앞에서 사라집니다. 즉 0이 됩니다. 추방되고 난 뒤 인간들은 이 때를 못잊어 신을 생각해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것이 가인의 제사입니다. 

그러니 0→2→(가짜)1 → 0 이 됩니다. 선악과로 2가 된 것을 십자가로 도로 0이 되게 하십니다. 이처럼 0이 다수의 1들을 살려내는 겁니다. 우상숭배란 단순히 외형적 형체를 갖춘 신상 섬기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런 신상을 구태여 만들고 싶어하는 인간의 심성도 근원적으로 파고 들어가십니다. 

그래야지만 새로운 주체상이 정립되고, 그 주체상에 의해서 참된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숭배를 할 수밖에 없는 정신은 어디서 찾아낼 수 있을까요? 신명기 18:9-11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길흉에 대해 궁금한 것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앞 날이 잘 풀릴 것인지 아니면 실패로 끝날 것인지에 궁금해할까요? 

그것은 본인의 처지가 하나님의 처소에 입각해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오로지 본인은 본인의 잘난 맛에 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이런 자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처소가 ‘화염과 깊은 어두움’으로 구성되어 있음에 대해서 대단히 낯설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다른 현실인 양 여기게 됩니다. 

곧 자신의 현 주체성을 이루는데 있어 그런 기억들은 소용없다고 보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자신이 깊은 어두움의 일부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봄이 되면 사방 들녂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둘러 싸여서 나른한 낮잠을 청하는 그런 화사한 풍경을 어두움이라는 이해할 자들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자기를 위한 처소를 만들면서 거기에 부합되는 주체상을 형성해 있습니다. 자기만의 자리를 위하고 보존하기 위한 기억만이 간직하려고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나의 처소를 위한 너”라는 겁니다. 

우리 안에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기에 우리는 늘 우리 자신 기대와 현실을 비교하게 됩니다.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누가복음 22:42) 예수님 마저도 이 땅의 생애에서 빛과 어두움이 공존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입장보다 예수님의 증인이라는 입장이 늘 우리 내부에서 우선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5-01-19 21:34 
14강-신 4장 9-11(기억하라)1501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4장 9-11절입니다. 구약성경 266페이지입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 하시매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 유암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모세가 손자들, 자식들에게 당부하는 게 있습니다. 당부하는 것은, 하늘과 땅이 유일하게 연결되는 지점을 그 손자들에게, 자식들에게 가르쳐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끊어지면 안 됩니다. 관계가 끊어지면 안 된다는 거죠. 꼭두각시 인형 뒤에는 항상 팔 다리에 줄이 연결되어 있죠. 줄이 연결되어 있는데, 만약에 줄을 끊어버리면 꼭두각시 인형하고 아무리 관객들이 보좌를 해도 나무 조각에 불과합니다. 뭔가 움직여야 하는데, 이거 줄이 끊어졌으니까 전혀 움직일 수가 없죠. 사람이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를 증거 하는 반면에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나한테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아주 희한한 새로운 피조물들이 반드시 생겨난다고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주님이 예언을 했습니다. 말린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예언이라는 것은, 필히 그렇게 된다는 거죠. 나중에 우리가 돌아서서, 사후에, 아, 그 예언이 도달될 때, 도달되었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을 알죠. 그러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이 와야 되는데,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령오기 전과 성령오기 후의 차이점을 오직 성령 받은 사람만 알기에 예수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봤다고 해서 증인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하고, 뭐, 인상에 대해서 소개한다고 증인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예수님에 관한 문제가 본인에 관한 문제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봤다가 돼버리면 자기는 변하지 않은 상태가 되거든요. 

그러나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증인 삼지 않습니다. 전에는 나를 위해서 살던 내가, 성령오고 난 뒤에, 나는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나라는 인생은 아무리 해봐야 그 자체로 희망도 없고 실패뿐인데, 주님께서 실패인줄 알면서도 거두어두셔서 예수님의 증인으로써 주님 입장에서 늘 성공적인 인생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성공이라고 말할 수 없죠. 오히려 실패의 심화, 실패가 더욱더 심화되는데, 남들 같으면 좌절했을 건데, 그것마저 주님의 증인의 재료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도들은 아주 기뻐했습니다. 그 연결고리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그 연결고리가 신약에서는 성령이라면, 구약에서는 뭐냐, 호렙산이라는 거죠. 호렙산. 

오늘 본문에서 호렙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연결고리를 설명하면서 호렙산에서 이런 일이 있었잖아? 라고 기억하라는 거예요. 호렙산에서. 호렙산 오기 전에 홍해 갈라진 것도 기억해야 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호렙산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중간 과정이 있었다는 것보다 호렙산이 더 중요하다는 거죠. 그러면 호렙산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인생은 어차피 백날 설쳐도 멈추어져 있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멈추어져 있는, 고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가봤자 멀리 못 가는 겁니다. 가봤자.....,개를 이렇게 묶어놓고 주인이 안심하는 이유는 백날 설쳐봐야 묶인 그 자리, 반지름 바깥으로 못나가니까. 주께서는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그 시점에서 호렙산을 설치하시고 호렙산에서 일어난 상황으로 말뚝을 박아놓고 성도는 그 밖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혹시 니한테 어떤 상황이 있더라도 호렙산에서 있었던 일로 인하여 너에게 그런 상황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너는 여호와를 증거 하는 증인이 되어라.” 이렇게 되겠죠. 구약에서는.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라.” 이렇게 하고. 그 호렙산에 있었던 그 고정성이 거기에 더욱 깊이 있게 완전히 드러난다면 십자가라는 막대기입니다. 십자가가 꽂혀있고 십자가 바깥에 서서 아무리 가도 십자가 범주 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는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너희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완전히 말뚝 박아 놨어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자, 그렇다면 이 멈추어야 된다는 것은, 결국 우리는 뭘 설쳐도 그게 의미 없다는 건데, 우리의 상식은 이래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성령 받아서 예수님의 증인된다는 것은, 예수님만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전에 우리는 성령 없을 때를 분명히 같이 증거 돼야 돼요. 요런 차이를 보여줘야 되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고정시켜 놓는다는 것은, 우리의 활동에 주님께서는 별 의미 없이 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죠. “내가 아무것도 안 하면 주의 일도 못하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면, 그게 어떡해 우리가 주의 일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주의 뜻은 이겁니다. 가만히 있어도 노는 게 아닌 것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겁니다. 가만히 있어도.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이상하게 뭐 찝찝하고 일이 잘못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아무것도 안 해도 무슨 일이, 그 자체가 일 중에 포함이 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아무것도 안한다는 말은 우리가 고정되어 있다는 말이고, 고정되어 있을 때, 주께서 벌리시는 일이 제대로 눈앞에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호렙산이에요. 그 앞에 스톱이 돼야 되고, 멈춰야 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호렙산에서 뭐가 그렇게 중요하기에 그 앞에서 우린 말뚝 박아서 스톱해야 되느냐. 호렙산이 중요한 이유는 그겁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거할 처소를 하나님 본인이 스스로 만든다는 겁니다. 그 처소 안에서는 니는 더 이상 할 게 없이 멈춰야 된다는 거죠. 인생이 어떻게 하도록 멈춰야 되죠. 

하나님이 자기 처소를 스스로 만드는데, 만드는 그 환경은 두 가지로 만듭니다. 여기 11절에 보면,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 유암과 구름이 덮였는데” 라고 돼있거든요. 여기 두 가지의 성질이 나옵니다. 하나는 불이고, 화염이죠. 또 하나는 흑암입니다. 흑암.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곳이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입니다. 그게 고정되어 있어요. 그건 확정적입니다.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이, 호렙산이 확대가 되고 확장이 되면, 이게 바로 이 세상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 결국은 어두움과 불로 끝나버리거든요. 결국은 이 말은, 이 세상은 하나님의 거주하심을 드러내는 증거물로써 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최종 나타납니다. 

이 빛과 어두움, 화염과 불과 어두움이 하나님의 처소라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그 자아상, 주체 안에는 이 빛과 어두움이 같이 있어줘야 해요. 주체가. 나라는 주체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어서 집어넣거든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주체라 하는 것은 절대성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안에, 우리의 주체가 거기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너는 이렇게 돼야 성도다운 주체가 된다.” “어떤 겁니까?” “니 속에 빛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니 속에 어두움 있을 거야.” “그거는 섭섭합니다.” 섭섭하고 감사하고 간에 둘 다가 있어야 돼요. 우리 속에 둘 다가 있어야 돼요. 그저, 뭐 어떤 박사가 낮에는 박사 되었다고 밤에는 괴물 되는 것 있죠? 양면성이, 둘 다 있어줘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처소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처소가. 시편 18편에 하나님이 이 땅에 등장하면서 하나님의 처소도 같이 대동하고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처소를 같이 대동하고 등장하게 되면, 입에서는 불이 나오고. 시편 18편 8절에, “그 입에 숯이 피었고” 9절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10절,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11절,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장막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이거 얼른 보면 중국 무협소설인지, 성경인지, 구분이 잘 안되죠. 황당무계하죠. 소돔 때 모습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낯섭니다. 상당히 낯설어요. 이 성경 시편 18편에 나오는 8절에서 11절까지의 주께서 처소가. 

근데, 그 낯선 것이 다른 사람들은 낯설다고 이야기해도 되는데 이스라엘은 그런 소리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게 왜냐, 호렙산에서 너희들이 경험했다는 겁니다. 산 위는 불이 붙었고, 산 아래는 어둡고. 저는 시내산을 오늘 아침에 본 적이 있어요. 뉴스 시간에. 29층 고층 아파트에 새벽 여섯 시 반에 불이 붙어버리니까 옥상에서는 화염이고 아직까지 해가 안 떴으니까 어두움이고. 딱 시내산이라. 왜,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자기 처소를 삼고, 그 처소가 확장돼서 우리 주체로 들어오느냐 하면은, 여기 이사야 45장 15절에 보면,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숨어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이번에 민수기 수련회 하면서 숫자로 제로, 0으로 한 겁니다. 0인데요, 0이 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면, 빛과 어두움이라는 숫자 2가 나와요. 빛과 어두움이니까 2잖아요? 우리의 상식은 0에서 1이 되는 줄 아는데, 0에서 1이 되는 것이 아니고 0에서 2가 돼버려요. 그러한 숫자이야기가 정확한 이유가 있어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선, 악, 1과 2거든요. 그런데 생명나무는, 선악과가 선, 악으로 나누어져 1과 2라면, 그럼 생명나무는 1이 아니고 0이 돼버려요. 선악과 따먹는 순간, 생명나무는 못 따먹는 나무가 되어 버려가지고 우리 쪽에서 숫자로 쳐 줄 수가 없어요. 제로가 되는 거예요. 0이 2가 되버리고 2가 되니까 인간들은 다시 에덴동산을 찾아가기 위해서 2를 뭐로 만드느냐면, 1로 만들어요. 신으로 만들어버려요. 

근데, 1은 0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땡! 탈락!이에요. 신을 믿는다는 게 땡, 탈락이 돼버려요. 다시 제로가 와서 1을 없애주는 기능을 해줘야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겁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겠다. 아니에요. 그거는 틀려먹었어요. 주님이 오실 때, 나는 죄인이고, 이렇게 해야 구원받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1이 1을 믿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거는 제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1로 돌아가요. “예수 믿겠습니다. 삼위일체 믿겠습니다.” 이거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하나의 몸부림치는 것이지, 이거는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게 구원이에요. 자기가 제로로 변하는 겁니다. 1은 주의 처소가 될 수 없어요. 0이 돼야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가 되게 되어 있어요. 숨어계시니까, 이 땅에서 1부터 시작하는 인간세상에서 0은 없는 게 되고, 없는 것이 실제로 1을 만들어내는, 이 세상을 만들어내는 그러한 환경이 되는 겁니다. 보다 상세한 것은 민수기 잘 된 동영상을 보시면 되고요. 

바로 이런 점을, 주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방식을 위하여, 호렙산을 기억하라는 말뚝을 박아 놓고, 그 다음에 그들로 하여금 마음껏 세상을 설치게 만듭니다. 물론 끈이 있어요. 끈을 그렇게 말뚝에 박아 놓고 이 세상에 나가서 니가, 그들이 다른 민족들의 신을 믿어라. 그들은 1일 것이다.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 우상을 섬기는 곳에 나는 거기에 있지 않는다. 그 다른 민족들이 신을 만들 때는 누구를 모방하느냐 하면, 본인들의 이상형을 가지고 신을 만들어요. 가장 우수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이런 것들의 내용을 담아서 신을 만들어요. 왜냐하면 신과 자기가 내부적인 교류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흑암과 불은요, 낯설어요. 이게 공통요소가 없어요. 우리가 사는 공통요소가 없어요. “아, 불 좀 받고 싶다.” 이런 사람 없잖아요? “아, 깊은 어두움에 빠지고 싶다.” 뭐 이런 거 없잖아요? 빛과 어두움은 우리는 예외적인 것으로 치고 우리는 뭐냐 하면, 우리는 항상 우리가 만든 세계에서 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 그걸 종교라는 이름으로 종교생활 한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에 해당되는 겁니다. 우상숭배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그들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하는데, 아마 이 구약성경을 보시는 분들에게 제일 지겨운 소리가, “너희들이 우상을 섬기지 마라. 우상 만들지 마라. 너희들이 망한 것은 우상을 섬겨서 망했다.” 우리는 그걸 보자마자 이러는 거예요. “나는 더 이상 갓바위 안 올라가지. 더 이상 조상 제사도 안 지내지. 내한테는 어떤 보이는 형상 없지. 나는 복 받지.” 자꾸 우리 변명에 나서는데 우상은 그런 게 아닙니다. 

우상은 뭐 형상이 있고 그게 우상의 전부가 아니고 그런 형상을 만들 수밖에 없는, 1, 나, 나 위주로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우상의 요인이 돼요. 우상 만드는 원인 제공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들 수밖에 없는 속성이 신명기 1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그 다음에 한번 보세요.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절에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죽여라 했어요. 여러분들이 노골적으로 무당을 섬기기, 굿하고, 칼 위에서 춤추는 자를 부러워하고 그러지는 않는데, 여기 길흉을 말하는 자를 죽여라 하는 말은, 길흉이 뭘까요? 그거는 앞으로 잘되겠습니까? 못되겠습니까? 미리 보는 거거든요. 

우리가 왜 그걸 봅니까? 압구정 백야라는 그런 드라마가 있어요. 거기에 여러분 신경 안 써도 되는데, 그런 드라마가 있어요. mbc에서 9시에 하는 그런 드라마가 있어요. 야야라고 하는데, 거기는 임성한 작가가 틈만 나면 길흉을 봐요. 궁합보고, 사주보고, 팔자보고, 계속 찾아가고, 재수있는지, 결혼해서 잘 사는지, 못사는지, 계속 보는 거예요. 저는 그걸 보면서 길흉을 보는 것이 이게 보편화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불안해요. 왜냐 하면은, 우리는 내 자리만 잘 되면 돼요. 내 자리만 잘 될 때 나오는 효과는 내가 이만큼 잘난 존재라는 것을 증언하는, 나의 증인으로써의 마지막에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앞날에 대해서 미리 걱정하고, 미리 알고 싶어 하느냐 하면, 내가 기대한 이상으로 내가 잘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근데, 성경을 뭐라 하느냐 하면, 우상을 부수라는 말과 똑같은 말로 우상을 숭배한 이런 자를 죽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길흉을 말하는 자를 죽이라는 말은, 니 손으로 죽이라는 말은, 그 말은, 죽이는 당사자가 나는 니같은 인간하고 상대 안 해! 상종 안 해! 라고 잘라버리는 겁니다. 바로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하나님이 이 땅에 자기 처소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그 작업에 나서시겠다는 겁니다. 나서시겠다는 것. 이게 상당히 예민하죠. 예민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하고 거래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 속에 하나님의 자신의 처소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주체라 하는 것은, 주님의 절대성 안에 부분으로 포함이 되어 있다 했죠. 수련회 때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만은, 특히 저 유원지 같은데 보면 사진 찍으라고 뭐 선장 복장을 하고 있는데 앞에 그림 그려놓고 얼굴만 동그랗게 오려냈죠. 오려낸 그 동그라미에 얼굴만 넣고 사진 찍고. 얼굴만 도려내는 것. 얼굴만 도려내고 그림에 따라서 선장도 될 수 있고, 뭐, 안 그러면 선원도 될 수 있고, 왕자도 될 수 있고, 공주도 될 수 있고, 그렇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주체, 그러니까 우리 얼굴, 우리의 본심을 도려내버려요. 도려내버리면 그 다음부터 우리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간에, 어떤 나이가되든 관계없이 이 얼굴은 누가 장악했는가. 주님이 장악합니다. 

주님이 어떻게 장악하느냐. 불과 흑암으로 이 얼굴의 내용을 지워버려요. 그러면 우리 얼굴은 화염이 되고, 때로는 어두움이 되고, 빛과 어두움이 되면서 나는 하나의 주님을 위한 껍데기로서 살았다는 거죠. 안에 내용은 이미 채워져 있으니까. 근데 얼굴에 채워지는 화염이 뭐냐 하면, 우상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거든요. 절대로 우상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함. 

자, 이야기 좀 쉽게 해봅시다. 호주의 탐험가들이 탐험하는데, 뭔가 배에 주머니 하나 차고 선 것도 아니고, 기는 것도 아니고, 펄쩍펄쩍 뛰어가는 뭔가 못 보던 짐승이 하나 있었어요. 있는데, 그래서 호주 탐험가가 물었어요. 원주민한테 이것이 무엇이죠? 라고 물었어요. 물으니까 원주민이 켕거루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켕거루 뜻이 뭐냐 하면, “그걸 나한테 왜 묻느냐”는 뜻이에요. 도대체 그걸 당신들은 물을 때, 무슨 의도로 묻느냐. 당신들은 나한테 무엇을 원하느냐. 켕거루라는 뜻이 원주민한테는 무엇을 원하느냐는 뜻이에요.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왜 묻느냐 하니까, 질문하는 탐험가들이 일방적으로 판단을 해가지고 이름이 켕거루란다. 그때부터 켕거루 되었어요. 

화염과 빛과 어두움이라는 것은,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의사소통이. 이 말은 우리는 우상을 안 섬기면 못 배기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길흉을 모르면 환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환장한 인간의 얼굴만 도려내버리고 거기다가 하나님이 자기 처소를 만든 거예요. “하나님 내 앞 집에 딸이 있는데 우리 아들이 저 집 딸과 결혼하게 되면 잘 되겠습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켕거루” 이렇게 했거든요. “야! 잘 된대! 잘 된대!” 우리는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우리는 일방적으로 잘 된다고 선언해버렸어요.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증인으로써 평생을 살겠다는 겁니다. 그게 우상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면 이렇습니다. 주님의 모든 활동은 우리 자신이 우상숭배를 반드시 하게 되는 존재인 것을 드러내면서 그 우상숭배, 자기 잘난 것 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흑암과 그리고 빛과 어두움, 하나님의 처소를, 너희들에게 만큼은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받은 전과 후의 차이를 너희들은 증거 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숨어있는 분인데, 사람들은 누가 만든 줄을 모르고 내가 여기 있음에 내 잘 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그냥 살아가거든요. 그러나 그 마지막 끝은 죽는데, 그 죽는 이유도 모르죠. 그냥 힘 빠져서 죽는 것인 줄 아는데, 힘 빠져서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고 우상 숭배한 죄로 죽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 잘 들으셔야 돼요. 순서는 없겠지만 우상 숭배자로 죽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말합니다. “주여, 이미 주의 처소로서 죽는다는 것은, 곧 안식입니다. 그동안 살려 준 것이 감사합니다. 죽는 것이 필연이고 사는 것이 우연이었습니다.” 하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어요.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맘껏 못 웃었던 웃음을 죽을 때나 실컷 웃고, 천사의 미소가 되어서 그렇게 죽었잖아요. 바로 우리 자신이 그냥 나한테 있으면 우상숭배 맞습니다만, 그것을 주께서 사용하셔서, 성령이 임해서 그리스도의 증인되게 할 때는 우리는 우리 속에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움직이죠. 안 움직입니다. 우리는 어디 가서 뭘 해도 괜찮아요. 미국가도 뭐 해도 괜찮은데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 원리와 이 법칙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고정 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의 성소가 된 것이 고정된 사항이고 결정된 사항인 것을 늘 감사하면서 어째서 우리가 길흉이나 기대하고 고대하는 우상 숭배자인 것을 날마다 주 앞에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