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례와 법도
2015년 1월 11일 본문 말씀: 신명기 4:1-4
(4: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4: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4:3)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을 인하여 행하신 바를 너희가 목도하였거니와 바알브올을 좇은 모든 사람을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서 진멸하셨으되
(4:4)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을 주신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듣는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땅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전에 살던 그 습성과 생활방식은 여전합니다. 문제는, 과연 과거의 생활 방식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에 들어가기에 적합하느냐 하는 겁니다.
이 점을 고려해서 하나님께서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규례와 법도란 장차 들어가야 될 땅에 부합하는 말씀인 반면에, 규례와 법도를 지키겠다고 덤벼드는 이스라엘 사람의 의식은 전에 애굽에 살던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빠져나와야 될 의식을 가지고 들어가야 할 세계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규례와 법도를 주신 취지가 ‘구원에 실패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구원에 실패함이 당연함으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장차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그 땅에 들어가기에 합치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실패’가 어떤 ‘실패’이든 의도적으로 기피하려고 합니다. 반대로, 성공과 자기 손으로 완성되기를 기대합니다. 사람에게 있어 모든 소망은, 타인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매우 아쉽게 여깁니다. 불만을 품게 됩니다. 나의 소망과 기대는 나의 손으로 기획해서 나의 손으로 달성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구축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나서지도 않는 일을 누가 나 대신 하게 되면 고마움 마음보다 무시당하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악착같이 하나님에 내어주신 숙제를 자기 손으로 풀어서 보란듯이 천국에 입성하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규례와 법도 지키기’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실패의 장을 유발시켜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바알브올 사건’입니다.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이 사건으로 해서 무려 24,000명이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죽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시편 106:28-29에 보면, “그들이 또 브올의 바알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하게 함으로써 재앙이 그들 중에 크게 유행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한다면 그 대목에서만 하자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분노할 일이 없다고 여겨지실 것입니다. 마치 학교 선생님께서 수학 숙제를 내어주면, 학생은 그 수학 숙제만 다하면 그 외 다른 일에 대해서 수학 선생님이 나서서 지적하면서 화낼 일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의 의식 자체를 문제 삼기 때문에, 후딱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그 외에 다른 일에 자율적으로 가담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는 사고방식 자체를 문제 삼고자 하십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그것으로 인해 정작 얻고자 하는 다른 얻을 당당하게 얻어내는 근거로 삼는다면 그것이 바로 제대로 규례와 법도를 모르면서 지킨 것으로 착각한 일이라는 겁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군데 군데 이스라엘이 화내거나 도리어 반대로 백성들이 즐거움과 기쁨에 몰입할 수 있는 상황들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새로운 땅을 얻고자 하는 그 노정에 말입니다. 규례 자체, 법도 자체로 즐거워하거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정작 사는 재미를 그 외에서 찾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본인은 이 사실을 감히 예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충실하게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에만 매달려 있다고 여긴 겁니다. 즉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놓고서는 인간들은 내심 성공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예상못한 분노의 경우들을 준비해놓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알브올 사건입니다. ‘바알브올’이라는 말은 ‘브올 지방의 바알’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바알이라는 신을 섬길 때는 그 지방의 고유의 방식들로 채워진다는 말입니다. 우상이란 간단히 말해서, 신을 만나는 방식을 인간의 행함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에서는, 인간 자체적으로 내세우는 모든 것을 수시로 틀어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간섭하심입니다. 인간 내부에 큰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바알브올에서 사건에서 브올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것은 어디까지 ‘정 나눔’입니다. ‘친하게 지내기’입니다.
결코 이스라엘이 아예 하나님을 버리겠다고 작심하고 새 신을 찾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라 그냥 유혹에 말려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신을 섬기는 방식에 있어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반영해준 사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그것은 자신을 실패자로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 말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 성공적 예가 마태복음 2:16-18에 나옵니다. “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동방박사를 놓쳐버린 헤롯왕이 화가 나서 아기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베들레헴 도성을 덮쳐서 아예 아기를 씨를 말렸듯이 2살 아래의 아기를 죽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 아이의 어미가 심한 통곡을 하게 되는데, 이 사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미리 예고된 사건이라는 겁니다. 특히 그 우는 어미를 대변해서 ‘라헬’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라헬은 바로 야곱의 본처입니다. 곧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낯선 고난에 참여된 자는 진정 자신의 노력으로 새 땅에 입성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자들입니다.
실패를 하되 아예 자기 자신의 뿌리조차 도려 나갈 정도의 실패를 통해서 비로소 그 현장에 같이 고난받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이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목, 곧 구원은 성공됩니다. 이것이 규례와 법도 안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나의 실패를 통해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