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12강-거절 당한 모세(신3;23-26) 1501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 16. 17:58

2015-01-04 14:57:14 조회 : 163         
   거절 당한 모세 150104 이름 : 이근호   

거절 당한 모세(신명기 3:23-26)

음성                동영상

 이근호 15-01-04 15:46 
거절당한 모세

2015년 1월 4일                               본문 말씀: 신명기 3:23-26

(3:23)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3:24)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였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3:25)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3:26)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모세의 기도가 반려되었습니다. 모세는 자신과 하나님이 동업자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합당하기 적합한 말들로 모세는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갖고 있음을 비쳐 보이므로서 자신의 기도도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거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조치는 확고하십니다.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의 논’은 보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는 협의해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모세의 협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구원은 아직 만료되지 않았습니다. 만료는 신약시대에 와야 성사됩니다.

모세가 짐작하는 그 구원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모세가 아무리 스스로 달라졌다고 자부해도 모세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세계는 그의 상상을 넘어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그가 속한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을 노엽게 한 요소를 끄집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성도는 자신들이 하나님과 화해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화해를 성사시킨 것이 성도 자신의 성실함이나 우수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화나게 한 요소를 계속해서 발췌해내기 때문입니다. 이 요소는 성도가 한 자리에서 자기 생존에만 몰두하게 하는 환경에서만 끄집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왜 오랫동안 살던 애굽의 땅을 떠나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몸으로 정(情)에 의해서 구축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살던 정든 지역을 떠나려면 자신의 추억을 상처를 입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단순히 고기덩어리, 세포덩어리 가 아닙니다.

지나온 역사로 다지고 또 스며든 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강제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몰아 세우므로서 그동안 자기 몸의 습성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성도는 자신의 몸으로 살아야할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럴려면 자신에게 뭐가 빠져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처음 찾아오실 때, 베드로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그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기가 꼭 있어야했습니다. 그는 어부이니까요. 그런데 어느날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고기가 없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에게 진정 ‘없는 것’이 고기일까요 아니면 다른 것이었을까요? 누가복음 5:8에는 이렇게 베드로 본인의 입으로 고백하게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즉 베드로는 자신에게 예수님 없음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생존의 차원에서 고기가 있기를 고집했다면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고맙습니다”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고백은, 예수님 앞에서 비로소 자신이 내 세울 의가 없음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는 곧 생존을 고집할 근거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성도는 자신의 몸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이 목표는 곧 ‘언약의 완성’의 완성으로 마감됩니다. 로마서 3:24에서는 ‘화목’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즉 인간의 그 어떤 고생과 건전성과 노고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화해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 안에서만 화해하십니다. 에베레스트 산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산에 도전하는 등산가를 중에서 매년 죽는 사람들이 발생합니다. 지금까지 수 백명이 죽었습니다. 자, 과연 에베레스튼 산이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겁니까?

산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저 인간들이 무모하게 도전한답시고 자꾸만 무리하게 올라오니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화목제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식으로 하나님과 화해를 시도하는 바로 그 자체가 잘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제시하는 방식에 대한 거부의사이도 합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광야로 이끌어내면서 그들의 몸에서 나온 인식으로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점을 일깨어주십니다. 지난 금요일 오후 2시 24분이었습니다. 제가 손톱 깎으면서 지난해 달력을 버리고 않고 거기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제 아내를 말하기를 이면지도 아까우니 다른 휴지 위에서 깍아라 고 했습니다. 면적이 좁은데도 말입니다.

손톱 깍는데 있어 면적이 좁게 되면 튕겨져 나간 손톱이 어디 갔는지 찾기가 곤란합니다. 이처럼 모세가 알고 있는 구원의 면적은 신약 때부터 훨씬 좁습니다. 그러면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 왜 자신의 합당한 기도를 거절하는지 모르게 됩니다. 우리의 생명이 죽음이 되어 우리 몸에 떨어져나가 어디로 날아가는지 모르게 됩니다.

모세는 기껏 눈에 보이는 저 가나안 땅이 구원의 최종점으로 생각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것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이 따로 남아 있습니다. 그 영광의 상태를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의 화남의 근거를 찾아내십니다. 죄를 아는 것이 곧 화목의 근거로 제시된 하나님의 조치가 알게 되는 구원의 환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몸, 즉 하나님과 화해된 참된 영생의 몸은 예수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보여졌습니다. 하박국 3:16-17의 말씀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는 것이 실감나고 체험되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비록 모세는 본인이 그리워한 가나안 땅에는 못가도 예수님의 천국에 이미 가 있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마태복음 17:2)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우수함 때문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 성도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환경이 다 구원의 적합한 환경임을 감안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1-09 07:40 
12강-신 3장 23-26(거절당한 모세)1501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장 23-26절입니다. 구약성경 265페이지입니다.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모세의 기도가 반려되었습니다. 모세가 기도할 때 그냥 기도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면서 “저는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기도하는 속마음도 주께서 이해할 줄로 믿사오니 내 뜻이 곧 주의 뜻과 일치되니까, 그러니까 제 기도는 주께서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근데, 주님께서는 뭐냐, “됐네, 이 사람아! 이걸로 족하다. 고만해라 마이 묵으따~ 고만해!” 동업자인줄 알았는데 동업자가 아니었어요. 주님의 계획 따로 있고, 모세가 생각한 그 계획에 주님께서 동조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뜻에 동조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의논할 사람 없어 가지고 어디 피조물하고 의논하겠어요.

기도의 반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기도하고 싶어 하지요. 기도하고 싶은 이유는 자기 기도가 은근히 효과가 있기를 바라는 겁니다. 효과 있기를. 그러나 모세의 기도가 효과가 있어 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모세가 중보자가 돼버려요. 중보자가 돼버리면 모세하고 거기 속한 이스라엘만 구원이 돼버립니다. 신명기 3장은 아직 요한계시록 아닙니다. 이야기 끝나지 않았어요. 끝이 아닙니다. 이 상황으로 세상 마무리 지어지지 않습니다. 더 있습니다. 모세는 기껏 어디까지 봤느냐 하면, 저 요단강 건너편에 아름다운 강산, 그것만 봤죠. “아! 저 곳에 갔으면.....,” 그러나 하나님 생각은 “너희들이 그 땅에 들어갔다 치자 뭐, 없어. 그 땅에 들어가도 없어. 그 땅에 들어가도.” 그게 하나님이 준비한 전부가 아닙니다.

남자가 프로포즈 하기 위해서 자기 여자 친구를 불러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케이크를 자릅니다. 그 여자는 케잌을 먹으면서 “기껏 케잌이나 먹으려고 왔나? 뭐야 케이크는 평소에 생일 되면 다 먹는 건데.” 그러면 남자가 “이게 끝이 아니야. 잘 씹어봐!” “아야, 뭐가 씹히네. 다이아. 웬 다이아가 여기 씹히네.” “나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이래 나와요. 결정적인 게 있어요. 근데 여자와 남자가 프로포즈 할 때는 둘 다 정상인 경우입니다. 둘 다 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어떤 그런 프로포즈를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정상적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정상적이지 않는 인간이 기도를 한다, 뭐를 보탠다, 주께서는 절대로 그걸 반려합니다.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인간은 다른 목적 때문에 지금 여기 와있는 겁니다.

우리가 신명기를 보면서 머리 좋으신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할 거예요.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도 고생하지 말고 요즘처럼 그냥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이렇게 하면 굉장히 쉬울 건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힘든 광야의 길을 실제로 이렇게 체험케 하시느냐. 도대체 안 그래도 되는데 그냥 애굽에 살면서 예수 믿으면 되잖아요. 애굽에 살면서 여호와를 믿으면 되잖아요. 애굽에 살면서 여호와의 언약을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믿습니다.” 하면 되잖아요. “믿습니다.” 달랑 네자예요. “믿습니다.” 하면 끝나는 걸. 그것도 그냥 믿습니다 하지 말고 쌍시옷 넣어서 믿씁니다 하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왜 그들을 애굽에 살다가, 사람이 산다는 것은요, 사람이 산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갖고 있어요. 사람이 산다는 게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정들었던 이웃과 더불어 사는 거예요.

어떤 한 장소에서 살다가 바깥에 나온다는 것은 정든 것 다 강제로 끊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되는 겁니다. 총각, 아가씨들이 이사 갈 때 수월해요. 그냥 지 몸만 홀랑 가면 되니까. 근데 애들 서넛 있고 뭐 이렇게 하면 이사 갈 때 골치 아파요. “야야 집 샀다.” 하니까 “엄마 나 그 집에 가기 싫어.” 뭐 이렇게 반란이 나오고, 이래 나오면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오늘 낮에 우리교회 예결산보고 제가 느낀 점이 있어요. 깔끔하다. 뭐 없어. 작년과 동일. 12월 31일과 1월 1일이 의미 없는 것처럼.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그만큼 얽매이지 않는다는, 너무 칭찬한다. 초장부터. 너무 교회 이런 문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사람이 이렇습니다. 자기 몸에 의존하게 되면, 인간은 자기 몸은 잘 알아요. 내가 이 소리하게 되면, 교회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걸리는 게 많아요. 특히 교회에서 한 삼 사십년 있다 옮기게 되면, 만약에 내 딸하고 내 아들, 시집장가 갈 때 부조가 안 들어와요. 그게 젤 큰 문제에요. 부조 때문에. 딸 치우고 난 뒤에 옮겨야지. 그동안 한 분할금을 목돈으로 받아낼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몸은 그렇게 체험으로 느낍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은 몰라요. 실제로 우리 성도가 어디 붙어 있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어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잘 아는, 익히 아는 내 몸을 잘라야 돼요. 그 자르는 그것 때문에 애굽에서 광야로 이동시키는 겁니다. 니 몸을 갖고 있는 니 몸이 하나님이 없는 세력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몸이거든요. 이걸 강제로 떼내기 위해서, 그걸 언약을 실현하기 위해서, 또는 언약을 체험하기 위해서, 보증된 자리에서는 언약을 몰라요.

뭔가 내 몸이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려울 때, 비로소 내가 내 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고 다른 몸에 새로 생성되기 위해서, 다른 몸의 지체가 되기 위해서, 그 다른 몸에 적합한 몸이 되기 위해서, 애굽에서 광야로 나와야 되는 겁니다. 광야, 물도 없어요. 양식도 없어요. 하지만 그리스도 몸이 뭐냐, 의미를 보여주는데 적합한 환경입니다. 양식 없고, 물 없고, 아무것도, 친구 없어도, 그래야 그리스도의 몸이 몸답게 된다는 겁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 했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 없어요. 베드로가 처음에 예수님께 부름 받을 때, 전문 직업이 어부거든요. 어부 인데 고기가 없어. 아마 중국어선이 와서 싹쓸이 해갔는지 고기가 잡히질 않아요. 고기 없는 어부가 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고기 없는 어부가. 고기 없는 어부와 동질한 몸이 예수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일가친척이고 예수님한테 아무도 없어요.

베드로는 자신의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위해서 본인이 몸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주님의 몸에는 어울리는 환경 속에 베드로가 강제로 잡혀 들어가는 겁니다. 그때 “오른편에 던져라!” 오른편에 던지니까 고기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여러분한테 질문할테니 속으로 답해보세요. 강의시간 아니니까. 베드로에게 고기가 없다가 고기가 많이 풍성하게 생겼습니다. 심지어 배가 잠길 정도로 생겼습니다. 그러면 제 질문은 이겁니다. 고기가 없는 겁니까? 뭐가 없는 겁니까? 고기가 없는 겁니까? 뭐가 따로 또 없는 겁니까? 고기 없다가 고기가 생겼으면 베드로 입에서, 고기가 없는 것이 맞다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팔아가지고 예수님에게 헌금하겠습니다.” 이래 나올 거예요. 베드로는 뭐라고 했냐면, 고기 없음을 통해서 고기 없는 것 말고 진짜 자기에게 없는 게 있음을 알았습니다.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저는 일상생활에 예수 없는 생각을 하면서 예수 없이도 고기 잡았습니다. 예수 없음이, 예수 부재가, 진짜 제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고백하죠. 내가 죄인입니다. 고기는 얻어놓고. 고기는 얻어놓고 나는 죄인입니다. 포항 구룡포에 아침에 가보면요, 아이구, 대게가 얼마나 많은지. 아마 대게를 주께서 주시면, “주여 감사합니다.” 하다가 “주여 죄인입니다.” 해야 돼요. “아이구 내가 먹고 싶은 대게, 대게, 대게, 대게가 되게 많네. 아니야, 내가 지금 대게 때문에 정신이 나갔어.” 만약에 로또 복권을, 사지는 않지요. 성도가 사지는 않을 거예요. 어디 바람에 날라와서, 이게 주인이 없어 했는데, 이게 일등이 되었다. “돈, 돈, 돈, 하다가 아니야 주여 제가 잠시 마귀한테 홀렸습니다. 주여, 제가 평소에 돈만 사랑하다가 주님이 없었군요.” 라는 그런 식이죠.

설교 다시 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잘 살던 그들을, 그들이 몸에 익숙한 환경을 버리고, 익숙하지 않은 광야로 나온 것은, 니 속에 진정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생명이 없는 거예요. 생존은 있는데, 뭐, 밥 먹고는 사는데, 밥 먹고 살아봐야 늙어 죽으면 그만이거든요. 생명이 있어야 영생을 얻는 겁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될 때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는 오늘 본문에서 뭐냐 하면, 이만하면 됐다는 겁니다. 저 요단강 건너 약속의 땅만, 젖과 꿀이 흐르는 그것만 있으면 됐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뭐, 그것만 있으면 된 거야? 그게 니가 바라는 전부야? 아니야. 그거 전부 아니야. 너는 그걸 바란다는 자체가 니한테 뭐가 없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2007년도에 보스니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부부인데, 결혼해가지고 사이가 너무 안 좋았어요. 온갖 것이 맞는 게 없어, 뭐, 성격도 안 맞고, 취향도 안 맞고, 맞는 게 없어 가지고 먼저 여자 쪽에서 바람을 피운 것은 아니고, 도저히 결혼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남편만 보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자기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이게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고 전에로 돌아갈 수도 없고, 자기 인생에 너무 환멸을 느껴서 인터넷 채팅을 했어요. 권사님들 채팅 아세요? 아, 너무 무시하나요? 인터넷 채팅을 해보니까, 세상에! 얼굴은 모르는데, 오고가는 그 편지글에 너무나 자기에게 딱 맞는 정말 이상적인 남자를 만났어요. 생각하는 것, 그 깊이, 말, 상식, 교양, 정말 찾고 있던 그 남자였어요. 그래가지고 오랫동안 채팅을 해서, 여자는 남편에게 받지 못한 결혼의 그 아픔을 인터넷에 가서 그 남자와, 몰래하는 게 재밌거든요. 몰래하는 연애재미에 푹 빠졌어요. 저쪽 남자도 자기가 이상형이라고 하고. 어느 날 용기를 내서 직접 만나기로 했어요. 딱 만나고 보니까 지금 남편이에요. 2007년 보스니아에서 있었던 일. 둘 다 헐!!! 둘 다 달라진 건 없었어요. 뭐가 빠졌느냐 하면, 내가 못났다는 사실. 내가 가상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던 거예요. 현실 속에서 자신의 못남을 알아야 하는데, 자기는 역시 잘난 존재가 되고, 현실이 나한테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모세의 문제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을 통해서 왜 하나님의 분노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노엽게 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니 안에 있다는 것. 여기서 정리해갑시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연초에 제일 중요한 말인데, 내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요소가 내 안에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분노하는 요소가 내 안에 있는 것을 알 때, 그 분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모세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붙잡혀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생각하는데, 나의 건전함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의 기도와 헌신이 기쁘게 한다고 생각을 해요. 나의 착함과 구제가. 그거는 마귀가 조작한 거고. 그거는 사기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나님을 좋게 한다면, 그들이 애굽에서 풍족히 살 때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을 거예요. 하나님은 애굽에 살면서 영광 돌리는 것, 그거 인정하지 않습니다. “니가 아직 현실을 몰라. 나와! 인간들 나와! 니가 그 짝에 있지 말고 나와 보란 말야!” 나와서 보게 되면 하나님과 함께 있는 현실이 뭐냐 하면은, 우리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요소로서, 노엽게 하는 대상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왜? 노엽게 하는 것이 있어야 그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냐면, 그것은 로마서 3장에 보면 그 이유가 펼쳐집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화해라는 것은 우리 힘으로 성사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화해. 로마서 3장 그 유명한 구절인데요.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예수님의 피가 화목이에요. 우리의 건전함이 화목이 아니고. “모세야 니 건전함 내놓아봐라. 아이구, 예뻐요. 아이구, 착해요.” 이런 게 화목이 아니고.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화목한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피를 왜 흘렸습니까? 피를 흘릴만한 요인이 우리 속에 있다는 거예요. 왜, 피를 흘려요? 촐랑대면서 자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착각하는 그러한 노엽게 하는 요소가 우리의 의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말로 해서 되겠어요? 우리가 얼마나 고집이 센데.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니대신, 그 노엽게 하는 것을 니 스스로 반성할 수 없으니까, 차라리 내가 니한테 맞아 죽을게. 맞아 죽어서 흘린 그 피로 말미암아 소급해서, 사후적으로 소급해서 보니까 “주여, 내가 주를 노엽게 하는 요소로 가득 찬 존재에 불과하군요. 제가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리 하나님 믿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확정지으세요. 우린 어떻게 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이요, 세계에서 제일 높은데 연초가 되면 거기에 많은 사람이 올라갑니다. 거기에 올라가려다 수 백 명이 죽었어요. 등산가들이 산사태, 눈사태 나서 죽었거든요. 에베레스트가 무슨 잘못했습니까? 에베레스트 산이 무슨 잘못한 거 있어요? 에베레스트가 살아 있어 가지고 정상에 올라오려고 하는 자들을 발길로 차가지고 일부러 산사태 일으켜가지고 죽였습니까? 에베레스트는 가만히 있었어요. 가만히 있는데 저그들이 기어 올라가다 죽었어요. 웃기지도 않아. 산이 있으니까 올라간다고. 나는 산이 있어도 안 올라가요. 광고비 때문에 올라간다고 솔직히 말하지, 참, 말도, 산이 있으니까 올라간다고? 에베레스트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주님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괜히 인간들이 객기를 부려가지고, “주여, 저는 이 정도로 착하고, 이 정도로 하나님을 잘 믿습니다.” 하고 까불다가, 그러니까 지가 촐랑대다가 지가 미끄러져 지옥 가는 거예요. 핑계 댈 걸 핑계 대야죠. 옛날 우리 어른들이 아는 동화나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소도둑을 잡았거든요. 잡아가지고 “왜, 소를 훔치냐?” 이렇게 하니까, 자기는 소구경도 못하고 소도 안 훔쳤다는 거예요. “당신 소 가져갔잖아?” 하니까, “집에 보니까 새끼줄이 있어가지고 슬슬 새끼줄 땡기니까 뒤에 소 지가 알아서 딸려오는데 나보고 뭐라카노?” 우리는 뭐 하나, 허니버터칩을 구입한다든지, 우리가 어디 취직을 하든지, 어떤 뭐 TV를 보든지, 이거는 뭐 아무 죄라는 생각 안 해요. 그냥 새끼줄만 잡고 가니까 뒤에 주님이 딸려 와요. 피 묻은 채 딸려 온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자신이 얼마나 잘난 존재며, 대단한 존재며, 멋있는 존재인지, 나라는 행동에 어떤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자부하면서 행동에 옮기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 보기에 우리는 떳떳하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에베레스트, 한결같아요. 피 묻은 그것이 화목, 화해입니다. 그 이외에는 화해가 없어요. 니가 아무리 착해도 그것 때문에 화해하지 않아요. 니 말고 예수님 피 때문에 화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피를 본받기 위해서 몽땅 다 망해야 되는 겁니다. 어떻게? 분노의 증거를 가지고 망해야 돼요. 그냥 망하면 안 돼요. 하나님이 분노했다는 증거로써 망해야 돼요. 십자가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분노가 담겨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건을 믿어야 되는 겁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분노하는 것은, 사실은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창조자가 나보고 분노하는, 분노가 그 분노라는 것을 고백해야 돼요. 모세는 아직도 자기 기도가 반려된 것에 대해서 의미를 몰라요. 자기 같은 지도자가 왜 약속에 땅에 못 들어가고 넌지시 느보 산에서 구경만 해야 되고, 결국 느보 산에서 죽거든요. 요단강 맞은편 산에서. 왜 내가 이정도 밖에 안 되느냐고 아마 한숨 쉬었을 거예요. 그것은 아직도 자기의 몸이, 자기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옮겨가는 그러한 범위가 되지를 못했어요. 어젠가, 금요일인가, 오후 2시 24분입니다. 저한테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어요. 뭐냐 하면은 손톱을 깎는데 2014년 달력 뒤에다가 손톱을 깎으려고 덤벼들었어요. 근데, 제 아내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아껴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쪼그마한 쪼가리에다 손톱을 깎으라는 거예요. 근데, 저는 달력 2014년도 뒷면, 그것도 이종분 집사님이 주신 달력, 거기에 깎으려는 그 이유가 있어요. 손톱이 튀어버리면, 작은 데서는 튀면 어디간지 몰라요. 근데, 이게 면적이 넓으면 튀어도 다 찾을 수가 있어요.

모세가 깎는 손톱은요, 지가 아는 요단강 넘어 그까지 뿐이에요. 그러나 내가 왜 죽는지는, 뭣 땜에 죽는지는 예수님이 와서 넓은, 달력 뒤처럼 넓은 뒤에다가, 넓은 데에다가 해야 해요. 그래서 신약 시대가 와야 돼요. 구약에 보면 주님이 준비하신 것을 다 밝혀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히브리서에 보면 모세는 그냥 일꾼이지 아들 깝은 안 돼요. 예수님이 오셔서 죽을 때는 진짜 우리 죽음이고, 예수님 부활 할 때 우리 생명이지. 모세가 죽고 사는 것은 그냥 예수님의 티를 낼 뿐이지. 모세 죽고 사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구약에서 주의 종에게 잘해주니까, 별미를 갖다 바치니까 복을 주더라, 그리고 양이 늘어나고 소가 늘어나더라, 그걸 사람들은 축복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거는 손톱을 좁은, 요만한 종이에다가 깎는 거예요. 튕겨버리면, 아브라함은 소와 양이 늘어나는데 왜 죽지? 왜 죽는 이유를 몰라요.

그리고 신약에다가, 넓은 달력 뒤에다가 깎아버리면 무화과에 소출이 없어도 그게 복이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그게 복이라는 사실을, 넓은 범위에서는 이게 카바되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달력 뒤처럼 넓은 범위입니다. 아내가 달력 뒤에다 하지 말라는 것은 그걸 또 하면 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계속 사용해야 되거든요. 알뜰살뜰 그거 이해합니다. 그걸 이해하는데 제발 손톱은 넓은 걸 사용해달라고. 우리 생각이 그냥 세상처럼, 내 이거 잘 됐다, 부자 됐다, 거기에 좀 얽매이지 마세요. 뭐 부자 되고 부흥 됐다,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넓게, 죽어도 괜찮아. 좀 더 넓게. 넓게. 설교 끝. 더 넓게. 주님처럼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어도 괜찮은 거. 베드로처럼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가도 괜찮은 거. 내 원대로 안 되도 괜찮은 거. 그런 한 해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주님께 노엽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것이 축복이고 그것으로 인하여 십자가가 연결된다는 사실을,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고백이 나온다는 사실, 그것이 화목제물과 관련된 재료인 것을, 저희들은 감지하면서, 감독하면서, 감격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