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신명기 3: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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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2014년 12월 28일 본문 말씀: 신명기 3:18-22
(3:18) 그 때에 내가 이 땅을 받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셨은즉 너희 군인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이 되어 건너가되
(3:19) 너희에게 육축이 많은 줄 내가 아노니 너희의 처자와 육축은 내가 너희에게 준 성읍에 머무르라
(3:20)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 같이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편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땅을 얻어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고
(3:21) 그 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가 목도하였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
(3:22)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
누가 무엇을 상속한다고 해준다면 일단 대단히 기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 소유’로 전환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상속, 곧 기업이란 받은 자의 소유가 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속에 하나님께 준비해놓은 원리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소유 말해서 택배 물건 받으면 그 안에 설명서 들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그 설명서로 인하여 상속받은 이스라엘은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들은 ‘무장 군인’이 되어야 합니다. 즉 설명서 자체가 일반적으로 상속분으로 즐거워하는 것과 일반인과는 달리 살게 하시는 겁니다. 주신 것으로 인하여 도리어 받은 자들은 주신 것에 예속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설명서의 원리는 공평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소득 5만 달라라는 점에서 공평한 것이 아니라 모두 다 노예요 모두 다 거지라는 점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스라엘이 원래 아무 것도 없는데서 등장된 나라입니다. 따라서 나타난 이상, 그 나라의 운명에 대해서 이스라엘 당사자들이 주도적으로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벌써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모세나 여호수아나 모두 개인적인 의도가 이스라엘 장래에 개입될 수 없고 오직 사전에 주어진 ‘모세 언약’에 준해서 반복적으로 적용받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역사적 개인적 인물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대신 ‘없었던 나라를 새로 만든 원리’가 주관하는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기업, 곧 상속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늘과 닿아있는 노선을 말합니다. 곧 생명의 줄입니다. 문제는 그 노선 안에 있는 생명에 합류되려면 그 원칙이 예수님에 의해서 밝혀진다는 사실입니다. 즉 사적으로 “나는 생명의 줄인 그 하나님의 기업을 소중히 여깁니다”고 고백한다고 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소개하는 바에 의하면, ‘죽음에 참여’가 곧 ‘생명의 참여’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생명을 얻기 위해 죽어야 된다는 말이 됩니다. 문제는 이 죽음에 있습니다. 즉 “나는 생명을 얻기 위해 죽을 수 있는 각오와 결심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갖겠습니다.”라고 해도 일단 죽으면 그 각오와 결심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함께 다 날아가 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단순하게 정리해서 말하면 이러합니다. 하나님 쪽으로 영생을 상속분으로 해서 이스라엘에게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속분을 이스라엘이 소유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생명이란 소유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명이 도리어 얻을 사람을 이 세상에서 죽게 합니다.
물론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다 죽는 그런 일반적 죽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접선되기 위해서 죽는 특수한 죽음은 따로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나올 때, 어린양의 죽음이 바로 특수한 죽음입니다. 곧 억울한 죽음이요 아픔이지요. 바로 이 특수한 죽음을 모세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겪게 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된 약속은 반복을 통해서 도리어 강화됩니다. 그 반복이 오늘 본문에서 이방민족과의 전투에서 진행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주저없이 구체화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 실현’이라는 명분으로 싸우면서 얼마나 본인들이 이방민족과 닮아있다는 점을 파악해야만 합니다.
일반적인 죽음에서 특수한 죽음을 맛본다는 것은 인간의 힘이나 아이디어로 성사되지를 못합니다. 이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의 약속 실현 차원에서 맛보게 해주십니다. 그 예가 열왕기상 21장에 나옵니다. 이스르엘 지역에 나봇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그 포도원이 탐이 난 이웃에 살던 왕은 그 포도원을 돈으로 구입하려고 의사를 타진해왔습니다. 그럴 때 나봇은 다음과 같이 대꾸합니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4절)
즉 “이 땅이 저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입니다. 그리고 이 상속분을 통해서 하늘의 영생의 나라와 닿아 있습니다.”이라는 식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부인이 이세벨이 남편을 근심케 한 그 나봇을 죽여버립니다. 그 나봇의 피가 쏟아지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이 벌리는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살해당한 흔적이 묻어있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바로 그 흔적의 연결이 곧 진정 영생과 닿아있는 생명의 노선이 되는 겁니다. 스스로 자살한다고 해서 생명의 노선에 합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속분이 만료되는 시점은 어떤 사태로서 마무리 될까요?
히브리서 9:15-17에 보면,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언약을 구체화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나라가 세워졌고 그 나라를 통해서 상속이 유지되고자 살펴보지만 결국에는 인간 입장에서 볼 때 생명의 상속분의 참여는 실패로 끝나고, 그 실패의 후유증이 죽음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 죽음을 받아서 자신의 특수한 죽음으로 전화시키는 방식을 사용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말씀의 실패자요 모두 죽어야 된다는 점이 극히 공평하지만 이 공평의 바닥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생명을 가졌노라도 주장할 수 없는 형평에서 오직 예수님 홀로 일하심으로 생명으로 통해서 상속분이 완성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는 모든 인간은 자체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자신을 과도하게 비판하고 낮추고 겸손해도 하나님의 상속분에서 요구하는 합당한 만족을 갖출 수는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에 의해서 그 무의미가 받아들여지게 되면 비로소 인간은 ‘예수님만이 최종 약속’이라는 차원에서 의미가 생기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일상에 무게를 주지 말게 하옵소서. 확정된 십자가 능력의 의의만 우리 몸을 통해 계속 구체적으로 반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강-신 3장 18-22(기업)1412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장 18-22절입니다. 구약성경 265페이지입니다.
“그 때에 내가 이 땅을 받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셨은즉 너희 군인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이 되어 건너가되 너희에게 육축이 많은 줄 내가 아노니 너희의 처자와 육축은 내가 너희에게 준 성읍에 머무르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같이 너희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편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땅을 얻어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고 그 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가 목도하였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
무슨 뜻이냐 하면, 모세에게 주신 약속을 실현, 구체화하는 데 있어서 역사가 필요하다 그 겁니다. 너희들이 필요한 역사가 아니고, 너희들이 원하는 역사는 이제 끝났어요. 모세에게 주신, 모세에게 하나님이 뭔가 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준 게 있습니다. 그 약속을 실현시키는 과정 속에서 너희들은 거기에 말려들 것이라는 내용을 하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가 꾸려가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하나님의 확정된 계획이 있고, 그 계획에 너희들은 복된 사람으로서 걸려들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들의 행함과 관계없이, 행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줄기차게 추진하시는 그 일에 혜택을 너희들이 입게 된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뭐, 군인 나오고, 육축이 어떻고, 땅이 어떻고, 기업을 삼고하는, 이 모든 일은 하나님 계획이지 너 계획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계획이라는 것은 없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서 수긍을 했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데요. 그들은 이런 이야기는 들었지만 수긍은 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먹어요? 아이고, 만만치 않습니다. 인간은 한 고집이 있어요. 자기 계획이 우선이지 자기 외부의 계획은 항상 거절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열심은 우리 열심보다 더 세기 때문에 그러한 마찰과 충돌을 겪으면서 기어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꺾으시죠. 우리를 굴복시켜 버립니다. 굴복시켜 버리면, “아, 하나님 말씀이 맞군요. 제 고집은, 이것은 현실성이 없는 거였군요. 더 나아가서 제 고집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마귀의 아이디어에 불과한 거였군요.” 라고 나중에 계속해서 자백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구절을 잘 아시다시피 요한일서 2장에 보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다 세상에서 온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가 바르게 살려고 애쓰지 마시고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 제가 뭔데 이 이야기를 왜 저한테 이야기합니까?” 그런 생각을 품고 살아야 돼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왜 저한테, 굳이 이 정보를 나한테는 이렇게 알려주시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왜 이걸 내몰라라 하십니까? 니가 이스라엘이다. 니가 이스라엘이거든. 특별조치에 따라서 너에게 혜택이 주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실습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계획이 실제 담겨 있는, 이런 어떤 취지에서 이렇게 줄기차게 밀어붙입니까? 라는 것은, 이상스럽게도 이스라엘에 의해서 고난 받고 핍박받는 사람을 통해서 그 진수가 드러나게 돼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그냥 진척은 하는데, 우리집 앞에 집 하나 짓거든요. 이층 헐어 버리고 이쁘게 집 하나 지어요. 이쁘게 집 지을 때 우리는 뭘 보느냐 하면, 날로날로 집같이 변모하는데 우리는 기분 좋지만, 가끔 이렇게 지나가면서, 서서 보는 것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한다고 했죠. 가끔 지나가면서 보게 되면, 뚝딱뚝딱, 노가다들이, 젊은 사람들이 앉아서 일하고 있어요. 우리는 그 일하는 사람들이 눈에 안 보이고, 번듯하게 달라지는 외형만 보고 감탄하는데, 그 안에 수고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 살 집도 아니에요. 자기 살 집도 아닌데 그렇게 애를 써서 고생하는 겁니다.
바로 모세가 그 일을 담당하고, 오늘 본문에 모세 죽고 나서 누가 일을 담당하는가, 여호수아가 담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모세나 여호수아나 둘 다 본인 일이 아닌데, 그 사람들은 불러 땡긴 거예요. 불림을 당한 겁니다. 이것을 어렵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관해서는 반복하면서 강화된다는 뜻입니다. 반복하는 가운데서 오히려 이미 확정지었다는 사실을 점점 더 강조가 되는 방식이죠. 우리 성도 인생이 뭐냐, 성도 인생은 온갖 변화를 겪으면서도 확정된 사실이 점점 우리 속에 강화가 되는 겁니다. 결국에는 죽을 때에도 오직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는 그 고백이 나오게 하는 거예요. 그 확정된 사실이 점점 더 강화가 되죠.
근데 오늘 설교 제목이 기업이라고 되어 있고, 오늘 본문에도 기업이라는 게 나옵니다. 그러면 이 기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뭐, 골치 아프게 하지 말고 알기 쉽게 딱 부러지게 이야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아마 미국에서 온 사람도 경상도 말 어려우니까. 딱 부러지게 기업이 뭐냐, 천국과 연결된 노선입니다. 다른 것은 안 돼요. 상속이거든요. 기업이라는 말이 어렵기 때문에 상속으로 바꿉시다. 상속했다는 말은 아버지 안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 하는 것은 유언이죠. “얘야, 죽고 난 뒤에 둘째 아들은 이 부동산 갖고, 그저 첫째 아들이 이 집 가져라. 그리고 셋째 아들 너희는 밭을 가져라.” 자식들이 봉사하면서 제일 기다렸던 하이라이트 순간은 그 순간이에요. 어떤 아버지 어머니는 바로 그 순간까지 카리스마를 유지하기 위해서 절대로 안 내놔요. 가장 중요한 것은 꽉 쥐고, 내놓으면 이제 나는 당하는 거죠.
제가 광주강의에 가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가진 것도 없죠. 없는데 치매 걸렸어요. 이 등급이 안 나오니까 문제가 돼가지고 시어머니를 때리면 등급이 나올까 싶어서 줘패버렸어요. 팼는데도 등급이 안 나와요. 그런데 그 다음 방법이, 참 제가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굶기니까 돌아버리대. 아, 그 방법. 노인을 굶기니까 완전히 돌아버려서 등급 나왔어요. 패도 안 되고, 어디 딸보고 당신 어머니 모시라고 해도 벌써 챙겨 버렸는데 모실 이유가 없잖아요. 유산 다 챙겼는데. 그러니까 등급은 받아야겠고, 등급이 없으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까. 때려도 안 되는데 굶기니까 아....돌아버리대요. 내 쌀 어딨노? 야, 그 방법이 있었구나! 그래서 등급 받아 가지고 아주 지금 요양원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답니다.
이게 유언되면 곤란해요. 상속이 되어 버려야 돼요. 상속인데 그 상속자가 살아 있어야 돼요. 살아 있고, 영원히 살아 있고 그 상속자가 연결되어야 합니다. 일종의 스파이더맨에서 나오는 그물 같은 거죠. 그물 해놓고 끊어지면 안 되잖아요. 쏜 사람에게 연결되듯이. 바로 상속, 기업이라는 것이 이런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머리 좋은 사람은, 그러면 하나님의 상속 내에 천국의 요소가 필히, 반드시 들어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반드시 천국의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아, 그렇다면 천국 자체가 생명입니까? 예, 생명입니다. 와우, 그러면 신났다. 그럼 그 상속을 우리한테 주시옵소서. 이래 나오겠죠. 자, 그 다음에 이야기를 해봅시다. 이야기를 계속 해봅시다. 그 상속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다면, 그 생명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다 보여줬습니다. 이 땅에서 죽어야 이게 생명을 얻을 수 있어요.
한 알의 밀알이 돼야 이게 열매를 맺거든요. 우리는 생명은 좋은데 이 땅에서 죽어야 된다는 이 부담은.....,이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러면 어느 정도냐, 죽어도 다시 산다는, 죽음 이후까지 극복해야 하는, 죽음 이후마저 내다봐야 될 믿음이 필요한데, 아, 이 믿음은...상당히 곤란하게 되죠. 왜냐하면, 믿음을 가진 내가 죽어야 된다는 말은, 죽고 난 뒤에는 그 전에 가졌던 믿음, 소망, 사랑, 한꺼번에 다 날라 간다는 뜻이거든요. 백날 살기 위해서 믿음 준비해봐야 그건 쓰레기로 처분되는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 있어도 소용없고, 믿음 없어도 소용없는, 이런 난관에 빠지는 겁니다. 자,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고자 이렇게 하나님의 기업을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겨지죠.
근데, 오늘 본문에 봅시다. 여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거기 해결책으로 나와 있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기업을 주시기 위하여 준비된 것까지 주십니다. 달랑 이게 상속이다. 이게 생명이다. 이것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오늘 신명기 3장 18절에서 22절 보게 되면 구체적으로 뭔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구체적으로 일을 하는 겁니다. 일을 하면서 제일 먼저 제공되는 것이 뭐냐 하면 공평함을 배우게 해요. 공평함. 평등함, 공평함을 배우게 하는 겁니다. 공평함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국민소득 오만불로 공평하게 하는 게 아니고 몽땅 다 노예고 몽땅 다 거지가 되게 하는 공평함입니다. 원래 이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잘 먹고 죽은 시체는 때깔도 좋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별로 신빙성 없는 이야기고 죽고 난 뒤에는 때깔 구분 잘 안 됩니다. 색깔 다 똑같습니다. 누리끼리 하고 시퍼렇고 다 똑같은데,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공평함을 배워야 돼요. 공평함 위에다가 자기가 색깔 칠하고 화장하고 메이크업 할 필요 없어요. 똑같이 되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똑같이 되게 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찾아야 뭔가 출발점이 되겠는데, 이 세상에서 똑같은 것이 어딨습니까? 물어보면 저는, 이건 유치부 아이들도 아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며칠 지나면 한 살 먹습니다. 세상에 이런 공평함이 없어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젠젠젠틀맨이 되든, 누가 되든, 어떤 젠틀맨이 되든 필요 없어요. 전부다 똑같이 못난 자나 잘난 자나 한 살 더 먹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바로 가르쳐주면 좋겠는데 부모님들이 바로 가르쳐주지를 않고, 이런 낭설을 이야기했어요. 얘야, 팥죽 한 그릇 더 먹고 떡국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는 거예요. 그럼 제가 떡국을 세 번을 먹었습니다. 그럼 불공평해요. 세 살 더 먹은 것이 되고 팥죽은 여덟 그릇 먹으면, 갑자기, 형은 두 그릇 먹고 나는 열 그릇 먹으면 내년 되면 내가 형 되고 형은 동생이 되는, 나이에 역전이 생겨 버리네. 그래서 어릴 때는 그런 의문점이 있었어요. 물을 대상은 없지만. 우리 어머니는 맨날 할머니 섬긴다고 바뻐가지고 우리한테 대화도 잘 안 했는데. 도대체 왜 떡국을 한 그릇 먹으면 한 살, 그럼 두 그릇 먹으면 두 살 이래 되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건 다 잘못된 이야기였습니다. 이게. 누구나, 심지어 굶어도 떡국 안 먹어도 한 살이에요. 전부다 먹습니다.
이 말은 뭐냐,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는 겁니다. 사는 것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인생에, 죽음이라는 공평이 인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겁니다. 그 죽음에 대한 원천적인 진짜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상속, 기업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펼치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싸우다 죽으라 그러면 너희들이 어린양의 죽음에 접촉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없는 이스라엘이 새로 만들어질 때는 어린양의 죽음이 개입됐습니다. 이 말은 죽음 없는 이스라엘은 없다는 이야기죠. 그러나 이방 사람들은 늙어죽을 때나 죽지 그전에부터 죽음의 흔적을 쥐고 있을 이유는 없다고 본 겁니다. 이방 민족들의 종교를 이렇게 공부를 하게 되면, 모든 세상 민족 공부를 해보면, 임금이 있는데 그 임금은 해야 될 일이 있어요. 제사를 지내가지고 한 해 동안 그 나라에 재산과 목숨과 안녕과 영토를 지켜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에게 기도를 해서, 그 순간만큼은 왕은 신의 아들이 돼요. 아들이 되고 국민들에게 이 나라를 지켜주소서 하는, 그런 식으로 제사를 드려야 돼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영국의 국가 이름이 뭡니까? “여왕이여, 이 나라를 지켜주소서” 아닙니까? 왕이여, 이 나라를 지켜주소서. 이 나라를 지켜달라는 거예요. 그게 이방나라가 해야 될 거예요. 그거 지켜서 뭐하게? 지켜야 우리가 산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하기를 절대로 그런 나라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나라를 본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이 나라가 만들어졌는가를, 그 솟구쳐 나온 그 원천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은, “그럼 과거로 돌아갈까요?” “아니.” “어떻게 할까요?” 지금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확정된 약속이 반복하면서 지금껏 이스라엘이 된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 자체가 바로 언약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진리가 되죠.
이걸 개인으로 바꾸면 오늘 아침에 말씀한 것처럼 우리가 곧 지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내가 신이라는 뜻은 아니고. 지혜의 열매, 지혜의 산물, 하나님의 숙제물, 예수님의 숙제물이 우리 자신이 된다는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전쟁을 해야 되는데 그 전쟁은 적들을 물리치는 쾌감을 누리라고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죽음을 늘 만끽하는 전쟁을 해야 되겠죠. 그러면 우리의 죽음을 만끽하는 전쟁이라면 우리는 바로 내가 살고자 하는데서 사는 것이 아니고, 다른 원천지에서, 언약이 나오는 구석에서 내가 살고 있다면 그 반면에, 이방인들은 본인이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야 된다는 그런 고집이라면, 그 둘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오늘 본문에 무장해서 싸우라 했으니까, 전쟁의 군인들이 되어서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면 한쪽은 자기 힘만 의지하는 전쟁인 반면에, 이쪽은 우리 가진 힘을 포기하는 전쟁을 통해서 죽음의 원천지를 접근하게 되어 있고 접촉하게 되어 있죠.
그러면 죽음 접촉해서 뭐할 건데? 그러면 사람이 너무 부정적이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이 들 텐데. 그 죽음 안에서 비로소 생명이 바로 그 안에 다 있어요. 영생이, 천국이 그 안에 들어 있으니 문제죠. 문제가 되는 거예요. 사탕을 먹더라도 그냥 먹으면 안 되고, 그 비닐 포장지를 까야 그 안에 사탕 알맹이가 들어 있는 것처럼. 죽음이라는 것을 까야 그 안에 생명이 들어있다 이 말이죠. 생명으로 들어오려면 죽음으로 접근해 나가야 해요. 이것은 우리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도 적용된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라고 해놓고, 온 열 두 제자가 다 오해하게 만들어놓고, 본인은 죽어야 된다니까, 제자들 머리에는 생명이 되시고, 어? 죽어야 되시고. 어떻게 생명인데, 생명이 죽을 리가 있느냐? 여러분! 하나님이 죽는다? 상상이 되십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에 그게 빠져 있어요. 하나님이 죽는다는 게 빠져 있어요. 그게 가짜에요. 죽는 하나님을 믿어야 사는데, 살아있으면서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니까 둘 다 가짜가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왜 죽어야 생명을 얻는가.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기업이라 하는 것은 상속인데, 그 상속은 천국과 통하는 상속이 돼요. 문제는 거기 접근하려면 그 상속을 이루신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본인이 죽어서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의 죽음으로 다가가야 주님의 생명에 합류할 수 있다는 그 원칙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싫어! 나는 그런 방법 싫어!” 하겠죠. “나는 그런 식으로 하면 나는 천국 안 갈 거야.” 안 가더라도 단회성이, 확정된 약속은 우리를 반복을 통해서 “어디를 안 가? 반드시 가야 돼.” 라고 우리에게 죽음의 원천이 느껴지는 경험들을 하게 만듭니다.
그 경험들 중에, 성경 구약에 나와 있는 하나의 유명한 예가 있어요. 하나의 사례가 있는데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거기에 포도원이 하나 나옵니다. 나봇의 포도원입니다. 누가 뺏으려고 하냐면 바로 옆집에 있는 아합 왕이 그걸 뺏으려고 덤벼들었어요. 왜 뺏으려고 하는가? 포도가 거봉이라. 포도농사가 너무너무 잘돼요. 포도가 잘 되니까 자기가 먹는 포도가 너무 맛이 없어요. 뭔가 견물생심이라고 보니까 탐이 나는 거예요. 왕이 안달이 났어요. 그래서 제안을 합니다. 더 넓은 포도원하고 바꾸자. 물물교환 하자. 그런데 답변하는 것이, 나봇이 있다가 “거 몇 평인데요? 이거는 한 오만 평인데 거기는 몇 만 평인데요?” 이런 것이 아니고 “억만금을 줘도 팔수가 없습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래요.
이 포도원의 주인은 내가 누구한테 임대차 계약을 한 게 아니고 내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럼 누구한테 임대차 계약했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한테 임대차 계약 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통하는 포도원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과 통하는 포도원이 되는 거예요. 결국은 나봇의 포도원에서 피가 흘려지는데, 누구 피가 흘려지느냐, 그런 이야기를 한 나봇 본인이 나봇의 포도원에 피가 흘리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포도나무라 했어요. 자신이 포도나무거든요. 예수님의 포도나무는 피로 적셔진 포도나무가 되는 겁니다. 아버지와 연결된 상속이고 기업인데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형식으로, 모양새로 진실된 생명과 통하는 유일한 죽음을 보여주게 되죠.
우리가 그냥 죽는다고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죽어줘야 그게 생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언약에, 약속에 의해서 관련된 죽음이 돼야 돼요. 이것은 인간은 성경 말씀보고 자기반성하고 자기비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노선에 충족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상속이, 하나님의 언약과 기업이 이렇게 보시면 좋아요. 하나의 노선, 하나의 선. 선이라고 본다면, 이쪽 선에서, 우리가 사는 이방민족 선에서 약속의 선으로 옮겨 탈 수 있는 방법은, 이거는 반성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비판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부족하다. 부족하다. 아무리 낮추어도 노선 갈아타기는 실패에요. 그래서 저쪽 노선에서, 생명을 통한 저쪽 노선에서 뭔가 작용이 돼야 됩니다. 나봇의 포도원이 있는데, 나봇의 포도원은 그냥 하나님이 주신 유업이고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팔수가 없습니다 할 때, 자꾸 하나님께서는 옆집에 사는 아합 왕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좋은 조건이 들어오게 만들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만듭니다.
우리 김명현 목사님이 일하시는데, 주유소 여자 주인이 크리스마스가 뭐냐고 할 때, 김명현 목사님이 상당히 복음을 모독하는 걸로 들었던 모양이죠. 그래서 제가 평하기를 그것도 악마가 만들어 준 직업인데 감사해야죠. 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은 가만두지를 않습니다.
“니 나하고 다를 것 같아? 똑같아.” 하고 자꾸 우리한테 들쑤셔요. 들쑤십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계신데, 제가 잘 모르지만 어떤 들었던 이야긴데, 딸이 사범대학을 나왔어요. 교사 임용고시를 언제 치느냐, 일요일에 치게 돼있어요. 그런데 그 목사가 자기 딸보고 강권해서 절대로 주일날 못 치게 했어요. 목사 딸이 주일날 시험 쳐버리면 교인들이 에이그, 목사가 지 딸 시험 치는 것은 봐주고 우리보고 안식일 지키라고, 주일 지키라고 그렇게 닦달내면서 앞뒤가 안 맞다고 한다면 지 자리가 위태위태하잖아요.
그래서 그 딸은 심청이 같은 심정으로, 아버지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서 사범대학을 사년동안 댕겨놓고는 임용고시 못 쳐가지고 뭐 딴 거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경우가 옛날에는 많이 있었어요. 안식일 지켜라. 그 말은 뭐냐, 안식일을 우리한테 지키라는 뜻으로 한 게 아닌데
뭔가 내까지 희생할 정도로 안식일 지켰다면 아마 하나님께서 내 하는 것보다 뭔가 월등한 좋은 것을 따로 마련한 것이 있을 건데. 그것을 충분히 보상되고 너끈하게 남을 큰 복을 주시겠지 라는 그런 계산에 의해서 안식일을 그렇게 지킨다고 한 겁니다. 잘못된 겁니다.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과 거래한 거예요. 사실 마귀하고 거래한 거예요. 왜냐하면 임용고시 안 치고 주일날 지키게 한 그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임용고시 안 쳐가지고 그런 교사 일을 못해서 수입이 적어지는 것을 그런 고난으로 생각하지 말고. 교사 한 자체를 통해서 수난 받는 것은 생각 안 합니까? 교사 하면서 학부모한테 멱살 잡히는 그런 것은 왜 생각 안 해요?
왜 자기가 스스로 낮추고, 자기비판하고, 스스로 겸손하게 하면 노선 갈아타기가 된다고요? 안 됩니다. 더 쉽게 말해서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노선 갈아타기 불가능합니다. 실패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 될 사람만 되게 만드는 명단이 언약 안에 들어있어요. 그 사람만이 나중에 뒤돌아서서 알게 되는 겁니다. “아, 이거 주께서 구원하기로 작심을 아주 하셔가지고 나로 하여금 주일날 교사 해가지고, 괜히 교사해서 학부모한테 멱살 잡혀 이렇게 되게 하는구나.” 알게 하시는 겁니다. 미리 땡겨서 교사 안 됨으로써 어떤 다른 혜택 기다리지 마시구요.
제 이야기가 히브리서 9장 15절에 나와 있는데, 제가 이 본문 이야기하기가 상당히 주저돼요. 왜냐하면 이 본문이 너무너무 어려운 대목인데, 어느 정도 어려운가 여러분 한번 듣기만 들어보세요. 히브리서 9장 15절,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더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16절,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18절,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이게 뭐예요? 이 대목이 신문지상에 나오면 아무도 알아 볼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이 이야기를. 이게 히브리서 9장 15절에서 18절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인간도 이룰 수 없는 노선 만들기. 영생으로 통하는 유업. 그 상속의 완성을 위해서 아무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전부다 잠재워놓고 본인이 그 위에서, 잠재워있으니까 모든 인간은 천국에 못가는 아주 공평함. 누구나 한 해 지나면 한 살 먹는 그 공평함. 그러다가 모든 인간이 죽음으로 떨어지는 그 공평함. 그 공평함 위에 예수님께서 본인이 그 상속을 실현하고자 본인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옛 언약과 교체시켰다는 이야기입니다. 옛 언약과. 어떻게?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통해서 교체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살아서 죽었습니다. 나는 저렇게 살아서 죽었습니다.” 라고 할 때에 죽었다는 그 외에 이렇게 살다 죽고 저렇게 살다 죽었다는 그런 것은 구원받는데 아무 문제 될 게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 문제 될 게 없다. 처음부터 니는 죽게 되어 있어요.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스스로 비판하던 간에, 자아를 낮추던 간에, 스스로 겸손하게 되던 간에 전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죽은 것으로 돼있어요.
그럼 이 땅에서 인생사는 것은 뭐냐, 그거는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이 무장해서 적들과 싸우는 거예요. 싸울 때에 맨날 일만 당하면 여호와를 위하여. 하나님 편에 서서. 어데 구라를. 우린 맨날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싸웠습니다. 해놓고 그러면서 점점 더 한 해 지나면 나이 하나 먹고. 당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으면 나이를 안 먹어야 되는데. 거꾸로 가야 되는데요. 나이가 점점 더, 한 해 다르게 얼굴이 점점 망가지고, 점점 더 늙어지고, 모든 것이 감퇴하고. 내가 분명히 주를 위해서 싸웠는데. 생명 쪽으로 가까운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죽음 쪽으로 가까워버리면 내가 싸웠던 사람과 차이점은 공평하고 이게 없네. 없어요. 아! 있구나! 공평하게 만들게 하시는 그 분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노선, 상속 노선에 들게 하셨구나! 들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상속 노선은 뭐냐 하면은, 죄를 아는 자의 노선. 이걸로 결론지을 수가 있습니다. 진짜 죽음은 우리의 죄 때문에 해결한 죽은 자, 예수님의 죽음이 유일하게, 성도만이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자. 그렇다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마음껏 싸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일상은 무의미합니다. 사람이 뭔가 기대하고 고대하면 피곤합니다. 모든 피곤의 원천은 뭔가 나름대로의 고대하고 기대한 바가 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피곤하고 잠도 안 오고 찌뿌둥한 거예요. 오늘 손님 좀 와야 되는데. 신상 나왔는데. 좀 팔려야 되는데. 아!!모든 근원이. 이번에 애가 학교에 들어가야 되는데. 아!! 모든 것이. 요번 수련회 사람 좀 와야 되는데. 우리 교회 몇 명 되지도 않고. 모든 것이. 모든 것이 피곤하고 얼마나 피곤하면 꿈에도 나오고 그러겠습니까.
우리의 기대는 이건 구체화입니다. 하나의 반복성. 니가 죽어야 될 것을 확정지어놓고 니도 반복해서 죽되, 다른 사람같이 진짜 예수님의 죽음에 의해서 접촉하는 그런 생을 살게 되면 이미 우리가 곧 상속자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왜 사는 것인지 묻지도 않고 그냥 또 한 해가 돼서 또 한 살 먹었습니다. 이러다가 내년되면 또 한 살 먹고 남들 가는 죽음의 길을 공평하게 갑니다. 그 가운데서 주께서 이 모든 것이 예수님 죽으심을 증거 하기 위한 용도인 것을, 그래서 이스라엘인 것을, 그래서 생명의 노선인 것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