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신 3장 6-11(진멸)1412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장 6-11절입니다. 구약성경 264페이지입니다.
“우리가 헤스본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 성읍들을 진멸하되 각 성읍의 남녀와 유아를 진멸하였으나 오직 모든 육축과 그 성읍들에게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 그 때에 우리가 요단 강 이편 땅을 아르논 골짜기에서부터 헤르본 산에까지 아모리 족속의 두령에게서 취하였으니 (헤르논 산을 시돈 사람은 시룐이라 칭하고 아모리 족속은 스닐이라 칭하였느니라)우리의 취한 것은 평원의 모든 성읍과 길르앗 온 땅과 바산의 온 땅 곧 옥의 나라 바산의 성읍 살르가와 에드레이까지니라 (르바임 족속의 남은 자는 바산 왕 옥 뿐이었으며 그의 침상은 철 침상이라 지금 오히려 암몬 족속의 랍바에 있지 아니하냐 그것을 사람의 보통 규빗으로 재면 그 장이 아홉 규빗이요 광이 네 규빗이니라)
성경을 보게 되면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몰라요. 이 이야기를 우리가, 2014년도에 우리가 왜 알아야 하죠? 옛날에 땅 싸움 했는 거, 전쟁 했는 거, 여기에 대해서 우리보다 먼저 해석한 사람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 해석을 문법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문자적 해석. 문법적, 문자적 해석을 한 겁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성경을 문법적, 문자적 해석을 한 것은, 우리보다 먼저 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동일합니다. 우리도 성경을 볼 때에 문자적 해석을 하는 겁니다. 땅 싸움 하거든요. 땅 싸움하니까,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하니까, 만약에 이 대목을, 교회 예배당을 넓히는 시점에서 이 대목을 본다면, “기도하라! 하나님이 땅을 주실 것이다.” 라는 부동산 개념으로 당연히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부동산 업자들 같은 경우에, 투자 업자들, 이 땅 문제에, 그 유명한 기도 있잖아요. 기도하면 땅 넓혀준다는 기도. 역대하에 나오는 그 기도, 하여튼 유명해. 지금도 유명할걸요? 그 선배가 우리가 아니고 유대인들이 이미 그런 문자적 해석을 해왔었습니다. 문자적 해석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질서 문제 때문에 그래요. 질서. 그게 누굴 위한 질서냐? 나를 위한 질서입니다. 뭔가 체계가 잡혀 있고 안정돼 있다는 거예요. 땅이 있으면 보다 안정되기 때문에 혹시 땅 얻을 수 있는 성경 구절 없을까? 이스라엘 보니까 땅을 차지했더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 땅을 주시는 하나님. 그러면 그 점에 대해서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은 말씀대로 한다니까, 성경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여 땅 주시옵소서” 하게 되면 땅 넓혀 주고, 살 땅 주시겠다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히브리서 11장에 어긋나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땅을 떠나고 다른 땅을 쳐다보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아마추어들이 신학교 나온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이유가 전체를 보지 아니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렇게 딱 잡아서 뽑아내서 본다는 것을 간파를 해가지고 그 반대되는 것은 이야기 안 하고, 그냥 뭘 원합니까? 채워드리겠습니다. 고객이 왕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서니까. 아, 참 하나님 좋은 분인 줄로 이렇게 아는데, 여기 6절에 보면 같은 단어 두 번 나옵니다. “그 성읍들을 진멸하되....유아를 진멸하였으나” “진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싹쓸이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죽이는 거예요. 이 죽인다는 말은 질서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전부다 뽀개버린다, 폭파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창조했는데 거기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에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나님이 만든 창조를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해석층이 여기서 두껍게 생깁니다. 마치 우유를 놔두면 우유에 막이 형성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는 그대로 있는데, 거기 창조된 인간이 해석을 잘못하다보니까 자기 질서유지의 막이 형성된 거예요. 그 막이 구체화되면 도시가 되고 그 도시를 만든 조상이 누구냐, 아벨이 아니고 가인입니다. 가인은 캐슬, 성이죠. 가인은 성안에서는, 도시는 법적으로 체계가 잡히게 돼있어요. 함무라비 법전이라 해서, 기원전 이천년 전에, 이미 이라크 지방에서, 거기에 고대 바벨론이 있어요. 거기서 법으로 질서가 잡혀져 있습니다.
질서라는 것이 우선이에요. 통진당이고 뭐고 질서 하나로 전부 날라가. 이석기고 뭐고 질서 하나로 다 날라가 버려요. 질서가 우선되는 겁니다. 혼돈은 제일 싫은 거예요. 근데 주께서, 이스라엘이 어디서 나왔는가. 이스라엘은 창조에 없던 거예요. 없는데서 생겨난 민족입니다. 기존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있는데서 있음을 유지하기 때문에 어쨌든지 간에 질서가 체계화 잡혀야 되는데, 이 없는 것이 등장하다 보니까, 이 없는 것은 기존의 있는 것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없는 민족을 통해서 있는 민족을 뒤엎어버립니다. 그래서 진멸이에요. 이 전쟁을 가지고 여호와 전쟁, 또는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호와 전쟁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직접 용사가 돼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냐, 들러리가 되는 겁니다. 들러리. 아시죠? 결혼식 때 들러리. 또 뭐, 신랑이 들러리한테 반하고 이러면 안 되고. 들러리라 하는 것은 그냥 폼 잡아 주는 거예요. 잘한다, 잘한다, 치어리더입니다. 응원해주는 거예요. 이 응원해준다는 말은, 우리 가운데 진짜 싸울 분이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 진멸을 하는 가운데서 기존의 막은 찢어져버리고 이스라엘이 이제 부각이 되는 겁니다. 부각이 되는데, 그 이스라엘이 부각되는 것을 신약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영어로 렘넌트remnant, 남은 자. 남은 자라는 뉘앙스가 굉장히, 소유가 안 되고 남은 자라고 했다는 것은, 내가 노력했더니만 남게 되었다는 그런 인상은 전혀 없고, 내가 일부러 분류시켜 가지고 특별히 너희로 하여금 안 다치게 했다는 뉘앙스가 굉장히 강합니다.
엑소더스 영화에 보면 열 가지 재앙이 그래픽으로 나와요. 거기에 보게 되면, 그 영화에는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성경에 보면 나와요. 열 가지 재앙이 떨어지는데, 열 가지 재앙 가운데서 일곱 가지 재앙은요, 애굽 사람 사는 지역과 이스라엘 사람 사는 지역이 그게 구분 돼요. 네 번째 재앙부터. 왜 첫 번째 재앙부터 안 그랬느냐 하면, 첫 번째 재앙부터 세 번째 재앙은 애굽의 술객들이 흉내를 내기 때문에 그런 분류 자체가 돼버리면, “에이, 이 정도 재앙은 애굽 술객도 할 수 있는데.” 라고 그들이 큰 소리 칠 것을 우려해가지고 처음에 애굽 술객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때는 구분이 없어요. 근데, 애굽 술객들이 못한다는 것을 들통 나고 난 뒤에는 이번 조치는 특별 조치로써 내리는 재앙이라는 겁니다.
근데, 그 재앙에 누가 동원하느냐 하면, 제일 밑에 있던 창조가 엎어버리죠. 보세요. 재밌는 것이 창조가, 하나님의 창조가 하나님의 손에서 엎어버리니까, 소위 질서라는 것이 우습게 돼버렸습니다. 그 애굽 나라 질서는 우리끼리, 저들만의 질서에요. 저들만의 질서라니까요. “니가 뭘 원하느냐?” 오차장이 물으니까 장그래가 하는 말이, 이야기하옵소서. 누가? 우리끼리. 누가? 우리. 근데 갑자기 우리교회가 생각나요. 장그래가 하는 말이 계속 우리로써 일하게 해달라. 드라마 안 본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이지 몰라요. 미생 안 본 사람들. 우리, 딴 것 필요 없고 우리끼리 일하게 해달라고. 딴 거 다 필요 없고 돈도 필요 없고 우리끼리 일하게 해달라. 따로 나와 가지고 저그끼리 회사 차려서 우리끼리 되잖아요.
그 ‘우리가’ 창조의 허락을 맡았습니까? 이게 문제에요. 창조를 이용했죠.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 때는 무슨 목적이 있어서 만들었는데, 그 목적은 가위로 다 끊어버리고 우리한테 뭐가 필요하냐를 주워 모아서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우겨버립니다. 그게 바로 우상덩어리죠. 오전에 이야기했지만 어떤 총각이 그런 사창가에 가는 것이 인생의 오점이라고 했지만, 인생의 오점은 그런 게 인생의 오점이 아니고 십자가가 와버린 게 오점이에요. 근데 십자가는 뭐냐 하면은, 어떤 법칙이 통하느냐면 은혜 보존의 법칙이 통해요. 이게 해당 돼요. 은혜 보존의 법칙. 어떤 경우라도 기어이 분류시켜서 남은 자를 끄집어내는 은혜 보존의 법칙에 대해서는 내가 양보 없다는 겁니다.
그 은혜가, 이 말은요, 은혜가 되지 않는 것은 그때그때 다 삭제시켜 나간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뭐, SNS, 메일 주고받고 하는데 악플이, 나쁜 평이 달리곤 하잖아요. 그때 어떻게 합니까? 삭제하잖아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 하나님도 그 일을 하셔요. 백성한테 은혜가 되지 않는 것은 다 삭제해버립니다. 근데 사람들은 어떤 걸 삭제하느냐 하면, 자기 자존심과 자기 자랑거리만 남겨놓고 자기한테 해코지되는 것은 다 삭제하잖아요. 그게 자기 나름대로의 질서에요. 그 질서가 바로 우상이 되고 이것이 진멸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설교 다시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하는데 그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다. 근데 전쟁하는 용사가 따로 있다. 용사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 분의 특징이 뭐냐, 모든 것을 진멸하는 것이다. 왜 진멸해야 되는가. 밑에 있는, 원래 창조의 질서와 위에 인간들이 구성한 질서와 이게 안 맞기 때문에 위에 것은 우유막처럼 이게 제거 대상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11장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엘리야시대인데요. 그때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으니. 11장 5절,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했습니다. 이 말이 굉장히 오해소지가 있죠. 문자적 해석을 해버리면 이거는 땅 주신다. 그런 내용이 아니고 유대인의 문자적 해석을 하면 안 됩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사람 칠천 명이 있는데, 그들이 노력하니까 뭐, 신앙생활 잘해서 남게 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어떤 노력도요, 이 세상의 질서를 이기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신앙생활 좋더라도 돈 앞에서는, 권세 앞에서는 고개 숙이게 돼있어요. 무너지게 돼있습니다. 우리 20대 젊은 분들을 보게 되면, 제가 뭘 느꼈느냐면, 저는 20대에 그걸 못 느꼈는데, 이제 와서 20대를 보니까 그들이 타고난 분노를 갖고 있어요. 사춘기나 젊은 사람들의 특징이 타고난 울분과 분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울분과 분노가 왜 일어나는가. 겉으로 보니까 왜 세상은 날 안 알아 주냐? 빠라~빠라~빠라빠 하는데 거기 있어요. 내 여기 있다는 겁니다. 드럼을 치는 이유가 내 여기 있다는 겁니다. 근데 그게 안 먹히니까 울분과 분노가 계속 쌓이는 거예요. 이게 성인돼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이 나를 안 알아주는 거예요. 근데 생각해 보세요. 내가 뭔데 왜 알아 줘야 되지요? 알아 줄 필요가 없어서 안 알아주는데 우리는 안 알아준다고 짜증내고. 우리가 이론상은 맞아요. 세상이 알아 줄 필요가 없는데 이상하게 나는 그걸 안 알아주면 내가 힘들어져요. 세상이 나를 안 알아주면. 왜 그렇지요? 사람이 불행한 이유가 자기를 안 알아줘서 불행해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만약에 누가 알아준다면 그 근심걱정 불행이 한꺼번에 싹,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날라가 버립니다. 그 원인을 우리는 모르죠. 우리는 같이 죄악된 해석 속에서 같이 뒹굴고 같이 놀았기 때문에 그걸 모르는 겁니다.
어떤 분이 어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듣고 보니까 굉장히 사람이 좀, 약간 울컥했는데, 집안에 힘든 것도 있는데 나도 하나님이 하나의 나에게 주신 일이라 해서 감당하고 견뎌야죠. 이렇게 이야기해요. 감당하고 견뎌야죠. 집안에 우환이 있더라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견디라고 나에게 주신 몫이라 해서, 이것도 내 몫이다 해서 견딘다는 겁니다. 그게 견딜 자격이 됩니까? 견디면? 견디면 뭐 어떻다 말입니까? 견디면 하나님이 날 알아줘요? 지금 견딘다 말의 반대말이 뭐냐 면은 남게 된 거거든요. 우리가 남게 된 겁니까? 견뎌서 버텨서 기어이 이겨낸 자들입니까? 어떤 쪽이에요? 이게 견디게 되면 은혜 보존 법칙이 깨져버려요.
자, 견딘다 했습니다. 그러면 그보다 더 쎈 게 오면 견디겠습니까? 못 견딥니다. 병은 자랑하라고 엄살을 피워야 돼요. “머리에 피났쪄요” 이렇게 엄살을 피워야 돼요. 어제 진짜 머리에 피났어요. “머리에 피났쪄용” 이렇게 엄살을 피워야 됩니다. “주여, 제가 견디겠습니다.” 그러면 안 돼요. 그건 신앙생활 아닙니다. 그건 장한 한국인에요. 장한 한국인 필요 없습니다. 그건 자기의 엉터리 해석막을 고수하려는 거예요. 자기가 스스로 용사되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은 우리가 이길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갈 때에 그들이 견뎌서 이겨낸 게 아니에요.
자기 말고 딴 분이 자기 속에 섞여 있는 겁니다. 그 분이 가는 곳에는 진멸이에요. 진멸 할 때에 누가 당황스럽냐 하면 오히려 진멸하는 본인들이 당황스러워요. “하나님 뭐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습니까? 하나님 이거는 뭐 심하지 않습니까?” 6절에 보니까 “남녀와 유아를 진멸하였으나” 애들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애들은 살려줘야죠. 씨를 없애라는 것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자비롭지를 못합니다. 우리 쪽에서 말리고 싶을 정도로 아주 잔인하게 하거든요. 하나님의 하는 일이 잔인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정신을 못 차렸다는 겁니다. 우리 주제파악을 못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 자기 자리로 되돌아갑시다. 참고 이기고 견디고 그거 하지 맙시다. 그냥 엄살, 엄살, 맨 돌아서면 엄살, “흰머리 또 나왔쪄요.”또 엄살 부리면서. “흰머리 나와도 구원받은 거야” “감사합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뭐든지 주의 품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어리광을 부리면서 살아야 돼요. 용기 있으면 자립하는 수가 있어요. 자립하면 그건 신앙생활이 아니고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11절에 보면 “르바임 족속의 남은 자는 바산 왕 옥 뿐이었으며 그의 침상은 철 침상이라” 이게 철기문화라 하는데, 이게 질서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과학적 기술을 동원해서 단단한 자기 생존의 안정적인 틀을 맞이하는데 점점 더 문명이 발달하잖아요.
그걸 고고학자들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문화. 철기문화에서 에너지문화로 이렇게 바뀌거든요. 문화가 바뀌면서 정치, 경제가 다 바뀌고 심지어 종교도 다 바뀌게 마련입니다. 윤리도덕도 그렇게 다 발전합니다. 근데, 여기는 철 침상이니까 철기문화에요. 철기문화는 무슨 뜻이냐 하면, 미국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군대가 미국을 점령할 때에, 총 들고 왔을 때에, 그들은 인디언 활 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이거는 전쟁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한쪽은 기관총 들고 있는데 한쪽은 침 퉤 뱉고 있고. 이래 가지고 무슨 전쟁이 되겠어요. 문자적 해석을 해버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철기문화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정복한다. 이래 되거든요. 이걸 유대인들이 지금도 기다리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이스라엘을 깔보는 모든 것들은 다 무너질 것이다. 거기다가 약간 더 성경에 나오지 않는 해석까지 플러스, 알파 첨가하게 되면 하나님은 이미 핵폭탄을 준비했을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이 핵폭탄을 준비했을까요? 그래서 철기문화, 이방 다른 민족,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슬람을 핵폭탄 가지고 조질 겁니까? 그렇다면 미국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이 되고 우리는 친미주의자가 되고. 이러면 이석기한테 욕 얻어먹어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 되죠. 그렇다면 김일성 말이 맞아요. 하나님 잘 믿는, 복음 잘 아는 한국에는 교회만 주지 말고 핵폭탄, 수소폭탄을 주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중국을 이기고. 이래야 계산이 맞아요. 그게 바로 문자적 해석입니다. 그러면 영적 전쟁은 뭐냐, 영적 전쟁이라고 하니까 굉장히 골치 아픈데. 은혜 보존의 법칙에 의해서 진행되는 게 영적 해석입니다. 은혜 보존의 법칙. 은혜 보존의 법칙이라는 것은 나대지마라 거든요. 나대지마란 말이죠. 가만히 있어! 나대지마!
그러면 그 소리만 들으면 우리는 기분 좋아요. 아이구, 뭐 잘 됐다. 안 그래도 교회 오기도 싫은데. 잘 됐다. 나대지마라고, 목사님 거기에다 막 살라고 수 백 번 이야기 하고 막 살면 되겠네. 나대지마라고 하겠는데 문제는 그 상황 자체가 그렇게 우리가 나대면서 내 원하는 것을 만끽할 수 있는 상황을 주께서 허락하지 않아요.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홈쇼핑에 이런 광고 있어요. 오리털 패킹. 캄파가치 오리털. 백프로 오리털. 네오캄퍼스. 십육만원짜리 구만구천원에다 오 개월 무이자. 집사님, 이래 가지고 장사되겠습니까? 패딩 하나에 십육만원인데 구만구천원 한다는 거죠. 네오캄파슨데 거기 딱 보는데 밑금 치면서 나오는 게 있어요. 베트남. 자, 여기 한번 보세요. 베트남 근로자들을 한번 보세요. 이 오리털을 한국 사람들이 소비하는데 있어서 베트남 근로자의 애환과 노고를 그들이 알겠습니까? 모르죠.
우리가 남은 자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어느 정도 우리가 깨어져야 하느냐 하면은요, 우리를 일을 시켜놓고 전혀 우리의 영광과 우리의 가치와 자존심을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챙기지 않고 다 뺏어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진멸하는 것이 문자적으로는 적들을 진멸하는 것이지만 영적 해석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동업자처럼 일하시는 용사되신 하나님이 우리를 진멸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구약에 나왔던 하나님의 원수 되는 민족이기 때문에, 그 아담의 죄가 우리 속에 가득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해주십니다. 일단 고마워요. 하지만 구원 과정 속에서 우리가 나름대로 자랑할 수 있는 것, 우리 교회 교인 많이 모였다. 모든 것을 전부다 밑금 치고 베트남. 이름도 성도 없는 일괄적으로 베트남. 영광은, 이거는 이익은 홈쇼핑에서 다 챙겨먹고 근로자들은 저임금에 시달리는 베트남. 그야말로 이름 없는 소자.
그렇게 취급하면서, 그저 분류되어서 구원받은 거나 감사해. 끽소리하지 말고. 너 같은 인간 내 일에 쓰여 준 건 만해도 고마운 줄 알아라. 이런 식으로 오직 주만 영광 돌립니다. 이거 감당할 수 있으면 성도고 이거 감당 못하면 땡 탈락. 마이너스 백점.
시편 16편 3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여기 보면 성도를 가지고 존귀한 자라고 했어요. 존귀한 자. 우리가 아는 복음적에서는 성도라 하는 것은 죄인이고, 거룩하지 않고, 주님만 쳐다보는 줄 알고 있죠. 그런데 여기서 보니까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에게 있도다 돼있거든요. 요걸 세자로 줄이면 이래 됩니다. 빨래 끝. 빨래 끝입니다. 빨래 끝. 빨래 하얗게 된 자는, 하얗게 된 본인을 자랑하면 안 돼요. 세 자를 자랑하면 안 돼요. 빨래 당한 자기를 자랑하면 안 됩니다. 이상하게 죄는 짓는데 이상하게 죄는 없어. 요 이상함. 그래서 죄를 용서받은 이상은 베트남을 하든 에스키모를 하든 관계없어요. 그저 우리 몸 하나를 통해서 주님만 존귀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족합니다. 그럴 때, 이것이 지금 전쟁 중에 있습니다.
이 전쟁은 남 볼 것 없이 우리가 주님 앞에서 하는 전쟁입니다. 우리의 모든 가치와 자존심을 뺏어가면서 오직 은혜로, 은혜의 보존 법칙. 니 속에 남은 것은 은혜 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은혜의 보존 법칙을 주께서는 꾸준하게 진행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가 하면은, 이게 현대 동시성 물리인데, 동시성 물리란 뭐냐, 사람 보는 관점에 있어서 시간이 차이가 난다는 거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전부가 완전히 완료가 되면서 전부가 미래가 되고 전부가 과거가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만약 죽는다면 우리가 가졌던 모든 것은 과거에 주께서 처리한 과거가 되고 우리가 구원받은 것 자체는 이미 구원받은 채로,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미래의 삶을, 우리가 이 땅에서 서른 살 때, 사십 살 때 살아온 셈이 돼버려요. 이게 누구 관점이냐 하면, 우리의 관점이 아니고, 일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 보존의 법칙을 갖고 있는 주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문자적 해석이 아니고 바로 복음적 해석, 언약적 해석, 영적 해석을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 이 전쟁에 처음에는 성공했습니다. 나중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이고 전부다 불바다 됐습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바벨론에 의해 불바다 됐습니다. 성전은 어디 세워지는가. 바로 법, 불탄 재위에서 바로 성전이 세워지는 거예요. 날마다 우리를 지금도 주께서는 우리를 불태우고 그냥 밑금 치고 베트남 하든지 뭐 이름을 00하든지 상관없어요.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깨끗하게 빨래 끝. 하시는 그 미래의 음성이 지금 여러분에게 들리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멸해야 될 대상이 우리가 싫어하는, 분노 느끼는, 우리가 울분 하는, 세상이 아니라 바로 그런 모습을 지닌 우리 자신인 것을, 하나님의 공격 대상인 것을, 도리어 감사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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