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명기 1강-전쟁과 땅 141019 이근호(신1;1-5)

아빠와 함께 2014. 10. 20. 07:57

전쟁과 땅

2014년 10월 19일 본문 말씀: 신명기 1:1-5

(1:1) 이는 모세가 요단 저편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1:2)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열하룻 길이었더라

(1:3) 제사십년 십일월 그 달 초일일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 다 고하였으니

(1:4) 때는 모세가 헤스본에 거하는 아모리 왕 시혼을 쳐 죽이고 에드레이에서 아스다롯에 거하는 바산 왕 옥을 쳐 죽인 후라

(1:5) 모세가 요단 저편 모압 땅에서 이 율법 설명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일렀으되

신명기란 율법을 다시 되새긴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사람들의 관심사는 율법 준수에 있지 아니하면 자신의 생존의 터전이 얼마나 더욱 공고하게 다져지고 확산되었느냐에 관심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방민족 같으면 대충 어느 장소든 상관없이 터잡고 살면 그만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이 따라붙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이스라엘의 생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가치가 그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 자기 백성들이 위반했을 경우에도 그 고유한 가치가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위주가 아니라 자신이 남기신 말씀 위주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면을 인간들은 알 리가 없습니다. 인간들에게는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끔 말씀에 관심을 갖고 움직일때도 그것이 자기 생존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가져다 주는 일이기를 은근히 고대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순수 말씀 자체에 관심두는 경우는 인간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실패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럴 줄 아시면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이유는 뭘가요? 그것은 말씀 안에, 율법 안에, 인간이 준수해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약속된 땅, 신약적으로 말해서 ‘천국’ 입성이 어떻게 가능했느냐를 보이고 싶어합니다. 그래야지만 천국은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아무리 자신들이 죄를 짓고 실패해도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행복하지 않더라도 욕심 줄이고 조그마한 일상에 만족하지 뭐”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말씀이나 율법이 제시하는 그 세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변명이 통해서 여전히 자신의 자존심과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그런 세계를 원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열하룻 길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가까운 길을 그들은 40년 걸렸습니다. 뭐가 문제일가요? 4절에 보면, “때는 모세가 헤스본에 거하는 아모리 왕 시혼을 쳐 죽이고 에드레이에서 아스다롯에 거하는 바산 왕 옥을 쳐 죽인 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진격하는 요소요소에 그들의 앞길을 가로 막는 타민족들이 있었습니다. 이럴 때, 그들은 하나님께 늘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그들이 알고 있는 세계는 오직 애굽 세계 뿐이었습니다. 즉 삶의 방식이 힘으로 자신의 생존의 기반을 지키는 방식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그들은 광야에 미리 산재해 있는 타 민족의 방식과 차이나지 않았고, 오합지졸 같은 형편에서는 그들의 공격이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 대안은 오직 하나 “애굽으로 도로 돌아가자”입니다. 즉 그들이 알고 있던 나라는 애굽나라 뿐이었고, 아무리 상상의 경계를 넓혀봐야 그것은 애굽의 팽창성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이라면 전혀 허물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동행하는 율법과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을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확인사살에 나갑니다. 단순히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가짐 자체가 전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살 마음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패가 율법과 하나님의 승리로 이어지기 위해서 필수코스라는 것이 신명기에서 말씀하시는 복음입니다. 실패를 즐거워하라는 겁니다.

실패로 인하여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가 일어난 바로 그곳에 비로소 감추어진 천국의 본질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실패를 해도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같이 실패에 가담하므로서 낯설게 느껴진 하나님의 이름이 실제적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광야의 장소는 전쟁하는 곳입니다.

광야 뿐만 아니라 약속의 땅도 전쟁하는 곳입니다. 사전에 광야에서, ‘약속의 땅의 전쟁’의 속성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도대체 누구와 전쟁이며 전쟁의 유발자가 누구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요새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배우고 지식으로 습득하려 하지만 정작 본인이 처한 자리가 영적 공간임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거기에 일곱 대접들이 순차적으로 등장해서 지상을 향해 퍼붓고 있습니다. 강이 피가 되고, 사람들이 종기에 아파하고, 나중에는 산천초목이 모조리 무너집니다. 그만큼 이 세상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이 대자연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조리 영적 상태로 애워싸여져 있습니다.

영적 상태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감을 잡지 못하고 그저 생존에 유, 불리만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전쟁에서 악에 대해서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정황이 구약적으로는 난데없이 광야의 이스라엘에 달려드는 아말렉 민족과의 전쟁에서 비쳐나옵니다.

출애굽기 17:8-9에 보면,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말렉이라는 실제하는 군대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진할 때, 이스라엘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향하여 공격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항하는 모세의 처신을 보세요.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산 꼭대기에 섭니다. 그곳은 아말렉이 공격하는 지점이 아닙니다. 그저 모세와 두 장로가 함께 있는 장소일 뿐입니다. 실제로 모세의 지팡이를 든 팔이 내려가자 이스라엘이 밀립니다. 반면에 지팡이를 든 모세의 팔이 올라가자 이스라엘이 이깁니다.

즉 이 전쟁은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인간도 하나님과의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와 하나님의 이름과의 전쟁이었습니다. 바로 이 전쟁의 본질에 입각해서 비로소 약속의 땅의 경계는 열리게 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사람들이 율법 지켜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실패해야 합니다.

실패한 자들을 데리고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어이 약속의 땅 입성을 성사시키십니다. 율법 안에 그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 들어있던 내용을 만개시키십니다. 그 와중에서 인간들의 설침과 객기와 노력은 철저하게 실패로 마감됩니다. 즉 ‘실패하므로서 구원된다’는 원리가 천국에 입성하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성공을 노리는 자들에게 천국은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무능과 패배를 도리어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4-10-23 22:26 
1강-신 1장 1-5(전쟁과 땅)1410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259페이지입니다.

“이는 모세가 요단 저편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 제 사십 년 십 일 월 그 달 초일 일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 다 고하였으니 때는 모세가 헤스본에 거하는 아모리 왕 시혼을 쳐죽이고 에드레이에서 아스다롯에 거하는 바산 왕 옥을 쳐죽인 후라 모세가 요단 저편 모압 땅에서 이 율법 설명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일렀으되”

오늘 오후에는 신명기를 시작합니다. 신명기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그러한 내용이 신명기 속에 담겨있습니다. 계명을 줄 때는, 뻔히 안다, 그 말씀 평소에 우리가 해왔던 말씀이다, 알던 말씀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말씀과 연계해서 말씀과 우리들의 삶이 같이 갈 때, 우린 늘 반복적으로 그 말씀과 비춰볼 때 말씀을 지키지도 못하고 늘 그 말씀에 실패한다는 겁니다. 말씀 지키는데 실패하는 것에만 지나지 않을 것 같으면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에요. 그것이 아니고. 우리가 말씀 지키는데 실패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말씀의 지적질이 그렇게 듣기 싫은 겁니다.

남편들이 밖에 나가서 일을 실패하는 것, 그것도 기분 나쁜지만 본인이 실패한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그게 집에 가서 아내가 다시 곱씹으면서 “당신이 이렇게 해서 실패했잖아.” 라고 잔소리 할 때 “내 그거 알거든. 고만하래이. 내가 분명히 고만하래켔데이. 나도 그거 알거든.” 하고 짜증이 배가 됩니다. 실패한 것이 짜증나는 것이 아니고 실패한 것을 뻔히 아는 실패를 또다시 확인 사살할 때 참 괴롭죠.

신명기는 바로 하나님이, 인간이 실패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말씀에 입각해서 그게 복이 아니고 저주받은 형태라고 확인 사살할 때 이것은 우리 일체의 다시 회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삭제해버리거든요. 그럴 때 얼마나, 사람은 희망을 잃어버린 사실만큼 더 살 맘이 확 빠져버립니다. “희망 없습니다.” 그 말보다 더 심한 말이 없잖아요. 그래서 신명기를 시작하면서 미리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아니 희망이 없어야 돼요. 희망 없는 게 기분 좋아야 돼요. 나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그러한 부담이 없다는 그것이 즐거워야 됩니다.

흔히 한국 사회를 가부장제 사회라 하거든요. 가부장제 사회라 하는 것은, 남자가, 아버지가 어른이 되어서 통치하는 그러한 구조가, 가정이 그렇게 다스려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가정에서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고 뭐 그렇죠. 가장은 남자고. 대대로 전통적으로 한국 가정은 가부장, 남자가, 아빠가 왕이 되는 그러한 구조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가부장적인 가정일수록 남자가 더욱더 여자를 의지하는 이런 현상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지. 이거 뭐지? 뭐 이런 현상이 다 있습니까? 그렇게 대장질하면서, 혼자 대장질하면 될 텐데. 큰 소리 치면 칠수록, 점점 더 40대에서 50대로, 50대에서 60대로 넘어가면서 “나는 하늘이다!” 누가 뭐라 그랬어요? 하늘같으면 하늘 값을 하고 돈 벌어 오란 말이죠. “나는 돈 못 벌어도 하늘이다!” 아내가 아파 누워있으니까 “여보! 빨리 일어나서 내가 하늘이고 니는 땅임을 증명하라.” 이런 식으로 막 닦달내고 그렇죠.

그러나 이거는, 자기가 “나는 하늘이다. 나는 왕이다. 나는 가장이다.” 하는 이 말 자체가 점점 더 그 소리가 모기소리만큼 기도하는 거예요. “나는 그래도 하늘인데.....,” “나는 그래도 하늘인데. 에이 씨.” “어이 하늘! 좀 따라와!” “알았어요.” 마트에 가서 장보면 장바구니 들고 뒤에 따라 다니죠. 사람이 대단한 체 하지만, 대단한 주인 행세를 하려면 철저하게 그 주인의 말 듣는 노예가 필요해요. 그래서 노예가 오히려 주인보다 더 위에 있다고 헤겔이라는 철학자가 그걸 분석했거든요. 주인이 주인 행세하려면 노예가 필요하니까 차라리 노예가 더 자유롭다는 거예요. 주인이 주인 행세하려면 노예 없으면 이거는 헛방이니까.

율법 없이는 죄가 없다 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산다.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가면 안 살면 돼요. 이야기를 쉽게 가겠습니다. 자, 이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출애굽 다음에 레위기 다음에 민수기, 민수기 다음에 신명기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출애굽 된 상태에요. 된 상태인데 약속에 땅에 못 갔다. 안 가면 되잖아요. 안 가면 되는데 그들이 율법 없이 혼자 있으면 그들이 뭐 이렇게 살기 적당치 않고, 이미 거기에 강한 군대가 선점해 있다면 뭐 전쟁에 질 것 뻔하니까 뭐 대충 살지. 이러면 되는데. 율법이 말하기를 너가 그곳에 못 가면 저주받는다고 하니까 율법이 미운 거예요. 율법이.

아까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자기가 잘못 한 것을 본인이 알고 있는데 그것을 확인 사살하듯이 다시 잘못을 들추어 가지고 “당신이 이래서 잘못했다.” 라고 잔소리 하는 마누라가 더 미운 거예요. 본인도 아는데. 애들이 공부 못하는 것 본인도 알아요. 그런데 무엇이 더 두려우냐 하면, 본인도 아는데 성적 나쁘다고 잔소리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더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뭐 가출하고 하죠. 율법이 없는 곳으로. 잔소리가 들어있지 않는 곳으로.

율법이 없는 곳으로. 만약에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없으면 이스라엘은 이방인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 곁에 모세 언약이 함께 하므로 그들은 약속에 땅에 들어가나 못 들어가나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언약 백성입니다. 꼭 우리들 같아요. 교회 나오기 싫다. 안 나오면 되죠. 예수 믿기 싫다. 안 믿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방인 되는 겁니다. 그런데 믿기 싫어도 관심두지 않더라도 성령께서 늘 우리 일이 꼬이게 만들어서 그리스도와 연결시키게 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명기 이게 어려운 대목이기 때문에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약속에 땅에는 뭐가 성립되지 않느냐 하면은요, 인간 차원의 성공, 실패가 없는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성공, 실패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고 율법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못 들어가도 역시 율법 대단하다! 들어가도 역시 율법이 대단하구나! 다른 말로 하면 못 들어가면 역시 율법이 닦달 내는구나! 들어갈 때 역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고야마네! 항상 약속 위주로 가기 때문에 우리가 약속과 떨어진 단독 위주 같으면 실패, 성공이 있는데, 이래도 말씀이 말씀대로 성공하고 저래도 말씀이 말씀대로 성공한다면 그 약속의 땅에는 성공만 있지 실패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공과 실패라는 자체가 이 약속의 땅에는 없어요. 없고 뭐가 있느냐 하면, 복과 저주만 있을 뿐입니다. 복과 저주만 있을 뿐인데 복과 저주는 개인에게 주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집단에게 주는 거예요. 집단에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살면서 익혀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나 개인구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를 그들은 배워야 합니다. 개인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집단에서 개인이라 하는 것은 오직 한 분만 개인이에요.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 되시는 주님만 개인이지 나머지기는 개인이 아닙니다. 그 분에게 소속된 집단이 되는 겁니다.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어린양의 피,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는 거예요. 죽음의 사자가 출애굽 심판할 때, “니 집에는 어린양의 피 발라라” “니 집에는 돈 이천만원 내놔라” “니 집에는 찬송가 1장부터 4장까지 불러봐라” 이렇게 따로따로 지시해서 구원한 것이 아니고 이집이든 저집이든, 저집이든 이집이든 어린양의 피만 있으면 모든 개성을 묵살하고 다 구원하는 겁니다. 지금 그 원리가 하나님의 율법, 말씀 안에 들어 있어요,

여러분, 기독교 신자입니까? 교회 다니십니까? 구원하는 원리가 뭡니까? 개인의 개성을 묵살한다는 것이 구원의 원리에요. 일체 개인의 재주를 받아주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가 달란트, 달란트 그 놈의 달란트 이야기해가지고 갑자기 개인 간의 경쟁을 시켜버리니, 이것은 바로 자기 힘으로 자기가 구원받는. 아침에 제가 오전에 설교한 자기가 스스로 중보자가 되어서 구원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스스로 내 행함을 매개로 해서 구원하겠다는 이런 사람들요, 하나님 문 앞에 서봐야 전부다 퇴짜당합니다. 아버지가 아시는 분은, 아버지가 받아주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 자기가 중보자 되어서 온 모든 인간들은 아버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퇴짜 맞습니다. 지금 이게 팩트, 사실이에요. 이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어린양 없이 천국 간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옷을 하얗게 씻어서 갑니다. 그 말씀은 곧 뭘 의미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주님이 원하는 그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어린양이 중보자로 거기에 끼어드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다닌다, 이스라엘 백성의 사적인 어떤 솜씨나 개인이나 달란트, 그 달란트 재주 자랑하라고 데리고 다닌 줄 압니까? 그 달란트, 그 재능들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오직 그와 함께 동행 하시는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으로 그들은 약속의 땅에 도착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약속의 땅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과 실패라는 그 의미조차 그거는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들은 광야에 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다. 땅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공간이고 영역이거든요. 그렇지만 그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들을 만나는 것은, 하나의 사건만 만나요. 그래서 제가 정리하면 사건이 어떻게 하나의 공간이 되느냐. 다른 말로 신약적으로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예수 안이라는 공간을 형성이 되느냐. 그 과정을 구약 신명기가 보여줍니다. 결론부터, 해답부터 듣고 싶지요? 제가 드리겠습니다. 자기에게 실패하세요. 자기 신앙에서 인간은 빠지세요. 이게 해답입니다. 인간은 빠져야 돼요. 내 신앙에서 나는 빠져야 됩니다. 나만 빠지면 나는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나만 빠지면, 그러면 교회 안 오고 집구석에 앉아 있으면 구원됩니까? 집구석 앉아 있다는 생각을 빼세요. 나는 집구석에 앉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나는 집구석에 앉아 있기를 작정했다 하면 안 돼요. 나는 교회 나오기로 작정했다 하는 그것, 나는 이제 교회 안 나오기로 작정했다 하는 그것, 두 개 다 실패입니다. 나는 주의 은혜로 교회 나왔다. 나는 주의 은혜로 지금 몇 달 째 집구석에 앉아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진짜 교회 가고 싶은데 다리몽댕이가 말을 안 들어가지고 지금 주의 은혜로 집구석에 앉아있다 이러면 구원받아요. 그 만큼 우리는 개인의 모든 게 묵살당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어떤 사건이 약속의 땅이라는 공간에 이르는데 어떤 식으로 그것이 절차가 될 수 있느냐. 이 사건이 특수한 사건입니다. 그 특수한 사건이 바로 여기 4절, 5절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읽어보면, “때는 모세가 헤스본에 거하는 아모리 왕 시혼을 쳐죽이고” 그 다음 4절 끝에 보면, “아스다롯에 거하는 바산 왕 옥을 쳐죽인 후라” 이래 되어 있지요. 이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은,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사건입니다. 이거 시간 가더라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려야겠어요. 이거 빠지면 설교 자체가 안 되니까.

지금 요 앞에 2절에 보면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죠. 열 하룻길. 이 열 하룻길이 사십 년 걸렸습니다. 뭐가 문제였죠? 열 하룻길을 갔다 이 말이죠. 열 하룻길을 갔으니까, 요새 말하면 하루에 어린 애들 합쳐서 10키로 간다 하고 10키로 곱하기 열 하룻길 하면 110키로, 요새 한 시간 만에 갑니다. 고속도로로. 한 시간 길을 사십 년 걸렸어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죠? 사건은 뭐냐 하면, 쉽게 약속의 땅, 요새 말하면 천국이죠. 천국에 니 식대로, 니가 관여해서 절대로 못 들어간다는 것을 깨우치는 기간이 사십 년 기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천국을 왜 못 들어가나 하면은, 자기가 그동안 몸에 익혔던 삶에 방식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애굽적인 삶이었습니다. 애굽적인 삶으로 몸을 유지하면서 그 몸으로 천국에 들어갈라 하니까 주께서는 그걸 바꿔야 된다 하는 것이고 그들은 못 바꾸겠다고 버티니까 사십 년 걸린 겁니다. 지금 사십 년 걸려도 못 들어가고 있어요. 제가 뉴저지 설교 할 때 두 번째 설교 했거든요. 설교가 뭐냐 하면, “여러분! 기쁜 소식 있고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느 것부터 말씀드릴까요? 좋은 소식부터 말씀드리면, 제가 수요일에 한 거예요. 좋은 소식이 뭐냐 하면, 살아생전에 우리가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좋은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슬픈 소식은 우리 마음을 바꿔야 된다는 거예요. 바꾸지 않고서는 그 나라 있어도 천국 못 갑니다.

그 바꾸기 위해서 율법이 있는 거고 말씀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십 년 걸렸습니다. 고속도로로 한 시간 만에 갈 거리를. 사십 년 걸렸다는 이 말은 결국 그들은 무슨 장벽이 있었단 말인데 그 장벽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모리 왕 시혼, 그 다음에 바산 왕 옥, 이것들이 하나의 미로처럼 장벽이 이루어진 거예요. 그 하나의 예를 들면,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모세하고 백성들이 물이 없다, 양식 없다, 원망하면서 반석 쳐가지고 물 나왔던 사건 이후에 곧바로 뭐냐 하면 아말렉이라는 웬 낯선 민족이 이스라엘 집단을 향하여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그 때, 보세요. 아말렉 군대가 쳐들어온다. IS군대, 또는 북한 괴뢰군들이 쳐들어온다. 오랜만에 괴뢰군 쓰니까 기분이 좋네요. 언제부터 신문에서 괴뢰군 말이 사라지고 인민군이라고 쓰거든요. 저는 씁니다. 괴뢰군.

이 북한 괴뢰군들이 쳐들어왔을 때, 이거는 누가 봐도 북한 괴뢰군들이 서울을 남침하고 평택 쭉쭉 내려가서 공격한 걸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애굽에 살던, 이 세상에 살던 인물이기 때문에 괴뢰군들이 오게 되면 반드시 우리는 공격한다 생각할 거예요. 아말렉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으니까 이거는 누가 봐도 아말렉 군대가 이스라엘을 치는 걸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삑!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말렉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모세가 든 지팡이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어느 이스라엘도 몰랐습니다. 그걸 보여줍니다. 밑에서 어줍잖게 여호수아가 칼질을 하는데 그거는 소용없고, 산 위에서 모세가 점잖게 지팡이를 드니까 아말렉 군대가 지팡이가 내려가면 아말렉 군대가 이기고 지팡이가 올라가면 아말렉 군대가 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아말렉 군대가 누구를 목표로, 누구를 겨냥해서 공격을 한 겁니까? 바로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주의 이름을 겨냥한 주의 이름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 살다보니까 세상을 둘러싼 다른 한 꺼풀의 영적세계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영적 세계가 요한계시록 16장에 나오는데, 그 16장에 나오는 예를 드는데, 이거 16장을 다하면 길기 때문에 제가 후딱 추려서 16장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첫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나더라. 두 번째가 쏟으매 바다가 죽은 피를 내더라. 세 번째 대접을 쏟으니까 강물의 근원이 피가 되더라. 네 번째 대접이 쏟아질 때 사람들이 해를 받아서 태움을 받았더라. 다섯 번째 쏟아지매 아파서 혀를 깨물었더라. 여섯 번째 대접이 쏟아지매 거기에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선지자의 입에 나타나서 사람들이 자기를 경배케 하더라. 일곱 번째 대접이 쏟아지매 온 천지가 다 멸망해서 바벨론 성이 갈라지고 산악이 간 데 없고 우박이 하늘로서 떨어지더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더라.

이건 뭡니까? 이게 지금, 이건 누가 누구를 공격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향하여 공격하죠. 지금 방금 읽었던 요한계시록의 일곱 대접에 대해서 우리 초등학교, 중학교 때 시험에 나옵니까? 수능에 나옵니까? 수리영역에 나와요? 이 이야기가 과학탐구영역에 나와요? 보세요. 우리가 살던 세계가 철저하게 애굽이잖아요? 애굽 주위에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 모르죠?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시고 언약을 주신 겁니다. 세상은 니들이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바깥에 영적 세계가 있고 영적 세계에 의해서 이 세상은, 이 지구는 홀라당 불타버려요. 홀라당 불타버려요. 이 땅의 성공, 실패 의미 없습니다. 수조원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 지금 눈만 깜빡거리고 있어요. 삼성의료원에서. 그 인생 성공한 겁니까? 누구나 그렇게 되잖아요?

약속의 땅요? 근처도 못갑니다.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식으로 생각하면 약속의 땅은 없는 거예요. 이게 바산의 옥과 아말렉 같은 군대가 중간 중간을 가로막아 줘가지고 우리는 맨날 옛날이 좋았다. 씨 옛날이 좋았다. 교회 안 다닐 때가 좋았다. 맨날 돌아가자 돌아가자. 맨날 유턴하는 것밖에 없어요. 맨날 애굽에 집착하는 것밖에 없어요. 그러니 진격이 안 되는 겁니다. 전진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을 통해서 현재 너희들이 악마의, 어떤 죄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계속 그들의 행보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안 되고, 안 되면서 짜증내기를 애굽이 사는 것이 더 좋았다고 함으로써, 봐라 니가 아는 세계의 그 한계가 결국은 나에 대해서 짜증내는 그것이, 원망하는 그것이 전부임을 알려줍니다.

근데, 그렇게 하는 그것이, 짜증내는 것이 그것이 구원에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하나의 작업 속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에 두 가지 규칙이 있는데, 구상적 규칙과 규제적 규칙이라고 이렇게 어려운 말이 있는데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게임을 하는데, 여러분들은 바둑 모르죠? 저는 바둑을 좀 알거든요. 바둑이 어떤 거냐 하면, 바둑은 판에다가 열아홉 줄을 긋고 그 교차점에다가 한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까만 돌을 가진 사람이 먼저 그 교차점에 하나 두고 그 다음에 하얀 돌을 가진 사람이 교차점에 둬가지고 나중에 누가 이기고 승리하느냐 하면 까만 돌은 까만 돌에 둘러 싸여 있는 그 교차점에 숫자하고 하얀 돌은 하얀 돌에 둘러 싸여 있는 그 교차점에 숫자하고 비교해서 많은 쪽이 바둑이 승리하는 쪽이 되는 겁니다. 요거 알았죠? 여러분! 그럼 바둑 18급입니다.

이게 바로 구상적 규칙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형성되느냐 바둑이라고 하는 게. 그러면 그거 알면 바둑 잘 둡니까? 그래서 잘 둔다는 말은 그런 규칙을 응용해가지고 전략을 꾸미고 드디어 생각을 할 때 거기에 새로운 규칙을 천재들은 만들어 내는 겁니다. 여러분, 또 결혼이 뭡니까? 결혼은 두 총각과 처녀가 만나서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결혼이다. 맞지요? 구상적 규칙입니다. 근데 규제적 규칙은 그 안에 실제적인 규칙은 그렇게 살면 그게 결혼입니까? 재롱도 부리고, 밥도 하고, 이쁘다 해주고, 앞치마 두르고 뭐 인사하고 이런, 그저 사이좋게 TV드라마 재미나게 보면서 호호 웃는 것, 그게 가정이잖아요? 취미도 맞고, 마음도 맞고, 성격도 맞고, 애도 같이 놓고, 애도 같이 키우고, 그게 결혼이잖아요? 그러니까 결혼이란 그 규칙은 동일하지만 결혼은 가정마다 사는 게 다 다르죠? 그렇죠?

율법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법칙입니다. 그 법칙인데, 그 법칙을 하나님이 다루시면서 인간의 애굽이라는 그 굴레를 완전히 찢어버리는 거예요. 찢어버리고 도저히 탈출이 안 되는 사람을 탈출케 하는 그 능력이 바로 어디 있느냐. 그 율법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제사법입니다. 그 제사법으로 말미암아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그들이 거룩함을 입어서 이제는 속된 것과 휘어지고 한 그것과 이별을 해서 그야말로 없던 나라, 거룩한 약속의 나라에 드디어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동시에 누가 쫓겨나는가? 더러우면서도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인간들을 거기서 다 추방시켜 내쫓아버리고 그 빈자리에다 그들이 들어감으로써 그것이 영원한, 같이 하신 주의 이름의 승리, 전쟁의 승리로 그렇게 굳어져서 오직 주의 이름만 영화롭게 하고 면류관을 그 앞에 반납하는 그런 식의 새로운 천국이, 그게 바로 천국이거든요.

그 천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었고, 우리 힘으로 내가 속한 세상을, 이 애굽 같은 세상을, 이 한국 땅을, 이 세상 지구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라는 고백이 계속 튀어나와서 그 죄를 용서하시는 어린양으로 넉근하게 천국 들어가도록 하는 그 조치, 그게 바로 하나님에 의한 규제적 규칙을 스스로 이루어 내셔서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실패해야 됩니다. 말씀보시고 실패하세요. 그리고 그 실패하는 것을 행복하고 복이라고 여기고 받아들이시고, “그래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야!” 이렇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고 실패를 느끼시고, 헌금하시고 실패를 느끼시고, 예배드리고 실패를 느끼시고. 그 실패를 느낀다는 그것이 바로 주께서 하시기에 나는 내 몸에서, 내 인생에서, 내 운명에서 내가 손을 뺄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게 신명기의 시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동행하셨다는 의미를 알게 하옵소서. 우리 힘으로 들어갈 나라 같으면 동행하시지도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믿게 하여 주시고 우리를 실패자로 만들면서 주님을 성공자로 만드는 그 양쪽을 우리가 다 간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