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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강-지도자(신1;9-14)이근호 141026

아빠와 함께 2014. 10. 31. 08:52
2014-10-26 15:07:38조회 : 182
지도자 141026 이름 : 이근호

지도자(신명기 1:9-14)

음성 동영상

 

 

조직 편성

2014년 10월 26일 본문 말씀: 신명기 1:9-14

(1:9) 그 때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는 홀로 너희 짐을 질 수 없도다

(1:10)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번성케 하셨으므로 너희가 오늘날 하늘의 별 같이 많거니와

(1:11)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1:12) 그런즉 나 홀로 어찌 능히 너희의 괴로운 것과 너희의 무거운 짐과 너희의 다툼을 담당할 수 있으랴

(1:13)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 자를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두령을 삼으리라 한즉

(1:14) 너희가 대답하여 이르기를 당신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다 하기에

신명기는 축약된 ‘전체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의 마지막 대목은 ‘아스라엘 멸망’에 관한 예언입니다. 즉 ‘필히 멸망’된다는 겁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너희들이 아무리 하나님 믿어도 결국에는 너희는 네 자신만을 믿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는 겁니다.

이로서 신명기뿐만 아니라 인간사 전체가 인류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로 마감됩니다. 문제는 그 원인과 이유에 있습니다. 멸망을 미리 언급했다고 해서 허무주의적으로 사는 것을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신명기 32:15-20을 보겠습니다. “그러한데 여수룬(=이스라엘)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케 한 연고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종류요 무신한 자녀임이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우리보고 경각심을 주기 위함도 아니요 회개를 촉구함도 아닙니다. 필히 반드시 이런 지경에 빠진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멸망이, 이스라엘 나라만의 멸망으로 끝날 사항이 아니라 전체 인류의 멸망으로 귀결됩니다. 곧 인류는 멸망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나타난 존재들입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신명기 말씀을 대하면서 설마 자신들만큼은 면제되리라고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이 사실을 오로지 이스라엘만 알려주시면서 관리하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예외는 없었습니다. 이와같은 이스라엘의 착오와 착각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되풀이 됩니다. 세상 멸망 소식이 교회를 통해서 울려퍼지기에 그런 역할을 담당하는 교회만큼은 안 멸망되리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입니다. 교회도 망합니다. 교회는 망하라고 세워진 단체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다 망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망할 교회에 구태여 다닐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요? 차라리 집에 혼자 성경보고 예수 믿으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이나 교회의 위상이 뭔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나 이스라엘은 그 등장과 소멸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실제 정체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이나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들의 한계성을 드러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은 ‘죽음에서 기어 나온 자들’입니다. 죽음의 홍해 바다를 건너온 자들입니다. 홍해는 결코 얕은 물이 아닙니다. 뒤따라온 애굽 군사들은 모조리 그 깊은 바다에 빠져 다 죽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살아남은 자체적은 가치 때문이 아닙니다. 개입하시는 그 하나님의 자체 속성과 연관 있습니다.

즉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깊숙이 관여하신 하나님이 더 중요하십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일단 내가 살아남았다’에 관심 두고 삽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날마다 홍해 안’ 되게 하시는 방침을 설립하십니다. ‘홍해 안’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견해와 의도나 계획은 모조리 무의미하게 됩니다.

병에 들렸다가 다시 낫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아예 병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당연히 병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병들게 하시고 나중에 낫는 식으로 일을 벌리실까요? 그것은 처음 사랑의 출처에서 사람들은 쉽게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빨리 자의식으로 도로 중무장해서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헤쳐나가보려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원천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자아는 되기 싫은 겁니다. 바로 이 숨겨진 인간들의 본질성을 겨냥해서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파고들어오십니다.

그래서 기어이 하나님을 버리고 본색을 드러내는 지경까지 이끌고 나가십니다. 이렇게 되면 일시적 은혜로서 온전한 구원은 성사될 수 없음이 명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지도자급 인사들을 뽑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만의 독특성 특성을 후대까지 이어가도록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과연 이스라엘이 이 정신 잇기에 성공할까요? 실패합니다. 그것은 바로 ‘지도자의 자리’와 ‘본인의 지도자됨’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란 곧 하나님의 마음에 합치된 자라야지만 그 자리를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란 실패에 대한 희생이 투입으로, 더 이상 그 희생정신을 상실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들은 이점에 실패합니다. 그들은 생명이 나오는 그 바탕을 그들의 존재로 틀어막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이 담기게 되면 기존들은 자기 자리들이 삽으로 파듯이 홀라당 날려버려야 합니다. 즉 없는 것이 있음을 살린다는 원리가 계속 그 사람으로 하여금 흘러나와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지속적인 하나님의 창조가 터져나오는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5:7에 보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창조를 반복하는 취지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이 우리 생각대로 되어지는 필연성이 아니라 우연적이게 하십니다.

따라서 멸망되는 이스라엘이나 교회라 할지라도 같이 참여해서 여기서, 왜 멸망되어야 하는 것을 몸소 체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교회임을 실감해야 합니다. 지도자의 자리란 이처럼 늘 새로운 후보들을 대조해보지만 역시 최종적인 지도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1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의 필연성 주장이 곧 문제점이 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강-신 1장 9-14(지도자)1410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장 9-14절입니다. 구약성경 259페이지입니다.

“그 때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는 홀로 너희 짐을 질 수 없도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번성케 하셨으므로 너희가 오늘날 하늘의 별같이 많거니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런즉 나 홀로 어찌 능히 너희의 괴로운 것과 너희의 무거운 짐과 너희의 다툼을 담당할 수 있으랴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 자를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두령을 삼으리라 한즉 너희가 대답하여 이르기를 당신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다 하기에”

이거 우리가 신명기를 새로 시작했는데요. 신명기를 작은 성경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시작과 신명기 끝이, 성경 전체 내용이 미리 앞당겨서 함축해서 다 들어있습니다. 신명기의 시작은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던 이야기고 신명기의 마지막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 망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안 망한다고요? 교회가 안 망해요? 교회는 망하라고 있는 게 교회입니다. 교회 와서 망해봐야 아, 교회 다닌 것이 다 헛 거구나! 비로소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교회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과 성령의 활동은, 왜 이렇게 우리가 열심히 해도 주께서는 우리 교회를 지켜주지 않는가? 그걸 생생하게 체험하고 체득하는 생활을 보내라고 우리보고 교회가게 하신 겁니다. 그러면 교회 없이는 과연 천국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교회 없이는 천국 못 갑니다. 단, 그 교회는 망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말을 두 개를 이어봅시다. 망하는 교회에서 망하는 자만이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 안 망하겠다고 빠져버리면 안 돼요. 교회 가서 망하게 되면 어떤 이득이 있느냐 하면, 왜 인간은 애초부터 죽어야 하는 이유가 자기가 다니던 충성한 교회가 같이 망함으로써 그걸 온 몸으로 경험하고 체득하고 경험하는 기회를 갖는 겁니다.

신명기 말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명기라는 것은 전체 성경을 요약한 건데, 그 끝은 비극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믿는다고? 개코라 해라. 너희는 아무리 해도 나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건 이미 십계명에 나와 있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할 때에 인간에게 마치 신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 같지만 이미 인간의 신을 고정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신이에요. 하나님 믿든, 뭐 예수를 믿든, 그 믿는다는 본인을 자기가 스스로 신봉하기 때문에 자기 외에 믿지를 않습니다. 인간은 본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것 외에는. 자기 자신이 노동의 결과물이니까. 자기 인생 외에는 단지 믿을 만한 것이 없어요. 그리고 또 그럴 수밖에 없고. 또 거기서 탈피한다는 것도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고.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망하게 되면, 아, 망하게 되는 이유가 우리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이 분명하구나! 그걸 확인 차원에서 이스라엘은 망하게 되는 겁니다. 한 번 나타났다가 망해버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뽑지요. 열 둘 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말합니다. 전에 망했던 이스라엘 대체물로써 새로운 이스라엘이 예수님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스라엘은 망할까요? 안 망할까요? 그 이스라엘 역시 망합니다. 망한다는데 왜 제가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교회인데 그 교회 망합니다.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다 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교회나 망하라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육체는 풀과 같기 때문에. 풀과 같은 것은 자기 역할만 하고 엑스트라로 사라져야 되고 그 인간을 풀로서 규정하는 그 말씀만은 영원토록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죠.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하고 다른 점이 없지 않느냐. 어떤 나라이든 망한다면, 이스라엘이 망하는 거나 다른 나라가 망하는 거나 망한다는 자체는 그 결과를 봐서는 무효로 돌아간다는 것인데. 어차피 무효인데 시작이 얼마나 화려하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망하면 끝나지. 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이렇습니다. 밀알이 어느 밀알이든 다 썩습니다. 하지만 밀알이 썩는 과정 자체가 썩음 속에서 하나의 생명이 나오는 하나의 메카니즘이 되거든요. 하나의 프로세스, 과정이 된다고요. 그게 경로, 패스, 하나의 경과가 돼요. 하나의 길이 되는 거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불교에서는 하나의 인간의 죽음을 이렇게 설명해요. 뭐냐 하면, 인간의 인생이라는 것이 불꽃이라면 죽음이라는 하는 것은 인간의 불쏘시개가 소진되어 자기 수명이 다 되었을 때 불도 꺼진다. 따라서 육체라는 불이 꺼지면 정신이라는 불도 함께 꺼지니까 죽고 난 뒤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기뻐하라. 이게 불교입니다. 인간의 육체가 꺼지면 정신도 꺼지니까. 뭐 있고 난 뒤에는 뭐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 2절에 보면, 우리가 참 그랬으면 좋겠어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 한 것처럼 살아서 부귀영화, 천국 가는 것 보다 더 신나는 것은 아예 행복이고 불행이고 느끼는 주체마저 사라지면 그게 최고로 제일 속 시원한 이야기인데 그게 우리 마음대로 안 되네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피조물을 만들 때 절대로 그 피조물을 죽게 하지 않습니다. 계속 사용하시기 때문에. 출애굽기 3장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떨기나무의 나뭇가지가 이게 유기체라서 탄소 결합체거든요. 그러면 탄소의 결합에 의해서 다 타버리면, 재가 되면 불도 사라져야 되는데 이게 이상해요. 떨기나무는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 불꽃도 그대로 살아있고. 뭔가 떨기나무 그 이상의 넘쳐남이, 그걸 잉여라고 하는데 뭔가 과분함이, 여분의 것이, 초과분이 떨기나무를 지배하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인간은 홀로 있을 때는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미처 생각 못한, 나에게도 이런 일이! 나에게도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예상 못한 일이 벌어질 때, 하나님께 접신된 거죠.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건드린 겁니다. 너는 니 혼자 있을 때 너 자아만을 목적으로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내가 찾아오기 전에 이야기이고 내가 찾아와 버리면 니가 생각한 그 이상의 다른 이유와 목적을 위해서 너는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런 자들의 집합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멸망할 때 주의 뜻도 멸망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떨기나무의 원칙에 의하면 떨기나무는 무너져도 거기 떨기나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은 다른 식으로 또 다시 새로운 떨기나무를 창조하는 밑거름으로써 기존의 떨기나무를 사용한 것뿐이죠. 그래서 저는 이 떨기나무 이야기를 언급한 이유는, 신명기를 처음 시작하면서 지금 1장을 보고 있는데, 하면서 이스라엘이 도대체 뭐냐? 이스라엘의 특수성. 이스라엘의 기이성. 이스라엘의 기이함. 우연한 사건과의 결합된 그 이스라엘의 정체성. 이런 것들이 다른 나라와 차이점이 뭐냐 하는 겁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제가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아시는 바입니다. 그들은 죽음에서 기어 나온 사람들이에요.

홍해라는 죽음, 사람이 들어가면 죽는데서 기어 나온 사람들이에요.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홍해 바다가 아마 깊이가 얕아서, 찰싹찰싹 흐르는 개울가라서 살아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뒤따라오는 애굽 군사는 다 빠져죽었어요. 홍해 바다의 물 깊이가 그 당시 우리는 안 가 봐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 들어가면 빠져죽는 그러한 홍해 바다에요. 그냥 갈대숲이 아닙니다. 갈대 개울이 아니고 그냥 빠져죽게 되어 있어요. 뒤따라오는 애굽 군사는 다 빠져죽었어요. 같은 60개의 세포로 되어 있는, 같은 동물 세포를 가지고 있는 인간인데 한쪽은 홍해 바다에서 통과했고 한쪽은 죽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다른 추가적인 요소, 여분의 요소가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죽음에서 기어 나온다는 말은 살았다는 것을 좋아하라는 말이 아니고 여전히 죽음에서 초과된 그 어떤 것이 동행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되죠. 여러분들은 죽은데서 살아 난 것이 좋습니까? 안 죽는 것이 좋습니까? 안 죽는 게 더 좋지요.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병 안 드는 게 좋습니까? 병들었다 살아 난 것이 좋습니까? 애초부터 병 안 드는 게 좋아요. 아예 안 아픈 게 나아요. 아프고 나으면 나중에 식겁합니다. 부모가 애들한테 놀린다고, 부부사이에 놀린다고 깜짝 놀라게 해놓고 농담이었어! 이러면 줘 패고 싶어요. 같은 부부라도. “두 번 다시 그런 장난하지마! 알았어!” 이런 식으로 나오죠.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그거 기분 나쁜 겁니다.

이스라엘은 간담 정도가 아니에요. 완전히 자포자기 했습니다. 자포자기함으로써 더 이상 자의식이라는 것이 주님 앞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했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이거예요. 죽음에서 기어 나온 그 이스라엘, 그들의 지도자를 뽑으라는 그 말이거든요. 도대체 죽음에서 기어 나온 그런 집단을, 거기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데 어느 정도 신앙이 되어야 그 지도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지도자라는 것은 뭐 물어 볼 때, 물어 보고 싶은 대상이 지도자잖아요.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물어 보는 대상이라고요. 그러면 물어 보는 자들이 이미 홍해 바다를 건너서 식겁해가지고 뭔가 나는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여분의 것이 따라 오는구나! 느껴서 느끼는 감이라면 기존의 일반 백성이 그 정도라면 그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그 사람들을 지도하는 사람의 신앙도는 이거는.....,그 멘탈이 어느 정도로 대단한 멘탈을 갖춰야 돼요? 엄청나잖아요. 실제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지도자 때문에 나라 망합니다.

신명기 마지막 대목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신명기 마지막 대목이 너희들이 나를 믿어도 결국은 나를 믿지 못할 것이고 너희들이 믿는 것은 너희들이 좋아하는 마귀만 믿을 것이다. 끝. 이게 신명기가 끝나거든요. 그래서 너희들 나라가 이스라엘이냐? 개코다. 이스라엘 아니다. 너희들은 이방나라와 동일하다.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멸망시키고 해체해버리는 거예요. 처음에 신명기 할 때는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얼씨구나 하고 좋지요. 하지만 그들이 뽑았던 지도자 하나하나가 절대로 지도자감이 되지를 못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지도자를 어디서 뽑습니까? 똑같은 인간들에서 뽑아요. 목사가 어디서 나온 줄 아세요? 같은 평신도에서 나와요. 목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평신도에서 나온다고요. 평신도에서 나왔기 때문에 일반 교인들이 원하는 대로 그냥 받쳐주는 겁니다. 고객이 왕이거든요. 손님이 이거 해달라고 하면 해줘야지. 교회는 구색 맞추는 거거든요. 구색 맞추는 거요. 보통 구색 맞추는 것이 열 가지 쯤 되는데, 가정이 우환이 났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뭐 이상하게 시름시름 앓습니까? 이사 갈 때 이사는 며 칠 날 해야 되고 결혼은 언제 쯤 하면 좋습니까? 뭐 이런 거. 성적이 오를 때는 어떤 거해야 하고. 땅 사놨는데 돈 언제 오르고. 그런 소비자들 구색에 맞춰서 기도 빡 세게 하시면 되고 뭐 어떻게 하면 되고. 그런 처방전을 내리는 그런 역할을 복이라는 이름으로 해댄다 이 말이죠.

그것은 죽음에서 기어 나온 것이 아니에요. 죽음에서 기어 나온 소리가 아닙니다. 정말 죽음에서 기어 나왔더라면 “죽어도 삽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 해야지. “죽으면 안 됩니다. 아프면 안 됩니다. 망하면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그건 지도자감이 못 되죠. 하지만 지도자라 하는 것은, 가게가 손님 없으면 문 닫아야 되듯이, 교인 없으면 목사도 먹고 살 길이 막막하잖아요. 결국 그들의 비위를 맞춰줍니다. 성경에서는 그럴 줄 알고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단단히 못을 박아 놨어요.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성경을 말하는 것은 아예 예상도 하지 마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렇다면 여기서 오늘 주제는 분명합니다. 지도자가 누구냐? 어떤 사람이 지도자 되어야 하는가? 제가 하는 말은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습니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준비한 지도자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를 제가 묻는 거예요. 거기에 합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없으니까 망했잖아요. 이게 주께서 어떤 인간도 이래서 지도자답다고 자리는 마련했지만 그 자리에 끼어든 모든 자들은 다 실패, 실패로 끝나줘야 돼요. 어떤 목회자, 어떤 설교자도, 어떤 목사도 교회의 지도자가 될 자격도 없고 그런 능력도 수완도 없습니다. 없어요. 그러니까 목사나 그런 사람들을 쳐다봐서는 안 돼요. 그 쳐다 본 사람이 나빠요. 주께서는 어떤 자리를 만들어 주고 그 자리와 맞춰보는 거예요.

신데렐라 작전인데요. 신데렐라는 이미 왕자가 원하는 그 여인의 구두가 이미 한 켤레 있어요. 그걸 온 동네에 다니면서 그 구두에 맞는 신발 찾기에 나섭니다. 신데렐라 언니는 맞지도 않는 구두에 억지로 집어넣어봐야 발만 아프죠. 그러니까 발을 빼야죠. 안 맞으면 주인이 아니니까. 빼는 거예요. 빼는 데, 아주 허름한 아가씨가 딱 맞으니까 그때부터 진짜 신데렐라~♪신데렐라~♪해가지고 공주가 됐잖아요. 하나님께서 어떤 지도자라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은 여기에 부합된 인간은, 인간이라고 치고는 아무도 없음을 증명하고 확인해주는 것이 바로 교회고 그래서 교회는 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어떤 지도자도, 목회자도 거기에 일치되지가 않습니다. 목사를 믿는 그 인간들이 나빠요.

구약 성경은 바로 어떤 지도자도 부합되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맞추는 작업, 신발 맞습니까? 하는 그 맞춤의 작업에 의해서 항상 그 지도자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비어 있는 자리. 그래서 성경의 해석의 원리는 뭐냐 하면,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그런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 자리는 비어 있는 자리입니다. 그 비어 있는 자리를 제가 예를 한 번 들어 보겠습니다. 사사기 14장 7절에서 9절에 보면, 삼손 이야기입니다.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며 그를 기뻐하였더라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가더니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서 벌떼와 꿀이 있는지라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행하며 먹고 그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취하였다고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래 되어 있어요. 힘 센 삼손이 사자를 보고 그 사자를 때려 죽였는데 죽고 난 뒤에 보니까 거기에 꿀이 있었더란 말이죠. 그 꿀을 취해서 부모에게 드렸는데 부모에게는 그 꿀이 어디서 나왔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더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14절에 보니까 삼손이 블레셋인을 만났는데 수수께끼를 냅니다. “먹는 자에게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 단 것이 나왔느니라” 풀어라. 3일의 말미를 주겠다. 여러분 한 번 풀어보세요. 제가 뉴저지에서 즉석에서 숙제를 낸 것이 있어요. 나실인이 세 가지 요소가 있었는데 포도와 죽음과 머리카락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연관된 문장을 만들어 보세요. 10초 드리겠습니다. 10초 줬는데 아무도 못 만들었어요. 어떻게 머리카락과 포도와 그리고 친척들의 죽음, 시체와 어떻게 세 단어가 연관될 수가 있겠습니까? 수수께끼죠. 그게 꼭 비슷해요. 삼손이 우리에게 숙제를 낸 겁니다. 먹는 자에게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 단 것이 나왔다. 이게 무슨 말인지를 풀어야 하는데, 3일 줄 테니까 못 풀면 너희들 다 죽었어. 그리고 그 여자는 나에게 내달라 하고, 이런 식으로 여자 차지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 겁니다.

여기에 대한 푸는 해답은 벌써 제가 제시했습니다. 뭐냐 하면, 이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나 자신을 없애버려야 돼요. 지워버려야 돼요. 이 수수께끼를 줄 때 백이면 다 느낍니다. “목사님! 이 수수께끼 풀면 나 구원받는 거 맞습니까? 신자 맞습니까?” 라고 나올 게 분명하단 말입니다. 출발 자체가 이미 잘못된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했다, 교회 망했다, 나도 당연히 망했다, 이렇게 알아야 되는데 교회는 망하고 이스라엘은 망해도 나는 따로 빼놓고 나만은 안 망한 자 되고 싶어요, 하는 그런 심정에서 이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고 성경을 해석하려고 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해석의 실패를 하고 있는 겁니다.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제가 뉴저지 할 때 수금포 이야기를 한 겁니다. 알아들을 사람은 딱 한 사람 있었어요. “목사님! 삽을 말하지요?” “맞습니다. 삽입니다.” 경상도 말로 수금포. 삽을 가지고, 수금포를 가지고 이 수수께끼 말씀을 가지고 나를 도려내야 돼요.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 내가 죽어서 좋은 데 가고자 하는 이 구원의 자체가 욕심이라는 사실. 여기서 사는 것은 힘들지만 나중에는 편하게 살겠다는 나 자의의 부귀영화를 노리는 자체가, 그걸 삽으로 퍼내버려야 돼요. 우린 그럴 자격과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망했다 할 때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도 같이 속해서 같이 망한 거예요.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왔는데 그 죽는 이유에 대해서 아무도 아는 사람 없습니다. 뭐, 살다보면 늙어 죽겠지. 이래 끝나는 거예요. 아니에요. 죽음 자체도 하나님께 쓸모 있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창조했어요. 하나님께서 있는 것만 창조한 것이 아니고 없는 것도 창조했어요. 그게 이사야 45장 8절에 보면 나와요. 하나님은 나만 창조한 것이 아니고 주변에 있는 시추에이션, 상황들도 같이 창조했습니다.

우리는 상황은 놔두고 나만 돋보이는, 나만 영웅이 되는, 나만 잘난 존재가 되는, 그걸 목표로 해서 신에게 기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신은 가짜 신이죠. 하나님은 나를 망하게 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데, 우리는 나만 살려주는 그런 멋들어진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으니까 그것을 말씀으로 퍼내버려야 하는 거예요. 퍼낼 때 물이 나오죠. 생수가 나오는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나 잘되기 위한 것 때문에 그 물을 우리 엉덩이로 틀어막고 있었던 겁니다. 주께서 일해야 될 그 현장을 내가 엉덩이로 그걸 틀어막고 나만 잘되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왔던 겁니다. 여러분! 나만 잘되면 돼요? 그러면 요새 이야기하는 것처럼 소통해서 더불어 잘되면 됩니까? 더불어 잘되는 것, 소통하는 것, 다 삽으로 퍼내야 돼요.

삼손의 뜻은 비어있는 것에서 낯선 것이 나온다. 이것이 해답입니다. 비어있는 것에서 낯선 것이 나온다.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가 만나고 우리가 접촉되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들은 이것은 필연이 아니고 우연한, 우연의 연속이라는 겁니다. 우연한 일이에요. 따라서 우연한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나의 실력과 능력으로 그 우연한 것을 내 소유화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연에 우리가 소유당해야 되는 거죠. 여러분 빨래가 펄럭인 겁니까? 바람이 지나간 거예요? 빨래는 그냥 있어도 바람 지나가면 펄럭이잖아요?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빨래를 펄럭인 겁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은 소유대상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가 자꾸 빨래만 붙들려고 하는데 빨래는 또 다른 바람이 불면 펄럭일 수밖에 없어요. 세상은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럼 내 맘대로 안 된다면 누구 마음대로 되느냐. 그것은 바로 죽음에서 기어 나오게 하신 그분 마음대로 되는 겁니다. 어떻게? 죽음에서 기어 나왔기 때문에 항상 우리로 하여금 그 죽음의 첫 자리에, 죽음에서 나오는 그 첫 자리를, 이스라엘이 이동하면서 항상 죽음에서 나왔더라도, 홍해에서 나왔더라도 그 죽음의 현장을 없애지 않고 그 현장을 계속해서 보존하면서, 보존하는 경우에만 거기서 새 생명이 나오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겁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보니까 신석기 유적이 발견됐다. 또 충청남도에 공룡의 유적이 발견되고. 중국에서인가, 몽골에서인가 고고학자들이 티라노사우르스인가 뭐 옛날 공룡흔적을 발견했다고 하는 겁니다. 보세요. 이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 아니죠? 이미 죽은 자들이 흔적을 남긴 세상이죠.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인간은 내가 태어나고 난 뒤에 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내가 생각한 그 세상은 전부라 보지 않고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다는 세상 그 바닥 위에서, 그 그라운드 위에서 우리로 하여금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 자신이 누구냐 하는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전부다 통합해서 주께서 말씀으로 알려주는 겁니다. 그게 뭐냐, 없는데서 우리를 있게 만들었어요. 없는데서 있게 만들었다는 말의 반복이 뭐냐 하면, 죄가 있더라도 용서해주겠다는 말과 동일한 말이 되는 겁니다.

“내가 없는데서 있으니까 있는 걸 잘해주세요.” 라고 하지 않고 없는데서 있게 했는데, 지금 있게 한 너가 다시 도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안에 죄가 끼어들었고 따라서 너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죄가 이 땅에 있음을 알고 그 죄가 용서되는 경우에만 준비된 영생이 너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 짧은 인생을 하나의 도구로써 활용한 겁니다. 활용하다 보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그것밖에 모르니까 주께서 주어진 모든 사태는 이건 필연이 아니고 우연적인 사태죠. 마치 삼손이 우연히 사자를 만난 것처럼. 그리고 모세가 우연히 떨기나무를 만난 것처럼. 이제 이 시대는 뭘 만나느냐. 이 시대는 공룡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시대는 떨기나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시대는 꿀 먹은 그런 사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시대는 모든 것이 완결지어야 되니까, 모든 것이 마무리 지어야 되니까. 그 마무리, 우리의 존재 의미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그 당시 지도자로 세운 겁니다. 삼손을 지도자로 세운 이유가 삼손이 여자 밝혀서 지도자가 된 게 아니고. 삼손이 갖고 있던, 삼손은 본래 여자밝힘증이에요. 제가 낮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하나님이여 다시는 이런 나쁜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은 다시는 하지 말라고 했죠. 인간은 “다시는”이라는 말은 그냥 해본 소리에요. 인간은 또 다시 그런 짓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바람피운 남자가 아내보고 뭐라고 합니까? 다시는 바람을 안 피운다고 하잖아요. 노는 취미가 그건데 다시는 안 하겠어요? 또 하지. 인간은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이건 성립이 안 됩니다.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담배 안 피우겠습니다. 다시는 내가 딴 거 안 믿고 하나만 믿겠습니다.” 그거 믿지 마세요. 인간은 “다시는”이란 말 자체가 해당이 안 되는 사항입니다. 그냥 살다 죽으세요. 그렇게 자기 미화시키지 말고 그냥 조용히 살다 조용히 가시면 되는 겁니다.

단, 자신의 밑바닥을 보게 하십니다. 그 밑바닥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데 그 초점은 바로 우리가 평생 살아온 죄를 용서해줌으로써, 죄를 없앰으로써 영생에 이르게 하는 그러한 원칙이, 바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그 사건을 통해서, 그걸 미리 우리 그라운드로, 미리 바탕으로 깔아놔 주시는 겁니다. 이 땅에서. 병 나았다고 좋아들 하지 마세요. 병 나아봤자 또 늙어죽습니다. 병 낫는 과정, 또는 병이 안 낫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하는 것은, 정작 만나야 될 것은 해답을 만나야 돼요. 십자가에 사람이 죽었다가도 다시 영생 얻을 수 있다는 그 해답을 만나는 계기로서 병 낫기도 하고 또 병 안 낫기도 하고. 그리고 이 땅에 살기도 하고 때로는 죽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사건을 비켜지나 갈 수 있기도 하고.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 것들이 다 어디서 나왔는가. 없는데서 있게도 하고 죽은데서 살리기도 하는 주님의 한결같은 원칙. 죄 용서 받으면 영생 얻는다는 하나님의 본래 창조의 뜻을 우리가 그걸 통해서 알아내면 되는 겁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지도자가 되는 겁니다. 그 지도자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항상 그 첫 자리, 죽었다가 죽음에서 기어 나온 사람이다.

그 은혜가 뭐냐, 내 공로, 내 열심, 내 노동력이 아니고 주님의 용서였다는 것을 계속 깔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과연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죠. 왜, 자꾸 그런 지도자가 없습니까? 그러면 오늘날 교회 목사 누구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교회 망하라고 없는 거고 이스라엘 망하라고 없는 거예요. 그게 왜 없어야 되는가?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지도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보지마시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 바라보면서 신앙생활 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면서 이것저것 챙긴다고 코앞에 있는 것밖에 몰랐습니다. 죽기 전이기에 죽음이후도 몰라도 되는 사항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우연과 우연의 연속 속에서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삼아 주시고 우리가 왜 사는지, 왜 죽는지 돌아보는 그러한 계기로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서 모든 것이 나 중심으로 살아왔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