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오용익 목사님-아들에게 입맞춤(시편2;1-4)140928

아빠와 함께 2014. 10. 8. 07:47

20140928 우리교회 오후설교 시2편 1절-4절(아들에게 입맞춤)-오 용익 목사님

시편 2편 1절부터 4절까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멘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하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하고 너무나 다릅니다. 그렇게 다르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자기 식대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떤 타협점을 이렇게 제시해서 거기까지 오면, 하나님이 조정과 타협을 통해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그런 것들을 들어주고 한다는 그런 식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에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이런 식으로 쭉 나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한테 열방들이, 민족들이 분노한다는 거예요. 첫 번째는 하나님께 분노한다, 두 번째는 허사를 꾀한다, 세 번째는 하나님과 아들 사이를 끊으려고 한다, 고 내용이거든요. 그리고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비웃는다고 하고 하나님은 비웃으시리로다. 또 보면 철창으로 부수신다고 하고. 이런 내용이 쭉 나오면 사람들은 이걸 보면서 얼른 눈길이 어디로 돌아가냐면, 12절에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그러니까 금방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얼른 눈길이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로 돌아가면서, 하나님은 바로 그 아들에게 입맞추면 부수시지도 않고 비웃지도 않고 하나님이 구원해주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빈틈없고,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도록 그렇게 돼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만약에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입맞추라고 하시는구나 라고 그렇게 한다면, 그럼 그것이 진짜라면, 진정한 마음으로 그렇게 한다면, 무엇을 인정해야 되냐면, 2장 1절부터 4절까지 그대로 백퍼센트 다 동의해야 되는 겁니다. 그냥 휙 지나가지 말고. “예, 예 알았어요. 예수님한테 입맞추겠습니다.” 하고 휙 가지 말고.

다 동의해야 해요. 여기다 자기를 집어넣어서, 자기를 빼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허사를 경영한다고. 하나님한테 늘 화낸다고. 그냥 가끔씩 화내는 것이 아니라 평생 화만 냈다고. 한 번도 화를 안 낸 적이 없다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부 허사만 경영했다고. 가끔씩 헛된 일을 한 게 아니라 아예 전부 다 완전히 백퍼센트 헛된 일만 경영했다고. 그리고 하나님과 아들 사이를 끊으려고, 훼파하고, 그런 짓을 시도했던 이것을 온통 다 수용해야 되는 겁니다.

그럼 그 다음에는 무얼 또 다 수용해야 하냐면은, 하나님이 비웃으신다는 것, 그걸 또 수용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다 부수신다는 것, 그것 수용해야 되죠. 자, 그럼 어떻게 돼야 합니까? 예수님한테 입맞추러 가기 전에 실컷 부정당하고, 예수님한테 입맞추러 가기도 전에 아주 실컷 부서지는 사태가 마땅히 일어나야 된다는 것을, 그걸 수용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성경을 제대로 읽는 거예요. 여러분, 누가 수용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의 하나님은 인기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인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인기가 없답니다. “쳇!” 한다면서요. 복음 이야기 하면 “쳇!” 한다면서요. 비웃음이죠.

사람이 사는 재미가 뭡니까? 여기 나오는 하나님하고 정반대로 사는 그것이 세상사는 재미 아니었던가요? 하나님이 비웃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반대가 뭐죠? 인정받는 거잖아요. 그게 세상사는 재미 아니었던가요? 교회를 왜 나오려고 하는 거죠?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나오는 것 아니었습니까? “제가 교회에 나왔습니다. 하나님! 저 이쁘죠?” 그러려고 교회 나온 것 아니었습니까? 교회를 왜 나와요? 하나님이 부수신대요. 안 부서지려고 나온 것 아니에요? 근데 하나님은 부수신대요.

여러분, 목사가 교회 와서 하는 모든 활동, 심지어 교회 나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걸 다 부정한다면 누가 교회 나오려고 하겠습니까? 헌금 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비웃습니다. 쳇! 하십니다. 앞에 두고 뭐는 못해도 속으로 무슨 생각이 들까요? 아마 죽이고 싶을 거예요. 조용히 교회를 떠나겠죠.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왜 그렇게 몰아붙이냐 하는 겁니다. 뭣도 다 비웃어버리고, 그렇게 하면 사람은 살 수가 없어요. 뭐 했다하면 비웃어버리고. 뭐 했다하면 다 때려 부수고. 어떤 선생님은 애들 숙제해오면 다 찢어요. “이게 숙제야?” 그 다음날 더 잘해왔는데 또 찢어버리고. 비웃고 던지고. 누가 학교에 가려고 하겠습니까?

당연히 이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사람을 몰아붙이는 거예요? 사람을 왜 이렇게 피곤하게 하는 거예요? 같이 좀 잘 지내면 안 되겠어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한 발씩 양보하면 안 되겠어요? 아주 쪼끔씩 한 발만. 딱 한 발만. 나도 한 발 갈 테니까 하나님도 한 발만...., 근데 성경을 고칠 수가 있나요? 지울까요? 성경은 요지부동입니다. 요지부동이에요. 꼼짝 못하고, 하나님이 뜻이 요지부동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한 발도 물러 설 마음이 없습니다.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요, 하나님이 심한 게 아니라요, 그만큼 하나님이 몰고 오시는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무지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식한 거예요. 무식하면서 아는 척을 하는 거죠. 무식하면서 까부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현실을 몰고 오시기에, 참된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어떤 현실을 몰고 오시기에 부서져야 한다고 하고, 비웃는다 하고, 허사를 경영한다고 하고, 이런, 사람으로부터 아주 무식하고 이해력 없다고 하는 그런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하실까요? 그것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데요.

마태복음 5장 한 번 보겠습니다. 소위 팔복이라고 하는 본문이죠. 예수님이 말씀 하십니다. 3절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그럼 예수님은 그냥 혼자 덜렁 오시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천국을 대동하고 오신 분이었다는 겁니다. 천국을 대동하고 오셨다는 것은 지옥도 대동하고 오셨다는 겁니다. 이게 참된 현실입니다. 이게 진짜 현실이에요. 그 현실 앞에서 사람이 뭐 인정받느니, 못 받느니.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니, 못 하느니. 그럼 사람을 인정해주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참된 현실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내가 뭘 하나님한테 이렇게 했더니 하나님이 뭘 해주신다는 그 하나님은, 여러분, 천국과 지옥을 몰고 온 참된 하나님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참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고요? 천국과 지옥을 대동해서 등장하시는 그 하나님이, 예수님이, 그 아들이 진짜 하나님이었던 겁니다. 그 현실에 무식한 체, 그 현실에 어두운 체, 한다는 소리가 만날 그런 겁니다. 하나님은 너무 하시고, 하나님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내 처지를 살펴주시지도 아니하시고. 천국과 지옥의 현실 앞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그 동안의 현실이라는 것, 이게 뭐겠어요?

여러분, 세상은 예수님이 몰고 오신 천국과 지옥, 예수님이 몰고 오신 진짜 현실 앞에서 이 세상은, 뭐라고 표현할까요? 임시막사. 헛간. 그냥 모델하우스. 모델하우스는 뭐죠? 진짜 집이 등장하면 무너져야 될 거죠. 바로 거기서 나는 인정받겠다! 나는 영생 얻겠다! 뭐하고, 뭐하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다 결국 무엇이었단 말입니까? 무엇이었어요? 진짜 현실이 등장한 그 앞에서 우리가 생각한 그 동안의 하나님, 우리가 현실에 어두운 체 그 동안 나댄 그것은 다 무엇이었단 말입니까? 그게 허사요. 그게 하나님한테 만날 화 낸 짓이요. 정말 진짜 현실은 오직 아들 예수님이 붙들고 있는 그 천국과 지옥인데, 그것도 모르고 건방지게 나대가지고 뭐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니, 보좌를 움직이니. 뭐 내가 이렇게 괜찮은 신앙, 나는 복음을 안다고 이런 거 해가지고 하나님을.....,


여러분, 우리한테 이런 것들이 은근히 없어요? 아예 저쪽 사람들 말고 우리요. 우리. 우리교회 우리. 이 훌륭하신 목사님, 만날 부수는 교회, 그러니 진짜 우리교회. 그런 게 은근히 없냐고요? 왜,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표정들이 그러세요? 그래서 오늘 마태복음 5장에 있는, 도대체 심령이 가난한 복이 뭐냐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복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는데. 뭐가 심령이 가난한 것이냐 하는 겁니다. 뭐가 복일까요? 복은 다른 게 아니고 그 예수님이 몰고 오신 그 세계 앞에서 바로 개떡 같은 자기 주제를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그게 복입니다.

그 동안 지가 개떡 같은지도 모르고 그래서 참된 현실이 눈에 안 보였던 거예요. 뭐만 보고 있었던 거예요? 만날 자기 잘난 지 쳐다보기 바빴던 거예요. 인정받을 만한 나. 그래서 이쁜 나. 그래서 부서지면 안 되는 나. 그래서 고이고이 천국까지 갈 만한 나. 그걸 계속 쳐다보니 예수님이 눈에 안 들어왔던 겁니다. 예수님이 몰고 오신 천국과 지옥이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던 거예요. 비로소 예수님이 몰고 오신 천국과 지옥이 보일 때, 같이 뭐가 보이느냐 하면, 왜, 내가... 자꾸 욕이 나오려고 하는데. 여러분, 죄인인 줄 아는 게 복입니다. 죄인인 줄 아는 게 복이에요.

여기 마태복음 5장 10절부터 보면, 의를 위하여, 여기 의는 예수님이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11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게 무슨 말일까요? 핍박받아야 천국 간다는 이야기입니까? 핍박받는 것 보고 천국 갈 사람인지 아닌지 그거 확인하겠다 그 말 아닙니까? 아니죠. 무슨 뜻일까요? 비로소 예수님의 참된 현실 앞에서 세상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았다 이 말입니다. 아! 세상은 예수님을 욕하고 핍박하고 짓밟고 하는 그런 현실이구나! 누구 포함해서? 자기를 포함해서. 자기 주제를 제대로 알았다는 겁니다. 자기 주제를.

자, 이제 또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그러면 우리보고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제가 처음에 설교 시작할 때에 이랬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 몰아 세워요. 제 이야기에요. 울려고 내가 왔는가. 웃으려고 왔는가. 이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 이슬 맺힌....,뭐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너무 몰아세우는 거예요. “내가 당신 위해서 복음 이거 붙들고 아직까지 안 떠나고, 목사 몇 남지도 않았어요. 십자가 마을에. 지금 버티고 있는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쫌 생각해주셔야지.” 뭐 이런 거. 서경수 목사님이 그래요. 다음 차례는 당신하고 나라고. 정말 안 보여요. 목사들이. 다 없어요. 제가 십여 년 전에 할 때 목사들이 많았어요. 지금 보니까 없어요. 그래서 다짐에 다짐을 해요. 다음 차례는 우리 둘인데 자기가 순번이 앞이래요. 그리고 제가 뒤라고. 잘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누가 견디겠어요? 누가 견디겠어요? 그렇게 쳐 맞으면서. 비웃음당하면서. 아무도 견딜 수 없습니다. 아무도 이거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 성경은 그래서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해드립시다. 만날 부서져야 한다고 하고. 뭐 해야 된다고 하고. 그게 오해가 아니고 너무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고. 그래도 마땅한 나였습니다. 그래도 마땅한 나였어요. 그래도 마땅한 우리였습니다. 그래도 마땅한 우리교회였습니다. 쳐 맞아도 마땅한 그게 우리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해드립시다.

왜입니까? 우리는 한 순간도 예수님한테 입맞추지 않으면 안 되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한 순간도 입맞추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예수님이 누굽니까? 바로 우리 죄를 위해서 피 흘리신 바로 그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만 우리의 주님이시고 그 예수님이 몰고 오신 천국과 지옥만 참된 현실입니다. 그 현실 앞에서 우리는 매일 부서져야 하고 매일 비웃음 당해야 됩니다. 바로 그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이해해드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언제 주님 사랑 알겠습니까? 어린아이처럼 매일 투정하고 매일 하나님한테 생떼부리고. 주님 그거 다 아시고 십자가 지신 거, 그거마저 우리에게 알려주시니 그저 범사가 감사할 뿐이고. 남은 인생 부서지더라도, 맞더라도, 아니 당연히 부서지면서, 당연히 비웃음당하면서 오직 예수님한테만 입맞춰야 되는, 우리 주제를, 우리 죄인 됨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