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말라기19강-엘리야 강림(말4;4-6)이근호141012

아빠와 함께 2014. 10. 13. 07:54

엘리야 왕림

2014년 10월 12일 본문 말씀: 말라기 4:4-6

(4: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4: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엘리야를 보내시겠다는 것은 일종은 현재 인간들의 수준과 실력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려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이미 죽은 이순신 장군은 이 시대에 다시 보내시겠다는 것은 기존의 군인 지휘관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발언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엘리야가 무어거리 대단한 신앙인이냐”라고 질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시겠다는 것은 엘리야가 개인적으로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엘리야가 처해있던 그 시대상을 본격적으로 가동시키겠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마치 산에 있는 나무를 개인 정원수를 옮길 때 나무만 달랑 뽑아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품고 있었던 주변 흙도 같이 새끼줄로 동여매어 옮기듯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엘리야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가 처해있던 저주받은 상황을 동반시켜 보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엘리야를 단순한 자신의 구원자로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들의 과오를 하나님께서 묵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접하게 됩니다.

야고보서 5:17에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떠합니까? 주변에 이런 인물이 있다면 참으로 부담될 것입니다. 걸핏하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벌내리도록 조치하고 기도하면 졸지에 피해보는 것은 우리들일 것입니다.

그런 분을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시겠다는 것은 결코 인간들과 협의해서 내린 결정에 따라 엘리야가 오시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엘리야는 비가 오지 말라고 기도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열왕기상 17:1에 보면,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엘리야는 아합왕에서 적극적인 위치에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인 위치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 내리지 않는 조치를 나 엘리야를 통해서 알리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뭄 조치에 대해서 엘리야 본인도 피해를 입고 있는 입장입니다. 비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신나서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봐서 인간은 상황을 주도하는 입장이 아니라 주어진 시대적 상황 속에서 피동적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엘리야를 보내는 땅의 세계를 저주를 내리시는 겁니까? 그동안 보내신 율례와 법도가 결국에는 구원 효과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말씀을 전파하다가 안 되어서 마지막 조치로서 엘리야를 보내신다면 결국 저주라는 언급은 구원 취지에는 부합되지 않는 성급함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는 자아라는 존재성을 하나님 앞으로 소환하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인간은 그 앞에서 순간적으로 자아를 조립해 놓게 됩니다.

“저요? 저 아직은 간음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하나님”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게 뭐가 문제가 되느냐 싶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평소에 인간은 밥을 먹을 때 밥을 먹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와서 하는 말이, “너 뭐하고 있니?”라고 묻게 되면 그 순간은 인간은 말합니다. “내가 밥을 먹습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내가’가 들어가는 겁니다. 인간들은 의지, 감정과 이성을 갖고 있다고 말들합니다. 이런 생각은 철학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자아는 뭔가 가져서 관리하고 유지할 능력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내게 의지가 있어 자아가 이 의지를 잘 관리하느냐에 따라 착한 일을 이룰 수도 있고, 나쁜 일도 일어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인간이 의지를 내세우는 것은, 자아와 의지를 따로 분리시켜서 그 어떤 경우에도 자아만큼은 전적으로 악하지 않다는 점을 변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나라는 인간은 전적으로 악하지 않다는 점을 이런저런 식으로 증명해보려고 하면서 등장되는 개념이 의지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의지가 악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악합니다.

그리고 이 악을 수정할 그 어떤 의지도 인간에게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을 둘러싼 인간의 원대로 조정되거나 변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온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징벌과 저주를 유발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차원으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저주가 주변 상황으로 총체적으로 주어지는 거라면 인간의 구원도 이와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개인적으로 예수 믿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집단적으로 구원되기로 작정된 자에게 주어지는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자들에게 집단적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야지만 천국이 ‘나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엘리야가 오긴 오신 겁니까? 마태복음 17:10-13에 보면,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세례요한이 곧 엘리야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함부로 대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 작전은 실패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세례요한 참된 엘리야이신 예수님의 소리에 불과합니다. 실체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로, 아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됩니다.

인간들은 아버지를 모릅니다. 아버지를 아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집단적으로 성도들은 아버지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말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삶이란 예수님의 의의를 드러내기 위한 용어로 관리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주받은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가 건짐받는가를 두고서 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19강-말라기 4장 4절-6절 (엘리야 강림) 1410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4장 4절에서 6절입니다. 구약성경 1331페이지입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先知)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과거에 있던 엘리야는 과거에 있던 인물인데 다시 보내겠다는 겁니다. 마치 요즘 이 시대에 이순신 장군을 다시 보내겠다는 것과 같은 취지거든요. 그만큼 우리 세대에 인물이 없는 겁니까? 주께서 전능하시면 지금 이 시대에 이순신 장군을 만들면 될 텐데. 과거의 엘리야를 다시 보낸다? 얼른 들으면 상당히 인간에 대한 모독같이 느껴집니다. 엘리야 같은 그런 대단한 자아가 나한테는 없구나, 참 안타깝다, 그래서 엘리야 같은 자를 보내겠다, 라는 식으로 들릴 수가 있는데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엘리야를 보내겠다는 것은 엘리야가 위대하다, 훌륭하다, 착하다, 뭐 그렇게 해서 보낸 게 아닙니다. 엘리야가 올 때, 엘리야만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와 환경도 같이 덮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해요.

여러분이 산에 있는 소나무를 퍼서 집의 정원에 심을 때 뿌리만 달랑해서, 탈탈 털어서 그렇게 나무 심는 법은 없어요. 항상 나무 주위에서 흙을 이만큼 둥그렇게 붙여놓고 그걸 새끼로 꽁꽁 묶어 1톤 트럭에 실어 와서 그렇게 소나무를 정원에 심잖아요. 나무만 달랑 뽑지를 않습니다. 나무의 주위에 포함되어 있는 그 주변 흙과 더불어서 그동안 그 나무와 더불어서 동거동락했던 그 흙과 더불어서 오듯이, 엘리야를 보내겠다는 것은 엘리야 시대의, 그 시대의 상황이 연속시키는 방법으로 내가 너희를 찾아가겠다는 겁니다.

그럼 엘리야 시대는 어떤 시대냐 하면, 여기 6절 끝에 보면 엘리야 시대가 나옵니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엘리야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물으신다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저주를 했던 시대라고 이렇게 단정 지을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에 보면 이상한 이야기가 있어요. 야고보서 5장 17절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제가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는 이 대목입니다.

엘리야가 상당히 나쁜 사람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엘리야가 비오지 않기를....., “살다 보면 비가 오네.” 이게 아니고 “주여! 비 오게 하시면 안됩니데이. 절대로 비 내리면 안됩니데이.” 하는 식으로 비 오지 않기를 기도했더니만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우리 옆에 있으면 우리는 재수 더러운 사람이 옆에 붙어 있는 거예요. 조금 성질 건드리면 “니 내한테 까불면 대구에 비 오지 않기를 기도한다.” 이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L.A가 지금 사 년 째 가물었다는 거예요. 뭐, 엘리야 같은 분이 기도해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같은 인간이면 인간 편을 들어야지, 어떻게 같은 인간이면서도 삼 년 동안 비 오지 않기를 기도합니까? 무슨 그런 못된 심보가 어딨어요?

그래서 성경을 찾아 봤죠. 과연 엘리야가 비 오지 않기를 기도했는지 찾아보니까 그런 대목이 없어요. 엘리야는 비 오지 않기를 기도 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거기 디셉 사람 엘리야가 있었는데, 엘리야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의 섬기는 하나님께서 나한테 어떤 정보를 이야기했는데 그 정보가 뭐냐 하면, 수년 동안 우로(雨露), 비가 없다고 전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엘리야야!” “예.” “니 전달해라.” “뭘요?” “앞으로 수년 동안 빗방울 없을 것이라고 전해라.” 라고 해서 엘리야는 그것을 전달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 책임을 엘리야한테 물을 수는 없는 거예요. 엘리야도 비 오지 않으니까 엘리야도 답답해요. 비 오지 않으면 자기도 손해예요.

따라서 우리도 이 땅에서 우리가 성도입장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결국은 같은 동료, 같은 인간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심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씀 드린 것은 성경에서 위대하다, 대단하다, 신앙이다, 뭐라고 아주 아름다운, 멋진 수식어를 붙여도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서 그냥 편한 게 제일 좋아요. “하나님, 좀 조용하니 삽시다. 아이! 참 미치겠다. 그냥 이대로 제발 날 건드리지 말고 좀 조용하게 살게 해주소서.” 그거나 이거나 똑같잖아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건드리십니다.

성경에서 오해받는 사람 중에 또 한 사람 있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 마리아가 신앙 좋아서 예수님을 낳았습니까? 주께서 건드렸어요. “마리아야! 임신해야 되겠다.” 마리아가 “아이고, 기다렸습니다. 임신이 안 되어 가지고 고생을 많이 했고 그렇지 않아도 남편이 무정자증이 되어 가지고 고민했는데 마침 동생이 정자 줘가지고 아이가 생겨서..청담동 스캔들처럼 그리 돼서 좋아했는데..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그냥 건드렸어요. 임신해라! 원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거, 여러분들이 절대로 원한 게 아닙니다. 자꾸 여러분들이 구원하려고 하는 것, 구원은 구원파한테 가고요.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제시한 게 아닙니다.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 구원된 환경을 주시죠. 이런 환경은 구원된 환경이고, 너는 니 의도 없이, 너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구원받는 상황 속에 우리를 집어넣은 겁니다. 그래서 성경해석을 구원론으로 해석하면 안 돼요. 상황으로 해석해야 돼요. 시추에이션, situation, 상황으로, 영어 막 나온다. 시추에이션, 상황으로 해석돼야 해요. 어떤 상황이 덮치게 되면 나는 그 상황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이거는 거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거부할 수 없는 상황들을 헤아려 보세요. 그게 신앙의 증거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에게 그대로 덮친 겁니다. 베드로야 니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갈 것이다(요21:18)는 그 원치 않는 것, 그 원치 않는 상황이 우리가 속한 상황입니다. 동일한 상황이에요. 엘리야가 온다고 해서 엘리야가 위대하고 대단한 사람 아닙니다. 뭐, 엘리야 오지도 않지만. 엘리야는 그냥 엘리야 같은 상황이 주어지죠. 그렇다면 이제 엘리야 같은 상황이 무엇이냐. 이제 궁금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성경을 해석할 때, 흔히 말하는 문자적 해석이라고 하는데, 문자적 해석이라 말해도 무슨 뜻인지 몰라요. 문자적 해석 아닌 해석이 뭐가 있어요. 모든 해석은 문자로부터 시작하는데 문자적 해석 아닌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문자적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유대인들이 성경해석 하는 방법을 가지고 우리는 문자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그럼 유대인들의 해석 방법은 뭐냐, 지금부터 좀 어려운 이야기할테니까 여러분들이 정신 차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십계명을 딱 주게 되면, 십계명이라는 것은 인간을 존재로서 소화시키는 것이 십계명이에요. 십계명은 존재로서 소화시킨다. 다른 말로 주체를, 흩어진 것을 주체로 묶어서 니 주체가 무엇이냐를 요구하는 것이 십계명입니다. 예를 들면, ‘간음하지 마라’ 할 때 간음하지 마라는 명령 자체가 앞에 뭐를 요구하느냐 하면, “너는!” “너는!”을 요구하거든요.

근데, 사람들은 평소에 내가 밥을 먹는 것이 아니고 그냥 밥을 먹지요. 그냥 밥을 먹고 있는데 누가 와서 “야! 이 밥 누가 먹었어?” 할 때, 누가 호명하고 호출할 때 비로소, 우리는 존재로서 응수하여 “내가 먹었습니다.” 그 때 내가 등장해요. 내가 평소에 밥을 먹는 것이 아니고 그냥 밥을 먹어요. 밥을 먹는데, “내가 뭐뭐 합니다.” “나는 뭐뭐를 안 했습니다.” 라는 것은 누가 주체를, “니는 어떤 존재냐?” 라고 요구할 때, 우리는 “나”라고. 비로소 호명할 때 “나”를 갖다 붙이거든요. 아침에도 언급했습니다만, 어떤 우리한테 의지가 있는 게 아니에요.

의지가 있는 게 아니고, “니가 왜 이런 짓을 했어?” 하면 우리가 하는 말이 “아이구, 이건 내 의지로 한 게 아닙니다.” 하든지 “이건 내 의지로 했습니다.” 하면서 “내가 의지를 갖고 있는데 내가 의지의 관리대상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내 의지를 제대로 사용해서 착한 일을 하는 쪽으로 내 의지를 발휘하겠습니다.” 라고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나는, 처음에 나는 원래 괜찮은 존재인데 내 의지를 그때 정신없어서 잘못 사용했습니다.” 나와 의지를 분리할 때 의지라는 것이 사용되는 거예요. 제가 어렵다고 했지요. 인간은 의지라는 것이 없어요. 인간에게 지,정,의가 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나온 겁니다.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있다.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신이시여! 내 감정이 잘못되었으면 감정을 고치고 의지가 잘못되었으면 의지를 고치고 내 이성이 잘못되었으면 이성을 고치겠습니다. 하지만 원래 나를 그렇게 탓하지는 마시옵소서.”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는 마지막 사수의 방법이 바로 지,정,의를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개념입니다. 그런 인간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생각한 인간 아닙니다. 사람이 지,정,의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그것들을 잘 관리만 한다면 내가 하나님에게 욕 얻어먹지 않고 착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노리기 때문에 그럽니다. 사실은 마귀가 그런 짓을 하죠. 우리가 이미 마귀로부터 훈련이 되고 숙달이 된 그런 몸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계명을 이야기하는 것은요, 평소에 우리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하면 “저는 살인 안 했어요. 저는 아직까지 남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부모를 공경하고 저는 아직도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습니다.” 하고 갑자기 그 명령이 오는 순간 그 앞에서 나를 순간적으로 조립해서 “가만 있어봐 명령 왔어. 명령 떨어졌어. 나는 어떤 존재야? 아! 나는 이 정도 하면 괜찮은 존재지?” 갑자기 나를 수집하고 조립하고 모으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속성, 그러한 우리의 타고난 생리를 의도적으로 노리면서 십계명을 언급한 겁니다. 인간은 자기 챙기는 식으로 사는 게 목적입니다. 인간이 사는 이유고 목적인데, 그것이 바로 마귀가 역사해서 그렇데 됐다는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유대인들이 거기에 말려 든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 율법을 준 것은, 십계명을 준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막고 저주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본문 마지막에 보면 “두렵건대 저주로 내가 와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저주라는 말이 언급될 때에, 주체사상, 자기 사상만 갖고 있는 사람한테만 이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잘못되었다. 그런데 국세청에서 와서 “이거 은행에 차압 넣었기 때문에 일주일만 사시고 나머지기는 비워드려야 됩니다.” 라고 통보했을 때에, 누가 겁냅니까? 그 집에 있는 식구들이 겁내지 그 집에 있는 고양이가 겁내는 거 봤습니까? 그 집에 강아지가 겁내는 거 봤습니까? 그 소리 듣고 강아지가 “으흑흑 주인님 어떻게 살아요? 이 집 차압당하면 어디서 살아요?” 이렇게 겁내면서 강아지가 이야기 합니까? 강아지가 발람의 당나귀도 아니고 지가 말할 줄도 모르고. 고양이는 그 소리 듣고 엎드려 자빠져 자고 있고. 고양이나 강아지나 아무 생각 없어요.

사람이 저주 받는다 말은, “니가 저주받는다. 니가 지옥 간다.” 라는 말은 이미 악마로부터 인간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나밖에 없다는 것이, 이것이 나만 챙기고 나만 살아야 되고, 나만 구원 돼야하는, 자기 생각에 집착되어 살아가는 이 잘못된 창조 위반되는 사항이 우리가 있었기 때문에 저주와 축복의 이야기에서 그 의도를 감지하고 탐지해내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저주를 하는 겁니까? 우리에게 저주를 안 해요. 그럼 누구한테 저주하나? 우리가 속해 있는 그 땅을 저주하는 거죠. 아까 나무 이야기 해드렸죠. 나무 옮길 때 나무만 옮기는 것이 아니고 흙과 더불어 옮긴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속해 있는 땅 전체를, 세상 자체를 저주해버립니다. 왜 그렇게 하시느냐고 물으신다면 우리가 천국 갈 때, 내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를 천국가게 하는 그 상황이 천국이 되어 버리면 우리는 그 속에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고 말았어요. 자신도 어리둥절해요. “내가 여기 올 입장도 안 되는데 여기 와있다니!”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상대해서 천국 보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있는 그 상황 자체를 임의로 하나님께서 예수 안으로, 예수 이름으로 그걸 자기 소유로 삼아버리니까 함께 그 상황 속에 우리가 들어 온 게 된 거예요.

우리는 살아갈 때에는 나밖에 모르는데 들어 올 때는 나가 아니고 우리, 영어로 We, 우리로 들어오는 거예요. 우리로 들어오니까 우리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아들이라지만 사실은 아들 아니에요. 아들은 수십 만 명이지만, 한 단수 아들로 삼아, 집합적 개념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자체가 개인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단체로 구원받아요. 이스라엘 단체로. 왜 그러냐 하면, 어린양이 죽었는데 어린양이 죽음으로써 그 가족들이 살잖아요. 그러니까 어린양 죽임이라는 그 사건 속에서 모든 인간의 개성은 일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린양의 피만 생각한다면 다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린양의 피를 흘렸잖아요. 그렇다면 그 예수님 한 분, 숫자로 하나, 1. 그 한 분에 대해서 여러 사람이 동의하게 되면 그 한 분의 능력으로 여러 사람이 같은 운명, 같은 팔자로 천국에 들어가는 그러한 골인 지점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천국은 “내거야!” “아니야!” 니꺼야 내꺼야 싸울 필요 없이 “다 예수님거야!” 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거기에 합류해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 가지고 따지는 것은 마귀에 의해서 숙달된, 우리의 학습된, 우리의 잘못된 의식이고 인식에 불과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따지지 않습니다. 개인을 따지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으로 끝났어요. 우리의 최초의 조상, 아담. 아담 하나만 따졌고 그리고 그 아담과 마주하신 분은 마지막 아담, 예수님. 그 두 아담 사이에 관계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은 그 혜택을 받든지, 그 혜택에서 제외되든지. 거기에 따라서 그 운명은 결정되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 믿는다고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 믿는 것은 우리라는 존재가 예수 믿어야 하기에 그 우리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기에 성령께서 선물로 믿음을 줬고 믿고 보니까 나만 달랑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우리’라는 더불어서 집단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성령 받고 난 뒤에, 예수 믿고 난 뒤에 비로소 깨닫게 된 거죠.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 다시 말해서 나라는 것을 대표한 나. 내 주체를 대표한 주체. 내 자아를 대표한 자아. 그 분께서 아버지께 이미 죄 값을 다 치뤘다면 그 안에 속해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들은 이미 어떤 짓을 해도 의인되는 겁니다.

여기서 어떤 짓, 어떤 짓을 해도 의인된다. 어떤 짓, 밑줄 쫙 그어놓아야 해요. 어떤 짓을 해도 의인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당신 말대로 어떤 짓을 해도 다 구원된다면, 그러면 내가 온갖 나쁜 짓을 해도 구원받는다 그 말이야? 당신이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그 말을 의미하는 거야? 라고 한다면 그 질문하는 사람은 바로 나는 ‘우리’라는 그 평지에서 이야기했는데 그 사람 질문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입장에서 나에게 질문하는 거예요. 나는 어떤 행동할 때 조심하거든. 나. 나. 영어 I. 오늘 영어 많이 나온다. 나는 어떤 행동할 때 내가 나의 의지로 알아서 하는데 그렇다면 니가 한 말은, 내가 나에게 어떤 짓을 해도 구원받는다 하는 그 말이야? 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이야기 합니다. 그 ‘나’를 ‘우리’로 바꾸라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은, 그렇게 질문한 사람은 바꿀 줄을 몰라요. 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항상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지? 출발점이 나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로 바뀌지 않은 채, 자기 세계 안에서, 자기 개념 안에서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그러면 니는 니 맘대로 하며 살 수 있느냐? 저는 이야기 합니다. 니 맘대로 사세요.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내 맘대로 살지 않고 우리에 합당한 조치가, 성령께서 조치가 주어질 겁니다. 그 항의 전화, 수많은 항의의 글들, 결국은 그 항의 글들이 나는 우리라는 것을 모르고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그대로 토설하는 계기가 될 뿐이었어요. 어디 앞에서? 복음 앞에서.

자, 그러면 엘리야가 온다는데, 저주를 몰고 온다는 거예요. 뭐 우리한테는 상관없지만 하여튼 신나요. 그 분이 와서 땅을 저주하거든요. 그 땅을 신약에서는 세대, 이 세대를 저주해버립니다. 자, 그러면 엘리야가 왔습니까? “엘리야가 왔습니까?” 라는 이 질문에 답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면 온다는 엘리야가 왔느냐 하는 문제에요.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와야 돼요. 엘리야가 와서 뭘 해야 하느냐 하면, 아비의 마음을 자식이, 자식의 마음을 아비가 돌이키는 그런 일이 벌어지면 엘리야가 온다는데 그 엘리야를 아직도 유대인들은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저 텔라비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부부라는 것이, 부부라는 것이 뭐냐 하면, 같이 산다는 것이 인간은 절대로 한 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부부예요. 분명히 성경에 부부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했잖아요. 그 하나를 사시면서 한번 확인해 보세요. 그게 확인이 되는지요. 뭐 십년 살아서 안 되겠다고요? 그럼 이십년 산 사람한테 물어봐요. “이십년 살았는데 한 마음 됐습니까?” “한 마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금 이혼 직전입니다.” 그럼 삼십년 사신 분들 있어요? 지금 우리교회 사십년 까지 사신 분들이 계시는데, 우리 장로님, 권사님, 물어 봅니다. 지금 한 마음이 됐습니까? 아님 갈라진지 사십년 됐습니까? 절대로 인간은 한 마음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서로를 이용할 뿐이고. 협상할 뿐이고. 타협할 뿐이지. 한 마음 없습니다.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요? 아니에요.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에게 하실 그 분은 본인 자체가 엘리야이면서 그 본인 안에 말라기가 예언한 그 마음을 듬뿍 안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이야기 합니다. 그 분이 바로 나다. “그 분이 바로 나다!” 세례 요한이 이미 왔으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그 엘리야로 온 줄 몰랐죠. 그러면 여기 말라기에서 예언한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 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입니까? 라고 둘 중에 결승 투표. 둘 중의 하나예요. 세례 요한이 엘리야냐? 예수님이 엘리야냐? 할 때, 세례 요한이 이야기 했어요. “나에게 존재라는 말을 붙이지 마라. 나는 하나의 소리다.” 나는 소리라 했어요.

뉴저지 가스펠렐로쉽 교회에 나와 있습니다. 강의했거든요. 소리가 뭐냐 하면, 보신각 종치면 댕~하고 나오죠. 댕~하고 소리가 나올 때 소리는 빠져나왔지만 보신각 종은 그대로 있잖아요. 실체는 그대로 있다고. 세례 요한이 말하는 나는 나를 보고 who are you? what are you? 너는 누구냐? 너는 무엇을 하느냐? 묻지 마라. 나는 하나의 보이스voice, 내 뒤에 오시는 분의 하나의 소리에 불과하니까. 보신각 종소리에 불과하니까. 너희들은 내 소리를 듣고 진짜 볼 실체를 찾아봐라.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그렇게 그 한테 지향하는, 그한테 안내하고 인도하는 하나의 소리예요.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의 소리입니다. 댕~~하고 움직일 때. 엘리야는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 안에서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이것은 예수님만이 할 수 있어요.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 죽은 자식을 아버지가 건사하므로 말미암아, 사흘 만에 되돌림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일치가 되는 그러한 사건을, 정확한 사건을 십자가 사건으로 남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은 바로 십자가 안에 거기에 모든 구약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나’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서 천국 백성됨을 통보받는 그런 입장으로. 예수님에 의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의 작품. 주님께서 이뻐서 보는 작품. 내가 이쁜 게 아니고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쁜 작품으로 살아가면서 우리 속에서 주님 자신이 하신 업적을 날마다 댕~~댕~~하는, 보신각 종소리처럼 울려나오도록 그렇게 조치하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하면 나를, 고생 많은 나를 죽어서도 편히 쉴까 온갖 시도를 다 해보고 왔습니다. 말씀 지키면 됩니까? 교회 봉사하면 됩니까? 십일조 하고 선교하고 헌금하면 됩니까? 시킨 대로 다 했지만 다 부질없는 짓. 이미 우리가 주의 백성으로서 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주로부터 지적당할 때 그것이 곧 성도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