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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18강-치료하는 광선(말4;1-3)140921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9. 26. 18:11
2014-09-21 14:53:56 조회 : 101         
   치료하는 광선 140921 이름 : 이근호   
 
치료하는 광선(말라기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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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9-21 15:43 
치료하는 광선

2014년 9월 21일                       본문 말씀: 말라기 4:1-3

(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4: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악인과 선인을 구분하는 하나님의 분류작업에 직면한 인간들의 반응은 긴장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긴장 자체가 평소에 사람들은 자기 위주로 살아가고 있다는 티를 낸 셈이 됩니다. 아니, 하나님이 하시겠다는데 당해주면 그만이지 왜 미리 바짝 긴장이 되는 거지요?

우리는 구약을 종결짓는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을 가름하시고 상응하는 징벌을 내리시겠다는 것은 그동안 인간이 자체 방어책으로 실시한 모든 것으로도 결코 자신의 영원한 신분은 본인이 결정지을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대로 라면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에 대해서 대환영을 할 수 있는 자만이 의인이라는 말이 됩니다.

자신이 철저하게 ‘악인 징벌’에 해당되지 않고 벗어나 있다는 확정적 근거에 대해서 인간 쪽에서 따로 마련해야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왜 우리 아브라함 자손만이 영원한 천국 백성이냐’를 말해주기 위한 근거를 조성하게 됩니다.

문제는, 신약의 복음의 생성이 바로 그런 집단 한복판에서 일어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나는 누가 뭐래도 의인 맞고 심판 안 받는다”고 자부했던 그 단체 한 가운데가 바로 메시아야가 살해당하는 현장이 됩니다. 예수님도 일찍 감치 예루살렘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3:33-35에 보면,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칭 의인들과 집결체야. 너희들이 악인들이다”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실수와 잘못은 바로, 신약으로 넘어가야 완성될 하나님 말씀을 자기 선에서, 자기 힘으로 완성을 보려고 한데 있습니다. 즉 “이정도 말씀 같으면 우리의 의지력을 믿어도 충분해”라고 자부하게 마련입니다.

이 자부심이 충천한 그 한 가운데로 진정 말씀 완성자가 지나가시다가 체포된 것입니다. 예수님 본인이 완성자이심을 입 마물고 곱게 지나가신 것이 아니라 공포하면서 지나가셨기 때문에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 말고 의인 따로 없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반대 의사를 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라기 말씀도 신약을 경우해서 봐야 합니다. 사람의 표정이 어둡고 거친 것은 마음 속이 안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치료’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누가 우리 자신을 보고 “치료받으셔야 겠네요”라고 한다면 누구나 기분 나쁘게 여길 것입니다. ‘성경에서 안정’이란 ‘창조 원리’대로 유지되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 원리에 벗어나면 치료라는 말이 성립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의 성경 해석에 의하면 성경 해석에 있어 예수님을 경유할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창조의 결과가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창조된 시점 그 이후로 피조물은 고유한 독자적 가치를 챙길 자격이 있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신약을 경유하면 우리 인간들의 자력으로 알 수 없는 본질이 창조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골로새서 1:16-17에 나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즉 유대인들은, 모든 창조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을 놓쳤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모르는 그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을 악인이 되는 겁니다. 오늘 나오는 심판도 이런 악인을 향하여 최종 쏟아지게 됩니다. 신약을 경유하지 않는 유대인들로서는 당연히 오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약을 경유했다고 자부하는 자들도 자만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치료’라는 말씀 자체가 비정상적 상태를 가진 대상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비정상적인 존재로 여기고 싶어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치료하시겠다’고 조성해놓은 하나님 창조 세계에 합치되지 못하는 생을 살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서 문제가 있는지 물을 용기나 물을 의사도 없습니다. 당연히 정상적이라고 자부하며 살게 됩니다. 따라서 신약을 경유하고, 예수님을 경유한 해석이란 이 ‘치료 대상’로서의 당사자로 자신이 어떻게 규정하게 되는지를 말해주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 방식은 형사가 결국에는 자신이 범인으로 들어나는 사건에 참여케 하는 겁니다.

형사가 어떤 고소 사건을 접하고 수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기억상실증 이전의 상황에 접어들게 되고, 본인이 그 사건의 유일한 범인 인 것으로 차후에 알게 될 때, 그 형사는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애써 부정하려 들 것입니다. 신약을 경유한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치료하려고 하는 일상적 일이 도리어 치료를 훼방하는 악인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본인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확인당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모든 껄껄러움은 본인이 의미있는 존재라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자신을 놔두지 않고 붙들고 부리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 집착이라는 늪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방식은 ‘님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말없이 님만 보고 따라하게 합니다.

앞서 가시던 님께서 심판을 하시든 징벌을 내리시든, 자신은 님의 그런 결정마저 찬동하게 됩니다. 창조 원리에 충실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드러남에 충실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앞장 세우지 않는 해석은 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인간은 본인의 결정지음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님으로 움직이시는 그분의 치료덕분에 살기에, 성도 자체가 이 시대를 비추는 치료광선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생활 구석구석에서 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함을 확인하는 증거들을 찾아낼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9-25 21:38 
18강-말라기 4장 1절-3절 (치료하는 광선) 1409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4장 1절에서 3절입니다. 구약성경 1331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과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성경 말씀은 예수님에게 일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성도는 예수님의 닮음 속에 포함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직접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 3절에 보면,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라는 그 말씀 듣고 예수 믿는다고 총 들고 가가지고 전부 다 나쁜 사람들을 다 잡겠다고, 일베 회원도 아닌 것이, 공산당 다 잡겠다고 그렇게 나서시면 곤란합니다. 성도란 이름으로 정의의 사자, 또는 스파이더맨으로 그렇게 설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끝나 버려요.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자 지역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블레셋 사람들이죠. 그들을 공격하면서도 그들은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내 땅에 왜 사느냐? 주의 약속은 우리가 지배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너희들 좀 나가 다오. 안 나가? 그러면 너희들은 우리의 핵폭탄에 맞을 것이다. 이 땅은 원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기 때문에 너희 블레셋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이 땅에 살 자격이 없다.” 그래서 공격하는 거예요.

근데 뭐가 빠졌지요? 하나님 다 거론하고, 하나님의 주의 백성 다 거론하는데 뭐가 빠졌느냐 하면 신약 성경이 빠져 버린 거예요. 그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끝나 버립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없어요. 성경은 보라는 것이고 보라는 것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대로 지키고 실시하게 되면 그건 주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고. 뭐가 어려우냐. 간단하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신약에 넘어가 버리면 이런 문제가 생겨요. “하나님이여, 왜 구약을 우리가 알아서 지키겠다는데 왜 하나님은 반대하십니까?” 이래 나와요. “구약 성경을 지키라고 준 건데, 지키라고 준 거 우리가 지키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키겠다는데 우리 말고 또 다른 분이 왜 필요로 하십니까? 그 정도로 우리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구약을 문자로 보지 말고 신약을 경유해서 보게 되면 신약 성경에 예수님 등장하시고 그 예수님이 그냥 말씀은 내가 지킬게 정도가 아니고요, 그 말씀을 내가 지키는데 너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내가 지킨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소리 듣고 저한테요? 이 착하고 경건한 저한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라고 우리는 대꾸할 수밖에 없고. 네가 문제 있기 때문에 내가 피를 흘린 거야. 너한테 죄가 나오기 때문에 죄가 나온 상태에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주께 영광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지킨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로마서 3장에 있는 말씀대로 하게 되면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이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질 못한다는 겁니다. 뭐 소프라노, 테너가 없어서 영광이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배드릴 장소가 없어서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장소 구비되어 있고 파이프 오르간 다 구비되어 찬양대 있더라 할지라도. 그리고 선교 의지 있고, 선교 의지 있고, 예배 의지 있다 할지라도. 심지어 구제 있다 할지라도. 영광이 근원적으로 영광이 안 돼요. 원초적으로 영광이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여기 2절 중간에 보면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이것을 자기가 자기를 후레쉬 비춘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구약 말라기를 가지고 신약을 경유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약을 경유한다는 이 말 때문에 이 말라기 설교 듣기가 상당히 부담이 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문자 알겠다, 해독하면 되는데, 지키면 되는데, 어디 딴 곳에 들르고 오라 하니까. 그럼 말라기를 봐서는 말라기를 모른다는 이야기인데. 사람 무시하는 느낌이 들거든요.

너희에게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대구 지하철 1호선 신천역 사거리에 한때 교회가 있었어요. 사거리에. 그 사거리에 있던 교회 목사님은 누구냐 하면 우리 외사촌이에요. 어머니 형제간에 아들 분인데, 교회 이름을 뭐라 했느냐 하면, 칠곡에서 하다가 거기서 쫓겨 나와서 개척교회 했는데 교회 이름이 '광선 교회'에요. 제가 물었죠. “형님. 왜 광선 교회 입니까?” “니는 말라기 4장도 모르느냐?” “주로 하는 게 뭡니까?” “광선이니까 치료한다니까.” 병든 자를 치료할 때, 비로소 치료받은 사람은 신자고 치료하는 사람은 주의 종이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흔적을 어디서 찾는가? 우리 교회 말고는 찾을 데가 없다는 거예요. 치료하는 광선 교회에 와야 비로소 살아계신 하나님의 치료하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으니까 나 이거 믿고 기도하는 가운데 응답받았다는 거예요. 그 광선 교회, 지금은 없어요. 이 대목을 볼 때마다 치료하는 광선, 치료하는 광선. 자꾸...치유, 영어로 하면 힐링이라고 하죠. 치유하는 교회, 그 생각하면 자꾸 나거든요. 뭐가 빠졌느냐. 그리하게 되면 유대교하고 같이 돼요. 뭐가 빠졌습니까? 이 구약에서 벗어나서 신약 성경을 경유한 그 노선이 빠진 거예요.

노선이 빠지니까 그냥 혜택만 볼라고 하는 거예요. 치료하는 광선이 있는데, 어! 아픈 사람 있다, 주님은 주의 말씀대로 하니까. 병든 자가 왔다. 치료하는 광선 받으면 치료받으면, 치료만 받을 뿐만 아니고 믿은 걸로 쳐서 죽어서 천국까지 가니까. 그게 참된 교회가 아니고 무엇이냐? 그들의 생각은 그런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은 뭐가 빠졌다 했습니까? 바로 왜 우리는 안 되는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가 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왜 주님은 우리가 뻔히 아는, “치료하는 광선이 있을 것이다.” “아멘 할렐루야!” 하고 그냥 병자 치료하는데 열중하고 “신이시여, 치료하는 신이시여 치료하소서.” 이거 밖에 할 줄 모르는 것을 익히 아는데 알면서도 왜 그걸 비켜 가느냐 이 말이죠. 왜 그게 아니냐 이 말입니다.

유대인들도요, 많은 병자들 치료했습니다. 예수님 오셔서 하신 말씀이 “너희는 한 사람 고치기 위해서 온 천지에 다 다니다가 배나 지옥 백성 만든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그들 가운데 치료하는 사람 있었고 효과 본 사람 많았지만 그것이 전부 다 지옥 가는 한 그룹에 속한, 지옥 가는 한 그룹이에요.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것은 치료 받았다, 병 나았다, 안 나았다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를 경유 했느냐로 결정되는 거예요. 말라기는 약속이 완성되는 그 시점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나오는 성도 자체가 같이 치료하는 광선이 되는 겁니다. 이 땅을 치유하는 광선이 되는 거예요. 병든 채로 남을 치료할 수 있는 거예요. 병든 채로. 거지 나사로처럼 죽을 때까지 벅벅 긁으면서 아픈 데 긁으면서 자기도 구원받고 남을 구원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고 도구로 사용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치료한다는데, 이 말을 들을 때 소위 건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아주 기분 좋지 않습니다. 내가 아픈 데도 없는데, 우리 어머니가 하는 이야기가 그래요. “나 아무 아픈 데도 없데이.” 그러시거든요. “나는 아무 아픈 데도 없다. 걱정하지 마라. 아무 아픈 데도 없다. 아이구아이구 어지럽네.”

우리는 뭔가 아프다 하면 상당히 자존심이 꼭 상해버립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살아가는 버릇이 자력으로 살아가는데, 아프다는 말은 남을 의지해야 될, 자기의 허약한 면을, 아주 약점을 보이는 거거든요. 약점을. 그러면 본인이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아이, 참 내가 나 혼자 할 수 있는데. 왜 나는 내가 남한테 의지한다는 이런 내 자신이 미워.” 이래 된다 이 말이죠. 사람들이 치료 안 해도 되는 건강한 상태, 그 건강한 상태가 어떤 상태냐. 그리고 그 건강한 상태에서 미흡할 때, 비로소 병들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정말 건강한 것이 몸의 건강뿐 일까요?

저는 우연히 플랜카드에, 플랜카드인가 어디 광고에서 보고 “아, 사람들이 건강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건강하다고 하는구나!”를 새삼 느꼈어요. 그 구호가 뭐냐 하면, 잘 들어보세요. '뭘 해도 된다 천 육백 세대' 이거 기분 좋지 않습니까? 상가 분양 광고에요. 여러분들이 상가 분양하면은 뭘 해도 돼요. 왜? 1600세대니까. 약국하면 약국 되고, 치킨하면 치킨 되고, 노래방하면 노래방 다 되고. 세상에 이 소식만큼 건강한 소식이 어딨습니까? 갑자기 아픈 게 싹! 옷 가게 천 육백 세대니까 옷 가게 다 돼요. 중저가 다 되고 고급가 다 돼요. 우리는 얼마나 그런 소리가 듣고 싶었습니까?

저는 이것을 네 자로 표현합니다. '매끄러움' 타일의 표면이 어떠냐 하면, 맨들맨들, 매끄러움이죠. 사람의 마음이 거칠다는 것은 안에 정리가 안 됐다는 겁니다. 안에 마음이 타일처럼 매끈하지가 않아요. 매끈하지가 않습니다. 뭔가 불안하게 되면, 1등이 7등 돼요. 조금 전까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남자 권총 금메달 딴 사람이 이번에 7등 했잖아요. 뭔가 안정감이 없어 불안해요. 특히 권총이나 사격 같은 것은 예민하거든요. 젊은 고등학생이 금메달 두 개나 따버리고 이래 됐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치료한다는 것은, 우리보고 불안하게 산다는 겁니다. 환경에 따라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거예요. 그걸 표면에서 처리하려고 하니까 항상 아무리 일시적으로 안정하려고 해도 또 뭔가 파도가 덮쳐버리면 또 어쩔 줄을 모르죠. 따라서 어떤 사태가 오더라도 뭔가 매끈한 게 있어야 돼요. 매끈한 게. 안정감을 줘야 되거든요. 언젠가 정의가 승리한다. 드라마 봐도 뭔가 언젠가 정의가 승리한다는 게 있어야 되는데, 뭔가 드라마 해결될 쯤 될라카면 또 뭔가 나쁜 생각을 해가지고, 이거 뭐 장보리가 언제까지 갈지 모르지만 하도 나쁜 생각을 끄집어내가지고 시청자 온 마음을 흔들어서 에이 씨, 또 문제 일으켰다 딴 데 틀라고 해서 딴 데 틀어버리고. 사람의 본성이 불안해서 못 보는 거예요. 한 번 승리하면 쭉 승리하든지. 또 계략을 꾸며가지고 또 휘말리게 만들고. 치료대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은 예술이란 치료의 효과,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예상되는 비극을 미리 봄으로써 내가 대체했다는 안도감을 갖게 하여서 미리 자기 불안정에 대한 대비책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치료한다는 것은, 인간은 이미 망가졌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망가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상당히 이상하죠. 망가졌기 때문에 성경 말씀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망가진 것이 회복된 사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감사, 성경 말씀 볼 때마다 감사가 되는데, 감사한 대목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4장 1절에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우리는 여기서 박수를 칩니다. “아이, 진작 그래 조져야죠.”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진작 그래 조져야죠.” 그런데 이미 구원을 못 받은 사람은 “아이구,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이거 뭐 어떻게 믿어야지? 뭘 어떻게? 목사님, 뭘 지키면 이 날을 피할 수 있습니까?” 오리려 불안을 가중시키는 말씀이 되고 마는 겁니다.

성경 내용이 이렇습니다. 천지창조 했다, 했는데 너는 죄 지었기 때문에 불안하다, 따라서 내가 마지막 때에, 끝 날에, 내가 치유하는 광선을 보내서 예수님의 능력이 와서 너희를 매끈하게 치유하겠다. 그 이야기거든요. 방금 제가 빨리 이야기 한 가운데서 뭐가 빠졌느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죄를 지었다. 치료하는 분이 오셔서 치료한다. 이 가운데 뭐가 빠진 게 있어요. 뭐가 빠졌느냐 하면, 그 빠진 것이 신약을 경유하면서 채워지는데 빠진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게 아니고 하나님은 치료하실 분과 더불어 천지를 창조했다. 이게 빠진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안 믿는 겁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거예요. 하나님이 천지창조 했으면 그걸로 손 털은 줄로 아는 거예요. 이제부터 창조된 우리가 알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근데, 처음부터 천지창조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어요. 따라서 설계하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걸 고쳐놓으신 분도, 새롭게 창조하신 분도. 우리가 못해요. 우리가 못한다는 자체가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나는 해도 안 된다는 것이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니까요. 우리 내면을 매끈하게 만들어요. 해도 안 되잖아요? 왜 내가 해요? 왜 내가 해야 합니까?

아, 진짜 내가 오후 설교 하지만 내가 미안해 죽겠어요. 어떻게 내가 잔인할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매끈한 걸 듣고 싶어요. 그냥 어떻게 돼도 우린 예수님으로 됩니다. 매끈한 것을. 듣고 싶은데 힘들더라도 이렇게 해주시면 좋겠어요. 해주신 분한테는 감사드리고요. 우리는 신약에 서 있습니다. 설교 다시 합시다. 구약에서 멸망이야기, 심판이야기, 저주이야기, 무지 많이 나오고 실제로 이스라엘이 멸망당했습니다. 그것을 좀 느긋하게 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걸 느긋하게.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떨어버리면 우리는 아무 것도 우리 내부에 매끈한 것 전혀 없어요. 이미 안정된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가지고는 교회 안 나와도 불안, 나와도 불안해요. “아이구, 이게 신의 저주인가!” 이런 식으로.

그러면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하나님의 매끈한, 완결된 신의 축복을 얻어 챙깁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그건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을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수사관, 형사라고 생각합시다. 그러한 영화나 드라마가 있은 적이 있었는데요. 형사에게 어떤 신고가 들어오고 접수한 신고대로 수사에 나섰는데, 그걸 수사하다가 보니까 마지막에 범인을 잡았어요. 그 범인이 누구냐 하면, 수사하는 본인이 범인이에요. 그동안은 왜 몰랐는가? 형사가 잠시 교통사고가 나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거예요. 기억상실증에 걸린 후에 시험 쳐서 형사가 되고 난 뒤에, 과거 십여 년 전에 사건을 수사하는 가운데서 마지막에 정황이나 증거를 다 해보니까 잃어버린 기억 전에 본인이 그 사건의 범인이었어요.

그럴 때, 그 심정이 어떻습니까? 황당하지요. 왜, 신약 성경에 예수님께서 그냥 거룩한 분으로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신 분이 아니고 왜, 죄인의 모습으로 왔을까요? 사람들이 본인이 범인이란 사실을 그 누구도 동의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우리는 불교처럼 생각합니다. “오, 신이시여! 부처여! 내가 힘듭니다.” 내가 힘듭니다. 근데 힘든 이유가, 본인이 저질러놓은 그 일이 자기한테 작용과 반작용이, 자꾸 되물림으로, 되새김으로 자기가 해놓은 짓거리 때문에 점점 더 늪에 쪼아지는 거예요. 쪼아지는 것 때문에 점점 더 몸부림치다보니까 점점 더 자기가 힘들어지는 겁니다.

저는 세상을 볼 때 타짜, 화투판으로 봅니다. 화투를 여러분들은 거룩한 성도님들이라서 추석 명절에도 만져 본적도 없겠지만. 저는 교회 나오기 전에 옛날에 추석 때는 우리 집안이 화투 치는 게 뭐 정규코스에요. 어떤 집처럼 싸우지는 않았습니다만. 화투를 쳤어요. 민화투를 쳤는데. 화투판이 뭐냐 하면, 이래 생각해요. “내가 열 판만 하고 그만둘게.” 라는 것. 그거 확인하려면 할머니들 화투치는 경로당에 가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 지묘동 할머니들도 화투치는 것 봤어요. 보니까 돈 놓고는 하지 않아서 신고는 안 했습니다만. 오지랖 넓은 제가 돈 놓고 하면 또 신고합니다. “요 판만 딱 하고 안 할게.” 그게 안 된다니까요. 세상은 사업을 해도 “여보, 이 사업만 성공하고 내가 발 뺄게.” 발 안 뺍니다.

화투판의 특징은 뭐냐 하면, 갈수록 자기만 집착해서 늪에 빠진 거예요. 화투판을 몰랐으면 그거 바깥에서 볼 수 있거든요. 근데 바깥에서 화투판을 보는 것보다도 안에 들어온다고요. 일본의 빠징코 같은 거. 저는 그런데 가보지는 않았습니다만, 강원랜드 같은 데 뭐 카지노 같은 것이 있는 가 봅니다. 겉에서 보면 참 재미있죠. 누구 망했다 하면 더 재밌고. 근데 막상 본인이, 본인이 만약 거기서 한다면 본인은 심각한 거예요. 미처 내가 나를 안 놓아줄 줄 몰랐다는 거예요. 아, 라스베가스 언제 한 번 가야 되는데. 언제 미국 안 가노? 이건 복음을 위해서 한 번 가야 되긴 가야 될 긴데. 날짜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 라스베가스 도박장에 가면 뭘 느끼느냐면 왜 나는 내 결심이, 내 결심마저 나는 뿌리치는 존재냐. 내 맹세와 결심마저 아무짝도 나한테는 보탬이 안 돼요.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치료할 능력이 상실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치료는 안 되지요. 본인은 빠져나오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이거는 외부에서 치료하지 아니하면 도저히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치료방법이 뭐냐, 니 그 범죄에 대해서 니가 수사하란 말야. 니가. 니가 니 자신을 수사해보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왜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내 정신을, 나에 대한 집착을, 왜 내가 못 놓고 있는가. 수사를 해보니까 누구를 경유하지 않아서 그래요. 요걸로 설교 마치겠습니다.

누구를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기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 문제를 해결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괴로움 심적으로 우울증 같은 것을 보게 되면 그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려고 달려들기 때문에 점점 더 정도가 심해져요. 그때 누군가 “에이, 이 바보야.” 한마디만 해줘도 병 나아요. 자꾸 바보 안 되려고 하니까. “니는 니가 죽든 말든. 병 낫든 말든.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니는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거야.” 좀 그 소리만 해줘도 병 낫는데. 자기가 “내가 병 낫든 안 낫든 아무 의미 없어. 내가 쓸데없는 일에 정신 쓰고 있는 거야.” 이러면 낫는데.

꼭 자기가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보고자 그렇게 애쓰니까 누구를 경유하지를 않는 거예요. 수사하면서 결국 범인이, 괴롭게 하는 것이 남이 아니고 결국 내가 나를 괴롭게 한 거예요. 참아야 하느니라. 만날 은장도 가지고 허벅지 찌르고. 지 멍만 들고 파스만 붙이고. 그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참는다고 누가 상주는 것도 아니고. 옛날에는 열녀문 세웠지만. 아무 의미 없어요. 그래서 지난 광주에서 했던 강의 중에 하나를 설명 드리면, 제가 대중가요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 제가 좀 좋아하는 노래가 노사연의 <님 그림자>를 좋아해요. 그 가사를 보게 되면 너무 가사가 맘에 드는 거예요.

어떤 여자 분인데, 달빛에 같이 가는데, 남자가 저 만치 앞서 가요. 근데 님의 그림자가 온다 이 말이죠. 그 순간 그 여자는 달빛에 비친 님의 그림자만 따라가지 자기를 안 본다니까요. 자기 포커판에서 벗어났어요. 자기한테 승부 보는, 자기한테 가치를 결정짓는 거기서 벗어나서 마치 새끼줄 따라가듯이 그냥 달만 뜨면 님 그림자가 보고 싶은 거예요. 저 만치 앞서가는 님. 저 만치 앞서가는 님이, 분이 없기 때문에, 그리워할 님도 없기 때문에 혼자서 해결하려니까 이건 참, 그 자체가 늪에 빠진 거예요. 늪에 빠진 겁니다.

그리고 진정 그 님을 사랑한다면 그 님이 “니 같은 것 나 따라 올 필요 없어. 저리가.” 해도 우리는 거기서 “감사합니다.” 해야 돼요. “내는 이만큼 사랑하는데 니는 내한테 뭐 줬나?” 이래 해버리면 그건 사랑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밧줄로 묶어놓은 거예요. 이제 그 밧줄을 풀어서 님한테 던져버려야 해요. 님의 그림자를 보면서 가야 되는데, 그런 님 그림자가 없으니. 달이 안 떠서. 달이 구름에 가렸는 모양이죠. 세상 신이 주님의 복음을 가려버리니까. 이젠 님 그림자가 안 보이니까. 지만 달랑 남았으니까. 살든 죽든 지가 알아서 해결해야 하니까. 이게 힘든 겁니다.

치료하는 광선, 님 그림자입니다. 한 번만 치료해줘요? 아니요. 늘 치료해줘요. 우리의 모든 요란한 것, 분주한 것,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주께서는 그걸 다 밀어냅니다. 등허리 두둘겨 치면서 “이게 술을 어디서 이렇게 많이 마셨나? 빨리 토해라.” 우리는 매일같이 나의 도박판. 나를 위한 사업. 그걸 전부 다 토사물처럼 다 토해내면서 님 그림자처럼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서목사님 님 그림자 가사 올릴 겁니다. 녹취하면서. 가서 보시고 저 만치 앞서가는 분을 늘 바라보는 그것이 이미 치료받은 상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혼자 살려고 하는 자체가 창조의 원리가 아닌데, 그래 놓고도 우리는 내가 왜 병들었느냐 내가 왜 죄인이냐 우기고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 주님 심판주로 오실 때에 그 심판하심을 감사히 여기고 그 심판에서 면제된 자로서 넉넉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8강-말라기 4장 1절-3절 (치료하는 광선) 140921-이 근호 목사.hwp (32.0K), Down: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