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탐꾼 제안(신명기 1: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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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탐꾼 제안
2014년 11월 2일 본문 말씀: 신명기 1:21-24
(1:21)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1:22)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
(1:23) 내가 그 말을 선히 여겨 너희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
(1:24) 그들이 앞으로 가서 산지에 올라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그곳을 정탐하고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떠오르는 생각은 ‘살고 보자’입니다.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평신도든 관계없이 모든 인간들은 이 생각의 떠오름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이점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목표로 세우신 그 세계로의 진입에 하나님 자신이 동행자로 나서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약속의 땅을 접수하기 이전부터 동행하시는 분과의 사이조차 원활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저 같은 인간의 형태를 지닌 같은 과에 같은 종에 속한 인간 존재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과 동행한다고는 하지만 그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세라는 같은 인간 뿐입니다.
따라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는 평소에 자신이 자기에게나 타인에게 대했던 그 관계를 그대로 적용시키기 마련입니다. 즉 타인이 자신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해서 타인에게도 같은 성향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동지와 우정을 쌓아나가고 거기서 결집력을 구축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은 완전히 소외되기 마련입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봐서, 하나님이 생각해놓으신 창조의 완성은 ‘죽음 속에서’만 성사됩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 자체도 하나님의 창조의 일환이었던 겁니다. 한 알의 밀이 썩어 죽어야 비로소 그 씨앗에서 생명이 나오듯이 말입니다.(요한복음 12:24)
그러나 사람들은 이 죽음에 선뜻 나설 의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이 구상해놓으신 생명은 관심이 없고 오로지 눈 앞에 펼치지는 자신의 생존의 보장책만 관심 있습니다. 즉 자기 생존의 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본인이고 싶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단지 나 스스로 벌려나가는 이 생존작전에 후원자로서 도와주시시만 하면 훌륭한 신이시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 인간의 생존은 관심 밖입니다. 처음부터 죽은 채로 이 세상에서 등장한 존재들이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거부한 채 죽음을 통하지 않고서도 생명을 취득할 수 있는 방안은 강구합니다. 이단이란 바로 여기서 출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외에는 다 퇴짜 놓습니다.
따라서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6:14에 의할 것 같으면 ‘예수 안’은 곧 ‘;십자가 안’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 자체를 기피하기에 자연스럽게 십자가도 기피하게 마련입니다. 내가 안 죽고 내가 영생 얻는 방식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단만 만나야 합니다. 이단은 말합니다. “십자가만 믿으신다면 그것이 곧 십자가 앞에 들어 있는 바가 됩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닙니다. 자신의 생존 문제 자체가 생명문제를 고려하는 하나님 앞에서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곧 십자가를 믿는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내가 사는 식으로 내가 영생 얻는 수단은 애초에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안 죽으려고 한다면 생명도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철저하게, ‘왜 내가 주의 원수인가?’ 를 아는 과정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야 합니다. 즉 내가 이것저것을 챙겨서 그 힘으로 구원받은 식은 인정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마태복음 17:8에 보면,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 제자들은 자체적으로 믿음을 형성시킬 요인들은 제대로 구비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해같이 빛났고, 죽었는줄 알았던 모세와 엘리야도 같이 영광 중에 나타났으니 제자들 자신의 미래상을 미리 당겨서 보는 즐거움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그 모든 현실은 사라지고 다른 현실장면이 다시 보입니다.
그것이 초라한 행색의 ‘예수님만 보이더라’입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는데 기세등등한 로마의 권세에 둘러싸인 보잘것 없는 행색을 대하면서 베드로는 주저없이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즉 믿음이 유발시킬 그 요인들은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와서,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정탐꾼 파견’을 제안합니다. 보고 믿겠다는 겁니다. 이는 곧 자신의 생존도 챙기고 아울러 생명도 챙기겠다는 의도에게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죽음 저편에서 우리를 기다립니다. 즉 생존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생존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반복적으로 들이닥치게 하십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어쩔 줄 모르면서 당황하게 됩니다. 마치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구경했던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체포되는 현장을 보고 당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요구사항을 거절하시는 걸가요? 그것은 마치 자신들에게 당연히 구원받은 자격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9:24-26에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롯의 아내는 분명 남편의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말과 현실 사이에 틈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정황으로 봐서 분명 남편의 말에 신빙성이 있다고는 믿어지지만 절대적인 믿음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서 확인하겠답니다. 즉 심판이 실제로 감행되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난 뒤에 “그래, 심판에서 면제되기 위해 부지런히 산으로 뛰어서 내가 나를 살려내야지”라고 행동을 결정하겠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롯의 처까지 하나님께서 심판 속으로 집어넣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심판여부를 스스로 결정지을 권한이 없이 모든 인간은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하셔야지만 온전히 모두 주님의 공로만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식으로 알던 것이 현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신 1장 21-24(정탐꾼 제안)1411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장 21-24절입니다. 구약성경 260페이지입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 내가 그 말을 선히 여겨 너희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 둘을 택하매 그들이 앞으로 가서 산지에 올라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그곳을 정탐하고”
오늘 읽었던 대목, 어렵지 않죠?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올라가라 했습니다 만은, 그전에 약속의 땅에 올라가란 말과 같은 말이,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두려워 말라, 올라가라. 이렇게 할 때, 그들이 하는 말이 그 땅을 일단 우리 눈으로 목격해서, 탐지해서 들어갈 만한 땅인지를,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역량이 되는지를 먼저 계산하겠다는 식으로 나왔습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뭐가 빠지느냐면, 이스라엘의 자체적인 활동이 되고 말죠. 누가 빠지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동행하시는 분, 보이지 않지만 함께 동행 하시는 분이 계셔요.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하신다는 것을 지금 그들은 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빼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겁니다. 그들이 근본적으로 모르는 것이 뭐냐 하면,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누구 아이디어냐 하면, 그들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한 약속의 땅에는, 거기는 생명과 관련되어 있어요. 근데 사람들은,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생명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생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여튼 일단 살고보자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고보자 하는 사람들은 못 들어가는 곳이 바로 생명이 있는 곳이죠. 생명은 살고보자가 아니라 이미 살았다는 자들만 모이게 되는 곳이고, 생존을 추구하는 사람은 일단 사는데 까지 살아보고 살면 살고 못 살면 죽는 거다. 이렇게 점검하고 간 보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마음가짐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과 생존 사이에서 우리가 성경 전체를 돌아 볼 때, 생명과 생존 사이에는 건너갈 수가 없죠. 생존을 포기하든지 해야 될 텐데. 그들은 생존을 포기할 마음은 없고, 영생은 또 얻고 싶고. 이 두 가지 마음이 다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시다시피 생명나무의 과실은 인간의 힘으로 그걸 따먹지를 못하게 되어 있어요. 매개자, 중보자가 있어야 됩니다. 중보자가 무슨 조치를 해줘야 생명나무 따먹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그 생명나무가 그렇게 많은데, 그렇게 많은 곳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자기 자력으로 들어갔던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피로 하얗게 옷을 씻은, 그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가미가 되어야 돼요. 개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가 개입되고 구원받으면 되잖아! 하는데 문제는 어린양의 피의 개입과 동행에 대해서 누가 싫어하느냐 하면은 생존하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계속 그걸 밀치는 거예요.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교회에서 뭐 재직회 뽑을 때 집사는 과반수로 하고 장로는 ⅓로 하라. 이렇게 해놨는데 그게 성경에 나옵니까? 그거 누구 아이디어죠? ⅓, 과반수 누가 정한 겁니까? 예수님께서 정하신 겁니까? 절대로 예수님이 정한 게 아니죠. 그러면 예수님이 정한 게 아니라고 하면 그 속에 뭐가 녹아져 있느냐 하면, 이런 식으로 한번 살아보자는 의도가 강렬하게 아직도 거기 녹아져 있다고 보면 돼요. 예수님은 우리를 생존보다 생명으로 이끄는 것이고. 우리는 생존도 챙기고 생명도 챙기겠다는, 둘 다 챙기겠다는 그런 의도가 강하기 때문에, 이 의도가 교회 내에서나 가정에서 결코 같이 나란히 갈 수가 없어요. 서로 티격태격 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성경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전체적으로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죽음 없는 창조는 없다.’ 이겁니다. 죽음이 없는 창조는 없어요. 죽음도 창조의 작업의 일환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생명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근데, 제가 오늘 아침에 이야기 한 것처럼 사람은 죽고자 하다가도 죽음 앞에서 되돌아오게 되어 있죠. 왜, 자기가 죽으면 자기한테 투입한 모든 시도와 노력이 의미 없게 되는, 무의미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생존, 생존이라고 말은 하지만 생존이 주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곧 신이다. 나는 영원해야 돼!” 라는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 생존을 곁들여 운운한 거예요. 남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나는 영생하겠다는,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이 취지! 그거는 주님의 취지와는 다릅니다. 어린양이 죽어야 되는데, 그 어린양의 죽음이 있어야 되는데, 그 어린양의 죽음마저, 그게 죽음이라는 그 형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회도로를 생각합니다. 요새 대구 곳곳에 우회도로 만들잖아요? 요 블록에 가면 우회도로 반대합니다. 이렇게 쓰여 있는데. 사람들은 우회도로를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돌파하지 않고, 십자가를 겪지 않고, 어떻게 영생 따먹는 방법은 없겠는가? 없습니다. 에, 죄송하지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죽여 놓고 그 죽음에서, 죽은 자가 어떤 의견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그 다음에 그 위에 어떤 조치를 가함으로써 말미암아 깨어난 자들이 “나의 나 된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였습니다.” 라는 것을 토해놓으면서 영원히 천국에서 사는 그런 천국만을 하나님께서는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보면 돼요. 인간은 신과 협상에 나서지만 진짜 구원받은 성도가 만난 것은 신을 먼저 만난 것이 아니고 중보자를 먼저 만나죠. 그런데 그 중보자의 행색이, 그 모양새가 뭔가, 구원받고자 하는 우리 자신과의 어떤 교류가 되어 있어요. 우리 사전에 우리 허락 없이 교류가 되어 있는데 뭐냐 하면, 뿜어 나오는 죄를 그 분이 다 받아 내는 식으로, 그런 양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얼룩덜룩한 가슴팍이, 그 얼룩덜룩한 그 모습 속에서 사람은 누굴 발견하느냐 하면, 사실은 거기서 자기 죄를 발견해줘야 비로소 주님과 상호 교류가 가능한, 교류하고 있는 중이라고 그렇게 판정될 수가 있습니다.
신을 의미하면 안 돼요. 신을 제시해버리면 이는 너무 허황되고 추상적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좋은 건 다 집어넣는데 막상 유대인들이 그런 신을 원했지만 막상 그들에게 온 신은 중보자 되시는 분이 오셨죠.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 먼저 보기 전에 이거 하나 정립합시다. 진짜 복음을 안다는 것은, “목사님 복음을 아는 게 맞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저는 이렇게 대꾸하고 싶어요. “성도님 이단이 뭔지 아십니까?” 제가 먼저 묻고 싶어요. 이단이 뭔지를 알아야 비로소 복음을 안다는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두 개가 한꺼번에 같이 나란히 가지 않거든요. 이단이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 앞에 퇴짜 맞는 자들이 이단이잖아요. 하나님 앞에 퇴짜 받는데, 하나님은 누굴 퇴짜 놓느냐 하면, 예수님 외에는 다 퇴짜 놓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만 있지 아니한 자는 이단입니다. 근데 예수 안을 갈라디아서 보면 십자가 안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거기서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죠. 하여튼 논리를 쪼끔만 끌어가면 고만 고개 저어 싸서. 어렵다고. 하나님은 자기 아들만 받고 나머지는 퇴짜 놓습니다. 그러면 퇴짜가 예수님이거든요. 그럼 예수 안에 있는 자, 예수님만 받으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도 자동적으로 받게 되는데.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십자가 안에 있다고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더란 말이죠.
그러면 아무리 사람들이 십자가를 싫어해도, 싫어하든가 말든 간에 어쨌든 성도는 십자가 바깥에 있다가 십자가 안으로 들어와야 되는 겁니다. 좋든 싫든 상관없이. 열 두 제자 있지만 열 두 제장 중에 십자가 좋아하는 제자 한 명도 없었어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물론 싫어할 뿐만 아니고 다른 열 한 제자 다 도망갔습니다. 십자가 질 때, 예수님 홀로 졌지요. 홀로 지신 그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의 모습으로, 십자가 모습으로, 창 자국 못 자국 보여 주면서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기를, 제자들을 그렇게 땡겼습니다. 그러면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려면 어떻게 되느냐, 반복되어야 되겠죠. 그 때 십자가로 끝나면 안 되고 십자가가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 반복되는 방식이 뭐냐, 십자가의 영을 보내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에요. 성령을 보내서 십자가 밖에 있는 자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들어 왔느냐, 안 들어 왔느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마태복음 17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변화산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맨션 세 채 짓겠다고, 지어드리겠다고 제안한....., 주님, 참 좋아 하시겠습니다? 맨션, 초막 셋을 짓고 살겠다는 것을 좋아하시겠어요? 그게. 하여튼 그 대목에서 모세와 엘리야하고 주님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봤는데, 그때 하늘에서,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렸고, 그 정도만 해도 제자들은 믿음이 아마 꽉꽉 차 있다고 아마 착각할 만 하죠. 그런 모든 조건들이. 자, 이정도 계시와 이정도 실제 모습을 봤으면 이젠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배반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만큼 요소는, 그만한 재료는 다 들어왔다고 생각이 되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화려했던 것이 다 떠나 버리고 마지막에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다시 조금 전에 상태로 돌아와 버렸어요.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더라.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 할 때도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더라 이래 돼요. 예수님 십자가에 죽을 때 옆에 엘리야가 짠~ 모세가 짠~ 주님 얼굴이 해같이 빛났으면 어떻겠습니까? 베드로가 배반하지 않았을 거죠. 그러나 끝까지 주님께서는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더라. 지금은 예수 만난 소자 외에는, 예수 믿는 소자 외에는, 예수 외에는 없다고 여기는 그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더라 이런 식이에요.
아주 요란한 계시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너무 평범해요. 방금 이야기 한 것을 앞당겨 봅시다. 십자가에서 그렇게 부활하시고 요란하시지만 오늘 신명기에 와서 그들에게는 마찬가지로 모세 외에는 아무도 없더라. 모세 외에는 아무도 없더란 말은 어렵게 이야기해서 모세라는 것을 자기의 관찰의 대상으로 본다면 모세를 보기 전에 먼저 누굴 보느냐 하면 내가 나를 먼저 봐요. 내가 나를 보는 식으로 모세를 대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한테 없는 것을 모세가 뭔가 추가적으로 제공할 것인가를 생각하다보면 모세를 경유해서 도로 나에게 되돌아 와버려요. 이들이 바로 정탐꾼 보냅시다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 정탐꾼을 보내가지고 일을 그르치느냐, 아니면 잘 되느냐, 이거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정탐꾼 보내가지고 오히려 그들은 더 크게 낭패를 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처음부터 정탐꾼을 안 보냈으면 좋겠다 하는데, 이게 인간들이 안 보낼 위인들입니까? 에? 보고 믿지 안 보고 믿을 인간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중요시하면서 생명의 의미가 높아지는 쪽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는데, 쉽게 말해서 “니는 죽어도 살아.”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쪽으로 몰아가는데, 우리는 뭐냐 하면 “절대로 내가 죽는 일은 없어야 됩니다.” 이런 쪽으로 자꾸 기도를 하고 그런 쪽으로 내 인생 가도록 자꾸 하나님을 내 쪽으로 끌어 땡기는 거예요.
돈은 한 75억 정도 있어줘야 죽는 것은 좀 덜하고. 그래도 건강보험 한 세 개 정도 있어줘야 되고, 운전하다 죽을 것 같으면 운전자 보험 들어야 되고. 가만 따져보면 전부다 돈이잖아요? 돈이다 말이죠. 애들 키울 때 영어 가르치려면 조기유학 보낼 돈은 좀 있어야 되고. 그 비용 생각하다가 남편 쳐다보면 “아이고, 꼬라지하고는...” 희망이 안 보이고. 세상의 모든 것이 내게 필요한 것은 돈 밖에는 없으니. 그 돈만 채워주시면 아낌없이 하나님을 섬길 용의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내 앞길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주께서는 내 의견에 동조만 해주면 된다는 겁니다.
주님은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미생이라고 해요. 바둑에서 두 점 못 놓으면 미생이에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뭐, 또 드라마 이야기 나올까봐 겁나요? 항상 아슬아슬해요. 하나님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취지는 이렇습니다. 나와 함께 동행한 너희는 이미 심판을 경과했다. 심판을 경과해서 나와 함께 있음, 그 자체가 생명의 관계이기 때문에 죽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근데 죽어도 괜찮다는 말은 이론이거든요. 이걸 실제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정말 죽는 경우가 계속해서 눈앞에 닥쳐오게 하십니다. 닥쳐오게 하시면서 신명기 전체의 전쟁은 뭐냐, 붙여주시는 전쟁이에요. 붙여주시는 전쟁입니다.
그 붙여주시는 전쟁을 옛날에 제가 설명하면서 이런 식으로 설명한 적이 있어요. 자기는 뭐 작대기, 꼬챙이만 들고 있어가지고 “꼬챙이를 보니까 갑자기 오뎅이 땡기네” 이러는데 갑자기 좌판에 있던 오뎅이 꿈틀꿈틀, 벌떡벌떡 하더니만 꼬챙이는 내가 가만히 들고 있는데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데 오뎅이 와서 꼬챙이에 꽂힐 때 아! 하고 뜯어 먹잖아요. 이게 바로 붙여주시는 전쟁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한다는 의미는 뭐냐 하면은 나는 가만있는데 주님 말씀이 얼마나 실제상황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가만있는데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막 다가와서 지남철처럼, 내가 지남철 되어 가지고 그런 철붙이가 막 달라붙는 거예요.
달라붙을 때마다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죠. 수차례씩이나 놀라죠. 놀라면서 소급해서 뒤돌아서 차후에 그 사건을 생각해보니까 아하!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로마서 8장 그 말씀을, 말씀이 실제 일어나는 상황인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난처한 일들을 자꾸 우리에게 닥치게 하시는 겁니다. 뭔가 생존이라는 것은 내거가 있어야 돼요. 내 것이 있어 가지고 이건 내거다! 내거다! 하는데 갑자기 어떤 사건이 터져가지고 뭔가 뻥하고 박는다든지 뭐가 날라갔을 때, 오! 내꺼가 날라갔을 때 나 이제 뭐 하고 살지? 뭐 하고 살지? 이런 경우가 있는데 이거는 불과 몇 시간 되지요. 어떤 사람은 몇 개월 가는 사람도 있지만. 하여튼 몇 개월 간다치고, 불과 몇 개월, 또 불과 몇 년, 몇 년은 너무 심하지만 하여튼 초조하다가 가만히 뒤돌아서 보니까 그게 하나님의 의도였다는 거예요.
항상 세상을 미리 정탐해서 내 길을 내가 앞가림하겠다는 그 생존의 길을, 비켜나가서 그게 아니야! 이쪽이야! 생명 쪽으로 몰아넣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런 사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항상 그 마지막 사태를 눈으로 보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정신 차리겠습니다. 했는데 그건 제가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백날 이야기해봐도 실패로 끝났죠. 보이면 뭐합니까? 결국 남는 것은 예수님만 보이더라 했는데. 그 예수님만 보이더라 했는데 결국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세 번이나 부인했잖아요. 닭은 울고. 인간이 주제가 그거밖에 안 돼요.
창세기 19장에 25절에 보면, 참 재미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거기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일어났을 때에 하나님께서 롯의 가정을, 천사를 대접해서 롯의 가정을 따로 빼돌렸습니다. 제가 아침에 이야기한 이게 배제에요. 저쪽은 배제시키고 따로 빼돌려서 구원을 하는데, 문제는 롯의 아내문젭니다. 롯의 아내가 그 남편이 이야기한대로 분명히 산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쳤는데 25절에 보니까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절에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왜? 롯의 아내가 뒤돌아보게 되죠? 롯의 아내는 남편이 이야기 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듣고 남편 따라 도망쳤습니다. 그때까지 롯의 아내는 남편의 말을 믿는 것처럼 보이죠. 믿는 것처럼 보이는데 남편 말과 자기 기존의 생각과 틈이 벌어진 거죠.
그 틈이 벌어지니까 이걸 원상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틈을 메꿔야 될 필요가 있다고 본 거죠. 메꾸는 방법이 뭐냐 하면, 과연 남편 말이 진짜 그런지 보고 싶은 거예요. 보고 싶어서 그 보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소금 기둥이 되었어요. 눈도 코도 모든 시각, 청각, 후각도...소금 기둥이 되었어요. 이거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에는 어떤 참관인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보고 심판에서 면제되겠다는 그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일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 인간 자체가 심판받아야 될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심판받아야 될 자에게 기회를 두 번 다시 주지를 않아요. 심판을 보고 “아, 겁나는구나! 피해야지!” 이렇게 심판을 면제할 기회를 줘버리면 그 사람은 온전히 심판받을 사람이 아니고 그냥 심판받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되고 말아요.
그러면 그 인간은 죄인이 아니고 죄질 가능성이 있는 인간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이게 좀 어려운 논리죠. 비슷한 어려운 논리가 뭐냐 하면, 지금 웃는 사람은 안다는 뜻이거든요. 만약에 에덴동산에 마귀가 없었다면 살기 좋은 곳입니까? 위험한 곳입니까? 위험한 곳입니다. 마귀가 없더라도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 중앙에 있는 이상은 아담은 장래를, 미래를 보장 못 할 환경에 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죄를 지어서 따먹고 죄를 짓는 상태가 배짱 편합니다. 그게 차라리. 차라리 일말의 선한 것이 없어줘야 우리가 이제는 내가 알아서 내가 선해야지 하는 가능성 자체를 짓밟혀야 해요. 그래야 모든 것이 100% 하나님의 은혜죠. 그래야 우리가 정탐을 안 해요. 정탐을 안 합니다.
그런데 제가 분명히 이런 이야기 했습니다 만은, 우리는 아직도 그런 것이 우리 밑둥치에 있지만 우리가 육이 되놓아서 평생 동안 촐랑대기 쉽거든요. 그럴 것 같으면 이제부터 이렇게 바꿉시다. 매일같이 정탐하세요. 매일같이 정탐해서 그 정탐의 결과로 인하여 우리가 힘들게 된다는 것을 매일같이 경험하시면 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상 새로운 입장에서 새로운 이해를 가지고 세상을 대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새 날을 우리에게 늘 허락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매일같이 살아가는, 똑같은 인간이 살아가는 매일이, 그 매일이 어제의 날과 오늘의 날이 달라요.
새로운 이해가 계속해서 주어집니다. 새로운 요소가 자꾸, 계속 변수가 생겨요. 변수가. 애가 안 아프다가 갑자기 아프다든지. 어떤 오랜만에 만난 친척이 와서 손 내밀고 돈 좀 달라고 한다든지. 이거는 내가 예상 못한, 정탐해도 바꾸어지지 않는, 그러한 일들이 자꾸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뭐냐, 우리의 정탐 능력이 무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성질대로 살게 만들고, 또 주님께서는 그걸 사정없이 꺾어버려서, 니는 정탐 안 해도 돼! 걱정하지마! 정탐, 니가 하나 안 하나, 니가 심판을 구경하나 안 하나, 니가 이미 죄인인 것을 내가 말씀을 통해서 아니까 니는 말씀을 통해서 어린양의 피로 씻어졌음을 니가 그걸 동의하고 수긍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제는 수긍한 상태에서 우리의 본성을 못 이기고 늘 이렇게 신명기처럼 조금씩 고개 내밀면서 한 번 봅시다 하고 정탐하다가 뭐 코 깨지고 하더라도, 간 보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 우리 입장이에요. 제가 아무리 성경에서 그렇게 동행 하시는 분이 이미 십자가 안에서 여러분의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생존에 대해서 염려 붙잡아 매놓고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돌아서면 우리는 다시 생명은 언제 적 들은 이야기가 돼버리고 우리는 생존에 급급하면서, 또 가게부 들여다보면서, 또 잔소리 해가면서, 또 그렇게 아등바등 애쓰면서, 또 정탐의 더듬이를 세우면서, 우리 아는 삼촌 없나? 검찰청에 누구 아는 사람 없나? 더듬으면서 또 세상을 정탐해갑니다.
하지만 그렇게 정탐한 결과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뭔가 죄 지었다는 의식을 또 다시 주죠. 하지만 그 죄는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서, 은혜를 더욱 보여주기 위한 죄기 때문에 오히려 그 죄를 드러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동행, 주와 동행하는 방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날 사람 정탐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운운 하지만 그들 눈에 보이는 모세밖에 없고 더 이상 모세는 믿을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외에는 믿을 자가 없다는 거, 자기 눈으로 목격해야 된다는 것, 그 생존방식이 오늘날 우리의 생존방식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주께서 십자가 영을 보내셔서 그런 철딱서니 없음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