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책
2014년 9월 14일 본문 말씀: 말라기 3:16-18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16. Then they that feared the LORD spake often one to another: and the LORD hearkened, and heard it, and a book of remembrance was written before him for them that feared the LORD, and that thought upon his name.(KJV)
(3: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3: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책이 있다고 해서 자기 이름이 영원히 기록되어 있다고 자부하는 것은 사람들의 타고난 심성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과 같이 책에 기록된 명단에 준해서 의인과 악인을 구분 짓고 더나아가서 천국과 심판에서 제2의 확정된 삶을 살게 된다면 어서 그 명단 내역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끓일 것입니다.
마치 입학시험치고 합격자 명단이 어서 공개되기를 기다리는 수험생의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책에 적혀 있는 명단은 마음에 불순종하는 경우에는 지워질 수도 있는 명단이라는 겁니다. 시편 69:28에 보면,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지움이 가능한 책’이다 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책과 이름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살펴봐야만 합니다. 책이 우선이냐 아니면 거기에 담겨있는 이름이 우선이냐는 겁니다. 물론 생명책, 혹은 기념에 적혀 있는 이름은 사람의 명단입니다. 그 명단이 끝까지 지워지지 않고 버텨낸다는 말은 곧 그 이름에 합당한 사람이 이 지상에서 온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수행했을 경우에 국한합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임하게 되면 그 약속의 받은 자의 이름이 바뀌어지는 것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약속이 임한 자는 본인을 위한 인생이나 일생이 되지 못하고 그 찾아든 약속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과 기능을 알려주는 식으로 이름이 바뀌어집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러합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이 바뀜을 통해서 바뀜에 개입하게 된 그 분을 따로 기념하게 됩니다. 즉 기념책은 명단에 적혀 있는 이름에 합당한 사람들을 기념하는 책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름까지 바뀌어가면서 영생 얻을 자로 삼아주신 바로 그 분을 기념하기 위한 책입니다.
이 말은 곧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줍니다. 첫째는, 책에 의해서 심판이 감행된다는 사실이요, 둘째는 책에 명단이 기록될 자는 누군가를 기념하기 위해 용도로 쓰임받았기에 기록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위하여 일단 이 기념책이 사람 자체를 자랑하지 않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내용이 성경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0:17-20에 보면,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번 귀신 떨어짐의 사건에서 자기 자신을 일의 출발점을 지정합니다. 즉 자신과 귀신의 싸움에서 귀신이 패배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보시기에 그런 주장은 인간들의 자리를 시발점으로 삼아서는 생겨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 출발점을 인간에서 벗어나 인간과 하나님과 접합되는 그 지점으로 옮겨야 하신다는 겁니다.
그 자리가 바로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그 자리입니다. 그냥 이름이 아니라 ‘기록된 이름’이 드러나는 취지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귀신 쫓아내는 권능을 행사토록 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기록된 이름‘의 자리는 어디에 있으면 어떤 자리입니까? 출애굽기 32:30-33에 보면,
“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의 기록하신 책’은 주님의 주님되심을 기념치 못하는 자들은 용납 못해주는 책입니다. 이런 책의 존재성이란 곧 이 세상의 진정 존재 이유로서 기념되어야 될 분이 따로 계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즉 책은 결코 인간들 편에서 기능하지 않습니다. 인간들 좋아라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기념책의 기념성이 최종적으로 확정이 되게 되면 그제야 비로소 그 명단에 있는 자들은 전원 구원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생명책을 이해하는 이해의 자리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항상 자기 옹호하는 성향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법에 저촉되는 사람을 보고 제각 신고하는 사람도 막상 본인이 위반하게 되면 뺑소니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자기를 기념하는 책이 아니라 자기 말고 다른 이를 기념하는 책에서 버틸 수 있으려면 그 책에 기록된 자들은 자기 기념에 실패한 자로서 참여되어야 합니다. 신약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기를,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다 구원됩니다. 빌립보서 4:3에 보면,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처럼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책임지는 그 이름만이 실패한 자들에게 유일하게 기념되는 이름일 것입니다. 사도행전 4:11-12에 보면,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버려진 돌’ 그 돌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되지 않는 이름이라는 겁니다. 이름 중의 이름을 제대로 알아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존 여타의 이름과 버려진 이 분의 이름이 어떤 식으로 차이나는 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들의 자신의 이름과 주의 이름이 어떤 차이를 나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지닌 기능이 성도에게 퍼지면 성도는 그 버림받음을 재생하는 식으로 인생을 가게 됩니다. 비록 마귀는 굴복하겠지만 그 효과와 능력은 결코 자신의 이름에서 나온게 아닙니다. 자신의 이름이 늘 실패하는 그 현장에서 비로소 밝혀지는 것은 ‘주의 이름’의 기능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우리 운명을 결정짓는 출발점으로 삼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강-말라기 3장 16절-18절 (기념책) 1409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3장 16절에서 18절입니다. 구약성경 1330페이지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대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맞는 말이면서도 위험한 말이죠. 하나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은, 그 말을 가지고 사람의 모습대로 하나님을 만들었다는 말로도 그것이 활용 가능한 말이 되고 말았어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왜?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안식일을 범한 자도 죽이고 부모를 저주한 자도 죽이고 그리고 간음한 자도 죽이고 심지어 사주팔자 보는 사람도 죽였어요. 점치는 사람도 죽였어요.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이 이게 철칙처럼,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여겼는데 실제로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에 보면 말씀에 위반되는 자는 가차없이 죽여라 하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은, 도리어 사람이 사람을 죽이기를 싫어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같은 동지니까. 같은 입장이니까. 니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 라고 우리에게 되묻는 거예요. “말씀에 위배했다면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담한 용기 있으면 나와 봐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지 사람은 우선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 없어요. 하나님이든 예수든 삼위일체가 되었든 다 우리 좋아라고 내 좋아라고 인간 좋아라고. 하나님은 인간 유지하라고 하나님께서 뭔가 베풀 것이다. 그런 생각이 철석같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은 날 죽인다는 생각은 우리는 감히 못합니다.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 말씀 가지고 우리가 분명히 정리정돈 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요. 뭐냐 하면, 사람이란 하나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참된 사람이란 하나님의 모습을 빼다 박아야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까 제가 비판했던 말하고 똑같은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다가 제가 고 한 부분을 수정하겠습니다. 참된 사람은 하나님을 닮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을 닮는 사람이다. 그렇게 바뀌어져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미 죄를 지은 인간이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야 돼!” 라고 말할 때 그 하나님은 죄악 된 인간이 조작해 낸 가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 모든 문제점은 참된 하나님은 숨으시고 인간들이 제조해 낸 가짜 하나님을 하나님 앞에 들이 댈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야. 그 의미가 아니야.” 라고 자꾸 제쳐버리는 그 역사적 과정이 구약입니다. “나는 그런 뜻으로 이야기 한 게 아니야.” 그런데 너희가 다른 뜻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봐서 이미 너희들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너희들 자체에 문제 있다는 거예요. 말씀에 문제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에 문제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키고자 할 때 그 순간부터 자기 속에 있는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자를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간음한 자를 죽이라고 되어 있을 때, 그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자를 가차없이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은 간음 안 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는 간음 안 했기 때문에 이 여자를 죽이는 행위 자체가 “나는 간음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라는 것을 아주 돋보이게 만드는 그러한 계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 같은 사람이 해당되는데요. 다른 사람이 법을 위반하면 굉장히 고소도 잘하고 고발도 잘하고 신고도 잘하고 지적질도 잘하고 그래요. 그 지적질을 하는 순간 나는 착하고 그런 짓을 안 하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티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본인이 사고 저지를 때는 절대로 본인이 신고 안 합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심지어 본인뿐만 아니고 본인 가족이라도 만약에 범죄 했으면 아주 관대한 처분을 기대하면서 몰래 감춥니다. 몰래 감춰요. 출생의 비밀이 거기서 발생됐고 거기서부터 드라마가 되는 겁니다. 장보리고 무슨 보리고 모든 사람이, 토스트 할매든 뭐든 전부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신고하지 않고 그저 남 신고해서 자기 범죄를 감추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은 껍데기만 구원해서는 구원이 안 되거든요. 바로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죄를 감추는 그 당사자를 찾아가서 그 당사자를 몽땅 건져야 이게 건짐 받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줘서, 율법을 주게 되면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율법에 의해서 남 지적질 하는 용도로 사용하지 자기 지적하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율법을 줘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라 하는 것은 다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시키기 위해서 구약의 율법을 먼저 준 겁니다. 율법을 먼저 줘 놓고 어떤 인간도 율법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인간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놓고 그 다음에 구원이라는 것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나님께서 그런 전략을 사용하신 거예요. 그 전략에 교인들이 말려들어 그 전략에 대해서 반대되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주님의 그 방법을 짓밟으면 안 됩니다. 그걸 또 오해한 해석을 내놓으면 안 되고. 그냥 성경 그대로에요. 율법 줬다. 죄인 되었다.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 건지러 왔다. 죄인 건짐 받았으면 지 자랑 안 한다.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얼마나 간편합니까? 간단해요. 얼마나 간단해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 간단한 것을 거부합니다. 왜? 자기 자신의 잘난 맛으로 살아왔던 것이 그 동안의 자기 행세기 때문에.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잘난 맛으로 평생 살아가거든요. “아이고, 목사님은 누가 자기 자신들의 잘난 맛으로 살아갑니까? 그거는 목사님이 너무 오바하신 겁니다.” 그렇게 막 이야기 하고 싶지요. 저는 절대로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형과 동생, 자식 둘이 있더라도 서로는 각자 지 자랑하지 않아요. 하지만 한쪽을 사랑하고 추켜세우고 칭찬하게 되면 가만히 있는 상대방 형이 갑자기 화가 나요. 명절날 시어머니가 동서 중에 한 사람 칭찬 못합니다. 다른 동서가 삐져서 그냥 일찍 친정에 가는 수가 있어요. 시어머니가 뭐라 했는데. 그냥 무심코 한 거에 삐져 가지고. 그만큼 사람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기에 고요하지 않아요. 툭 치면 터지게 되어 있어요. 완전히 봉숭아연정이에요. 치면 터지게 되어 있어요. 뭔가 폭발하게 되어 있어요. 그걸 율법 가지고 터트리는 겁니다. 터트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기념책에 적힌대로 나중에 심판받고 분류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아, 이거 굉장히 난해한 말씀이에요. 우리는 말합니다. “하나님 그 책이 어딨습니까?”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에요. “그 책이 어딨습니까?” 한다고 해서 “아나 책이 여깄다.” 라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에요. 책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이름을 알려주죠. 그래서 책이 있음은 책이 있음보다 우선돼서 지상에 등장할 때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그 한 가지 예가 누가복음 10장 20절에 나오는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70명의 전도자들이 전도하고 난 뒤에 아주 기뻐하면서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일했더니만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이 말은 니가 한 것이 아니고 내가 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너희들 가운데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그 다음에 그 다음 내용을 우리가 모른다고 괄호를 치자 이 말이죠. 괄호를 치고 그 비어있는 괄호에다가 당신들이 쓰고 싶은 대로 한번 써보세요. 하면 뭘 쓰겠습니까? 귀신이 우리한테 항복하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다른 걸 좋아할 때, 그 다른 것 속에 우리가 뭐를 더 쓸 수가 있습니까? 아, 쓰기기 곤란해요. 내가 이겼으니까. 내가 귀신을 이기고 마귀를 이겼으니까. 그런 권세를 부여받았으니까. 소유하고 있으니까. 얻을 것 다 얻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는 말이, 예수님께서 공개한 정답은 뭐냐 하면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출발점은 뭐냐 하면, 내가 했다는 거예요. 출발점은 나고 결과는 내가 한 귀신 쫓아낸 그것이 종점이고. 출발점은 나라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출발점을 연장을 시켜버려요. 출발점이 아니고 그거는 중간지점이라는 겁니다. 내가 뭘 했다는 것은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중간 과정에 삽입된 것이지 거기서부터 출발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 자랑이 돼버려요. 내가 귀신 몇 마리 쫓아냈다. 나는 능력 있는 자다. 이것이 중간 지점부터 시작되어 버리면 이거는 누굴 믿으란 말이에요. 새로운 교주가 등장해요. “옛날에 나는 실제로 나는 병고치고 귀신을 쫓아냈다. 실제로. 나를 믿으라. 나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고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문제 삼는 것은 니가 니를 출발점으로 해버리면 결국은 마지막 구원할 때, 너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식이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했다고 쳐도 출발점을 자기로 잡아 버리면 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자기 이름이 주의 이름 앞에 부정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보쌈 하듯이 긍정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한테 가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 경우가 돼버려요. 벌써 예배 마친지 두 시간 반 되어 가는데, 두 시간 좀 넘었는데 요즘 늘 듣는 이야기가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돌아서 다 잊어버렸는지 제가 한번 시험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미 구원된 어떤 자를 발견하는데, 발견해보니까 그게 나더라 이래 되어야 해요. 그러면 출발점이 뭐냐 하면, 출발점이 나부터 출발해야 할 건덕지가 아예 삭제가 되어야 하죠. 나는 이렇게 해서 내가 이렇게 했더니만 나에게 이런 행동을 한 그것이 주입되어서 날 구원했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것은 발견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만들어 낸 거죠. 자기 그럴싸한 구원 용도를 만들어 낸 겁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 받으라고 했잖아요. 예수를 본 받으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결과를 본 받은 사람이 있어요. 모양새를. 겸손하다, 나도 겸손하다. 자기를 비웠다, 나도 비웠다. 이걸 본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출발된 것을 믿었어요. 다시 쉽게 말해서 예수를 본 받으라는 말은 아버지께로부터 출발한 그 사태와 업무에 의해서 본인이 저주받는 경우를 당했어요. 그 경우를 본 받자 이 말입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주의 일만 원활하게 된다면 나를 어떤 것에도 제공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이래 나와요. 그래서 제가 아침에 했잖아요. 내 구원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이라고. 이제 다시 기억나지요? 우리는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주님이 시작하신 일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의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에 불과하거든요. 그 무슨 공장에 보통 보면, 작은 중소기업에 가도 나오는데 처음 방문한 사람은 신기해요. 마지막 공정에 보면 제품이 1초에 두 개씩, 세 개씩 쏟아져요. 현대 공장에도 45초 만에 나온다는데. 4분인가 5분인가 만에 차가 나온다는데. 처음 간 사람 참 신기하죠. 하는 그 과정을 보면 그 과정은 아주 치밀하게 엮어져 있습니다. 그 프로세스가. 그 과정이. 결과만 보면 좋지요. 우리는 주님을 본 받는다는 말은 아버지께 죄인의 모습으로 저주받은 그것까지 우리가 본 받을 용의가 돼있습니까? 용의돼 있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떠한 어려움과 수모를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조차도 하나의 절차인 냥 여기고 수용해야 돼요. 받아들여야 돼요. 누구 탓하지 말고 절차를 받아들여야 돼요. 이게 본 받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러면 나라는 것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에, 나라는 것이 없어지는 것을 가지고 나의 이름이 없어진다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성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 이름이 없어지는 거예요. 사도행전 4장 11, 12절에 보게 되면,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부정으로 이야기 할 때는, 없다하는 것은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주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되는 것이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에, 천하 뭐 어떻고 저떻고 해도 예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구원되는 일이 없는 겁니다. 이 말을 할 때 여러분! 번쩍하고 번개가 쳐야 돼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되지를 않다는 사실을 번개처럼 여러분 속에 침투되어야 해요. 유대인들이 여호와라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알라신을 믿습니다. 힌두교는 신이 한 두 가지고 아니고, 일본가도 신이 15만 가지의 신이 있다는 거예요. 중국가도 신들이 그렇게 많아요. 하지만 그렇게 많으라고 하세요. 또 많이 만들어 내도 내는 것에 대해서 우리 즐거워합시다. 왜냐하면 그 많은 신들 가운데 예수 외에는 어떤 이름도 우리에게 구원할 이름이 없어요. 이걸 종합 정리하게 되면 신의 이름으로 구원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신은 자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한 적 없어요. 신이 보여준 유일한 이름은 신의 자신의 이름이 아니고 오직 예수의 이름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에서 예수로 바꿔야 됩니다. 하나님에서 예수로 바꿔야 돼요. 하나님을 쥐고 있으면요, 하나님을 쥐고 있으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본 받으려고 애쓰지 예수를 본 받으려고 안 하는 셈이 됩니다. 예수님을 본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시련과 고난과 역경과 오해와 모독과 그리고 밉상당함과 그러한 얕잡아봄. 이런 것까지 전부다 우리 인생 속에 스며들어 오고 있음을 아울러 또 수용해야 되니까. 그게 왜 들어오느냐 하면은 내 이름 자리에 예수님의 이름이 들어오니까. 주의 이름은 우리한테는 기능으로 들어오는 거거든요. 기능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벌리는 그 기능이 이제는 우리를 덮침으로 말미암아 우리 입에서 늘 나오는 것이 나로 인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의 이름은 어떤 기능을 한다? 우리 몸을 가지고, 우리 몸을 사용해서 자꾸 주님 자신의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식으로 우리 몸을 사용하는 겁니다.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할 때, “니는 그것 좋아하지 말고 내 이름으로 떨어진 것을 좋아하라.” 그럴 경우에만 너는 내 책에 네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쯤 이야기해서 이해될 것 같으면 제가 나쁜 사람이죠. 이해 안 되죠? 그래서 시간을 짧게 가져가는 의미에서 짧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게 되면, 모세가 하나님을 단독으로 만나게 됩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 하느냐 하면, 책이 있었다는 그 이야기 합니다. 근데 그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대해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은 그 당시 모세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책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생명책에 관해서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책이 있는데 그 책의 내용이 뭐냐 하면 명단, 리스트가 있었습니다. 이름들이. 이름들이 있습니다. 근데 그 이름들이 있는데 그 이름들은 지워졌다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나타나는 그런 이름들이 있어요. 생명책에 명단이 있으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죠. 그거는 구약 때는 그게 해당이 안 됩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게 되면 그 이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름들이 관리가 되게 되면, 그 이름들이 인간이라는 중간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름의 출발점을 예수님과 하나님이 의논한 창조 전으로 이게 출발지가 되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책임자가 누구냐 하면, 책임자가 예수님이 책임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제가 모순된 이야기를 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여러분 당연한 거예요. 제가 모순되게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구약의 입장과 신약의 입장, 둘 다를 제시했기 때문에 모순되는 겁니다. 구약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숨어계셔 가지고 하나님이 숨어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치고 인간 세상에서 생각하는 하나님의 관계를 고 범위 안에서만 설명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내가 그렇게 설명한 것이 아니고 성경책 자체가 그렇게 설명해요. “너희들의 이름이 비록 생명책에 있다 할지라도 내가 말씀대로 안 살면 내가 지워버린다.” 라는 말을 직접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근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환경 자체가 인간들이 생각하는 범주 내에서는, 구약이라는 범주 내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은 법대로 지킨 사람 아무도 없기 때문에 전부다 지워져도 마땅하죠. 인간들이 생각했던, 내 이름은 한번 기록되면 지워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가, 그거 믿다가 범죄 하므로 말미암아 “어? 내 이름 지워졌네?” 라는 식으로 인간들을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기껏 생각하는 인간의 이성의 한계가 되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 쪽에서 충분히 이용을 하시는 겁니다. 이용하시는 거예요. 예를 들면 뻔하게 이번 생일에 시계를 사줄 것을 이야기 다 하면서 엄마가 일부러 이야기합니다. “너 이번 시험에 성적 10등 안에 들면 시계 사줄게.” 그런데 듣는 아이는 엄마 마음이 성적 들지 않더라도 시계 사주리라는 그걸 몰라요. 그건 엄마의 마음이니까 알 수가 없죠. 그러니까 걔는 엄마 말 듣고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시계 사달라고 저번부터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번 10등 안에 안 들면 시계를 안 사주기 때문에. 안 사주기 때문에 열심히 일 한 거예요. 시계 사주기 때문에 열심히 일 한다는 어린애의 마음을 엄마가 이용한 거예요. 엄마가 이용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용한 엄마가 나쁘잖아요?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면 안 돼요. 그건 엄마 마음이기 때문에. 그리고 난 뒤에 시계를 사주니까 애가 오해하기를 “엄마가 내가 10등 안에 안 들면 안 사 줄 뻔 했는데 들었으니까 시계 사줬잖아요?” 하니까 그때서야 이야기 합니다. “니 두 번 다시 그 이야기하면 시계 뺏어버린다.” 니는 시계 속에서 니 행함을 자랑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갈라디아서, 로마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나 그 이야기는 신약 때 사람들이 알 이야기지 구약 때 사람들은 모를 이야기예요. 그들은 “믿씁니다.” “미씁니다.” 하는 것이 믿음인 줄 알고 있어요. 근데 아브라함에게서 믿음이란 뭐냐 늘 실패하는 거예요. 우리들이 아브라함 보면서 위로받을 것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은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늘 실패하는 사람이에요. 늘 실패해요. 늘 실패하면서 기껏 한 것이 자꾸 하나님께 맡겼죠.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도 “하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 조카 있는데 하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기도하고. 이게 뭐냐 하면 그 다루는 방식이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도 자기 유리하는 쪽으로 기도하는 것밖에 몰라요. 그걸 하나님이 이용하신 거예요. 그걸 이용하시되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세전에 계획은 아무리 인간이 실패해도 하나님의 그 계획은 실패 때문에 요동치거나 변질되지 않습니다. 그걸 아브라함이 믿은 거예요. 아! 그걸 아브라함이 믿은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마지막 때,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나는 예수를 믿는다. 예수. 예수를 믿은 거예요. 나는 실패자이지만, 실패자이지만 상관없이 구원되는, 구원되도록 조치를 하실 자가 나 말고 따로 오시는 나는 그 분을 믿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실패해야 그 분이 느껴져요. 실패해야. 저는 반주하시는 집사님 보고 늘 실패를 느낍니다. 주일 오전, 오후예배 늘 실패를 느낍니다. 저도 늘 실패를 느끼거든요. 반주해서 구원될 것 같으면 전부다 피아노에 달려들어요. 다 달려들어요. 근데 반주와 상관없이 구원받거든요. 또 이래 하면 삐지지 않을까. 안 삐지겠지요. 삐지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아무리 완벽해도 완벽한 반주는 없다는 이야기를 해드리는 겁니다. 우리에게서. 아무리 와서 띵똥띵똥 연습해도 소용없어요. 아무리해도. 완벽한 반주 없듯이 완벽한 설교 없듯이 우리 인생은 완벽한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실패하는 거예요. 왜, 내 이름이기 때문에 실패할 이름이에요. 우리는 나한테 관리될 내 이름 필요 없습니다. 주님한테 관리되는 내 이름은 나에게서 끄집어 나오고 나를 출발점으로 하지 말고. 생명책을 출발점으로 해서 나오는 그 이름은 홀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관리하에, 책임하에 우리에게 적용되는데 그게 기능으로 나옵니다. 기능으로 나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우리는 그걸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죠. 그 기록된 생명책에 의해서 세상에 마지막에 둘로 분가할 그 때가 반드시 온다고 이 말라기는 신약에게 그 책임을 미뤄버려요. “너희들은 안 돼! 내가 아무리 생명책 이야기해도 너희들은 안 돼! 하지만 장차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에 의해서 오실이가 올 텐데. 그 이름, 생명책의 기록을 책임질 그 이름에 의해서 너희들은 완전히 창세전부터 예정된 자만 구원될 거야” 라는 내용이 말라기 3장에서 하고 곧장 마태복음으로 그 책임을, 그 완성도를 뒤에다가 미뤄버리죠. 말라기는 그래서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는 책이 되는 겁니다. 진짜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 누굽니까? 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그 사람이에요. 주의 이름을. “아이, 뭐 예수 이름, 예수 부르지 뭐.” 그게 아니고. 예수님의 기능을 통해서 부르는 이름이죠. “그러면 기능을 통해서 부르죠.” 그런 뜻이 아니고 그 기능이 무슨 기능이냐 하면 이 땅에서 수난 받고 십자가라는 그 기능. 내가 실패자임을 털어놓는 그 기능 속에서 “나는 이래도 주의 이름으로 구원됩니다.” 라고 고백하는 희한한 사람, 믿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사가 성공한 줄 알았는데 뒤돌아보니까 미흡하고. 완벽하다고 자부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어설프고. 우리 자랑할 것이 없고 그 가운데서도 실패와 관계없이 이미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주의 피로 인하여 구원받게 됨을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쓰여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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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17강-말라기 3장 16절-18절 (기념책) 140914-이 근호 목사.hwp (32.0K), Down: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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